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어 성경은 바울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이 쓴다.”라는 것이지요. 바울 서신을 살펴보면, 모든 서신이 ‘바울’이란 이름으로 시작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바울이란 이름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의 본래 이름은 ‘사울’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이름이라고 해서 바울이 자신의 이름을 바꾸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사울은 높은 사람, 바울은 낮은 사람이라는 해석을 제일 처음 한 사람은 어거스틴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9절에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라는 구절을 해석하면서, 바울을 ‘낮은 사람’이라고 보고 반대로 사울을 ‘높은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사실, 언어적으로는 정확한 해석은 아닙니다(사울이란 뜻은 ‘얻어내다’입니다).
분명 ‘사울’은 자신을 ‘바울’로 나타내보이고 싶어했습니다. 사울은 ‘사울’이란 히브리어 발음을 그대로 살리면서 헬라식으로 나타내보일 수도 있었습니다(사울루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스펠링을 바꾼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바울 스스로가, 자신의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자신을 언제나 의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그의 과거가 무엇입니까? 빌립보서에 의하면, 그는 ‘베냐민 지파’라고 합니다(3:5).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었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이스라엘의 초대 왕과 똑같은 설정입니다. 그는 “8일만에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빌 3:5). 말 그대로 태어나면서부터 철저하게 율법의 사람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율법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다고 확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폐기하는 것처럼 보였던 예수님을 오해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며, 실제로 그들을 핍박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과거를 요약하는 단어가 바로 ‘사울’입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다시 말해서 율법을 폐기하는 것처럼 보였던 예수님이 실제로는 율법의 완성자였음을 깨달은 후에, 그의 모든 것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해서 철저하게 이방인과 담을 쌓았던 히브리 이름을 가진 사울이, 주님의 부름을 받고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름에서 히브리적인 요소를 제거합니다. 히브리의 첫 단어를 바꾸면서, 사울을 바울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읽으면 그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주님을 만난 후에 즉각 이름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써 첫발을 떼고 바꾸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1차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바울이 됩니다. 그동안 자신이 철저하게 미워하고 저주했던 이방인의 모습을 취한 것입니다(행 13:9). 이것이 바로 바울의 현재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과거를 얼마나 철저하게 폐기처분했는지를, 그의 서신 제일 첫 단어 곧 ‘바울’을 읽을 때마다 묵상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보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나는 나의 과거와 얼마나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자 애를 써왔는가! 예수님이 나의 인생에 얼마나 큰 전환점이 되었는가! 진정 나는 변화되었는가! 나의 현재는 어떠한가! 비록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인위적으로 바꾸지는 않더라도, 바울과 같은 변화를 경험해야만 할 것입니다. 주님을 진정 경험하고 난 이후, 이전의 삶이 배설물처럼 버려지고 완전히 새로운 주님의 아들/딸로써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확신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 단어는 사도입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이 말이 사도라는 중요한 단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역시 다른 서신서에서도 마찬가지로 바울은 자신의 이름 뒤에 항상 ‘사도’를 붙입니다. 이 사도라는 말은 ‘제자’와 다릅니다. 제자는 배우고 익혀서 스승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대사입니다. 다시 말해서 ‘특정한 일을 대신하기 위해 전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사도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이 마가복음 6장 7절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12제자들을 둘 씩 짝지어서 전도여행을 “보내”십니다. 이 “보낸다”라는 말 자체가 사도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씀에는 예수님이 보냄을 받은 제자들, 곧 사도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다고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란, ‘특정한 일을 대신하기 위해 전권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구약에서부터 내려온 것입니다. 바로 선지자가 사도의 원초적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건, 사도란, ‘그분의 일을 이제는 내가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일을 구약시대엔 선지자가 했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이 하셨고, 예수님의 그 일은 12사도가 했으며, 이제 그 사도들의 일을 바울 내가 한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 이 두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존재의 자기 정체성임을 우리는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의 명함은 단지 이 두 단어만 있습니다: 바울 사도! 과거와 철저하게 단절해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바울, 이제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분이 맡긴 일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펼쳐갈 하나님의 사람! 바로 이것이 바울 사도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자기 정체성입니다.
이제 밑줄을 살펴봅시다. 밑줄은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와 ‘그리스도 예수의’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의 사도됨은,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라는 확신과 확증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자신의 삶에 대해서 확신을 갖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바울은 확신한 바가 있었습니다. 나의 나됨은 철저한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다! 나의 계획과 나의 의지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의 결과라는 확신이 바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바울의 사도됨에 대하여 주변의 많은 세력들이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갈 1:12)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지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달리 말하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지금 내가 사도가 되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말미암아 지금 내가 ‘이러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라는 확신이,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광야길에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출애굽시켜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기에, 백성들은 불평했고 결국 그들의 확신대로 그들은 광야에서 죽었지 않았습니까? 또한 그러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가룟 유다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진정한 구원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기에, 가룟 유다 안에 마귀가 들어가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먹었던 것이 아닙니까! 지금 나의 나됨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특별히 ‘사도’라는 말 대신에, 우리의 직분을 집어넣고 싶습니다. ‘목사’ ‘전도사’ ‘장로’ ‘안수집사’ ‘권사’ ‘집사’ ‘교사’ ‘성가대원’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나의 직분은 나의 뜻으로, 나의 계획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된 것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사도의 직분을 권세자의 그것으로 보면서, 그럴 듯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돈을 주고 이 직분을 ‘감히!’ 사려고 했습니다. 사람이 많이 꼬일수록 부패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우리는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귀한 믿음을 지켜나가야만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직분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가지게 되었다라는 생각을 갖는다면, 우리의 섬김은 180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직분을 섬기면서 당하는 어려움 앞에 우리는 이제 당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을 소유격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사도라는 것은 독립적인 직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말 그대로 누구의 일을 대신하는 것인 만큼 철저하게 ‘종’이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것입니다. 바울을 소유하고 있는 소유주는 세상이 아닙니다. 돈이 아닙니다. 철학이 아니며, 학문도 아닙니다. (예전엔 그랬지요.) 바울을 소유하고 있는 단 한 분이 있으니, 바로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교회에서 우리 모두는 철저하게 예수님의 종입니다. 내가 누구를 부릴 수 없으며, 내가 누구보다 높아질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역함에 있어서 겸손하게 만들어줍니다. 나의 직분에 언제나 소유주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잊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교회에서 섬김의 사역을 할 때, 답답한 일을 당해서 분통이 터질 때가 있습니다. 나의 생각이 100번 옳았지만 나의 생각이 반영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를 드러내놓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라는 말을 나의 명함에서 지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이러이러한 직분을 맡았는데, 아직도 나의 주인이 내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 지금도 기도하오니, “그리스도 예수의” 직분자가 되게 하옵소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언제나 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겐 믿음의 확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증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일까요? 그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기적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사도의 일을 하다가 맞을 일이 생겼을 때, 기적적으로 피할 길을 주셨던 것일까요? 물론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상 바울 스스로는 그러한 도우심을 ‘믿음의 확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사도의 일을 하다가 생긴 ‘상처’가 ‘믿음의 확증’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이 기적입니까?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13) 주님을 섬기다가 생긴 내면의 아픔과 상처,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마음의 굳은 살이 바로 ‘믿음의 확증’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을 맞이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우리의 환경을 이겨나가는 것! 바로 이것이 ‘믿음의 확증’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인 것입니다. 더 이상 흔들리지 말고 견고하게 하소서! 사람 보지 말고 주님 보게 하소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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