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아모스

아모스서의 배경

호리홀리 2015. 2. 20. 10:02

3. 아모스(북왕국 선지자)


                                                                                                    박인대교수

배경


아모스는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787-747)때 활동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이집트가 자국의 문제로 힘을 쓰지 못할 때였고 유다와 이스라엘에게는 영토확장의 좋은 기회였다.

당시 이스라엘의 영토는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홍해)까지 이르렀는데 이는 솔로몬시대의 영토와 비슷하다. 다메섹을 속국으로 두었고 왕의 대로를 확보하였다.(통행세)

 이스라엘의 국제무역은 육로와 해상 모두 활발했으며 부자(상인)들이 생겨났고 사치스런 별장들이 생겨났으며 집과 가구들은 수입품인 상아와 고급제품으로 채워졌다. 따라서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었으며 사회적 약자들은 더욱 피패해졌다.


상업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도시화 현상이 생겨났고 범죄와 타락,부패한 사회가 되었다.

예후의 개혁이 잠시 있었으나 바알종교는 다시 급속히 퍼져나갔으며 여호와의 종교는 지극히 형식적인 것이 되었다. 여로보암2세가 죽은후 국력은 급격히 쇠약해졌고 25년동안 6명의 왕이 바뀌면서 수도 사마리아가 함락되고 722년 아모스가 예언한 대로 다메섹 밖으로 포로로 끌려갔다.


이스라엘의 멸망기사는 역대기에서는 관심이 없고 열왕기하에만 기록되어있다.

 여로보암2세-스가랴(그의 아들 ,사마리아에서 6개월 통치)-반역자 살룸(한달)-므나헴(딥사를 정복한 후 모든 사람들 학살, 임신부까지 죽임,10년 통치)-그의 아들 브가히야(2년 통치)-군대장관 베가가 길르앗 사람 50명의 도움으로 반역, 그의 통치기간 중 앗수르왕 빌레셀3세에 의해 갈릴리지역이 점령당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감.

베가는 아람왕 르신과 함께 반 앗수르 동맹에 섰다가 앗수르의 지원을 받은 호세아의 반역으로 살해당함- 호세아는 9년 통치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다 애굽과 동맹을 맺었고 이에 살만에셀 5세에 의해 사마리아 3년 포위후 멸망 (남북 모두 애굽을 의지하다 망함)한다.


신명기의 언약적저주가 성취된 것에 대해 열왕기에 왕들의 범죄와 언약파기,우상숭배가 계속 기록되고 있다. 아모스는 여기에다가 사회적인 죄와 정치적인 죄를 추가한다.

여로보암2세의 사회적 상황을 좀더 살펴보자.

어느때 보다도 정치적,경제적 안정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내부적 요인보다 외부적 요인이 크다 하겠다.

 아람은 극심한 쇠퇴기에 접어들어 이스라엘을 위협할 수 없었고 앗수르는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데 만족하였다. 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은 반세기동안 평화를 유지했고 상업과 무역에 힘쓴 결과 부강을 얻게된다. 그러나 문제는 빈부의 차이였다. 도시와 농촌의 차이, 대지주와 소작인의 차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상대적 빈곤을 가져다 주었다.


므나헴왕때는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칠 때 큰 부자에게 각각 50세겔씩, 합계 은1000달란트(은한달란트=3000세겔) 는 계산하면 최소 6만명 정도의 부자들이 북 왕국에 있었다는 셈이다.

언약법은 토지매매를 금지했지만 이제 토지는 중요한 재산증식이 되었고 부동산 투기현상도 일어난다. 소작인들은 급기야 벼랑 끝에 내 몰리게 된 것이다. 결국 채무로 인해 노예로 떨어진다.


토지를 잃은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나갔고 도시에는 극빈자들이 생겨났으며 가족의 연대는 약화되고 개인주의가 만연하게 된다. 따라서 ‘고엘‘제도는 유명무실하게 되고 안식년(노예해방)도 지키지 않게된다.


상법체계가 무너지고 뇌물이 성행했으며 일반백성들 까지 뇌물을 받고 거짓증인으로 나서는 일이 일반화되었다.(나봇사건) 여기에다가 정치적인 불안정, 구테타가 이어지자 국가는 응집력을 잃어버리고 분열되어 앗수르의 침략에 제대로 맞서보지도 못하고 무너진다.

결국 사마리아는 함락당하고 28,000명이 포로로 끌려간다.(왕하17:1-6)

이스라엘이 망한 후 북왕국은 앗수르의 ‘주’로 편성되어 ‘사마리아’로 불리게 된다.


앗수르는 정복한 지역 백성들을 혼합시키므로 저항세력을 사전에 차단하는 정책을 펼쳤다. 하여 사마리아도 혼혈민족이 되어버린다.

 많은 북 왕국의 백성들은 유다로 망명했고 이로인해 예루살렘의 인구는 급증하게 되었다.

아모스의 멸망예언은 사회지도층의 분노를 야기시켰고 아모스는 이스라엘에서 추방된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에 의해 사역이 지속되었고 아모스는 최초의 기록 선지자가 된다.

언약법

아모스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호칭은 86회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핵심은 ‘아도나이’이다.  또한 아도나이를 다른 호칭과 붙여서 사용하기도 한다. 아도나이는 ‘주’로 번역되어 언약의 하나님의 호칭이 되어왔다.

아모스가 언약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주'의 호칭 속에 이미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의 세부법을 인용하며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아모스는 아브라함언약의 골자인 ‘씨’와 ‘땅’을 강조한다.

 언약파기는 씨와 땅을 뺏아감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은자를 통해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특히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재건 할 것을 예언한다.(9:11) 이는 메시아예언이며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오시는 하나님나라,언약의 성취로 오시는 메시야를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모스는 처음부터(1:2) 다윗언약으로 시작한다.

 ‘시온과 예루살렘에 좌정하신 하나님’시온과 예루살렘은 병행법으로 동일한 장소이다.

 이사야서에 ‘너 야곱아 이스라엘아’ 하듯이 말이다.

하나님은 다윗언약을 세우신 다음 예루살렘을 신정국가의 중심으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시온,예루살렘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다윗언약의 시작인 것이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언약,시내산언약,모압언약과 그 세부법을 통해서 현재의 이스라엘을 진단하고 경고한다. 동시에 종말론적인 예언 즉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강조하며 메시야까지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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