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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화와 석의 해석-간하베

호리홀리 2015. 4. 1. 13:08

상황화와 석의 해석-간하베

 

혼합주의의 위험에 대한 염려로 인해 복음주의자들의 논의는 지난 여러 해 동안에 걸쳐 성경해석 과정에 관한 것으로 그 방향을 전환했다. 예전의 견해는 “선교가 복음과 함께 너무도 빨리 낯선 문화를 상대국에 수출하며, 교회들은 때때로 성경보다는 문화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같은 허용은 타문화권의 상황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전달하는 과정으로서의 해석학에 대한 복잡한 이해에 복음주의자들이 통찰력을 갖게 됨으로 보다 정제되었다.

 

석의

 

해석 과정 속에 혼합주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침투할 수 있다. 성경 자체의 문화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에는 독창력없는 문자적 순종이나 무책임한 무시를 낳는다. 성경의 의미를 밝힘에 있어,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본문 석의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 방법인 문법적―역사적 접근이 우리의 객관적인 기준”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조차도 “아직 완전한 이해는 아니다. 보다 완전한 이해는 우리가 성육신하신 그 말씀에 직면할 때, 즉 본문의 의미가 우리 자신의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질 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인정되고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성경해석 방법의 실패는 적용없이 분문을 분석하는 경향인 것같다. 그럴 경우 말씀에 대한 순종은 없이 학적인 지식의 습득만을 낳기 때문이다.

 

복음주의자들은 문법적―역사적 해석방법을 통해 궁극적으로 “객관적 해석”을 얻어내는 것에 대한 이러한 논의에서의 문제점에 덜 민감하다. 석의는 아직도 신학적 상대주의에 대한 최후의 피난처로서의 신화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객관적인 석의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요란한 선전에서 흔히 결여되어 있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설정되고 강화되어온, 감추어진 어떤 전제에 대한 인식이다. 석의는 근본적으로 서구인들에 의해 행해지는 하나의 기술로 남아 있고, 근본적으로 서구 중심적으로 단일문화적인 정신구조 속에서 행해지고 있다. “콘스탄티누스적 문화 포로”상태에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석의에 있어 본문은 보통 본문의 언어라는 관점에 한정되어 있다. 9세기 튀빙겐학파가 던진 도전과 삶의 정황에 대한 관심의 결과 전통적인 정의는 그 의미가 넓어졌다. 그렇지만 라이트푸트(J. B. Lightfoot)와 웨스트코트(B. F. Westcott)같은 사람들이 제시한 고전적 복음주의적 모델들은 사전학과 어원학, 구문론에 편중된 채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에 있어서도 NIC신약주석같은 복음주의적인 주석들도 본문에 대한 의문들이 충분히 다루어질 수 있는 서론 부분이 비교적 생략되어 있다. 대체로, 복음주의 주석가나 자유주의 주석가나 똑같이 역사 비평적 방법론에 의해 좌우되는 일종의 본문에 대한 비평적 해석의 형태에 머물러 있다.

 

존 칼빈에 의해 제공된 석의 방법에 대한 독특한 통찰력을 잃어버린 복음주의적인 전통은 진리와 그 실행, 추상적인 이론적 인식과 구체적인 적용을 나누는 서구 데카르트학파적 구분 위에 세워가기 시작했다. 따라서 석의와 석의 결과의 전달에 있어 성경해석에 대한 편협한 관점은 신학을 관념적인 것으로, 적용을 실제적인 것으로 축소시켰다. 신학교의 각 부문에도 이러한 관점이 반영되었다. 석의는 신약과 구약 부문에서 본문에 대해 비교적 공정한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 여겨졌다. 한편 본문 연구에 따른 적용은 실천신학 부문에 맡겨졌다.

 

그러한 석의 모델이 낳은 최종적인 결과는 석의와 전달 방법론의 수립이었다. 그렇게 함으로 복음주의자들은 현재의 논의에 있어 몇가지 수준에서 약하고 견고하지 못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종교개혁 양식이 태어난 단문화주의는 민족문화주의적 무지를 배경으로 하여 굳어져왔다. 그런데 그 민족문화주의적 무지는 서구인 해석자들이 석의와 교회 생활, 의사전달의 노력들을 행함에 있어 흔히 실제적인 문화적 요소들에 둔감하게끔 만들었다. 이와 똑같은 무지함이 선교사와 서구에서 훈련받은 교회 일꾼들 속에 교회적인 편협함을 심었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들 고유의 문화와 싸우는 제3세계 교회들로부터 어떤 선한 것이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17세기 혹은 18세기에 교리 발전의 화석화를 낳는 데 기여했다. 따라서 혼합주의는 객관성의 날개를 타고 날아 들어온다.

 

이해

 

복음주의자들은 해석학의 그 수준에서 훌륭한 진전을 보았다. 그래서 주석가 혹은 전달자가 의미화 과정에서 그 자신의 환경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 수준에서는 공공연한 혼합주의가 보다 쉽게 인지되며 그에 대한 인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종종 더 깊숙이 숨어 있는 혼합주의의 깊은 유혹을 알아차릴 만큼 민감하지 못하다. 더 깊이 숨겨진 혼합주의는 우리가 말씀에 의해 깨닫는 그것이 바로 그 메시지의 의미라고 우리가 생각할 때에 생겨난다. 우리가 그 말씀이 이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항상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아니다. 전달자가 말씀의 의미에 대해 이것이 맞을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갖는 가정이 크면 클수록 잘못 인식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위험은 말씀의 수납자가 자기가 들은 메시지를 해석할 때에 또다시 가중된다. 이 무의식적인 이해 과정을 좌우하는 많은 요인들이 있다. 예를들면, 독자가 “가난, 정의, 의,구속”과 같은 단어들을 접할 때에 그것을 그에게 구체화시켜주는 언어나 의미, 세계관, 가치관, 태도 등에 대한 전반적인 전제의 덩어리가 있다. 유교 문화에서 크리스챤이 중국적인 예절과 중용의 개념보다 의(義)에서 더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이슬람 배경에서 신자가 구속(救贖)과 같은 단어를 통해 은혜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게 될 것인가? 도회지에 사는 중류층의 북미인들이 가난한 에 대한 구약적 개념에 숨어 있는 압제의 특징을 발견할 것인가? 필라델피아의 빈민가에 살고 있는 흑인들에게 정의는 어떤 것을 의미할까?

 

그리고 우리가 우리 사회 속에서 담당하는 역할들이 있다. 그 역할들은 예상된 태도와 정해진 행동을 가져오는데, 그 태도와 행동은 메시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 가난한 자와 억압당하는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던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다른 쪽 뺨도 돌려 대라”(마 5:38-42)고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 시민이었던 바울은 빌립보에서의 부당한 투옥에 항의하여, “이제는 우리를 가만히 내어보내자고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행 16:37)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면 백인종주의자가 “다른 쪽 뺨도 돌려대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알라바마주 버밍햄에서 자기들의 시민 권리 보장을 요구하며 도시를 둘러싸고 시위를 벌이는 흑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줄 것인가? 개인이 맡은 역할들은 흔히 누구는 높고 누구는 낮으며 서로 친구 관계인가 아니면 적대 관계인가를 그 안에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요인들도 또한 메시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면 끝없이 계속되는 은밀한 혼합주의의 형태를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독자들은 개인적인 진공상태, 즉 일종의 정신적인 백지상태에서 본문을 대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의 문화적 배경, 개인적인 환경,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의무로부터 비롯된 관심사에 대한 자각을 지니게 된다. 이 관심사들은 성경에 대한 의문들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거기서 얻는 것은 그 의문에 대한 대답만이 아니고, 더 많은 의문이 따라오게 된다. 우리가 성경에게 말을 건네면 성경도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우리는 문화적 여건에서 비롯된 우리의 전제들이 도전을 받고 수정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실제로, 우리는 이전에 가졌던 의문들을 부득이 수정하여 새로운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상호작용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것은 끝없이 반복되는 해석학적 원(circle)이 아니라 나선(spiral)이다. 그 가운데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일치하여 자라가는 것이다.

 

제3의 지평

 

성경해석 과정에서 혼합주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제3의 영역이 여전히 있다. 그것은 메시지 수납자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데 의사전달에 있어 “제3의 지평”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신 해석학파”의 신학적 논의는 일반적으로 두 지평의 관점에서 틀이 잡혀왔다. 그 두 지평은 바로 1세기의 신약 본문과 현대의 독자이다. 그런데,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 두 지평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그러나 제3의 지평이 또 있다. 그 제3의 지평은 독자가 수납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때 나타난다. 그것은 수납자의 지평이며, 수납자가 다른 문화에 속해 있어서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 그리고 역할에 대한 이해를 지니고 있을 때에 구체화된다.

 

성경해석의 이 차원에서 독자(전달자)의 책임은 배가된다. 크래프트는 혼합주의에 빠질 수 있는 최소한의 두 길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기독교의 메시지를 토착적인 형태를 적응시킬 때에 발생되는 실수이다. 사람들은 흔히 기독교적인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말과 관습을 시험해본다. 그런데 잘 되지를 않는다. 때로는 그들이 행하는 상황화의 시도에 대해 무책임하기도 하다. 실수를 범할 위험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나 혼합주의를 낳는 또다른 길은 이것보다 훨씬 큰 위험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의미하시는 바를 새로운 문화적 형태에 적응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크리프트는 바리새인들과 유대주의자들의 실패를 예로 들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메시지의 표현들을 고수하려고 애썼는데, 그것을 듣는 청중들에게는 그 표현들이 낯선 것들이었다. 그러나 낯선 형태들은 의미의 변화에 적응할 수 없으며 때로는 그 과정에서 비기독교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혹 이 단계에서는 수납자가 혼합주의를 낳는 주요 원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수납자가 갖는 위험은 독자(전달자)가 갖는 위험과 병존할 수 있다. 수납자는 세계관, 가치관, 그리고 일반 지식에 있어 사회역사적으로 형성된 자기의 이해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 그 메시지를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리얀자야의 사위 부족은 예수를 복음의 핵심이자 신뢰할 만한 대상으로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가치체계로 볼 때 배반은 악이 아니라 미덕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관한 메시지를 처음 들었을 때, 이같은 문화적 가치체계는 예수가 아니라 가룟 유다를 영웅의 자리에 앉힌 것이다.

 

해석적인 과정에 있어 수납자 편에서 생길 수 있는 혼합주의의 위험을 가중시키는 또다른 요인들이 있다. 챨스 태버는 몇가지 가능한 예들을 들었는데 여기서는 간단히 살펴보기만 하기로 한다. 수납자는 메시지가 적절하지 못한 환경하에서 전해졌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메시지를 거부할 수도 있다. 혹은 수납자가 전달내용에서 얻고자 기대하는 것이 전달내용에 대한 해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옛날 별명인 쌀 크리스챤은 이러한 위험의 실례이다. 또한 본문의 형태(시나, 산문 서술체나 잠언)가 수납자에게 어떤 문화적인 기대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무슬림은 성경이 어떤 장소에서 일어난 역사이거나 편지이며 코란의 시적 구조처럼 일관된 시형으로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성경의 진정성과 권위를 일축한다. 또 서구에서 교육받는 과학자는 성경을 객관성과 정확성 그리고 추상성 편에서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이 기술용어로 쓰여지지 않았고 일상 언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그 메시지가 올바른 대답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과학적인 오류를 열거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다시 한번 성경적인 기반을 가진 신학연구에 있어서의 많은 함정을 물리치는 데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문화인류학과 언어학 및 의사전달의 부수적인 기술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혼합주의는 성경의 명령들이 수납자의 문화에 도전을 주고 변혁을 일으키지 못할 때에 나타난다. 인류학은 의사전달의 과정에 들어가는 그 문화적 세 지평을 개발함으로 혼합주의의 기능적인 특성에 역점을 둔다. 그것은 선교사와 수납자 모두의 이해 프로그램 속에 너무나 자주 미지의 것을 가져다주는 사회문화적 전제들을 제거함으로 선교사에게 도움을 준다. 그것은 전달자에게 의혹의 해석적 도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제공해준다. 그리고 그 도구를 사용함으로 본문은 덜 모호해지고 문화적으로 보다 명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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