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스가랴서 해석(요약)

3강. 스가랴의 메시아 예언

호리홀리 2015. 4. 29. 17:16

3강. 스가랴의 메시아 예언



1. 에스겔서와의 연결성 속에서 살펴본 스가랴의 메시아 예언


1). 에스겔서와 스가랴서의 시대적 연결성

고레스 왕 원년인 주전 538년에 고국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라는 왕의 칙령이 내려지자 성전건축에 대한 소망을 갖고 고국을 돌아온다. 돌아온 이들은 에스겔의 회복 신탁의 성취를 갈망하였지만 회복의 때가 그들의 세대에 속하지 않았다는 결론 속에 지내게 된다(참고, 학 1:2). 이러한 정황 속에서 등장하여 회복 신탁의 성취를 선포하는 선지자가 학개와 스가랴다. 그러므로 스가랴와 에스겔 사이에 나타나는 신학적 연결성을 살펴보는 것은 스가랴서의 메시아 신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2). 에스겔서와 스가랴서의 신학적 관점의 연결성

  에스겔이 바라보는 이스라엘 회복 공동체는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공동체다. 성전과 예배의 회복은 이스라엘의 회복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에스겔이 전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회복 신탁에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예배와 성전의 회복이다(참고, 겔 20;39-44; 36:24-31; 37:26-28; 40-48장).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라보는 에스겔의 이러한 신학적 관점은 포로 후기의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성전건축과 회복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학개와 스가랴서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연결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스가랴가 14장의 예언에서 회복 공동체가 예배 공동체임을 확연히 선포하는 것은 에스겔이 그의 예언을 성전 환상으로 마무리하면서 회복 공동체가 예배 공동체임을 선포하는 것과 유사하다.


3) 에스겔서와 스가랴서에 나타난 메시아 예언의 연결성

 

  스가랴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오실 메시아를 두 가지 측면에서 조명하고 있다. 하나는 직분의 측면이며 다른 하나는 사역의 측면이다. 직분의 측면에서 스가랴가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은 제사장, 왕과 목자다.


⑴ 제사장과 왕이신 메시아(슥 3:8-10; 4:11-14; 6:9-15)

  스가랴는 6:9-15에서 메시아를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통합하는 다윗의 후손으로 예언한다. 스가랴는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가서 바벨론에서 온 자들에게서 금과 은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든다(6:9-11). 그리고 이 관을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운 후, ‘순’에 대한 말씀을 전하면서 메시아 예언을 선포한다(12-13절). 성전을 건축하는 인물이 바로 이 ‘순’이며 이 예언은 오실 메시아의 정체성과 사역을 다룬다. 스가랴가 선포하는 ‘순’은 다윗의 후손을 의미 하며(슥 6:12, 참고 사 4:2; 렘 23:3-5; 33:14-26; 겔 17:22-24), 그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것이며, 영광을 얻고 왕의 보좌에 앉아 통치권을 행사할 것이다(슥 6:13). 이 예언에서 더욱 주목해야 할 내용은 이 메시아 왕이 제사장으로 그의 위에 앉아 왕권과 제사장직을 통합한다는 것이다.

  메시아 안에서 제사장직과 왕권이 통합되는 것은 스가랴만의 독특한 예언이 아니다. 시편 110:4은 이미 메시아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 될 것을 선포하였다.

  스가랴 6장의 “순” 라고 불리는 다윗 후손이 제사장직과 왕권을 왕의 보좌에 앉아 통합하리라는 해석은 스가랴 3-4장의 예언과 함께 살필 때 더욱 분명해진다.

  제사장과 왕인 메시아 예언을 정리하면, 정결하게 된 대제사장이 여호와에 의해 세워지고, 이것은 성전 예배의 가능성을 기대하게 한다(3장). 이 대제사장은 왕과 함께 성전 예배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며(4장), 결국 왕의 보좌에 앉게 되는 다윗의 후손(“순”)안에서 제사장직과 왕권이 통합될 것이다.

  

  스가랴는 9:9-10에서 왕이신 메시아의 모습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왕은 시온과 예루살렘의 기쁨의 근거가 된다(슥 9:9, 참고 마 21:1-11; 막 11:1-11; 눅 19:28-40; 요 12:12-19). 겸손한 왕의 모습이지만 이 왕은 우주적 평화를 선포하고 우주적 정권을 가진다.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 9:10). 두굿(Duguid)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시편 72편을 이 예언의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라”(시 72:8). 이 통치의 특징은 공의(슥 9:9; 시 72:3)이며 그 결과는 우주적 평화와 구원이다(슥 9:9; 시 72:4) 결론적으로 스가랴가 3장, 4장, 6장, 9장에서 제시하는 메시아는 제사장직과 왕권을 통합하는 다윗의 후손이다.


⑵ 선한 목자이신 메시야(슥 10:1-12; 11:4-17)

   에스겔 34장은 스가랴가 전하는 목자이신 메시아 신탁의 배경이 된다.

  스가랴 10:2는 목자가 없어서 백성이 양떼와 같이 유리하며 곤고를 당하고 있음을 묘사한다. 이는 실제적으로 목자의 부재 문제가 아니라 목자는 있지만 양떼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실신한 목자의 부재 문제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친히 신실하지 못한 목자들과 숫염소들에게 책임을 묻고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슥 10:3), 여호와께서 친히 그의 백성을 돌보실 것이다(슥 10:6-12). 스가랴 10:4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그의 양떼를 위해 불의한 목자들을 대신할 지도자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는데, 이 지도자가 모퉁이 돌, 말뚝, 싸우는 활, 권세 잡은 자로 묘사되고 있다. 불의한 목자들은 결국 여호와의 심판 대상이 된다(겔 34:18-22).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친히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 더 나아가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후손을 목자로 세워 그의 회복 약속을 보증하신다(겔 34:23-24).


⑶ 찌름과 칼로 침략을 당하는 메시아(슥 12:10; 13:7-9)

  스가랴 12:1-9는 열국이 미래의 한 날에 예루살렘을 파괴하려고 모일 때 여호와께서 친히 그 대적들을 물리치시고 예루살렘을 보호하실 것을 선포한다. 이날에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실 것을 약속한다(12:10). 결과는 대대적인 애통과 통곡이다(12:11-14). 이것은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개혁한글)” 그를 찌른 행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애통과 통곡으로 보인다(12:10). 이들이 찌른 행위를 묘사는 동사(다카르)는 칼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상처를 내는 행위를 의미한다. 개역한글 성경에서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로 번역하고 있는 맛소라 히브리어 원문(BHS)을 직역하면 “그들이 그 찌른바 나를 바라보고”라고 번역된다. 이와 같이 맛소라 본문을 따라 번역할 경우, 그들이 찌른 자는 여호와(“나를”)를 의미하게 된다. 즉, 그들은 여호와께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것(이것은 추상적이거나 비유적이라기보다는 실제적인 상처를 의미함)에 애통하며 용서를 구하는 회개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친히 이 고통을 경험하심으로써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들은 그들의 행위에 대해 회개하고 죄 사함에 이르게 된다(참고, 슥 13:1). 여기서 언급하는 찌름을 당한 자는 스가랴서의 흐름을 고려할 때, 11:4-14에 나타나는 양떼에게 거절당하는 목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여호와와 목자가 동일시되는 대목이다. 이 목자가 13:7에서는 칼로 침을 당하는 자로 묘사되며 여호와의 짝된 자(“내짝된 자”)로 불린다. 따라서 여호와는 이 목자의 거절당함(11:4-14), 찌름을 당함(12:10), 또한 칼로 침을 당함(13:7)을 통하여 이 고통에 참여하기에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거민이 찌른 자가 여호와라고 하는 것이 가능하다. 같은 맥락에서 이사야 53장에서 말하는 고난 받는 종을 통해 여호와는 이 고통에 참여하시며, 스가랴 12:10의 찌름을 당한 자의 모습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을 맞이한 예수님께 적용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참고 요 19:37; 1:7). 스가랴 12장에서 언급하는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의 애통과 통곡은 단순한 괴로움의 표현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애통과 통곡이 13:1에서 죄 사함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스가랴 12:10에서 언급하는 찌름을 당한 자는 13:7에서는 칼로 침을 당하는 목자로 묘사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치는 행위가 여호와에 의해 행하여진다. 즉, 여호와께서 칼을 휘두르시고 이 칼로 그의 목자(“내 목자”)를 치신다. 이것은 이사야 53;10에서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라는 표현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내 짝 된 자”라는 표현은 이 목자가 신성을 여호와와 함께 나누고 있는 자를 암시하며 “내 종”이라는 표현(참고, 슥 3;8)과도 평행을 이룬다. 이 목자가 칼로 침을 당할 때 양떼가 흩어짐과 심판을 경험하게 된다(슥 13:7-8, 참고 단 9:26). 그러나 삼분의 일은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여호와를 그들의 하나님(“내 하나님”)이라고 부를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목자의 죽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호와와 그의 백성 간의 언약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내 백성”과 “내 하나님”). 마태복음 26:31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를 버리게 되는 것을 이 예언의 성취로 해석한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라 기록된바 내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스가랴는 에스겔의 선한 목자이시며 제의적 역할을 감당하시는 메시아의 이미지(겔 34:23-31; 37:24; 40-48장)를 이사야의 고난 받는 종의 이미지(사 53장)와 하나로 묶어 찌름과 칼로 침을 당하는 목자(슥 12:10; 13:7)로 묵시적 예언을 통해 전하고 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그의 백성과의 언약 관계를 회복하시는 방법이며 창세기 3:15에서 언급하는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히브리서 저자를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증거 한다.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 8:27). 또한 복음서 저자들은 스가랴의 메시아 신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았던 것이다. 요한복음 19:34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창에 옆구리를 찔리셨을 때 물과 피가 흐른 것을 기록하며 예수님의 확실한 죽음을 전한다. 하지만 같은 장 37절에서 저자가 스가랴 12:10을 인용하는 것을 볼 때 이 물과 피는 두굿이 지적한 것처럼 스가랴 13:1에서 언급하는 속죄하는 물과 칼로 침을 당하여 죽음에 이를 때 흘리게 되는 피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속죄와 언약 관계 회복이 동시에 이루어졌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가랴 10-13장의 흐름을 목자를 중심으로 정리하면, 10장에서 여호와는 불의한 목자들을 대체할 그의 목자를 제공하실 것을 약속하시고, 실제로 제공하시는데, 양떼는 이 목자를 거부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슥 11:4-14). 하지만 여호와는 이들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그들의 행위에 대해 애곡하고 회개에 이르게 한다(슥 12:10). 양떼가(칼로) 찌른 목자(슥 12:10)는 여호와께서 의도하신 칼로 치심(슥 13:7)의 대상이며, 이 목자의 죽음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남은 자들(“삼분지 일”)의 언약 관계가 회복되며 죄 사함이 이루어진다(참고 슥 13:1). 여호와와 그의 백성 간에 위치하여 백성의 죄 사함과 언약 관계를 회복하는 목자의 중재자적 역할은 에스겔의 성전 환상에서 왕의 역할 속에서 이미 그려진 바다. 에스겔의 성전 환상에 따르면, 왕은 자신과 백성의 속죄를 위한 제물을 제공하는 제의적 책임을 감당하는 인물이다(참고, 겔 45;15, 20, 22) 왕이 속죄를 위한 제물을 제공하지 않으면 성전에서 제사장들은 속죄제를 드릴 수가 없게 된다. 다라서 백성의 속죄를 위해 왕의 제의적 역할은 중요하다. 에스겔 선지자가 그려 주는, 속죄 제물을 제공하는 메시아적 왕의 중재적 역할이 양떼로부터 버림을 받고 찌름을 당하고 여호와의 칼에 죽게 됨으로 성취될 것임을 스가랴 선지자는 선포하는 것이다.

2. 9장, 심판과 구원

  

1) 수리아에 대한 심판(1-2상절): 하드락, 다메섹, 하맛

  이스라엘의 북방 시리아 지역에 위치한 나라들에 대한 심판의 예언을 담고 있다. “사람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본다” 함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개함을 의미한다(Calvin).  이스라엘이 회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 수리아와 기타 나라들을 멸망시키게 된다는 뜻이다.  하드락 땅에서 출발한 여호와의 말씀이 다메섹에 머물다가 인접한 하맛에 이르고 마지막으로  두로와 시돈에 이른다. 이러한 말씀의 행군은 통상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루트를 예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베니게에 대한 심판(2하-4절): 두로, 시돈

  난공불락의 요새로 대변되는 막강한 방어(군사)력과 활발한 해상 교역을 통해 얻은 엄청난 국가 경제력이 두로가 가진 지혜의 증거다.

  시돈과 두로를 심판(4절)하시는 하나님이 단호한 의지를 강조한다. 하나님은 두로가 자랑하던 모든 재산을 빼앗을 것이다. 그들의 재산(권세)은 그 근원인 바다(해상무역)에 던져지고, 남은 것은 불살라짐으로써 (비교 암1:10),  기원전 332년에 알렉산더에게 정복당한 후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신약은 이러한 두로와 시돈에도 메시아로 말미암아 소망의 빛이 비추고 있음을 보여 준다(막 3:8 등).


3) 블레셋의 심판과 구원(5-8절): 아스글론, 에그론, 아스돗

  블레셋은 수리아와 베니게 지역 국가들의 패망, 특히 다메섹과 두로가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서 크게 놀랐을 것이다. 5-8절에 기록된 지리적으로 불규칙하게 배열된 도시들의 순서는 아마도 이들의 당혹감을 반영하는 듯하다. 블레셋 다섯 도시 중 갓이 제외된 것은 유다의 웃시야에 의해 멸망당했기 때문일 것이다(대하 26:6).

하나님께서 블레셋의 가증한 우상 제의를 제거한 결과(7절), 블레셋의 남은 자는 다윗 시대의 여부스(참고 삼하 5:6-10)처럼 정치, 종교적으로 이스라엘의 당당한 일원으로 편입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누릴 것이다. 놀랍게도 남은 자 사상이 이스라엘의 경계를 뛰어넘어 이방인 블레셋에게 적용되고 있다. 한때 이스라엘의 최대 적이었던 그들이 여호와의 남은 자,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나아가서 이들은 종교적으로 통합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다윗 시대에 시작된 이 통합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교회를 통하여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갈 3:28).

 

3.유다/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나올 메시아(10:3하-4)


4절은 유다 족속에게서 “모퉁이 돌”10), “말뚝”11), “싸우는 활”12),과 “권세 잡은 자”13)가 나올 것이다.


4. 이스라엘의 회복(10:5-6)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이는 전적으로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약속에 근거한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을 들으리라.” 이는 시내산언약의 연속이다.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출 6:7-8).14)

5.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하리라(13:1-6)

   “그날에”라는 구약의 묵시적이며 종말론적인 예언의 중심 주제인 ‘여호와의 날’(욤 야웨)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 날”은 이 땅의 죄악을 모두 씻고, 인간이 통치하는 이 세상의 모든 모순을 해결하시며,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하는 날이다.

  13:1절에 ‘샘’은 히브리어로 ‘마코르’로서 구약에서 자주 생명의 근원에 대한 비유로(렘 2:13; 17:13; 시 36:9; 잠 10:11; 14:27; 16:22) , 그리고 기쁨의 근원에 대한 비유로(참 5:18) 사용한다. 생수의 샘(마코르)이 되시는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 숭배죄에 해당되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에 대해서 스가랴 13:1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들의 죄, 특히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진 모든 자의 죄를 씻어 주시는 샘을 열어 주시겠다는 복음이다.“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라는 것은 우상 그 존재 자체를 완전히 소멸하겠다는 것이다. ‘우상숭배’와 함께 ‘거짓 선지자들’과 ‘더러운 사귀’(루아흐 하투므아, 그 더러움의 영)를 이 땅에서 제거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6. 여호와의 날, 그날에(슥 14:1-21)

1) 열국과 예루살렘 사이에 전쟁이 있어서 예루살렘 백성에게 큰 환난이 있을 것이다(14:1-8)

  여호와의 날에 그 심판은 이방 민족들을 도구(2상절)로 사용하여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백성에서부터 시작된다(참고 암 5:18; 사 22:5; 습 1:2-18; 계 16:14-16). 그날에는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당하며 백성 중 절반이나 사로잡혀 갈 것이나 남은 자들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한편 스가랴 14:3 이하에서는 여호와의 날에 있을 구원을 묘사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치러온 이방 민족들에게 거룩한 전쟁을 선포하시고, 친히 감람산에 임재하여 서시며 지진과 같은 자연계의 현상도 사용하셔서(참고 웃시야 왕 때 지진에 관해서는 암 1:1)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기 백성, 즉 구원받은 성도 및 천군천사와 함께 예루살렘 성으로 피할 길을 내주신다(참고 마 25:31; 살후 1:7 등).

  여호와의 날, 그날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왕국과 구원의 완성을 묘사하고 있다. 먼저 6-7절에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 질서의 변화가 있을 것을 말한다. 지금 우리가 보는 해와 달과 같은 세상의 빛들은 사라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빛이 영원히 빛나는 세계가 온다는 말씀이다(참고 사 60:19-20; 계 21:25). 그날이 언제인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벧후 3:8-13; 행 1:6-7; 마 24:36) 이어서 8절에서는 그날에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솟아나 계절에 상관없이 동해와 서해로 흘러간다는 것이다(참고 계 22:1-5). 여기서 예루살렘은 종말에 나타날 새 예루살렘이며(계 3:12; 21:2 등), 동해와 서해도 각각 염해(사해)나 지중해로 축소할 이유가 없다.


2)여호와께서 온 세상의 왕이 되시고 예루살렘을 영화롭게 하신다(14:9-21)

 

  14:16-21절은 스가랴서의 총 결론인 동시에 묵시적 종말론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과 그 보편성을 강조한다. 16절에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이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재림하신 뒤에 만국은 주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보호 받은 것을 감사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 만국의 민족들이 이와 같은 것을 지키는 목적은, 저들도 세상에 살던 동안 하나님이 보호하여 주신(특별히 영혼이 망하지 않게 해 주신) 은혜를 회고하며 감사하려는 것이다. 여기 “초막절” 이라는 것은 반드시 옛날 유대인이 지킨 절기와 같은 시기라고 할 것은 없다. 이것은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행위를 중점으로 말하는 것이다.  17-19절에 있는 말씀은, 천국에는 이방인이 있을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21절은 주님의 재림 이후에는 모든 것이 다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 날에는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여기 이른바 “가나안 사람”이라는 말은, 죄와 저주 아래 있는 자를 가리킨다(창 9:25; 레 18:24; 신7:2, 9:4). 주님의 재림으로 세우신 세계에는 그런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계 21: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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