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스가랴서 해석(요약)

2강 스가랴서의 메시지

호리홀리 2015. 4. 29. 17:14

       2강 스가랴서의 메시지



1. 여호와께 돌아오라(1:1-6)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순종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충성하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슥 1:3-4, 암 5:10-27; 4:1-15; 호 6:1-3; 14:1-3; 사 1:18-31; 42:18-25). 이것만이 축복과 형통의 길이며(신 6:4-9; 7:12; 11:13-23, 28; 암 5:10-27; 4:1-15; 호 6:1-3; 14:1-3; 사 1:18; 시 1:1-6), 사탄에게서 승리할 수 있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벧전 2:2).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됨을 강조한다(슥 1:6; 사 40:6-8; 55:10-11; 57:19).


2. 환상을 통한 메시지


  여덟 개의 환상이 교차대구법으로 구성 되었다. 첫 번째 환상과 여덟 번째 환상은 “땅 위를 살펴보는 말들”을 중심으로 병행을 이룬다. 첫 번째 환상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초점을 맞춘 데 반해(1:12, 17), 여덟 번째 환상은 하나님의 승리에 초점을 맞춘다(6:8). 첫 번째 환상에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전체적’으로 선포된 후 이어서, 두 번째 환상에서는 특히 이방 민족들의 죄악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구체화한다. 세 번째 환상은 두 번째 환상과 마찬가지로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구원을 포괄적으로 전개한다.  네 번째 환상과 다섯 번째 환상은 메시아 시대의 영적, 정치적 지도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하며 병행을 이룬다. 여섯 번째 환상과 일곱 번째 환상은 죄악의 땅과 죄인들을 징벌하는 문제를 다루며 서로 병행을 이룬다.

1) 첫 번째 환상(1:7-17)-여호와께서 돌아오심

  스가랴의 처음 세 환상(1:7-17; 18-21; 2:1-13)은 여덟 개 중 공통점을 지니는 첫 번째 부류의 환상들이다. 이 환상들의 공통적인 테마는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예루살렘/유다를 위한 하나님의 역사다. 첫 번째 환상에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약속하며 세 번째 환상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는 이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기 시작 하는가를 보여 준다. 스가랴는 주전 519년 2월 15일 첫 환상을 보았다. 빨간 말을 탄 한 사람을 보았다.

이 말들이 사방(四方)을 두루 둘러보고 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각 색깔별, 즉 빨간색, 밤색, 흰색의 말에 타고 있었을 것이다. 천사가 타고 있던 빨간 말 뒤에 여러 말이 보인 것으로 보아 총 4마리였던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스가랴서 안에 4라는 숫자가 지니는 중요성을 염두에 둘 때, 천사가 탄 말 역시 넷으로 구성된 조의 한 일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세상을 둘러보고 온 기마병들이 천사에게 온 세상이 “조용하고 평안하였다”고 보고했다(11절). 열방이 평안한 것은 곧 주의 백성이 아직도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하여 버림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선언했던 70년의 심판이 지속되는 것으로 간주한다(참고 렘 25:11). 예레미야의 70년은 이사야의 70년(사 23:15-17)처럼 하나님의 때가 차기까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스가랴는 이 70년을 자신의 시대에 문자적으로 적용한다. 이 경우 70년은 바벨론의 손에 유다가 멸망했던 586년에서 시작해서 2성전 준공인 516년이다.

  천사의 탄식어린 질문을 받으신 하나님께서 위로로 말씀하셨다(13절). 14-17절은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을 노래한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지칠줄 모르는 하나님의 열심,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 은혜와 자비로 충만한 여호와의 예루살렘 귀성, 성전재건, 시온과 예루살렘에 임할 위로 등 을 약속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의 백성을 버리시지 않는다.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와 관심이 멀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순간에도 천사들을 보내셔서 온 세상을 관찰하고 둘러보고 계셨다.


2) 둘 째 환상(1:18-21)-네 뿔을 깨는 네 공장(이방민족들에 대한 심판)

  두 번째 환상에서는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열방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크게 진노하심으로 이 약속이 실현될 것을 말하고 있다. 네 뿔을 보았다. 네 뿔은 묵시문학적 표현에서 세상이다. 4를 뜻하는 의미이다. 주의 백성들을 괴롭혔던 네 뿔(열방)이 네명의 공장(대장장이)에 의해서 부셔진다. 하나님의 심판이다.

  “내가...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 - 이곳의 네 뿔은 유다와 이스라엘, 그리고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그 백성들을 다 흩어버렸던 열방들을 뜻한다. 세계의 네 제국, 곧 바빌론, 메대-바사, 그리스, 로마, 혹은 앗수르, 애굽, 바빌론,  메대-바사등으로 보기도 한다(K. L. Baker, Feinberg)

  

3) 셋 째 환상(2:1-5)-척량줄을 손에 잡은 자 (성곽이 없는 새 예루살렘)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이라는 관용구로 시작한다. ‘척량줄(헤벨 밋다). 척량줄은 공간을 측량하기 위한 도구인데, 척량줄은 어떤 경우에는 심판상황에서 나타나지만(아모스 7:7-9), 여기서는 예루살렘의 구원과 회복을 상징한다. 이런 점에서 에스겔서와 연관이 깊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회복이야기로서 새로운 도성을 측량하는 것(겔 40:3)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척량줄 환상은 바벨론 포로기의 에스겔에서 시작해서 포로이후 스가랴로 이어진다. 그리고 600년이 지난 다음, 다시 요한계시록으로 이어진다. 척량줄을 손에 든 이유는 새 도시의 크기를 측량하기 위해서다.

 

4) 네 번째 환상(3:1-7)-이스라엘의 정결과 회복

3장은 제사장나라로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보여 준다. 출19: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러한 제사장직의 회복, 성전의 회복은 미래의 메시아의 오심으로 성취될 것이다(슥 14장).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3:1, 4). 여호수아는 죄를 지은 이스라엘을 대표한다. 사탄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백성의 상징)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의 고소자다(욥 1-2; 계 21:10).

변호인은 여호와이시다. 고소자 사탄이 여호와 앞에서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여호수아를 책망한다. 근거는 하나님의 택하심 때문이다. 여기서 ‘택하다’(바하르 to choose)라는 의미는 ‘선택하다’라는 선택적 개념을 반영하고 있다(엡 1:4). 하나님의 택하신 ‘예루살렘’이며 백성을 대표하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하는 것을 하나님은 받아들이실 수 없다.

  2절에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은 바벨론의 포로를 의미하기도 하며 ‘이’는 ‘이것’ 혹은 ‘이 사람’(제 this)은 먼저 구원받은 사람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의미하며 언약백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3절의 ‘더러운 옷’  (베가딤 쪼임)을 입고 있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연결시킨다면 이것은 부정함을 보여 주기도 한다.  여기에서 ‘더럽다’(쪼이)라는 단어는 ‘더럽다’를 표현하는 히브리어 단어 중에서 가장 더러운 개념을 갖는다. 즉,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일 뿐만 아니라 정결하지 못한 옷을 입고 있었다.

  4절에 “더러운 옷을 벗는다”는 것은 죄의 용서하심을 통한 사역이며 예복을 새롭게 입히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칭의’(Justification)를 통하여 대제사장은 ‘예복’( 마할라쪼트 robe of state)을 입게 된다. 하나님의 사역은 ‘죄 용서’뿐만 아니라, ‘칭의’적인 새로운 ‘예복을 입혀 주심’으로 약속된다(3:4). 스가랴는 이러한 장면을 보고 깨끗한 관( 짜니프 turban, headband)을 쓰게 해 달라고 요청하여 예복뿐만 아니라 머리에 정결한 관까지 쓰게 된다(5절).


  여호와의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증언한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서있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7절). 즉 “나의 길을 걸으며”, “나의 명령을 지키면”이라는 조건절이 ‘만약’(임 if)이라는 구절로 증언한다. 세 가지의 결과를 약속하시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릴 것”이며, 둘째로 “하나님의 뜰을 맡길 것”이며, 셋째로 “하나님께 자유롭게 왕래할 것”이다. “하나님의 집을 다스릴 것”은 그분의 성전을 다스리며,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하여 통치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권위를 갖고 제사장직 사명을 지속적으로 다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뜰을 맡게 된다”는 것은 성전이 우상숭배와 죄에서 전염되는 것을 막도록 사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자유롭게 왕래”라는 것은 제사장의 특권을 보여 준다.

8-10절에서 종말론적인 사건을 약속하신다. 이스라엘을 위해서 메시아를 지칭하는 ‘새싹’, ‘한 돌’과 같은 단어들이 나타난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위한 ‘한 돌’과 같다. 실제로 메시아는 그를 대적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걸림 돌’이 되거나 ‘거치는 돌’이 되었다(사 8:13-15; 시 118:22-23; 마 21:42; 벧전 2:7-8). 그러나 그를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피난처’가 되셨다(사 28:16; 벧전 2:6). 그리고 지금은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셨다.(엡 2:20). 이 메시아 사역은 “이 땅의 죄악을 하루 만에 제거 하겠다”(9하절). 는 약속과 연관된다. 이 돌에는 ‘일곱 눈’이 있다. ‘일곱 눈’은 주로 성령의 충만한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즉, 무한하고 전지전능하신 그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10절에서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평화로움을 상징하는 표현인데 그날에는 바로 이스라엘의 정결함과 회복이 일어나게 된다.

 

5)다섯 번째 환상((4:1-14))일곱 촛대의 순금 등대와 감람나무(성전의 재건)

  4장은 스가랴가 본 환상(4:1-5, 11-14)과 두 개의 예언(4:6-10)으로 구성 되어 있다. 그 환상은 순금등대와 이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다. 순금 등대는 등의 대 위에 기름 그릇이 있고 이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다. 각 등잔에 심지를 놓을 수 있는 일곱 개의 관이 있는 등대의 모습은 출애굽기 25:31-40과 37:17-24에서 묘사하는 성막의 등대와는 다른 형태다.

  순금등대는 언약백성을 가리킨다. 그리고 신약의 교회를 상징 한다1). 그들의 사명은 세상을 밝히는 것이다. 기름은 성령이다. 성령의 공급으로만이 세상에 빛을 밝힐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빛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공급되어야만 한다. 즉, 스룹바벨이 성령으로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것을 보여준다.

스가랴 4:6-7절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지도자인 스룹바벨에게 주어진 첫 번째 신탁의 내용이다. 스룹바벨이 사람의 힘과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영으로 성전건축을 마무리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즉 순금 등대에 계속해서 기름을 공급하는 이상은 성전건축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계속 공급하여 주심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공급하실 것은 곧 “하나님의 영”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힘’이란 육체적 힘을 의미하며, 발전된 의미로 “보화”(스가랴 14:14)를 의미하기도 하고, 에스겔 17:17에서처럼 “군대”로 번역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성전건축을 완성하는 것이 인간의 육체적 힘, 재력 또는 군사력이 아님을 선포하는 것이다. “능” 또한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 두 표현을 함께 사용하면서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성전이 완성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영”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단어 ‘루아흐’는 하나님의 인격을 의미하는바, 이는 그의 뜻을 알리고 인간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4:6절은 하나님의 임재와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서만 성전건축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성전건축이 확실히 이루어지게 되리라는 약속의 말씀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성전건축이 연약한 인간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성전건축의 장애 또는 방해는 스룹바벨 앞에 놓여 있는 큰 산으로 표현된다.(참고 스 4:2-4, 24). 큰 산이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어 제거될 것을 약속한다.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 앞에서는 어떠한 장애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리가 은총을 외치는 가운데 스룹바벨이 건축을 마무리하는 머릿돌을 놓게 된다.


  두 번째 신탁의 내용은 4:9절에 스룹바벨이 성전건축을 마무리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전한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성전건축을 이루실 것이지만 스룹바벨을 통하여 성전의 기초를 놓으시고 그를 통해 성전건축을 완성하실 것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10절에 보면 그들의 성전건축 사역을 "작은 일의 날"이라, 이것을 학개서에서는 “보잘것없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학 2:3). 그리고 그때의 성전 재건은 원수들의 방해로 인하여 미천(微賤)해 보였다.

복음 운동이 역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천한 것이다.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 공사가 그때에 미약해 보였으나 필경 완성될 이유는,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 곧, 성령께서 그 일을 성사(成事)시켰기 때문이다. “일곱”은 완전을 의미하는 수(數)이니, “일곱 눈”은 성령을 비유한다.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는 것은, 성령, 곧, “일곱 눈”이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 공사를 위한 다림줄을 기뻐 하신다는 뜻이다.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완성되는 것이다. “큰 산”이 외부에서 오는 방해를 의미한다면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태도는 내적 어려움을 나타낸다. 즉, 스룹바벨은 외부와 내부에서 오는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하나님의 신으로 성전건축을 마무리하게 되리라는 약속의 말씀이다.2) 이 말씀대로 성전은  다리오 왕 6년,아달월 3일에 완성된다(스 6:15).

  11절의 “등잔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이다. 다시 12절에서  “기름을 흘리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기름 발리운 자(또는 부음을 받은 자) 둘”을 의미한다. 이들은 순금 등대에 금 기름을 풍부하게 공급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즉, 대제사장과 정치적 지도자가 같은 위치에서 하나님의 원동력을 공급하는 통로가 되리라는 것이다.

  스가랴는 왕과 제사장이 기름 부음을 받을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히브리어 ‘사만’이 아닌 ‘이츠하르’라는 단어를 4:14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이 단어를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와는 다른 표현인 “기름 발리운 자”로 해석하기도 한다.3) 기름 부음 받는 사실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기름을 공급하는 그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의도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기름 발리운 자 둘”에 대한 언급은 대제사장과 지도자의 상호보완적 역할을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성전건축 사역이 인간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이며, 그러므로 성전건축이 필히 마무리될 것임을 예언하는 것이다.


6) 여섯 번째 환상(5:1-4)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죄인의 심판)

   5장에서는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죄가 여전히 그들 가운데 있음을 보여 주었으며, 스가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도덕적으로 바른 삶을 살도록 촉구하였다. 스가랴에게 보여준 환상은 전반부(1-4절)에서 날아가는 두루마리4) 환상을 보여 주고, 후반부(5-11절)는 에바 속에 있는 여인에 대한 환상을 기술하고 있다.

  전반부는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환상과 천사의 설명이 이어지는데,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5:3)는 말씀이었다. 환상에서 “이쪽 글”과 “저쪽 글”이라고 함은 요한계시록 5:1절에 나오는 두루마리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의 두 판에 기록하였던 율법의 두 돌판을 연상시킨다(출 32:15). 스가랴가 본 두루마리에 적혀 있는 율법은 출 20장에 기록된 십계명 전체를 대표한다. 본문에서 ‘저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알라’에 특정한 ‘저주’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는 정관사가 붙었다고 하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2절에서 두루마리의 크기가 매우 컸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길이가 20규빗이요 너비가 10규빗”이라는 것은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이 장이 60규빗, 광이 20규빗, 그 성소의 앞의 낭실((porch)의 크기가 장이 20규빗, 광이 10규빗이라고 하니 두루마리의 크기가 제사장들이 항상 여호와의 율법을 읽었던 장소, 낭실의 크기와 동일 하였음을 보여준다(왕상6:2-3). 매우 컸던 두루마리의 환상은 두루마리에 쓰인 내용이 변경할 수 없는 절대적 권위를 갖고 있음과 심판에 대한 주체가 하나님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의 정도나 범위를 보여 주는데, 하나님으로 시작한 저주의 말씀을 뜻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매우 크고 극에 달할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두루마리가 본래는 날아다니는 물건이 아닌데도 두루마리가 “날아가는”(5:2) 것은 저주의 말씀이 그들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5:4) 저주의 말씀이 떠나지 않고 완전히 망할 때까지 나무와 돌을 불사르는 심판의 철저함에 대한 언급이다. 심판의 범위는 “온 지면”(5:3), “시날 땅”(5:11), “이 땅”(3:9), “온 세상”(4:10)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의 죄악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세상의 죄악을 심판하신다

두루마리 환상을 통해서 징계의 불가피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저주의 대상은 십계명을 어긴 자들이었는데, 이를테면 탐심을 갖고 물질에 눈이 어두워 남의 것은 물론 하나님께 바쳐진 것까지 도적질한 자들이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에게서 매우 비난받던 죄였다(말 3:8; 느 13:10). 또한 거짓 증언을 함으로써 의를 벗어나게 하는 자들, 즉 ‘거짓 맹세하는 자’들과 도적질과 함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간악한 세대들에 대한 저주였다. 이는 도적질과 망령된 맹세에 대하여 각각 ‘고네브’(도적질하고 있다 5:3)와 ‘니쉬바아’(맹세하고 있다, 5:3)와 같이 ‘계속적 행동과 반복적 행위를 뜻하는 분사형’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은 두루마리에 회개하지 않고 계속하여 죄를 짓는 자에 대한 저주를 기록하여 이들을 벌하실 것임을 밝히시고 있는 것이다.

  

7) 일곱 번째 환상(5:5-11)-시날 땅에 옮겨지는 바구니 속의 여인

   무엇을 보고 있느냐는 천사의 질문에 스가랴는 일곱 번째 환상 중에 공중에 떠다니는 측량 바구니, 곧 에바5)를 보았다고 답한다(5:6). 그 에바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죄의 분량을 상징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부정직한 방법으로 돈을 착취하고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의 악을 상징하였다. 에바를 사용하여 저울을 속이고 도량형을 속임으로써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속임수의 도구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 덮개 안에 한 여인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5:7), 여인은 ‘악’을 상징하였다(5:8). 여인을 악으로 표현하는 이유에 대하여는 히브리어로 ‘악’(라아) 이라고 하는 용어가 여성형이기 때문에 악을 의인화하였다는 견해(K. L. Baker, J. Baldwin)와 ‘악’이 우상숭배를 뜻하는 것으로 ‘행음’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여인’으로 묘사하였다고 주장하는 견해(H. G. Mitchell), 그리고 구약에서는 타락한 이스라엘을 음란한 여인으로 취급했던 것처럼 악한 이스라엘을 뜻한다는 견해(Lange)가 있다. 또한 ‘악’을 상징하는 ‘여인’을 에바 속에 던져 넣어 납으로 된 뚜껑으로 덮었다는 것은 악을 감금시켜 놓았음을 의미한다.

  9절에서 ‘학의 날개와 같은 날개’를 가진 정체불명의 두 여인이 나와서 에바를 바빌론, 즉 시날 땅으로 옮겨갔다. 두 여인은 하나님께서 악을 제거하시는 모습을 묘사한 점으로 보아 에바를 옮기는 ‘두 여인’은 ‘하나님의 사자’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두 여인에게서 볼 수 있는 ‘학의 날개와 같은 날개’는 단순히 악을 상징하는 여인이 담긴 에바를 옮길 수 있는 능력이 두 여인에게 있었음을 보여 준다. 두 여인이 에바를 옮긴 장소는 바빌론의 옛 이름이기도 한 시날 땅이었다. 앗수르인은 이 땅을 ‘수메르Sumer)라고 불렀다. 이 땅은 니므롯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인간의 왕국, 즉 바벨탑을 쌓았던 곳이다(창 10:10-11). 또한 이스라엘이 유배 갔던 곳이기도 하며, 우상숭배와 죄악 그리고 반역의 땅에 대한 대명사였다(계 17:3-5). 귀신과 영들이 거하는 처소이기도 하였다(계 18:2). 그래서 70인역은 ‘시날 땅으로’를 ‘바빌론 땅으로’(to the contry of Babylonia)라고 번역하였다. 즉, 에바를 옮겨간다고 하는 것은 악이 제거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거하는 곳과 분리되어 이스라엘에서 악을 제거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들이 거할 ‘집’과 ‘제 처소’는 에바가 우상으로서 산당이나 신전에 세워질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K. L. Baker). 바빌론의 우상들은 ‘무력함’의 상징으로, 이는 이사야의 풍자에 자주 나타나기도 하였다(사 44:9-30; 46:1-2). 즉, 스가랴는 이스라엘에서 악이 제거된 거룩한 나라에 대한 환상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8) 여덟 번째 환상(6:1-8)-네 병거 환상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오는 것을 본다. 여기서 두 산은 하나님께로 통하는 ‘하늘의 문들’(doors of heaven)을 가리킨다.6) 두 산은 높은 산이었다. 여기서 놋산은 놋으로 만들어진 산이라기보다는 새벽 여명에 반사되어 산의 색깔이 놋빛을 띤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 번째 환상에서는 시각이 어두운 계곡의 그늘 속 화석류나무가 강조된 한밤중인 반면에(슥 1:8) 마지막 환상은 여명이 밝아오는 놋산을 강조함으로써 그 시각이 새벽녘을 알 수 있다.7) 이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두움의 역사에서 벗어나 희망의 새 시대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8) 병거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으며 때로는 강력한 통치력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네 병거는 각기 서로 다른 말들이 끌고 있었다. 첫째 병거는 홍마, 둘째 병거는 흑마, 셋째 병거는 백마, 넷째 병거는 어룽진 말들이 매여 있었다.

  스가랴는 네 병거에 네가지 서로 다른 색깔의 말들이 매여 있는 것을 보고 해석 천사에게 이것들의 의미에 대하여 질문한다(4절). 천사는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5절)고 그 의미를 풀어 주고 있다. 여기서 바람은 ‘루아흐’다. ‘네 영’이다.

  이 네 바람은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온 세상을 향하여 가도록 지시 받았다(시 104:4 참고 렘 49:36; 7:2). 그들의 임무는 첫 번째 환상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 땅을 정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낸 자들 가운데 북쪽으로 나간 자들의 보고만 기록되어 있는 것(8절)으로 보아, 스가랴가 본 네 병거 환상의 주된 관심은 북쪽의 일이다. 아마도 바빌론 지역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한 곳이었기 때문에 북쪽 지역이 주된 관심으로 부각 되었을 것이다.

  북쪽으로 나간 자들의 임무 수행에 대하여 “북쪽으로 나간 자들이 북쪽에서 내 영을 쉬게 하였느니라”(8하절)는 평가가 내려진다. ‘내 영’은 히브리어로 ‘루히’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보면 ‘나의 영’ 즉 ‘하나님의 영’을 말한다. 또한 ‘쉬게 하였느니라’는 히브리오로는 ‘머문다’(to settle down on)를 뜻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이 북쪽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북쪽은 바빌론을 가리킨다. 사실 바빌론에 머물러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그곳에 어렵게 정착하여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었고(참고 렘 29:1-7), 고국에서 맞이할 불확실한 미래가 두려워서 본국으로의 귀환에 소극적이었다. 따라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병거는 바빌론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노를 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지역에 유배된 이스라엘 사람들을 귀향시키거나 그들을 감동시키기 위해서 여호와의 영을 내리는 것이었다(참고 슥 2:6-13; 8:7-8, 20절 이하). 여기서 하나님의 영은 ‘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적인 영향력’(겔 37:1-14)을 뜻한다.9)

   스가랴는 최근 바빌론에서 귀환한 세 사람, 즉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를 만나서 그들에게서 은과 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고 그것을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다(11-12절). 이것은, 선지자 스가랴를 시켜 상징적 행동을 취하도록 하여, 메시아 예언을  대신케 한다.  바빌론에서 돌아온 자들 중 위에 지명된 세 사람이(14절에는 스바냐의 아들 헨까지 4명) 성전 건축을 위하여 바빌론에 남아 있는 동포들에게서 금품을 모집해 온 듯하다. 선지자는, 이제 그들을 찾아가서 그 금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도록 명령을 받았다.

  이유는. 그들은, 귀환 유대인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높은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예루살렘 재건 약속을 불신앙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귀정시켜 신앙으로 많은 유대인들을 바로 인도하도록 하시려고, 그들에게 스가랴를 보내어 이 일을 하게 하셨다(Calvin). 하나님께서는, 스가랴의 이와 같은 상징적 행위로써 여호수아의 대제사장 직분 실행(성전 재건)의 확실성을, 그들에게 보여주시어 그들의 신앙을 강화시키신다.

  여호수아에게서 예표된 사람은, "순"(가지, Branch) 곧, 메시아라는  의미에서(3:8 해석 참조), 선지자로 예언케 하신다. 사 11:1 참조. “자기 곳에서”라는 것은 “자기의 아래로부터”라고 직역되나 실상 자기의 고향(메시야가 나시기로 약속된 곳이니 베들레헴)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겸하여, 아래로부터 (미천한 데서부터) 자라남을 암시하기도 한다(Keil and Delitzsch).

 

3. 말씀으로 임하시는 하나님(7장-8장)

이제까지는 환상으로 보여주셨다면 7장부터는 말씀으로 들려주신다.


1) 헛된 의식을 배격하라(7:1-7)

  귀환공동체의 대표들은 518년 스가랴를 찾아와서 금식에 대한 질문을 한다. 3절에서 매년 오월에 하는 금식을 계속해야 합니까? 그들은 금식을 나타내는 직접적인 단어인 ‘쫌’( fasting)을 쓰지 않고, “울며 재계하다”(바카 to weep, 나자르 separate oneself, to fast)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들은 금식은 애곡하고 재계하며 회개하는 것을 의미하였다(삼하 12:16; 레 16장), 레위기 16장에서는 금식을 가리키는 말로 ‘아나’( afflict one's soul, 스스로 괴롭게 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레 16:29, 31). 하나님은 직접적인 대답을 주시는 대신에 질문 자체를 바꾸어 문제의 본질을 가르치신다. 그 금식이 누구를 위해서냐? 즉 금식의 시기가 문제가 아니라 금식의 정신(동기와 목적)이라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헌신의 삶 자체가 중요 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근본적인 목적이어야 한다. 


2) 과거 불순종을 기억하라(7:8-14)

  스가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금식의 온전한 자세와 선민의 바른 삶의 모습을 포괄적으로 선포한다. 또한 실천 명령은 “만군의 하나님”, 즉 “절대적 능력의 하나님”의 명령이다(7:9, 참고 슥 :1, 9).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적극적 헤세드를 베풀라. 그러나 백성들은 청종하지 않았고, 징벌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선민에게 온전한 삶의 변화를 동반한 회개를 원하신 것이다. 이것이 예언적 명령의 본질적 요소다(호 4:1-10; 8:11-14; 암 2:6-7; 5:10-15; 24; 6:4-8; 8:4; 미 6:8; 사 1:17; 65:1-7; 렘 9:1-9; 17:10-11; 22:13-17).

10절에서 마음의 문제를 다룬다. 마음을 온전히 다스리는 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다(미 2:1-3; 잠 4:23; 렘 17:9-10;막 12:28-31; 마 15:18; 눅 6:43-45). 따라서 사회적 문제 해결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사탄에 대한 해방에서부터 시작 될 수 있다.(슥 1:3-4).

11절의 “등으로 돌리며”는 등을 돌려 거역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느헤미야 9:29에 목에 멍에를 쓰지 않으려고 완강히 버티는 소의 이미지에서 온 표현이다(호 4:16).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는 이사야 6:10의 내용과 같은 표현으로서 그들의 돌처럼 굳은 강퍅한 심령을 나타낸다.

  3) 위로와 회복에 대한 약속(8:1-17)

  바빌론에서 귀환하는 백성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말씀을 선포한다[8:7, 8, 9, 13, 15,  “두려워 말지니라”8:9, 13, 15절)].

  하나님은 천지 만물의 절대적 주권자이시며 전쟁의 주관자요, 권능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8:1). 그리고 2절에서는 언약백성을 강렬하게 사랑하시며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선포한다. 질투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카나’의 어원적 의미는 격렬한 감정으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말한다(become red or black). 그의 사랑하는 백성이 언약을 파기하고 하나님을 떠날 때 하나님의 격렬한 사랑은 이스라엘을 징벌하는 역사로 나타난다(신 29:20-28; 수 24:19; 겔 5:13; 16:38, 42; 23:25). 여기에서는 예루살렘에 대한 강한 사랑으로 표출된다(사 54:7-8; 55:6-7). 하나님은 열정의 하나님이시며 열정으로 충성하기를 원하신다(신 4:23-24; 6:4-5; 11:13-21; 26:16-19; 30:2 계 3:16-16).

  “진리의 성읍”과 “성산”(8:3)이라는 새 이름을 얻을 것이라는 것은 예루살렘이 신실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새로운 도성, 정화된 도성, 거룩하게 구별된 도성이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선포하는 것이다. 여기에 “진리”라고 번역되어 있는 히브리어 ‘에메트’는 견고하여 흔들림 없는 믿음(to be firm, dependable, truthful)을 의미한다. 충성스러운 믿음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성산에서의 ‘성’(코데쉬 거룩)이라는 말은 본래 ‘구별하다’(카다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구별된 도성이 될 것임이 선포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도성에 임재하시어 역사하실 것을 선포하신다.

  예루살렘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소년이나 노인이 함께 상생할 수 있는 복된 세상이 될 것임을 약속하신다(8:4-5절).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야 어찌 기이하겠느냐”(6절) “기이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이팔레’( be too difficult, 너무 어렵다)인데 “여호와께서 불가능한 일이 있겠느냐”(창 18:14)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온 세상에서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도성에 살게 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하나님이 그들과 새로운 언약 관계를 맺으실 것이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성실과 공의로 그들을 다스리실 것을 약속하신다. 그들의 축복은 영원히 보장된 것이다. 7절에서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낸다”는 표현은 히브리어로는 ‘히넨니 모쉬아’인데, 이 표현은 ‘보라’(히넨니)와 ‘구원한다’(모쉬아 히필형 분사)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 표현은 특히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확실성과 임박성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하시어 그들로 세상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실 것이다(창 12:3; 사 49:6; 고전 15:58; 살전 3:5; 렘31:16; 대하 15:7).

  8:15절의 “은혜를 베풀기도 뜻하였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레헤이팁’[ to do good: 야타브(going well)의 히필형 부정사]인데, 이 말은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되어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수 24:20; 사 1:17; 암 5:6, 14; 습 1:12; 겔 36:11). 이것은 하나님이 언약의 수여자임을 나타내는 말로서, 이스라엘 편에서는 하나님이 하사하신 언약의 수혜자로서 이 언약에 충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선포된다.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이니라”(8:16-17).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미워하신다고 선포하신다. 이것은 율법의 정신이며(출 20:1-17; 23:1-13; 레 19장; 신 10:18; 14:29; 16:11, 14, 18-22; 24:17-20).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마 5:13-16; 25 8:17절에서는 스가랴 7:10과 마찬가지로, 특히 마음의 문제를 다루면서 우리의 모든 죄 된 행위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강조한다(출 20:17; 사 1:19;렘 31:33; 겔 36:26-27; 시 51:17; 84:1-2; 잠 4:23; 16:32; 마 5:3; 12:34; 15:11, 17; 눅 6:43-45; 고전 13:6; 엡 4:30-32).


4) 유다의 회복(8:18-23)

   삶의 방식이 요구된다. 그것은 ‘성실’(에메트)을 사랑하고 ‘평화’(샬롬)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언적 명령이요, 영원한 축복을 풍족히 누리는 진리의 길이다(슥 1:6). 성실은 하나님에 대한 충실을 의미하며, 평화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 사이의 온전한 관계를 의미한다. 이 예언적 명령은 8:16-17의 내용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스가랴는 세상 만민이 주께 기도하고 은혜를 얻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모일 것임을 선포한다(슥 2:10-11; 6:15: 8:20-23; 9:7; 13:8-9; 14:16-17).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한 이방 민족들을 징벌 하신다(슥 1:15, 18-21; 2:9; 사 13:17-19; 14:24-27; 21:2; 8-9; 렘 50:29; 51:24-25). 그러나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그들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사 2:1-4: 19:23-25; 49:22-23; 60:1-3; 미 4:1-5; 렘 4:1-2). 이것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이유다(창 12:1-3; 시 47:9; 갈 3:8). 23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베푸신 축복과 은혜에 감동하여 그들도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고 고백할 것임을 선포한다.  23절에서, “말이 다른 이방 사람 열 명이 유다 사람”에게 와서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하심을 고백할 때가 올 것임을 선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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