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히브리서

히브리서 강의

호리홀리 2019. 4. 30. 14:13

 

 

1장  히브리서 개요 

히브리서는 신약성경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을 많이 사용한다. 히브리서가 구약성경을 사용한 방식에는 직접인용과 간접인용이 있다. 

1) 직접인용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30여 개 이상 구약성경을 직접 인용한다. 

히 1:5상 = 시 2:7 
히 1:5하 = 삼하 7:14 (대상 17:13) 
히 1:6 = 신 32:43 LXX (또는 시 97:7) 
히 1:7 = 시 104:4 
히 1:8,9 = 시 45:7,8 
히 1:10-12 = 시 102,26-28 
히 1:13 = 시 110:1 
히 2:6-8 = 시 8:5-7 
히 2:12 = 시 22:23 
히 2:13상 = 사 8:17 
히 2:13하 = 사 8:18 
히 3:2,5 = 민 12:7 
히 3:7-4:13 = 시 95:7-11 
히 4:4 = 창 2:2하 
히 5:5 = 시 2:7 
히 5:6 = 시 110:4 
히 6:13,14 = 창 22:16,17 
히 7:1,2 = 창 14:17,18,20 
히 7:17 = 시 110:4 
히 7:21 = 시 110:4 
히 8:5 = 출 25:40 
히 8:8-12 = 렘 31:31-34 
히 9:20 = 출 24:8 
히 10:5-10 = 시 40:7-9 
히 10:16,17 = 렘 31:33,34 
히 10:30상 = 신 32:35 
히 10:30하 = 신 32:36 
히 10:37,38 = 사 26,20과 합 2:3,4 
히 11:18 = 창 21:12 
히 11:21 = 창 47:31 (LXX) 
히 12:5,6 = 잠 3:11,12 
히 12:20 = 출 19:13 
히 12:26 = 학 2:6 
히 13:15 = 신 31:6 
히 13:6 = 시 118:6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첫째로  히브리서는 매 장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성경 인용은 히브리서의 전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이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구약성경을 일관성 있게 빈번하게 사용하려는 의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를 기록할 때 얼마나 구약성경을 중요시하며 구약성경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둘째로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성경 전체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서의 기자의 도서관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의 도서관은 구약성경의 각 권으로 충실하게 잘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히브리서 기자의 도서관 규모의 충실성은 다음과 같이 입증된다. 히브리서에는 레위기를 제외하고 분명하게 모세오경이 인용된다. 레위기는 주로 간접적으로 사용된다


히브리서는 사무엘, 이사야, 예레미야, 하박국, 학개와 같은 선지서들을 인용한다. 히브리서는 전 선지서와 후 선지서를 고루 인용하고 있으며, 후선지서 가운데서도 대 선지서 뿐 아니라 소 선지서도 잘 알고 있었다. 히브리서에 사용된 성문서로는 잠언이 한 번 인용되며, 그 외에는 시편이 압도적으로 많이 인용된다. 시편인용의 수는 히브리서의 구약성경 인용가운데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다.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도서관에 구약성경 전체를 소지하고 있었으므로 히브리서를 기록할 때 폭넓게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다. 

2) 간접인용 

히브리서는 구약성경에 대한 직접인용과 함께 상당히 많은 간접인용을 가지고 있다. 시 110:1을 간접적으로 사용하는 히 1:3이나 사 41:8,9를 간접적으로 사용하는 히 2:16은 가장 좋은 예가 된다. 이 외에도 히브리서는 각 장마다 구약적인 모티브를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선지자들과 조상들 (히 1:1) 
아브라함의 자손 (히 2:16) 
출애굽 사건 (히 3:16-19) 
창조와 안식 (히 4:3) 
여호수아의 가나안 진입 (히 4:8) 
아론의 소명 (히 5:4) 
아브라함에의 약속 (히 6:13) 
아브라함의 승리 (히 7:1이하) 
모세의 장막건설 (히 8:5) 
장막구조와 제사제도 (히 9-10장) 
믿음의 열조 (히 11장) 
시내산 선포 (히 12:18-29) 
천사영접 (히 13:1) 

이러한 관찰을 통하여 얻게 되는 결론은 히브리서는 구약성경으로 뒤덮여 있는 듯한 인상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특히 구약의 인물, 사건, 사물에 대한 설명적인 진술이 돋보인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히브리서가 구약의 여러 가지 사항들을 사용할 때 상당한 자유를 행사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히브리서는 구약의 인물, 사건, 사물을 설명함에 있어서 풀어놓음과 압축시킴을 잘 활용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부언처럼 풀어놓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요약처럼 압축시킨다.

 

3). 히브리서의 구조와 구약성경의 인용 

히브리서에 사용된 구약성경의 핵심구절들은

 안식에 관해서 말하는 시 95:7-11(히 3:7-11),

멜기세덱에 대하여 말하는 시 110:4(히 5:6),

언약에 관하여 말하는 렘 31:31-34(히 8:8-12),

제물에 관해서 말하는 시 40:6-8(히 10:5-7)이다.


 이 구절들은 사실상 히브리서의 중요 인용으로서 대체적으로 히브리서의 네 단락을 구성하는 것이 된다. 히 1-2장에 나오는 연속인용이 하나님의 아들을 설명하는 것에 이어서 히 3-4장은 영원한 안식에 관한 해석이며, 히 5-7장은 영원한 대제사장에 대한 해석이며, 히 8-9장은 새 언약에 관한 해석이며, 히 10-13장은 새 제물(몸)에 관한 해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핵심적인 구약성구의 사용을 중심으로 히브리서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분해할 수 있다. 


히 1-2장: 하나님의 아들 
히 3-4장: 영원한 안식 
히 5-7장: 영원한 대제사장 
히 8-9장: 새 언약 
히 10-13장: 새 제물 (몸) 

이 단락들을 주의해서 살펴보면 핵심적인 구약성구들이 각 단락 내에서 상세하게 해석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단지 첫 단락인 히 1-2장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라는 종합적인 표현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11개의 구약성경 구절들을 연속적으로 인용하는 것이 특이하다. 


둘째 단락(히 3-4장)은 영원한 안식에 관해서 말한다. 핵심구절은 95:7-11(히 3:7-11)이다. 이 구절에서 중요한 단어들은 "오늘", "격노", "안식"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단어들을 하나씩 해설한다. "오늘"에 대한 해석은 히 3:12-14에 나오며, "격노"에 대한 해석은 히 3:15-17에 나오고(다시 한번 시 95:7-8 인용, 히 3:15),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에 대한 해석은 히 3:18-4:13에 나온다(다시 한번 시 95:11 인용, 히 4:3; 시 95:7-8 인용, 히 4:7).. 

히 3-4장 : 영원한 안식 
히 3:7-11 (시 95:7-11 인용) 
히 3:12-14 "오늘"에 대한 해석 
히 3:15-17 "격노"에 대한 해석(시 95:7-8 인용, 히 3:15) 
히 3:18-4:13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에 대한 해석(시 95:11 인용, 히 4:3; 시 95:7-8 인용, 히 4:7) 

셋째 단락(히 5-7장)은 영원한 대제사장에 대하여 말한다. 핵심구절은 멜기세덱에 대하여 말하는 시 110:4 (히 5:6)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서론적으로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신 것 (히 5:7-10)과 멜기세덱에 관한 내용이 매우 어려운 것임을 언급한다(히 5:11-6:12). 이어서 이 핵심구절은 맹세로 된 의미를 밝힌다(히 6:13-20). 그리고, 이 핵심구절에서 중요한 사항인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제사장"(6:20)을 자세히 해설한다. 이때 차례대로 멜기세덱의 신분(7:1-10, 다시 한번 시 110:4 인용, 히 7:17), 멜기세덱 반차의 의미(7:11-16),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의 절대성을 설명한다(히 7:17-28, 다시 한번 시 110:4 인용, 히 7:21). 이것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히 5-7장 : 영원한 대제사장 
히 5:6 (시 110:4 인용) 
히 5:7-10; 11-6:12 서론 
히 6:13-20 맹세 
히 7:1-25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제사장" 
히 7:1-10 "멜기세덱"에 대한 해석 
(시 110:4 인용, 히 7:17) 
히 7:11-16 "멜기세덱의 반차"에 대한 해석 
히 7:17-25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에 대한 해석(시 110:4 인용, 히 7:21) 

넷째 단락(히 8-9장)은 새 언약에 대하여 말한다. 핵심구절은 렘 31:31-34(히 8:8-12)이다. 이 단락에서는 "언약"이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이 단락은 먼저 첫 언약의 내용에 관해서 서술하고(히 8:13-9:10), 이어 새 언약의 의미에 관해서 설명한다(히 9:11-22). 

다섯째 단락(히 10-13장)은 새 제물(몸)에 대하여 말한다. 핵심구절은 제물에 관해서 말하는 시 40:6-8(히 10:5-7)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몸"이다. 이 단락은 먼저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신다"와 "기뻐하지 아니하신다"을 설명한다(히 10:8, 다시 한 번 시 40:6-7 인용). 그리고 나서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의 의미를 설명한다(히 10:9-18, 다시 한번 시 40:8 인용). 이에 더하여 "몸"에 관련하여 긴 설명이 부연된다(히 10:5,10,22; 13:3, 11 참조). 

이상에서 관찰한 바와 같이 구약인용과 관련하여 히브리서는 기둥과 같은 구약성경 핵심구절들을 먼저 진술하고 이어 해석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우선 서술할 내용을 정리해놓고 그 후에 구약인용으로 그것을 입증한 것이 아니라, 우선 구약성구를 인용하고 그 후에 내용을 서술해나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문작성 후에 성구인증이 아니라, 성구인용 후에 본문작성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히브리서에서 선 구약인용, 후 내용서술이라는 방식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히브리서에서 구약인용은 대단히 의도적인 성격을 지닌다. 추측하건대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를 기록하기 이전에 이미 해설하려는 구약성구를 수집해놓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속해있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하여 특정한 구약성경 핵심구절들을 수집해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히브리서는 초대교회의 구약본문 설교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예가 된다. 

그러면 히브리서가 이렇게 구약성경의 핵심구절을 해석할 때 사용한 해석방식은 무엇인가. 대표적인 것은 미드라쉬(Midrasch) 방식이다. 이것은 랍비의 해석방식으로 교훈적 해석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에 대한 좋은 예는 시 95:7-11에 대한 해석(히 3:7-4:11)과 시 110에 대한 해석(히 7:1-25)이다. 이 가운데서 시 95:7-11에 대한 해석(히 3:7-4:13)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히브리서는 시편인용에 이어(히 3:8-11),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하라는 하나의 주제를 제시한다(히 3:12). 


그리고는 시편인용에 나오는 중요한 단어들을 교훈적으로 해석한다. 먼저 "오늘"이라는 단어를 현재적인 "매일"로 해석하고(시 95:7; 히 3:13 -14), 이어서 "격노"라는 단어를 가지고 하나님을 격노시킨 자와 하나님이 격노하신 자는 순종하지 아니한 자들로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던 것처럼 안식약속이 남아있으므로 조심해야 할 것을 설명한다(시 95:7; 히 3:15-19). 그리고 나서 "안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한다(시 시 95:11; 히 4:1-11). 히브리서는 여호수아에 의하여 구약백성에게 주어졌던 일시안식(히 4:8)과 현재의 하나님백성에게 주어지는 진정안식(히 4:3,9)을 구별하면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 것을 권면한다(히 4:11). 

또한 히브리서에는 모형론적 해석방식(typology)이 자주 등장한다. 이것은 구약의 인물과 사건을 현재적이며 종말론적인 구속사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이다. 이때 원형과 모형이 기독론과 구속사의 기초를 이룬다. 예를 들면 예수의 제사장직은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의 원형을 따르는 것이며(시 110:4; 히 5:10), 지상적인 성전은 천상적인 성전의 원형을 따라 지어졌다는 것이다(출 25:40; 히 8:5). 


이와 더불어 히브리서에는 여러 가지 해석방식이 동반된다. 히브리서에는 언뜻 페세르(pescher) 해석방식이 엿보인다. 이것은 쿰란 공동체가 즐겨 사용하던 해석방식으로 의역적인 해석이다. 쿰란에서 발견되는 페샤림은 주로 선지서 주석과 시편 주석인데, 선지서와 시편의 말씀들을 마치 자기들의 세계에서 전개되는 상황을 묘사하는 것처럼 해석했다. 히브리서에서 페세르 해석방식을 위한 예를 들면 시 8:4에 대한 해석이다(히 2:6-9). 여기에서는 사람/인자가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된다(히 2:9). 


또한 히브리서는 어의학적인 (etymology) 해석방식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의 이름을 해석하면서 의의 왕/살렘 왕 - 평강의 왕으로 해석한다(히 7:1-2).


 더 나아가서 히브리서에는 랍비적 성경해석 방식가운데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a minore ad maius, 칼바호메르) 해석하는 방식이 자주 등장한다. 이때 "하물며"라는 문구를 이용한다. 예를 들면, 동물제사가 정결하게 한다면 "하물며" 예수의 피 제사가 정결하게 하지 않겠는가 라는 것이며(히 9:14). 땅에서 경고한 자를 피하지 못한다면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라는 것이다(히 12:25).


 마지막으로 히브리서는 짝귀절 해석방식(proof-text)을 사용한다. 이것은 한 구약성경구절을 유사한 다른 구약성경구절로 해석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시 95:11 (안식)을 해석하기 위하여 창 2:2을 인용하는 것이다 (히 4:4). 

히브리서는 구약성경에 대하여 아주 중요한 견해를 제시한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옛적에 선지자들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한 것은 모든 날 마지막에 하나님의 아들이 말하는 것과 동일한 선상에 놓인다(히 1:1-2). 이것은 구약계시와 신약계시의 통일성을 지시하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구약계시를 "천사들로 하신 말씀"(히 2:2)이라는 표현으로 다시 한번 설명하면서(참조. 행 7:53) 복음개념에 포함시킨다(히 4:2). 또한 히브리서는 신약계시를 주께서 하신 말씀과 들은 자들이 확증한 말씀으로 나누어 설명한다(히 2:3).

 
특히 히브리서에서 중요한 것은 구약성경을 여러 가지 표현으로 복합적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히브리서는 시 95:7-11을 미드라쉬 방식을 따라 해석하면서(히 3:7-4:13), 이 구절을 한 번은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히 3:7), 한 번은 "성경에 일렀으되"(히 3:15), 한 번은 "다윗의 글에...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히 4:7), 한 번은 "하나님의 말씀"(히 4:12)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성령의 말씀, 성경의 말씀, 다윗의 글,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동등한 선상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히브리서는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글로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는 성경은 다윗과 같은 사람의 시학적 기술로 기록되었지만 성령의 영감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는 인간의 문화적 요소와 하나님의 영적 요소가 아무런 마찰없이 결합되어 있다. 성경은 인간의 문학적인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있으며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히 4:12). 

그러면 히브리서가 이렇게 구약성경의 핵심구절들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구성된 것은 무엇을 설명하기 위한 것인가. 여기에는 하나의 신학이 흐르고 있다. 히브리서가 구약성경의 핵심구절들은 해석하는 것은 기독론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첫째 단락(히 1-2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본질을 소개하면서(히 1:1-4), 천사보다 뛰어난 분이심을 강조하는데(히 1:5-2:18), 신분에 있어서도(히 1:1-14), 말씀에 있어서도(히 2:1-4), 만물지배에 있어서도(히 2:5-10), 형제관계에 있어서(히 2:11-18) 그러하다는 것을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다. 

둘째 단락(히 3-4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세와 비교하여 뛰어나신 분임을 말하며(히 3:1-6), 다윗의 예언을 통하여 안식의 의미를 설명한 후에(히 3:7- 4:7), 여호수아의 일시적인 안식과 영원한 안식을 대조시킨다(히 4:8-11). 여기에서 흥미스러운 것은 여호수아를 등장시킨 것인데, 불완전한 여호수아는 완전하신 예수를 상징하고 있다(실제로 그리스어로는 "여호수아"가 "예수"로 표기된다, 히 4:8).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점이다(히 3:6). 

셋째 단락(히 5-7장)은 멜기세덱 대제사장론을 통하여 구약 대제사장과 예수 대제사장의 유사성과 차이성을 드러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성격을 강하게 증명한다(신약신학 열두 논문, 185-188 참조). 한 마디로 말해서 이 단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 묘사된다. 

넷째 단락(히 8-9장)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하는데, 옛 시대에 속한 것들(히 8:1-9:10), 즉 예물과 제물(히 8:1-6), 첫 언약(히 8:7-13), 지상의 성소(히 9:1-10)는 지나가고 새 시대에 속한 것들(히 9:11-28), 즉 더 나은 성소(히 9:11-14), 새 언약(히 9:15-22), 더 나은 제물(히 9:23-28)이 도래한 것을 말한다. 이때 더 나은 제물은 반복적으로 드려져야 하는 동물의 피가 아니라 단회적으로 드려지는 예수의 피라고 말한다(히 10:1-18).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로 소개된다(히 10:15). 

다섯째 단락(히 10-13장)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었다는 것을 말하면서(히 10:10), 몸을 제물로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시작자이며 완성자라고 정의한다(히 12:2). 

이렇게 히브리서의 구약인용에서 기독론이 중심을 이룬다. 히브리서는 초대교회 설교의 전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잘 표시되어 있다(히 3:1; 4:14; 10:23). 이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리켜 "더욱 아름다운 이름"(히 1:4)이라고 부른다. 히브리서는 구약성경 인용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앙고백의 사도이며 대제사장(히 3:1)이시고, 구원의 인도자이시며(히 2:10), 믿음의 시작자이며 완성자 이심을(히 12:2)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성도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려는 목적으로 이 서신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신 것은 그리스도께 속한 일들을 성도들로 밝히 깨닫게 하려 하심이다. 누가복음 24:45에서 우리는 제자들의 총명을 여시어 '성경을 풀어 이해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행사를 만난다. 주님께서 그렇게 은혜로우시니 당신의 말씀을 여시어 우둔한 자로 깨닫게 할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시119:130)



 제1강에서는 히브리서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서론적인 것들만 다루려 한다. 



1. 히브리서를 처음 받은 이들


 영어 성경에 보면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라고 되어 있어 수신자들을 히브리인들로 말하고 있다. 

 


 성경의 각 책들의 제목을 알아보려면 보편적으로 각 책의 첫 구절을 주목하는 것이 좋다. 신적 영감을 통하여 기록된 거의 모든 서신들마다 첫 구절에 수신자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각 서신의 내용들은 처음 그 서신을 받았던 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님도 지적되어야 한다. 이 점을 깊이 유념하지 못하면 미숙한 그리스도인들이 극단적인 세대주의의 가르침에 현혹될 수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로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모든 성경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울이 디도서 초두에서 디도 혼자에게만 그 편지를 보낸 것 같이 하였지만(딛1:4) 편지 마지막에는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딛3:15)라고 하였다.



​우리는 히브리서 앞에 사람이 붙여 놓은 제목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서신의 처음 몇 구절들에서 그 편지를 제일 먼저 받도록 지정하는 '수신자'가 밝혀지지 않았음을 보고 대번에 의아심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신의 첫 문장은 그것을 처음 받았던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익히 알게 한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1:1)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도 역시 그들이다. 히브리서 3:1에 보면, 이 서신을 처음 받은 이들이 적은 무리였음을 알리는 대목이 발견된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사랑하라."


 이 서신은 이스라엘 전체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 중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에게만" 보내졌던 것이다. 베드로 사도의 서신들도 이 점을 아주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베드로전서 1:1,2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편지하노니..."라 되어 있다. 베드로후서도 역시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과 동일하다. 베드로후서 3:15에서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라는 언급한다. 그리 생각하면 히브리서를 처음 받은 수신자들에 대한 모든 의문은 사라진 셈이다. 

 


 특히 히브리서는 믿음을 가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성도들에게 보내진 것이 아님을 5:12가 명백하게 드러낸니다.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을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자가 되었도다." 이 서신은 혹독한 핍박을 받았던 성도들에게 보내졌다.(행8:1참조) 그리고 13:24는 히브리서가 상당한 규모의 기독교 사회에 전해졌음을 분명하게 암시한다.


 이 서신이 처음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졌을 것이다(행11:22) 그렇지 않았으며 유대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전해졌을 것이다(행9:31) 그리고 이 서신의 여러 사본들이 다른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송달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던 아브라함 자손들에게 전해진 것이 분명하다.



2. 히브리서를 기록한 목적



 한 마디로 히브리서는 기독교로 말미암아 유대교가 폐하여졌음을 유대인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기록되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가졌던 첫 회심자들 중 상당수가 혈통적으로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유대교적인 선입관들 때문에 고통 받아 왔다. 사도는 그의 초기 서신들에서 이 점을 여러 번 언급했었다. 그리고 부당하고 때에 맞지 않게 모세의 율법이 말하는 의식에 집착하는 태도에서 그들을 건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온전하고 체계적으로 다룬 것은 히브리서 뿐이다.



 이 서신이 기록될 당시 주 예수를 믿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들은 과거 오랜 세기 동안 참되신 하나님을 아는 모든 지식을 갖지 못해 우상을 섬겨 왔던 이방인들과는 달랐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종교'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예배 처소를 두고 있었다. 그들에게 '천여 년 동안 너희 조상들이 숭배하던 것들을 버리라' 고 요구하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어릴 때부터 믿어 왔던 자들도 자기들은 견지하던 형식과 의식들을 그대로 고수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존 브라운(Jonn brown)은 이렇게 주석한다.


"그들은 일의 새로운 경륜 아래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차별이 없음을 것을 지적하지 못하였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모든 신자들은 외적인 차이들을 무시하고 이제 거룩한 공회 속에서 가장 긴밀한 영적 결속의 띠로 함께 매어 살아야 함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야를 통해서 이방인들이 유대교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꿈꾸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그 유대교라는 외적인 경륜이 세상 끝까지 바뀌지 않아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 유대인들은 그러한 혈통적인 선입관에다가 부가적으로 처한 환경이 갈수록 어렵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 어려운 환경은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한 신앙고백을 버리도록  시험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8:1에 언급한 핍박 다음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탁월한 유대교 학자였다가 기독교로 회심한 아돌프 사피어(Adolf saphir)의 말을 들어 보자.



​"스데반 다음에 다른 신자들에 대한 핍박이 일어났다. 특별히 바울을 대적하여 어려운 핍팍이 일어났다. 특별히 바울을 대적하여 어려운 핍박이 일어났다. 베드로는 63세쯤 죽었다. 사두개인들 편에 섰던 대제사장 아나니아 때에 그리스도를 믿는 히브리인들을 율법을 범하는 범법자로 몰아 핍박하였다.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돌에 맞아 죽었다. 산혜드린 공회가 이러한 극형을 자주 부과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동족들로 고통과 여러 힐책을 받게 할 수는 있었다. 


그들이 믿는 자들의 재산을 압수하는 것은 아주 작은 일이었다. 그들은 믿는 자들을 거룩한 곳에서 추방했다. 이제까지 그들은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특권을 누려왔다. 그들은 성소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부정하고 배도한 사람들로 취급받게 되었다. 그들이 예수를 믿는 믿음을 포기하여 함께 모이는 일을 하지 않는 한,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제단과 희생제사와 대제사장과 여호와의 집의 모든 특권으로부터 추방당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들의 처참한 아픔을 상상할 수 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메시야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한 자기 동족 백성들로부터 심한 학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일은 실로 크고 복잡 미묘한 시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영광된 소망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장소에서 추방당하였고,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곳, 성전에서 쫓겨났습니다. 그곳은 여러 상징들과 규례들로 자기 조상들의 기쁨과 힘을 주었던 곳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언약의 자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방 사람들보다 더 나쁘게 성전의 바깥뜰에도 서있지 못하고 이스라엘 나라 밖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실로 지독하고 신비로운 시험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상들에게 하나님이 맺으신 약속들을 고수하고, 자기 나라가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부단하게 기도하며 소망을 키우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들 믿음의 진정성을 가늠하는 가장 격렬한 시금석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충성하는 것이 예루살렘의 모든 권리와 특권들을 박탈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실로 기독교가 유대교에 대하여 어떤 관계를 가지로 있는지를 명료하고 조직적으로  밝혀내는 일이 당시 매우 '긴박한' 과제였습니다.


 사탄은 믿는 히브리 사람들을 설득하여 나사렛 예수를 믿는 것이 실수요 환각이요 죄라고 생각하게 만들 절호의 기회를 그냥 지나칠 리 없습니다. '생각해 보라. 육체를 따라 너희 동족 대다수를 다스리는 산혜드린 공회와 제사장직을 장악하고 이들을 보라. 너희가 옳다면 그들이 잘못된 것인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따르니 하나님께서  너희를 번성케 하더냐? 너희 외적인 환경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너희에 대하여 매우 불쾌하게 여기심을 분명하게 나타내지 않는가? 더구나 이스라엘 소수의 남은 자들이 그리스도가 금방 지상에 강림하실 것이라고 고대하였다. 그러나 30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그리스도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렀습니다.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은 정말 난처하였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킬 것이 긴박하게 필요했습니다. 실로 구약에 비추어 기독교를 더욱 철저하게 설명해 주어 그들의 이해와 총명을 열어 줄 필요가 매우 절실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긴박성에 부응하여 인애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감동하시어 이 편지를 그들에게 서 보내게 하신 것입니다.


3. 히브리서의 주제는 무엇인가?


 히브리서는 '유대교와 비교하여 기독교가 얼마나 지극하게 탁월한가'를 그 중심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요의와 본질과 중심과 구심점과 빛과 생명'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중심 주제를 풀어나가시는 성령님의 방식은 이전의 모든 이들보다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무한히 탁월하신지를 보여주시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유대인들이 자랑하던 여러 인물들을 한 사람씩 차례로 하나님의 아들의 초월적인 영광의 빛 앞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 인물들은 그 하나님이 아들의 영광 앞에서 무색하게 됩니다.


(1) 선지자들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의 영광(1:1-3)


(2) 천사들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1:4-2:18)


(3)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3:1-19)


(4) 여호수아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4:1-13)


(5) 아론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4:14-7:18)


(6) 유대교의 모든 의식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7:19-39) - 이 대목에서는 옛 언약에 대하여 새 언약이 지극히 우월함을 논리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7) 구약의 대표적인 성도들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11:1-12:3)


 이와 같이 유대교가 그림자와 모형으로만 갖고 있던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님 안에서 실체(substance) 를 갖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중심 주제를 규정해 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예증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더 낫다'는 비교급의 표현이 매우 자주 등장함을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그 방식을 통하여 구약의 성도들이 누렸던 것보다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것이 '우월함'을 드러납니다.​



​히브리서 1:4에서는 그리스도꼐서 '천사들보다 낫다'는 표현이 있고, 7:19에서는 '더 나은 소망'에 관해 언급합니다. 7:22에서 '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라는 표현이 있고, 8:6에서는 '더 좋은' 언약, 9:23에서는 '더 좋은 제물.' 10:34에서는 '더 나은 산업,' 11:16에서는 '더 나은 본향, 11:35에서는 '더 좋은 부활,' 그리고 11:40에서는 '더 좋은것'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에 언급된 일곱 가지 '큰' 것들을 주목할 것입니다. '큰 구원'(2:3), '큰 대제사장'(4:14), '큰 장막'(9:11), '큰 싸움'(10:32), '큰 상'(10:35), '큰(허다한) 증인들'(12:1), 양의 '큰 목자'(13:20)등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인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얻는지를 대조시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진 것'을 지시하는 표현이 매우 많이 나타납니다. 곧 '우리에겐 대제사장이 있다'(4:14; 8:1),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과 같다'(6:19), '우리에겐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다'(10:34),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13:10)는 식의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히브리 그리스도인들더러 '뒤의 것은 잊어버리고 앞의 것을 향하여 쫓아 나아가라.'는 권면이 얼마나 자주 발해졌는지요. 이 서신 전체에 '앞을 바라보라'는 말이 아주 돋보입니다. 1:6과 2:5에서 '장차 오는 세상(또는 '거처')등이 언급됩니다. 6:5에서는 '내세' 가, 8:8에서는 '새 언약'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새 언약이 이스라엘 집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9:11과 10:1에서 '장차 올 좋은 일'에 대하여 말합니다. 9:28에서는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0:37에서는 '잠깐 후면 오실 그리스도' 에 대하여, 11:14과 13:14에서는 '앞으로 나타날 도성(본향)'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서신 전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 이 크게 강조됩니다. 유대교의 중심은 그 성전과 제사제도였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히브리서를 통해 '지금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유대교의 성전과 제사제도가 그림자로 보여주는 것을 실체로 소유하고 있는 방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4. 히브리서의 개괄적인 내용 분석


 존 브라운(John Brown) 박사는 히브리서의 내용을 어찌나 간명하게 분해 해 놓았던지 그것을 인용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교리적인 부분과 실천적인 부분이다. 물론 그 구분이 그렇게 명확하지는 않다(본 강해자도 그 점에 대하여 같은 시각을 가지고 있다). 교리적인 부분에서 어떤 것을 명령하거나 어떤 의무를 행하라는 권면하기도 한다. 또 실천적인 부분에서 교리를 진술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교리적인 부분으로 지칭할 수 있는 1:1부터 10:18까지이다. 실천 부분은 10:9에서 시작되어 마지막 부분까지 계속된다. 기독교가 유대교보다 월등하다는 것이 사도의 위대한 교리다. 그러한 종교를 부단히 믿고 고백하는 것이야 말로 지당한 일이요 큰 의무이다."



5. 히브리서의 특징들


 히브리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신약의 다른 서신들과 차이가 납니다. 히브리서는 저자가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문안 인사도 없고 이 서신을 받을 대상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서신의 적극적인 측면에 눈을 돌리면, 구약의 모형적인 교훈들이 다른 서신들에 비하여 아주 상세히 강론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노골적으로 밝히는 것은 신약 중에서 히브리서뿐입니다. 그리고 배도에 대한 경고들이 신약의 다른 어떤 책에서보다 더 자주 나타나고, 또 그 표현이 더 숙연합니다. 그리고 신약의 다른 책들보다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고 믿음을 지키라."는 요청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서신을 받았던 사람들이 육신의 혈통 때문에 주어진 당시의 조건들을 염두에 두어야 이 서신의 특징적인 요점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특징들을 늘 유념하지 않으면 히브리서의 적지 않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남겨두게 되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사용된 여러 모형적 표현들과 인용된 말씀들은 유대교가 기초로 삼고 있는 구약성경의 빛으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서신을 항상 구약성경에 근거하여 생각하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표현들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죄를 정결케 한다.'(1:3)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4:9)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가라.'(6:1,2)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10:22) '우리에게 재단이 있다.'(13:10)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를 맨 처음 언급할 때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보좌에 앉으신"(1:3) 분으로 표현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적 관계의 중심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시기 때문입니다. 그 요점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는 곳도 주목하십시오. 1:13에서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분으로, 8:1에서는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으로, 10:12와 11:20에서도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서신에서 열쇠 역활을 하는 1:3의 표현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면서 언급되는 요점들이 있습니다. '하늘의 부르심'(3:1), '하늘의 은사'(6:4), '하늘에 있는 것(8:5), '하늘에 있는 본향'(11:16) '하늘의 예루살렘'(12:22),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12:23)등입니다. 자기들의 산업이나 종교적인 관계, 그리고 '지상적'인 차원의 소망에 연루되어 있는 이들에게 이 서신이 보내졌음을 유념하면 이런 강조점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13:22의 말씀은 이 서신의 '특징'을 뛰어나게 규정짓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이 구절에 대하여 사피어(A.Saphir)는 다음과 같이 잘 말했습니다.


"히브리서의 중심 사상은 옛 언약이 탁월하다느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개면을 조직적으로 체계화시켜 나가면서도 여전히 실천적인 것을 매우 탁월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서신 전체에 깔고 있다. 서신 어디를 보아도 기자가 목적하는 바는 '권면'이다. 그는 형제들의 위험과 부족이 무엇임을 늘 염두에 둔다. 그래서 양심과 삶에 자기의 교훈을 적용시키는 것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


 히브리서는 주해라기보다는 설교다. 이 서신의 모든 논증과 교훈과 예증에서 히브리서 기자의 목표가 아주 탁월하게 견지된다. 그 중심 목적은 '견고하라'는 권면이다. 이 점은 히브리서의 고유한 특징이다. 다른 서신들에서 사도는 논증을 해나가다 갑자기 중단하고 권면이나 충고를 하는 적이 드물다. 오히려 먼저 교리적인 강해를 한 다음에 그것을 기초로 하여 여러 가지 실제적인 권변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특수 상황과, 히브리서 기자가 그들을 향해 가진 특별한 사랑(롬9:3 참조)이 이런 예외를 설명한다."


 이상의 인용문은 히브리서 11장의 내용을 잘 이해시켜 줍니다. 성경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믿음의 삶' 에 대한 그처럼 상세하고 완벽한 묘사를 만나 보지 못합니다. 히브리서의 여러 대목들 중에서 가장 긴 대목인 11장이 온전히 그 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기자가 그리한 이유를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일차적으로 그들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외적 상징'과 의식이라는 정교한 예배 양식 속에서 자라왔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이들은 '보는 대로 행해야 한다.'는 식의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행한다'는 의미를 명백하고 상세하게 분석하고 묘사해줄 필요성이 아주 긴박하게 대두된 것입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성으로 더 쉽게 이해하게 하고, 마음에 더 강력한 호소력을 가지게 하면 할수록 더 좋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성도들의 삶의 노정에 호소하면 이 중요한 중심 주제를 발전시켜 나가는데 아주 좋다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실로 '믿음'이라는 용어의 충만한 의미를 인식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사피어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성경 전체가 규정하는 믿음은 개인의 안전을 위해서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개인의 안전이 믿음의 중심적인 요점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참되고 깊은 방식으로 이해함을 명심해야 한다. 사도가 고린도전서와 후서에서 설명하듯이, '믿음'이란 보이거나 현세적인 것이 아닌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시간 세계나 감각 세계나 죄에 속한 것들보다 영적이고 영원한 실체들을 더 크게 여기는 것이 믿음이다. 또한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실현해 나가는 것이다. '믿음은 바른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모든 교리와 예증은 마음과 양심을 타켓으로 삼고 있다. 삶을 향해 호소하고 있으며 믿음의 삶을 중심 목표로 한다.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을 붙잡으라는 줄기찬 호소가 히브리서 전체를 강력하게 관통하고 있다. 


그것이 히브리서의 제일의 요점이다. 그리고 실천적이고 참된 예배를 견지하라는 것도 계속 강조되고 있다. 히브리서는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의 면전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 안에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과 교제하면서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고 인해하며 소망을 가지라고."


 우리가 지금 상세하게 취급할 필요가 전혀 없느나, 일단은 지적해야 할 히브리서의 또 다른 '특징'은 '배도에 대한 반복적인 경고' 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발견되는 배도의 위험성에 대한 가장 엄숙한 권면들이 이 히브리서 가운데 나타납니다. 2:1-3, 3장과 4장 전체, 6:4-6, 10:26-29, 12:15-17 등은 이 서신과 친숙한 모든 사람들에게 얼른 떠오르는 부분들입니다. 어째서 그러한 경고들이 필요했는지는 이미 지적한 바 있습니다.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속에서 자라도록 방치해 두었던 세상적인 차원의 소망을 버리는 일로 겪어야 했던 낙심, 그들이 당시에 겪어야 햇던 핍박들, 예루살렘에 이제 곧 임할 하나님의 심판(AD 70년에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졌다) 등은 그런 경고들을 절실하게 만들었습니다.



6. 히브리서의 가치


 우리는 먼저 히브리서가 가진 '증거적' 가치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특별히 '성경의 축자영감'(Verbal Inspiration)에 대한 여러 증거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 점은 히브리서의 기자인 사도가 구약을 언급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증거를 위해서 구약을 인용합니다. 사도는 시편과 사무엘하와 신명기에서 인용하여 1:5-9을 썼는데, 그런 인용문들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 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6-8절에서 "그가 이르시되"라고 표현합니다. 3:7에서도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라고 합니다.


 사도가 구약을 인용할 때마다 '모든 말씀'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간단한 표현을 기초해서 근본적인 진리를 구축하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이 점을 증거해주는 많은 예증들 가운데서 몇 가지만 취해 보기로 합니다.


​사도는 2:8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권위'로부터 논증을 끌어냅니다. 2:11에서는 시편22편을 인용합니다.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인성을 취하셨다는 결론을 끌어냅니다. 3:7-19, 4:2-11에서는 시편 95편을 인용합니다. "오늘날," "내가 맹세하여," "그의 안식"이라는 말씀의 표현을 기초하여 논리를 구축합니다. 역시 3:2에서도 민수기 12:7에 있는 '종'(사환)과 '내 집'이라는 말에서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8장 전체의 논증은 예레미야 31:31에서 발견되는 '새 언약'이라는 말을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12:5-9에서는 잠언3:11을 인용하고 있는데 거기 있는 '내 아들'이라는 말을 얼마나 복되게 활용하고 있는지요. 12:26,27에서는 학개2:11의 '또 한번'이라는 말을 인용하여 얼마나 강력한 호소를 하고 있는지요. 사도 바울의 판단에 성경의 '가장 미세한 표현'도 하나님께 감동받은 것이 분명함이 드러나 있었음으 누가 부인할 것입니까?



 또 히브리서가 '복음적 가치'를 견지하고 있음을 모든 학파의 그리스도인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단번에 드려진 한 큰 제사'의 말로 할 수 없는 의도와 가치와 효과들이 히브리서 중에 햇빛처럼 밝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죄를 정결케 하셨습니다(1:3) 그는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7:25).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린 제사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셧습니다(10:19,20). 이와 같은 진술은 히브리서의 놀라운 선언들 가운데 몇몇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대업이 얼마나 말로 할 수 없이 가치 있는지를 줄기차게 강조하고 잇습니다. '영원한 구원'(5:9). '영원한 구속(속죄)'(9:12), '영원한 기업'(9:15) 등을 강조합니다.



 이 책을 갖는 '교리적인' 중요성도 로마서의 교리적인 특성에 견줄 만합니다. 히브리서의 교훈을 믿고 이해하고 삶 속에서 순종하고 실현시켜 나가면, 의식주의(ritualism)와 율법주의(legalism)(두 가지 모두 기독교의 대적임)는 전혀 기를 펴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의 어떤 책 속에서도 이 히브리서처럼 로마카톨릭교회의 아는 척하면서도 진실은 모르는 현학성과 기만성을 그렇게 명백하고 조직적으로 파헤쳐진 적이 없습니다. 교황주의의 오류들을 너무나 완벽하고 요점적으로 논박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 서신이 그 사탄적인 체계가 수립된 후에 기록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합니다. 어느 청교도가 이렇게 말한 것은 아주 잘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황주의라는 극악한 이단이 나타나 자리 잡을 것을 아시고 배수진을 미리쳐 놓으셨다."


 그리고 히브리서의 독특성은 구약시대의 여러 모형들을 해석하는 데서 잘 드러납니다. 성막과 그 여러 제사들과 제물들이 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Person)과 직무들(Offices)과 그 영광을 예표한다는 가르침을 이 히브리서를 통하여 얻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저희가 섬기는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8:5)고 말합니다. 첫째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라."고 가르칩니다.(9:9). 의식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라."(10:1)라고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모형'임을 말하기도 하고(7:15), 이삭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연상하게 하는 것임을 가르쳐줍니다(11:9

 

7. 히브리서를 기록한 사람


 우리는 히브리서의 기자가 사도 바울이라고 분명하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임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롬11:13) 그러나 사도행전이 분명히 보여주듯이 사도 바울의 사역이 반드시 이방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나니아가 바울(사울)에게 가라는 주님의 지시를 받고 근심하고 있을 때 주님께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이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이스라엘'이 언급된 일과, 히브리서가 거의 이방의 성도들에게 써 보낸 다른 서신들 뒤에 기록된 사실이 서로조화를 이루는 것도 의미심장해 보입니다. 이 서신의 기자가 바울 사도라는 것을 베드로후서3:15로부터도 분명하게 유추해 낼 수 있습니다. 그의 서신의 처음 몇 구절에서 분명히 밝혀주듯이 사도 베드로는 구원받은 유대인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첫 구절은 그 서신이 베드로전서를 받아 보았던 자들과 동일한 이들에게 보내졌음을 알립니다. 그런 다음3:15에서 그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언급하는 바울의 편지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거기에다가 13:32에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히브리서 기자임을 더욱 더 확증해 줍니다. 사도들 중에 누가 디모데와 동역하였습니까? 사도 바울이 아니면 누구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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