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미가서

미가서의 배경

호리홀리 2015. 2. 19. 20:20

6. 미가서(유다의 선지자)

 

 

                                                                                                                          박인대교수

역사적배경


호세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사역했다면 이사야는 주로 예루살렘에서, 미가는 유다의 백성들을 위해 사역했다. 미가는 요담(742-735)때 시작해서 아하스,히스기야때까지 사역했다.(렘26:18-19)

 이사야서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미가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의 기록이 담겨있다.

 

주전 734년 앗수르는 영토확장을 위해 이스라엘의 해안평야를 침공했다.

 그래서 미가의 고향 모레셋 근처인 블레셋을 거쳐 시내광야인 와디-엘-아리시까지 도달했다.

그들은 다메섹을 정복하고(732)갈릴리와 트랜스요르단지역을 점령했다.

그리고 허수아비 호세아를 이스라엘 왕으로 세웠다.(왕하17)

 이어 사르곤 2세는 사마리아를 정복했다.(이스라엘 멸망)


사르곤 2세는 반란을 사전에 차단하기위해 상류층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갔고 이스라엘은 사마리아란 이름으로 앗수르의 한 도로 전락했다.

사르곤 2세이후 산헤립이 왕이 되었을 때 유다는 히스기야가 통치하고 있었다.

히스기야는 주위의 여러나라와 동맹을 맺어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이 포위될 것을 대비하여 지하수로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사야는 반 앗수르 동맹에서 탈퇴를 권고했고 히스기야는 순종한다.


미가는 이일로 말미암아 유다가 망하고 포로가 될 것을 예언한다. (미1:8-16,4:9-10)

 특히 701년 산헤립의 침공은 유다에 치명적이었다. 

 산헤립은 시리아를 거쳐 샤론평야 그리고 욥바를 정복했다.

그리고 미가서1:10절의 아홉 개의 도시를 포함해서 46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라기스를 함락시킨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예루살렘은 인근지역과 사마리아에서 몰려온 피난민으로 인구가 3-4배 급증하게된다.

이에 하나님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유다를 구원하신다.




사회적,종교적상황


앗수르의 침공,이스라엘의 멸망속에 유다도 휘청거렸다.

 백성들의 생활은 피패해졌으나 소위 지도층 인사들의 부패와 탐욕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미가의 예언이었다.

거기다가 거짓선지자들의 사욕을 채우는 모습,불의한 재판관, 심지어 가족까지도 신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히스기야는 이전의 왕들과 달리 여러 산당을 제하며,주상을 깨트리고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종교개혁을 단행했지만 유다의 죄악은 그치지 않았다.

 종교지도자들의 죄악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교만과 물질을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미가는 ‘미가야’의 줄인 말이다.

뜻은 ‘여호와 같은 이가 누구인가’이다.

그의 고향 모레셋은 예루살렘 서남쪽 40k에 위치해있다.

미가는 당대 최고의 인격과 영혼을 지닌 선지자였다.

이사야가 왕궁에서 왕의 고문 역할을 했다면 미가는 시골에서 약자들과 함께 사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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