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잠언

잠언3장,지혜의 복

호리홀리 2015. 4. 6. 09:46

3장

이때까지는 지혜의 부름과 부름에 대한 응답 방식을 언급했다. 적극적으로 지혜도 추구하는 자세여야 한다. 3장에 보면 1절에서 지혜는 한 번 얻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지혜와 더불어 사는 삶, 지혜를 따라 지속적으로 살 것을 말한다. 이와같은 지혜와 더불어 지속적으로 따라 사는 사람에게 지혜가 가져다 주는 결과로 ①장수할 것이다. ②생명의 해와 날이 길 것이요, ③평강을 더할 것이다. 여기서 생명의 날과 연한이 길 것이다라고 하나 문제는 하나님 시각에서 생명과 평강이라는 것이 어떤 시각인가? 하는 것이다.앞에서 땅이라는 것이 육적 차원의 영역이 아님을 생각할 때, 이스라엘 나라가 이루어지는 영역이라 할 때, 생명과 평강이라는 말은 특수한 의미를 가진다.

2절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날이 길다’는 오래 계속된다는 지속성을 뜻한다. 지속성이라 하면 무엇을 전제하는가?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음을 전제한다. 구약에서 여러 번 나타나는데 이것은 단순한 육적 생명의 장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복된 삶의 영역에서 흔들린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 땅에서 너의 유업이 견고하리라.

3절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二思一意; 인자와 진리. 여기서는 진실한 사랑, 진실이 구약에서는 사실과의 부합이라는 뜻과도 같지만 근본 뜻은 견고하다, 흔들리지 않다, 신뢰할만 하다, 믿을만 하다이다. 그래서 신실한 사랑, 변함없는 사랑이다. 이것은 매우 묘하게도 2:12절 이하의 내용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12절 이하에서는 바른 길에서 떠나 악을 행하는 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악을 행한다는 것은 이웃과 관계에서 억울케, 착취하는 것이다. 이에 대응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에게 언제나 친절하고, 언제나 도울 태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두번째 이방 여인, 신실치 못함과 관계되어 진다. 여기서 (헤세드; 사랑)와 (에메트; 진리)가 앞에 있는 두 가지 관계와 관련되어 있다면 재미있다. 앞에서는 지혜의 부정적인 면, 여기서는 지혜의 긍정, 적극적인 면이다. 여기서 신실한 사랑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만은 아니고 하나님과 신실한 사랑이다. 어떤 다른 인격과의 관계에서 가장 지혜로운 관계는 신실한 사랑이다.

“목에 매며”는 가장 잃어버리지 않으려 할 때 몸에서 떼어 놓지 않는다. 항상 소중히 여겨 내게서 떼어 놓지 않는다.

“네 마음 판에 새기라”는 그리하면 4절이 된다.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 여기서는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자세로서 포괄적인 자세임을 알 수 있다.

5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하나님을 향한 헤세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자세가 무엇인가? 말씀 → 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대개 요한일서,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은 그의 지혜를 순종, 그의 계명 순종을 떠올린다. 그것은 그 중요한 전 단계를 생략한 표현임을 명심치 않으면 오해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 사랑하는 것 아니다. 하나님 사랑 말고도 게명 지킬 수 있다. 지키는 척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지키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사랑 = 계명 순종을 완전히 동일시 하면 오해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계명의 순종이 되어지나 그러나 하나님 사랑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 신뢰하는 것이다. 신약적 표현으로 그를 믿는 것이다.

6절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5절), “네 모든 길에서 그를 의지하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7절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 “지혜”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네 모든 삶에서 네가 행하는 모든 행위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네 삶의 주관자가, 주인이 되시게 하라이다. 네 삶에서 주인되심, 삶의 목적과 방식 모든 것에 있어서(아도나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왜 지혜로운 것인가?

나중에 가서 결론 부분에 나올 것이지만 세계의 통치자가 하나님이시므로 이 삶의 틀에서 가장 지혜로운 길은 세계 통치자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길이며, 안전한 길이다. 그분께 우리 삶 맡기는 것이 당연하다. 네 스스로 지혜로운 것 처럼 하지 말라!

내가 나 자신을 볼 때 내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 또 이 일을 내가 할 수 있으며,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자세인가? 자신의 삶을 자기가 주인으로 여기며, 자율적 인간이며, 자신이 자기 삶을 주관한다. 내 스스로 내 지혜, 힘으로, 내가 옳고 귀중하다는 대로 내 삶을 꾸려나가겠다는 것이다. 일반 세속 철학, 학문이 겉으로 고상해 보여도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배역하며 마귀에게 속하여 사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세상 교육의 목표가 자기성취, 자기완성이며 이같은 교육을 인간 삶의 최고 목적으로 둔다. 그러므로 겉으로 아무리 고상해 보여도 본질에 있어서는 마귀적이다. 성경을 볼 때는 괜찮으나 나아가서는 다 넘어간다. 학식있는 자 앞에서 그것 괜찮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이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 아닌가?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해서 그가 인도하시는 대로 가라고 하는가? 아니면 믿으면 이렇게 되고, 인격이나 모든 면에서 가장 아름답게 되며, 효과적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교회에서도 이렇게 하기 쉽다. 말은 쉽다.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다 잃으면 유익이 되나 이것 따라 사는 것이 어렵다.

9절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9절 전에서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하나님으로 네 주인이 되게 하라”하고 9절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공경하라” = 귀하게 여기다. 네가 얻은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 보다 하나님을 귀하게 소중히 여겨라. 하나님을 네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로 삼으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한 것보다 10절에 관심이 있다.

10절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이것이 돈이 많이 들어온다는 뜻인가? 풍요로움을 말하는 것인데 돈이 많이 들어온다는 뜻이라기 보다 영적 축복이다.

11절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또 다른 하나님에 대한 바른 자세가 나타난다. 징계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표현하시는 형태의 하나이다. 아버지의 사랑 가지고 우리를 직접 교정하신다. 자신의 신뢰를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 공경해야 한다. 그의 징계하심 즉, 아버지의 사랑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요,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자세이다.

13절 이하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러한 지혜를 발견한 자가 왜 복된가?

14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은보다 귀하고 금보다 귀하다” 직역하면 ‘지혜가 장사해서, 무역해서 얻은 것, 지혜가 초대하여 얻은 결과이다’ 지혜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결과, 지혜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14-15절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이 지혜가 가장 소중한 것이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사는 것이 금, 은, 산호, 그 어떤 것보다 귀하다. 그러므로 이 지혜가, 진리가 참으로 복되다.

16절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부귀, 영화 가진다 하니” 지혜에는 관심없고, 교회에 잘 나가고, 목사님 시킨대로 잘하고, 헌금 잘하면 이것은 저절로 굴러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여기 보면 장수 = (오렉), 부는 항상 돈을 생각하나 부귀는 풍요로움, 결핍없는 상태이다. 영화 = (카보드), 전적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부요함, 존귀의 길이다. 그 길은 사랑스러운 길이요, 여호와 보시기에 사랑, 평강의 길이다. 흔히 말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평강은 가정 화목, 사랑은 남편에게 사랑받는 이런 수준 못벗어나면 안된다. 더 나아가서 그것이 지혜이다.

18절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생명나무 붙잡는 자, 생명나무는 생명과가 열리는 나무이며, 생명과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이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이 지혜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소유하는 자는 복되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얻었으니 얼마나 복된가?

19절 이하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을 세우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고 그 지식으로 해양이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것, 바다를 만드신 것, 비, 이슬, 삶의 공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에 의한 것이다.

21절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로 네 눈 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 “내 아들아 분별하여 지키라”

22절 “그리하면 그것이 네 영혼의 생명이 되며 네 목에 장식이 되리니” “네 영혼을 살리고 진정한 아름다움이 될 것이며”

23-26절 이미 앞서 언급했으나 19절 이하에서 지혜는 우리 영혼을 살리는 것, 평안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와 형제되셨다.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 되셨다. 형제 = 동일한 본질을 교리로 이야기하는 것, 그러나 구제시 믿는 자에게만 구제하는 것 아니다. 다른 무엇이 있다. 그 이유는 그 동일한 지혜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 다스리신다. 지혜로 다스리신다. 그 지혜가 하나님으로 살리고 아름답게 한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체가 지혜로운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것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그 내용을 말씀하신다.

27절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이유를 향한 헤세드, 앞에서는 지혜로 사는 길이 무엇인가? 삶의 자세에서 인자와 진실을 말했다. 먼저 하나님에 대하여 이 자세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본절에서 “인자와 성실”의 자세는 무엇인가? 선은 주인으로부터 거절되어서는 안된다. 선의 주인은 내가 베푸는 선을 꼭 필요로 하는 자, 도움 필요로 하는 자에게 도움 거절해서는 안된다. 특히 네가 도울 힘이 있을 때 거절하지 말라.

28절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갔다 다시 돌아오라 내가 내일 주리라” 하는 태도도 안된다.

29절 “네 이웃이 네 곁에서 안연히 살거든 그를 모해(謀害)하지 말며” “이웃에게 악을 행치 말라 그가 너와 더불어 평안히 거하게 하라” 이는 더불어 사는 삶의 원칙이다. 그와 더불어 평안히 거하게 하라. 이웃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자세이다.

30절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나하였거든 까닭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 시비, 논쟁하지 말라. 이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시비, 논쟁하는 것이 가하나 시비, 논쟁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나에게 손해 있으므로 시비, 논쟁에 가담치 않겠다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다. 누가 나를 귀찮게 하지 않는 한 나 몰라라 해서는 안된다.

31절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 아무 행위든지 좇지 말라” 편벽된 자는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자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와 친밀하시기 때문이다.

32절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느니라” ודוס(수두);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나타낸다. 이것은 하나님과 늘 영적 깊은 교통 가운데 사는 사람의 모습이 이러하다.

33절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 “의인의 밭(집)에는 복이 있다”

34-35절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현달(顯達)함은 욕이 되느니라” 여기 보면 이웃에게 어떠한 자세 가질 것인가? 도울 수 있으면 도우라. 인색한 마음으로 차일피일하지 말라. 까닭없이 다투지 말라. 악한 사람 부러워 하지 말라. 이것은 참 지키기 어렵다. 어느 한 파당이 있어서 나쁜 짓으로 중요한 자리 차지할 경우에 나는 가만히 있으면 나는 다 빼앗긴다. 그러므로 나도 이렇게 하자!라고 하면 악인이 그런식으로 잘되는 것을 부러워하는 마음이다. 이런데 넘어가서 망치는 자 처럼 어리석은 자 없다. 선하게 있다가 남 하는 것보다 함께 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교회에 속한 자가 망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자기와 타인에게 해를 끼쳐서 망할 것이다. 무엇이 부러운 것인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행악자가 잘되는 것 보고 행악을 행하고 내가 분을 내고 하면 망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웃을 향한 바른 삶의 자세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는가? 하는 해답은 바로 하나님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망하게 된다. 이웃을 향한 성실한 삶이 결국 하나님과 관계된 말로 결론지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이웃과의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로 관련지어지고 만다. 이웃과 잘못, 죄, 악에 대해 사람이 책임을 묻지 않는다. 하나님이 책임을 물으신다. 이웃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종속된 무엇이요, 거기에 포함된다. 지혜가 이처럼 윤리적 성격인 사랑을 강하게 띠고 있다는 것은, 지혜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흔히 지혜라 할 때 약삭빠른 것이나 지식을 생각하는데 지혜라는 것은 약삭 빠르게 굴어 무엇인가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 바로 지혜이다. 우리도 잘하다가도 자긍하면 옛날의 부리던 솜씨로 돌아간다. 망하는 길이다.

복습

1-8장까지 한 단락을 이룬다. 1장 서론 지난 후 지혜의 부름이 나타나고 8장까지 이어진다. 1:20절부터 지혜의 부름, 초청이 나오고 이후는 지혜의 응답 자세를 말한다. 3장에서는 지혜를 계속 기억할 것을 권고하고, 지혜를 따라 지속적으로 살 것을 말한다. 13절 이하부터는 지혜 획득자의 복됨을 말한다. 3장에서 어떤 인격적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든, 이웃이든 간에 지혜로운 삶의 모습을 “사랑과 신실함”으로 말한다.

어떤 대상에 지혜로운 태도는 “사랑과 신실함”이다. 이 둘은 따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과 신실함”은 이사일의(二思一意)이다. 이것이 하나님,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지혜로운 삶의 원칙이다. 다같이 하나님, 이웃에 대해 사랑과 신실함이다. 3:5의 신실한 사랑의 자세가 무엇이냐 하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네 생활을 의지하지 말고”라는 말을 통해 전자의 말을 강조하는 것이다. 믿음의 구체적 자세를 6절에 보면 “모든 일을 행함에 그(하나님)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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