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쿰란 공동체와 초기 기독교 비교

쿰란 공동체와 예수

호리홀리 2015. 3. 11. 12:58

(3) 쿰란 공동체와 예수

1. 종말론

- 쿰란 공동체의 신학과 예수의 신학은 절대적으로 종말론적이다.

- 양자는 모두 임박한 종말론을 선포했으나 예수의 종말론은 좀더 실현된 종말론적 성격 을 띠고 있다.(Charlesworth 70)

- 근래에 들어 예수의 종말론적 배경은 현재와 미래의 조화에 의해 드러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는데, 이는 구원이 한편으로는 바라는 희망인 동시에 이미 경험된 것이라는

뜻이다.

- 이러한 사상은 '공동체의 찬송'과 당시의 유대문헌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O'Connor

57).

- H.W.Kuhn은 단도직입적으로 쿰란 공동체의 종말론과 예수의 종말론 사이에는 뚜렷한 연관성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 까닭은 예수에게 있어서 구원의 현재성이 그의 활동 내에서 존재한다는 데 비해 쿰란 공동체는 미래의 구원이 이미 공동체 내에 현존한다 고 생각하기 때문이다(O'Connor 58).

2. 메시야관

- 쿰란 공동체의 메시야관(D.S.Russell 147-49)

① 제사장적인 메시야와 왕적인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다.

② 사독(Zadokite) 단편들에 아론과 이스라엘의 메시야 도래에 관한 언급들이 있다.

③ 사해사본에 나타난 단수 단어가 실제로는 복수단어로 읽혀졌는데, 이는 저자가 두 사람 이상의 메시야를 대망했음을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아론과 이스라엘의 메시야들과 한 예언자가 올 때까지..(훈련교범 Col.9, 제11행).

④ 결론적으로 쿰란 공동체의 메시야 대망은 유대의 전통적 희망인 왕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야를 기대하는 점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 예수는 자신을 메시야로 인식하고 있었고, 초대 기독교 공동체 역시 예수를 그들이 대 망하던 메시야로 인정했다.

- 쿰란 공동체에 있어서 '의의 교사'는 메시야로 생각되지 않았으며, 그 메시야는 후에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Filson 135).

3. 부자들에 대한 태도

- 예수가 부유함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사실(마 10:9)과 쿰란(엣세네) 공동체가 개인 의 풍요로움을 피했던 사실(Josephus,J.W.2.8.4 //142-26)에서 유사성을 엿볼 수 있다 - 예수의 사상이 쿰란 공동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확언할 수 없는 것은 양자 모두 의 자세가 구약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 예수의 사상은 쿰란(엣세네) 공동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는 있으나, 그가 단순히 행한 것을 제자들에게 소개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O'Connor 58).

4. 환자 치유시에 손을 얹는 행위

- 예수가 치유 혹은 축사를 할 때에 환자에게 손을 얹는 행동과 유사한 모습을 유대문 헌에서 찾는다면 쿰란문서 1QapGen 20.22,29에서만 언급되어 있을 뿐 다른 유대문헌

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 엣세네 공동체가 의술에 관심을 가진 것은 요세푸스에 의해 강조되었다(J.W.2.8.6 /

136).

5. 안식일에 관한 문제

- 안식일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예수의 견해는 쿰란(엣세네) 공동체와 의견을 완전히 달 리하고 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다(막 2:27).

같은 날, 그(예수)는 안식일에 일하는 한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말하였다.'사람아,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너는

축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네가 그 일을 모르고 있다면 너는

저주를 받으며 율법을 어긴 자이다(눅 6:5 Codex D).

이렇듯 안식일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안식일 준수에 대한 반대가 아닌 안식일의 본래 적인 의미를 퇴색시킨 데 대한 것이다.

- 쿰란 공동체에 있어서 안식일의 준수는 바리새파의 그것보다 훨씬 더 엄격하였다.

쿰란 공동체에서는 안식일에 어떤 물건을 다른 친구에게 빌려주거나, 조약돌을 들어올 려서도 안되었으며, 집의 먼지를 터는 행위 역시 금지되었다(CD 10.14-11.18).

- 한편 마태복음 12:11에 나타난 예수의 언급과 다마스커스 문서에 나타난 조항은 정확 하게 대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너희 사람들에게 묻겠다. 만일 누군가 양 한 마리를 갖고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날 구덩이에 빠졌다고 한다면 그 양을 들어 올리지 않겠

느냐?(마 12:11).

나는 구덩이에 그 양을 두고 떠나겠다(CD 11:13-14).

쿰란 공동체에서는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짐승을 도와주지 말라고 엄히 경고한다.

- 요세푸스 역시 엣세네파는 "다른 유대종파보다 더 엄히 안식일을 지킨다."라고 증언한

다(War 2.8.147).

- 이로 미루어 볼 때에 예수는 쿰란 공동체와는 달리 그의 행동에서 안식일에 대한 매우

자유로운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6. '산상수훈' 중 '가난한 자'에 대한 문제

- 마태와 누가의 복음서에서 언급한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가난한 자'와 '심령이 가난 한 자'의 개념은 쿰란 문서에서 기술적 형태로 사용해 왔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마 5:3).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들을 위한 것이다(눅 6:20b).

- 필로(Apologia pro Judaeis 11)와 요세푸스(War 2.8.122)는 모두 엣세네 공동체가 검 소한 삶을 살았으며, 모든 사치와 풍요로부터 분리된 삶을 살았다고 증언하나 '심령이 가난한 자'혹은 '가난한 자'라는 비유적 의미는 찾아볼 수 없다.

- 쿰란 문서에 의하면 '가난한 자('ebhyon)'라는 종말론적 전쟁에서의 영광스러운 승리 와 연관지어서 자신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너희 구속받은 가난한 자의 손으로...(1QM 11.9 cf.11.13;13.12-14).

- 또한 쿰란 공동체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말 역시 자신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 하고 있는데, 이는 전쟁 문서에서 '그 길의 완전'이란 말과 동일시되고 있다.

- 이들 공동체의 설립자인 '의의 교사'는 '사악한 제사장'으로부터 육체적, 정신적인 고 통을 당하고 결국은 성전에서 추방되어 추종자들을 이끌고 광야에서 자신들만의 공동 체를 만들었다. 그는 광야에서 그의 종을 구원하고 '가난한 자의 삶'을 살게하신 하나 님께 감사하는 찬양을 지었다. 즉 '의의 교사'는 스스로를 '가난한 자'로 이해한 것이

다.

그리고 당신(오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생명을 사자의 굴에서 구원

하셨나이다.

그는 칼같이 그의 혀를 갈고있었나이다.

오 나의 하나님, 그리고 당신은 그들이 가난한 자와 거지의 생명을

찢어 갈기지 못하도록 그들의 이빨을 다물게 하셨나이다.

그리고 당신은 칼과 같은 그들의 혀가 당신의 종의 생명을 죽이지

못하도록 칼집에 강제로 집어넣으셨나이다(1QH 5.13-15).

- 후에 '가난한 자'의 개념은 쿰란 공동체 전체에 해당하게 되었는데, 그 때는 "은혜에

가난한 모두"(1QH 5.22)라는 개념으로 자신들을 언급하였다.

- 마가의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쿰란 공동체 역시 하나님 나라에서 의 유익을 위해 모든 추종자들이 가난하게 될 것을 명했다.

가라.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하늘에 보물이

있게 하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 10:21).

(5) 쿰란 공동체와 요한복음

- W.F.Albright가 요한복음과 쿰란문서의 특징적 어휘 중 접촉점이 될만한 몇 가지 용어 들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빛의 아들들", "생명의 빛", "어둠에 다님", "진리를 행함", "하나님의 일" 등

- 요한은 쿰란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우주를 빛과 어두움, 선과 악, 진리와 거짓 등이 첨예하게 대립한다고 본다(Bruce 222).

- 다마스커스 문서에서는 세계를 지배하는 창조된 두 지도자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하 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이며, 다른 하나는 미워하는 자라고 언급한다.

사랑하는 자 : 진리의 영, 빛의 왕, 하나님의 진리의 사자, 성령.

미워하는 자 : 타락의 영, 어둠의 천사, 파괴의 사자, 벨리알.

- 요한은 쿰란문서의 사상과는 달리 창조된 빛의 영을 거부하며, 빛의 세력의 지도자는 창조되지 않은 영원한 로고스인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오 병세 129)

- 요한과 쿰란의 유사성은 빛과 어두움의 투쟁에서 빛의 궁극적인 승리를 내다보는 종말 론적 이원론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요한과 쿰란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공의 실현에 있어서 쿰란은 악의 세력과의 투쟁을 강조하는 반면 요한은 투쟁적인 부분보다 성육신한 로고스이신 빛이 어두움에 속한 자들을 그에게로 초청한다는 사상을 담고있다(G.E.Ladd 269).

(5) 쿰란 공동체와 초대교회 공동체

- 두 공동체는 모두 스스로를 진정한 이스라엘이며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설립된 공동체 라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마음에 든 선택받은 사람들..(1QS 8.6).

당신의 기뻐하심을 입은 아들들.....(1QH 11.9).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눅 2:14).

- 두 공동체 사이의 유사점

① 쿰란 공동체가 의의 교사의 인도를 통해 시작되었듯이 초대교회 역시 성령강림으로 시작되었다(1QS 3.13ff; 행 2:38).

② 입회할 때에 사유재산을 바쳐서 이를 공동으로 관리하게 하였다(1QS 1.12;행 2:44).

③ 쿰란 종파는 12명의 족장들에 의해서 인도되었으며 종파의 최고 위원회는 12명의 평 신도들과 3명의 제사장으로 구성되었다(1QSa 1.27-2.1; 1QS 8.1). 초대교회 역시 핵 심사도 3사람을 포함한 사도, 장로들의 지도하에서 운영되었다(행 15:6).

- 두 공동체 사이의 차이점(Bruce 227-8)

① 쿰란 공동체와 초대교회 공동체는 동일하게 물로 씻는 정결의식을 가졌지만 기독교 적인 독특하고도 영원히 한번만 가지는 요소를 쿰란 공동체는 갖지 않는다.

② 두 공동체는 공동식사를 가졌는데, 기독교의 성찬과 같이 성례전적이며 기념적인 요 소가 쿰란 공동체에 있어서는 결핍되고 있다.

③ 초대교회 공동체에 있어서 물건과 재산 통용은 쿰란과 같이 강제적인 것이 아닌 자 발적 성격이 강하다.

④ 쿰란 공동체는 자신들을 외부와 격리시킴으로서 자신들의 거룩함을 지키려 한 반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모든 종류와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과 사귀었으며, 그들을 향 한 선교에 열심이었다는 점이다.

IV.

-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쿰란 공동체와 초기 기독교 공동체 사이에는 수많은

유사성과 차이점이 나타난다. 이 중 어느 한 방향으로만 치우쳐도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사

상적 배경을 놓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 드러났듯이 쿰란 공동체와 초

기 기독교 공동체 사이에 나타난 여러 사상적, 생활의 유사성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쿰란 공동체의 영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더우기 쿰란 공동체의 말기와 기독교의 출발점이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은 두 공동체의 연관

성에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