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구약사

창세기~다윗(역사적,지리적배경을 중심으로)

호리홀리 2016. 7. 12. 13:10

 

                    구약사1

       창세기~다윗(역사적,지리적배경을 중심으로)


                               박인대교수        

  

역사를 보는 두 가지 시각

인간 역사를 보는 눈에는 두 가지 각도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인간 역사에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일체의 외부적 힘의 개입을 부정한 채 보는 시각이요, 다른 하나는 그 외부적 힘을 인간 역사에 있어서의 절대적 동인(動因)으로 인정하는 시각이다. 이 외부적 힘은 성경에 야웨 하나님으로 묘사되었다. 그는 인간과 시간(시간은 곧 역사이다)을 창조하고 또한 계속 지어내는 조물주로서, 인간 역사의 운명을 좌우하는 지존자로 등장한다.

성경은 분명히 사람들과 민족들, 그리고 나라들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의 배경에는 반드시 절대적 원인으로서의 하나님이 있다. 출애굽 기사에서 마치 모세와 아론이 주인공인듯 하나 실상은 하나님이 주인공이다. 사무엘서의 주인공은 다윗이 아니라 역시 하나님이다. 욥기의 실제적 주인공 역시 하나님이다. 다니엘서 역시 마찬가지이며,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에스더서도 이 사실에서 예외는 아니다. 복음서에서는 야웨 하나님과 더불어 동일한 권능과 영광을 나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사도행전이나 서신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역사를 보는 성경적 시각에 반대되는 다른 시각은 소위 말하는 인문 주의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인문주의란 쉽게 말하면 인간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인문주의는 타락한 중세 종교로부터의 해방을 기치로 들고 출발하여 종교 개혁이라는 좋은 결실도 보았고, 자연 과학을 비롯한 제학문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것은 걸음을 잘못 내딛어 하나님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무서운 사상을 인류 사회에 심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인문 주의는 하나님이란 신을 버린 대신 사실상 이성이라는 새로운 신을 숭배하고자 하는 사상이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을 최고의 위치에 두고 그 이성에 의하여 모든 것을 판단하고자 하며, 그 이성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본다. 오늘날 제학문의 바탕에는 인문주의가 깊이 뿌리박고 있어서 이성의 판단에 의한 전제나 증명이나 결과만을 받아들이고, 이성의 영역을 벗어나는 신앙의 영역은 점차 학문의 자리에서 붸겨나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님을 연구한다고 하는 신학이 점점 좌경화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말을 다시 쉽게 설명하자면, 현대 인문 주의 신학에서 이성의 판단에 문제시되는 이적이나 하나님 위주의 역사 이해가 점점 하나님이 제외된 합리적 해석으로 대치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해석은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을 사실로 받아들일는지는 몰라도,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간섭만은 부인하든지 아니면 그에 대한 인위적 해석을 시도한다.

고도로 자유화된 현대 학문의 세계에서는 거의 모든 전제가 인정되지만, 신앙을 기초로한 전제는 가설로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서 인류와 우주의 생성에 관하여 진화론은 하나의 가설의 단계를 넘어서 정설의 자리까지 차지하고 오랜 세월을 군림해왔는데,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다는 창조론은 종교의 범주 안에 묶어놓고 이를 학문 영역의 가설로서 받아들이는 것조차 제한하여 온 경향이 있다. 신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신앙의 영역에 해당할 뿐, 이를 학문의 전제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터부시하는 것이 오늘날 학문 세계의 현실이다.

하나님을 인류 역사의 절대적 주체로 보는 시각은 믿음이라는 동기에서 출발한다. 만일 이 믿음이 인간 자신의 발상에 의한 것이 아니고, 진정 조물주 하나님이 있어서 그의 자기 계시에 의한 것이라면, 이런 시각이야 말로 가장 객관적인 시각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믿음의 눈을 통해 볼 때,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은 가장 객관적인 시각,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시각을 통하여 역사를 기술한 이들이다. 선지자나 사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곧 객관이요, 모든 인간적 가치관이나 견해는 주관적인 것이었다.

만일 학문을 수행하는 능력이 이성에만 있는 것이라면, 불행하게도 하나님은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필자가 간절히 바라는대로 인간 이성이 좀더 겸손한 자세를 취하여 믿음의 세계에 조금이라도 자리를 양보할 생각이 있다면 하나님 또한 기꺼이 인간 학문의 대상이 되어 주리라고 본다.


다음 글로 넘어가기 전에 하나님과 그의 메시야(=기름부음 받은 자)로부터의 해방을 도모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장이 무엇인지 들어보도록 하자: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야웨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

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

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시편2:1-6).


하나님의 역사와 이스라엘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의미를 오늘날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뉘어진다. 이스라엘을 무조건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민족 내지는 나라로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견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 이후로 그를 믿는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치하였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두 가지 견해 모두 일단의 진실과 왜곡을 가지고 있다. 성경을 자세히 그리고 겸허한 자세로 읽다 보면, 때로 이스라엘은 문자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하면, 또 신령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로마서 4장에 의하면 모든 믿는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믿는) 사람의 조상이라" (롬4:16). 그리고 에베소서 2장에 의하면, 과거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요,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던 (12절)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이제부터 외인도 아니요, 손님도 아니며,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19절) 되었다고 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방인들은 자신을 얼마든지 '신령한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예를 들어 신명기 6장 4절 이하의 말씀을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야웨는 오직 하나이신 야웨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야웨를 사랑하라...") 읽을 때,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문자적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 이 명령이 순전히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주어진 것이요, 이방인인 자신에게는 해당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철저히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로마서 9-11장을 읽을 경우, 거기 여러번 나오는 '이스라엘'을 '신령한 이스라엘' 곧 교회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독자는 철저히 성경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9-11장의 문맥을 통해 볼 때, 그 안에 나오는 '이스라엘'이란 단어는 문자적인 의미로서만 이해하여야 함이 자명하다. 이처럼 성경에 언급되는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는 때때로 신령한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가능한 한 문자적 의미를 그대로 취할 경우에 성경을 오해함이 없을 것이다.

교회를 신령한 이스라엘이라 하여 현존하는 이스라엘 국가나 유대 민족의 존재를 하나님의 역사와 전혀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와는 정반대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을 항상 현재의 이스라엘 국가와 유대 민족에게만 연관시켜 해석하여서도 문제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택받은 민족인 유대인에게 '거침돌'이 된 것처럼, 이스라엘 또는 유대인은 어떤 점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의 장애물 내지는 '눈에 가시'가 되어 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예수 당시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를 메시야로서 인정하지 않았고, 지난 2000년간 거의 대부분의 유대인들도 예수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를 몹시 혐오하였다. 이런 비극적 상황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일부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인 죄로 저주를 받고 있다"고 구박받아온 유대인들이 2000년 가까운 유랑 생활 끝에 옛 조상의 땅에 찾아와 다시 나라를 세운 일은 역사의 이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유대인들은 조상들이 살던 땅에 다시 나라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광대한 아랍 국가들 가운데 조그만 점처럼 박혀 있으면서도 거뜬히 그들의 위협과 침략을 막아내고 있다.

1948년 결코 신생이라 할 수 없는 '신생 이스라엘 국가'의 성립, 1967년 주변 아랍국들과 벌여 엿새만에 이스라엘의 대승리로 끝난 6일 전쟁 등의 역사적 사건은 종래 이스라엘의 존재를 잊었던 많은 기독교인들의 관심을 다시 불러 들였을 뿐만 아니라, 성경 연구가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중요성을 재삼 깨닫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구약 성경을 통해 볼 때, 누구든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이라면, 하나님의 역사의 주된 배경은 바벨론도 이집트도 로마도 아닌 조그만 나라 이스라엘이었다는 것을 시인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결코 소국도 주변국도 아닌 중심지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민족으로서 늘 하나님의 역사와 간섭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이방 세계로의 복음 전파는 하나님 역사의 중심장을 이스라엘에서 다른 곳으로 옮긴 듯한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서 로마 가톨릭은 로마의 중심성을 강조한다. 베드로, 바울 등의 거물급 사도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마저도 로마라는 도시와 연관시켜 로마의 중심성을 강조하는 것이 로마 가톨릭의 경향이다. 더욱이 교황을 머리로 하는 종교적 정부인 바티칸이 로마에 들어섬으로서, 로마의 종교적 지위는 더욱 견고해지게 된 셈이다.

개신교도중에는 때때로 자기 나라가 이스라엘의 지위를 전수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제2의 이스라엘' 또는 '영적 이스라엘'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우리 한국에도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듯 하다. 지난 100여년간 기독교세가 급성장하여 우리 남한에서만 해도 일천만 기독교인을 확보하였으니 이런 말이 나올 법도 하다.

어쩌면 이들의 주장이 결코 그릇되었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 같다. 기독교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로마로, 유럽 세계로,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그리고 아시아로 계속하여 불꽃을 일으키며 번져가지 않았던가. 이러한 복음의 확산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요 바램이기도 하다. 이방 세계에서 복음이 확산되어 갈 것을 가리켜 성경은 '이방인의 때'(눅21:24; 롬11:25) 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 같다. 성경에서 이방인이란 용어는 이스라엘 자손 또는 오늘날의 유대인과 상반된 개념으로 쓰인다. 따라서 '이방인의 때'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잠시 소홀히 대접받는 때'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지난 2000년 간 유대인은 가는 곳마다 푸대접과 학대를 받았다. 그들에게는 나라도 없었을 뿐 아니라, 늘 생존권의 위협이 그들 뒤를 따랐었다. 과거 주변의 강대국들로부터 학대와 침입을 받았던 몇몇 소수 민족의 예를 통해 볼 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진작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지고, 그 이름 넉 자만이 낡은 역사책 속에 남아 있을 법도 하지만, 이스라엘 또는 유대인은 아직도 역사책 속에서만 아니라, 지상 역사의 현장 안에서도 깊은 자국을 남기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만 두고라도, 지난 2000년 간 유대인은 지구촌 구석 구석을 방랑하며 그들의 흔적을 남기었다. 결코 다른 민족과 쉽게 동화될 수 없는 민족, 수천년 해묵은 전통을 버리지 아니하고 고도로 기계화된 현대까지 그 옛날의 짐을 어깨에 메고 살아온 고집 불통 민족, 2000년의 유랑 끝에 조상들이 살던 땅으로 다시 기어 들어와 독립 국가를 세운 그 집념. 하나님이 없다면 유대 민족의 역사는 너무나도 우연한 기적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의 이러한 모든 운명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이미 명시되어 있는 것이라면 독자는 이에 대하여 무어라 말하겠는가? 과연 성경 시대 이후 유대인의 역사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인가?

신약 성경중 미완성 교향곡으로 끝난 책이 있다면, 바로 사도행전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로, 사마리아로, 그리고 당시 이방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까지 확산되는 것을 기록하였다. 사도 행전의 기록이 완성된 이후 이방 세계의 중심은 로마에 멎지 아니하고 산넘고 강건너고, 바다를 지나 이미 여러 차례 그 중심축을 옮겨갔다. 지난 20세기 동안 그리스도의 복음 역시 쉬지 않고 이방인들을 집요하게 추적하였다. 이 기간 동안 일어난 성령의 사역은 비록 사도행전에는 기록이 되지 않았으나, 인류가 사는 지상 위에 낱낱이 새겨져서 '기록되지 않은 사도행전'을 이루고 있다.

지난 2000년 간 유대 민족의 역사는 어찌 보면 '기록되지 않은 구약 성경'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으로 시작하는 구약 성경은 전체적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의 상호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 안에는 약속들이 있고, 축복과 저주가 담겨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딤후3:16). 사도 행전에 담긴 사건들은 제각기 하나의 모델이 되어서 시간을 거듭할수록 그와 유사한 사건들이 반복될 것이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순종, 불순종은 역사가 지속되는 한 거듭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신약의 사도행전이나 구약 성경을 팔만 대장경과 같은 분량의 방서로 만들지 않으셨던 것이다.

미완성 교향곡인 사도행전과 구약 성경, 공히 장차 있을 이스라엘의 마지막 구원을 기대하고 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 때문에 '하나님이 정하신 날'(말4:3)에 '이스라엘의 소망'(행28:20)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11:26).


약속의 땅을 향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말하고자 할 때 맨 먼저 언급되는 이름이 바로 아브라함이다. 그의 본래 이름은 아브람이었으나, 하나님의 지시에 의하여 아브라함으로 개명하였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오늘날 유대인의 조상일 뿐만 아니라, 유대인을 증오하는 아랍인들중 일부의 조상이기도 하다. 오늘날 전쟁의 위험이 가장 짙다고 하는 중동, 이곳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어 사는 곳이다.

아브라함은 과연 누구인가? 지금으로부터 대략 사천년전 아브라함은 지금의 이라크와 쿠웨이트 국경 부근에 위치했던 갈대아 땅 우르라는 커다란 도시에 살고 있었다. 비록 사천년이라는 시간적 격차가 있긴 하지만 우르는 오늘날의 도시 못지 않게 번영하였다. 각종 상업 활동도 빈번하였거니와 문화 정치 활동도 활발하였다. 또 도시마다 따르는 도덕적 부패 문제도 심각하였다. 이 도시에 가득하였던 각종 우상 신은 시민의 도덕적 수준을 높혀 주기는 커녕 오히려 죄악의 심층화를 부채질해줄 뿐이었다.

청년 아브라함은 일찍부터 야웨 하나님을 섬겼다. 그가 어떤 동기로 야웨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우상 숭배자인 아버지와 (수24:2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늘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부친 데라는 노년에 결국 아들의 입장을 따라 야웨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한 것 같다. 데라가 아브라함과 더불어 가나안 땅을 향하여 떠난 사실이 이것을 입증해 주지 않을까? 하지만 데라는 가나안 땅에는 발을 들여 넣지 못하고 결국 중도에 하란에서 그의 일생을 마치고 만다.


아브라함은 고향 친척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아무런 불평 없이 길을 떠난다. 당시 그의 여정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행기도 자동차도 없는 시대, 걷는 것이 아니면 겨우 낙타, 당나귀, 말 따위의 탈 짐승에 의존해야 했던 장거리 여행, 게다가 모든 소유물을 끌고 다녀야 하는 그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비록 그의 기나긴 여정이 도시인으로서의 생활 양식을 버리고 보다 원시적인 유목민으로 탈바꿈하는 것이었을지라도 그는 한 마디 불만의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야웨 하나님이 아브라함더러 가라고 한 땅은 가나안 땅이었다. 가나안 땅에는 비록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같은 큰 도시는 없었으나, 그런대로 큼직한 성읍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생업은 농업을 주로 하되, 목축업과 약간의 상업 활동이 가미되었다. 우상 숭배 문제는 우르 땅이나 가나안 땅이나 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더러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명하셨을까? 결코 답하기 쉬운 물음인 것 같지는 않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아브라함은 그곳서 결코 주인으로서 살아본 적이 없다. 아내의 시신을 묻고자 땅을 사야만 했던 아브라함, 본주민들과의 마찰 때문에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던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사는 아브라함의 적나라한 모습이었다. 그는 일정한 곳에 집을 짓고 상주한 일도 없었다. 도시 출신인 그에게 천막 생활이란 결코 달콤한 낭만이 될 수도 없었다.

야웨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소유로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이 약속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자발적으로 그와 맺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결코 가나안 땅을 이상향으로 생각해 본일도 없거니와, 이유를 막론하고 그곳으로 이주해 올 생각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가나안 땅은 갈대아 우르의 청년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정하셨다. 그가 앞으로 전개하실 중대한 역사의 중심지로 가나안 땅을 내정하신 것이었다. 이제 아브라함은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새로운 역사의 첫 장을 열고 있는 것이다. 그 후 사천년에 걸쳐 이 땅에서 또는 이 땅을 중심으로 일어날 일들을 어찌 아브라함이 상상이라도 하였으랴마는, 그는 단순히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서 위대한 역사의 문을 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약2: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대하20:7; 사41:8), 또는 '하나님의 선지자'(창20: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라는 칭호로 불리기에 적절한 사람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그의 약속을 그대로 믿고 그의 지시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데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가 수 만리 이상이나 떨어진 곳에 살던 아브라함을 불러 내어 머나먼 약속의 땅으로 떠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지정학적으로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세 대륙이 만나는 지점이요, 동시에 과거 근동 역사에 있어서 북쪽의 메소포타미아와 남쪽의 이집트 양대 강대국이 늘 충돌하던 지점이기도 하였다. 기후 및 지형적인 면에서 볼 때, 인위적인 노력으로 나일강 물을 관개하여 농사짓던 평지의 이집트와는 달리 가나안 땅은 산과 골짜기의 복합체로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이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지역이었다. 좀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그 목줄을 쥐고 있는 땅인 것이다. 하나님으로서는 자기 백성을 훈련하시고자 일부러 이런 장소를 택하였을 법하다.

사천년전 아브라함을 이땅으로 부르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다시 그의 후손을 이곳으로 이끌어 들이고 계시다. 유대인, 곧 아브라함의 후예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을 듣지 못하였는지는 모르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때문에 친히 이 대이동을 주동하시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지금까지 유효한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한번쯤 유대인의 귀환을 주시해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간 일이 우리 인류의 구속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었다면, 사천년이 지난 오늘날 그의 후손들이 옛적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일이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역사를 펼치는 주무대이다. 옛적에 아브라함을 이땅에 불러들여 인류 구속사에 있어서 중요한 한 장을 전개하셨던 동일하신 연출자 하나님께서는, 사천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 그의 후손을 이땅으로 불러들여 구속사의 새로운 장을 펼치고자 하신다. 지난 2000년간 구속사의 무대는 여러번 자리를 달리하였었다. 그동안 약속의 땅은 세상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었다. 그러나 20세기 중엽 이후로 중동은 세계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풍부한 석유 자원, 기독교화된 서구에 대한 체면을 유지하기에 안간힘을 쓰는 모슬렘의 아랍권, 그리고 그 안에 눈에 가시처럼 박혀있는 이스라엘이라는 존재 등이 중동의 긴장을 늘 고조시켜 온 것이다.

이제 한 가지 물어야 할 일이 있다면, 온 세상의 관심이 집중된 이 지역에서 장차 하나님이 무슨 일을 계획하고 계신가 하는 물음이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히브리서 11:8-10).








제1장 족장시대


1. 아브라함의 출생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을 때는 100세였고(창21:5) 이삭은 60세에 야곱을 낳았고(창25:26) 야곱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는 130세였다(창27:9) 이것을 합하면 290년이다(100+60+130).

이스라엘의 애굽 체재 기간을 430년으로 보고 출애굽연대도 약1446 B.C.로 볼때 합계(290+430+1446)는 2166년이 되는데 이것이 아브라함의 출생연대이다.


2. 아브라함이 우거했던 지역들 (창11장-13장) - 아브라함은 고향 땅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에 이주했다.


(1)우르(창11:28, 31, 15:7) -창 24:4,7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의 원고향이요 출생지는 메소보다미아의 남방지역인 우르가 아니라 북방 메소보다미아의   '밧단아람'일 것이다. 사도행전 7:4에서 스데반의 설교에도 LXX경을 그대로 인용하여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로만 되어 있다. 맛소라 사본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아브라함의 출생지와 원고향은 북방 '밧단아람'이었으나 그가 성장하기는 남방의 '우르'였을 것이다. '우르'는 수메르 문화의 중심지였다.

수메르 문화가 집약된 곳이 바로 '우르'인데 그곳은 갈대아의 월신 난나를 섬기는 중심지로서 많은 신전들이 있었다. 아브라함 시대의 우르는 가장 번창했으며 옛 성터가 발굴된 성의 크기는 150에이커에 이르며 피네건의 계산은 인구가 약 24.000 가량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우르는 바벨론의 함무라비(1728 B.C.-1686B.C.)에 의해 파괴되었고 후일 나보니더스에 의해 재건되기는 했으나 다시는 옛날같이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는 되지 못했다.


(2) 하란(창 11:31-32, 12:5) - '하란'이란 '길'이라는 뜻으로 니느웨와 바벨론 다메섹과 두로와 애굽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의 중심지이다. 우르 문화권의 마지막 울타리가 되는 국경지대이기도 하다. 하란은 기원전 약 2000년경에는 아모리인들의 본거지가 되었던 곳이고 그 주변은 본래 아브라함의 가문의 발상지인'밧단 아람'(아람인의 들판이란 뜻)이다. 미탄리왕국의 수도


(3) 세겜(창12:6) -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 처음 머무른 곳이 세겜인데 지금의 델발라다란 곳으로 기원전 2000년에서 1800 B.C. 사이와 또 1400 B.C.-1200B.C.사이 전후 400년간에 걸쳐서 가나안의 중요한 요충지대였다.

(4) 벧엘(창12:8) - 아브라함은 벧엘 성 밖에 장막을 치고 머물렀다. 이 성은 1934년에 알브라이트의 지도로 발굴되었는데 그 시대 그 곳의 석공들과 연마공들의 기술이 그 어느 시대의 것보다도 높은 수준이었다는 것이 그 성지와 가옥들의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벧엘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맨 처음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은 곳이기도 하며 애굽에서 돌아와서 다시 찾은 곳이기도 하다(창12:8, 13:3,).


(5) 브엘세바(창26:23, 28:10) - 여기는 샘물이 있는 곳이며 우물로 유명한 곳이었다(창21:19, 21:25). 이곳의 옛터는 발굴되지 않았으나 지금까지도 이 부근은 생산물들과 상품들의 집산지가 되는 시장의 중심지라고 한다. 


(6) 헤브론(창13:18, 14:13, 18:1-4) - 아브라함이 롯과 갈라진 후에 오래 머물렀던 곳이며 사라가 임종한 곳이다. 아브라함도 죽어 이곳에 묻혔다(창23:2, 25:10) 이곳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아르바인들의 성"이라는 뜻)인데 아르바인들은 아낙인들 중에서도 가장 큰 족속들의 이름이었다(수14:15). 아브라함은 헤브론의 '마므레'에서 살았고 세겜에서와 같이 상수리나무에 이르러 장막을 쳤다(창12:6, 13:18,). 상수리나무에 이르러 장막을 친 것은 언약갱신의 의미가 있는 거룩한 장소로 보았다.


(7) 남방 (네게브:창 12:9) - 아브라함은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다. 팔레스틴의 남방지구를 네게브라고 부른다. 신 광야를 중심으로 한 네게브는황무한 사막만은 아니었음이 확인 됐다. 그 후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갔는데 목자였으므로 가축을 위한 물을 얻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제2장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1. 이스라엘 거주 당시의 애굽 역사

이스라엘이 애굽에 거주하던 그 전후 애굽의 역사는 크게 4개의 시대로 구분한다.

- 첫째는 기원전 약 1991에서 약1786에 이르기까지의 제12왕조 기간으로 이때에 애굽은 남과 북으로 갈려 있던 것이 바로왕의 주권 밑에 강력한 통일 국가를 이루어 부귀와 문화를 크게 자랑하던 때요, 국경을 넘어 열방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던 때이기도 하였다.

- 둘째는 힉소스 왕조로 창건자는 애굽인이 아닌 타국인으로 왕이 된 자였다. 그는 가나안의 셈 계통인 것만은 확실하다. 애굽의 12왕조는 강력했었지만 13, 14왕조의 왕들은 단명했고 나약했었다. 이때를 이용하여 셈족들은 애굽으로 침입해 들어가서 마침내 주권을 잡게 되었다. 약 1700 B.C.에 시작된 힉소스 왕조는 약 1세기 반 동안 남과 북을 통치했으나 힉소스의 중심세력은 북부 델타의 동쪽에 집중되어 있어서 왕조의 반대세력은 자연히 남부에서부터 시작되어 힉소스 왕조를 무너뜨리게 됐다.

- 셋째는 모든 왕조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제18왕조로 첫 왕은 아하모세(1584-1560B.C.)였는데 힉소스 왕조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북부를 점령함으로 애굽은 아하모세에 의해 완전히 통일되었다. 그는 칼과 병거로 무장된 강한 군대를 갖게 되었고 나일강에서 유브라데스에 이르는 넓은 대제국을 이루었다.

- 넷째는 19조 왕조 기간으로 18조에 뒤지지 않는 영향력을 열방에 행사하던 때로100여 년간 계속되었다. 그 중에 66년간은 람세스Ⅱ,1304-1238B.C.의 통치 기간으로 람세스 왕은 군사적인 면과 건설에 많은 힘을 써서  남북 애굽의 도성들을 확장 신축했다.


2. 애굽의 압박(출1:1-2:25) - 이스라엘은 애굽에 가서 4백 여년 동안 크게 번성하여 강대해졌고 애굽의 정치 정세의 변화와 이스라엘에 대한 압박이 시작되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출1:8) - 야곱의 가정을 우대하고 요셉을 크게 등용했던 힉소스 왕조(본래 셈 계통)는 아하모세(1584-1560B.C.)에게 무너졌고 새로운 왕은 애굽의 본토인으로 이스라엘의 번식을 막으려고 압박했고 이스라엘을 노예로 하여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케 했다. 이스라엘은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창성했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출애굽 할 때까지 한 민족국가로서의 발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로왕은 번성해 가는 이스라엘을 누르기 위해 새로 탄생하는 남아들을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스라엘의 번식을 억제하려는 바로의 정책에는 첫째, 애굽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적대 관계로 변한 것과 둘째, 쫓겨난 전 왕 힉소스와의 어떤 내통이 있을 것을 두려워 한 점과 셋째, 이스라엘의 번식이 자기들보다 빠르고 강대해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3. 모세의 탄생(출1:15-2:10) - 모세는 신생아를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이 실행되던 때로 출애굽 당시(1446B.C.)의 그의 연령이 80이었다면그의탄생은 1526B.C.였을 것이다. 그 연대는 아하모스(1584-1560B.C.)왕의 손자인 Thutmose Ⅰ(1539-1514B.C.)때이며 그는 애굽의 18왕조 중에서도 강력한 왕중의 하나로 애굽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킨 자이다. 그는 자국 안에 외국 민족이 크게 번성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런 때에 모세는 탄생했고 그의 부모는 레위의 후손들로(출6:16-20)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로 어린 시절 부모의 교육이 후일 애굽에서의 교육보다 모세에게 더 큰 감화를 주었다(히11:23, 1:23-27). 석달을 숨겨 키우던 모세를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갈 상자에 넣어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었을 대 바로(Thutmose Ⅰ)의 딸 공주(Hatshepsut)가 목욕하러 하수로 나왔다가 모세를 발견하게 되었고 미리암의 소개로 모세는 그의 어머니에게 돌아와서 4-5세 때까지는 키워졌다.

당시의 바로왕은 아하모스의 아들의 사위였는데 그 공주는 그의 무남독녀였으며 크게 유능한 인물이었고 법적으로도 왕위계승을 할 수 있었지만 남편에게 왕위를 계승케 하였고 공주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의 남편은 궁녀의 몸에서 아들 하나를 얻었으나 일찍 죽고 말았다.

그러므로 어린 Thutmose Ⅲ(약1504-1448B.C.)가 지배하던 근 20년간은 실제로 Hatshepsut가 나라를 다스렸는데 통치의 실적도 훌륭해서 남북 애굽의 모든 문제들이 잘 정리되었고 전체 애굽이 노동력 동원에도 잘 순종했으며 그때 지은 건축물 중에는 지금도 남아있는 아름다운 석조건축인 사원이 있고 그가 세운 거대한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지금도 하나가 그 자리에 남아 있다. 강력한 세력을 가진 공주의 슬하에서 아들로 키워진 모세의 지위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히11:24-27).


4. 모세의 성장과 피란(출2:11-25, 행7:23-29, 히11:24-27) - 모세는 공주의 양자로 Thebes의 궁중에서 자라났다. Thebes는 당시 정치, 문화의 중심지며 교육적인 시설도 잘 갖추어진 곳이었다. 모세는 공주의 역량 아래 권력자의 아들로 키워졌다. 그의 미래는 찬란한 것이었으나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브리 사람으로 살기를 원했으나 그 방법은 인간적 방법으로 히브리 종들을 학대하는 애굽의 감독을 죽임으로 그 일이 탄로나 애굽을 탈출하게 되었다(출2:14-15). 그는 미디안으로 피하여 시내반도의 제사장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며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을 했고 광야 생활을 통해 후일 출애굽 할 때 지리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40년의 세월이 지나자 그의 생명을 찾던 ThutmoseⅢ는 죽었다(출2:23-25). 그는 강력하고 유능한 왕으로 재위 32년간 단독통치한 기간에 상당한 업적을 남겼으며 가나안과 수리아 지역을 공격했고 므깃도를 점령했다. 그때가 애굽 역사상 최대의 발전을 보았던 시대였다.


5. 모세의 귀환(출3:1-4:31) - 때가 되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으로 돌아가라고 하셨고 모세는 거절의 대답을 했다. 이유는 백성들의 자기에 대한 불신과  '말에 능치 못한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그에게 기적의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고 그의 형 아론을 대언자로 세워주시겠다는 것이었다(출3:10, 4:19, 3:11, 4;1, 행7:25, 출4:10, 4:2-9, 4:11-17). 모세가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돌아가는 길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죽이려 하셨는데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들에게 할례를 받게 한 후 아내와 아들들을 장인의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다시 돌아갔다가(출8:5-6, 출4:27비교) 호렙산에서 마중온 형 아론을 만나 함께 돌아오니 백성들은 그의 말과 행하는 이적을 보고 그들을 믿으며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돌보심을 알고 하나님께 경배했다.


6. 바로와의 대결(출5:1-12:36) - 모세와 아론이 애굽에서 대결했던 바로는 AmenhotepⅡ(1448-1424B.C.)였는데 부왕의 뒤를 이어 부왕이 이룩한 업적을 잘 유지할 수 있도록 훈련된 유능한 인물로 교만하고 강퍅한 왕이었다. 모세는 바로에게 사흘 길 쯤 광야에 가서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려 한다고 하였으나 거절되었다. 고역은 더 강해졌고 패장들은 몹시 학대하며 때렸다. 이때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과 원망이 생기게 되었고 모세의 낙심도 컸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계시하면서 그를 격려하셨다(출5:21-23, 6:1-8). 모세는 새 힘을 얻어 바로와 정면으로 대결하게 되었고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짐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열 가지의 무서운 재난으로 바로왕을 쳤다.

열 가지 재앙은 ① 나일강의 물이 피가 되게 했고(출7:14-25) ② 개구리로 온 땅을 덮게 했고(출8:16-19) ③ 애굽 온 땅의 티끌이 이가 되게 했고(출8:16-19) ④ 파리 떼를 일으켜 사람들과 짐승들을 쏘게 했고(출8:20-24) ⑤ 모든 생축에 악질이 생겨 죽게 했고(출9:1-8) ⑥ 재를 뿌려 독종이 생기게 했고(출9:9-12) ⑦ 하늘에서 우박이 내리게 했고(출9;18-21) ⑧ 메뚜기로 푸른 곡식을 먹게 했고(출10:4-19) ⑨ 캄캄한 흑암이 3일간 온 애굽을 덮게 했고(출10:21-29) ⑩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 있었다(출12:29-33).

이 열 개의 재난은 갈수록 고통의 농도가 짙어가고 물질과 인명의 피해도 커져 갔고 영적인 교훈도 포함되어 있었다. 애굽이 그렇게 숭배하는 우상종교는 여호와 앞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생명줄인 나일강과  모든 어족들과 곤충들은 그들의 숭배의 대상이었고 나일신인 개구리신 태양신은 여호와 앞에 무능함을 보여 주었다. 마침내 바로는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과 바로의 장자까지 치게 될 때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허락하여 유월절 다음날(정월 15일, 민33:3) 라암셋에서 출발하여 출애굽의 노정에 오르게 된 것이다.


7. 유월절(출12장, 13장) -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출애굽할 때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의 제도로 교육하셨는데 그 달로 연중 첫달(아뷥월)이 되게 하셨는데 이스라엘의 신기원을 이루는 날이 되기 때문이다. 이 달 10일에 흠 없는 일년 된 어린 양(혹은 염소) 수컷을 준비한 후 십사일 해질 때 각 가정 단위로 잡게 했다. 그 피를 문 좌우설주와 인방에 바르되 우슬초로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뿌리게 하고 띠를 띠고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그 고기를 구워 급히 먹되 무교병과 쓴나물을 같이 먹게 했고 한 사람도 아침까지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출12:7, 22, 14-28).


8. 출애굽의 노정(출12:37, 13:20, 14:-18:) - 이스라엘 자녀들은 아뷥월 15일에 라암셋을 떠났다. 숙곳을 거쳐 광야의 끝이 되는 에담에 와서 장막을 쳤는데 출애굽 후 처음으로 장막을 친 곳이며 이스라엘의 행군이 시작된 곳이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의 인도를 받게 됐다. 그 다음은 바알스본에 와서 진을 쳤다(출13:21-22, 14:2).


9. 홍해의 기적(출14:1-15:21) - 이스라엘 자녀들이 애굽을 떠난 후 바로의 마음이 변했다. 그들에게는 이스라엘의 노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홍해 가에 진을 침으로 광야에 갇히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거 6백승을 동원하여 추격에 나섰다. 이때 이스라엘 군중들의 모세를 향한 원망은 대단했으나 모세의 기도에 따라 하나님의 이적은 나타났다(출14:5, 14:3, 14:15). 앞서 가던 구름 기둥이 뒤로 옮겨지면서 추격하는 애굽 군대 앞에는 구름과 흑암이 가로 막게 하고 이스라엘에는 광명함으로 애굽의 군대가 가까이 하지 못했다. 모세가 바다위로 손을 내밀매 큰 동풍이 불어 밤새도록 바닷물이 갈라져 이스라엘 자녀들은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좌우로 벽이 되었다. 그들이 다 건넌 후에 뒤따라온 애굽 군대들과 병거들은 다시 뒤덮이는 물에 전멸되었다(출14:20). 하나님의 크신 이적으로 홍해의 시련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다시금 체험하게 되었고 새로운 용기로 대적과 싸울 수 있는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10.출애굽 연대 -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연대를 성경(왕상6:1)에서 계산한다면 약 1446 B.C.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땅에서 나온지 480"이라 했고 그 해는 솔로몬이 왕이 된지4년(966B.C.) 되는 해였다고 했으니 출애굽의 연대는 1446B.C.(966+480)이다. 또 출애굽의 연대는 사사 입다의 기록과 출애굽의 연대를 고증하는 고고학적 자료도 있다. 또 다른 고고학적 자료는 "아마르나의 편지"인데 가나안 지방의 왕들이 애굽왕에게 보낸 긴급 원병을 청원한 문서로서 "하비루"의 군대가 침입하였으니 어서 도와주어야겠다는 것으로 이것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을 증명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제3장  시내산에서의 이스라엘(출15:22-40:38, 레1-27)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으며 제사제도와 제사장직이 임명되었고 성막 제도의 식양을 받아 그것을 세웠고 율법을 가진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언약의 자녀들이 된 것이었다.


1. 수르 광야와 신 광야(출15:22-16:36)-마라의 이적과 만나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은 수르 광야로 들어서서 3일 길을 걸었으나 물이 없었고 마라에 이르러 물을 발견했으나 물이 써서 마시지를 못했다(출15:23). 백성들의 원망은 컸으나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한 나무를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다. 거기서 6마일 남쪽으로 와서 엘림에 이르렀는데 샘 열둘이 있었고 종려나무 70주가 있는 '오아시스'지대여서(출15:27) 장막을 치고 며칠을 묵은 후 엘림과 시내산 사이의 신광야로 나왔다. 애굽에서 나온지 꼭 한달째인 2월15일이었다. 이스라엘은 먹을 것이 없어 모세를 원망 했다.

하나님은 만나를 내려 먹게 하셨다. 아침에 만나를 거두게 한 하나님께서는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게 하심으로 고기를 먹게 하셨다(출16:3, 4-16, 13-35, 수5:11-12).


2. 르비딤의 아말렉 전쟁(출17:1-16) - 신 광야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마실 물이 없어 크게 불평을 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호렙산 반석을 쳐서 생수를 마시게 하셨고 또 거기서 아말렉과 만나 싸우게 되었다. 이때 모세가 아론과 훌과 함께 산에 올라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의 손이 내려가면 지는 이적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때 아말렉을 영원히 도말할 것을 선포하셨고 이스라엘은 승리하였다. 모세는 감사의 제단을 거기 쌓고 '여호와 닛시'라고 했다.


3. 이드로의 방문과 시내산 도착(출18:1-19:2) -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르비딤으로 왔다. 이때 모세는 그 장인의 권유를 따라 신실한 사람들로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세워 백성들을 재판하도록 했다.


4. 십계명과 언약법(출19:3-20:17) -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기 전에 이틀 동안 몸을 정결케 하고 제3일에 산에 올라 40주야를 머무르며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을 덮고 나팔 소리가 크게 들리는 가운데서 하나님은 어떤 형태가 아닌 말씀으로 나타나시어서 친히 쓰신 계명을 돌비와 성막의 제도와 세밀한 양식과 함께 받았다.시내산언약체결식과 갱신


5. 금송아지 우상과 두 돌판(출32-34) - 모세가 산에서 더디 내려옴을 보고 아론은 백성들과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 놓고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하며 뛰놀 때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분노하여 두 돌판을 던져 깨뜨렸고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가루로 만들어 물에 뿌리고 백성들로 마시게 했다. 언약파기의 죄 값으로 3.000명이 죽었고 하나님께서 아론도 멸하려 하셨으나 모세의 중보기도로 살았다. 모세는 다시 산에 올라 40주야를 식음을 전폐하고 두 번째 언약의 두 돌판을 받아 내려 올 때는 얼굴에서 광채가 남으로 백성들이 두려워했고 수건으로 그 얼굴을 가려야 했다.


6.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 - 도덕법: 영원불변한 것으로 십계명을 말한다. 첫 부분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의무이며 둘째 부분은 인간 상호간에 대한 의무로서 부모 공경과 간음하지 말 것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 등이다.

- 시민법: 하나님 백성들의 사회생활을 위해 주신 것으로 기초는 십계명으로 세상에서 공의를 행하고 어떻게 재판하며 이웃 간의 사랑은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구체적인 조문들이다.

- 의식법: 제사법과 성전의 법등의 종교적이고 의식적인 것들로 제사법과 특별한 절기 등이다.


7.  3대 절기

1). 유월절(출12:1-28, 민28:16-25, 신16:1-8) -유월절은 무교절이라고도 하며 이스라엘의 해방의 새 출발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달로 성력의 첫 달을 삼게 했다. 지금의 3-4월 첫 달 14일이며 제물은 흠 없는 수컷 어린 양으로 4일전에 준비해야 하며 7일 동안 매일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했고 제7일에는 성회로 모였다.


2). 오순절(출23:16, 34:22, 레23:15-22, 신16:9-12) - 오순절은 모맥을 거두는 시기이므로 맥추절 또는 초실절이라고도 부르며 단 하루만을 지키는 절기로서 누룩을 넣어 구운 유교병 2개를 첫 소제로 드린다. 이날에 성회로 공포하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한다.


3). 초막절(출23:16, 34:22, 레23:34-43, 민29:12-40, 신16:13-15) - 초막절은 장막절이라고도 하며 7월 15일에 시작하여 1주일간 계속되는데 7일간 초막을 짓고 거기 살면서 그들의 장막생활을 기념하며 1년 동안 수고한 모든 곡식을 다 거두기를 마치면서 지킨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추수된 물산을 감사하며 기쁨으로 지켜야 하는 절기이다.

- 위의 3대 절기는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의 진리의 예표요 상징으로 유월절은 그의 구속의 예표요, 오순절은 성도의 첫 열매인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질 교회형성의 예표이며 초막절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그에게 속한 모든 성도들의 구원의 완성을 기뻐하는 예표이다.


8.  안식일, 안식년, 희년

- 안식일(출20:8-11, 신5:12-15, 민28:9-10) -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제7일에 안식하시면서 그날을 복주셨다. 인간이 맨 나중에 창조되었으니 처음 맞은 날이 안식일이다.

- 안식년(출23:10-11, 레25:1-7, 신15:1-11) -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 7년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쉬게 하셨는데 안식년에 자생한 모든 소출은 가난한 자들과 모든 들짐승들의 식물로 삼게 했다.

- 희년(레25:8-55, 27:16-25) - 일곱 번의 안식년이 지난 후 제50년째는 희년으로 땅을 쉬게 하고 잃은 기업은 다시 회복되고 종 되었던 자도 자유를 얻는다.(예수님의 희년 선포식 사61:1~3/눅4:18)


9.  나팔절과 속죄일

- 나팔절(레23:23-25, 민29:1-6) - 매달 첫날은 번제와 화목제와 속죄제를 드리며 그 제물 위에 나팔을 불고 특별히 7월의 첫날의 월삭은 성회로 모이는 나팔절로 더 많은 번제물과 속죄제물을 드려 안식하며 지켜야 했다.

- 속죄일(레16:1-34, 23:26-32, 민29:7-11) - 7월10일은 속죄일로 지키는 성회로서 일년중 가장 중요한 날 중의 하나로  온 백성은 안식해야 하면서도 스스로 몸을 괴롭게 해야 하는 날이며 두 염소를 취하여 하나는 아사셀의 양으로 먼 광야로 보내고 하나는 속죄물로 삼아 그 피를 가지고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소에 뿌려 지성소의 회막과 제단을 속죄하고 온 백성의 회중을 위해 속죄하기 위해 일년에 일차씩 반드시 있어야 했었다.



제4장 광야에서의 이스라엘(민1:1-36:13, 신1:1-4:49)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의 일년간 시내산에서 지내고 구름기둥이 증거(법)막에서 떠오르는 때에 가나안을 향해 출발했는데 20세 이상의 남자 장정만 603,550명이었다. 거기서 호렙산에 그리고 가데스바네아까지 이르기까지 열하루 길이었는데 3일이 지난 후 큰 불평이 일어났다.


1. 이스라엘의 불평과 70인 장로(민11-12장) - 이스라엘은 광야의 사막길 사흘을 걸은 후 괴로움을 참지 못해 모세에 대해 원망을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원망하는 악한 말을 듣고 진중에 불을 내려 그 끝을 사르게 하셨다. 모세의 기도로 불은 꺼졌으나 그곳 이름을 '다베라'라고 했다. 그들의 불평은 계속되어 만나에 질려 고기를 달라는 것이었고 하나님께서는 메추라기를 주어 먹게 하셨으나 그들의 탐욕을 크게 징계하셨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짐을 나누어 질수 있는 70인의 장로를 세워 그들에게도 신을 부어 주어서 그 일을 감당케 했다.


2. 가나안 입성의 실패(민13-14장, 신1:19-46) - 가데스에 도착했을 때 모세는 정탐 열둘로 가나안을 탐지하게 했다. 40일이 걸려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그들은 '땅은 비옥하고 산물은 풍성하여 젖과 꿀이 흐르나 성읍은 견고하고 거민은 강하여 점령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중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기게 할 것이니 담대히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고 했으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한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밤새도록 통곡하며 아우성이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려 하셨다. 모세의 기도로 그들을 용서하셨으나 40년간의 광야의 유리 생활을 선포하셨고 그들이 죽은 뒤 새 세대로 가나안에 입성케 하실 것을 약속했다.


3. 38년의 광야생활(민15-36장) - 이스라엘에게는 가나안의 축복이 눈앞에 있었지만 불순종과 거절로 그 축복을 잃게 되고 광야에서 38년간이나 유리하는 자들이 되었고 그 동안에 20세 이상의 사람들은 다 죽었다.


4. 이스라엘 회중의 반역과 징계

1).고라사건(민16:1-35)- 레위 자손 중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과 다단이 이름 있는 족장들 250인과 야합하여 모세와 아론을 반대하여 전멸한 일이다.


2). 반석을 쳐서 얻은 샘물(민20:1-13)- 그들이 또 다시 가데스에 돌아왔을 때 회중들이 물이 없음으로 불평하였고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반석을 쳤고 반석에서 물이 솟아났다.


3). 불뱀과 놋뱀사건(민21:4-9)- 또 다시 광야 길로 나섰을 때 길은 험하고 매일 먹는 만나는 역겹고 물도 없으므로 이스라엘이 불평하기 시작했고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셔서 많은 사람이 불뱀에 물려 죽게 했다.


5. 이스라엘의 북진과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 정복(민21:10-35, 신2:24-3:11) - 이스라엘이 광야 38년의 시련이 끝나는 그해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일어나서 세렛 시내를 건너 가라"고 하셨고 그들은 요르단을 향하여 북진하여 요단강 동쪽에 이르기까지 에돔과 모압과 암몬땅을 통과해야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괴롭게 하는 것을 원치 않으셔서 모압과 에돔을 피하여 헤스본 왕국으로 침입하는 길을 택했고 시혼 왕과의 싸움에서 크게 승리하여 시혼왕을 죽이고 길르앗에 이르기까지 여러 성읍을 취하였고 계속 바산으로 올라가 그 왕 옥을 쳐서 남북 길르앗의 온 땅을 점령했다.


6. 발람과 바알브올사건(민22-25:31) - 이스라엘이 여리고 맞은 편 모압 평지에 진을 치자 모압왕 발락은 이스라엘에 대해 새로운 위협을 느끼고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해 줄 것을 청원했다. 발람이 처음에는 발락의 청을 거절했으나 재차 사신이 왔을 때 따라가게 되었다. 도중에 나귀의 입에서 경고를 듣고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후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대신에 세 번씩이나 축복하였다.


7. 모세의 유언 -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기에 앞서 모세는 몇 가지 중요한 일을 지시했다. ① 인구 조사와(민26) ② 아들이 없는 경우 딸이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율례를 세운 일과(민27:1-11) ③ 여호수아를 새로운 지도자로 세운 일이다.(민27:15-23) ④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하나님께 제사의 예물을 드려야 하고(민28장) 절기를 어떻게 지켜야 하며(민29장) 서원을 어떻게 지켜야 할 것들을 가르쳤다(민30장). ⑤ 가나안에 들어가면 그 거민을 내어쫓고 모든 우상들을 멸할 것을 지시했다(민33:50-56). ⑥ 이스라엘의 기업인 땅의 경계를 동서남북으로 지시하고 기업을 받을 각 지파의 족장들을 지정했고 레위인을 위한 42개의 성읍과 법죄자를 위한 여섯 개의 도피성을 두어야 할 것을 지시했고 죽음에 앞서 모압언약을 체결했다.(신명기)


                          

제5장  가나안 정복(수1-24장)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대신하여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우셔서 요단을 건너가라 하셨다. 레바논에서부터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Hittites:1906년 발굴에 의해 완전히 드러났다. 가나안의 둘째 아들인 헷:창10:15) 족속의 온 땅이 너의 지경이 되리라 하셨다.

1. 가나안 입성(수2-5장)

요단을 건너기 전에 여호수아는 싯딤에 진을 치고 정탐들을 여리고에 보냈다. 두 정탐은 기생 라합의 집에 투숙했고 여리고성의 왕은 그들을 수색할 것을 명령했다. 기생 라합은 그 집이 성벽위에 있었으므로 그들을 지붕위에 숨겼다가 창문으로 내려 보내어 도망케 하면서 3일간 산에 가서 숨어 있을 것을 지시했고 3일 후에 그들은 싯딤(사해 남쪽에 있는 싯딤 골짜기와 다른 장소)으로 귀환했다. 라합은 언약을 지키기위해 생명을 걸었고 그와 온 가족이 살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복을 얻었다.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가나안의 첫 언약성취 이기도 하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백성들을 거느리고 요단에 이르렀으나 3일간 머물렀다. 그 시기의 요단물은 불어 언덕에 넘쳤다. 이때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에 잠기자 요단의 물은 갈라졌고 그들은 마른 땅같이 요단을 건넜으며 이 큰 이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두 개의 기념의 증표를 세우게 했는데 요단강에서 열두 돌을 취하여 가나안 땅 첫 진을 친 길갈에 세우게 하고 또 다른 열두 돌은 요단강 한복판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섰던 곳에 세우게 했다.

이것은 후일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영원토록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고 그를 경외케 하기 위함이었다. 이 사건은 언약의 성취를 기념하는 증표였다.


2. 중부 전쟁(수5:13-9:27)

(1) 여리고 정복(수6:13-27)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여리고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북부의하솔,중부의 헤브론) 여리고 성의 견고함은 그 어떤 공격도 막아낼 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일곱 나팔을 불며 언약궤 앞에서 행하는 일곱 제사장을 따라 6일간 여섯 번을 돌고 제7일에 일곱 번째로 돌때 길게 부는 양각 나팔 소리를 따라 온 군대가 크게 외쳤고 성은 기적적으로 무너졌다. 그 성의 모든 사람은 죽었고 오직 약속대로 라합의 가족만이 살아남았다.


(2) 아이성의 실패(수7:1-8:29)

아이성의 첫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비참하게 실패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여리고에서의 승리로 그들의 마음이 교만해져서 일치 협력하는 마음이 식어졌기 때문이고 다음은 회중에 죄악이 침입했기 때문이었다(아간의 훔친 물건). 그러나 결과적으로 언약파기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라합은 언약을 지킴으로 온 가족을 살렸으나 아간은 언약을 파기함으로 온 가족을 죽게했다.그들은 아간의 죄를 청산한 후 힘을 모아 아이성을 점령했다.


(3) 세겜언약(수8:30-35, 신27:1-26)

여리고와 아이와 벧엘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로 받은 언약을 체결하기 위해 에발산과 그리심산을 찾았다. 거기에 율법을 기록한 다듬지 않은 돌단을 세우고 화목제와 번제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절반은 그리심산 앞에 절반은 에발산 앞에 서게 한 후 축복의 말씀과 저주의 말씀을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여호수아는 모든 백성들에게 낭독했다.


(4) 기브온과의 언약(수9장)

길갈에서 여호수아는 기브온 거민(히위족속)이 원방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그들의 청원에 따라서 화평의 언약을 맺었는데 이 언약은 하나님의 지시와는 어긋나는 일이었다.


(5) 남북 가나안 전쟁(수10-12장)

기브온 거민들과의 언약으로 이스라엘은 전쟁없이 그비라와 브에롯과 기럇여아림을 자유롭게 지배하게 되었으나 남쪽의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기브온이 이스라엘과 화친했다는 말을 듣고 여러 남방 왕들과 연합군을 이루어 기브온을 쳤다.

기브온으로부터 급보를 받은 여호수아는 길갈에서 기브온까지 군대를 이끌고 와서(속아서 체결한 언약이라도 언약은 생명을 걸고 지켜야 된다는 것을 보여줌) 적군을 물리치고 벧호론 비탈에서 완전히 섬멸했다. 이 전쟁은 큰 격전이었으나 하늘의 해와 달이 중천에서 운행을 멈추었고 하늘에서 큰 덩이의 우박이 내려 적군을 쳤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같은 일은 전에도 후에도 없었다.


(6) 토지 분배(수13-22장)

- 여호수아는 가나안의 전 지역을 각 지파들에게 분배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제비를 뽑아 나누는 방법이었다.

- ㈀ 르우벤 갓 및 므낫세 반 지파의 기업(수13장) - 이들은 요단을 건너오기 전에 길르앗을 위시한 요단 지역을 기업으로 받았다.

- ㈁ 유다, 에브라임 및 므낫세 지파의 기업(수14:1-17:1) - 헤브론 산지에는 강한 아낙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갈렙이 그들을 내어 쫓고  갈렙의 기업이 되었고 유다지파는 남방의 큰 지역을 차지하였고 여호수아가 소속된 에브라임 지파는 유다 지파보다 작은 지역으로 베냐민 지파를 사이에 두고 유다 북쪽 지역이었고 세번째 제비를 뽑은 지파는 므낫세로 에브라임 지파의 바로 북쪽 지역을 이 두 형제 지파는 가나안의 중앙지대를 경계를 같이하며 차지했다.

- ㈂ 진지의 이동과 토지분배 중단(수17:12, 18:9) -  토지분배를 중단하고 오랫동안 가나안 정복의 기지였던 길갈에서 실로로 옮겨 성막을 세웠다. 속히 안정된 곳에 성소를 세우려고 하였고 또 요셉의 두 지파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토지 분배에 불평이 있었기 때문이다.

- ㈃ 토지분배의 계속(수 18;10-19;1) - 여호수아는 남은 일곱 지파들에게 3인씩 뽑아 남은 땅을 답사하고 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그려서 가져오라고 하여 제비를 뽑았다.

- 처음 제비뽑은 지파는 베냐민으로 유다와 에브라임 사이에 끼어있는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지경 안에는 여리고와 예루살렘이 포함되어 있었다.

- 두 번째는 시므온 지파로 유다 지파가 차지한 기업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했다.

- 세번째는 스불론 지파(갈릴리 서남쪽)

- 네번째는 잇사갈 지파였다. 이 두 지파는 경계를 연하여 베냐민 지파와 비슷한 작은 땅을 얻었는데 가나안에서 가장 비옥한 땅들 중의 하나였다.

- 다섯번째는 아셀지파로 지중해에 면해 있는 넓은 땅이었다.

- 여섯번째는 납달리 지파로 갈릴리 북쪽으로 아셀지파와 지경을 같이하여 남북으로 뻗쳐있는 넓은 땅이었다.

- 끝으로 단지파는 큰 지파중 하나였으나 얻은 땅은 작은 편으로 납부 유다와 에브라임 사이에 동쪽으로 위치해 있었다.

- ㈄ 레위 지파와 도피성 - 레위인의 남자의 수는 22,000명이었다. 그 중에서 아론의 자손들이 제사장이 되었고 그 가문의 장남은 계속적으로 대제사장이 되었다. 그 외의 자손들은 성전을 돕게 했다. 그들의 기업은 없었고 모든 이스라엘 족속들이 드리는 화제물이 그들의 기업이 되었다. 그들의 거처가 되는 성읍은 매 지파에서 3-4성읍을 공출하여 얻은 것이 48성읍으로 그 중에 6성을 택하여 '도피성'으로 삼게 하였다.




제6장 -사사시대


사사시대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 메소보다미아의 구산 리사다임이 이스라엘을 침략할 때 하나님께서 처음 사사 옷니엘을 세울 때부터 사울왕을 세울 때까지 342년간의 기간을 말한다.

이 시대의 특징은 삿21:25에 기록된대로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함과 같이 무법시대요 암흑의 시대이며 종교적으로도 위기였다.


1. 사사들의 통치

⑴ 옷니엘과 메소포다미아와의 전쟁(삿3:7-11)

-  이스라엘의 첫 사사로 유다 지파에 속한 갈렙의 동생이며 또 그의 사위가 된 사람이며 그나스의 후손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면서 가나안 종교에 물들어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며 이방족속들과 연혼하여 이방화의 길을 치닫게 됨으로 하나님께서는 메소포다미아의 구산 리사다임을 일으켜 8년 동안 그들을 괴롭게 할 때에 그들이 환란을 통하여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매 세우신 사사가 옷니엘이었고 그가 메소포다미아를 이긴 후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평화를 누렸다.



⑵ 에훗(삿3:12-31)

- 에훗은 이스라엘이 모압의 지배 밑에서 18년 동안 핍박을 당하던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80년 동안의 태평을 누리게 한 사사로서 베냐민 지파며 왼손잡이였다.

에훗이 죽은 후 아낫의 아들 삼갈을 세워 서쪽에서의 침략자인 블레셋을 물리쳤는데 소 모는 막대기로 600명을 죽였다.


(3) 드보라(발락)와 하솔 왕 야빈(삿4:1-24) -

드보라의 시대는 종교적으로 더 타락하여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잔인한 하솔 왕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20년 동안 괴롭게 했다. 이렇게 어려운 환란 중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는데 여자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일은 오직 드보라뿐이었다.


(4) 기드온과 미디안의 침략(삿6;1-8:28)

- 드보라 사사 이후 40년의 태평세월은 이스라엘을 또 다시 부패하게 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미디안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지배케 했다. 이스라엘은 견디지 못하여 산으로 피하여 굴을 파고 산성을 만들어 지내기를 7년, 하나님께서 그들의 호소를 듣고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셨다.

기드온은 사사로 세움을 받자 먼저 바알의 제단을 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300명 용사를 뽑아 그것을 세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려 그 안에 횃불을 감추게 하고 나팔을 불 때 삼면에서 항아리를 깨고 횃불을 밝혀 원수들을 놀라게 한 전략은 전쟁사에 영원히 남을 놀라운 지혜였다.

기드온은 세습적인 왕을 거절하였는데 그의 첩의 아들(삿8:31)인 아비멜렉은 그의 어머니의 친척들의 후원을 얻어 자기 형제 70인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고 3년 만에 세겜 사람들과의 큰 전쟁에서 죽었다(삿9:53-55, 살아남은 요담의 저주대로).

아비멜렉의 통치 후에 하나님께서는 돌라를 세워 23년을 다스리게 했고 또 후에 야일을 세워 22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했다.


(5) 입다와 암몬의 침략(삿11:1-12:7) -

18년간 이스라엘을 지배한 암몬을 물리친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로 그의 형제들에게 쫓겨나서 가난한 자들과 어렵게 살고 있을 때 암몬의 공격을 받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입다를 자기들의 장관으로 삼았고 입다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 후 사울 왕 때까지 암몬은 다시 이스라엘을 괴롭히지 못했다(삼상11:1).

입다의 열심은 지나쳐 전쟁에 나가려 할 때 하나님께 서원하여 그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누구든지 자기 집 문에 나와 나를 영접하는 자를 ....번제로 드리"기로 했다(삿11:31). 그가 돌아왔을 때 그의 무남독녀 외딸이 나와서 영접하므로 그의 서원대로 딸을 드렸다.


(6) 삼손과 블레셋의 침략 -

입다 다음의 사사는 베들레헴 사람 입산으로 아들 30과 딸30을 모두 이방으로 시집보내고 장가보내는(삿12:8-10) 호화로운 중에 타락해 가는 지도자상을 볼 수 있다. 그의 통치 7년 후 스불론 사람 엘론이 사사가 되어 10년을 다스렸고 그 뒤에 압돈이 사사가 되어 아들과 손자가 80이요 어린 나귀70필을 타고 다니는 호화를 누렸으나(삿12:13-15) 블레셋의 40년 침략의 수난이 닥쳤다(삿13:1). 그때 삼손이 탄생하여 장성한 후에 20년을 사사로 지내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으나 완전히 구원하지는 못했고 그가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 죽인자보다 더 많았다.(삿16:30)


2. 사사시대의 동족상쟁 -

⑴ 길르앗과 에브라임의 내전 -

사사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을 할때 에브라임 지파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이 불리하고 위험하다고 느낄 때는 협력하지 않았으면서 오히려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다며 입다에게 그 책임을 물으려고 하였고 또 그들은 기드온 때에도 그러했기에 이런 나쁜 감정들이 복합이 되어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을 쳤다. 이 전쟁으로 에브라임은 크게 패하여 패잔병들이 요단 나루터에서 죽은 자만도 45,000명이었다(삿12:6).


⑵ 베냐민 자손과의 내전 -

이 사건은 에브라임에 거하는 레위인의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그 아비의 집에 가서 있었고 그 남편이 다시 가서 찾아 데리고 올 때 기브아의 한 노인의 집에 유숙했다. 그 성내의 비류들의 패륜적인 행동으로 첩은 죽었고 이때 분개한 레위인은 그 시체를 열두 토막을 내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돌렸고 이를 보고 분개한 온 이스라엘이 기브아 성을 치려할  때 기브아의 베냐민 사람들만이 아닌 온 성의 베냐민 사람이 한데 모여 단결함으로써 온 이스라엘의 내란으로 번지게 되었고 그 피해는 막심했다.

동족끼리의 전쟁으로 베냐민족속은 거의 전멸상태였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행동에 허무함을 느끼고 한 족속이 이즈러짐을 크게 염려하여 특별한 조치를 세웠던 것은 슬픈 역사의 한 사연이었다(삿21:3-6, 15-17).


3. 단 지파의 라이스 점령(삿18장) -

단 지파의 처음 얻은 기업은 가나안의 서부지역 산간과 해변에 이르는 비옥한 땅으로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유다 지파들과 인접한 지역이었으나 원주민인 아모리 사람들에게 밀려 산지로 쫓겨 들어가서 기업의 땅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한 채 블레셋의 압박을 받았고 결국 살길을 찾아서 가나안의 최 북방인 '라이스'로 옮겨갔다. 거기서 600명의 용사를 뽑아 '라이스'를 점령하여 그곳 이름을 '단'이라고 불렀다.




           

제7장-통일왕국의 시작


사무엘은 사사시대와 왕정시대를 연결하는 과도기의 주역을 담당한 인물로 왕정의 설립자로서 첫 두 왕인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 부은 사람이며 최후의 사사이기도 하고 최초의 선지자이기도 하며 라마에 선지 학교를 처음 세운 사람이다(삼상10:1, 16:1-13, 19:20).

그는 본래 에브라임 엘가나의 아들이었으나 근원은 레위의 후손이었다. 그의 어머니의 서원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때부터 엘리 제사장의 슬하에서 자랐고 그때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위협을 늘 받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전장에 가면 승리하리라고 생각했으나 아벡전투에서 블레셋에게 패하여 언약궤를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도 죽었다.

실로에서 소식을 기다리던 엘리는 이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죽는다. 블레셋에 의해 200년간 지속되어온 실로의 성소가 파괴됨으로 이스라엘은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이후 임시 성소는 높땅(후에 다윗이 피신)에 세워진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성소를 불태운 이 사건은 후에 예레미야7:12절에서 첫 성소인 실로를 하나님께서 태우셨는데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못 태울 것 같은냐고 경고하신다.

  사무엘은 라마를 근거지로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하며 이스라엘을 통치했으나 그가 늙으매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위협에 대한 불안이 더욱 커져서 왕을 구했고 사무엘은 기뻐하지 않았다(왕의 요구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신정정치를 반역하는 것이기에).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허락하셨고 그 허락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의 징계였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왕정은 시작되었고 그 첫 임금은 사울이었으며 그가 처음에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개별적 의식이었고(삼상10:1) 공식적으로 이스라엘 앞에서 기름부음을 받고 왕위에 오른 때는 40세였다.


1. 사울의 통치 -

사울은 기스의 아들이었으며 이스라엘 중에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다. 그는 인격의 준수함과 그 위풍이 화려함으로 온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가 되었으며 겸손한 자이기도 하였다(삼상9:22-27, 11:12-13). 그러한 그에게 지도력을 시험하는 위기가 닥쳤다. 암몬 왕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를 쳐들어 왔을 때 백성들을 다 소집하여 전쟁을 하여 크게 승리했다. 그 승리로 인해 사울의 지도력은 크게 인정을 받았고 오랜 원수 블레셋을 쳐서 이겼고 주위의 원수들은 이기게 되었으나 사무엘은 그를 버렸다.

사무엘이 사울왕을 슬퍼하게 된 것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이 하나님의 준엄한 법을 잊어버리고 독립적인 행동을 취했는데 제사장직을 침범했고 아말렉의 전쟁에서 모든 소유를 진멸하라는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사울은 질투와 시기의 노예가 되어 다윗을 죽이려고 산과 들로 그를 쫓는 비극적인 존재(악신이 임해 그를 번뇌케 하는)가 되었다(삼상16;14).


2. 다윗을 죽이려한 사울(삼상18:1-22:5) -

사울은 자기를 위해 수금을 타는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두 번씩이나 창을 던졌으나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그를 사랑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으나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딸 미갈은 그를 지극히 사랑하여 보호하였다


3.블레셋으로 쫓겨 가는 다윗 -

유다로 돌아온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거친 황무지와 산간으로 광야로 유리했다. 고원지대 엔게디에 있을 때 사울이 3,0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추격해 왔다. 그때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왔으나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칠 수 없다 하여 그의 겉옷자락을 베는 것으로 아름다운 마음을 보였다. 그 후에 또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으나 사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와서 멀리서 그것을 사울에게 고했을 때 사울은 회개하는 듯 보였으나 다윗은 그의 회개를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시글락으로 갔다(삼상27:8-12).


4. 시글락에서의 다윗(삼상27:8-12) -

(1) 아말렉을 공격 -

시글락에 살게된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의 감시와 아기스왕의 의심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사울에게 쫓겨 이스라엘 땅을 떠나기는 하였으나 그의 애국심은 버려질 리가 없었다. 그는 시글락에 살면서 블레셋과 동맹관계에 있는 이스라엘의 원수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로하여 그들의 남녀를 진멸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약대와 의복들을 취하여 왔는데 이 소식을 들은 아기스왕이 다윗을 추궁할 때 다윗은 유다 남방의 동족을 살해한 것으로 말했다. 아기스의 신임을 얻긴 했으나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삶을 산 때였다.

(2) 블레셋의 침략(삼상28:1-2, 29:1-30:30) -

다윗이 시글락에 16개월을 머물러 있는 동안 아기스 왕이 이스라엘을 치러 갈 때 다윗도 함께 전쟁에 가기를 요구하여 어쩔수 없이 아기스를 따르기로 했지만 블레셋 방백들의 완강한 거부로 다윗과 그 군대는 시글락으로 돌아왔고 동족을 치는 전쟁에서 몸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잠깐 시글락을 비운 동안에 아말렉이 침범해 와서 성을 불사르고 여자들과 자녀들을 사로잡아 갔다. 처자를 잃은 다윗의 부하들은 군급하여 그 책임을 다윗에게 돌려 그를 돌로 치자고 하는데까지 이르렀으나 다윗의 신앙은 크게 소생하여 600명을 거느리고 뒤쫓아가서 아말렉의 낙후병 소년의 도움을 받아 아말렉을 진멸하고 잃었던 아내들과 자녀들을 도로 찾아왔다.


5. 사울의 최후(삼상28:3-25, 31:1-13)

- 사울은 수많은 블레셋의 군대를 보고 마음이 떨렸고 여호와의 계시와 사무엘의 계시가 그리웠으나 사무엘은 죽었고 여호와의 계시는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의 길을 가르치는 계시는 끊어졌다. 그는 예전에 신접한 모든 자들을 다 내어 쫓았으나 신접한 여인을 찾을 만큼 심령은 타락했다. 길보아산 전투에서 세 아들과 함께 죽었다.


6. 다윗의 활 노래(삼하1:1-27) -

다윗은 아말렉을 치고 돌아온 3일 만에 비보를 듣고 종일토록 슬퍼하며 금식했다. 그 소식을 전하여 준 아말렉의 한 소년은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죽였다고 말한 죄 때문에 처형되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조상하고 슬픈 노래를 지어 유다 족속들에게 가르치게 하였고 그 이름을 '활 노래'(당시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활을 빗대어 한 노래 혹은 멜로디를 활에 맞추어 불렀다.)라 했다.

삼상31:4-5에는 사울이 자기의 칼에 엎드려 자결했다고 했으나 삼하1:9-10에는 아말렉 소년이 사울의 요구에 따라 그를 죽였다고 했다. 아말렉 병사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안 다윗은 그 병사를 처형한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왜 아말렉인가를 살펴야한다. 하나님과 대대로 원수된 아말렉의 공격과, 속이는 영으로서의 아말렉에 대한 다윗의 올바른 판단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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