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사무엘하(구속사)

사무엘하6장,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호리홀리 2015. 9. 17. 11:21

뺀 무리 삼만 - 같은 내용을 기록한 대상 13:1-5에 의하면 '뺀 무리 삼만'은 틀림없이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골고루 뽑은 자들일 것이다(Keil). 왜냐하면 거기에는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올려 오기 위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의 온 이스라엘'(대상 13:5) 백성들을 불러 모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온 이스라엘'이란 곧 이스라엘 전체에서 골고루 뽑은 수행자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런데 이 '뺀 무리 삼만'은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다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한 일종의 군사들이었을 것이다(Keil & Delitzsch, Lange, Pulpit Commentary). 왜냐하면 당시 법궤가 안치되어 있었던 바알레유다(2)는 블레셋 지경(地境)에서 가까웠으므로 그들의 기습 공격에 대비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작은 법궤 하나를 운반하기 위해서 삼만이란 대군을 동원하였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이며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한 혹자의 견해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The Interpreter's Bible). 이와 관련 70인역(LXX)은 본절의 3만이란 수를 7만으로 기록하고 있음도 기억하라. 한편, 이처럼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기 위해 이스라엘 전역에서 골고루 수행자들을 뽑은 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법궤에 대한 온 국민적 관심을 회복시켜 여호와 신앙의 부흥을 꾀하기 위함이다. 각 지파간의 유대감을 조성하며 통일 왕국의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다.

 

 다시 모으고 - 이 말은 이번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체 총회는 지난번 다윗의 즉위식 때 35만명이나 모였던 총회(5:1-3;대상 12:23-40)에 이은 제 2차 총회임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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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하6:2]

 바알레유다 - 혹자는 '바알레유다'(Baale of Judah)'유다의 방백들', '유다 백성들'로 해석하였다(LXX, Vulgate, Luther, J. W. Wevers). 그러나 이 해석은 구문법상(構文法上) 옳지 않다. 왜냐하면 한 문장 안에 지명을 가리키는 지시 대명사 '거기서'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은 '거기서'가 지시하는 지명을 의미하며, 혹자들이 해석한 대로 일반명사는 아니다. 한편, 바알레유다는 '숲의 성읍'이란 뜻의 기럇여아림(Kirjath-jearim)의 옛 명칭이다. 이곳은 본래 기브온 사람들의 도시였으며 '바알라'(Baalah)로 불리웠다(15:9;대상 13:5, 6). 그 후 이곳이 유다 지파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자 '유다의 바알라'(Baalah of Judah), 곧 바알레유다로 불려지게된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욥바로 가는 길목, 곧 예루살렘 서쪽 15km 지점에 위치했었다. 한편, 하나님의 언약 궤는 이제 다윗에 의하여 온 이스라엘의 관심이 집중되기 전까지 이곳에 70년 이상 동안(B.C. 1075-B.C. 1003, 이 기간은 아벡 전투 때부터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때까지의 기간이다;Leon Wood) 머물러 있었다(삼상 7:1, 2).

 

 그 궤는...이름하는 것이라 - 이 구절은 매우 난해한 구절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 문구, '아론 하엘로힘 아쉐르 니크라 쉠 솽 여호와 체바오트 이쉐브 하케루빔알라우'를 직역하면,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그 이름이 그 위에서 불리워지는 하나님의 언약궤'이다. 여기에서 해석상 중요한 낱말은 '그 위에서'(*, 알라우)이다(우리말 성경에는 '사이에'로 번역되었음). 과연 '그 위에서'는 어디를 의미하는 걸까? (1)혹자는 '그 위에서''그룹 위에서'로 해석한다(Cleri-cus). 이 경우 본절은 '그룹 위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가 되고 만다. 그러나이 해석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룹 사이에' 계시기 때문이다(삼상 4:4). (2) 또다른 사람들은 '그 위에서'를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 위'로 해석한다(Keil,Lange, The Interpreter;s Bible). 이렇게 볼 때, 본절은 '하나님의 언약궤, 바로 그위에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그 이름이 불리워진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곧 하나님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啓示)이며 그의 능력과 속성에 대한 표현이며, 그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다. 3:7-15 강해, '하나님의 이름' 참조.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언약궤 위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재, 그분의 능력, 그분의 성품, 그분의 영광이 임재하여 있다는 말이 된다. , 하나님의 언약궤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가견적 보좌(寶座)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하나님의 궤를 '주의 권능의 궤'라고 한 표현과 일치한다(132:8). 따라서 이 해석은 비교적 타당성을 갖는다 하겠다. 한편, 다윗이 이와같이 하나님의 가견적 보좌인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려 한것은 그가 하나님을 신정왕국(神政王國)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Ce Graaf).

 

 그룹들 - '그룹'(cherub)은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천사의 일단(一團)이다. 이들의 전체 수효가 얼마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들의 직무에 대해서는 성경에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즉 이들은 창세초(創世初)에 아담이 쫓겨난 에덴 동산에서 생명 나무를 지켰으며(3:22-24) 하나님의 보좌 병거를 끄는 사역을 담당하고있다(1:20). 그러나 이들의 형상에 대해서는 정확히 규정할 수 없다. 다만 성경 곳곳의 기록들(, 1, 10;4:6-8)을 종합해 볼 때 그들은 날개를 지녔으며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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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하6:3,4]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헌 수레가 아닌 새 수레에 싣고 운반한 것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존중한 행위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수레로 운반하려 한 것은 분명히 법궤 운반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행위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에 따르면, 오직 레위인 중 고핫 자손들만이 법궤를 '어깨에 메고' 운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4:15;7:9). 그런데도 다윗이 법궤를 수레로 운반하려 한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선지자 사무엘이 죽은 이래(삼상 25:1) 다윗의 통일 왕국이 성립되기까지의 혼란기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가르침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는바 다윗도 율법에 정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2)당시 블레셋족이나 페니키아인들은 자신들의 신상(神像)을 운반할 때 수레를 사용하였는바 다윗이 이에 영향받았기 때문이다(Lange). 아무튼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뜨거운 열심은 있었으나 그 방법면에서 그릇됨을 볼 수 있다.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 - 블레셋으로부터 돌아온 하나님의 언약궤(삼상 6)가 다윗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운반되기까지 안치되어 있던 기럇여아림 사람 아비나답(Abinadab)의 집을 가리킨다(삼상 7:1, 2).

 

 아비나답의 아들 - 아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니'는 복수형으로 '아들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복수 형태 '아들들'은 때로 '손자'(grandson)를 의미하기도 한다(16:1;왕하 25:22;대상 8:40;2:5;7:1). 이렇게 볼 때 본절의 '아비나답의 아들'은 아비나답의 손자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비나답의 아들 엘르아살은 이미 70년 전부터 그 집에서 법궤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삼상 7:1, 2). 그러므로 이제는 엘르아살의 아들, 즉 아비나답의 손자들인 웃사와 아효가 이 일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더 큰 것이다(Keil & Delitzsch, Lange, PulpitCommentary).

 

 아효 - 이 말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이 말은 '그의 형제들'로 번역할 수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법궤는 웃사와 그의 형제들이 운반한 것이 된다. (2)사람의 이름으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그런데 (1)번의 경우처럼 '그의 형제들'로 해석하면, 본서 저자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웃사의 형제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 되니 이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따라서 (2)번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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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하6:5]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주악하더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관계된 큰 역사들과 관련하여 음악을 연주하곤 하였다(6:4-20;왕상 1:39;대하 5:11-14).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하며 음악을 연주한 사실은 그들이 이 행사를 지극히 거룩한 의식으로 여겼음을 입증한다. 한편, 여기서 '주악하더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하크'는 본래 '뛰놀다', '즐거워하다'는 의미이다(삼상 18:7;대상 15:29;8:30, 31;30:19). 따라서 이 말은 그들이 단순히 악기를 연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잔치 분위기에 젖어 기뻐하면서 연주한 것을 의미한다(Lange,Keil). 본절의 평행 구절인 대상 13:8에는 '뛰놀며 노래하며...주악하더라'고 되어 있다.

 

수금 - 히브리어로는 '킨노르'라고 하는데 6줄로 이루어진 현악기이다. 대개 노래를 부를 때 반주(伴奏)를 넣는 악기로 사용되었다.

 

 

 비파 - 하아프의 일종이다. 역사서(삼상 10:5;왕상 10:12;대하 9:11)와 시편(33:2;57:8;92:1-3)등에 자주 언급되는 악기로 그 용도는 수금과 같다.

 

 양금 - 히브리어로 '므나아느임'이라고 하는 이 악기는 탬버린(tambourine)의 일종이다.

 

 제금 - 히브리어로 '첼츨림' 또는 '므칠타임'(, 대상 13:8;대하 5:12)이라고도 하는 이 악기는 심벌즈(cymbals)dml 일종이다.

 

[삼하6:6]

 나곤의 타작마당 - 이에 대해 대상 13:9에서는 '기돈의 타작 마당'(the threshingfloor of Chidon)이라고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1)이 두 기록의 차이를 원문 파손으로 인한 두 저자의 실수로 보는 견해이다(The Interpreter's Bible). (2)'기돈'(Chidon)을 타작 마당의 주인 이름으로 보고 '나곤'(Nachon)을 타작 마당의 수식어로 보는 해석이다. , 나곤이란 말의 의미는 '예비된'이란 뜻으로 나곤의 타작 마당은 곧 '기돈의 예비된 타작 마당'이라는 해석이다. 이 해석은 나곤을 ''(, 예비된, 준비된)의 파생어로 본 데서 나온 견해이다. (3)'나곤''예비된', 또는 '고정된'이란 수식어로 봄은 물론 '기돈' 역시 타작 마당을 수식하는 말로 보는 견해이다. , '기돈''파괴', '재앙'이란 뜻을 지닌 단어이다. 따라서 이 견해는 '예비되었던 타작마당'은 하나님의 재앙이 웃사에게 내린(7) '재앙의 타작 마당'이었다고해석한다(Lange). (4)세번째 견해와 같이 '기돈'을 사람의 이름으로 보지 않고 '재앙'으로 해석하긴 하나 '나곤''예비된' 또는 '고정된'이란 말로 보지 않고 '나카'(, 치다)의 분사로서 '충돌하는'이란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이다(Keil). 따라서 이 견해는 이 타작 마당을 '충돌의 타작 마당이며 재앙의 타작 마당'이라고 해석한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네 견해 중 어느 것이 가장 정확한 해석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중 (3)번이나 (4)번을 지지하는 것이 비교적 무난할 것이다. 왜냐하면 (1)번은 해설이 너무 부실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23:1-7 강해, '성경 영감론' 참조. 그리고 (2)번은 본문의 문맥과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3)번과 (4)번은 하나님이 웃사와 충돌하여(8) 웃사에게재앙이 임했다고 한 본문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소들이 뛰므로 - '뛴다'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마트'는 본래 '미끄러지다', '걸려 넘어질 뻔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소들이 돌뿌리에 걸리거나 미끄러져 비틀거리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말이다(Keil & Delitzsch, PulpitCommentary). 그런데 이러한 소들의 실수는 앞서 블레셋 백성들이 암소 두 마리에 법궤를 실어 벧세메스로 운반했을 때에는 없었던 불길한 흉조(凶兆)였다(삼상 6:12). 그러므로 이 일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대로 행하지 아니한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릇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일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과거에 블레셋인들도 법궤를 수레에 실어 운반하긴 하였다. 그러나 블레셋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문외한(門外漢)이었기 때문에 저들의 행위는 묵인될 수 밖에 없었다(삼상 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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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하6:7]

 웃사의 잘못함 - 웃사가 하나님의 궤에 손을 댄 것을 가리킨다(6). 그런데 수레를 끄는 소들이 날뛰므로 흔들리는 법궤를 잡으려했던 웃사의 행위는 인간적으로 또는 상황 윤리적으로 볼 때에는 전혀 잘못이 없었다. 그러나 그 행위는 하나님 말씀에 의거할 때 엄연한 신성모독(神聖冒瀆) 행위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경 여러 군데에서 법궤의 신적 특성을 말씀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를 어겼기 때문이다. , 하나님께서는 레위 자손 중심지어 고핫 자손일지라도 법궤는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4:15).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로서 거룩한 것이니 아무도 들여다 보지도 말라고 명하셨으며(4:20;삼상 6:19), 법궤를 운반할 때에는 그것을 완전히 싸서 (4:15) (pole)를 궤의 고리에 꿰어(25:14) 운반하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하나님이 매우 엄하게 법궤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웃사가 그것을 만진 것은 그만큼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소홀히 여겼으며, 하나님을 가볍게 여겼다는 증거인것이다.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죽으니라 - 이처럼 구약 시대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함'을 침해하는 자를 향하여 급속한 진노를 발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선 그 모든 진노가 영원히 유보된 것이다(5:8, 9). 그러니 이 같은 영생의 축복을 얻은 우리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진정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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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하6:8]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 여기서 '충돌'로 번역된 '페레츠'의 원동사 '파라츠''무너지다', '파괴하다', '분산시키다'등의 뜻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웃사에게 진노하사 저에게 죽음의 형벌을 가하신 것(7)을 가리킨다. 공동 번역은 본절을 '야훼께서 우짜를 치신 일이'로 번역하고 있다.

 

 다윗이 분하여 - '분하여'에 해당되는 원어 '하라'는 단순히 괘씸한 마음을 품거나 섭섭한 감정을 지니는 것 정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의 기본 뜻은 '타오르다', '심히 뜨거워지다', '빨갛게 되다'로서 온 몸과 심장이 타버릴 듯한 극도의 분노를 가리킨다. 그러면 다윗은 무엇 때문에 아니면 무엇에 대하여 이처럼 분노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바 크게 두 견해로 나뉘어진다. (1)다윗은 웃사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화를 내었다는 견해이다(Lange, MatthewHenry, Pulpit Commentary). 즉 다윗이나 그의 백성들 그리고 웃사는 무슨 큰 불경죄(不敬罪)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기껏해야 경솔한 행동을 한 것 뿐인데 하나님께서 그처럼 준엄한 형벌을 가하시니(7) 이에 불만을 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견해는 지금껏 하나님을 대해온 다윗의 신실한 태도(2:1;5:12, 23)에 비추어 볼 때 수긍하기 어렵다. (2)다윗은 자신과 웃사의 불찰로 인하여 빚어진 비극에 대하여 스스로에게 화를 내었다는 견해이다(Keil & Delitzsch). 즉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모시는 계획이 자신과 웃사의 잘못으로 인하여 중단되게 되었음을 크게 분해 하였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견해는 그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였다는 구절(9)에 의거할 때 타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다윗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분을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 여기서 '베레스'로 번역된 '페레츠'는 두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곧 '갑작스런 공격', '뜻아니한 재난'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떠한 사항에 대한 '위반', '범법'이다. 따라서 '베레스웃사'(Perez-uzzah)란 말은 '웃사를 치심' 또는 '웃사의 위반'이란 뜻이다. 아마 다윗은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웃사가 율법을 어기고선 법궤를 만진 것(6)과 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신 일로 인하여(7) 그곳을 이렇게 명명(命名)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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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하6:9]

 다윗이...여호와를 두려워하여 - 아직 미처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이 자신들이 율법에 명한 방법대로 법궤를 운반치 아니한 데 있음을 깨닫지 못한 다윗(3, 4절 주석참조)은 우선 법궤로 인하여 또 다른 하나님의 재앙이 미치지나 않을까 두려워 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모시는 역사(役事)를 중단한 채 황급히 법궤를 변방으로 이송(移送)시켰을 것이다(10). 그러나 이는 분명 다윗의 또 하나의 경솔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법궤를 맡아 관리하던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11). 다윗은 하나님의 진노를 접하였을 때 무조건 두려워하기보다는 그 원인을 규명한 후 올바른 방법에 따라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왔어야 마땅했다(Matthew Hen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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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하6:10]

 가드 사람 오벧에돔 - 대상 26:1-4에 의하면, 오벧에돔(Obededom)은 고핫의 자손이며 후에 예루살렘 성문의 문지기로 활약한 사람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그를 가리켜 가드 사람(the Gittite)이라고 한 것은 그가 단 지파 지경 내에 있는 레위인의 성읍 가드림몬(Gathrimmon)에서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Keil, Clericus, Wycliffe,Pulpit Commen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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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하6:11]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 아마도 이 말은 그의 가족, 가축, 밭의 소산 등이 풍성해졌음을 의미할 것이다. 한편, 다윗은 이러한 현상을 보고서 이제 하나님의 진노(7)가 깨끗이 풀린 줄 깨달았음이 분명하다(Hertzberg, Matthew Hen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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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하6:12]

 다윗이 가서...올라갈새 - 같은 내용을 더욱 자세히 기록한 대상 15장에는 다윗 왕이 이번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순종하여 법궤를 운송했음을 보여 준다. , 그는 이번에는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레위인들로 하여금 몸을 성결케 하고 모세의 법대로 어깨에 메어 운반하도록 하였던 것이다(대상 15:14, 15). 여기서 우리는 다윗 왕이 베레스웃사 사건 이후에 하나님의 율법을 상고(詳考)한 후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율법 위에 굳게 선 것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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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하6: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 - 대상 15:11에 의하면 이들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레위인 우리엘, 아사야, 요엘, 스마야, 엘리엘, 암미나답 이렇게 8명이었음을 알 수있다.

 

 여섯 걸음을 행하매 - 혹자는 '여섯 걸음을 행할 때마다'로 해석하나(PulpitCommentary) 결코 지지할 수 없는 견해이다. 왜냐하면 이 견해를 따를 경우 다윗이 드린 제물의 총수는 엄청난 것이 될 것인데 대상 15:26에는 그 수가 모두 수송아지 일곱, 수양 일곱 마리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증거가 아니더라도 이 견해는 다윗이 약 5m 간격으로 제물을 잡아드렸다는 주장이 되므로 그 제물의 수로 볼때 너무나 상식 밖이다. 따라서 본절은 '여섯 걸음을 행한 후'를 의미함에 분명하다(Lange, Wevers, Keil, Hertzberg). 그런데 다윗이 여섯 걸음을 행한 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은 무슨 연유일까? 아마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즉 이번에는 출발부터 하나님이 레위인들과 함께 하심을 본 까닭이다(대상 15:16). 다시 말해서 다윗은 궤를 멘 레위인들이 처음 여섯 걸음을 아무 탈 없이 옮기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법궤 운반을 허락해 주신 줄 알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 것이다(TheInterpreter's Bible, Bottcher, Wycliffe).

 

 다윗이...제사를 드리고 - 혹자는 본절과 관련, 다윗이 직접 하나님께 대한 제사를 집전(執典)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Lange). 그러나 구약 시대 당시 하나님께 대한 공적 제사를 집전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제사장뿐이었다(1-6). 그러므로 이는 다윗이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제사를 드린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본절의 평행 구절에 '무리가...제사를 드렸더라'(대상 15:26)는 언급이 있는 것만 보더라도 분명하다. 더욱이 과거 사울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게 된 결정적 이유도 사무엘의 직분을 월권(越權)하여 스스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때문임을 기억한다면(삼상 13:8-14) 이는 보다 명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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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하6:14]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 다윗의 종교적 열정과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고 넘치는 감격적인 기쁨을 잘 드러내 주는 행동이다. 즉 그는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언약궤를 수도 예루살렘에 모시게 된 데 대하여 감격하며 온 몸과 마음으로 이를 기뻐한 것이다(Lange, Pulpit Commentary). 한편 국경일이나 종교 절기, 기타 경사스러운 일을 맞이하여 춤추며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5, 15)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몸에 배인 풍습 중 하나였다(15:20;11:34;149:3;150:4).

? 베 에봇을 입었더라 - 베 에봇(linen ephod)은 본래 제사장이 직무를 수행할 때 입던 것으로 엉덩이까지 내려오며 소매가 없는 일종의 겉옷이다. 28:4 주석 참조. 그러나 여기서 다윗이 입은 베 에봇은 제사장들이 입는 에봇이었다기 보다 제사장이 아니라도 특별한 종교 의식에 참여할 때 입었던 예복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그 이유는 두 가지 사실 때문인데 곧 다음과 같다. (1)당시 다윗 뿐아니라 법궤의 운반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세마포 겉옷이나 베 에봇을 입었기 때문이다(대상15:27). (2)제사장의 적령(適齡)에 이르지 못한 어린 사무엘도 세마포 에봇을 입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삼상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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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하6:15]

 즐거이 부르며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비트루아''환호성을 지르다', '갈채를 보내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춤을 추며 환호성을 지르는 행위는 특별히 새로운 왕을 환영할 때 보여 준 행위였다(왕상 1:34, 39;왕하 11:12, 14;삼상 10:24). 따라서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행동은 언약궤로 상징되는 하나님을 그들 신정 국가의 진정한 왕으로 모시는 기쁨을 표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나팔을 불고 - 대상 15:28에 의하면 이때 백성들은 비단 나팔(trumpet) 뿐아니라 이미 5절에 언급된 것과 같은 제금, 비파, 수금 등을 함께 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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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하6:16]

 사울의 딸 미갈이...저를 업신여기니라 - 혹자는 미갈이 다윗을 업신여긴 까닭에 대해 그녀가 아직도 전 남편인 발디엘(3:15, 16)을 사모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The Interpreter's Bible). 그러나 이는 지나친 억측이다. 왜냐하면 본절은 미갈이 다윗을 업신여기게 된 동기를 그녀가 다윗의 철부지 같은 행동을 본 탓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미갈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다윗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업신여기게 된 까닭은 아마 여호와의 궤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사울 왕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대상 13:3). 미갈을 다윗의 아내로 소개하지 않고 '사울의 딸'로 소개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II, pp. 336 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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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하6:17]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 여기에서 장막은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까지(7:1-17;왕상 6) 임시로 하나님의 궤를 모셔놓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는 모세 당시 만든 성막(40)과는 다르다. 다윗 당시 이 성막은 기브온(Gibeon)에 설치되어 있었다(대상 16:39;21:29). 그러나 솔로몬 때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된 후에는 이 성막과 다윗이 만든 임시 장막은 모두 해체되고 만다(대하 5:2-10). 18:1-7 강해, '성막의 역사' 참조. 한편, 여기서 '장막 가운데'란 장막의 중앙을 의미하는데 이는 일종의 지성소(至聖所)와 같은 곳이었다(Keil).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드리니라 - 이 역시 다윗이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제사를 드린 것을 의미한다. 13절 주석 참조. 아무튼 이처럼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것은 법궤를 모실 장소를 성별하기 위한 일종의 봉헌식(奉獻式)이었다(Keil, Lange). 한편 여기에서 번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의미를 가지며(1:3-17), 화목제는 그동안 소원(疎遠)했던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관계가 하나되게 해달라는 간구의 의미를 지닌다(3:1-17). 레위기 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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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6:19]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떡 한 덩이씩 - 여기에 언급된 음식물들은 모두 제사용 음식이다(29:23;8:26;2:5;3:1). 그런데 이처럼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고 난 후 함께 그 제사 음식을 먹는 것은 화목 제물과 관련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화목 제물을 드린 후에는 제사 참여자들로 하여금 그 제물을 함께 나누어 먹도록 규정하신 것이다(7:15-18). 한편 백성들이 이처럼 제사드린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은 그들이 이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연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Wenham). 이는 곧 이제 이스라엘 온 백성이 정치적으로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진정으로 하나된 통일 왕국을 이루게 되었다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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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6:20]

 방탕한 자가...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 여기서 '방탕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크''공허한', '가치없는' 또는 '가난한'이란 의미이다(7:16; 5:13;29:8). 바로 이 단어에서 파생된 말이 곧 신약의 '라가'(, '어리석은 자'란 뜻)이다(5:22). 또한 '그 신복의 계집종'이란 '그 종들의 종년'이란 말로서 가장 천한 자들이란 뜻이다. 이렇게 볼 때, 미갈의 말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왕인 다윗이 마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자처럼 가장 낮고 비천한 자들 앞에서 품위를 잃은 행동을 했다는 내용의 불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는 그녀가 하나님의 언약궤와 관련된 다윗의 순전(純全)한 기쁨을 이해치 못한 데서 나온 불평에 다름아니다. 16절 주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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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하6:21]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 이 말은 다윗의 어린아이와 같은 행동(14, 16)이 미갈의 말처럼 비천하고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라 지극히 순전한 신앙에서 우러나온 순수한 행동임을 천명한 것이다. , 그는 (1)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으로 모실 수 있었던 것을 기뻐하는 동시에 (2)하나님께서 자기를 택하여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주신 일(5:1-3)을 기억하며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이러한행동은 여호와 앞에서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는 지극히 겸손한 행위였다고 할수 있다(131:1;23:12).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 하나님께 범죄한 사울을 내치고 대신 다윗을 택하신 결과(삼상 13:8-14;15) 사울 가문은 몰락하고 대신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음은 지금껏 우리가 충분히 살펴본 바이다(1-5).

 

 주권자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기드'는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택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5:2; 7:8; 삼상7:16; 10:1; 13:14;25:30). 그러므로 다윗 자신을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라고 표현한 것은 곧 자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할 자로 이스라엘의 왕위에 봉직(奉職)되었다는 철저한 소명 의식을 드러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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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하6:22]

 내가...천하게 보일지라도...높임을 받으리라 - 다윗의 행위가 미갈의 말처럼 저질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낮아진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존귀를 얻게 될 것이라는 확신에 찬 대답이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 앞에서 겸손한 자만이 참으로 높아질 수 있다는 그의 확고한 신앙을 엿볼 수 있다(삼상 2:7;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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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하6:23]

 그러므로...미갈이...자식이 없으니라 - 혹자는 미갈이 이처럼 무자(無子)한 까닭에 대하여 다윗이 그녀와 동침하기를 싫어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Dake, Wycliffe).이는 미갈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였음이 분명하다(Pulpit Commentary, Keil &Delitzsch, Matthew Henry). , 그녀는 (1)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였고, (2)하나님의 가견적(可見的) 보좌인 법궤에 대하여 무지하였으며 (3)자기의 입술을 가볍게 놀린 결과로 자식이 없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만한 자, 영적으로 무지한 자, 그리고 자기의 감정에 따라 말하는 자는 반드시 실패하고 만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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