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역대하(구속사)

역대하32장,가장 힘들 때

호리홀리 2015. 12. 23. 10:18

본문은 산헤립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침공, 왕하 18:13-19 :37과 사 36, 37장에서도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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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고한 성읍들을...취하고자 한지라 - 왕하 18:13에서는 산헤립이 이 성읍들을 쳐서 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앗수르 비문에 의하면, 이때에 앗수르가 유다를 쳐서 취한 유다 성읍의 수가 46개라고 한다(Curtis). 열왕기 기자는 이 사실과 함께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 왕 산헤립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많은 뇌물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왕하 18:13-16),  역대기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도우셨는가하는 측면에서 기록하고자 했다

 

 예루살렘을 치러 온 것을 보고 - 산헤립에게 뇌물을 주고 나서, 그 뇌물이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또 다른 조치를 취했을 것이며(왕하 18:13ff). 그 조치는 예루살렘 성안에서 방어 자세를 계속 견지하는 것이었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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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불어 의논하고 - 이와같이 히스기야 왕은 항상 나라의 중대사를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방백들이나 백성들과 의논하여 처리하는 자상한 면을 갖고 있었다(30:2).

 

 성밖에 모든 물 근원(根源)을 막고자 하매 - 여기서 '막고자 하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싸탐'(*)'막다'(shut up), '은닉하다'(conceal)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여기서는 한쪽 방향에서 물을 막아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 히스기야 왕은 지하 수로를 만들어 기혼 샘물을 다윗 성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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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앗수르 왕들로 와서 많은 물을 얻게 하리요 - 이때에 히스기야가 수로를 만들어 기혼 샘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인 것은(30) 앗수르 왕들이 예루살렘 성 외곽지에서 물을 얻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히스기야가 세력을 내어 - 이는 히스기야가 예루살렘 성을 방비하기 위하여 용기를 내고 최선을 다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였음을 가리킨다(15:8).

 

 퇴락한 성을 중수(重修)하되 - 요아스 때에 에브라임 문에서 모퉁이 문까지 약 400규빗의 무너진 성벽(25:23)은 웃시야(26:9)와 요담(27:3)에 의해서 대부분 수리되었지만, 히스기야는 산헤립의 침략에 가비하여 다시 한번 허술하거나 무너진 성벽을 수리했다.

 

 망대까지 높이 쌓고 - 본 구절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한데, 다음과 같이 대략 세 가지로 열거할 수 있다. , (1) 망대들을 높이 쌓았다는 견해(Zockler), (2) 성벽 위에 망대를 쌓았다는 견해(Berthau, Ewald), (3) 성벽 위 망대까지 기계들을(26:15) 올렸다는 견해(Keil) 등이 있다. 이 세가지 해석은 모두 가능하지만 (2)의 해석이 원문에 가까운 듯하다.

 

 외성을 쌓고 - 히스기야는 성벽을 보수하고 그 위에 망대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외침을 방어하는 데 용이하도록 또 한겹의 성벽을 외부에 쌓았다. 이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는 예루살렘 남동쪽 실로암 못을 둘러 싸고 있는 외벽의 잔재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연대가 히스기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Bliss's Excavations at Jerusalem).

 

 성문 광장 - 본절이 어느 성문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29:4에서 언급된 '동편 광장'을 말하는 것 같다(Curtis). 하지만, 이 표현으로는 그곳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O. Zockler). 어째든 히스기야는 그곳에 군대 장관들을 모으고 격려의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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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고 - 이에 대해서는 20:15 ; 31:6 등을 참조하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우시며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사용된 것이었다(1:9). 이처럼 히스기야가 결연한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이사야의 충고에서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37:5-7).

 

 우리와 함께하는 자가 저와 함께하는 자보다 크니 - 여기서는 '보다 크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브'는 형용사로서 '수가 많은', 또는 '강력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엘리사가 보았던 '불말과 불병거'(왕하 6:17)를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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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신의 팔이요 - ''은 흔히 ''(power)을 상징하는데, 여기서의 '육신의 팔'이란 인간의 보잘 것 없는 힘을 의미한다(31:3 ; 17:5).

 

 우리와 함께하는 자 - 여기서 우리는 이사야가 말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임마누엘'을 연상할 수 있다(7:14 ; 8:8, 10). 한편 7, 8절에 나타난 히스기야의 모습은 왕하 18:14-16에 기록된 유다에 대한 산헤립의 1차 침입 때에 보여 준 그의 태도와는 완전히 대조 된다. 열왕기에 의하면, 산헤립이 라스기까지 쳐들어왔을 때, 히스기야는 굴욕적으로 강화(講和)하여 공물을 바치고 성전문에 입힌 금까지 취해서 다 내주었다. 그러나 역대기는 이 사실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히스기야의 의연한 모습만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는 역대기 가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섬겼던 왕임을 부각시키려 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나름대로의 신학적인 관점을 가지고, 히스기야의 여호와 신앙을 통하여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담대할 수 있고, 무슨 일이든지 가능할 수 있음(4:13)을 보여 주고자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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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에 - 이것은 물론 산헤립의 예루살렘 침공에 대비해서 히스기야 왕이 백성들의 마음을 단단히 무장시키고 난 이후를 가리킨다. 앗수르가 라기스를 정복하고 예루살렘 성까지 올라오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왕하 18:17). 한편 라기스에 대해서는 25:27 주석을 참조하라.

 

 그 신복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 산헤립은 자신의 수하에 있던 장군 다르단과 랍사리스와 랍사게를 예루살렘에 보내고(왕하 18:17), 자신은 라기스 부근에 진을 치고 남아 있으면서 근처의 성읍들을 공략하였다(왕하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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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가...무엇을 의뢰(依賴)하느냐 - 이는 이미 포위된 상태에서 무엇을 믿고 항거하느냐는 뜻이다. 여기서 '의뢰하느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보트힘'은 신앙적으로 의뢰하는 것을 뜻하는 '아만'과는 달리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한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 이 말은 유다 백성이 더 이상 의지할 만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며, 다만 성 안에 갇혀서 기갈에 허덕이다가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위협이 섞인 회유의 말인 것이다(왕하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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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스기야가 너희를 꾀어 - 본절은 히스기야가 산헤립의 침입에 대비하여 여호와 유일신앙으로 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실제적으로 물 근원을 막는 등의 대책을 편 사실을 앗수르 왕 산헤립이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열왕기에는 앗수르 왕의 신복 랍사게가 히스기야가 애굽 군대의 원조를 청한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그의 신앙이 헛것임을 입증하는 구절이 있으나(왕하 18:21), 역대기 저자는 외국 군대의 원조를 구한 히스기야의 태도를 옳지 않게 여겼으나(Curtis), 히스기야의 진심이 사실상 그렇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생략해버렸을 것이다. 또한 역대기 기자는 역사적인 사실만을 열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히스기야의 신앙과 하나님의 도우심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애굽에게 지원을 요청한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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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히스기야가...분향하라 하지 아니 하였느냐 - 본절은 지금 주림과 목마름으로 죽게 된 마당에(11) 히스기야의 개혁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란 뜻이다. 이는 히스기야의 유일신 사상과 그의 개혁에 대한 산헤립의 공격적인 말이다(왕하 18:22). 앗수르의 산헤립은 히스기야의 우상 척결을 가리켜 '여호와의 산당들과 단들을 제하여 버린'행위였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러한 앗수르 왕의 주장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이스라엘 전역에 퍼져 있던 우상들과 단들이 여호의 종교를 표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히스기야가 척결한 우상 중의 하나가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처럼 왜곡된 '여호와 신앙'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종교는 하나의 소수 민족이 가진 고유 종교 정도로 밖애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고, 유일신 신앙이 타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의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여호와 신앙(6:4)을 회복하기 위해 종교 개혁을 시도했고, 이러한 종교 개혁이 앗수르 제국을 반역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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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방의 신들 - 이는 구체적으로 앗수르 군대에 의해 정복 당한 하맛, 아르밧, 스발와임, 헤나, 아와의 신들을 가리키는데, 이것들은 북이스라엘에서 숭배하던 우상들이다(왕하 18:34). 여기서 앗수르 왕 산헤립은 히스기야의 하나님 여호와도 결국 열방의 신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만들어낸 신에 불과하다고 단정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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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 하나님이...건지겠느냐 - 이는 결국 여호와에 대한 신앙만으로는 앗수르를 대항할 수 없다는 단정적인 표현이다. , 여호와는 의뢰할 만한 신이 되지못한다는 것이다(10). 여기서 앗수르인들이 가지고 있던 신()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는데, 랍사게를 비롯한 앗수르인의 신앙은 외형적인 변화에 크게 좌우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앗수르인들이 섬긴다고 하는 신이란 외형적인 현상으로 파악이 가능하고, 변화하는 유한한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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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즉 이와 같이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 본절은 랍사게가 전한 앗수르왕 산헤립의 말(10-15; 왕하 18:19-35)을 결론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결국, 산헤립의 논지는 자신의 앗수르 제국이 모든 나라를 차지했는데, 히스기야만이 유별나게 여호와 신앙을 벌지 않았으며, 히스기야가 그렇게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산헤립의 희롱 속에는 결과적으로 히스기야가 지닌 신앙의 특성과 위대함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히스기야가 가진 유일신 신앙과 보이는 것에 의지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뢰하는 믿음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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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헤립의 신복들도...비방하였으며 - 위에 기록된 산헤립의 전갈 외에 산헤립의 신복까지 여호와 하나님과 그 종 히스기야를 비방했다. 여기서 우리는 역대기 저자가 풍부한 자료들로부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발췌하여 여기에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Barker). , 역대기 기자는 '신복들'의 비방하는 말의 내용들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과 그 종 히스기야 - 산 헤립은 히스기야를 비방한 반면(10-15), 신복들은 히스기야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비방의 대상으로 첨가 되었다. 또한 히스기야에게 그의 종'(, 아벱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히스기야를 비방한 것은 바로 여호와를 비방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역대기 기자는 이해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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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헤립이 또 편지를 써서 - 산헤립은 랍사게와 다른 두 신복들(왕하 18:17)에게 보낸 전갈 이외에 또다른 편지를 급히 보냈다. 이와 같이 산헤립이 다시 편지를 보낸 이유는 대개 두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 첫째 이유는 랍사게가 비방의 말로써 백성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항복을 유도하였으나, 오히려 히스기야와 그의 백성의 신앙은 더욱 견고해져 강력한 저항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왕하 19:14-19). 그리고 또한 다른 이유는 구스 왕 디르하가의 공격으로 인하여(왕하 19:9), 산헤립의 마음이 다급해져 유다를 조기(早期)에 항복시키기 위해서였다(Keil, O.Zckler, Curt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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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다 방언으로 크게 소리 질러 - 산헤립의 신하 랍사게가 유다 방언으로 크게 소리 질러 이야기함으로써, 성안의 백성들을 놀라게 하고 괴롭혔기 때문에,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랍사에게 유다 방언으로 말하지 말고 아람 방언으로 말할 것을 요청한 사실이 열왕기에 나타난다(왕하 18: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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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세상 백성의 신들 - 여기서 역대기 저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와 이방인들의 거짓 신들과의 분명한 구별을 지으면서, 산헤립과 랍사게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말하고 있다. ,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에도 불구하고, 앗수르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피조물인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 신들처럼 취급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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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로 더불어...기도하였더니 - 히스기야의 구체적인 기도 내용은 왕하 19:15-19에 나타나 있고,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왕하19:20-34에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지로서 나타나 있다. 열왕기에는 직접적으로 히스기야가 이사야와 함께 기도했다는 표현은 없으나, 히스기야의 요청에 따라 이사야도 함께 기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왕하 19:2 ;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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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천사를 보내어 - 본절과 병행 구절인 왕하 19:35-37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35)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는 본절과 동일한 의미이다. '여호와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라는 표현은 직접적인 신의 현현(顯現)이라기 보다는 사자를 통한 여호와의 직접적인 사역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데, 이때 앗수르는 역병(pestilence)에 의해 전멸되었을 것으로 보인다(Curtis).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장관들을 멸하신지라 - 왕하 19:35에는 단지 군사 십 팔만 오천 명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역대기 기자는 대표성이 있는 '대장''장관들'까지 특별히 첨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는 앗수르 군대가 전력상 큰 타격을 입게 된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자 한 의도에서 였던 것 같다.

 

 얼굴이 뜨뜻하여 - 이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베보쉐트 파님'을 직역하면, '수치스런 얼굴로'란 뜻이다. , 심한 수치심 때문에 얼굴이 붉어지며 달아오른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스 9:7 ; 44:16을 참조하라.

 

 그 신의 전에 들어갔을 때에...죽였더라 - 여기서 '그 신의 전'이란 니스록 신전을 가리키는데, 니스록은 앗수르의 불신(god of fire) 누스쿠(Nusku)와 동일한 신으로 추측된다(왕하 19:37 ; 37:38 ; Curtis). 산헤립은 이 신전에서 그의 몸에서 난 아들 아드멜렉과 사레셀에 의해 피살되었다(왕하 19:37). 한편 앗수르 역사를 살펴보면, 이드람멜렉과 사레셀은 자기들의 부왕(父王)을 죽인 죄목으로 아르메니아(아라랏)로 도망가야만 했고, 산헤립의 후계자로서 에살핫돈이 즉위하였다. 역대기 저자는 이러한 산헤립의 죽음을 열왕기 기자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함으로써(Curtis) 앗수르 왕 산헤립의 죽음이 여호와의 저주에서 기인한 것이고, 이스라엘은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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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구절에서 역대기 기자는 자신의 결론을 추가하고 있다. , 히스기야가 누리고 있는 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보호하시매 - 이 구절을 1절과 연결시켜 볼때, 여호와께서 히스기야를 보호하신 이유는 그의 모든 충성된 일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적국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사 - 본절이 산헤립 침입 이외에 또 다른 전쟁이 있었음을 가리키는지(Barker), 아니면 앗수르가 물러나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이었다는 사실이 다른 나라에 퍼지게 되어 그 소문을 들은 다른 이방 나라들이 유다를 넘보지 못했음을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다. 어쩌든 본절은 분명히 여호와께서는 산헤립 뿐만 아니라 어떠한 적국의 침입으로부터라도 유다를 보호해 주셨음을 말하고 있다(14:6 ; 15:15 ;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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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사람이 예물을 가지고 - 여기서 '여러 사람'이란 유다 근방의 이웃 나라들로부터 찾아온 대사들일 것으로 추측된다(O. Zockler). 이들이 히스기야에게 예물을 가지고 온 이유는 유다가 앗수르의 팔레스틴 진출을 저지시킴으로써 그들도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감사의 표현으로 예물을 가져왔을 것이다. 또한, 히스기야의 세력이 강해졌음으로 주변 국가들이 히스기야와 평화 조약을 맺으려 했을 것이다. 한편 이처럼 이웃 나라의 예물들을 받은 왕으로서는 솔로몬(9:23, 24)과 웃시야(26:8)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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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히스기야의 병과 그의 교만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히스기야의 회개에 관해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왕하 20:1-8의 요약적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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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 히스기야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것은 그의 부()가 아니라 그를 부요케 하며, 그의 생명을 구하여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궁의 보물과 성전의 창고를 부로닥발라단의 사자들에게 내 보임으로써(31; 왕하 20:12, 13 ; 39:1, 2), 자신의 교만을 드러내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지 않았다.

 

 진노가...임하게 되었더니 - 여호와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히스기야에게 보내셔서 예언하게 하셨다.그런데 그것은 히스기야 왕의 모든 보물이 바벨론으로 옮겨지게 될 것이고, 그의 아들 중에 바벨론 왕의 환관이 될 자가 있을 것이라는 진노의 예언이었다(왕하 20:16-18 ; 3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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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에 - 히스기야가 중병에 걸렸던 시기에 관해서는 왕하 20:1 주석을 참조하라.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으로 보이셨으나 - 이는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수명을 15년간 연장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의 징표로서 일영표(日影表) 위에 머무른 해의 그림자를 뒤로 10도 물러나게 하신 사건(왕하 20:8-11 ; 38:8)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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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 히스기야가 회개한 사실은 왕하 20:19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회개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3:12)은 연기되었는데 이 같은 그의 태도야말로 그가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었음을 증거해 주는 실례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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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스기야가 부와 영광이 극한지라 - 이와 유사한 표현이 여호사밧(17:5 ; 18:1)과 솔로몬(1:12), 그리고 다윗 왕(대상 29:28)에게도 쓰였다. 본절의 '부와 영광이 극하다'라는 표현은 선왕(善王)들의 성품과 통치를 나타내주는 전형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Curtis).

 

 은금과...국고(國庫)를 세우며 - 왕하 20:13에 따르면 히스기야는 여기에 언급된 각종 보물들과 군기고(軍器庫)와 내탕고(內帑庫)를 부로닥발라단의 사자들에게 다 보내어 주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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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 - 이것들은 주로 이스라엘 땅에서 나는 대표적인 산물들로서 함께 자주 언급되고 있다(31:5 ; 18:12 ; 7:13 ). 다윗과 웃시야 때에도 이와같이 풍부한 산물들로 인하여 창고들을 만들었고 온갖 짐승과 양떼를 위하여 우리를 만들었다(26:10 ; 대상 27:25). 이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신 결과이다(29, 30). 한편, 본절에 나타난 '외양간'은 히브리어로 '우라오토'를 번역한 말로서 원어의 의미는 '사료 선반'(O. Zockler), 혹은 '양떼를 위한 우리'(Kei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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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하여 성읍들을 세웠으니 - 본절의 '성읍들'(, 아림)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학자들 간에는 몇 가지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1) 이것은 일반 성읍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소떼와 양떼를 지키기 위한 '망대들'을 가리킨다는 견해(Keil, zocker). , 왕하 17:9에 의하면 가축을 지키는 목동들의 거처인 망대가 성읍 주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2) 본절에 해당하는 원문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다는 견해(Kautzsch, Benzinger). 이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본절을 수정하여 해석하기를 '히스기야는 자신을 위하여 국고성(國庫城)을 만들었고 많은 양떼와 소떼를 소유하게 되었다'라고 해석한다. (3) 본래대로 '성읍들'로 해석해야 된다고 보는 견해(Kittel, Barnes). 그래서 바르너스(Barnes)는 주장하기를 이 성읍들은 전시(戰時)에 양떼와 소떼를 도피시키기 위한 장소라고 한다. (4) BHS(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의 본문 비평가인 루돌프(W. Rudolf)'성읍들'에 해당하는 이 단어를 생략하여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상의 네 가지 견해 가운데 (1)의 견해가 기장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본 히브리어 '아림''눈을 뜬다', '잠깨다', '일어나다'를 의미하는 '우르'에서 온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은 양떼와 많은 소떼를 지키기 위해 세운 망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저에게 재산을 심히 많이 주셨음이며 - 여호와는 바로 부(wealth)의 근원이시다(대상 29:12). 여기서 '재산'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레쿠쉬'31:3에서 보듯이 많은 소떼와 육축의 소유를 가리킨다(Ke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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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혼의 윗 샘물을 막아 - 역대기 저자는 히스기야가 공사했던 수로(水路) 사업을 굉장히 큰 치적 중의 하나로 기록하고 있다(3, 4절 참조).

 

 다윗성 서편으로 곧게 인도하였으니 - 히스기야가 만든 이 수로는 다윗 성의 서쪽 방향으로 곧장 내려가도록 만들어졌는데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바에 의하면 그 수로는 높이 60cm-1.5m, 너비 60cm, 총길이 약 520mS자형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왕하 20:20). 한편, 히스기야가 이처럼 기혼 시냇물을 끌어들여 저장한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 백성들의 식수 공급 : 팔레스틴 지방은 연평균 강우량이 500mm 내외인 건조한 지방이다. 따라서 식수를 확보하기가 용이치 않았다. (2) 전쟁의 방비용 : 이는 3, 4절에 의해 명확히 입증된다. , 히스기야는 수로를 건설함으로써 외국 군대가 침입했을 때 그들이 식수를 공급받지 못하도록 하고, 한편으로 우군(友軍)의 식수를 원활히 공급하려고 의도하였다.

 

 저의 모든 일이 형통하였더라 - 이에 대해서는 31:21 ; 대상 29:23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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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웨켄'30절의 마지막 부분인 '저의 모든 일이 형통하였더라'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따라서 이 접속사 히스기야가 형통한 사실과 본절의 내용이 어떻게 연결되었는가를 잘 보여 준다. 그런데 이 접속사에 대하여 학자들 간에는 서로 다른 해석을 한다. (1) 역접 관계를 보이는 '그러나'로 해석하는 경우(A.V., Luther) : 이렇게 해석할 때 본절은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되는데, 즉 히스기야는 바벨론 방백들이 왔을 때 범죄하여 형통치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시험으로 인해 나타난 부정적 결과로 말미암은 해석이다.(왕하 19:12-19). (2) 순접 관계를 보이는 '그래서'(and thus)로 해석하는 경우(Bertheau, Keil, Barker) : 이것은 본절의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하게 해 주는데, 즉 히스기야가 자신의 무궁한 번영을 마음껏 누리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를 시험하셔서 그를 교만치 않고 겸손하게 만드셨다는 의미가 된다(Zockler, Curtis). 이상의 견해에서 후자의 해석이 더욱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시험하신 것은 그의 형통함을 깨뜨리고 죄에 빠지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히스기야가 그 시험에 실패하여 교만하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를 겸손케 하여 계속 형통함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26). 한편 왕하 19:19에는 후손들에 대한 불행한 예언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받아들인 히스기야의 겸손한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그 땅에 나타난 이적 - 바벨론 방백들은 히스기야의 병문안을 위해 보냄을 받았지만(왕하 20:12 이하), 실상 히스기야를 위해 하나님께서 보여 주셨던 천체의 변화에 대해 더 많은 질문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24).

 

 그 심중에 있는 것을 알고자 하사 - 여호와께서 시험을 통하여 히스기야에게 알고자 하셨던 것은 아마 여호와의 행사에 대한 '그의 전적인 순종'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순종은 범사에 여호와를 참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3:6). 한편 이와 유사하게 여호와께서는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시험을 통하여 진실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알고자 하셨다(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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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스기야의 남은 행적 - 그의 생애 중에 있었던 사건들은 열왕기서와 이사야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의 환상'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본문이 원문이고, 열왕기서의 설명은 이사야를 발췌한 것임을 시사하는 듯하다(왕하 18:9-20:19 ; 36-39). 한편, 전설에 따르면 이사야는 B.C. 69712살의 나이로 즉위한 므낫세 왕(B.C. 697-642)의 신복들에 의해서 톱으로 잘려 순교했다는 한다. 이사야(B.C. 740-681)는 아마도 히스기야보다는 오래 살았기 때문에 앗수르 왕 산헤립의 사망으로 그를 계승하여 B.C. 681년에 즉위한 에살핫돈(B.C.681-699)과 관련이 있는 사건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합당한 것 같다(37:37, 38).

 

 모든 선한 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씨딤'은 단순히 '경건한 행위', '선한 일'(Keil, O. Zockler)을 가리킴과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함과 사람에 대한 친절한 행위 모두를 포함하는 말로 이해된다(Curtis). 한편 이러한 표현으로 평가 받은 사람은 히스기야와 요시야, 느헤미야(13:14) 뿐이다.

 

 이사야의 묵시책 - 1:1의 말씀과 연결해서 볼 때 이것은 산헤립의 침입과 히스기야의 병에 대한 사실을 포함하고 있는 이사야의 예언서를 가리키는 것 같다(Keil, Curt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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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실 중 높은 곳에 장사하여 -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다른 해석들이 있다. (1) 묘실이 부족하여 새롭게 묘실을 높은 곳에 만들었다는 견해(Barker, Thenius). (2) 묘실 중에서 제일 높은 곳, 또는 윗쪽에 장사했다는 견해(Keil, Curtis). 그러나 '높은 곳'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알레'는 묘실의 상층부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므로 후자의 견해가 더 옳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이는 '저의 죽음에 존경함을 표하였더라'는 말과 잘 어울린다(16:14 ;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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