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역대상(구속사)

역대상21장,성전건축

호리홀리 2015. 10. 7. 10:13

 지금까지 다윗 왕의 영광된 측면만을 부각시켜서 기록했다(10:1-20:8). 그러나 본장에서부터는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준비하는 다윗 왕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시기적으로 다윗 왕의 통치 말기에 해당하는데 다윗 왕의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던 때로부터 약 20년의 세월이 경과한 것으로 보인다(Payne). 참으로 이 20년의 기간 동안에 다윗 왕은 그의 큰 범죄로 말미암아 일련의 연쇄적인 징계들을 받았다. 그 징계들이란 암논의 추행 사건(삼하 13), 압살롬의 반란(삼하 14-19), 그리고 세바의 반란(20) 등이었다. 그러나 본서 저자는 이러한 다윗(David) 왕의 불행했던 역사를 뛰어넘어 곧바로 성전 건축에 관련된 다윗 왕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 왕이 겪은 고통스런 일련의 역사를 본서에서 생략한 것은 바벨론(Babylon) 유수(幽囚)에서 풀려난 유다 왕조의 후손들에게  왕조의 탁월성 및 정통성만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신정 국가 건설에 큰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자 하기 위함이었다(Payne). 그런데 이러한 저자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본장에서 다윗 왕이 크게 범죄했다고 생각되는 인구 조사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본서에 언급된 것은 이 일을 계기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전 건축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 이 사건을 동기로 해서 성전의 부지가 결정되고 성전 건축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단이...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 본 문맥은 내용상 삼하24장과 일치하고 있으나 많은 차이점이 발견된다. , 삼하 24장에서는 다윗을 격동한 주체가 하나님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본절에서는 그 주체가 사단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삼하 24장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Lange).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유대인의 신관(神觀)에 비추어 볼 때 잘못된 추측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단의 활동을 허락하실 때에야 비로소 사단은 활동을 개시할 수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1:12;삼상 26:19). 참으로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일에 간섭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다(12:23;104:9-31;50:2, 3;1:15, 16). 그래서 삼하 24장은 바로 이러한 섭리적 차원에서 다윗을 격동하신 주체가 하나님이었다고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본문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움직여지는 결과적 측면에서 그 주체를 사단으로 기록한 것 뿐이다. 따라서 이 두 구절은 어느 하나 잘못된 것이 없으며 다만 상이한 관점에 따라 달리 기록된 것일 뿐이다(PulpitCommentary).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사단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였음을 알 수있다. 그러나 혹자는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사단이 다윗을 격동한 것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고 주장한다(1:11;2:5, Wycliffe). 그러나 사단이 다윗을 격동한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이라고 하기보다는 '고소', '기만' '파멸'을 일삼는 사단의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사단을 이용하여 다음과 같은 자신의 세 가지 목적을 달성하신다. (1) 그것은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려는 다윗 왕의 교만을 제거하여 겸손하게 만드는것, (2) 지난번 압살롬의 난, 세바의 난 때에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종 다윗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형벌하시는 것(삼하 24:1), (3) 그리고 궁극적인 것으로 성전건축을 구체적으로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단의 역할이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인데 이러한 활동을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혹은 연단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상(思想)은 포로기 전후에 나타난 유대교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O. Zockler). 

 

[대상21:2]

 다윗이 요압과 백성의 두목에게 이르되 - 여기서 '백성의 두목'(the ruler of thepeople)이란 삼하 24:4에 의하면 다윗 왕의 '군사 지휘관(군대 장관)'(the captainsof the host)들이었다. 그런데 다윗이 요압과 함께 이들에게 인구 조사를 명하였다는 사실은 그가 공식 석상에서, 곧 지휘관 회의에서 이 명령을 시달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 브엘세바(Beersheba)는 유다의 남쪽 경계지이며 단(Dan)은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지이기 때문에 이 지명들은 '이스라엘의 온 영토'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브엘세바(Beersheba)는 헤브론(Hebron) 서남방 약 50km지점에 위치한 팔레스틴의 남쪽 국경이다. 그리고 단(Dan)은 옛날의 바니아스(Banias), 즉 가이사랴 빌립보(Cesarea Philippi) 북방 약 5km 지점에 위치한 팔레스틴의 북쪽 국경이다. 그러므로 '브엘세바에서 단까지', 혹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란 말은 이스라엘 전 국토를 가리키는 말이다(20:1;삼상 3:20;왕상 4:25).

 

 그 수효를 알게 하라 - 다윗이 인구 조사를 명하는 장면이다. 결국 다윗은 이러한 명령을 함으로써 국가적인 큰 재앙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인구 조사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지시하에 인구 조사를 실시한 사례들이 여러번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1:1-3;26:1-4;30:12-16).문제는 다윗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동기를 가지고 인구를 조사하였다는 데 있었다. , 다윗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인구 조사를 명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인구 조사의 명령을 내림과 더불어 칼을 뺄만한 사람의 수(5)를 헤아리게 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그는 우선 인구 조사를 집행할 책임자로군대 장관인 요압을 임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합법적인 인구 조사에있어서 제사장들이 그 임무를 감당했던 것과 크게 배치되는 것이었다(1:3;26:1,2). 또한 이스라엘이 인구 조사를 할 때 각 사람에게 생명의 속전(贖錢)을 받아 하나님께 드려야 했으나(30:12) 다윗의 인구 조사에 있어서는 이런 일이 행하여지지 않았다. 사실 이 속전은 이스라엘이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생존케 하시고 번성케 해 주신데 대한 감사의 예물이었던 것이다(30:13). 그러나 다윗은 이 예물을 백성들에게 받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을 시행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논의된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 다윗은 자신의 왕권의 강화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권세를 확인하기 위하여 인구 조사를 시행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의 인구조사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세력을 의지한 그의 교만함과 불신앙을 보여준 죄악된 행위였던 것이다(Matthew Henry, Lange, Keil, Pulpit Commentary, Pay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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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21:3]

 요압이 가로되...어찌하여 이 일을 명하시나이까 - 요압이 다윗의 인구 조사 명령에 반발하여 강력히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요압이 이처럼 다윗의명령에 크게 반발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혹자는 이에 대해 말하기를, 요압은 백성들의 원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The Interpreter's Bible). , 당시 근동 지방에서 실시된 인구 조사는 흔히 과세와 징병의 목적으로 실시되었는데 금번의 다윗의 인구 조사에 대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와 같은 시각으로 인식하여 다윗 왕조에 대해 원망을 터뜨릴 것을 요압은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 전혀 배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정 국가인 다윗 왕조의 군대장관 요압이 이처럼 크게 반발한 것은 보다 특별한 이유에서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그는 신정 국가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워지고 또한 앞으로 더 크게 세워질 것을 알고 있었다(33:29). 그런데 다윗 왕이 이러한 신정 국가의 원리를 무시하고 자기의 힘을 의지하려는 동기에서 인구 조사를 실시하려 하자 이에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던 것이었다(Pulpit Commentary, Lange). 그래서 요압은 다윗의 용장(勇將)으로서 그와 갈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삼하 3:27-29) 본절에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신실한 조언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혹자는 요압의 간언이 인구조사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보다 자신의 군사에게서 안정을 찾고 있었음에 대해 지적한 것이라고 한다(Wycliffe).

 

 어찌하여 이스라엘로 죄가 있게 하시나이까 - 여기서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쉐마'는 종국적으로 형벌을 초래하고야 마는 '원인적인 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의 이 같은 표현은 이러한 다윗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죄에 동참하게 되었으며(Barker) 백성들이 하나님의 형벌을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O. Zockler). 그래서 요압은 이 문맥에서 다윗의 인구 조사가 결국은 이스라엘을 형벌 가운데로 나가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압의 말 가운데는 다윗 왕과 이스라엘이 언약(서약)으로 연합된 관계에 있다는 사상이 나타나 있다. , 온 이스라엘은 다윗 즉위시 그 앞에서 충성의 서약을 함으로써(11:3;삼하 5:3) 그와 하나된 공동체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다윗의 죄는 곧 이스라엘 전체의 죄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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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21:4]

 왕의 명령이 요압을 재촉한지라 - 여기서 '재촉한지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자크'는 본래 '강퍅하다', '강화하다', '완악하다'는 뜻이다(8:19;9:35).그래서 이는 다윗 왕이 요압의 반대를 끝까지 뿌리치는 완악함을 보였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요압의 충언에 대해 매우 위압적인(NIV, overruled) 자세로 단호하게 물리친 것이다. 이 때문에 공동 번역은 이를 '굽히지 않았다'라고 의역한 것이다. 한편, 이처럼 사단의 유혹 아래 있는 자들은 그 귀가 무디어져 버리기 때문에 아무리 유익한 충고를 듣더라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사단이 하나님의 교회를 혼란시키기 위해 취하는 가장 교활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교회의 지도자를 교만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교회 지도자들의 말이라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땅에 두루 다닌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 병행 구절인 삼하 24:5-8에는 인구 조사를 한 요압의 경로(經路)가 자세히 언급되어 있으나 본절에서는 이를 간단히 요약해 버렸다. 사무엘하에 의하면, 요압은 요단(Jordan)을 건너 갓(Gad) 골짜기 가운데 성읍인 아로엘(Aroer)에서 출발하여 지도상으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였다. 또한 삼하 24:8의 기록에 의하면, 요압은 이 일을 9개월 20일 만에 완료하였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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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21:5]

 이스라엘 중에...일백 십만이요 유다 중에...사십 칠만이라 - 병행 구절인 삼하24:9에는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 만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 만이었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서 본서의 언급과 사무엘서의 두 기록 사이에 숫자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군사의 수에서 차이가 나는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혹자는 사무엘하의 기록보다 본절의 기록에 유다의 군사 숫자가 감소되어 나타나 있는 것은 본절에는 레위와 베냐민 지파의 수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Curtis).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사무엘하의 기록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므로 이 주장은 옳지 않다. 다시 말해서 베냐민의 숫자가 빠져 있어서 본절에서 유다의 수가 감소했다는 의견은 긍정이 가나 레위 지파의 수가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수가 본절에서 늘어난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의견은 부정확한 것으로 생각된다. (2) 혹자는 본장의 기록이 이방인, 곧 다윗 왕의 통치를 받고 있던 이방인의 숫자까지도 포함시킨 기록이기 때문에 사무엘하의 기록보다 더 많게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성경 상의 아무런 근거가 없다. (3) 혹자는 '그 수효를 다윗 왕의 역대지략에 기록하지 아니하였더라'(27:24)는 구절에 근거하여 이 숫자는 기록되지 아니한 구전에 의해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두 구절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우리는 이 주장의 가능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설득력있는 주장이 있기에 우리는 또한 그 설명을 주시해 보아야 한다. , (4) 혹자는 본절에 나타난 이스라엘 군사 110만명의 숫자에는 다윗의 정규군 약 30만명(정확히 말해서 288천명;27:1-15)이 포함되었으며 사무엘하의 80만명에는그 정규군의 숫자가 빠진 것이라고 주장한다(Payne). 이는 이스라엘의 군사 수에 대해서만 수치상으로 거의 맞아 떨어지는 주장이기 때문에 타당한 것으로 고려된다. 그러나비단 본절 뿐만 아니라 본서와 평행 구절의 많은 부분(왕상 4:26과 대하 9:25;왕상7:26과 대하 4:5 )에서 이같이 숫자상의 차이는 발견된다. 이는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서 숫자 서술을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기이거나 잘못 해독한 경우일 수 있다. 또는 500 이상의 숫자를 표기할 때는 알파벳 위에 특별한 표시(그 한 예로 점을 사용했음)를 했기 때문에 기록하거나 해독할 때 생긴 실수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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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21:6]

 레위와 베냐민 사람은 계수하지 아니하였더라 - 본절의 이러한 언급은 사무엘서의 평행 구절에는 없는, 본서에만 나타난 사실이다. 그런데 요압이 레위 지파를 계수하지 아니한 것은 선례(先例)를 따른 것이었다. , 이전의 합법적인 인구 조사에서 하나님은 레위 지파의 종교적인 지위 때문에 그들을 계수하지 말도록 명령하셨던 것이다(1:49). 그래서 요압은 다윗 왕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던 차에 이와같이 선례를 따라 레위 자파를 인구 조사의 대상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또한 베냐민 지파의 영토 안에는 예루살렘(Jerusalem) 성과 기브온(Gibeon) 성막이 있었으므로 요압은 이것을 빌미로베냐민 지파도 조사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던 것이다(Payne). 한편, 27:24에 의하면, 요압이 인구 조사를 다 끝내기도 전에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 임하였다. 이로 비추어 보건대, 요압은 레위 지파 또는 베냐민 지파의 경내에서 소일(消日)하다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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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21:7]

 하나님이 이 일을 괘씸히 여기사 - 이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이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혹은 '이 일은 하나님 눈에 악한 것이었다'라는 의미이다. , 다윗이 자신의 안정과 교만을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케 한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다는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할 때에는 언제나 그의 행위에 대해 여호와께서 괘씸히 보신다(34:7;45:7; 31:2).

 

 이스라엘을 치시매 - 이는 다윗을 회개시키기 위한 예비적인 매라기 보다는 14절에 기술된 '온역의 재앙'을 가리키는 구절이다(Pulpit Commentary, Lange). 한편 본절에 언급된 '치시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나카'인데 이는 '때리다', '쫓아내다', '죽이다', '벌주다'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본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윗의 범죄로 인해 벌을 줘서 온역으로 백성들을 죽였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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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21:8]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 병행 구절인 삼하 24:10에는 '다윗이...그 마음에 자책하고' 나서 여호와께 회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계기를 통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을 받게 하셨을 것이 틀림없다. 그 계기가 요압의 계속적인 반대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Payne). 한편 본절에 언급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라는 말은 다윗이 밧세바의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께 죄의 고백을 할 때 사용한 표현과 유사하다(삼하12:13). 이처럼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며 회개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다윗이 지닌 진솔한 성품으로, 자신의 죄에 대해 한 마디의 변명도, 타인에 대한 책임 전가도 없이 스스로 책임을 지려는 자세이다. 사실 죄악으로 인해 초래되는 가장 심각한 병폐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 단절이다. 그러나 다윗은 사단의 시험을 극복하고 자신의 잘못을 자복하며 즉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나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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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21:9]

 여호와께서 다윗의 선견자 갓에게 이르시되 - 병행 구절인 삼하 24:11에는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갓에게 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다윗은 밤새도록 양심의 가책 속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이후 곧 그날 아침에 선견자 갓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다. 따라서 선견자 갓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은 다윗의 회개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선견자 갓(God)은 이전 다윗의 망명 시절에 모압(Moab)을 따라 유다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다윗에게 전하여 주었던 사람이다(삼상 22:5). 그리고 그 이후 그는언약궤 앞에 아삽의 찬양대를 상주하게 하라는 지시를 다윗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대하 29:25). 또한 그는 사무엘, 나단 선지자와 더불어 다윗의 행적을 기록한 역사가로 소개되기도 한다(29:29). 한편, 본절에 나타난 '선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호제'이다. 그런데 이는 '주시하다', '감지하다', '이상을 보다'를 뜻하는'하자'에서 유래한 용어로 ', 계시, 신탁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 , 다시 말해서 '선견자'란 하나님의 이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하는 자이다(2:26, 41, 43, 45;4:20;7:2). 그러나 이와는 달리 선견자(seer)와 비슷한 의미를지닌 '선지자'(prophet)'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자'를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역사상 그 초기에는 선견자와 선지자가 분명히 구분되어 사용되지 않은 듯하다(삼상 9:11;3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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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21:10]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 본절에 언급된 '보이노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나타'로서 '뻗다', '펼치다', '제공하다'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선택할 것을 앞에 놓아둔 생생한 현장을 나타낸 것이다(Lange). 그런데 여기서 세 가지는 12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3년 동안의 기근, 3개월의 칼의 재앙, 그리고 3일 간의 온역이었다. 이 세 가지는 흔히 하나님의 대표적인 형벌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26:25;왕상 8:37;대하 20:9;14:12;21:7-9;24:10;27:8, 13;29:17) 다윗은 이중에서 기근과 칼의 재앙을 이미 맛본 바 있다(삼하 21:1;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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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21:11]

 너는 마음대로 택하라 -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는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이지 결코 하나님 밖에서의 방종이 아니다. 본절에서 볼 때 사실 다윗에게 어떤 형벌을 주시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세가지를 제시하시면서 마음대로 선택하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다윗이 진실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지 시험해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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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21:12]

 삼 년 기근일지 - 병행 구절인 삼하 24:13에는 본절의 3년 기근이 7년 기근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본 구절의 언급이 옳은 듯하다. 왜냐하면 본 문맥에서 하나님이 갓 선지자에게 제시하고 있는 재앙들이 모두 3이란 숫자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Payne,Lange, Pulpit Commentary). 그래서 70인역(LXX)도 이를 지지해서 3년으로 기록해 놓았다. 그런데 사무엘서에서 이렇듯 7년으로 나타낸 것은 숫자를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기록한 것을 잘못 해독했거나 오기(誤記)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3'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깃멜''7'을 뜻하는 '자인'은 그 모습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한편 기근, , 온역의 세 가지 형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역사를 이뤄가시는 과정에서 자주 사용하신 형벌로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28:21-25;삼상 6:3-6;왕하 19:35;14:21;6:4-8).

 

 여호와의 사자 - 평행 구절인 삼하에서는 발견되어지지 않는 말로 '천사'(KJV, theangle of the Lord)를 의미한다(Pay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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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21:13]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나이다 - 다윗이 세 가지 재앙 중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시는 형벌이라고 여겨지는 온역을 선택하는 말이다. 그는 잔악한 이방인의 손에 붙여지기 보다는 하나님의 손에 붙여짐으로써 긍휼하신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이 살 소망이 있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의 선택은 하나님의 진정한 본성이 긍휼과 자비라는 그의 믿음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참으로 이 장면에서 다윗은 비록 재앙을 당하더라도 원수의 손에서는 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서 당하겠다는 신정 국가의 왕으로서의 신앙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혹자는 다윗의 이러한 대답을 '경건과 지혜가 합한 응답'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P.C. Ba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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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21:14]

 여호와께서...온역을 내리시매 - 이 형벌에 대해 사무엘서(삼하 24:15)에서는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이 이스라엘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정하신 때라는 말을 '저녁 희생 제사 때'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삼일 동안의 온역을 하루로 단축시키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Barker). 왜냐하면 15절에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는 뜻을 돌이키고 있고, 이것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원문에도 원어상 이 말에는 관사가 붙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이었더라 - 혹자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인구가 약 5백만명인 것으로 보고 7만명의 사상자는 전체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추정한다(Pulpit Commentary). 사실 이렇게 볼 때 당시 이 재앙의 결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뿐 아니라 당시의 다윗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택하신 나라, 신정 국가 안에는 하나님보다 인간의 힘을 의지하는 그 어떠한 불신앙적 요소도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이러한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교육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큰 재앙을 내리셨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혹자는 이 형벌이 매우 적절한 벌이었음을 강조한다(Wycliffe). 왜냐하면 다윗의 범죄는 곧 군사력에 의지하며 그것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인구 계수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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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21:15]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 여기서 '뉘우치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함''뜻을 돌이키다', '동정하다', '위로하다'라는 뜻이다(6:6;32:14;2:18;106:45). 그래서 본절은 온역의 재앙이 3일간 계속되지 아니하고 중간에 중단된 것을 암시한다. 진정 여호와께서는 천사가 예루살렘을 멸하려 하는 것을 보시고 3일간의 재앙 기간을 단축하여 본래의 계획을 수정하신 것이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본래의 뜻을 돌이키신 것은 하나님의 본성인 긍휼하심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같은 것은 바로 다윗이 재앙을 선택하기 직전에 한 가닥 희망으로 가졌던 요소였는지도 모른다.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선지라 - 여기에서 여부스 사람이란 '예루살렘 성의 원주민'을 의미한다(11:4). 왜냐하면 여부스 족속은 가나안의 일곱 족속 중 한 족속으로(10:15, 16) 예루살렘 산악 지대에 거했기 때문이다(13:29). 그런데 본절에 언급된 오르난(Ornan)이 병행 구절인 삼하 24:16에서는 '아라우나'(Araunah)로 소개되어 있는데 이들은 결국 한 사람의 다른 이름들이다. , 오르난은 히브리식 발음의 이름이며 아라우나는 여부스식 발음의 이름인 것이다(Keil,Ewald, Lange). 그리고, 오르난의 타작 마당은 예루살렘 동편 언덕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곳은 후에 솔로몬 때에 성전의 터가 되었다. 사실 타작 마당은 곡식의 낟알을 떨고 까부르기 위해 평지보다 조금 높은 지역에 단단하고 매끈한 땅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나무로 된 바퀴나 철이나 돌로 된 바퀴를 굴려서, 또는 가축으로 밟게 하여 곡식들을 타작하였다(삼하 24:22;41:15;2:17, Pulpit Commentary). 한편, 본절에서 나타난 '선지라'라는 말은 대단히 모호하다. 왜냐하면 이것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아마드'로서 '서다'란 뜻과 더불어 '지정하다', '일어나다', '체재하다'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19:27;30:9;13:5;10:13;삼상 14:9;7:10). 그러나 천사를 의인화해서 표현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하나님의 사자가 타작 마당곁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대상21:16]

 여호와의 사자가 천지 사이에 섰고 - 이는 천사가 하늘과 땅 사이 곧 '공중에 서 있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Curtis, p. 251). 그래서 공동 번역은 이를 '공중에 서서'라고 번역하였다.

 

 다윗이 장로들로 더불어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 여기서 굵은베를 입은 것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의 표시이며(왕상 21:27;왕하 6:30;9:3;1:13;3:5,6), 얼굴을 땅에 댄 것은 주께 대한 경배의 표시이다(대하 20:18;삼하14:33). 한편, 병행 구절인 삼하 24:17에는 장로들이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본절에서는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당시 하나님의 재앙이 전국에 걸쳐 미쳤으므로 장로들이 다윗과 함께 회개에 참여했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드려질 수 있다(L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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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21:17]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 다윗은 이번의 범죄, 곧 인구 조사의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만 있음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본 구절에서 강조의 의미로만 사용되는 인칭 대명사 ''(*, 아니)를 반복 사용함으로써 이번 일에 대한 모든 책임이 전적으로 자신에게만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의 죄를 일체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지 아니하는 다윗의 진실성을 발견할 수 있다. , 다시 말해서 본절을 통해 우리는 다윗의 위대한 신앙을 다시 한번 볼 수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윗의 고백을 통해 우리는 회개의 올바른 자세를 볼 수 있다.그것은 (1) 자신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는 것, (2) 자신 때문에 고난받는 자를 위해 간구하는 것, (3) 자신을 내어 맡기고 오직 그분의 긍휼만을 구하는 것 등이다.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 신정 국가(神政國家)에 있어서 왕과 백성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였다(11:2;23:1-4). 그래서 성경은 빈번히 지도자와 백성을 목자와 양무리로 비교하는 것이다(Wycliffe, p. 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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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21:18]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 - 혹자는 (1) 여호와의 사자가 임한 곳은 정결해야만 했으므로(28:18;6:20;13:6, 19)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그곳을 정결케 하는 제사가 드려질 필요가 있었다고 주장한다(Curtis, p.252). 그러나 우리는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단을 쌓으라고 한 여호와의 지시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지시가 있기 전에 다윗은 하나님께 진실한 회개를 드렸고 하나님은 그의 회개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 따라서 이번의 지시는 다윗의 회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킬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진정시킬 그 장소로 오르난의 타작 마당을 지명하신 것은 그곳에서 천사의 심판 활동이 중지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곳을 이스라엘을 위해 화목의 은총을 베푸실 장소로 지정하시고 그 땅을 성결케 하도록 명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오르난의 이 타작 마당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사로 드리려한 장소로 유명한데(22:2, 9;대하 3:1) 혹자는 이곳을 멜기세덱이 제사장 직분을 감당한 장소(14:17-20)로 추측한다(Barker). 한편, 본구절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갓을 통하여 지시를 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병행구절인 삼하 24:18에서는 여호와의 계시를 받은 갓이 그 지시를 전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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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21:19]

 다윗이...말씀대로 올라가니라 - 다윗 왕이 갖고 있던 신앙의 큰 특징인 순종의 모습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 다윗은 갓의 말을 듣고 지체없이 여호와의 지시에 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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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21:20]

 오르난이...천사를 보고 네 아들과 함께 숨었더니 - 오르난과 그 아들들이 숨은 이유는 천사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있었기(6)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당시 여호와나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면 죽는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6:22, 23;13:22). 한편, 70인역(LXX)에서는 '천사'(, 말르아크) 대신 ''(, 말렉)으로 기록해 놓았는데 이러한 번역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PulpitCommentary). 왜냐하면 오르난이 그곳에서 천사를 목격했다는 것은 문맥의 흐름상 자연스러운 것이며 반면 왕을 보고 숨었다는 것은 지극히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보이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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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21:21]

 오르난이 내어다보다가 다윗을 보고 - 여기서 '내어다보다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바트''유의하여 보다', '골똘히 주시하다', '관심을 가지고 보다'라는 뜻으로(15:5;84:9;4:17) 오르난이 밖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숨은 곳에서 유의하여 바라보았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그는 다윗 일행을 목격하였던 것이다. 한편, 병행 구절인 삼하 24:20에서는 '왕과 그 신복들'이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이른 것으로 나타나 있어 본절의 표현보다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매 - 구약에서 빈번하게 언급된 경배의 자세는 '무릎을 꿇는' 태도였다(왕상 8:54;9:5;45:23). 그러나 이마가 땅에 닿도록 몸을 숙이는 자세는 특별히 그 상대에게 절대 복종하는 태도였다(삼상 25:23;왕하 4:37;8:3). 이처럼 오르난은 다윗에게 왕으로서 절대 존경과 복종심을 내 보였던 것이다. 물론 그의 이러한 태도 이면에는 방금 목격한 하나님의 사자의 모습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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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21:22]

 내게 붙이라 너는 상당한 값으로 붙이라 - 여기서 '붙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탄''주다'라는 기본 어근과 더불어 '지정하다', '배당하다', '수여하다'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의 말은 결국 '팔라'는 의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상당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말레''충분한', '꽉찬'이란 뜻으로 타작 마당의 넉넉한 시가(時價)를 표현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의 요구는 곧 타작 마당전체(O. Zockler)를 팔라는 요구로 이해되어 진다. 한편, 본절을 '이 타작 마당에서 장소를 빌려라'라고 번역한 혹자의 주장(Luther)은 별로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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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21:23]

 내가 이것들을 드리나이다 - 에브론(Ephron)이 자신의 소유인 밭을 아브라함(Abraham)에게 주려고 했던 것처럼(23:10, 11) 오르난도 자기의 소유를 다윗에게 바치고자 했다(James Wolfendale). 그 이유는 그가 이스라엘 땅에서 온역이 속히 그쳐지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곡식 떠는 기계는 화목으로 - 여기서 '곡식 떠는 기계'는 나무로 만든 썰매와 같은 것(8:7, 16)으로 가축들이 끌고 다니며 곡식 낟알을 떨도록 고안된 것이다. 오르난은 번제물을 태울 화목(火木)으로 이것을 다윗 왕에게 기증하려 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그의 정성과 믿음은 가상(嘉賞)한 것이다.

 

 밀은 소제물로 - 소제물로는 곡식을 빻은 고운 가루(2:1), 고운 가루로 떡을 만들어 구운 것(2:4),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어 삶은 것(2:7), 그리고 첫 이삭(2:14) 등을 드렸다. 그런데 이 사건이 일어난 때가 오르난이 밀을 타작하는 도중이었기에(20) 그는 자신의 수확물 중 첫 열매를 다윗에게 바쳤을 것이다. 한편, 이 소제는 번제를 드리고 난 후에 이어서 드려지는 제사였다(2;6: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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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21:24]

 값 없이는 번제를 드리지도 아니하리라 - 다윗은 제사에 있어서 형식적인 것보다 내용적인 면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하나님은 자신을 드리지 아니하는 그럴듯한 외형적인 제사보다 자신을 함께 바치는 참된 제사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경건한 다윗이 모를 리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피정복민인 오르난의 제의를 거절하고 자신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하여 모든 것을 그에 상응하는 가격으로 구입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Payne, McConcille).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것을 희생해서 드리는 자의 제사를 기뻐 받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삶 전체가 주께드려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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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21:25]

 그 기지 값으로 금 육백 세겔을 달아 - 금 한 세겔(Shekel)은 은 한 세겔의 15배이며 은 한 세겔은 노동자의 4일 동안의 품삯에 해당하는 값어치이다(30:24). 따라서 이를 계산해 보면 금 육백 세겔은 노동자가 36천일, 다시 말해서 약 100년 동안 일한 품삯에 해당하는 값어치이다. 한편, 병행 구절인 삼하 24:24에는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라고 기록되었다. 이와같이 양 구절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 혹자는 본서 저자가 크게 과장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Thenius,Lange). 그러나 이 차이는 과장치고는 너무도 큰 차이이며 터무니 없는 것이다. 따라서이 주장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양 구절의 상이한 수치가 각기 다른 두 품목에 대한 다른 가격인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Pulpit Commentary, Payne, Curtis,p. 253). , 은 오십 세겔은 단지 타작 마당과 소를 사는데 든 비용일 뿐이며 금 육백 세겔은 후에 성전 부지가 된 모리아(Moriah) 산 전체를 구입하는 데 든 비용인 것이다. 그런데 사무엘서 저자는 다윗 왕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했기 때문에 그는 단지 다윗 왕이 제사에 필요한 것만을 구입한 것으로 기록하였으나 본서 저자는 성전 건축을 예비하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했기 때문에 성전부지를 사들인 것으로 서술한 것이다. 한편, 혹자는 다윗이 성전 부지를 구입하는데 지불한 600 세겔은 한 지파당 50세겔씩 12지파에게 부담시켜 산출한 액수라고 추정한다(Curtis). 그러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미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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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21:26]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 이 말은 하나님께서 불로써 번제단 위의 제물을 사르셨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는 죄의 소멸을 상징하는 것으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내려진 하나님의 역사였다. 그런데 본서 저자는 병행 구절인 삼하24:25'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라는 평범한 기술과는 달리 기적적인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 그 제물을 태우신 사례는 성경에서 그리 흔치 않은 일로서(9:24;왕상 18:24, 37, 38;대하 7:1) 하나님의 영광스런 출현과 관련되어 나타난 것들이다. , 하나님이 불을 내리신 것은 단순히 그 기도를 응답하셨다는 사실 외에 이제 그 장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여 계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따라서 본 문맥에서 하나님께서 불로써 그 제물을 태우신 사실은 (1)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회개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용서해 주심과 아울러 (2) 그곳(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계심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이렇게 볼 때 본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곳을 성전 건축의 부지로 승락하시는 하나의 공식적인 재가(裁可)의 성격을 지닌 것임에 틀림없다(PulpitCommen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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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21:27]

 저가 칼을 집에 꽂았더라 - 실제적으로든 또는 결과적으로든 이 말은 이스라엘에 온역이 완전히 그쳤음을 의미한다(삼하 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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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21:28]

 거기서 제사를 드렸으니 - 이는 다윗이 불로 응답을 받은 이후 계속해서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있는 단에서 희생 제사를 드렸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 다윗은 이곳에서 계속적으로 조직적인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Barker, O. Zockler). 이유인 즉, 다윗이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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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21:29]

 여호와의 장막과 번제단이 그때에 기브온 산당에 있으나 - 다윗 왕은 이전에 기브온(Gibeon) 산당에서 조직적인 예배를 확립한 바 있다. , 그는 그곳에서 대제사장 사독(Zadok)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성막을 모시게 하였으며 헤만(Herman)과 여두둔(Jeduthun)으로 하여금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였던 것이다(16:39-42). 그런데 사실 여호와의 성막은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성막 건축에 대한 계시를 받고(25:1-31:11)시내 산에다 건축하였다(36:1-40:33). 그러나 성막이 완성된 후 약 50일 동안 그 장막은 시내 산에 안치되었다가 출애굽한지 제 2220일에(10:11, 12) 이동을 시작하여 약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한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이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에 정착한 후 최초로 여리고 근처인 길갈에 진을 치고 성막을 세웠다(4:19;5:10;9:6;10:6, 43). 그러나 이곳은 일시적인 장소였기에 마침내 성막은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실로로 옮겨진다(18:1;19:51). 그 이후 성막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다가 블레셋에 의해 실로가 함락될 당시, 다시 말해서 실로에서 블레셋 군에게 법궤를 빼앗길 당시 하나님의 성막은 여기에서 놉으로 옮겨진 듯하다. 왜냐하면 사울이 놉에서 아비아달을 제외한 모든 제사장을 죽인 후(삼상 22:9-23) 그곳에서 성막을 기브온으로 옮긴 사실이 성경에 나타나기 때문이다(16:39). 그런 후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다윗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언약궤와 성막을 위한 한 장소(오르난의 타작 마당)를 마련해서 하나님의 성막을 지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 시대에는 기브온과 예루살렘에 각각 성막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 때 성막이 성전으로 대치되고 성막의 기구들이 모두 성전으로 옮겨짐으로써 약 500년 간의 성막 역사는 끝이 난다(대하 5:1),

 

[대상21:30]

 다윗이 여호와의 사자의 칼을 두려워하여 - 기브온(Gibeon) 산당에 여호와의 장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지 못하고 오르난(Ornan)의 타작마당에서 계속 제사를 드린 이유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까지 제사를 드렸던 기브온 산당에 얼마든지 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가지 아니했는데 그것은 본 구절 그대로 그가 여호와의 사자의 칼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 다시말해서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후 다시 기브온으로 가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의 천사가 다시 칼로 온역을 발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옮기지 못한 것이다(J. Wolfendale). 그래서 다윗이 다시 기브온 산당에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지난번 칼을 집에 꽂았던 여호와의 사자를 무시하는 처사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옮기지 못했다고 하는 혹자의 주장은 일리가 있는 것으로 받아 드려지는 것이다(Pulpit Comment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