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이사야서

이사야서의 역사적배경

호리홀리 2015. 1. 28. 11:58

역사적배경

 


 

다윗과 솔로몬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당시 세계에서 강국으로 부상하며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하나님나라의 전성기였고 세계의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했다.

 그러나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은 급속히 약해졌다. 

 앗수르가 등장한 것이다.

앗수르의 지상목표는 오직 정복이었다.

이웃 나라들을 하나씩 정복해 나갔고 순식간에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다.

 언약을 파기한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속국이 되어버렸다.

이사야가 부름받았던 시기는 바로 이때였다.

 

당시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은 기원전 744년부터 727년 까지 앗수르를 최강국으로 만들었다.

처음 그가 세계무대에 등장했을 때 당시 이스라엘과 유다는 여로보암2세와 웃시야 때였다. 

 여로보암2세는 이스라엘의 영토를 유프라데까지 넓혔고 웃시야는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이미 우상숭배의 극을 달리던 이스라엘,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은 빌레셀의 침공을 받고 하솔과 납달리에 이르는 영토 절반을 잃게 된다.

그리고 이때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다.(왕하15:29)

이사야9:1절이 그 당시의 참상을 보여준다.

 

앗수르는 남쪽으로 블레셋을 침공했고

 이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킨 호세아는 이스라엘 왕 베가를 죽이고 왕이 되었고

앗수르는 이것을 인정해 주었다.

 앗수르의 왕이 죽자 호세아는 반란을 시도했다.

이 일은 앗수르의 강력한 보복을 받게 되었고

 사마리아는 3년간 포위되었다가 722년 마침내 사르곤 2세에게 함락당한다. 

 이사야 28:1-4은 여기에 대한 역사적상황을 잘 보여준다.

당시 27.290명이 포로로 잡혀가 유프라데 강 상류지역으로 강제 이주하게 된다.

 

한편 유다에서는 히스기야(715-687)가 왕위에 올랐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멍에를 떨쳐버리려고 노력했으나 국내의 상황은 녹녹치 못했다.

 나라 밖으로는 블레셋,에돔,모압,아람이 국제정세를 불안하게 했다.

사실 애굽이 가장 문제였다.

 약소국들을 앗수르에게서 보호해 주겠다고 했지만 큰소리만 치고 있던 애굽은

 이러한 나라들을 동맹국으로 여겼으나 앗수르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715년 왕위에 오른 히스기야는 이사야의 요청인 블레셋동맹에 가담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는다.

 히스기야는 그 경고를 듣고 동맹에서 탈퇴한다.

갈그미스전투에서 승리한 살곤2세는 사마리아를 정복하여 포로로 끌고갔으나 다른 나라는 그대로 둔다.

 이집트에게 붙었던 블레셋도 멸망한다. (711)

 

사르곤2세가 죽은 후 산헤립이 왕이된다.

 이 때 히스기야는 산헤립에게 대항한다.

산헤립은 유다 46개 마을과 도시들을 정복했고 200.150을 포로로 잡아갔다.

히스기야는 전쟁배상금 금300달란트,은 800달란트를 바친다. (왕하18:14,300달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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