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중간사 시대

2. 헬레니즘 시대

호리홀리 2015. 3. 31. 12:20

2. 헬레니즘 시대

 

2.1. 헬레니즘의 전파자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동맹으로 묶은 사람은 마케도니아의 필립(Philip)이었다. 이것은 페르시아에게는 치명타였다. BC 336년에 필립이 모살당한 후 아들 알렉산더가 즉위했다. 그의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였고 그리스 문화를 수용했다. 페르시아의 다리오 3세 때 알렉산더는 원정 중이었는데 Granicus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무찔렀다. 그 후 별다른 저항 없이 소아시아와 페니키아를 점령했고, 다리오 3세의 협상을 거절했다.

애굽인들은 페르시아를 침입자로 여겼기에 알렉산더를 해방자로 환영했다. 알렉산드리아는 마케도니아인들의 애굽 정복을 기념하기 위해 새운 도시다. 이 무렵 유대인들이 이 도시에 많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는 군사 정책이외의 모든 부분은 애굽인의 자치를 허용했다.

BC 331년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본토에서 대 접전을 준비했다. 바벨론과 수사 등 페르시아의 대부분의 도시를 점령했다. BC 330년에 다리오 3세는 죽고 알렉산더는 대왕(Basileus)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 후 동진 정책을 통해 러시아와 인도의 푼잡 지역까지 경계선을 확장했다.

323년에 알렉산더는 33세의 일기로 열병으로 사망했다. 사망 전에 여러 가지 문제로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그가 가는 곳에는 헬레니즘이 전파되었는데, 이것은 헬레니즘을 다른 모든 문화보다 더 우수하다고 여긴 알렉산더의 영향 때문이었다.

 

2.2. 알렉산더 사후의 분열 및 톨레미 왕조 치하의 유대인

알렉사더가 죽은 후 권력 다툼이 발생했고, 알렉산더의 형 필립 아르히다이오스를 황제로 세웠다. 그러나 이 결정은 오래가지 못했고 페르딕카스가 제국을 대표하게 되었다. 하지만 알렉산더의 부하들은 제국을 분할-점령해 갔다. BC 315년에 이르러서야 알렉산더의 후계자로 4명의 걸출한 장군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안티고누스(Antigonus)는 지중해에서 중앙 아시아까지, 카산더(Cassander)는 마케도니아를, 톨레미 라기(Ptolemy Lagi)는 이집트와 남부 시리아를,마지막으로 리시마쿠스(Lysimachus)는 트라키아를 지배했다. 이 중에서 안티고누스가 가장 강력했기에 나머지 3장군들은 동맹을 맺기도 했다.

그 후 톨레미는 팔레스틴을 통치했는데 이 때 의인 시몬(Simon the Just)은 톨레미 1세가 파괴한 예루살렘 성곽을 재건했다. 시몬은 유대인의 지도자요 대제사장이요 교사들의 수장이었으며 예루살렘에 저수지도 만들었다.

그 후 안티고누스는 톨레미를 시리아에서 쫓아내고 시리아를 장악했다. BC 311년에 셀류커스는 바벨론을 정복하고 셀류커스 왕조를 세웠다(나중에 안디옥이 수도가 됨). BC 301년 리시마쿠스, 셀류커스, 그리고 카산더는 연합하여 안티고누스를 대항한 결과 그를 프리기아의 입수스(Ipsus)에서 죽였다.

이 전쟁에 톨레미가 가담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틴 지역을 정복해버렸다. 셀류커스는 BC 281년에 살해되고 안티오커스 1세가 왕위를 이어 받았다. 그 후 3왕이 알렉산더 대제의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집트의 톨레미 왕조, 시리아의 셀류키드 왕조,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누스 가문).

BC 252년 안티오커스 2세는 톨레미의 딸 베레니케(Berenice)와 혼인하여 이 두 왕조간에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안티오커스 2세의 다른 아내였던 라오디케(Laodice)는 베레니케와 그녀의 자녀들을 죽여 버렸는데, 이 사건을 기점으로 셀류키드와 톨레미 3세 사이에 라오디게아 전쟁(Laodicean War)이 발발하여 톨레미 가문의 승리로 끝났다.

 

2.3. 셀류키드 왕조 치하의 유대인

BC 223년에 18세로 등극한 안티오커스 3세의 팔레스틴 정복 역사 중에서 BC 198년에 있었던 예루살렘입성은 주목할 만하다. 셀류키드 왕조의 팔레스틴 통치 시기는 이집트인의 팔레스틴 통치 보다 더 헬레니즘을 수용하도록 압력을 가했던 시기였다. 이 무렵 로마의 힘은 강성해 갔다.

아테네 출신인 안티오커스 4세는 에피파네스 (신현)으로 불렸는데, 유대인들은 그를 ‘에피마네스’(Epimanes, 미친 놈)로 불렀다. 이 때 예루살렘에는 의인 시몬의 자손인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가 다스리고 있었다. 친 헬라화 정책을 추진한 유대인에 의해 그리고 에피파네스의 재가에 의해 야손(Jason)이 대제사장으로 추대되었다. 야손은 짐나지움을 세웠고, 유대 이름대신 헬라이름을 선호했다. 하지만 정통 유대인들인 하시딤(Hasidim, 경건한 자들)은 反헬라화 투쟁을 전개했다. 메네라우스(Menelaus)는 베냐민지파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뇌물을 바쳐 대제사장이 되었다.

에피파네스는 쥬피터 신상을 성전에 세웠는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멸망의 가증한 물건(the abomination of desolation)으로 여겼다. 돼지가 성전 제단에 드려졌고, 바카스(Bacchus)를 위해 酒神祭가 드려졌다. 유대인의 절기를 지키면 사형에 처하라는 법령이 선포되었다. 히브리 성경 사본을 파기하라는 명령도 떨어졌다. 이것에 대해 저항했던 자들은 무참히 죽어갔다. 참고로 BC 168년에 피드나(Pydna)전투에서 로마군은 마케도니아 군을 무찔렀다.

 

2.4. 유대인에게 미친 헬레니즘의 영향

알렉산더 대제는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헬라의 사상과 문화를 전수 받았고 정복지 마다 헬라도시를 세웠다. 연극장, 짐나지움, 도서관, 헬라교육-철학, 헬라화된 축제 등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포로 이전에는 가나안의 종교가 위협이었다면, 포로 후기에는 헬레니즘이 유대인들의 최대의 적이 되었다.

디아스포라에 미친 헬레니즘- 바벨론, 안디옥, 다마스커스, 에베소, 버가모, 사데, 티그리스-유프라데스 강 계곡 등에는 큰 디아스포라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들 중 20세 이상 남자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성전세를 보내었고 절기에는 순례길을 떠났다. 하지만 헬라문화와 유대문화의 종합은 여러 지역에서 불가피해 보였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LXX이 번역되었는데, 아마 톨레미왕조의 첫 번째 왕인 ‘필라델푸스’ (BC 285-246) 치하에서 시작되었다.

번역의 동기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이 자녀들의 신앙 교육을 위해서 헬라어 성경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주후 3세기 오리겐 때에 ‘Septuagint’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전설에 의하면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선발된 72명의 장로들이 별실에서 72일 동안 번역하여 제출한 것으로 거의 일치한 번역본이라고 한다. 이런 전설은 LXX에 영감성을 부여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이다.

성경해석과 관련해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BC 160년경의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와 BC 20에서 AD 50년경에 살았던 필로(Philo)는 헬라의 풍유적 해석을 도입했다. 반면에 알렉산드리아의 영향에서 제외된 안디옥에서는 문자적 해석이 유행했다. 디아스포라처럼 팔레스틴에서도 헬레니즘이 유행했지만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2.5. 마카비 왕조와 反헬레니즘

모딘 (Modin)이라는 마을 출신의 늙은 제사장인 마타디아스의 출현은 중요하다. 그는 이방신 숭배를 거절했으며 배교한 유대인과 에피파네스의 사절을 죽여버렸다. 그는 5명의 아들과 함께 도망갔다. 그 후 다른 사람들이 가담하여 게릴라전 형식으로 헬레니즘에 대항했다. 그의 사후 셋째 아들인 유다 마카비가 지도자가 되었다.

그 후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성전을 정결케 하고 하누카(Hanukkah, 빛의 절기)를 12월 25일부터 8일간 지켰다. 그 후 시리아 군대와의 전투에서 유다 마카비는 전사했다. 이제 유다의 형제들인 시몬, 요나단, 요하난이 지도자로 역할을 했다. 시몬이 이스라엘의 지도자 회의에서 지도자 및 대제사장으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하스몬 왕조가 합법적으로 출법했다. 하스몬(혹은 아스모니우스)은 마카비 가문의 조상의 이름이다. 그러나 BC 134년 시몬과 그의 두 아들은 야심 많은 사위에게 살해당하고 셋째 아들 요한 하르카누스가 왕이 되었다. BC 142-BC 63년까지 하스모니안 왕가는 시리아로부터 독립했다.

 

2.6. 하스몬 왕조의 성장과 쇠망

히르카누스가 시리아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정치적인 협상에 기인한다. 시리아는 히르카누스가 시리아의 군사 행동에 지원할 것을 약속받고 왕위를 보장해주었다. 이렇게 되자 헬라주의자들과 하시딤 사이의 분쟁은 종식되었다. 헬라주의자들의 이상은 사두개인들을 통해서 발전되었고 하시딤의 정신은 바리새인들에게 전승되었다.

히르카누스는 정복 정책을 펼쳤는데 부자와 귀족의 지원을 받았다. 이유는 새로운 상업의 기회를 정복정책이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는 독실한 하시딤의 일원이었지만 헬라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BC 104년에 사망했다.

히르카누스의 장자 아리스토불루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폭군이었던 그는 음주, 질병, 반란에 대한 공포로 통치 1년 만에 사망했다. 따라서 그의 형제인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계승했다. 영토확장 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솔로몬 시대의 영토를 회복했다. 이때 하스몬 왕가와 바리새파의 갈등은 절정에 달했다. 외국 보병을 동원해서 바리새파를 복종시키고 말았다.

바리새인들은 시리아 왕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나중에 얀네우스에 의해 많은 바리새파들이 살해당했다. 이런 대립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대립을 자연스럽게 초래했다. 학자들은 얀네우스를 의의 교사(the Teacher of Righteousness)를 핍박한 사악한 제사장(the Wicked Priest)으로 여겼다.

아리스토불루스와 얀네우스와 번갈아 가며 결혼했던(미망인)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왕권을 잡았다. 그녀의 사후 히르카누스 2세가 통치했다. 그는 동생 아리스토불루스 2세에게 통치권을 넘겨주었다. 그 후 이두메 출신의 안티파터가 정권을 잡았다. 이런 형제간의 혼란을 중재하기 위해 로마의 폼페이가 개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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