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공관복음의 제자도

1.마태복음의제자도

호리홀리 2015. 2. 26. 13:13

                                                      제목:공관복음의 제자도 비교


1.서언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은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볼 때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마가가 제자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상대적인 견지에서 볼 때 다른 복음서에서보다는 보다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반면에, 누가복음에서 제자들은 비교적 긍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누가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신하여 도망한 사실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은 이에 대한 가장 큰 증거 중 하나로 지적될 수 있겠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과 비교해 볼 때,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일방적으로 긍정적이지도 않고 또한 일방적으로 부정적이지도 않은, 양면적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런 마태복음의 제자상(弟子像)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마태가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에서의 부정적 제자상을 어떻게 완화 내지 약화시키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여전히 부정적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는지를 또한 검토하겠으며, 마지막으로 그 어느 한 쪽으로 치우지지 않으면서 양면적 성격을 띠게 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2.마태복음의 제자도
1) 제자들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

마태는 일반적으로 부정적으로 표현된 마가의 제자도를 긍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제 아래에서 우리는 마태복음의 이런 특징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몇 가지 대표적 예를 들어 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마가복음 8장 14절부터 21절까지에는 '바리새인의 누룩'에 대한 주님과 제자들간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특히 17절은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다: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즉 세 번에 걸쳐 제자들의 몰이해를 나무라고 계신다. 그리고 막8.21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비난이 계속되는 것을 보게 된다: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한 마디로 일방적인 부정적 묘사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병행되는 마태복음의 기사를 보게 되면, 먼저 막8.17에 해당되는 구절에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16.8-9a)라고 기록함으로써 상당히 그 비난의 정도를 약화시키고 있고, 또한 막8.21에 해당하는 마16.12에서는 마가복음에서와는 달리 제자들이 예수님의 교육을 통해 비로소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이러한 마태와 마가의 제자들 묘사의 차이를 감안(勘案)할 때 우리는 마가의 제자들 묘사가 얼마나 부정적인지 발견하게 되며, 동시에 마태가 이러한 마가의 부정적 이미지를 얼마나 완화시키고 있음을 아울러 발견하게 된다.

둘째, 마가복음 10.35-45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城)에 들어가시기 전 제자들 중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주님께 나아와, (그들 생각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면 얻게 될 영광의 일부를 함께 나눠갖고 싶다는 그들의 세속적 소원을 아뢴 장면이 나온다. 마가복음의 순서를 따른다면, 이제까지 예수님께서는 세 번에 걸쳐 예루살렘 입성 후 맞게 될 자신의 수난적 운명을 교육시켰건만, 제자들은 여전히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입성 바로 직전까지 여전히 그들의 몰이해(沒理解)와 세속적 욕망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마20.20-29) 이런 인간적 욕망을 요청하는 장본인이 제자들이 아니라 그들의 어미로 바뀌어지면서 아예 두 형제 제자들의 이름조차 생략되어 나타나고 있다(20절: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 따라서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님의 가르침을 몰이해한 부정적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지 않다. 마태의 이런 변화는 제자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자 하는 또 다른 증거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세째,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예언과 관련하여, 막10.32에서는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놀라고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반해, 마20.17에서는 제자들의 그런 부정적 모습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음에 우리는 유의해야 할 것이다.

네째, 막9.33-37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실례로 들면서 겸손의 교훈을 가르치시고 계시는데, 이는 이런 교훈이 있기 이전에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크냐?'는 다툼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었다(33-34절). 그런데 문제는 이 다툼이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예언 바로 다음에 나타나고 있는 데에 있다. 즉 예수님의 거듭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난당할 예수님의 운명이 곧 자신들의 운명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는 어리석고 욕심많은 모습으로 나쁘게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하여, 마태에서는 겸손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이 소개되고는 있지만, 제자들 사이의 순위(順位) 다툼이 그 배경으로 소개되고 있지는 않다(마18.1-5). 즉 무지한 제자들을 교정(矯正)하는 차원에서 비롯된 말씀이 아닌 것이다. 이 역시 제자들에 대한 긍정적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는 대목인 것이다.


2) 제자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그러면 이제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이 마가복음에서처럼 여전히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대목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마21.21은 예수님의 저주로 메말라버린 무화과 나무를 바라보면서 제자들이 주께 던진 질문에 대한 답변인데, 제자들의 믿음의 부족을 꾸짖는 것이 마가복음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막11.23).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서 열 한 제자들 다시 만나셨을 때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고 있었다(마28.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이런 제자들의 부정적 이미지는 막16.14과 눅24.36-43에서도 역시 발견된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처럼 마태복음에서도 제자들은 로마 군병에게 무고(無辜)하게 체포되신 스승을 저버리고 모두 도망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막14.50//마26.56). 이와 함께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네 번에 걸쳐서 그들의 적은 믿음으로인해 주님으로부터 책망받고 있다(8.26; 14.31; 16.8; 17.20). 또한 주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마음은 여전히 굳어있었다(마13.2-3, 10-17, 34-36).

이런 일련의 구절들을 종합해 볼 때,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비록 마가복음에서보다는 나을는지 모르겠지만, 역시 그 부정적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3) 양면적 이미지의 제자상(弟子像)

이제까지 우리는 위에서 마태가 소개하고 있는 제자들에 대한 긍정적/부정적 이미지에 관한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이런 검토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은, 상대적으로 볼 때 마태는 마가보다 제자들을 보다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아울러 부정적 이미지를 완전히 제거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즉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모습으로 제자들은 마태복음에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양면적 성격이 마태의 제자 묘사의 특징이다.

(가) 마태의 제자 묘사의 특징인 이러한 양면적 성격에 대한 전형적인 경우를 우리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사건에서 발견하게 된다(마16.13-28). 마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의 대변자 역할을 하고 있는 베드로에 대하여 그가 한 신앙고백에 대하여는 전혀 칭찬이 없고, 오히려 장차 있을 수난을 예언하신 예수님을 책망한 까닭에 도리어 책망을 받는 장면만이 기록되어 있다(막8.27-38).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에 대하여 칭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수난을 예언하신 예수께 대한 베드로의 책망도 없음으로하여, 베드로에 대한 비난도 역시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렇게 볼 때 누가복음에서 베드로에 대한 묘사는, 비록 구체적인 칭찬이 없기는 하지만, 그러나 책망을 받고 있지 않은 까닭에 긍정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눅9.18-27).

이에 비해,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예수께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하는 고백을 함으로써,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7-19)라고 하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각별한 칭찬을 듣게 됨을 보게 된다. 이런 칭찬만을 참작(參酌)하게 되면, 베드로가 대표하고 있는 제자들은 마태복음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베드로는 칭찬만을 듣고 있지 않다. 마16.21에서 예수께서 장차 다가올 메시야로서의 자신의 수난(受難)을 선포하자 마가복음에서처럼 베드로는 예수님을 책망하게 된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절). 베드로의 이 책망의 말은 오직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이로 인해 베드로는, 마가복음에서처럼,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하는 예수님의 준엄한 책망을 받게 된다(23절). 이렇게 볼 때, 마태복음에서 베드로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칭찬을 듣기도 하지만, 아울러, 베드로에 대한 책망이 생략되어 있는 누가복음과는 달리, 제자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그리고 있는 마가복음에서처럼 책망도 역시 듣게 됨을 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마태복음에서의 베드로에 대한 묘사는 마가복음에서처럼 부정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누가복음에서처럼 긍정적이지도 않은, 즉 양면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베드로의 신앙고백 사건은 마태의 제자 묘사의 이런 양면적 성격을 가리키는 여러 특징 중 대표적 예인 것이다.

(나) 제자들에 대한 마태의 양면적 묘사에 대한 또다른 증거를 우리는 마태의 제자와 관련된 어휘 사용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마태가 제자들에 대하여 사용하고 있는 단어 중 독특한 것은 인데, 이는 우리말로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번역되어 있다(마6.30; 8.26; 14.31; 16.8).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마태가 제자들을 결코 '불신자'()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마태는 그 복음서에서 (13.58: "믿지 않음")와 (17.17: "믿음 없음")를 각기 한 번씩 사용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한 번도 이 단어를 제자들에 대하여는 사용하고 있지 않음에 우리는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런 특징을 명확히 보여주는 장면이 마태복음 17장 14절 이하에서 소개되고 있는 [간질병들린 소년 치유 사건]이다. 1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향하여는 를 사용하고 있는 반면에, 20절에서 귀신을 좇아내지 못한 제자들을 나무라시면서는 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의 이런 단어 사용을 통하여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마태에게 있어서 제자들은 믿음이 전혀 없는 무리들과 구별되는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믿음이 부요하여 칭찬을 받은 백부장(마8.10)이나 가나안 여자(15.28)와도 구별되는 그런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태에게 있어서 제자들은 믿음이 아주 크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믿음이 전혀 없지도 않은, 그저 믿음이 적은 자들인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이 양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다른 증거인 것이다. 요컨대,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믿음이 부요하여 칭찬만을 받는 긍정적 모습으로만 그려지지도 않고, 아울러 믿음이 전혀 없음으로하여 책망만을 받는 부정적 모습으로만 그려지지도 않는 것이다. 때로는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책망을 받기도 하는, 보통의 성도들을 대표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바로 마태복음의 제자들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마가복음에서의 제자들은 [기피/억제 모델](a deterrent model)로 표현할 수 있겠고,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누가복음에서의 제자들은 [이상적 모델](a ideal model)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양면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마태복음에서의 제자들은 [대표적 모델](a representative model)로 표현할 수 있겠다. 즉 칭찬과 책망을 아울러 받고 사는 보통의 평범한 성도들을 대변하는 본보기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다) 위의 사실에 보충하여, 마태가 소개하고 있는 대표적 모델로서의 제자상(像)을 지지하는 또다른 증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제자의 범위]에 관한 문제이다.

먼저 부정적 모델로서 소개되고 있는 마가복음의 제자들은 대체로 열두 사도와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 이에 대한 한 증거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열두 제자들에게는 주어졌으나, 외인(外人)에게는 비유로 주어졌다'고 하는 표현을 들 수 있다(막4.10-11). 즉 열두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제한적 그룹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밖에도 마가복음에는 제자들과 주님 간의 사적(私的)인 모임이 다른 복음서에서보다 더욱 많이 기록되어 있다(4.10; 4.34; 7.17; 9.28; 10.10; 13.3). 이것 역시 제자들이 제한적 무리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누가복음의 경우는, 그러나, 마가복음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일단 눅6.17에 의하면, 제자들은 허다한 무리로 소개되고 있다(). 이 허다한 제자들은 확실히 열두 사도들과는 구별되어 나타나고 있는데(cf. 눅6.13), 이는 이 허다한 제자들로부터 사도들이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눅10.2에는 70인 제자들의 파송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들을 가리켜 제자란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에게 준 명령을(10.4) 예수님의 사역 말미에 사도들에게 하신 교훈과(22.35) 비교해 보게 되면, 이들 칠십 인 역시 제자라 부를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이유는 눅22.35의 말씀은 열두 사도에게 주신 말씀인데, 거기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전대, 주머니, 신' 등은 열두 사도를 파송할 때 주신 명령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고(9.3; 지팡이, 주머니, 양식, 돈, 두 벌 옷) 바로 칠십 인들을 파송할 때 주신 명령 가운데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이제 제자들은 숫적으로 이미 칠십 인을 넘어서고 있다. 눅19.37에도 "제자들의 온 무리"()란 표현이 나오는데, 문맥상 역시 적지 않은 숫자임을 발견할 수 있다.

이상의 세 대목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누가에게 있어서 제자란 마가에서럼 제한된 소수의 무리(즉, 거의 열 두 사도)가 아니라, 공개적인 다수의 무리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유인즉, 사도행전에서는 이제 제자란 바로 '교회의 회중(會衆)'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행2.41; 6.1). 아울러 사도행전에서는 제자와 사도 사이의 구분이 이제 확립된 것처럼 보인다(2.41-42; 6.1-2). 이러한 사도행전에서의 '제자'란 단어의 사용 용례를 감안할 때, 누가-행전 두 권의 책의 저자인 누가가 전편과 후편에서 다른 의미로 '제자'란 단어를 사용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누가는 그의 복음서를 기록할 때 뒤이어 기록할 사도행전을 염두에 둔 채 이미 제자와 사도를 구분하여 사용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제까지 드러난 증거에 따르면, 제자의 범위에 관한 한, 마가복음은 소수, 누가복음은 다수를 가리키고 있다. 이 문제에 있어서, 마태복음은 또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중간적 위치에 놓여 있음을 보게 된다. 먼저 마태복음에는 누가복음에서처럼 "허다한 제자의 무리"란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 아울러 칠십 인 제자 파송 사건도 역시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에서처럼 제자를 적은 무리로 간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듯하나, 이런 가능성은 마8.21과 27.57에서 깨어지게 된다. 마8.21에서 열두 제자의 그룹 밖의 사람에게도, 즉 단지 예수님을 따르는 여늬 추종자에게도 제자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고, 마27.57에서는, 비록 동사적 형태이기는 하지만(), 아리마대 요셉에게도 제자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두 경우를 참작할 때 얻어지는 결론은,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누가복음에서처럼 허다한 무리의 제자는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열 두 사도에게만 제한되는 소수의 그룹의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마태복음의 제자상을 보통의 평범한 신자들, 즉 교회를 가리키는 대표적 모델로 간주함에 커다란 무리가 따르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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