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에베소서

에베소서 5:21-33,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가정

호리홀리 2015. 4. 28. 11:46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가정(엡 5:21-33)



   본 장은 헬라시대와 로마시대에 널리 사용된 "가정 운영"(oikonomia)에 대한, 규범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 당시 모든 사회의 가정 규칙들은 부부와 부자와 주종 사이의 질서를 다룬다. 

   이런 가정 운영 규칙은 동양사회에서도 같은 패턴을 가진다.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가족 제도인 대가족 제도는 가부장 중심으로, 여필종부와 부부유별, 부자유친, 장유유서라는 철두철미한 위계질서와 종적 인간관계 생활을 사회의 기본생활로 짜고 있다. 여기에서 성차별과 자녀에게 맹종을 요구하는 것이 부작용으로 나타나며, 부부 사이에는 부부 일체감 대신에 괴리감과 소외감을 심화시켜왔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평등의 대전제 하에서 가정 안에서 가족 상호간의 질서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신약시대의 넓은 사회적 배경 속에서 기독교적인 가정질서를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지킬 인간 관계의 새질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21)



   우리말 성경(개역)은 가정질서에 대한 권면을 22절부터 시작하지만(//KJV), <그리이스어 신약>(Nestle-Aland, NTG 1979, 26판)은 21절부터 새단락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22절에는 가장 신빙성 있는 헬라어 사본들에 동사가 없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번역자들은 22절의 "복종하라"는 동사를 21절에 있는 "복종하는"에서 가져왔다. 또한 21절은 뒤따르는 세가지 인간 관계, 부부, 부자, 상전과 종에 대해 바울이 적용하는 일반적 원리로 나타난다. 신약성경은 상호 복종의 원리를 인간 관계의 일반적 원리로 제시한다(빌 2:3; 롬 12:10; 빌 2:7; 마 20:28 등). 따라서 이 절은 "빛의 자녀의 생활"(5:6-20)의 결론이라기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야 하는 인간 관계, 특히 가족 관계의 서론으로 제시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아내(5:22)와 자녀(6:1)와 종(6:5)에게 준 "순종"과 "복종"의 권면은 결코 일방적이 아니며, 이들에 대응하는 남편과 부모와 주인에게 함께 주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서로"는 상호성을 띠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된 모든 인간관계는 결코 일방적인 예속이나 강제나 폭력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이루어지는 상호 순종이다. 여기에 인간관계의 새로운 "기독론적" 기초가 제시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경외하므로, 서로를 향한 순종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런 새로운 인간관계는 고대 세계의 가부장적인 가정 구조의 배경에서 볼 때 혁명적이다. "신약성서 외에 고대 어느 윤리에서 부부, 부자, 주종에게 동등하게 '서로 서로' 순종하라는 교훈이 있는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21절은 가정 덕목록의 윤리 전체를 이해하는 길잡이이다. 바울이 단지 고대 사회의 철저한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기독론적 기반 위에서 '기독교화' 하였다는 주장은 21절을 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 안에서 부부관계의 새 질서(엡 5:22-33)



   (1) 아내들에게(22-24절)



   바울은 고대 세계의 일반적 형식을 따라 먼저 아내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22절)고 권면한다. 원문에는 "아내들은 주께 하듯 자기 남편에게"로만 나타난다. "복종하다"는 단어는 앞 절에서 가져와 완전한 문장을 만든 것이다.

   "복종하다"는 번역은 새번역에서 "순종하다"로 제시된다. "순종하라"(휘포타셋스세)는 자녀들로 부모에게 "복종하라"(휘파쿠에테)는 명령과는 다르다. 물론 "순종하라"는 말은 "어쩔 수 없이 당시의 가부장적인 사고"에 대한 여운을 담고 있지만, 주 안에서의 순종은 굴욕적이며 굴종적이거나 여성 비하적인 순종이 아니다. 아내의 자기 남편에 대한 순종은 자발적인 협력과 양보를 의미한다.

   또한 순종의 범위는 어디까지나 "자기 남편"에 제한된다. 이 권면은 한 가정 안에서의 부부관계를 다루고 있으므로,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하라"는 일반적인 권면이 아니다. 이어 바울은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를 "남편이 아내의 머리되기 때문"으로 제시한다(23절). 나아가 아내는 "범사에" 순종해야 하며,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 순종해야 한다(24절).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란 사상은 원래 창조 기사에서 암시적으로 나타났으나, 이제 명시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구약성경에서 남편의 대표성은 항상 전제되어 나타났다. "아내의 머리 됨"이란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여기에 단 한번 나타나지만,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는 비슷한 표현이 한 번 더 나타난다(고전 11:3).

   "남편의 머리 됨"은 고대 세계의 일반적인 가치관으로서 "남성 우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남녀 차별을 신학화하는 것도 아니다. 남녀의 평등과 동등성은 이미 창조 질서에 나타났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는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갈 3:28).

   "남편의 머리 됨"에 있어서 "머리"는 크게 "근원"(source)과 "권위"(authority over)를 의미한다. 웨인 그루뎀은 그리스어 "머리"(kephale)가 단지 "근원" 혹은 "시작"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는 여러 학자들(B. & A. Mickelsen; M. Howe; L. Scanzoni & N. Hardesty)의 입장을 주전 8세기부터 주후 4세기 사이에 36명의 저자들이 2336회에 걸쳐 언급하는 본문들을 다루면서, "머리"가 "권위를 행사하다"는 뜻을 의미하지 않는 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논증하였다.

   바울은 "남편의 머리 됨"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다"(23절)고 말한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의 관계는 분명히 "권위와 복종을 말한다"(골 2:10). 따라서 바울은 가정 안에서의 대표성과 최종적인 책임을 남편에게 두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질서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바울은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고전 11:3). 여기에서 "머리 됨"은 또 다른 차원을 가진다. 왜냐하면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본질의 동등성과 기능과 경륜에 있어서의 차이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된 부부 생활의 올바른 관계를 "머리"와 "몸"이란 비유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 관계는 기독론과 교회론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인간론적인 구조"는 철저히 그리스도가 어떻게 교회의 머리인가라?라는 "신학적 구조"에 의존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라고 말함으로써, "머리 됨"의 의미를 한층 분명히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대신 주셨다. 여기에 "머리 됨"은 결코 일방적이거나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며, 정복과 착취를 일삼는 통치가 아니다. 그것은 "희생적인 헌신"과 "자발적인 섬김"과 "올바른 다스림"이다. 그리스도는 제왕으로서가 아니라, 참된 종으로서 어떻게 우리를 지도하며 다스리는지 모범을 보여주셨다(막 10:45).9)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은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신" 사랑과 헌신으로 나타난다(25절). 따라서 바울은 이미 가정으로 주어진 개인적, 사회적 존재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변환시키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종말론적인 성령의 오심으로 개인적 정체성, 사회적 책임, 힘과 권위에 근본적인 전환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랑의 빛 속에서 모든 것이 결코 옛날과 같을 수 없었다.

   따라서 가정질서는 구속사적인 전환을 따라 본질적인 변화를 만들 수 밖에 없다. 부부는 기본적으로 "주 안에서"의 신자로서의 관계를 이룬다(골 3:18).

   아내는 "복종"하나 그들의 불신 남편을 그리스도 앞으로 "얻기"위해 더 높은 목적으로 복종한다(벧전 3:1-2).

   그러나 가정 안에서 본질적인 권위의 원리가 있다.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서 궁극적 권위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과 혼돈이 생긴다. 바울은 한 가정 안에서 최종적 권위를 남편에게 둔다. 가장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지속적인 결심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가장은 계속 자신의 결심에 영향받는 자들과 의논해야 한다. 그는 아내와 자녀의 조언을 들어야 하며 가족 구성원의 기술과 능력을 최선을 다해 이용해야 한다.



   (2) 남편들에게(5:25-33절)



   25절부터 남편의 책임을 다룬다. 남편에게 주는 아내 사랑의 의무(25-33절)는 아내의 남편에 대한 순종 의무(22-24절) 보다는 세배나 더 길며, 오히려 바울의 중심 관심이 여기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바울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25절)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사랑의 최고의 표현으로 설명한다. 남편의 사랑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한 것"과 같이 희생적이고, 비이기적이어야 한다. 그 사랑은 신약의 독특한 용어인 아가페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것은 최고 형태의 사랑이며, 자기를 주는 희생적 사랑이다. 이 사랑에는 자기 절제와 부인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도우며 돌보는 사랑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어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구원론적인 목적을 제시한다(26-27절). 그리스도의 사랑은 교회를 향해 구체적인 목표와 목적을 가진다. 주님은 교회를 정결케 하여 구원하실 뿐 아니라(26절), 나아가 완성하시려고 하신다(27절).

   이런 기독론적이며 교회론적인 기초 위에 바울은 최종적으로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같이 하라"(28절)고 말한다. 여기에서 부부 사랑이 한 몸으로 표현되며, 바울은 창세기 2:24을 인용한다. 부부 사랑의 심오한 연합으로 서로가 서로의 일부가 된다. 마치 "바이올린에 활과 같다. 서로 협조하지 않으면, 결코 황홀경(extasy)이 없다".

   따라서 결혼의 목표는 부부의 행복이 아니며, 오히려 둘이 하나됨에 있다. 이제 부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다. 두 인격체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과 헌신에 근거하여 하나로 엮어진다. 그러나 하나됨은 밋밋해짐이 아니다. 항상 더 큰 다양성의 풍성함이 있다. 행복은 하나 됨의 산물이다. 끝으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부 사랑과 상호 순종을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라고 말한다. 그는 단순한 창조의 순서에 의한 위계질서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기독론)과 교회의 순종(교회론)에 근거하여 가정의 질서를 새롭게 만들어가기를 권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의 가정을 회복하며, 인간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 가정과 가족관계는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십자가의 사랑과 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에서 그 모델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복종하며, 서로를 섬기고, 서로에게 헌신하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