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구약사

족장시대~포로귀환까지

호리홀리 2016. 4. 9. 17:04

 

                                  구약사 2

    (족장시대~포로귀환까지/역사적,지리적,고고학적배경을 중심으로)


                                                            박인대교수


제1장 족장시대


1. 아브라함의 출생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을 때는 100세였고(창21:5) 이삭은 60세에 야곱을 낳았고(창25:26) 야곱이 애굽에 내려갔을 때는 130세였다(창27:9) 이것을 합하면 290년이다(100+60+130).

이스라엘의 애굽 체재 기간을 430년으로 보고 출애굽연대도 약1446 B.C.로 볼때 합계(290+430+1446)는 2166년이 되는데 이것이 아브라함의 출생연대이다.


2. 아브라함이 우거했던 지역들 (창11장-13장) - 아브라함은 고향 땅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에 이주했다.


(1)우르(창11:28, 31, 15:7) -창 24:4,7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의 원고향이요 출생지는 메소보다미아의 남방지역인 우르가 아니라 북방 메소보다미아의   '밧단아람'일 것이다. 사도행전 7:4에서 스데반의 설교에도 LXX경을 그대로 인용하여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로만 되어 있다. 맛소라 사본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아브라함의 출생지와 원고향은 북방 '밧단아람'이었으나 그가 성장하기는 남방의 '우르'였을 것이다. '우르'는 수메르 문화의 중심지였다.

수메르 문화가 집약된 곳이 바로 '우르'인데 그곳은 갈대아의 월신 난나를 섬기는 중심지로서 많은 신전들이 있었다. 아브라함 시대의 우르는 가장 번창했으며 옛 성터가 발굴된 성의 크기는 150에이커에 이르며 피네건의 계산은 인구가 약 24.000 가량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우르는 바벨론의 함무라비(1728 B.C.-1686B.C.)에 의해 파괴되었고 후일 나보니더스에 의해 재건되기는 했으나 다시는 옛날같이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는 되지 못했다.


(2) 하란(창 11:31-32, 12:5) - '하란'이란 '길'이라는 뜻으로 니느웨와 바벨론 다메섹과 두로와 애굽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의 중심지이다. 우르 문화권의 마지막 울타리가 되는 국경지대이기도 하다. 하란은 기원전 약 2000년경에는 아모리인들의 본거지가 되었던 곳이고 그 주변은 본래 아브라함의 가문의 발상지인'밧단 아람'(아람인의 들판이란 뜻)이다. 미탄리왕국의 수도


(3) 세겜(창12:6) -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 처음 머무른 곳이 세겜인데 지금의 델발라다란 곳으로 기원전 2000년에서 1800 B.C. 사이와 또 1400 B.C.-1200B.C.사이 전후 400년간에 걸쳐서 가나안의 중요한 요충지대였다.


(4) 벧엘(창12:8) - 아브라함은 벧엘 성 밖에 장막을 치고 머물렀다. 이 성은 1934년에 알브라이트의 지도로 발굴되었는데 그 시대 그 곳의 석공들과 연아공들의 기술이 그 어느 시대의 것보다도 높은 수준이었다는 것이 그 성지와 가옥들의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벧엘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맨 처음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은 곳이기도 하며 애굽에서 돌아와서 다시 찾은 곳이기도 하다(창12:8, 13:3,).


(5) 브엘세바(창26:23, 28:10) - 여기는 샘물이 있는 곳이며 우물로 유명한 곳이었다(창21:19, 21:25). 이곳의 옛터는 발굴되지 않았으나 지금까지도 이 부근은 생산물들과 상품들의 집산지가 되는 시장의 중심지라고 한다. 


(6) 헤브론(창13:18, 14:13, 18:1-4) - 아브라함이 롯과 갈라진 후에 오래 머물렀던 곳이며 사라가 임종한 곳이다. 아브라함도 죽어 이곳에 묻혔다(창23:2, 25:10) 이곳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아르바인들의 성"이라는 뜻)인데 아르바인들은 아낙인들 중에서도 가장 큰 족속들의 이름이었다(수14:15). 아브라함은 헤브론의 '마므레'에서 살았고 세겜에서와 같이 상수리나무에 이르러 장막을 쳤다(창12:6, 13:18,). 상수리나무에 이르러 장막을 친 것은 언약갱신의 의미가 있는 거룩한 장소로 보았다.


(7) 남방 (네게브:창 12:9) - 아브라함은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다. 팔레스틴의 남방지구를 네게브라고 부른다. 신 광야를 중심으로 한 네게브는황무한 사막만은 아니었음이 확인 됐다. 그 후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갔는데 목자였으므로 가축을 위한 물을 얻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제2장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1. 이스라엘 거주 당시의 애굽 역사

이스라엘이 애굽에 거주하던 그 전후 애굽의 역사는 크게 4개의 시대로 구분한다.

- 첫째는 기원전 약 1991에서 약1786에 이르기까지의 제12왕조 기간으로 이때에 애굽은 남과 북으로 갈려 있던 것이 바로왕의 주권 밑에 강력한 통일 국가를 이루어 부귀와 문화를 크게 자랑하던 때요, 국경을 넘어 열방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던 때이기도 하였다.

- 둘째는 힉소스 왕조로 창건자는 애굽인이 아닌 타국인으로 왕이 된 자였다. 그는 가나안의 셈 계통인 것만은 확실하다. 애굽의 12왕조는 강력했었지만 13, 14왕조의 왕들은 단명했고 나약했었다. 이때를 이용하여 셈족들은 애굽으로 침입해 들어가서 마침내 주권을 잡게 되었다. 약 1700 B.C.에 시작된 힉소스 왕조는 약 1세기 반 동안 남과 북을 통치했으나 힉소스의 중심세력은 북부 델타의 동쪽에 집중되어 있어서 왕조의 반대세력은 자연히 남부에서부터 시작되어 힉소스 왕조를 무너뜨리게 됐다.

- 셋째는 모든 왕조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제18왕조로 첫 왕은 아하모세(1584-1560B.C.)였는데 힉소스 왕조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북부를 점령함으로 애굽은 아하모세에 의해 완전히 통일되었다. 그는 칼과 병거로 무장된 강한 군대를 갖게 되었고 나일강에서 유브라데스에 이르는 넓은 대제국을 이루었다.

- 넷째는 19조 왕조 기간으로 18조에 뒤지지 않는 영향력을 열방에 행사하던 때로100여 년간 계속되었다. 그 중에 66년간은 람세스Ⅱ,1304-1238B.C.의 통치 기간으로 람세스 왕은 군사적인 면과 건설에 많은 힘을 써서  남북 애굽의 도성들을 확장 신축했다.


2. 애굽의 압박(출1:1-2:25) - 이스라엘은 애굽에 가서 4백 여년 동안 크게 번성하여 강대해졌고 애굽의 정치 정세의 변화와 이스라엘에 대한 압박이 시작되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출1:8) - 야곱의 가정을 우대하고 요셉을 크게 등용했던 힉소스 왕조(본래 셈 계통)는 아하모세(1584-1560B.C.)에게 무너졌고 새로운 왕은 애굽의 본토인으로 이스라엘의 번식을 막으려고 압박했고 이스라엘을 노예로 하여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케 했다. 이스라엘은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창성했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출애굽 할 때까지 한 민족국가로서의 발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로왕은 번성해 가는 이스라엘을 누르기 위해 새로 탄생하는 남아들을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스라엘의 번식을 억제하려는 바로의 정책에는 첫째, 애굽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적대 관계로 변한 것과 둘째, 쫓겨난 전 왕 힉소스와의 어떤 내통이 있을 것을 두려워 한 점과 셋째, 이스라엘의 번식이 자기들보다 빠르고 강대해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3. 모세의 탄생(출1:15-2:10) - 모세는 신생아를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이 실행되던 때로 출애굽 당시(1446B.C.)의 그의 연령이 80이었다면그의탄생은 1526B.C.였을 것이다. 그 연대는 아하모스(1584-1560B.C.)왕의 손자인 Thutmose Ⅰ(1539-1514B.C.)때이며 그는 애굽의 18왕조 중에서도 강력한 왕중의 하나로 애굽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킨 자이다. 그는 자국 안에 외국 민족이 크게 번성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런 때에 모세는 탄생했고 그의 부모는 레위의 후손들로(출6:16-20)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로 어린 시절 부모의 교육이 후일 애굽에서의 교육보다 모세에게 더 큰 감화를 주었다(히11:23, 1:23-27). 석달을 숨겨 키우던 모세를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갈 상자에 넣어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었을 대 바로(Thutmose Ⅰ)의 딸 공주(Hatshepsut)가 목욕하러 하수로 나왔다가 모세를 발견하게 되었고 미리암의 소개로 모세는 그의 어머니에게 돌아와서 4-5세 때까지는 키워졌다.

당시의 바로왕은 아하모스의 아들의 사위였는데 그 공주는 그의 무남독녀였으며 크게 유능한 인물이었고 법적으로도 왕위계승을 할 수 있었지만 남편에게 왕위를 계승케 하였고 공주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의 남편은 궁녀의 몸에서 아들 하나를 얻었으나 일찍 죽고 말았다.

그러므로 어린 Thutmose Ⅲ(약1504-1448B.C.)가 지배하던 근 20년간은 실제로 Hatshepsut가 나라를 다스렸는데 통치의 실적도 훌륭해서 남북 애굽의 모든 문제들이 잘 정리되었고 전체 애굽이 노동력 동원에도 잘 순종했으며 그때 지은 건축물 중에는 지금도 남아있는 아름다운 석조건축인 사원이 있고 그가 세운 거대한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지금도 하나가 그 자리에 남아 있다. 강력한 세력을 가진 공주의 슬하에서 아들로 키워진 모세의 지위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히11:24-27).


4. 모세의 성장과 피란(출2:11-25, 행7:23-29, 히11:24-27) - 모세는 공주의 양자로 Thebes의 궁중에서 자라났다. Thebes는 당시 정치, 문화의 중심지며 교육적인 시설도 잘 갖추어진 곳이었다. 모세는 공주의 역량 아래 권력자의 아들로 키워졌다. 그의 미래는 찬란한 것이었으나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브리 사람으로 살기를 원했으나 그 방법은 인간적 방법으로 히브리 종들을 학대하는 애굽의 감독을 죽임으로 그 일이 탄로나 애굽을 탈출하게 되었다(출2:14-15). 그는 미디안으로 피하여 시내반도의 제사장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며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을 했고 광야 생활을 통해 후일 출애굽 할 때 지리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40년의 세월이 지나자 그의 생명을 찾던 ThutmoseⅢ는 죽었다(출2:23-25). 그는 강력하고 유능한 왕으로 재위 32년간 단독통치한 기간에 상당한 업적을 남겼으며 가나안과 수리아 지역을 공격했고 므깃도를 점령했다. 그때가 애굽 역사상 최대의 발전을 보았던 시대였다.


5. 모세의 귀환(출3:1-4:31) - 때가 되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으로 돌아가라고 하셨고 모세는 거절의 대답을 했다. 이유는 백성들의 자기에 대한 불신과  '말에 능치 못한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그에게 기적의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고 그의 형 아론을 대언자로 세워주시겠다는 것이었다(출3:10, 4:19, 3:11, 4;1, 행7:25, 출4:10, 4:2-9, 4:11-17). 모세가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돌아가는 길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죽이려 하셨는데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들에게 할례를 받게 한 후 아내와 아들들을 장인의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다시 돌아갔다가(출8:5-6, 출4:27비교) 호렙산에서 마중온 형 아론을 만나 함께 돌아오니 백성들은 그의 말과 행하는 이적을 보고 그들을 믿으며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돌보심을 알고 하나님께 경배했다.


6. 바로와의 대결(출5:1-12:36) - 모세와 아론이 애굽에서 대결했던 바로는 AmenhotepⅡ(1448-1424B.C.)였는데 부왕의 뒤를 이어 부왕이 이룩한 업적을 잘 유지할 수 있도록 훈련된 유능한 인물로 교만하고 강퍅한 왕이었다. 모세는 바로에게 사흘 길 쯤 광야에 가서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려 한다고 하였으나 거절되었다. 고역은 더 강해졌고 패장들은 몹시 학대하며 때렸다. 이때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과 원망이 생기게 되었고 모세의 낙심도 컸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계시하면서 그를 격려하셨다(출5:21-23, 6:1-8). 모세는 새 힘을 얻어 바로와 정면으로 대결하게 되었고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짐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열 가지의 무서운 재난으로 바로왕을 쳤다.

열 가지 재앙은 ① 나일강의 물이 피가 되게 했고(출7:14-25) ② 개구리로 온 땅을 덮게 했고(출8:16-19) ③ 애굽 온 땅의 티끌이 이가 되게 했고(출8:16-19) ④ 파리 떼를 일으켜 사람들과 짐승들을 쏘게 했고(출8:20-24) ⑤ 모든 생축에 악질이 생겨 죽게 했고(출9:1-8) ⑥ 재를 뿌려 독종이 생기게 했고(출9:9-12) ⑦ 하늘에서 우박이 내리게 했고(출9;18-21) ⑧ 메뚜기로 푸른 곡식을 먹게 했고(출10:4-19) ⑨ 캄캄한 흑암이 3일간 온 애굽을 덮게 했고(출10:21-29) ⑩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 있었다(출12:29-33).

이 열 개의 재난은 갈수록 고통의 농도가 짙어가고 물질과 인명의 피해도 커져 갔고 영적인 교훈도 포함되어 있었다. 애굽이 그렇게 숭배하는 우상종교는 여호와 앞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생명줄인 나일강과  모든 어족들과 곤충들은 그들의 숭배의 대상이었고 나일신인 개구리신 태양신은 여호와 앞에 무능함을 보여 주었다. 마침내 바로는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과 바로의 장자까지 치게 될 때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허락하여 유월절 다음날(정월 15일, 민33:3) 라암셋에서 출발하여 출애굽의 노정에 오르게 된 것이다.


7. 유월절(출12장, 13장) -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출애굽할 때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의 제도로 교육하셨는데 그 달로 연중 첫달(아뷥월)이 되게 하셨는데 이스라엘의 신기원을 이루는 날이 되기 때문이다. 이 달 10일에 흠 없는 일년 된 어린 양(혹은 염소) 수컷을 준비한 후 십사일 해질 때 각 가정 단위로 잡게 했다. 그 피를 문 좌우설주와 인방에 바르되 우슬초로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뿌리게 하고 띠를 띠고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그 고기를 구워 급히 먹되 무교병과 쓴나물을 같이 먹게 했고 한 사람도 아침까지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출12:7, 22, 14-28).


8. 출애굽의 노정(출12:37, 13:20, 14:-18:) - 이스라엘 자녀들은 아뷥월 15일에 라암셋을 떠났다. 숙곳을 거쳐 광야의 끝이 되는 에담에 와서 장막을 쳤는데 출애굽 후 처음으로 장막을 친 곳이며 이스라엘의 행군이 시작된 곳이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의 인도를 받게 됐다. 그 다음은 바알스본에 와서 진을 쳤다(출13:21-22, 14:2).


9. 홍해의 기적(출14:1-15:21) - 이스라엘 자녀들이 애굽을 떠난 후 바로의 마음이 변했다. 그들에게는 이스라엘의 노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홍해 가에 진을 침으로 광야에 갇히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거 6백승을 동원하여 추격에 나섰다. 이때 이스라엘 군중들의 모세를 향한 원망은 대단했으나 모세의 기도에 따라 하나님의 이적은 나타났다(출14:5, 14:3, 14:15). 앞서 가던 구름 기둥이 뒤로 옮겨지면서 추격하는 애굽 군대 앞에는 구름과 흑암이 가로 막게 하고 이스라엘에는 광명함으로 애굽의 군대가 가까이 하지 못했다. 모세가 바다위로 손을 내밀매 큰 동풍이 불어 밤새도록 바닷물이 갈라져 이스라엘 자녀들은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좌우로 벽이 되었다. 그들이 다 건넌 후에 뒤따라온 애굽 군대들과 병거들은 다시 뒤덮이는 물에 전멸되었다(출14:20). 하나님의 크신 이적으로 홍해의 시련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다시금 체험하게 되었고 새로운 용기로 대적과 싸울 수 있는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10.출애굽 연대 -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연대를 성경(왕상6:1)에서 계산한다면 약 1446 B.C.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땅에서 나온지 480"이라 했고 그 해는 솔로몬이 왕이 된지4년(966B.C.) 되는 해였다고 했으니 출애굽의 연대는 1446B.C.(966+480)이다. 또 출애굽의 연대는 사사 입다의 기록과 출애굽의 연대를 고증하는 고고학적 자료도 있다. 또 다른 고고학적 자료는 "아마르나의 편지"인데 가나안 지방의 왕들이 애굽왕에게 보낸 긴급 원병을 청원한 문서로서 "하비루"의 군대가 침입하였으니 어서 도와주어야겠다는 것으로 이것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을 증명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제3장  시내산에서의 이스라엘(출15:22-40:38, 레1-27)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으며 제사제도와 제사장직이 임명되었고 성막 제도의 식양을 받아 그것을 세웠고 율법을 가진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언약의 자녀들이 된 것이었다.


1. 수르 광야와 신 광야(출15:22-16:36)-마라의 이적과 만나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은 수르 광야로 들어서서 3일 길을 걸었으나 물이 없었고 마라에 이르러 물을 발견했으나 물이 써서 마시지를 못했다(출15:23). 백성들의 원망은 컸으나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한 나무를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다. 거기서 6마일 남쪽으로 와서 엘림에 이르렀는데 샘 열둘이 있었고 종려나무 70주가 있는 '오아시스'지대여서(출15:27) 장막을 치고 며칠을 묵은 후 엘림과 시내산 사이의 신광야로 나왔다. 애굽에서 나온지 꼭 한달째인 2월15일이었다. 이스라엘은 먹을 것이 없어 모세를 원망 했다.

하나님은 만나를 내려 먹게 하셨다. 아침에 만나를 거두게 한 하나님께서는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게 하심으로 고기를 먹게 하셨다(출16:3, 4-16, 13-35, 수5:11-12).


2. 르비딤의 아말렉 전쟁(출17:1-16) - 신 광야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마실 물이 없어 크게 불평을 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호렙산 반석을 쳐서 생수를 마시게 하셨고 또 거기서 아말렉과 만나 싸우게 되었다. 이때 모세가 아론과 훌과 함께 산에 올라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의 손이 내려가면 지는 이적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때 아말렉을 영원히 도말할 것을 선포하셨고 이스라엘은 승리하였다. 모세는 감사의 제단을 거기 쌓고 '여호와 닛시'라고 했다.


3. 이드로의 방문과 시내산 도착(출18:1-19:2) -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르비딤으로 왔다. 이때 모세는 그 장인의 권유를 따라 신실한 사람들로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세워 백성들을 재판하도록 했다.


4. 십계명과 언약법(출19:3-20:17) -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기 전에 이틀 동안 몸을 정결케 하고 제3일에 산에 올라 40주야를 머무르며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을 덮고 나팔 소리가 크게 들리는 가운데서 하나님은 어떤 형태가 아닌 말씀으로 나타나시어서 친히 쓰신 계명을 돌비와 성막의 제도와 세밀한 양식과 함께 받았다.시내산언약체결식과 갱신


5. 금송아지 우상과 두 돌판(출32-34) - 모세가 산에서 더디 내려옴을 보고 아론은 백성들과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 놓고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하며 뛰놀 때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분노하여 두 돌판을 던져 깨뜨렸고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가루로 만들어 물에 뿌리고 백성들로 마시게 했다. 언약파기의 죄 값으로 3.000명이 죽었고 하나님께서 아론도 멸하려 하셨으나 모세의 중보기도로 살았다. 모세는 다시 산에 올라 40주야를 식음을 전폐하고 두 번째 언약의 두 돌판을 받아 내려 올 때는 얼굴에서 광채가 남으로 백성들이 두려워했고 수건으로 그 얼굴을 가려야 했다.


6.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 - 도덕법: 영원불변한 것으로 십계명을 말한다. 첫 부분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의무이며 둘째 부분은 인간 상호간에 대한 의무로서 부모 공경과 간음하지 말 것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 등이다.

- 시민법: 하나님 백성들의 사회생활을 위해 주신 것으로 기초는 십계명으로 세상에서 공의를 행하고 어떻게 재판하며 이웃 간의 사랑은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구체적인 조문들이다.

- 의식법: 제사법과 성전의 법등의 종교적이고 의식적인 것들로 제사법과 특별한 절기 등이다.


7.  3대 절기

1). 유월절(출12:1-28, 민28:16-25, 신16:1-8) -유월절은 무교절이라고도 하며 이스라엘의 해방의 새 출발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달로 성력의 첫 달을 삼게 했다. 지금의 3-4월 첫 달 14일이며 제물은 흠 없는 수컷 어린 양으로 4일전에 준비해야 하며 7일 동안 매일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했고 제7일에는 성회로 모였다.


2). 오순절(출23:16, 34:22, 레23:15-22, 신16:9-12) - 오순절은 모맥을 거두는 시기이므로 맥추절 또는 초실절이라고도 부르며 단 하루만을 지키는 절기로서 누룩을 넣어 구운 유교병 2개를 첫 소제로 드린다. 이날에 성회로 공포하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한다.


3). 초막절(출23:16, 34:22, 레23:34-43, 민29:12-40, 신16:13-15) - 초막절은 장막절이라고도 하며 7월 15일에 시작하여 1주일간 계속되는데 7일간 초막을 짓고 거기 살면서 그들의 장막생활을 기념하며 1년 동안 수고한 모든 곡식을 다 거두기를 마치면서 지킨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추수된 물산을 감사하며 기쁨으로 지켜야 하는 절기이다.

- 위의 3대 절기는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의 진리의 예표요 상징으로 유월절은 그의 구속의 예표요, 오순절은 성도의 첫 열매인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질 교회형성의 예표이며 초막절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그에게 속한 모든 성도들의 구원의 완성을 기뻐하는 예표이다.


8.  안식일, 안식년, 희년

- 안식일(출20:8-11, 신5:12-15, 민28:9-10) -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제7일에 안식하시면서 그날을 복주셨다. 인간이 맨 나중에 창조되었으니 처음 맞은 날이 안식일이다.

- 안식년(출23:10-11, 레25:1-7, 신15:1-11) -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 7년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쉬게 하셨는데 안식년에 자생한 모든 소출은 가난한 자들과 모든 들짐승들의 식물로 삼게 했다.

- 희년(레25:8-55, 27:16-25) - 일곱 번의 안식년이 지난 후 제50년째는 희년으로 땅을 쉬게 하고 잃은 기업은 다시 회복되고 종 되었던 자도 자유를 얻는다.(예수님의 희년 선포식 사61:1~3/눅4:18)


9.  나팔절과 속죄일

- 나팔절(레23:23-25, 민29:1-6) - 매달 첫날은 번제와 화목제와 속죄제를 드리며 그 제물 위에 나팔을 불고 특별히 7월의 첫날의 월삭은 성회로 모이는 나팔절로 더 많은 번제물과 속죄제물을 드려 안식하며 지켜야 했다.

- 속죄일(레16:1-34, 23:26-32, 민29:7-11) - 7월10일은 속죄일로 지키는 성회로서 일년중 가장 중요한 날 중의 하나로  온 백성은 안식해야 하면서도 스스로 몸을 괴롭게 해야 하는 날이며 두 염소를 취하여 하나는 아사셀의 양으로 먼 광야로 보내고 하나는 속죄물로 삼아 그 피를 가지고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소에 뿌려 지성소의 회막과 제단을 속죄하고 온 백성의 회중을 위해 속죄하기 위해 일년에 일차씩 반드시 있어야 했었다.



제4장 광야에서의 이스라엘(민1:1-36:13, 신1:1-4:49)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의 일년간 시내산에서 지내고 구름기둥이 증거(법)막에서 떠오르는 때에 가나안을 향해 출발했는데 20세 이상의 남자 장정만 603,550명이었다. 거기서 호렙산에 그리고 가데스바네아까지 이르기까지 열하루 길이었는데 3일이 지난 후 큰 불평이 일어났다.


1. 이스라엘의 불평과 70인 장로(민11-12장) - 이스라엘은 광야의 사막길 사흘을 걸은 후 괴로움을 참지 못해 모세에 대해 원망을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원망하는 악한 말을 듣고 진중에 불을 내려 그 끝을 사르게 하셨다. 모세의 기도로 불은 꺼졌으나 그곳 이름을 '다베라'라고 했다. 그들의 불평은 계속되어 만나에 질려 고기를 달라는 것이었고 하나님께서는 메추라기를 주어 먹게 하셨으나 그들의 탐욕을 크게 징계하셨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짐을 나누어 질수 있는 70인의 장로를 세워 그들에게도 신을 부어 주어서 그 일을 감당케 했다.


2. 가나안 입성의 실패(민13-14장, 신1:19-46) - 가데스에 도착했을 때 모세는 정탐 열둘로 가나안을 탐지하게 했다. 40일이 걸려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그들은 '땅은 비옥하고 산물은 풍성하여 젖과 꿀이 흐르나 성읍은 견고하고 거민은 강하여 점령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중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기게 할 것이니 담대히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고 했으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한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밤새도록 통곡하며 아우성이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려 하셨다. 모세의 기도로 그들을 용서하셨으나 40년간의 광야의 유리 생활을 선포하셨고 그들이 죽은 뒤 새 세대로 가나안에 입성케 하실 것을 약속했다.


3. 38년의 광야생활(민15-36장) - 이스라엘에게는 가나안의 축복이 눈앞에 있었지만 불순종과 거절로 그 축복을 잃게 되고 광야에서 38년간이나 유리하는 자들이 되었고 그 동안에 20세 이상의 사람들은 다 죽었다.


4. 이스라엘 회중의 반역과 징계

1).고라사건(민16:1-35)- 레위 자손 중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과 다단이 이름 있는 족장들 250인과 야합하여 모세와 아론을 반대하여 전멸한 일이다.


2). 반석을 쳐서 얻은 샘물(민20:1-13)- 그들이 또 다시 가데스에 돌아왔을 때 회중들이 물이 없음으로 불평하였고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반석을 쳤고 반석에서 물이 솟아났다.


3). 불뱀과 놋뱀사건(민21:4-9)- 또 다시 광야 길로 나섰을 때 길은 험하고 매일 먹는 만나는 역겹고 물도 없으므로 이스라엘이 불평하기 시작했고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셔서 많은 사람이 불뱀에 물려 죽게 했다.


5. 이스라엘의 북진과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 정복(민21:10-35, 신2:24-3:11) - 이스라엘이 광야 38년의 시련이 끝나는 그해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일어나서 세렛 시내를 건너 가라"고 하셨고 그들은 요르단을 향하여 북진하여 요단강 동쪽에 이르기까지 에돔과 모압과 암몬땅을 통과해야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괴롭게 하는 것을 원치 않으셔서 모압과 에돔을 피하여 헤스본 왕국으로 침입하는 길을 택했고 시혼 왕과의 싸움에서 크게 승리하여 시혼왕을 죽이고 길르앗에 이르기까지 여러 성읍을 취하였고 계속 바산으로 올라가 그 왕 옥을 쳐서 남북 길르앗의 온 땅을 점령했다.


6. 발람과 바알브올사건(민22-25:31) - 이스라엘이 여리고 맞은 편 모압 평지에 진을 치자 모압왕 발락은 이스라엘에 대해 새로운 위협을 느끼고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해 줄 것을 청원했다. 발람이 처음에는 발락의 청을 거절했으나 재차 사신이 왔을 때 따라가게 되었다. 도중에 나귀의 입에서 경고를 듣고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후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대신에 세 번씩이나 축복하였다.


7. 모세의 유언 -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기에 앞서 모세는 몇 가지 중요한 일을 지시했다. ① 인구 조사와(민26) ② 아들이 없는 경우 딸이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율례를 세운 일과(민27:1-11) ③ 여호수아를 새로운 지도자로 세운 일이다.(민27:15-23) ④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하나님께 제사의 예물을 드려야 하고(민28장) 절기를 어떻게 지켜야 하며(민29장) 서원을 어떻게 지켜야 할 것들을 가르쳤다(민30장). ⑤ 가나안에 들어가면 그 거민을 내어쫓고 모든 우상들을 멸할 것을 지시했다(민33:50-56). ⑥ 이스라엘의 기업인 땅의 경계를 동서남북으로 지시하고 기업을 받을 각 지파의 족장들을 지정했고 레위인을 위한 42개의 성읍과 법죄자를 위한 여섯 개의 도피성을 두어야 할 것을 지시했고 죽음에 앞서 모압언약을 체결했다.(신명기)


                          

제5장  가나안 정복(수1-24장)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대신하여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우셔서 요단을 건너가라 하셨다. 레바논에서부터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Hittites:1906년 발굴에 의해 완전히 드러났다. 가나안의 둘째 아들인 헷:창10:15) 족속의 온 땅이 너의 지경이 되리라 하셨다.

1. 가나안 입성(수2-5장)

요단을 건너기 전에 여호수아는 싯딤에 진을 치고 정탐들을 여리고에 보냈다. 두 정탐은 기생 라합의 집에 투숙했고 여리고성의 왕은 그들을 수색할 것을 명령했다. 기생 라합은 그 집이 성벽위에 있었으므로 그들을 지붕위에 숨겼다가 창문으로 내려 보내어 도망케 하면서 3일간 산에 가서 숨어 있을 것을 지시했고 3일 후에 그들은 싯딤(사해 남쪽에 있는 싯딤 골짜기와 다른 장소)으로 귀환했다. 라합은 언약을 지키기위해 생명을 걸었고 그와 온 가족이 살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복을 얻었다.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가나안의 첫 언약성취 이기도 하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백성들을 거느리고 요단에 이르렀으나 3일간 머물렀다. 그 시기의 요단물은 불어 언덕에 넘쳤다. 이때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에 잠기자 요단의 물은 갈라졌고 그들은 마른 땅같이 요단을 건넜으며 이 큰 이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두 개의 기념의 증표를 세우게 했는데 요단강에서 열두 돌을 취하여 가나안 땅 첫 진을 친 길갈에 세우게 하고 또 다른 열두 돌은 요단강 한복판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섰던 곳에 세우게 했다.

이것은 후일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영원토록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고 그를 경외케 하기 위함이었다. 이 사건은 언약의 성취를 기념하는 증표였다.


2. 중부 전쟁(수5:13-9:27)

(1) 여리고 정복(수6:13-27)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여리고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북부의하솔,중부의 헤브론) 여리고 성의 견고함은 그 어떤 공격도 막아낼 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일곱 나팔을 불며 언약궤 앞에서 행하는 일곱 제사장을 따라 6일간 여섯 번을 돌고 제7일에 일곱 번째로 돌때 길게 부는 양각 나팔 소리를 따라 온 군대가 크게 외쳤고 성은 기적적으로 무너졌다. 그 성의 모든 사람은 죽었고 오직 약속대로 라합의 가족만이 살아남았다.


(2) 아이성의 실패(수7:1-8:29)

아이성의 첫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비참하게 실패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여리고에서의 승리로 그들의 마음이 교만해져서 일치 협력하는 마음이 식어졌기 때문이고 다음은 회중에 죄악이 침입했기 때문이었다(아간의 훔친 물건). 그러나 결과적으로 언약파기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라합은 언약을 지킴으로 온 가족을 살렸으나 아간은 언약을 파기함으로 온 가족을 죽게했다.그들은 아간의 죄를 청산한 후 힘을 모아 아이성을 점령했다.


(3) 세겜언약(수8:30-35, 신27:1-26)

여리고와 아이와 벧엘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로 받은 언약을 체결하기 위해 에발산과 그리심산을 찾았다. 거기에 율법을 기록한 다듬지 않은 돌단을 세우고 화목제와 번제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절반은 그리심산 앞에 절반은 에발산 앞에 서게 한 후 축복의 말씀과 저주의 말씀을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여호수아는 모든 백성들에게 낭독했다.


(4) 기브온과의 언약(수9장)

길갈에서 여호수아는 기브온 거민(히위족속)이 원방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그들의 청원에 따라서 화평의 언약을 맺었는데 이 언약은 하나님의 지시와는 어긋나는 일이었다.


(5) 남북 가나안 전쟁(수10-12장)

기브온 거민들과의 언약으로 이스라엘은 전쟁없이 그비라와 브에롯과 기럇여아림을 자유롭게 지배하게 되었으나 남쪽의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기브온이 이스라엘과 화친했다는 말을 듣고 여러 남방 왕들과 연합군을 이루어 기브온을 쳤다.

기브온으로부터 급보를 받은 여호수아는 길갈에서 기브온까지 군대를 이끌고 와서(속아서 체결한 언약이라도 언약은 생명을 걸고 지켜야 된다는 것을 보여줌) 적군을 물리치고 벧호론 비탈에서 완전히 섬멸했다. 이 전쟁은 큰 격전이었으나 하늘의 해와 달이 중천에서 운행을 멈추었고 하늘에서 큰 덩이의 우박이 내려 적군을 쳤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같은 일은 전에도 후에도 없었다.


(6) 토지 분배(수13-22장)

- 여호수아는 가나안의 전 지역을 각 지파들에게 분배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제비를 뽑아 나누는 방법이었다.

- ㈀ 르우벤 갓 및 므낫세 반 지파의 기업(수13장) - 이들은 요단을 건너오기 전에 길르앗을 위시한 요단 지역을 기업으로 받았다.

- ㈁ 유다, 에브라임 및 므낫세 지파의 기업(수14:1-17:1) - 헤브론 산지에는 강한 아낙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갈렙이 그들을 내어 쫓고  갈렙의 기업이 되었고 유다지파는 남방의 큰 지역을 차지하였고 여호수아가 소속된 에브라임 지파는 유다 지파보다 작은 지역으로 베냐민 지파를 사이에 두고 유다 북쪽 지역이었고 세번째 제비를 뽑은 지파는 므낫세로 에브라임 지파의 바로 북쪽 지역을 이 두 형제 지파는 가나안의 중앙지대를 경계를 같이하며 차지했다.

- ㈂ 진지의 이동과 토지분배 중단(수17:12, 18:9) -  토지분배를 중단하고 오랫동안 가나안 정복의 기지였던 길갈에서 실로로 옮겨 성막을 세웠다. 속히 안정된 곳에 성소를 세우려고 하였고 또 요셉의 두 지파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토지 분배에 불평이 있었기 때문이다.

- ㈃ 토지분배의 계속(수 18;10-19;1) - 여호수아는 남은 일곱 지파들에게 3인씩 뽑아 남은 땅을 답사하고 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그려서 가져오라고 하여 제비를 뽑았다.

- 처음 제비뽑은 지파는 베냐민으로 유다와 에브라임 사이에 끼어있는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지경 안에는 여리고와 예루살렘이 포함되어 있었다.

- 두 번째는 시므온 지파로 유다 지파가 차지한 기업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했다.

- 세번째는 스불론 지파(갈릴리 서남쪽)

- 네번째는 잇사갈 지파였다. 이 두 지파는 경계를 연하여 베냐민 지파와 비슷한 작은 땅을 얻었는데 가나안에서 가장 비옥한 땅들 중의 하나였다.

- 다섯번째는 아셀지파로 지중해에 면해 있는 넓은 땅이었다.

- 여섯번째는 납달리 지파로 갈릴리 북쪽으로 아셀지파와 지경을 같이하여 남북으로 뻗쳐있는 넓은 땅이었다.

- 끝으로 단지파는 큰 지파중 하나였으나 얻은 땅은 작은 편으로 납부 유다와 에브라임 사이에 동쪽으로 위치해 있었다.

- ㈄ 레위 지파와 도피성 - 레위인의 남자의 수는 22,000명이었다. 그 중에서 아론의 자손들이 제사장이 되었고 그 가문의 장남은 계속적으로 대제사장이 되었다. 그 외의 자손들은 성전을 돕게 했다. 그들의 기업은 없었고 모든 이스라엘 족속들이 드리는 화제물이 그들의 기업이 되었다. 그들의 거처가 되는 성읍은 매 지파에서 3-4성읍을 공출하여 얻은 것이 48성읍으로 그 중에 6성을 택하여 '도피성'으로 삼게 하였다.




제6장 -사사시대


사사시대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 메소보다미아의 구산 리사다임이 이스라엘을 침략할 때 하나님께서 처음 사사 옷니엘을 세울 때부터 사울왕을 세울 때까지 342년간의 기간을 말한다.

이 시대의 특징은 삿21:25에 기록된대로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함과 같이 무법시대요 암흑의 시대이며 종교적으로도 위기였다.


1. 사사들의 통치

⑴ 옷니엘과 메소포다미아와의 전쟁(삿3:7-11)

-  이스라엘의 첫 사사로 유다 지파에 속한 갈렙의 동생이며 또 그의 사위가 된 사람이며 그나스의 후손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면서 가나안 종교에 물들어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며 이방족속들과 연혼하여 이방화의 길을 치닫게 됨으로 하나님께서는 메소포다미아의 구산 리사다임을 일으켜 8년 동안 그들을 괴롭게 할 때에 그들이 환란을 통하여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매 세우신 사사가 옷니엘이었고 그가 메소포다미아를 이긴 후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평화를 누렸다.



⑵ 에훗(삿3:12-31)

- 에훗은 이스라엘이 모압의 지배 밑에서 18년 동안 핍박을 당하던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80년 동안의 태평을 누리게 한 사사로서 베냐민 지파며 왼손잡이였다.

에훗이 죽은 후 아낫의 아들 삼갈을 세워 서쪽에서의 침략자인 블레셋을 물리쳤는데 소 모는 막대기로 600명을 죽였다.


(3) 드보라(발락)와 하솔 왕 야빈(삿4:1-24) -

드보라의 시대는 종교적으로 더 타락하여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잔인한 하솔 왕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20년 동안 괴롭게 했다. 이렇게 어려운 환란 중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는데 여자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일은 오직 드보라뿐이었다.


(4) 기드온과 미디안의 침략(삿6;1-8:28)

- 드보라 사사 이후 40년의 태평세월은 이스라엘을 또 다시 부패하게 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미디안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지배케 했다. 이스라엘은 견디지 못하여 산으로 피하여 굴을 파고 산성을 만들어 지내기를 7년, 하나님께서 그들의 호소를 듣고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셨다.

기드온은 사사로 세움을 받자 먼저 바알의 제단을 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300명 용사를 뽑아 그것을 세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려 그 안에 횃불을 감추게 하고 나팔을 불 때 삼면에서 항아리를 깨고 횃불을 밝혀 원수들을 놀라게 한 전략은 전쟁사에 영원히 남을 놀라운 지혜였다.

기드온은 세습적인 왕을 거절하였는데 그의 첩의 아들(삿8:31)인 아비멜렉은 그의 어머니의 친척들의 후원을 얻어 자기 형제 70인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고 3년 만에 세겜 사람들과의 큰 전쟁에서 죽었다(삿9:53-55, 살아남은 요담의 저주대로).

아비멜렉의 통치 후에 하나님께서는 돌라를 세워 23년을 다스리게 했고 또 후에 야일을 세워 22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했다.


(5) 입다와 암몬의 침략(삿11:1-12:7) -

18년간 이스라엘을 지배한 암몬을 물리친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로 그의 형제들에게 쫓겨나서 가난한 자들과 어렵게 살고 있을 때 암몬의 공격을 받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입다를 자기들의 장관으로 삼았고 입다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 후 사울 왕 때까지 암몬은 다시 이스라엘을 괴롭히지 못했다(삼상11:1).

입다의 열심은 지나쳐 전쟁에 나가려 할 때 하나님께 서원하여 그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누구든지 자기 집 문에 나와 나를 영접하는 자를 ....번제로 드리"기로 했다(삿11:31). 그가 돌아왔을 때 그의 무남독녀 외딸이 나와서 영접하므로 그의 서원대로 딸을 드렸다.


(6) 삼손과 블레셋의 침략 -

입다 다음의 사사는 베들레헴 사람 입산으로 아들 30과 딸30을 모두 이방으로 시집보내고 장가보내는(삿12:8-10) 호화로운 중에 타락해 가는 지도자상을 볼 수 있다. 그의 통치 7년 후 스불론 사람 엘론이 사사가 되어 10년을 다스렸고 그 뒤에 압돈이 사사가 되어 아들과 손자가 80이요 어린 나귀70필을 타고 다니는 호화를 누렸으나(삿12:13-15) 블레셋의 40년 침략의 수난이 닥쳤다(삿13:1). 그때 삼손이 탄생하여 장성한 후에 20년을 사사로 지내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으나 완전히 구원하지는 못했고 그가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 죽인자보다 더 많았다.(삿16:30)


2. 사사시대의 동족상쟁 -

⑴ 길르앗과 에브라임의 내전 -

사사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을 할때 에브라임 지파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이 불리하고 위험하다고 느낄 때는 협력하지 않았으면서 오히려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다며 입다에게 그 책임을 물으려고 하였고 또 그들은 기드온 때에도 그러했기에 이런 나쁜 감정들이 복합이 되어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을 쳤다. 이 전쟁으로 에브라임은 크게 패하여 패잔병들이 요단 나루터에서 죽은 자만도 45,000명이었다(삿12:6).


⑵ 베냐민 자손과의 내전 -

이 사건은 에브라임에 거하는 레위인의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그 아비의 집에 가서 있었고 그 남편이 다시 가서 찾아 데리고 올 때 기브아의 한 노인의 집에 유숙했다. 그 성내의 비류들의 패륜적인 행동으로 첩은 죽었고 이때 분개한 레위인은 그 시체를 열두 토막을 내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돌렸고 이를 보고 분개한 온 이스라엘이 기브아 성을 치려할  때 기브아의 베냐민 사람들만이 아닌 온 성의 베냐민 사람이 한데 모여 단결함으로써 온 이스라엘의 내란으로 번지게 되었고 그 피해는 막심했다.

동족끼리의 전쟁으로 베냐민족속은 거의 전멸상태였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행동에 허무함을 느끼고 한 족속이 이즈러짐을 크게 염려하여 특별한 조치를 세웠던 것은 슬픈 역사의 한 사연이었다(삿21:3-6, 15-17).


3. 단 지파의 라이스 점령(삿18장) -

단 지파의 처음 얻은 기업은 가나안의 서부지역 산간과 해변에 이르는 비옥한 땅으로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유다 지파들과 인접한 지역이었으나 원주민인 아모리 사람들에게 밀려 산지로 쫓겨 들어가서 기업의 땅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한 채 블레셋의 압박을 받았고 결국 살길을 찾아서 가나안의 최 북방인 '라이스'로 옮겨갔다. 거기서 600명의 용사를 뽑아 '라이스'를 점령하여 그곳 이름을 '단'이라고 불렀다.




           

제7장-통일왕국의 시작


사무엘은 사사시대와 왕정시대를 연결하는 과도기의 주역을 담당한 인물로 왕정의 설립자로서 첫 두 왕인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 부은 사람이며 최후의 사사이기도 하고 최초의 선지자이기도 하며 라마에 선지 학교를 처음 세운 사람이다(삼상10:1, 16:1-13, 19:20).

그는 본래 에브라임 엘가나의 아들이었으나 근원은 레위의 후손이었다. 그의 어머니의 서원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때부터 엘리 제사장의 슬하에서 자랐고 그때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위협을 늘 받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전장에 가면 승리하리라고 생각했으나 아벡전투에서 블레셋에게 패하여 언약궤를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도 죽었다.

실로에서 소식을 기다리던 엘리는 이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죽는다. 블레셋에 의해 200년간 지속되어온 실로의 성소가 파괴됨으로 이스라엘은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이후 임시 성소는 높땅(후에 다윗이 피신)에 세워진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성소를 불태운 이 사건은 후에 예레미야7:12절에서 첫 성소인 실로를 하나님께서 태우셨는데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못 태울 것 같은냐고 경고하신다.

  사무엘은 라마를 근거지로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하며 이스라엘을 통치했으나 그가 늙으매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위협에 대한 불안이 더욱 커져서 왕을 구했고 사무엘은 기뻐하지 않았다(왕의 요구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신정정치를 반역하는 것이기에).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허락하셨고 그 허락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의 징계였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왕정은 시작되었고 그 첫 임금은 사울이었으며 그가 처음에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개별적 의식이었고(삼상10:1) 공식적으로 이스라엘 앞에서 기름부음을 받고 왕위에 오른 때는 40세였다.


1. 사울의 통치 -

사울은 기스의 아들이었으며 이스라엘 중에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다. 그는 인격의 준수함과 그 위풍이 화려함으로 온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가 되었으며 겸손한 자이기도 하였다(삼상9:22-27, 11:12-13). 그러한 그에게 지도력을 시험하는 위기가 닥쳤다. 암몬 왕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를 쳐들어 왔을 때 백성들을 다 소집하여 전쟁을 하여 크게 승리했다. 그 승리로 인해 사울의 지도력은 크게 인정을 받았고 오랜 원수 블레셋을 쳐서 이겼고 주위의 원수들은 이기게 되었으나 사무엘은 그를 버렸다.

사무엘이 사울왕을 슬퍼하게 된 것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이 하나님의 준엄한 법을 잊어버리고 독립적인 행동을 취했는데 제사장직을 침범했고 아말렉의 전쟁에서 모든 소유를 진멸하라는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사울은 질투와 시기의 노예가 되어 다윗을 죽이려고 산과 들로 그를 쫓는 비극적인 존재(악신이 임해 그를 번뇌케 하는)가 되었다(삼상16;14).


2. 다윗을 죽이려한 사울(삼상18:1-22:5) -

사울은 자기를 위해 수금을 타는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두 번씩이나 창을 던졌으나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그를 사랑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으나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딸 미갈은 그를 지극히 사랑하여 보호하였다


3.블레셋으로 쫓겨 가는 다윗 -

유다로 돌아온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거친 황무지와 산간으로 광야로 유리했다. 고원지대 엔게디에 있을 때 사울이 3,0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추격해 왔다. 그때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왔으나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칠 수 없다 하여 그의 겉옷자락을 베는 것으로 아름다운 마음을 보였다. 그 후에 또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으나 사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와서 멀리서 그것을 사울에게 고했을 때 사울은 회개하는 듯 보였으나 다윗은 그의 회개를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시글락으로 갔다(삼상27:8-12).


4. 시글락에서의 다윗(삼상27:8-12) -

(1) 아말렉을 공격 -

시글락에 살게된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의 감시와 아기스왕의 의심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사울에게 쫓겨 이스라엘 땅을 떠나기는 하였으나 그의 애국심은 버려질 리가 없었다. 그는 시글락에 살면서 블레셋과 동맹관계에 있는 이스라엘의 원수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로하여 그들의 남녀를 진멸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약대와 의복들을 취하여 왔는데 이 소식을 들은 아기스왕이 다윗을 추궁할 때 다윗은 유다 남방의 동족을 살해한 것으로 말했다. 아기스의 신임을 얻긴 했으나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삶을 산 때였다.

(2) 블레셋의 침략(삼상28:1-2, 29:1-30:30) -

다윗이 시글락에 16개월을 머물러 있는 동안 아기스 왕이 이스라엘을 치러 갈 때 다윗도 함께 전쟁에 가기를 요구하여 어쩔수 없이 아기스를 따르기로 했지만 블레셋 방백들의 완강한 거부로 다윗과 그 군대는 시글락으로 돌아왔고 동족을 치는 전쟁에서 몸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잠깐 시글락을 비운 동안에 아말렉이 침범해 와서 성을 불사르고 여자들과 자녀들을 사로잡아 갔다. 처자를 잃은 다윗의 부하들은 군급하여 그 책임을 다윗에게 돌려 그를 돌로 치자고 하는데까지 이르렀으나 다윗의 신앙은 크게 소생하여 600명을 거느리고 뒤쫓아가서 아말렉의 낙후병 소년의 도움을 받아 아말렉을 진멸하고 잃었던 아내들과 자녀들을 도로 찾아왔다.


5. 사울의 최후(삼상28:3-25, 31:1-13)

- 사울은 수많은 블레셋의 군대를 보고 마음이 떨렸고 여호와의 계시와 사무엘의 계시가 그리웠으나 사무엘은 죽었고 여호와의 계시는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의 길을 가르치는 계시는 끊어졌다. 그는 예전에 신접한 모든 자들을 다 내어 쫓았으나 신접한 여인을 찾을 만큼 심령은 타락했다. 길보아산 전투에서 세 아들과 함께 죽었다.


6. 다윗의 활 노래(삼하1:1-27) -

다윗은 아말렉을 치고 돌아온 3일 만에 비보를 듣고 종일토록 슬퍼하며 금식했다. 그 소식을 전하여 준 아말렉의 한 소년은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죽였다고 말한 죄 때문에 처형되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조상하고 슬픈 노래를 지어 유다 족속들에게 가르치게 하였고 그 이름을 '활 노래'(당시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활을 빗대어 한 노래 혹은 멜로디를 활에 맞추어 불렀다.)라 했다.

삼상31:4-5에는 사울이 자기의 칼에 엎드려 자결했다고 했으나 삼하1:9-10에는 아말렉 소년이 사울의 요구에 따라 그를 죽였다고 했다. 아말렉 병사는 거짓말을 하고있는 것이다. 이를 안 다윗은 그 병사를 처형한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왜 아말렉인가를 살펴야한다. 하나님과 대대로 원수된 아말렉의 공격과, 속이는 영으로서의 아말렉에 대한 다윗의 올바른 판단을 말이다.


제8장  다윗의 통치 (삼하1-24장, 왕상1:1-2:11, 대상12-29장)


다윗이 즉위할 때만 해도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들은 서로 분열되어 있었으나 그들을 효과적으로 단결시켜 부강한 왕국을 이루게 되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가장 강력하고 위대했던 전무후무한 왕이었다.


1. 다윗왕의 즉위(삼하2-5) -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은 유다 족속만의 왕이 되었고 사울의 넷째 아들 이스보셋이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의 지지를 받아 유다 족속을 제외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은 이스보셋의 군대를 지휘했고 요압은 다윗의 군대 장관이 되었다. 아브넬의 도발로 전쟁이 일어나 이스라엘이 패하자 아브넬이 도망 할때 아사헬이 그를 추격하다 아브넬에게 죽고  아브넬의 군대는 마하나임으로 요압은 헤브론으로 철수했고 두 집 사이의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유다는 점점 흥왕하였고 사울의 집은 점점 미약해져갔다. 그때 아브넬이 이스보셋을 배반하고 다윗에게 돌아오려고 하였는데 요압에게 피살되었고 다윗은 슬퍼하며 금식했다. 이스라엘은 다윗이 아브넬을 죽인 것이 아님을 알고 다윗을 기뻐하였고 얼마 후 이스보셋은 자기의 부하 장군에게 피살되었고 그를 죽인 자들은 그 머리를 다윗에게 가지고 와서 자기들의 공로를 인정받으려 했으나 다윗은 그들을 사형에 처했고 사울의 집의 멸망을 기뻐하지는 않았으며 드디어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2. 예루살렘(삼하5:6-9, 대상11:4-9) -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수도를 헤브론(8년통치)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예루살렘은 정치적 중앙도시로서 위치가 좋았고 기혼 샘이 있어 물 공급이 좋았으므로 통일 이스라엘의 정치적 중심이 되었고 밀로에서부터 두루 성을 쌓았다. 또 다윗이 종교적 중심지로 삼으려고 시온산에 궁전을 짓고 오벳에돔의 집에서 법궤를 옮겨왔다. 다윗이 법궤를 안치할 성전을 지으려 했으나 하나님의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3. 다윗 언약(삼하7장, 대상17장) -

실로는 파괴되고 성소는 임시로 운영될 때 다윗은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누구보다 잘알고 있었다. 다윗은 궁전을 지은 후 언약궤가 장막에 있는 것을 민망히 여겨 성전 건축을 놓고 기도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소원을 받지 않으시고 그의 아들이 건축하리라고 말씀하시고 그를 축복하셨다. 그때에 다윗에게 세운 언약은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하셨다.

다윗언약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창3:15의 "여자의 후손(씨)", 노아 때의 창9:29의 "셈의 장막"에 대한 축복의 언약, 창12:1-3의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근원", 렘31:31-34의 또 먼 후일에 예레미야의 "새 언약" 에 이르기까지 구약시대의 모든 언약들은 모두 다윗과 세운 "내 언약'에 집중되어 있다.


4. 다윗의 승리 -

(1)블레셋(삼하 5:17-25) -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블레셋이 2차에 걸쳐 침공해 왔다. 그들은 다윗이 유다만의 왕이 되었을 때보다 통일 이스라엘 왕이 되어 강성해지려는 틀이 마련되는 것에 위협감을 느껴 다윗 왕국의 분열을 노리고 에브라임 남방 르바임 골짜기에 포진하여 공격했고 다윗은 헤브론 동북에 있는 아둘람 굴에 본부를 두고 대항했다. 다윗에게는 충실한 3용사가 있었고 매복 작전으로 블레셋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다.


(2) 모압과 에돔(삼하 8:2, 대상18;2, 삼하8:13-14, 대상18:12-13) -

  블레셋을 이긴 후 모압과의 전쟁이 있었는데(모압은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한때 피난을 갔던 곳이기도 하다) 다윗이 모압을 쳐서 정복했고 모압은 이제 다윗에게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 되었다. 얼마 후에 다윗은 에돔을 쳐서 이기고 에돔에 수비대를 두었고 암몬과 모압을 이김으로 중요한 무역로를 확보하고 국력을 신장하는 발판을 이루게 되었다.(두로와 에일랏을 연결하여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중계무역을 통해 부를 쌓게된다.)


(3) 소바와 다메섹과 하맛(삼하8:3-12) -

다윗은 북쪽의 강력한 왕국 소바(다메섹 북쪽에 위치한 아람의 도시국가)를 점령했고 전쟁에서 마병1,700과 보병2만을 사로잡았다. 그때 소바를 도우려고 아람 군대가 동원되었으나 2만2천의 전사자를 남기고 굴복했고 다윗은 다메섹에서도 조공을 받으며 수비대를 두어 지키게 했다. 또 다메섹과 전쟁 상태에 있던 최북단에 위치한 하맛왕이 자원하여 조공을 드리는 자가 되었다. 두로와는 평화적인 교역을 통해 세력을 뻗쳤다.


(4) 암몬(삼하10장, 대상19장) -

다윗이 암몬 왕 하눈에게 베푼 호의가 오해를 사게 됨으로 암몬(위에서부터 암몬-모암-에돔이 위치)과의 전쟁을 했다. 이 전쟁으로 아람계의 여러 나라를 완전 정복하여 중요한 지대를 수중에 넣는 좋은 기회가 되었지만 소바왕 하닷에셀이 패잔병들과 아람인들을 불러모아 전쟁을 일으켰고 다윗의 군대는 요단강을 건너가서 헬람에서 그들과 싸워 승리했다.

요압은 암몬의 수도 랍바를 포위했고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은 범죄를 한 것도 이 전쟁 때였으며 요압이 다윗의 지령을 따라 우리아를 전사케 했고 마침내 랍바성은 함락되고 암몬은 완전히 다윗왕국의 한 지방이 되고 말았다.


5. 다윗 왕국의 판도

다윗은 온 유다와 이스라엘의 통일뿐만 아니라 암몬과 블레셋 모압과 에돔 다메섹과 소바와 마아가와 하맛까지(유프라테스강까지) 정복하여 편입시키기도 하고 조공을 받기도 하며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것이 다윗 때에 역사적 사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제 이스라엘은 주변 국가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상비군 28만 8천을 두고 12반열로 나누어 매달 2만 4천명씩 예루살렘 궁을 지키도록 했다. 또 행정적으로 각 지파마다 관할하는 관장을 두어 다스리게 했으며 궁중에 고문단과 서기관을 두어 국사를 논의했으며 인재들의 등용과 종교제도를 세워 대제사장 사독과 아히멜렉 밑에 제사장들과 레위족속들을 분대별로 조직했다.


6. 다윗왕의 선행과 악행 -

다윗의 아름다운 행위는 요나단의 유일한 아들로 절뚝발이인 므비보셋을 찾아 왕궁에 살게 하고 사울의 밭을 돌려주었으며 그의 상에서 함께 먹게 했고 왕자 중 하나와 같이 대우했다.

또 기브온 사람들에 대해 공의를 베푼 일로 기브온 사람들에게는 여호수아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사울이 깨고 그들을 학살하였는데 다윗 왕 때에 3년간 큰 기근이 임하여 다윗이 하나님께 그 원인을 물어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사울의 악한 행위를 말씀하셨다. 그는 기브온 거민들을 불러 소원을 다 들어주었다.

다윗의 악행은 밧세바와의 무서운 죄악(삼하11:1-12:25)으로 요압이 랍바성을 포위하고 있을 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불러 범하고 그가 잉태하자 우리아를 전선에 보내 전사케 한 후에 밧세바를 아내로 취한 것이며 또 왕위에 오른 여러 해 후에 9개월 20일에 걸쳐 인구 조사를 하였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슬퍼하시며 이스라엘을 치시매 온 땅에 온역이 있어 죽은 자가 7만이었다. 후에 다윗은 회개하였다. 이 일이 악함은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 소유로 아는 세상 권세를 추구하는 교만에 빠진 때문이다.


7. 다윗의 말년(삼하13-20, 왕상1:1-2:11, 대상22:28-29) -

다윗의 말년에 가정의 어려움이 계속되어짐은 하나님의 징계였다. 왕궁에서 왕위의 계승을 놓고 반역과 반란이 계속되었다.


(1) 압살롬의 반역(삼하13-19) -

압살롬은 다윗의 3남으로 그술성의 왕 달매의 딸 마아가 공주에게서 난 아들로 다윗의 장남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범하자 양털 깎는 잔치 자리에 암논을 불러서 죽이고 누이에 대한 복수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왕권을 탐내었으나 두려움이 생겨 어머니의 고향 그술로 도망하여 3년을 지낸다.

다윗은 압살롬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했고 요압의 중재로 압살롬을 데려오기는 했지만 그 아들을 보려 하지 않았다. 사랑은 하지만 압살롬의 죄과를 전부 용서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압살롬은 왕자의 입장에서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부하를 두며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의 마음을 사, 신임을 받으려고 애를 써서 4년 후에 헤브론으로 가서 "왕이 되었다"고 나팔을 불어 반역을 일으키매 따르는 자가 많았고 아히도벨과 군대장관 아마사도 압살롬을 따랐다. 다윗은 압살롬을 피해 피난길에 올랐다. 그때 사독과 아비아달이 함께 하였고 충복 600명과 그렛 사람과 블렛사람도 함께 했다.

두 제사장이 법궤를 가져가자고 하였으나 다윗은 이를 거절하고 생명을 온전히 여호와께 맡겼다. 그는 두 제사장과 고문관인 후새를 예루살렘 압살롬에게 보내어 아히도벨의 지략을 물리치게 하였다.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 그곳의 부호들과 유지들이 다윗의 군대를 도왔고 다윗의 군대와 압살롬의 군대가 정면 대결하게 되었다. 다윗은 출전하는 그들에게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고 간청했으나 에브라임 수풀에서 압살롬의 군대는 패전하여 압살롬은 죽었고 다윗은 심히 슬퍼함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릴 정도였다.


(2)세바의 반역(삼하20:1-26) -

압살롬이 죽자 온 이스라엘이 다시 다윗에게 돌아왔고 다윗의 환궁을 서두르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서로 환궁을 앞장설려고 하는 충돌 속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분열을 일으켰다. 이때 베냐민 사람 세바가 일어나 이스라엘을 충동하여 반역을 일으켜서 온 이스라엘이 세바를 따르므로 압살롬의 반역보다 사태가 더 심각해졌다. 다윗은 이 일에 압살롬의 반역에 주동이 됐던 아마샤를 군대장관으로 임명하여 3일 안에 군대를 모으고 세바를 추격하게 했다.    그러나 요압 형제들이 이 일을 못마땅해 하였다. 정한 3일이 되어도 아마사가 돌아오지 않자 다윗은 요압의 동생 아비새에게 세바를 추격할 것을 명령하였고 도중에 아마사를 만나자 요압이 아마사를 죽였다. 세바는 아비새의 추격을 받아 어떤 성에 숨었으나 성의 포위됨을 보고 한 여인이 지혜를 내어 세바의 머리를 아비새에게 넘겨주므로 반란은 종결되었다.


(3) 아도니야의 반역과 솔로몬의 즉위(왕상1:1-2:9, 대상22:6-23:1) -

다윗이 나이 많아 늙었을 때 넷째 왕자 아도니야가 불법으로 왕위에 오르려 했다. 그는 군대장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자기편으로 포섭하여 일을 진행하였다(요압은 기회주의자였다). 선지자 나단이 밧세바를 시켜 아도니야의 반역을 다윗에게 알렸고 나단도 다윗에게 들어가 알렸다.

다윗은 즉시 솔로몬을 왕의 노새에 태우고 기혼의 대제사장 사독의 성막에서 기름을 부어 왕이 되었음을 선포케 했고 명령대로 행하여 솔로몬 왕 만세를 부르자 아도니야와 요압의 군중들이 놀라 흩어짐으로 아도니야의 계획은 무너지고 말았다. 다윗은 임종을 앞두고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며 행할 것과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것과 모든 백성들에게 솔로몬을 도와 성전 완성에 크게 협력할 것 등을 유언으로 호소했다. 다윗의 통치 기간은 40년으로 헤브론에서 7년 예루살렘에서 33년이었다.



제9장  -  솔로몬의 통치(왕상2:12-11:43, 대하1-9장)


-다윗은 목자로 많은 고난과 전쟁을 체험하면서 왕위에 올랐으나 솔로몬은 왕자로 호화롭게 자라 왕위에 올랐다. 자기의 궁전을 13년에 걸쳐 건설했고 또 많은 건설을 하므로 백성들에게 세금을 많이 거뒀고 또 그 건축할 재료들을 위하여 무역에 힘을 썼으며 국방을 위해 말과 병거들을 수입했다. 그런 정책으로 나라는 부강했으나 영적으로는 점점 타락해져서 하나님의 책망을 들었다.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을 때 아도니아가 밧세바에게 다윗 왕을 봉양하던 아비삭을 아내로 줄 것을 요구하였다.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야심을 알아차리고  브나야를 보내어 그를 죽였는데 이는 선왕의 후궁을 계승하여 소유함은 그 왕좌를 계승한다는 하나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그를 지지한 대제사장 아비아달을 파면하여 쫓아내고 군대장관 요압을 죽였으며 시므이를 처형했다. (아비아달 계열은 아나돗으로 유배되었고 이후 사독 계열이 대제사장이 되었으며 예레미야도 아나돗 출신이다)



1.솔로몬의 번영

⑴ 외교와 국방 -

솔로몬은 애굽과의 친선을 외교적 승리라고 생각하여 바로의 딸을 아내로 맞아 자기의 궁전과 같은 궁을 지어 주었고 바로도 그 딸을 위하여 게셀을 선물로 주었다. 솔로몬은 게셀에 밀로와 예루살렘과 하솔과 므깃도와 같이 국방의 요새지로 삼았다. 또 두로의 히람왕과 동맹을 맺어 식량을 수출하고 레바논의 백향목과 잣나무를 수입했다. 히람은 금과 건축의 기술자들도 보냈다. 솔로몬은 국방을 견고하게 하려는데 힘을 썼는데 국고성과 병거성과 마병성을 건축했다. 그 역군들은 아모리, 헷, 브리스, 히위, 여부스의 남아 있는 자들로 이스라엘의 노예된 자들이었다.


⑵ 재정과 경제

- ㈀ 세금과 공물 - 솔로몬은 세금과 공물의 징수를 위해 이스라엘을 12지역으로 나누고 각 지역 마다 관장을 두어 왕과 왕실을 위해 식물을 준비케 하되 각 지역마다 1개월분씩을 분담케 했다.

㈁ 노력 동원 - 솔로몬은 가나안에 남아있는 많은 이방인들을 종으로 삼아 역군(30,000명)과 벌목군(10,000)과 담군(70,000)과 돌을 뜨는 자(80,000)로 썼다.

㈂ 조공물 - 외국으로부터 많은 조공물이 있어 금과 은의 그릇들과 의복, 갑옷, 향품, 말과 노새들이 해마다 정한 수대로 들어왔고 스바의 여왕이 가져온 선물도 금과 보석과 향품이 많이 있었다.

㈃ 무역 - 나라의 경제를 부강케 하기 위해 무역에도 힘썼다. 홍해를 통해 '애시온-게벨'(엘랏)에서 배를 짓고 오빌(금 생산지로 아라비아 남단에 위치)에 왕래하여 금, 은, 상아, 잔나비, 공작, 진귀한 백단목, 보석들을 수입했다. 또 애굽과 쿠웨에서 많은 말들과 병거들을 수입하여 다른 나라들에 팔기도 했다. 국가의 번영과 확대에 많은 노역과 세금의 부담이 점점 늘어감으로 백성들의 불평이 늘어갔다.

⑶ 성전 건축(왕상5-6, 7:15-51, 대하2-4) -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해 많은 물자를 준비했으나 하나님께 거절당하고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시작한 것은 그가 즉위한지 4년째 되는 봄 모리아 산이었다. 7년을 걸쳐서 11년 가을에 완공되었는데 성전의 규모는 장이 60규빗, 광이 20규빗, 높이 30규빗이며 내부는 돌로 분리되어 있었고 지성소는 장이 20규빗, 광이 20규빗, 고가 20규빗이며 외소는 장이 40규빗이었다. 또 마루와 벽은 돌로 되었고 백향목으로 깔았다. 백향목에는 박과 핀 꽃으로 아로새겨 돌이 보이지 않게 하였고 그 위에는 정금으로 입혔다.

성전 벽에는 다락과 골방을 만들었으며 성소의 정면에는 낭실이 있고 두 큰 놋기둥으로 장식했다. 그 우편의 것은 '야긴'이라 했고 좌편은 '보아스'라 했는데 이 두 기둥은 성전의 영원무궁성과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다윗왕의 원하던 것이 솔로몬에게서 이루어졌다.

출애굽한지 480년만에 세워진 성전 이 위대한 성전 완공 후에 성대하고 숭엄한 헌당제사를 드렸다. 양과 소의 제물이 너무 많아 셀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솔로몬이 기도를 드릴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기도를 받으시고 그와의 언약을 새롭게 하셨다.


⑷ 왕궁 건축(왕상7:1-12) -

솔로몬은 13년에 걸쳐 그의 궁전을 건축하였다. 또 '레바논 나무궁'과 다른 여러 궁을 지었다.


⑸ 솔로몬 시대의 문서활동 -

다윗왕과 솔로몬 시대는 문서 활동의 황금시대였다. 다윗은 시인이고 솔로몬은 지혜자요 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궁중에 서기관을 두어 다윗과 솔로몬의 행적을 기록케 했다. 성전을 중심으로 음악도 크게 발달했다. 성전에는 4,000명의 노래하는 자가 있었고 중요한 성경들이 기록된 찬란한 시대였다.


2. 솔로몬의 타락(왕상11:1-40) -

나라가 부강하고 번영하였고 백성들은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나 통치의 말기에 세금과 부역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지혜와 부귀와 총명과 영화를 누렸으나 끝까지 충성하지 못하고 이방의 많은 여인들을 아내로 맞아 왔다. 이는 정책적인 것으로 하나님께는 배신적인 것으로 그 여인들이 자기들의 신들을 가지고 와서 분향했고 솔로몬도 그들을 위해 산당을 지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빼앗을 것을 선포하셨다. 솔로몬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켰고 다메섹(수리아)의 르손을 일으켰으며 여로보암을 일으켜 그의 원수가 되게 하셨다.



제10장 -북 이스라엘(왕상12-22장, 왕하1장-17장)


1.이스라엘의 첫번째 왕, 여로보암(931-910B. C.) -

유다 지파를 제외한 다른 지파들의 오랜 불만으로 유다 지파에 대한 반발의식이 숨어 있었고 르호보암은 종족적인 단합에 실패하고 이스라엘과 유다의 분열을 가속화시켰다. 르호보암은 유다 지파 하나만을 여로보암은 10지파를 중심으로 북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


2. 여로보암의 정책과 범죄(왕상 12:25-14:20)

- 여로보암은 위에 올라 세겜을 건축하고 거처를 삼았으나 부느엘을 건축하고 그곳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다시 디르사(아가6:4절에 정결한 신부의 순결성을 정복할 수 없는 요새인 디르사로 비유)로 옮겨 거처를 삼았다.

그는 백성들이 절기에 예루살렘으로 갈 것을 염려했고 불안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는 남쪽 벧엘에 하나는 북쪽 단에 두어 제사하게 함으로 일반인을 제사장으로 삼고 절기도 유다와 비슷한 날로 정하여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막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형상화시켜 보려는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3. 여로보암 왕조의 몰락(왕상13:1-14, 14:18, 15:25-30) -

여로보암은 금송아지와 바알신도 함께 섬기는 혼합적인 제사를 드리는 악을 범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징벌하게 되었고 벧엘에서 한 선지자가 와서 "다윗의 집에 요시아라 이름하는 아들"이 나타나서 여로보암의 제사장들의 뼈를 그 단 위에서 불사를 것을 예언하였다. 여로보암은 진노하여 손을 펴서 선지자를 잡으려 할 때 그 편 손이 말라 거두지 못했다. 그때 선지자의 도움을 청했고 선지자의 간구로 그 손이 성하여졌으나 마음이 강퍅하여 돌이키지 않았다.

그후 그의 아들이 병들었을 때에 아내를 변장시켜 선지자 아히야에게 보냈는데 선지자는 여로보암의 집이 진멸될 것을 선포했으나 그는 회개하지 않았고 22년간 이스라엘을 치리하다 죽었다. 그 아들 나답이 위에 올라 2년을 치리하다 블레셋 깁브돈을 포위하고 있을 때 바아사의 반란으로 피살되었다.


4. 바아사의 몰락 -

이스라엘 왕국을 혁명으로 이어받은 바아사는 24년간 재위하였고 여로보암의 죄악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유다왕 아사와 일평생 전쟁하였다. 그후 그의 아들 엘라가 왕위에 올라 2년을 치리했으나 깁브돈을 점령하기 위해 군대장관 오므리를 파송하여 그 성을 포위하고 그는 궁내 대신 아르사의 집에서 마시고 취할 때 신복 군대장관 시므리에 의해 피살되어 바아사의 왕가는 예후의 예언대로 영원히 도말되었다(왕상16:11-12).


5. 오므리의 통일(왕상16:8-22) -

  시므리와 오므리는 엘라왕의 군대 장관으로 오므리가 깁브돈에 출정하여 있을 때에 시므리가 반란으로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깁브돈의 군대들은 오므리를 왕으로 세우고 본국의 수도인 디르사 성을 포위했고 시므리는 성이 함락됨을 보고 왕궁에 불을 놓고 자살함으로 그의 치리기간은 7일뿐이었다. 그러나 그 때 이스라엘은 둘로 분열되어 절반은 '디브니'를 왕으로 삼으려 했고 절반은 오므리를 쫓았다. 이 상태는 4년간 지속되었고 오므리가 디브니를 이기고 이스라엘 전국을 다스리는 왕이 되엇다.



제11장 - 오므리 왕조의 번영과 몰락(왕상16:21-왕하10:11)


- 여로보암이 북 이스라엘을 창건 후 50년 동안에 세 번의 혁명이 있었고 바아사 시대 외에는 정세가 심히 불안했다. 오므리 왕조 때에 비로소 안정을 얻었으나 종교적으로는 암흑기였다.


1. 오므리 왕조 창건까지의 이스라엘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분열 이후 긴장 속에 전쟁이 계속되었고 바아사 시대에 유다를 침략함으로 더욱 치열해졌다. 바아사는 라마를 점령하고 성을 건축하여 기지를 삼아 유다를 전부 점령하려 했으나 유다는 아람 왕 벤하닷에게 원병을 청하여 그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은 라마 건축을 버리고 후퇴하였고 유다는 이것을 취하여 게바와 미스바를 강화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시므리 왕을 죽인 군대장관 오므리가 정권을 잡으므로 정국은 안정 되었고 그의 왕조는 4대에 걸쳐서 44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오므리는 세멜에게서 산을 사고 그 위에 성을 건축한 후 사마리아라고 칭한후 수도로 삼았다.   또 다윗왕과 솔로몬 이후 잃어버렸던 권세를 회복하여 모압을 속국으로 삼아 지배하게 되었고 모압이 조공을 바쳤다. 오므리 왕조는 강력하고 번영한 나라였으나 영적으로는 크게 타락한 때였다.


2. 아합왕의 전사(왕상16:29-22:36) -

아합왕은 부왕 오므리의 뒤를 이은 후 부왕의 강력한 정책을 확대시켜 '트랜스 요르단'을 장악하기 위해 힘을 썼다. 다메섹을 경계하기 위하여 두로와 시돈(페니키아:베니게)으로 동맹을 맺고 그 동맹의 증표로 이세벨을 아내로 맞았고 남방 유다와의 동맹을 위해 그의 딸 아달랴를 유다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에게 주었다.

이세벨은 바알신에게 헌신한 자였기에 이스라엘을 바알신화시키려고 투쟁일선에 나섰다. 종교적인 위기가 닥친 것이다. 아합왕은 상아궁을 지어 호화로운 생활을 탐했고 나봇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앗았다. 아합왕의 권세와 호화로운 궁전과 그의 세력도 끝이 와서 아람과의 전쟁에 죽었다.


3. 오므리 왕조의 몰락(왕상22:40-왕하10:11) -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위를 계승하여 2년간 치리하였으나 병사하고 그 동생 여호람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바알 신상을 제거하고 아람군이 침입한 어려운 때에는 굵은 베를 입고 옷을 찢으며 회개하기도 했으나 참 회개가 아니었음은 선지자 엘리사를 죽이려고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아람왕이 '트렌스 요르단'을 사이에 놓고 긴장상태에 있었고 아람왕 벤하닷이 죽고 하사엘이 왕위에 올랐을 때 길르앗 라못(요단강 동편의 길르앗의 요새이며 도피성)을 탈환하기 위하여 아람과 싸울 때 부상을 입어 치료하는 중에 군대장관 예후에게 피살되어 오므리의 왕조는 엘리야의 예언대로 4대만에 무너졌다.


4. 오므리 왕조가 유다에 미친 영향 -

오므리 왕조는 유다와 혼인 정책으로 연합하여 남북의 긴장을 해소하고 주변 국가들에 국력을 확장하려는 이해관계에서 하나가 되었다. 여호사밧은 모압과 암몬의 연합군을 이김으로 부귀와 영광이 극에 달했으나 이스라엘과의 친선이 깊어짐에 따라 종교적으로 부패와 타락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의 축복을 잃게 되었다. 국권도 점점 쇠약해져 그 아들 여호람 때에 에돔과 립나가 배반하여 수하에서 떠났고 아합의 딸 아달랴는 유다 왕국의 씨들을 학살하는 비참한 결과를 보게 되었다. 아달랴가 요아스가 위에 오를 때까지 6년간 통치하게 되어 유다왕국의 계대가 일시 중단되는 비극을 보게 되었다.


5.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동(왕상17-19, 21: 왕하1:1-2:11(엘리야) (왕하2:12-13:21(엘리사) -

아합왕과 그 아들의 통치 시대에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동이 가장 대표적인 선지자의 활동이었다. 엘리야는 길르앗 디셉 사람으로 여러 가지 이적을 보면

①아합왕 때에 삼년반 동안의 가뭄을 선포하고 그릿 시냇가에 숨어 까마귀가 날라주는 떡과 고기로 연명하다가 시돈 땅 사르밧으로 가서 한 과부와 그의 아들을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도록 기적으로 먹인 일과 그 아들이 병들어 죽은 후 그 아들을 기적으로 살린 일이다.

②3년후 이스라엘에 가뭄이 심하므로 아합이 가뭄을 엘리야의 탓으로 돌려 많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엘리야를 죽이려 했으나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을 갈멜산에 모으고 참 신이 ‘여호와냐 바알이냐’를 가리는 격전을 벌였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을 태우며 도랑에 채운 물을 핥게 하던 이적을 일으켰고 이방신의 선지자들을 다 죽였다.

③자기를 죽이려는 아합과 이세벨을 피해 호렙산으로 가는 도중 심신이 지쳤을 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대신하게 하라는 분부를 하셨다.

④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 있을 때 언약의 백성들에게 '땅'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인데 그 기업을 지키려는 언약의 가정과 개인의 권리를 멸시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책망하시는지 보여 주었다.

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된 후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었을 때에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가서 그 병이 낫겠느냐고 물으려 할 때 엘리야가 왕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는 예언을 듣고 왕이 두 번에 걸쳐 50부장과 50인의 군대를 보내 그를 잡으려 할 때 엘리야의 기적으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은 모두 죽었다.

⑥ 그의 승천으로 위대한 선지자의 생애는 마지막의 찬란한 막을 내리는 영광스러운 장면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엘리사의 사역을 보면 그는 부유한 농가 출신으로 열두 겨리 소로 밭을 갈 때에 엘리야를 통해 부름을 받았고 그의 활동 기간은 여호람왕의 초기부터 예후를 거쳐 여호아하스와 요아스왕 때까지 약 50년이다. 그는 궁중의 왕들과도 교통이 있었고 많은 이적 중에서도 사람들의 병을 고치거나 불쌍한 자들을 돕는 일상의 일들이 많았다. 엘리야의 선지학교를 더욱 번창시켜 선지자 양성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제12장 -  예후 왕조의 발흥과 몰락(왕하9:11-10:36, 13:, 14:16-29)


- 오므리 왕조의 마지막 4대왕 여호람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예후의 왕조는 5대에 걸쳐 이스라엘을 통치했는데 89년간의 기간으로 오므리 왕조의 44년에 비해 2배가 넘는 장기간이었고 종교적인 면에서는 예후의 왕조가 오므리의 왕조와는 달리 바알신을 제거하는데 힘을 쓰긴 했으나 우상을 떠나지는 못했다.

예후가 오므리 왕조를 멸한 것은 20년전에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로 예언하였던 것으로 선지자 엘리사는 생도 하나를 길르앗 라못으로 보내어 군대 장관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고 아합의 집을 숙청하여 멸할것을 지시했다. 예후는 선지자의 지시를 받은 후 곧바로 왕이 되어 요람왕을 죽이고 성을 차지하였다. 그때 요람왕의 병문안을 온 유다왕 아하시야는 이스라엘에서 탈출하였으나 므깃도에서 죽었다.

예후는 이스르엘로 돌아와 이세벨을 죽이고 아합 왕가에 속한 모든 귀족들과 바알의 제사장들을 다 죽여 그 왕가를 전멸시켰고 신당의 목상을 불사르고 바알의 당을 헐어 변소를 만들었으나 그도 하나님의 율법을 전심으로 섬기지 않았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음으로 다메섹 왕 하사엘과 앗수르왕 살만에셀의 침략을 받아 세력은 줄어들고 열국들의 압박과 수모를 받게 되었다.


1. 예후(841-814 B.C.)와 다메섹(아람) 및 앗수르의 침략 -

예후가의 약화의 원인은 종교적으로는 아합집의 대대적인 숙청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그의 지나친 숙청으로 하나님의 뜻과 달리 존귀한 고급 관원들까지 숙청을 해서 그를 도울 수 있는 고급 인력을 잃게 되었고 혁명이 너무 감정적이어서 유능한 사람들도 협력하기를 꺼렸고  유다왕 아하시야를 죽이고 그 형제들까지 죽임으로 유다와의 긴장이 고조되고 북쪽 베니게(두로와 시돈을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로 해상무역이 발달하여 스페인 카르타고까지 영역을 넓혔고 바알을 숭배했다.)와의 관계악화로 경제적 정치적 부담이 컸으며 또 예후의 정치적 능력의 부족함이 이유라고 학자들은 본다.

- 다메섹(아람) 왕 하사엘의 침략 : 범죄한 예후를 징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다메섹의 아람왕 하사엘을 일으켰다. 그는 '트렌스 요르단'을 공격하여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모든 땅을 점령했다.

- 앗수르왕 살만에셀의 침략 : 이스라엘의 예후왕은 앗수르의 압박에 시달려 마침내 앗수르왕 살만에셀에게 많은 조공을 바쳐야 하는 위치로 몰락했다.


2. 구원자를 만난 여호아하스(814-798B.C., 왕하13:1-9) -

예후의 나라는 약화되었으나 16년간의 긴 기간을 통치했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도 왕이 되어 16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나 다메섹에게 시달려야 했다. 아람 군대들은 이스라엘의 영토를 지나 블레셋을 공격하고 예루살렘까지 진격했다. 이때 여호아하스는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여 하나님께서 한 구원자를 보내셨는데 앗수르를 일으켜 다메섹을 치므로 이스라엘은 다메섹의 압박에서 해방을 받았으나 완전한 해방은 아니었다.


3. 국력를 회복한 요아스 왕(798-782B.C.)(왕하13:10-25, 14:15, 16, 역대하25:17-22) -

여호아하스가 죽고 그 아들 요아스가 위에 올라 국력은 점차 회복되었다. 그는 16년을 치리하며 악한 길을 걸었으나 선지자 엘리사가 죽을병이 들었을 때는 찾아가서 눈물을 흘리며 사랑과 존경을 나타냈다. 엘리사는 요아스에게 활로 땅을 치라고 하였는데 요아스가 땅을 세 번만 쳤더니 엘리사가 왜 5-6번을 치지 않았느냐고 책망하면서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칠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예언대로 아람을 세번 쳐서 이겼다.


4. 여로보암 2세의 부흥(793-753B.C, 왕하14:23-29)

-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2세는 부왕의 업적으로 부강하고 안정된 황금시대를 맞았고 통치 기간도 40년이라는 최장기간을 누리며 '하맛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사해)까지' 회복했고 다메섹을 속국으로 삼았으며 '트렌스 요르단' 전체를 장악했다.


5. 호세아와 아모스의 활동

호세아 -

호세아는 여로보암 2세의 전 통치기간 약 40년을 활동한 선지자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활이 풍요로운 만큼 종교적으로는 타락된 길을 걸었기에 그는 거짓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꾸짖으며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외쳤다.

아모스 -

아모스도 호세아와 같은 동시대 여로보암 2세 때의 선지자로 호세아와는 달리 남방 유다 출신으로 북방 이스라엘에 와서 활동한 선지자였다. 그는 타락해 가는 이스라엘에 유다가 이미 예속되어버린 상태에서 타락해 가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며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간곡히 외쳤다.

요나

요나 선지자도 여로보암 2세 때 활동했던 선지자로 그가 니느웨에서 복음을 전파했을 때 그들이 크게 회개하고 여호와의 종교로 돌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서 이방에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으나 앞으로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포로되어 갔을 때의 생활을 미리 준비하심이며 니느웨의 회개는 이스라엘에게는 축복이었다.


6. 예후왕조의 마지막 왕 스가랴(753B.C., 왕하15:8-12) -

이미 선지자 아모스가 예언했던 대로 여로보암 2세의 아들 스가랴가 위에 올랐으나 불과 6개월 만에 반역이 일어나 살룸에게 죽었다.



제 13장 북방 이스라엘의 쇠퇴와 멸망(752-722B.C., 왕하15:13-17:41)


여로보암 2세의 치리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그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기간이었으나 그의 아들 스가랴가 살룸에게 죽자 북 이스라엘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살룸은 혁명으로 예후 왕가를 무너뜨리고 왕위에 올랐으나 한 달 뒤 혁명을 일으킨 므나헴에게 죽었다.

-므나헴 왕조(752-742 B.C., 왕하15:16-22) - 므나헴은 혁명을 일으킨 후 그를 환영하지 않은 딥사 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였고 앗수르 세력에 눌려 조공을 바치며 속국이 되었다 . 그의 통치 10년이 끝나고 그 아들 브가히야가 왕이 되었으나 계속되는 궁중반란으로 2년후 죽었다.


1. 앗수르에 항복한 베가(742-732B.C., 왕하15:27-31) -

브가히야를 죽이고 왕이 된 베가는 20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나 왕이 된지 6년 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트렌스 요르단'과 납달리를 점령하고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갈 때에 호세아의 반란이 일어나 베가를 죽였고 호세아는 앗수르의 보호 아래 이스라엘 왕이 되었으나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완전히 점령이 되는 때였다.


2. 마지막왕 호세아(왕하17:1-6) -

베가를 죽이고 호세아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앗수르가 '트렌스 요르단'과 길르앗과 납달리를 점령하고 9년을 치리하는 동안 앗수르에 굴복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디글랏 빌레셀이 죽자 호세아는 앗수르를 벗어나려 했다. 이것을 안 디글랏 빌레셀의 아들 살만에셀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다시 호세아는 조공을 바쳤다. 애굽과 동맹을 맺고 앗수르에 조공을 거절했으나 애굽은 이스라엘을 도울 힘이 없었다.

앗수르가 다시 공격해 와서 호세아를 잡아 가두고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사마리아 성을 삼년동안 포위하였다. 호세아 9년에 성은 함락되었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히니 북 이스라엘의 역사는 끝이 났다.(209년 존속)

하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와 그 외에도 많은 선지자를 보냈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고 결국 앗수르는 많은 포로들을 잡아가고 거기에 많은 이방 사람들을 이민시켜서 잡족의 동거로 종교의 혼란이 생기며 이방 신과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같이 섬기는 혼합종교와 혼혈족으로 인해 "사마리아 인"이라는 한 족속이 생겨났다.


3. 앗수르와 이스라엘 -

이스라엘 왕국은 앗수르에 패망했고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앗수르는 북부 메소보다미아의 광야에 자리잡고 서로는 수리아와 남으로는 바벨론과 북쪽은 '우라르트'와 동쪽은 파사의 고지로 국경이 이루어져 있다. 그 세력이 최고였을 때에는 바벨론과 애굽, 수리아와 팔레스틴과 메대 전역에 그의 세력이 확대되어 있었고 주로 셈계통의 종족들로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한 '진노의 몽둥이요 막대기며 세내어 온 삭도라 했으며 넘치는 하수라'고 했다.

 

  유다-BC722년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도 남 유다는 586B.C.까지 계속되었다. 역사적 배경은 이스라엘이나 유다가 비슷하다. 계속되는 앗수르의 위협과 남북의 충돌과 선지자들의 활동은 거의 같고 남 유다와 에돔과의 관계가 북 이스라엘과 다메섹(아람)과 비슷하나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북 이스라엘은 왕조가 여러번 바뀌었으나 남 유다는 다윗 왕조로서 다윗왕가가 일관하였다는데 있다. 한때 일시적으로 아합왕의 딸인 아달랴가 유다왕국을 지배한 적도 있었으나 7년 만에 다시 요아스가 왕위에 올랐다.



제14장  남북갈등 시대의 유다(931-870B.C., 왕상14:21-15:24, 대하10-16)


여로보암이 분열할 당시에 르호보암을 따른 지파는 유다뿐이었다. 베냐민 지파는 처음에 지역적 특성 때문에 여로보암을 지지하였으나 르호보암에게 돌아와서 유다와 합하게 되어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대로 여로보암은 열지파를 소유하였다. 또 제사장들과 레위족속들과 신실한 신앙인들이 유다로 돌아왔다.


1. 분열 유다의 첫왕 르호보암과 애굽의 침략 -

르호보암(931-913B.C., 왕상14:21-31, 대하10-12) - 르호보암은 41세에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17년간 통치하였다. 그의 신앙은 부왕 말기의 영향과 그 모친의 영향을 받아 타락하여 문란하게 우상을 섬겼다. 이스라엘과 전쟁이 있었으며 애굽왕 시삭의 침략이 있어 큰 피해를 보았다.

- 시삭의 침략(왕상14:25-27, 대하12:2-12) - 르호보암 5년에 애굽왕 시삭의 예루살렘 침략은 그의 교만을 징벌하기 위한 하나님의 징계였다. 르호보암은 시삭에게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과 솔로몬의 금방패까지 빼앗기고(조공으로 바침) 유다의 독립을 유지했다.


2. 여로보암을 이긴 아비야왕(913-911B.C., 왕상15:1-8, 대하13:1-22) -

르호보암이 17년을 다스린 후 그 아들 아비야가 왕이 되어 3년을 다스렸다. 그도 아비의 죄를 버리지 못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다윗과의 언약 때문에 은혜를 주셔서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심으로 북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40만의 군사로 80만의 여로보암의 군대를 이겼다. 북이스라엘은 50만의 희생자를 내었고 아비야는 종교 중심지 벧엘과 몇 성읍과 마을을 빼앗았다.


3. 개혁왕 아사의 성공과 실패(911-870B.C., 왕상15:9-24, 대하14-16)

아비야의 아들 아사가 왕위에 올라 41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부왕의 3년의 통치에 비해 장기간의 통치였고 신앙의 통치자로 우상을 제거했다.


⑴ 아사의 개혁 운동(왕상15:11-15, 대하14:2-5, 15:8-18) -

그는 개혁을 궁중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머니의 우상숭배를 꾸짖고 태후의 위를 폐했으며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들을 찍어 살랐으며 열조의 우상들과 남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제거했으나 산당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않았다. 그의 마음은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전쟁을 막아주시고 유다에 평안을 주셨다. 개혁 운동은 선지자 아사랴의 힘이 컸다.


⑵ 애굽 및 구스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대하14:9-15) -

41년의 통치기간 중 아사왕은 두 번의 큰 전쟁을 치러야 했다. 하나는 구스(에디오피아) 세라의 군대는 군사가 100만이요 병거가 300승이었고 아사왕의 군대는 58만이었다. '마레사'까지 진입한 적군을 맞아 아사왕은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크게 승리하여 많은 전리품들을 얻었고 하나는 이스라엘의 바아사왕과의 전쟁이었다.


⑶ 이스라엘과의 전쟁과 하나님의 책망(왕상15:16-22, 대하16:1-10) -

아사왕 16년에 바아사왕이 유다를 공격해 왔는데 세라 군대와의 전쟁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던 그 믿음이 없었다. 바아사가 라마를 점령하고 거기에 성을 건축하려고 할 때 아사왕은 아람왕 벤하닷의 원병을 청원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했고 바아사는 북방 도성들의 방비를 위해 철군했는데 아사왕은 바아사가 라마성을 건축하던 재료로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했다. 그때 선지자 하나니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왕을 의지하였다고 책망하자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아사왕은 하나님의 징계로 발에 중병이 들었을때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불신앙을 회복하지 못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고 2년 후 죽었다.



제15장 -남북동맹시대의 유다(873-835B.C.,왕상22:41-50,왕하8:16-23, 11:1-16, 대하17:1-23:15) -


아사왕의 여호사밧과 이스라엘의 아합왕 때는 서로 평화하였다.


1.여호사밧의 잘못된 평화정책(870-845B.C.,왕상22:41-50,대하17-20) -

여호사밧이 아사의 뒤를 이어 25년간 유다를 통치했다. 그는 처음부터 부왕을 쫓아 여호와의 도를 행하며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을 제하고 남색하는 자를 쫓아내며 개혁운동을 계속했다.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게 했으며 모압과 암몬과 에돔이 쳐들어 왔을 때 온 백성에게 금식을 공포하고 함께 기도했으며 노래하는 자들에게 군대 앞에 행하며 찬송하게 했을 때 크게 승리했고 전리품을 거두는데도 3일이나 걸렸다.

그러나 그는 평화정책으로 아합왕의 딸 아달랴를 자부로 맞게 되어 이스라엘군과 군사동맹을 이루어 아람의 벤하닷과의 전쟁에 참여하였으나 '길르앗 라못'의 전투에서 겨우 목숨만 건졌고 아합은 전사했다. 그는 신앙을 잃은 것은 아니었으나 신앙과 정치가 일치하지 못했고 아직 위에 있는 동안에 그 아들 여호람으로 왕이 되게 했다.


2. 아달랴의 영향 밑에 있던 두 왕, 여호람과 아하시야(왕하8:16-29, 9:27-29, 대하21:1-22:9) -

⑴ 여호람왕

-여호람왕은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8년간 유다를 통치하였다. 조부와 부왕의 길을 따르지 않고 아내 아달랴의 영향을 받아 아합의 길을 따랐다. 그는 형제들을 죽이고 방백들을 죽였다. 선지자 엘리야가 무서운 형벌을 예고했다. 후에 블레셋과 아라비아가 군대를 일으켜 유다를 쳐서 왕궁의 모든 재물과 아들들과 아내들을 탈취해 갔는데 아들 중에 여호아하스만 남았다. 이는 엘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⑵ 아하시야왕(여호아하스)(841B.C.,왕하8:25-29, 9:27-29, 대하22:1-9)

아하시아왕은 22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1년이 못되어 죽었다. 모친 아달랴의 교도를 받아 아합의 길을 쫓았으며 긴밀한 교제를 가졌다. 아합의 아들 요람왕이 하사엘과의 전쟁이 있을 때 그를 도우러 길르앗 라못으로 갔다.  그때 부상을 입고 치로 중인 요람을 방문하여 갔다가 반란을 일으킨 예후에게 죽었다.

3. 아합의 딸 아달랴의 학정(841-835B.C., 왕하11:1-6, 대하22:10-23:15)

예후의 혁명으로 아합집이 무너질때 유다의 아하시야왕과 많은 귀족들도 죽었다. 이때 아달랴가 일어나 자기 가정의 왕족들의 씨(자기의 손자들)를 전멸하고 정권을 잡았고 피의 숙청을 강행했다.



제16장 - 남북 평행시대의 유다왕국(835-722B.C., 왕하12:17:, 대하23:16-28:27) -


예후의 반란으로 아합 왕가는 무너지고 남유다에서는 아합의 딸 아달랴의 죽음과 여호야다의 반정으로 남북의 밀접한 관계는 무너지고 서로 평행을 이루는 시대가 되었다.


1. 제사장 여호야다의 반정과 요아스왕(835-796B.C., 왕하11:4-12:36, 대하23:1-24:27)

⑴ 반정의 성공(대하23:1-21, 왕하11:4-21) -

아하시야왕의 누이 여호사브앗의 손에서 숨어 자란 어린 왕자 요아스가 7세 되던 해에 제사장 여호야다는 반정을 일으켜 어린 왕자를 무리 앞에 인도하여 면류관을 씌우고 율법책을 주고 기름을 부어 요아스왕 만세를 부르게 했다. 군중들의 찬송과 나팔소리에 놀란 아달랴는'반역'이라고 외치며 도망했으나 병사들에게 피살되었다. 


⑵ 요아스왕의 성전 수리(대하24:4-14, 왕하12:4-16) -

요아스는 장성한 후에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할 계획을 세우고 레위사람들에게 백성들로부터 연보를 거두게 하여 성전 수리를 했고 성물이 정돈되고 번제도 회복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부흥이 편만하게 되었으나 제사장 여호야다의 생전에만 그러했다.


⑶ 요아스왕의 타락과 징벌(대하24:15-27, 왕하12:17-21) -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는 정책을 바꾸어 방백들의 청원에 따라 아세라 목상을 세우고 섬기게 했다. 선지자 스가랴(큰 은혜를 입었던 여호야다의 아들)가 이 일에 경고하자 그를 돌로 쳐죽이도록 허락했다. 이일 후에 하나님께서 아람왕 하사엘을 일으켜 유다를 치게 했고 그는 성전과 왕궁의 모든 금을 주어 예루살렘을 떠나게 하였으나 그때 많은 방백들이 죽고 자신도 크게 부상을 입었고 결국 부하들의 반란으로 죽었다. 재위기간은 40년이었다.


2. 아마샤왕의 승리와 실패(796-767B.C., 대하25, 왕하14:1-20) -

요아스왕이 피살된 후 그 아들 아마샤가 왕위에 올라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처형했고 국방을 든든히 하고 에돔 공격을 위해 30만의 군대를 조직하고 이스라엘에서 10만을 고용했으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선지자의 충고를 따라 이스라엘의 용병들을 돌려보냈다. 그들이 불만을 품고 유다 성읍들을 공격하여 3천의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을 노략했다.

아마샤왕은 에돔을 공격했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돌아올 때 그는 에돔의 우상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으로 경배하며  분향했다. 이 사실을 안 선지자가 충고하자 "어찌하여 맞으려느냐"고 크게 꾸짖었다. 아마샤는 이스라엘을 공격했고 크게 패하여 성전은 훼파되고 성전의 기구는 약탈되고 많은 사람은 포로가 되고 자신도 포로가 되었다. 백성들의 모반으로 피살되어 재위29년이 끝났다.


3. 유다왕국을 부강케 한 웃시야왕(767-739B.C., 대하26, 왕상14:21-22)

아마샤의 아들 웃시야는 16세에 왕위에 올라 52년간을 치리했고 유다 왕국을 부강케했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와 대등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 영토의 확장 : 아마샤가 정복한 에돔을 주관하고 엘랏엘롯(에일랏) 항구를 건축하여 무역정책에 힘을 썼다. 동쪽으로 암몬을 다스리며 조공을 받았고 서쪽으로 블레셋을 쳐서 여러 성읍을 정복했다.

- 산업정책 : 에일랏을 건설하여 아라비아와의 무역을 힘쓰고 거친 땅에 물웅덩이를 파서 목축과 농업에도 힘을 썼다.

- 국방과 군사정책 : 군대의 조직을 재편성하여 용사26,000명과 307,500명의 정예병을 두고 훈련시켰고 당시의 무기들도 풍부히 제조 준비하였다.

- 교만과 실패 : 유다 왕국이 강하여지자 백성들은 물질주의에 빠졌고 왕도 교만해져서 제사장의 직분까지도 무시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징계로 문둥병이 들어 별궁에 살면서 그 아들 요담이 나라를 다스렸고 그는 문둥병으로 죽었다. (웃시야신드롬)


4. 앗수르의 발흥과 요담과 아하스왕(대하27,28, 왕하15:32-38, 16:)

⑴유다의 부패를 다스리지 못한 요담왕(739-731B.C.,대하27, 왕하15:32-38)

요담은 16년간 유다를 치리했다. 비교적 경건생활을 했으나 백성들의 죄악을 다스리는데는 실패했다. 백성들은 점점 부패해졌고 이사야 선지자의 경고도 듣지 않았다. 이때 앗수르의 디글랏벨레셀의 세력이 커져가는 때였다.


⑵ 친 앗수르의 아하스왕(731-715B.C., 대하28, 왕하16:11) -

아하스는 왕위에 올라 16년을 치리하였으나 유다왕국은 심히 약해진 나라로 북쪽에는 다메섹과 이스라엘의 압력이 계속되었고 서쪽과 남쪽에는 블레셋과 에돔의 공격이 그치지 않았다. 아하스는 친 앗수르 정책을 썼으나 앗수르는 오히려 유다를 괴롭게 했다.


⑶ 베가와 르신의 공격(대하28:5-21, 왕하16:5-9) -

친 앗수르 정책을 펴는 아하스왕을 다메섹왕 르신과 이스라엘왕 베가가 연합하여 공격했다. 유다는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왕은 앗수르만을 의지했고 이사야 선지자는 아하스에게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자'라고 하면서 친 앗수르의 정책이 실패할 것을 선포했으나 끝까지 듣지 않고 앗수르에게 은금을 보내며 구원을 요청했다. 앗수르의 도움으로 다메섹과 이스라엘은 물러갔으나 더 큰 원수는 앗수르인 것을 알지 못했다.


⑷ 에돔과 블레셋의 반격(대하28:16-21) -

아하스의 세력이 약해지자 에돔이 공격해 와서 백성들 중 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혀갔다. 그 후 블레셋이 침략해 와서 여러 성읍을 점령했다. 에돔과 블레셋의 공격을 받은 아하스는 또 앗수르에게 많은 재물을 주며 구원을 요청했다. 앗수르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다메섹과 이스라엘 블레셋과 에돔까지 그 힘을 뻗쳤고 유다도 그 손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⑸ 아하스의 종교적 타락(대하28:1-4, 22-25, 왕하16:2-4, 10-18)

이사야는 아하스가 백성들과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하였다. 그는 가나안의 모든 우상을 다시 섬긴 자로 바알 우상을 만들었으며 어린 자녀를 불살라 드리는 몰렉 종교를 따랐고 산당에서 우상을 섬기는 일들을 자행했다. 우상의 제단을 예루살렘에 두고 제사를 드리며 성전을 폐쇄해 버렸다.



제17장  유다 의 단독 시대(722-586B.C., 대하29:1-36:20, 왕하18:1-25:21)


1.반앗수르의 개혁왕 히스기야(715-686B.C.,대하29:1-32:33,왕하18:1-20:21사36:1-38:22)

  아하스의 뒤를이어 히스기야가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29년을 치리하였다. 그는 모세의 율법에 충실하였고 반 앗수르 정책을 썼다. 하나님이 형통케 하심으로 블레셋을 쳐서 이겼다.


⑴ 개혁 운동(대하29:3-31:21) -

히스기야는 부왕 아하스가 폐쇄한 성전 문을 열고 정결케 한 후 모세의 법대로 번제와 화목제의 큰 제사를 드림으로 유다 왕국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 성대하게 유월절을 지킬 것을 명했는데 북 이스라엘에도 초청장을 보내어 유월절 지키기를 청했고 북쪽의 많은 사람들이 호응해서 온 이스라엘이 기뻐했다. 솔로몬 이후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한다. 또 그는 산당들을 훼파하고 모세때부터 있던 놋뱀도 쳐부수고 그것을 '느후스단'(놋조각)이라고 했다.


⑵ 앗수르왕 사르곤과 히스기야 -

히스기야왕은 반 앗수르 정책을 폈으나 사마리아를 점령한 사르곤이 살아있는 동안 앗수르를 대항하지 않았다. 기원전 711년에 아스돗 지역의 반란으로 사르곤은 출정하여 진압했고 히스기야는 아스돗을 도와야 할 입장에 있었으나 선지자 이사야의 권면으로 지혜롭게 피하여 사르곤의 공격을 피하게 되었다.


⑶ 산헤립왕의 침략(대하32:1-21, 왕하18:13-19:37, 사36-37) -

사르곤의 아들 산헤립이 왕이 되었을 때 히스기야왕은 애굽의 후원을 얻어 두로, 아스글론, 에글론과 반 앗수르 동맹을 맺고 앗수르의 공격을 막기 위해 국방을 튼튼히 하고 실로암 굴을 파서 물을 성내로 끌어들여 백성들이 그 물을 사용하게 했고 앗수르군이 공격해 왔을 때 물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큰 공사를 했다.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포위했고 라기스를 점령하고 부하 랍사게를 보내어 갖은 모욕을 하며 히스기야의 항복을 요구했다. 이때는 주변의 모든 나라와 도성들이 앗수르에 굴복한 상태여서 참으로 위기였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에게 화해를 청하여 은3백과 금30달란트를 주게하고 성전과 왕궁에 있는 은과 금을 다 거두어서 보냈으나 산헤립은 계속 항복을 요구하며 공격해 왔다. 이때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에게 용기를 주며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고 앗수르 왕은 반드시 물러가리라는 것을 예언했다. 그날 밤 앗수르 진에서는 18만 5천이 죽고 산헤립은 떠나갔고 유다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받았다.


⑷ 히스기야의 병과 바벨론의 사신(대하32:22-31, 왕하20, 사38-39)

- 히스기야의 병 : 히스기야는 전쟁 중에 병이 나서 죽게 되었다. 간절한 회개와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15년의 생명연장과 앗수르의 손에서 구원을 약속하셨고 약속의 징표로 일영표가 10도를 물러가는 이적을 보이시기도 했다.

히스기야 왕이 병이 나은 후 바벨론왕 므로닥발라단이 위문의 사신들을 보냈는데 사신들은 예물을 가지고 왔다. 그때 히스기야는 그들에게 군기고의 모든 군기와 보물을 공개하여 보이며 부강함을 자랑했다. 그때 선지자 이사야는 후일에 유다가 반드시 바벨론에게 망할 것을 예언하며 그의 교만을 책망했다.


⑸ 선지자 이사야와 미가

- 이사야 : 웃시야왕이 죽던 해부터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에 이르는 3왕의 비상한 때에 선지자의 임무를 감당했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닫도록 하는데 힘을 썼다. 그 중에서도 53장의 구속주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속죄의 큰 역사는 후일 '고난의 종'의 죽음을 통하여 완전히 이루어질 것을 예언했다.

- 미가 : 이사야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이다. 히스기야왕은 미가 선지의 경고를 받고 크게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며 회개하였다.


2. 암흑시대의 므낫세와 아몬왕

⑴ 므낫세왕(686-642B.C., 대하33:2-10, 왕하21:2-16) -

므낫세는 히스기야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올라 55년을 통치하였다. 남과 북의 이스라엘 왕들 중에 최장기간 왕위에 있었던 사람이나 그의 통치는 유다로 심히 부패케 했다.


⑵ 종교적 부패(대하32:2-10, 왕하21:2-16) -

므낫세왕은 부왕과는 대조적인 인물로 부왕이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짓고 바알의 단을 다시 세우며 아세라 목상과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했고 몰렉에게 아들을 드려 불 가운데 지나게 하며 점치고 사술을 행했다. 또 정책을 반대하는 무죄한 자의 피를 많이 흘렸다.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 선지자도 그의 손에 죽었다.


⑶ 하나님의 징계와 회개(대하33:11-20) -

므낫세는 자기가 그렇게 섬기던 앗수르왕에게 비참한 모습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가게 되었다. 그 이유는 바벨론과 협력하여 앗수르의 압박을 벗어나기 위한 전쟁에서 바벨론이 실패했기 때문이며 앗수르를 섬기며 조공을 바칠 것을 서약하고 유다로 돌아왔고 큰 혼란을 통하여 크게 겸비하여 기도했으며 우상을 제하고 여호와의 단을 중수하고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섬길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


⑷ 아몬왕(642-640B.C., 대하33:21-25, 왕하21:19-26) -

아몬은 므낫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2년간의 통치는 타락한 정치였고 2년 만에 궁중의 신하들의 반역으로 죽었으나 백성들이 일어나 왕을 죽인 자들을 처형하고 그 아들 어린 요시아로 왕을 삼았다.



제18장 -신흥 바벨론과 유다 왕국의 멸망(640-586 B.C.,대하34-36, 왕하22-25)


- 요시아왕을 계기로 하여 유다왕국은 마지막 시대로 접어들게 되고 앗수르도 앗수바니발왕 이후 점점 나약해졌다. 그때를 이용하여 신흥 바벨론은 새로운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잡고 일어나게 되었고 그 세력이 활발해지기는 요시아왕 말기 때 부터였다.


1.유다왕국 최후의 개혁왕 요시야(640-609B.C.,대하34-35, 왕하22:1-23:30)

요시야는 8살의 어린 나이로 아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 배후에는 경건한 신앙의 인물들이 충성으로 섬겼다.(대제사장 힐기야와 예레미야) 그의 치리기간 31년은 유다왕국의 창건 이래 가장 평화롭고 행복했던 때이며 크게 부흥하고 발전했던 시기로 모든 우상을 멸하는 숙청작업이 유다뿐 아니라 온 이스라엘까지였다.


⑴ 개혁 운동(대하34:8-35, 왕하22:3-23:25)

- 요시아왕이 위에 오른지 8년(그의 나이 16세)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12년(20세)에 모든 우상과 산당들과 모든 우상의 제단들을 다 훼파하여 남유다왕국에서 북이스라엘까지 온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고 모세의 율법을 따라 유월절을 크게 지켰다. 이처럼 유월절을 크게 지킨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사사시대 이후 처음이었다.

  6년의 세월에 걸친 이 개혁운동은 유다왕국의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로서 성전 수리를 할 때 제사장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 책(모세의 친필 신명기)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왕 앞에서 율법 책을 읽게 했을 때 왕은 옷을 찢으며 회개했고 온 백성들과 여호와 앞에 언약을 세워 진정으로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서약했다. 요시아 왕의 개혁은 히스기야 때보다 더욱 철저했다.


⑵ 요시아왕 말기의 국제정세(왕하23:28-30)

앗수르 제국은 앗수바니팔이 죽은 후 뒤를 이은 왕들이 무능하여 나라가 쇠약해졌고 614B.C.에 바벨론과 메대가 연합하여 앗수르를 공격하여 앗수르를 점령하고 2년 후에 니느웨를 포위했다. 3개월 후에 수도인 니느웨가 함락되고 앗수르의 왕은 피살되었다.

니느웨는 대오를 정비하여 '하란'에서 전쟁을 다시 시작했으나 610B.C.에 하란은 함락됐고 다음해에 대오를 정비하고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때 애굽은 앗수르를 도우려 했으나 요시아왕은 반앗수르였기에 앗수르를 도우려는 애굽을 가로막기 위해 므깃도에 진출했다가 전사했다.


2. 애굽왕에게 폐위된 여호아하스(609B.C., 대하36:1-4, 왕하23:31-33)

요시아왕에게는 세아들(엘리야김, 여호아하스, 시드기야)이 있었다. 아들 셋이 차례로 왕이 되었다. 둘째인 여호아하스가 먼저, 다음에 맏이가, 세 번째로 셋째 아들이 왕이 됐다. 요시아왕을 죽인 애굽의 바로느고는 여호아하스를 제거하고(여호아하스는 3개월만에 폐위되었고 애굽에 포로로 가서 거기서 죽었다) 형 엘리야김으로 왕을 삼고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고치게 하고 유다를 속국으로 삼아 은100달란트와 금 한달란트를 조공으로 받았다.


3. 두루마리를 태운 극악한 여호야김왕(609-597B.C.,대하36:4-8, 왕하23:34-24:7, 렘22:13-19, 렘36:1-32)

⑴ 여호야김의 악정 - 여호야김은 애굽왕 바로느고의 임명으로 왕이 되었다. 여호야김은 애굽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백성들에게 많은 것을 늑징하였으며 자신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해 백성들을 압박하고 많은 피를 흘렸다. 선지자 예레미야와 동시대의 하박국, 우리야가 그런 행동들을 신랄히 경책했으나 우리야를 죽였고 예레미야도 죽이려고 했으나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으로 살았다.


⑵ 세계사를 바꾼 갈그미스 전투와 여호야김 -

므깃도 전쟁에서 요시아왕을 죽인 애굽의 바로느고는 하란을 점령하진 못했으나 수리아 지역과 팔레스틴을 완전히 점령했다. 여호아히스를 폐하고 여호야김을 세워 왕을 삼았다. 바벨론왕은 병석에 있었고 그 맏아들 느부갓네살이 군대를 동원하여 유브라데강을 건너 갈그미스에서 애굽의 바로느고를 격퇴시켰다. 애굽군은 하맛으로 후퇴하여 대오를 재정비하려했으나 느부갓네살에게 전멸되었다.

바벨론이 앗수르와 애굽의 동맹군을 격퇴함으로 단번에 세계를 재패하였고 이 전투에서 앗수르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느부갓네살은 점령지에서 조공을 받아들였고 여호야김도 3년동안 그를 섬기다가 느부갓네살이 애굽의 느고를 치려고 애굽 국경까지 진격할 때 느부갓네살을 배반했다(이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야김에게 바벨론을 섬기라고 권면했으나 듣지 않고 애굽을 의지하였다). 느부갓네살은 갈대아 부대와 아람과 모압과 암몬의 부대들을 급파하여 여호야김을 쳤고 그들 부대들로 유다를 다스리게 하다가 바벨론 주력부대가 진격했다.


4. 여호야긴왕과 유다의 첫 포로(597B.C.,대하36:9-10, 왕하24:8-16)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여호야긴이 왕이 되어 3개월 10일을 치리했다.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쳐들어왔을 때 여호야긴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그의 숙부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다. 이때 에스겔을 비롯하여 왕의 모후와 환관들과 아내들과 나라의 유력한 자들을 사로잡아갔다. 잡혀간 여호야긴은 감옥에서 해방되고 일평생 왕궁에서 먹으며 후한 대우를 받았다.


5.시드기야왕과 유다왕국의 멸망(대하36:11-21, 왕하24:17-25:21, 렘39:1-10) -

여호야긴이 잡혀간 후 그의 숙부 맛다니야를 왕을 삼고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쳤다( 시드기야는 왕이 되었으나 왕이라기보다 섭정자로 보아야 함). 시드기야의 왕위는 확고하지 못했고 능력도 매우 부족하여 반바벨론적 관원들과 백성들의 압력으로 바벨론을 배반하게 되었다.


⑴시드기야의 반바벨론과 예루살렘의 함락(왕하24:20-25:12, 대하36:13-21)

시드기야의 바벨론 배반은 반바벨론의 압력과 국제정세 때문이었고 거짓 선지자들의 잘못된 격려 때문이었다. 당시 모압과 암몬과 베니게의 여러나라가 반바벨론 동맹을 맺어 유다도 가담하라고 사신들이 찾아왔고 궁중의 반바벨론파 수뇌들이 시드기야를 강권하여 바벨론을 배반했다.

바벨론의 군대는 유다를 공격해 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그 후 2년 뒤 예루살렘은 함락됐고 시드기야왕을 사로잡고 그의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그의 두 눈을 뽑아버린 후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죽는 날까지 옥에 갇혀 있었다. 성전은 훼파되고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비천한 자들만 남게 됐다. 이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포로들에게 그곳에 정착하여 깨어 기도하고 평안하기를 힘쓰면 70년 후에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선언했다.


⑵ 예루살렘 함락

예루살렘이 바벨론군에게 포위되었을 때도 유다의 관원들은 애굽의 원병이 오리라고 믿고 기다렸고 마침 애굽군대가 왔으나 예레미야가 애굽군이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유다의 모든 성읍은 망했고 예루살렘과 아세가와 라기스만 남았다. 아세가와 라기스와 예루살렘이 차례로 함락될 때의 형편을 알려주는 '라기스의 편지'는 바벨론군의 진격이 빨라서 손 쓸 사이 없이 성읍들이 함락되어 가는 것을 탄식하는 심정을 읽을 수 있는 것들이다.


⑶ 유다왕국의 최후(왕하25:22-26, 대하36:17-21, 렘40-43) -

바벨론왕은 유다의 백성들을 포로로 끌어가고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삼았다. 그는 예레미야를 숨기고 보호했던 아히감의 아들이었고 조부 사반은 요시아왕의 개혁 당시 서기관이었다. 흩어졌던 유다인들이 그달리야가 총독이 되었다함을 듣고 미스바로 모였다. 총독 그달리야는 백성들에게 유다 땅에 거하면서 바벨론왕을 섬길 것을 권했으나 백성들 중에는 반바벨론의 강경파들이 그달리야를 매국노로 보고 죽이고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워 애굽으로 가게 되었다. 애굽으로 가는 것을 반대한 예레미야도 함께 끌고 갔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지 1500년 후에 그 후손들은 포로로 옛 고토인 갈대아 땅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제19장 - 포로된 언약백성


1. 바벨론에 끌려간 유다인들 -

유다인들은 4차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1차는 기원전 605에 다니엘등 왕족들과 귀족계급들이었고  2차는 기원전 597년에 여호야긴왕과 일반 백성들과 모든 방백들과 군사들 1만명과 많은 기술자들이었고 3차는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이 함락될 때 시드기야왕을 포함한 백성들이었고 4차는 기원전 581년에 느부갓네살의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마지막 남은 유다인들을 사로잡아 갔다.

유다는 황무하여 기아와 약탈로 비참해진 불법 천하였다. 바벨론 정권은 끌려간 자들에게 많은 자유를 허락했고 성전은 없지만 종교의 자유도 허락했다. 이때 성전을 대신하는 회당이 생기게 되었고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웠으며 한 민족으로서 이산을 막을 수도 있었다.


2. 유다에 남은 백성들 -

느부갓네살은 유다의 남은자를 위해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세웠고 그는 미스바에 본부를 두고 예레미야의 도움을 받아 남은 자들을 수습하려 했으나 이스마엘이 동료 10인과 함께 와서 그달리야와 그를 따르던 유다인들과 진주해 있던 바벨론의 군사들까지 죽이고 암몬으로 도망갔다.


3. 애굽으로 간 유다인들(렘43:8-44:30)

- 그달리야가 피살된 후 이스마엘 일당은 암몬으로 갔으나 남은 사람들은 애굽으로 가려고 예레미야에게 물었지만 예레미야는 거절하였다. 그들은 예레미야와 남은 자들을 끌고 애굽으로 갔고 예레미야는 요시야왕 때의 개혁 때 우상의 제단을 헐어버림으로 큰 재난이 왔다고 믿는 그들에게 애굽에서도 선지자의 사명을 다했지만 그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애굽의 우상을 다시 섬기며 여호와도 섬기는 다신교적이었다.


4. 예레미야 최후의 예언과 그 성취 -

예레미야의 애굽에서의 최후의 예언은 예레미야 44장이다. 거기에는 소수의 사람만이 살아남아서 유다 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과 애굽왕 호브라는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게 붙여지게 될 것을 예언 했다. 애굽왕 호브라는 바벨론을 위협으로 느껴 두로와 동맹을 맺고 바벨론을 대항했으나 두로는 바벨론에 포위되어 13년을 견디다가 함락됐다. 두로를 함락한 베벨론은 애굽을 공격했고 호브라는 성경대로 느부갓네살에게 붙잡혔다. 애굽은 아마시스가 왕이 되었고 느부갓네살을  반역하다 공격을 받아 지극히 약한 나라가 되었고 신흥 파사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제20장 - 포로기간 중의 바벨론


1. 바벨론의 새 왕 나보니더스 -

느부갓네살왕이 죽자 그 아들 에윌므로닥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여호야긴을 감옥에서 내어놓아 지위를 높여 주었다. 왕이 된지 2년 후 궁중 반역을 당하여 피살되고 그의 처남인 '네르갈사레셀'이 왕이 되었다. 그가 죽자 그의 어린 아들'라바시말둑'이 왕위에 올랐으나 9개월 만에 음모단에 의해 무혈혁명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나보니더스'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유능한 인물로 메데의 침입을 막고자 국방강화에 힘썼고 애굽과 통하는 남북연결의 통로를 확보했고 북아라비아의 '데마'를 점령하고 바벨론의 제2수도를 삼아 11년간 거기 머물면서 그의 아들 벨사살을 부왕으로 삼아 바베론 궁을 지키며 다스리게 했다.


2. 나보니더스와 벨사살에 대하여 -

바벨론 역사의 연대에는 나보니더스(556B.C.-539B.C.)가 바벨론의 최후의 왕으로 나타나 있다. 성경에는 벨사살 때 바벨론이 멸망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그것은 다니엘서의 기록오류라고 성경학자들이 말했으나 19세기 중엽에 고대 바벨론에서 발굴된 서판에 의해 성경내용이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나보니더스가 그의 모든 왕권을 벨사살에게 맡기고 데마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데마의 왕을 죽이고 점령한 후 장기간 그곳에 정주했다는 사실이다.


3. 메데와 파사

- 파사는 본래 엘람 왕국의 멸망 후에 생긴 작은 나라였다. 벨사살은 메데의 세력을 막기 위해 파사와 동맹을 맺기도 했다. 파사는 메데의 영향 아래 있는 작은 나라였으나 그 지도자 고레스왕은 젊은 나이로 나라를 급속도로 발전시켰다. 그의 부왕은 메데와 정략결혼으로 동맹을 맺고 평화를 유지했으나 기원전 550년에 두 나라는 큰 전쟁을 벌였고 파사는 수적으로는 열세였으나 고레스왕의 강력한 지도로 메데를 물리쳐 승리했다. 그러나 고레스의 정책은 특수하여 메데를 연합국으로 만들어 두 나라를 통치하는 수반이 되었다.


4. 나보니더스의 종교정책 -

북아라비아의 데마에 제2수도를 건설하고 거기에 정주한 나보니더스는 바벨론의 본궁을 비우고 공식 신년제사인 '말둑'에게 올리는 가장 중요한 행사에 다년간 불참하여 불평을 샀다. 그는 새로운 다른 월신 '난나'숭배에 열중해 있었고 바벨론의 다신교의 혼란한 종교를 정리하고 '난나' 신 중심의 종교를 세우려했다. 이런 종교정책은 사생활이나 종교생활에 자유를 누려왔던 유다의 포로들에게는 불안과 수난이 되었으나 파사의 고레스왕의 승리로 유다인들에게는 이중삼중의 해방과 큰 기쁨이 되었다.

제21장 - 유다의 귀환


1. 고레스왕(대하36:22, 23, 스1:1-4) -

고레스왕이 기원전 539년 1월 29일 바벨론을 정복한 후 유다의 포로들에게 본토로 귀환하라는 것과 성전을 재건하라는 두 개의 선언을 하였다. 고레스는 무혈전쟁으로 바벨론에 입성했다. 그것은 나보니더스의 말둑신에 대한 불경건이 민중들에게 불만을 품게 했고 고레스는 '말둑신이 예배를 게을리하며 무시하는 바벨론왕을 멸하기 위하여 자기를 파송한 말둑신의 파송자라고' 했다 그의 종교정책으로 군중들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2. 1차 유다의 귀환(스1:1-2:70) -스룹바벨(성전재건)

유다의 포로들은 기원전539-538년에 본토로 돌아오도록 허락되었고 이듬해부터 실제로 귀환이 이루어졌다. 고레스는 느부갓네살이 옮겨온 성전기명들을 유다의 지도자 스룹바벨(스룹바벨은 여호야긴왕의 장남 스알디엘의 아들)에게 주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그들의 본토로 돌아오게 하셨다.

고레스는 바벨론을 정복한 후 애굽을 정복하기 위해 모든 계획을 그 아들'캄비세스'에게 맡기고 파사 동부의 유목민들 진압에 나섰다가 거기서 부상을 입고 전사했다.



제 22 장 - 성전 건축(에스라3-6)


귀환한 포로들은 조상들의 본성으로 돌아갔으나 기원전 537년 7월에 일제히 예루살렘으로 모여 가장 큰 절기의 달로 1일은 나팔을 불어 기념하는 성회(나팔절)로 10일은 대속죄일이요 15일은 7일 동안 연속으로 지키는 초막절이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옛 성전터 위에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조석으로 번제를 드렸다. 이렇게 성회를 지키며 제사에 힘쓴 것은 해방과 귀환의 감격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 때문이었다.

다음 해 2월에 성전건축을 시작하여 지대를 놓았으나 북방 사마리아인들(에살하돈기원전 681-669, 앗수르왕의 식민정책으로 이스라엘로 이민되어 온 자)이 성전 건축에 저들도 참여하겠다고 제안하자 스룹바벨이 거절했다. 그들은 성전건축을 방해하며 파사왕에게 유다인들을 고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성전건축을 중지시키는 왕의 명령이 내려 15년 동안 중단되었다.

1. 성전건축 중단기간 중의 파사의 정세 -

그때의 파사왕은 고레스의 아들'캄비세스'(까우마라)였다. 캄비세스는 애굽을 점령하려고 출정한 때에 사마리아의 총독이 유다의 귀환자들이 성전 건축을 서두르며 배반을 꾀한다는 상소문은 파사왕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또 그때 동생인 '스멜디스'가 본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돌아와서 그 아우를 죽였으나 사실은 동생의 이름을 빌린 제삼자인'까아우마타'였고 그 반란으로 왕위를 점령했고 '캄비세스'는 자살하고 말았다. 그가 죽은지 2개월 뒤 파사는 다시 군사반란이 일어나 '까우마타'는 처형되고 다리오왕 1세가 왕위에 올랐다.


2.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

귀환공동체가 흉년으로 곤고를 겪고 있을 때 선지자 학개는 하나님의 일에 게을리 한 징계라고 했다. 용기를 잃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들을 격려하여 마침내 다리오왕의 허가를 얻어 건축은 진전되어 착공한지 20년 후인 기원전 516년에 완공했다(스가랴 선지자도 스룹바벨을 격려했다). 성전은 그 자체의 중요성이 성전의 실체인 장차 오실 메시야의 상징이기 때문에 힘썼다(슥9:9, 11:12-13, 12:10-13:6, 13:1, 14:8, 14:16- 참 성전인 메시야는 나귀를 타고 시온 성에 입성하실 것, 은 삼십에 팔릴 것, 창에 찔릴 것, 그의 죽음으로 속죄의 샘의 문이 열릴 것, 왕중 왕이 될 것, 온 만국의 백성은 그 앞에 회개하며 돌아올 것등).

아하수에로왕은 그리스를 침략하여 아덴까지 공격하였다가 해전에서 실패했다. 그의 패전은 에스더의 사건이 있은지 4년 후의 일이다. 


3. 2차귀환:에스라(스7:27-10:44) -영적부흥운동

아하수에로왕의 뒤를 이어 아닥사스다1세가 위에 오른지 7년에 제사장 아론의 후손인 에스라가 포로들의 2차 귀환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아닥사스다왕은 조서와 함께 성전건축을 위한 많은 은금을 주었고 그들은 그 은금을 성전에 바치며 수송아지 열둘로 희생제물을 드리며 제사를 드렸다. 에스라의 귀환 후 남아있던 모든 이스라엘인들이 이방화되어 이방결혼으로 인해 타락해 가고 있었다. 에스라의 회개 운동으로 옛날의 순결을 회복하는 큰 역사가 있었다.



제23장 -3차귀환 :느헤미야의 성곽 건축(느헤미야1-13)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왕 1세의 궁에서 술 관원이었다. 아닥사스다왕 20년에 동생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자들이 큰 환란을 당하며 성전은 훼파되고 성문은 타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아닥사스다왕의 허가를 받아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는데 왕에게서 유다 총독의 직책과 권한을 받아 당당하게 입성했다. 왕은 군대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그를 호위했다.


1. 아닥사스다왕의 성곽건축 협조 -

아닥사스다왕의 성곽건축의 협조는 기원전 488년 왕의 17년에 '아바르나하라'의 총독인 메가비주스가 반란을 일으켰었는데 그는 왕의 즉위 후 10년경에 애굽의 반란을 진압한 장군이었다. 그때 그와 협력하여 파사를 반역한 사람들이 유다인들을 고소했던(사마리아의 총독 르훔과 서기관 심새) 사람들이었다. 그런 이유로 아닥사스다왕은 유다인들을 도우려는 마음이 생겼고 유다를 도우는 것이 파사제국을 위해서도 유익하다는 판단이었다.


2. 원수 산발랏 -

애굽과 사마리아의 반란 후 사마리아의 총독이 된 산발랏은 암몬의 도비야와 아라비아의 게셈과 동맹을 하고 느헤미야의 성곽건축을 끈질기게 위협과 음모로 또 화해정책의 음모를 꾸며 선지자'스마야'를 매수하여 예언하게 하기도 하며 방해했으나 성곽은 52일만에 완공되었다.

3. 건축된 성문들 -

느헤미야 3장에는 성곽건축의 모양이 기록되어 있는데 성곽의 문은 10개로

① 양문 -성곽의 동북쪽에 있고 그 옆에 베데스다못이 있었고 제물된 양들       을 씻어 그문을 통과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대제사장 엘리아삽       과 그 형제 제사장들이 건축하였다.

② 어문 -북쪽 문으로 요단강과 갈릴리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를 들여온 데       서 붙여진 이름이다.

③ 옛문 - 지금의 다메섹 문.

④ 골짜기 문 - 서남쪽에 위치한 문으로 힌놈의 골짜기를 향하여 있었다.

⑤ 분문 - 성 남쪽 중앙에 있는 문으로 성안의 오물들을 실어내는 문.

⑥ 샘문 - 실로암 못가에 있었기에 그렇게 불림.

⑦ 수문 - 성전에서 쓰는 물을 실어들이기에 불려진 이름.

⑧ 마문 - 동쪽에 있는 문으로 말들이 들어올 수 있었던 문.

⑨ 동문 - 수문과 동일한 문.

⑩ 에브라임 문 - 에브라임 문은 성곽 북쪽 옛문을 향하여 가는 서편 방향      으로 위치하여 있었을 것이며

감옥의 문 - 성곽 동쪽 수문을 향하는 북편 방향이었을 것인데 느헤미야 3장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문이다.



제24장 -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부흥운동


귀환 초에 스룹바벨이 유다의 총독을 지낸 후 느헤미야가 총독이 되기까지 70년 동안의 사적은 알 길이 없으나 많은 총독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백성들에게 토색하며 압제하였던 것은 알 수 있다. 느헤미야는 총독으로서 녹을 받지 않고 성벽 건축에 많은 힘을 썼는데 일꾼들의 먹는 비용을 다 부담했다. 귀환한 유다인들 중에는 계급의 차이가 생기고 동포들을 종으로 매매하고 기업을 속량치 못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느헤미야는 그들을 크게 꾸짖어 이식을 받지 말 것과 돌려보내고 기업을 무를 것과 율법으로 돌아올 것 등을 호소함으로 백성들이 호응하여 안정되어 갔다. 에스라에게 율법으로 백성을 가르쳐 지도할 것을 건의했을 것으로 본다. 에스라는 7월 절기에 유다 자손들을 예루살렘으로 소집하여 절기를 지키며 율법의 말씀을 낭독하여 큰 회개 운동이 일어나 영적 부흥운동의 절정에 이르렀다.

  말라기 선지자는 느헤미야 시대에 보내진 최후 선지자로 그의 활동은 성전의 완공 후 정상적인 제사제도가 회복된 때였다. 그는 제사장들의 해이한 마음과 불경건을 책망했으며 십일조를 게을리 했던 일과 이방인 여인들과의 결혼을 책망했다. 느헤미야와 말라기로 구약의 역사는 모두 끝나는데 신약시대가 되기까지의 중간시대(기원전420-200년)는 파사제국과 헬라제국이 중심세력이 되어 있으나 성경은 이 시기에 대해 깊은 침묵을 지킨다.  


'세미나 > 구약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다윗(역사적,지리적배경을 중심으로)  (0) 2016.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