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치유사역

구속사적관점

호리홀리 2018. 1. 2. 21:34

개혁주의 성령론 요약  

   Ⅴ. 오순절 사건의 해석 : 구속역사적 관점과 구원순서의 관점

 

개혁주의 신학은 전통적으로 구속역사적 관점을 강조해왔다. 오순절 사건을 구속역사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1. 여러 견해

 

1) Historla Salutis(구속역사)로 보는 견해

역사적 개혁교회, 특히 카이퍼, 워필드, 개핀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부활-승천에 연결되는 일련의 구속사적 사건의 한 나뉠 수 없는 사건으로 취급한다. 이는 단회성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2) Ordo Salutis(구원순서)로 보는 견해

오순절교회, 은사파 교회 특히 웨슬리, 피니, 르우벤 토리 등은 성령은사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여 이를 제2의 축복이라고 하면서, 구하여 받겠다고 하는 의지가 강하다. 반면에 성령은사에 교회론적, 종말론적, 윤리적 측면의 강조가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왔다.

3) 두 견해를 모두 받아들이는 경우

개혁교회 안에서도 오순절 주의의 성령운동을 적극적인 방법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이는 역사적 개혁교회의 입장과는 사뭇 다른 입장이다. 로이드 존스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회심 후 신자들의 체험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고신의 안영복 교수는 중생과 성령세례를 명백히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견해들은 전통적인 개혁파 교회의 구속역사적인 관점보다는, 구원순서의 관점에서 오순절 사건을 조명하는 오순절주의의 입장을 수용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2. 단회성과 영속성의 문제

차영배 교수는 두 관점의 균형을 찾아보려는 시도를 그의 「성령론」의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과 영속성”에서 하고 있다. 차교수는 오순절 성령강림은 유일무이한 사건으로서 오순절 전이나 후에도 그 같은 모양으로 강림하신 적이 없다는 의미에서 단회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승천하신 예수께서 성령을 항상 보내신다는 의미에서 영속성을 제시하고 있다. 즉 오순절에 사도들을 포함한 120명에게 단회적으로 오셔서, 그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항상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성령강림의 체험은 신자가 중생 후 한 번뿐만이 아닌, “영속적으로” 위로부터 강림하는 “동질의 성령”을 “각양 은사들과 더불어” 받아 누려야 할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성령세례는 “은밀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중생의 첫 단계, 곧 “복음으 말씀과 더불어 성령의 감화로 거듭남으로써 주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는 과정”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며, 이는 신자의 존재 전체에 이르기까지 거듭나는 획기적인 역사로서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3. 평 가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과 연속성에 대한 문제는 역사적 개혁 교회 안에서 격렬한 찬반 양론이 있어 왔으며,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여 소강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역사적 영역과 현재의 체험적 영역이라는 두 측면에 대한 문제를 각각의 독특성 안에서 상호의존적으로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우리는 모든 신자가 새사람이며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죄의 몸은 멸해졌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의 새사람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지체로서, 그는 성령의 거소와 성전이 되어 성령의 새로움 속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교리에 대하여 어떠한 양보도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성령은 오늘도 위로부터 계속적으로 내려오신다(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제2장 3절).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를 과다하게 제한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바람직하기 못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말씀을 통하여(per verbum), 말씀과 더불어(cum verbo)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우리의 마음이 열려야 할 것이다.

 

역사적 개혁신학의 테두리 안에서도 성령의 부어주심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여러 은사들이 오늘날도 나타날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오순절에 임했던 성령강림의 역사는 사도행전 28장과 함께 끝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기쁘신 뜻을 따라 세상 끝날까지 복음전파와 함께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경험과 현장성을 강조하는 오순절주의 또는 신 오순절주의의 틀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선 중생- 후 성령세례”라는 웨슬리안 또는 오순절주의의 구도를 도식하고 “제2의 축복” 체험을 일반화 하는 경향은 계시기록의 종결을 말하는 역사적 개혁신학의 입장을 벗어난 잘못된 주장인 것이다.

 

결 론

우리는 기독교적 체험의 다양한 면을 인정해야만 한다. 웨슬리적인 체험도 있으며 디모데적인 체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한 가지만을 고집해서는 안 될 것이며, 특히 체험에는 윤리적인 요소가 있음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윤리적인 것이 모두 영적인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아가는 삶(Coram Deo)이 지향하는 특징에는 윤리적인 면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 인격에는 감정적인 면이 있다. 따라서 너무 지적인 요소만을 강조하여 체험적인 요소, 정서적인 요소 등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체험의 기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교통인데, 여기에는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모시고 그분의 주권에 복종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며,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강조한다. 그러나 강조점과 순서는 달라도 바울신학과 베드로의 신학이 다른 것은 아니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그리스도와의 교통 속에 있음을 깨닫고, 남은 생애를 그리스도께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어떤 사람에게는 연합이 강조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교통이 강조될 뿐이다.

결론적으로 성령 안에서 성도의 체험을 평가한다면, 이는 눈에 보이는 외적인 현상이기에 앞서서 영적 변화라는 점에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영적 변화가 주어지는 성령의 체험이야말로 기독론적이요 교회론적이요 동시에 종말론적인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령의 사역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이 천상사역의 계속으로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는 오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들을 동반하는 비인격적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동반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현상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을 통하여 지금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 누구냐를 계시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받은 자들은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대한 감격과 감사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이러한 감격과 감사는 성도의 지상생활을 더욱 능력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즉 칼빈이 원했던 것처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언제나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통한 생활과 기도와 예정 속에서 그 기쁨이 더욱 배가(倍加) 되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성령사역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온전한 신자의 생활을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김길성의 개혁주의 성령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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