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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교회론

호리홀리 2025. 1. 6.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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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제자훈련이 거의 끝나 갈 무렵 제자들을 데리고 졸업여행을 떠나셨다. 가나안 최북단 헐몬산 기슭에 있는 가이샤라 빌립보였다. 거기는 우상숭배의 본산이었다. 신비스러운 곳, 생명의 근원인 갈릴리 호수의 근원,중동을 통틀어 가장 큰 담수호는 갈릴리 호수였다.

동굴속에서 물이 흘러 강을 이루고 그 강물이 갈릴리로 흘러들어가는 곳.역사적이고 신비로운 곳에 도달하려면  입구에서 30분이상 풀숲을 지나 강을 끼고 언덕을 한참 올라가면 각종 우상들이 즐비하고 큰 반석이 나타난다. 반석 좌우로 각종 우상인 판신의 부조들이 널려있고 아래에서는 각종 우상숭배가 성횡하는 곳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오신 예수님.

 

필자 역시 놀라움으로 하루 종일 이 장소에 머물며 예수님의 관점에서 성경과 장소를 매칭하여보았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위대한 베드로의 고백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하신 예수님,베드로의 이름(대문자 페트라)이 반석이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반석은 예수님을 가르키는 typologe 였다.

18절의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할때 이 반석은 베드로가 아니라 소문자 페트라(반석 rock)이며 광야에서 반석을 치라는 말과 같은 typologe인 것이다.결코 나약한 인간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이 아닌 것이다.

내교회를 세우리라 할때도 정관사가 붙은 에클레시아 즉 그 교회 =나의 교회로 말씀하신 것이다.

 결국 캐토릭의 베드로 1대 교황은 시작부터가 잘못된 단추를 끼운 것이다. 뒤이어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하신 이유도 알게된다. 교회는 사람이 세우는 것도 아니고 사람위에 세우는 것도 아니다. 다시 16:16절 을 보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를 네게 알게한 이는 하늘의 아버지시라 하시면서 교회를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교회의 주인도 하나님이신 것을 가르치셨다. 이렇게 제자훈련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난, 십자가, 죽음에 대한 예언을 하시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본 강의에서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의 중요성, 교회의 조직, 교회의 사명, 교회의 직무, 교회의 임직원, 교회의 봉사, 교회의 성례등을 살펴볼려고 한다

 


I 교회
   ἐκκλησία, (ekklesia) 라고 하는 헬라어는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 이란 의미입니다.  구약에서도 קָהָל (Kahal)이라는말은 “부른다”. 교회란 건물을 말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훌륭한 건물이 있다 해도 그 안에 예배하는 성도가 없다면 교회가 아닙니다. 반면에 건물이 없고 땅속이나 야외에서 모인다 해도 성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교회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 라는 의미입니다.  행 11장에 보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예수 믿는 성도들을 “ Christian ” 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קָהָל kahal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배를 위해서 모이는 것을 말했습니다. 신약에서의  ἐκκλησία (ekklesia) 라는 말은 세상에서 특별히 빼내어 불러냄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마치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냄을 받은 것처럼 세상에서 세상사람으로 살고 있던 우리를 하나님이 불러내어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모인 특정한 장소를 말하기도 합니다.  συναγωγή ,시나고게(회당)(행 5:11, 행 11:26, 고전 11:18, 고전 14:19, 28, 35.)   교회는 어떤 개인의 집에서 모인 성도의 무리들을 가르킨다. 신약에서는 자기 집을 교회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롬 16:5, 23, 고전 16:19, 골 4:15, 빌레몬서 2절.  교회는 이 땅이나 하늘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신비스럽게 연합되어 있는  모든 믿는 성도들을 통틀어서 교회라고 합니다.  엡 1:22, 엡 3:10, 21, 엡 5:23-25, 골 1:18, 24   


    “주의 몸”  고전12:27,엡 1:23, 골 1:18.
    “성령의 전”  고전 3:16, 벧전 2:5,
   “위에 있는 예루살렘”    갈 4:26,
    “거룩한 곳”   12:22,
    “새 예루살렘”  21:2
    “진리의 기둥과 터‘  딤전 3:15


 


II; 교회의 본질
   
   개신교와 천주교의 입장이 다릅니다.  천주교는 교회를 외적인 유형 기관이라고 주장하는데  천주교에서는 외적인 유형교회가 모든 믿는 자를 포함한 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치는 교회” 와 “배우는 교회” 등 둘로 나누어서 가르치는 교회란 교황을 위시하여 추기경. 대 주교, 신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교황은 사도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하여 오늘까지  교황권이 계승되어 온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배우는 교회란  일반 성도들을 말하며 이들은 “가르치는 교회” 즉 교회 지도층에 복종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Augustine으로 부터 Thomas Aquinas의 자연신학을 통해서 천주교의 교리가 나오게 되었고, John Wycliffe Jan Hus  Martin Luther John Calvin을 통해서 종교개혁이 시작 되었습니다. 

 


 1. 교회의 성격
      가. 전투적교회와 승리적 교회
지상 교회를 "Church Militant" 즉, “전투적인 교회” 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성도는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가는 십자가의 군병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원수인 Satan 과 싸워야 하고, 내 마음속에 있는 죄와 싸우면서 천성을 향해서 날마다 돌진하는 것이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교회를 전투적인 교회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늘 나라에 올라가서 주님과 온전히 사귈 때의 교회인 "Church Triumph" 즉 승리적 교회와는 다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싸움은 모두 끝나 이제 싸울 일이 없습니다.  전투적인 교회의 개념이 요즘은 점점 사라져 가고 무기를 던지고 방심하는 생활로 변해 버린 것이 사실입니다.

 

    나. 유형교회와 무형교회:
   무형교회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교회는 본질상 신령한 영적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누가 구원 얻은 성도이고 누가 아니지 우리의 육안으로는 구별이 되지 않기 때문에  구원 얻은 성도들을 통틀어 무형교회 라고 부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 요리문답 제61문에,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오면 모두 구원을 얻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오면 모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무형교회에 속한 사람만 구원을 얻는다” 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무형교회란 거듭난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무형교회는 교회의 성례식 때나  말씀선포 시에 신앙고백을 하고 또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하는 공동체로서 남에게 보일 수 있는 것이므로 유형교회의 면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형교회와 유형교회가 항상 평행 하는 것은 아니고 어떤 때는 무형교회에 속한 사람이 유형교회에 들어 있지 않을 수도 있게 됩니다. 이 말은 오늘의 교회가 진실한 성경적 성도를 수용하기를 기피한다는 말이며, 또한 신실한  성도가 출석할만한 참된 교회가 없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많지만 참으로 성경적인 교회는 귀합니다.  교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기보다는 청중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려는데 더욱 신경을 쓰다 보니 참 교회의 모습은 사라지고 참 성도는 갈 길을 못 찾아 헤메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특히 요즘에 바로 믿는 사람, 즉 무형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점점 유형교회에서 소외되는 일들이 많아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늘어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2. 교회의 속성
      교회의 속성은 무형교회에 해당하는 말인데 천주교에서는 반대로 전적으로 유형교회의 속성을 말합니다.  내면보다는 외면을 더 중요시하는 천주교의 신학에 기인합니다.


1). 교회의 통일성:
      천주교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천주교를 통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Ecumenical 운동에 앞장섭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말씀 안에서 교제하고 예배를 드리는 유형교회에서의 하나됨을 강조합니다. 천주교는 다양하게 많은 교파들과 공조하면서 선교를 펄쳐 나갑니다. 가령 1993년에 만들어 진 이른바 ECT, 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 라는 단체가 그런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원래 천주교의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 진 이 선교 기관에는 개신교 목사들이 많이 가입되어 교리를 초월하여 선교사업에  천주교와 공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의 칭의의 개념과 개신교의 개념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서로 다른데 어떻게 이런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무시하면서 선교에 공조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심각합니다. wcc 


 


     2). 교회의 거룩:
         천주교는 교회라는 기구를 통해서 겉으로 거룩해 지는 것을 강조하여 각종 예배의식이나 도덕적 관념에서 외면에  신성을 강조하는 반면, 개신교는 교회라는 기구보다는 개인 성도들의 마음의 거룩함을 강조합니다. 개신교는 성결한 생활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목적을 갖고 마음의 생각을 거룩하게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3). 교회의 보편성
         천주교는 사도시대로부터 계승되어 왔다는 사실과 또 교회가 세계에 가장 많이 분산되어 있다는 것을 가장 강조합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그런 건물보다 내적인 보이지 않는 무형교회에 속한 성도가 전 세계에 흩어져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는 외적인 면에 신경을 쓰고 개신교는 내적인 면을 강조하는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다른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III. 교회의 세 가지 특징:
    

     1. 말씀선포:
       참 교회는 말씀의 선포가 있어야 하는데 말씀의 선포가 없는 교회 이를테면 Quaker교파 같은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닙니다.  말씀선포가 있다 해도 성경적인 말씀이 아니면 또한 참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요 8:31-32, 47, 요 14;23  요일 4:1-3 요이 9.  지상의 교회가 완전할 수는 없다 해도 기독교의 근본적인 핵심 교리는 바로 전해져야 하며, 성경을 가장 바로 가르치는 교회가 참다운 교회인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고, 이런 교회가 가장 좋은 교회이라고 할 것입니다.


 


     2. 성례 집행: 
       말씀이 선포되어도 성례가 없으면 참 교회가 아닙니다.  성례는 2가지, 세례와 성찬입니다. 이 두 가지 성례는 모두 말씀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성례 식은 반드시 말씀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례는 반드시 합법적인 성직자가 집례할 것이며 반드시 믿는 사람들이 참여할 것입니다. 마태 28:19, 마가 16:16, 행 2:42, 고전 11:23-30 등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천주교에서는 일곱 가지 성례를 주장합니다.  영세(세례), 고해, 견진. 미사, 혼인, 신품, 종부 등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마태복음 28장과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세례와 성찬등 두 가지 성례만 명령하고 있습니다.  한편 기독교 교파라고 하면서 성례가 없는 교단도 있습니다.  성경대로 시행하지 않는 증거입니다.


 


    3. 권징: 
   오늘의 교회는 말씀선포나 성례식이 있다고 해도 권징이 바로 되어 있는 교회는 거의 없어서 이 점이 가장 약점입니다.  권징은 교회의 순결을 지키고 교리의 오도를 막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이것을 등한히 하면 진리가 침식되고 혼합주의에 빠지게 되어 버립니다.  마태 18:18,  고전 5:1-5, 13, 고전 14:33, 40, 계2:14-15

 


IV. 교파
    1. Quaker 

퀘이커(영어: Quaker)는 17세기에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가 창시한 신비주의 교파다. 퀘이커라는 이름은 하나님 앞에서 떤다는 조지 폭스의 말에서 유래했다. 1650년대영국조지 폭스가 제창한 명상 운동으로 시작했다. 퀘이커는 올리버 크롬웰의 종교적 관용정책으로 크게 확산되었는데, 이후 찰스 2세가 국가교회 정책을 펴면서 정부로부터 탄압받았다. 퀘이커 신앙은 윌리엄 펜(William Penn, 1644-1718)이 불하받은 북아메리카 식민지 영토에 도시(현 미국 펜실베이니아)를 세움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허용받았다.(위키백과)

 

퀘이커파의 사상을 받은 한국인은 함석헌(1901-1989)으로 본다. 함석헌은 "항시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퀘이커적 사유로 삶을 마감했다. 그는 영국 사상가 토마스 카알라일(1795~1881)의 <의상철학>을 통해서 퀘이커에 관한 글을 읽었다. 이때 그는 조지 폭스에 대해 큰 인상을 받았고,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폭스가 쓴 <일지>를 읽게 됐다.

조지 폭스는 1624년 7월 청교도 마을인 영국 중부의 레스터셔, 지금의 페니 드레이튼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크리스터 폭스는 이웃들이 ‘공정한 크리스터’라 불릴 정도로 정직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방직공이었다. 그의 집안은 하층에 가까웠다. 집안 형편으로 볼 때, 폭스가 공식적인 교육을 받을 기회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십대 시절, 목회자가 될 것을 바라는 친척들의 희망을 뒤로한 채 구두 제조업과 목축업을 겸하는 사람에게서 양치기 생활을 했던 점도 이런 것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폭스는 글은 쓰고 읽을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는 외로운 양치기 생활 동안 종교와 신앙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며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 꿈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이때 그는 노아,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을 생각하며 정규적인 제도 교육이 목회자가 되기 위한 필요한 자격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성서의 위대한 인물들은 양치기 생활을 통해서도 훌륭한 목회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목회자가 되기에는 아직 확고한 신앙을 가지지 못했다. 당시에는 로마 가톨릭, 영국 국교도, 청교도들이 서로 나뉘어 싸움을 하고 있었고, 그 사이를 틈타 분파적인 교회들도 생겨나 정말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신앙에 대한 그의 고민은 커져만 갔다. 18세 때에 정말 어느 것이 진정한 신앙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 집을 떠나 수많은 사람들과 목회자를 찾아 다녔지만 실망만 안고 돌아왔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내 몸은 그야말로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으로 메말라 있었고, 그러한 고통들이 너무나 커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거나 장님으로 태어나 사악하고 허망한 것들을 보지 않게 되거나, 벙어리로 태어나 헛되고 나쁜 말들이나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말들을 결코 듣지 않기를 바라는 게 나았을 것 같았다.”

폭스는 이제 다른 사람이나 글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만을 온전히 바로 알고자 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바로 알 수 있는 것인가? 사람들이 성경을 읽기는 하였으나,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제대로 안 것일까? 폭스는 오랜 고민 끝에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성령이 함께 해야 성경을 올바로 알 수 있다고 깨달았다. 그 이유를 그는 나중에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통해 성경을 주셨다는 것과,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배웠던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과, 바로 그 영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은 성경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어떻게 이런 깨달음을 갖게 된 것일까 ? 그는 이런 종교적 깨달음을 갖게 된 것은 주께서 내 마음을 여시어 된 일이라고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해 성경에서 읽기는 하였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나 이제 계시를 통해 열쇠를 가지신 분이 그 문을 여셨으며 생명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로 나를 인도하셨다.”

폭스는 이런 깨달음을 얻고 난 후, 1643년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영적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영적 방랑 생활을 하면서 영적인 열림의 체험을 한 다른 사람들을 열심히 찾아 다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가 볼 때, 그런 체험을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참된 신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나누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어떤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한 분, 한결같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그분만이 네 처지를 말해줄 수 있다.”

그는 이 음성을 듣고, 너무 좋아서 깡충깡충 뛸 정도였다. 1646년에 체험한 이 음성을 그는‘내적인 빛’이라 표현했다. 그는 ‘내적인 빛’을 ‘그리스도의 신령한 빛’으로 설명하였다. 이 ‘내적인 빛’에 따라 살 때 그는 타락 전의 아담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회복한 온전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내적인 빛’에 의한 영적 각성 후 폭스는 진리를 전파하러 전국을 돌기 시작했다. 그는 시장에서도, 설교가 끝난 교회에서도 설교를 했다. 그는 설교를 통해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목회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해야만 목회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에게 중요한 것은 영적인 체험과 소명이다. 조지 폭스는 교회를 돈벌이로만 생각하는 직업적인 목회자들을 부정했다. 그는 돈벌이로 이용되는 교회를 영은 없고 건물만 있는 ‘뾰족집’으로 불렀다.

그의 <일지>를 통해서 폭스는 각 개인은 하나님과 직접 교감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 모든 인간 안에는 여러 용어로 표현될 수 있는 속 생명, 내면의 빛, 영감, 내적 그리스도, 하나님의 씨앗 등이 있고 이것은 직접 하나님의 영성과 교통할 수 있다는 폭스의 주장은 초기에는 영국정부와 국교인 성공회에서 이단으로 여겼다. 그래서 폭스를 포함한 많은 퀘이커교도들은 수많은 정치적, 종교적 박해를 받았다.

조지 폭스는 종교가 설교나 교리, 의식에 의한 제도라기보다는 내면의 빛을 따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 내면의 빛이 있으므로, 폭스는 각 개인이 침묵예배를 통해서 절대자와 교감하는 합일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느꼈다. 이 내면의 빛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그것은 종교적인 어떠한 형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이다. 이 내면의 빛은 각 개인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의 단체모임을 통해서도 발현된다.

초창기 조지 폭스를 비롯한 퀘이커들은 한 개인의 영적 통찰도 깊은 사회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퀘이커들의 증언(testimonies)은 타인의 내면의 빛을 발견하고 존중하는 것을 그 기초로 한다. 그래서 수감자들을 위한 교도소 시설의 개선, 정신병원시설 개선, 여성참정권운동, 노예제도반대, 노동자들을 위한 공정한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 정직한 상거래 확립, 정찰제 소개, 교육과 구호사업, 세계평화운동 등을 위해 퀘이커들은 역사를 통해 부단히 힘써 왔다.

또한 초창기부터 퀘이커들은 남녀평등을 중요시했다. 그것은 예배뿐 아니라 공개연설, 교육, 그리고 사무관계를 논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퀘이커 모임에서 양성 평등의 훈련을 통해서 여성들은 자신들의 지도력과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 앞에 한 죄수가 끌려 왔다. 호국경은 위풍당당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 앞에 서면 누구든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죄수는 몰골은 초라했지만 당당했다. 이 죄수는 상습범이었다. 1649년에 노팅엄에서 체포된 적이 있었고, 1651년 더비에서는 신성모독죄로 기소되었다. 이후에도 질서를 어지럽히고 미혹한다하여 여러 번 체포되었다. 그는 정식 목회자가 아니면서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설교를 했고, 설교를 통해 영적 체험과 소명을 강조했다. 영적 체험과 소명이 없는 기성 교회와 목회자들을 비판했다. 기존 교회와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그래도 이 죄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친구들’이라는 이름의 무리를 이끌며 영국 전역을 방랑하며 설교를 했다. 크롬웰 정부는 이들이 왕당파의 음모에 가담해 정부를 타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의심을 했다. 그러나 크롬웰은 그 죄수와 대화를 한 뒤 그러한 의도가 없다는 확신을 가졌다. 오전 내내 이루어진 대화에서 그 죄수는 ‘친구들’에 대해 설명하고, 크롬웰에게 신의 음성을 듣고 그것에 따라 살라고 진언해 주었다. 폭스가 떠나려 할 때, 크롬웰은 눈에 눈물이 가득차서 이렇게 말을 했다.

“다시 나의 집으로 오게나. 그대와 내가 하루 한 시간 만이라도 같이 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서로 더욱 가까워질 것일세.”

크롬웰을 감동케 한 이 죄수는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였다. 조지 폭스가 이끈 당시의 신앙 운동은 퀘이커 운동이었다. 프로테스탄트, 천주교회 그리고 영국 국교회와는 전혀 다른 제 3의 종교운동이었다. 퀘이커라는 말은 치안판사 베네트가 조지 폭스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향해 비꼬는 말에서 유래했다. 베네트는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면 몸을 떨게 되리라던 폭스의 말을 인용해 폭스와 그의 친구들을 ‘몸을 떠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퀘이커들(Quakers)’이라고 조롱해 불렀다.

 

 

1 퀘이커의 특징

 

청교도들이 성경을 절대시하여 그들의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의 지침으로 삼았다면, 퀘이커교도들은 인간 개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성스러운 '내적인 빛' 곧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퀘이커 교도들은 칼빈이 주장한 인간의 원죄를

믿지 않았으며,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내적인 빛이 있기 때문에 성직자도 평신도, 남자와 여자, 자유인 노예가 모두

평등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교황이나 주교 등 성직자의 권위를 부정하고, 마틴 루터처럼 개개인은 누구나

다 사제로 보았다. 그들은 개개인에 대한 궁극적인 권위는 개개인의 마음속에 계시되는 내적인 빛이라고 주장한 것

이외에는 어떠한 신조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어떠한 예식도 하지 않았다.

 

2 퀘이커의 설교 

 

그들은 교회당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십자가도 성상도 없는 그 곳에서 예배시간이 가까워지면 한두 사람씩 오는 순서대로 빈자리를 채우고 앉는다.

먼저 온 사람과 나중 오는 사람 사이에 어수선한 인사도 없고, 각자 자리에 앉아 차분히 눈을 감는다.

사회자도 목사도 없다. 더러는 바닥에 허리를 펴고 앉고 더러는 의자에 앉아 손을 모은 채, 느긋이 침묵을 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누군가 말을 할 법도 한데, 좀이 쑤시는 침묵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뒷산에 눈 녹는 소리와 여린 새의 소리가 크게 들린다. 새소리가 들리자 옆 사람 들숨날숨 소리도 들리고,

마음이 누그러진다.'침묵'이 불편하지 않게 느껴질 무렵, 예배가 끝났다.

꼬박 한 시간 동안, 찬송가 자락이나 성경 봉독도 없이 예배가 진행된 것이다.

 

침묵예배. 이것이 이들의 일관된 예배 방식이다. 단순히 명상으로서의 침묵이 아니라, 모든 겉치레를 버리고 전심으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기 위한 침묵. 그러나 예배 도중 누구라도 자신이 받은 감동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말하기도 하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기도 한다. 말을 나누든 나누지 않든 이들의 예배는 늘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는 전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3 사회속의 퀘이커

 

모든 사람의 내면에 빛이 있어서 공동체적인 깊은 침묵을 통해 그것을 발견해 나가는 것.

이것이 퀘이커의 모임에 설교도 없고 성찬도 없고 목사도 없고 리더도 없이, 오직 동등한 공동체로서 함께 성령의 임재를 추구해 나가는 근거다. 그러나 '속의 빛'으로부터 시작된 퀘이커의 신학은 단지 신비적인 체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또한 이들이 삶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신앙의 형태 중 중요한 것 하나가 바로 사회참여다.

이들은 전적으로 평화를 옹호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기 때문에 1,2차 세계대전 참전 거부로부터 시작해서

노예제도 폐지, 감옥개선, 핵무기 반대운동 등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평화운동을 벌여왔다. 이것은 전쟁반대와 인권운동, 정치적 개혁에까지 걸쳐 있는 폭넓은 사회참여다.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한 퀘이커교의 신앙은 후일 펜실배니아 식민지를 중심으로 전개된 계몽사상의 기틀이 되었고, 미국 독립선언서와 헌법의 기본 정신이 되었다. 더 나아가 이 퀘이커 사상은 인간의 신성과 무한한 가능성을 가르친 초월주의 사상의 출현을 도와 주었으며, 뉴잉글랜드 청교도 정신과 함께 미국의 정치, 사회, 철학 사상의 양대 지주가 되었다.

 

잘못된 점   -    “교회의 정치 체제는 어떤 체제이건 간에  반드시 타락하게 되고 기독교의 정신과 위배되기 때문에 어떤 교회의 정치 체제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그래서 주어진 성경말씀 대신에 특별 계시를 인정하고,  사람이 만든 교회의 정치 체제 대신에 하나님이 계시로 주신 체제를  도입하고,  설교 대신에 즉석에서 성령이 하시는 말씀으로 권면 한다. 여러 사람이 회동해 있다가 한 사람이 성령으로 계시를 받으면 그 말씀을 회중에게 전하는 형태의 예배다. 성경보다 성령의 체험을 중시한다. 그러나 오늘 날 성경 66권이 모두 기록되었고 마지막 계시인 예수께서 오셨으므로 계시는 종결된 것이며 성경을 벗어난 체험은 잘못된 것이다. 분명히 말하고 경고하지만 직통계시는 이단이며 위험하다 오히려 독단적이고 이기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을 강조하며 성경은 참고할 뿐이라 가르친다. 영적우월주의 영적교만 문명거부 영적이기주의 영적 배타주의 나의 신앙만 옳다라고 여기는 영적 풍토는 지극히 위험하다

 


  2.성공회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교회 관할권을 사도들의 계승자인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만 부여 했다고 믿는다. 일반 교인들은 교회 일에 간섭할 권리가 전혀 없다고 가르친다. 지금 영국 국교가 여기에 속한다.


 


  3.장로교

 

1.초대교회와 장로정치: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사후에 참여할 'kingdom of glory'와 지상에서 성도들이 은혜의 수단을 맛보며 살아가는 'kingdom of grace'으로 구성된다.

 

지상의 교회들이 취하고 있는 정치 형태는 크게 넷으로 나눌 수 있다.

1교황정치, 2감독정치, 3회중정치, 4장로정치.

장로교회는.. 회중교회가 주장하는 자율과 평등 사상을 수용하지만, 그들과 달리 교회회의의 위계성과 교회의 연합을 강조한다.

 

 장로교도들은 세속 정치 참여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또 다른 특징은 교회의 모든 제도와 권위의 기초를 성경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장로주의자들은.. 장로와 감독이 하나의 직분으로 동일한 직분에 대한 다른 설명이라고 주장한다.

 

초대교회의 교회 직분은 감독 밑에 장로와 집사가 존재하였던 것이 아니라, 장로(감독)와 집사라는 두 가지 직분만 있었다. 교회회의 결정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어서 항상 성경에 비추어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는 지역교회의 자율, 교역자 사이의 평등, 교회의 연합을 실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장로교회 정치원리이다. 초대교회는 교회 절기를 중시하지 않았다.. 사순절 동안에 금식이나 고행, 또는 자학하지 않았고, 성탄절을 앞두고 대강절을 지키지 않았으며 심지어 성탄절조차도 교회 절기로 여기지 않았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참된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져야 한다고 믿었으므로 기도문에 의존하여 기도하는 것이 예배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초기 교부들의 감독 중심 사상은 3세기 이후에 감독주의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감독 중심의 교회정치 체제는 사제주의 신학과 결합하면서 막강한 힘을 가진 교황 통치 시대를 열게 되었다.

 

2.중세의 장로교회:

 로마교회가 빛을 잃고 있을 때,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교황청의 부정부패 가운데도 교회의 흔적은 있었고,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존재하였다..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숨겨 두신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교회를 회복하셨다. 프린스턴신학교의 교수였던 사무엘 밀러의 지적처럼 왈도파는 중세 시대의 진정한 장로교도였다. 이와 같이 왈도파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에 이미 개혁주의적인 신앙을 고백한 장로교도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개혁신학의 계승자, 왈도파

 

앞의 질문들에 대한 답변, 곧 루터의 종교개혁과 차이를 가진 개혁파 종교개혁은 그 바탕이 ‘왈도파‘이다. 칼빈주의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까지 이르지만, 그 중간 과정에 왈도파가 있다.

 

스위스에서 개혁신학을 한 자들은 대체적으로 왈도파에 속했다. 칼빈에게 영향을 준 사촌 올리베땅이나 파렐도 왈도파 소속 목회자였다. 이들이 번역한 프랑스어 성경을 프랑스만 아니라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종교개혁자들도 사용했다. <올리베땅 성경>은 루터에게 신약성경 번역에 큰 도전을 주었다. 심지어 츠빙글리의 성찬론 역시 왈도파가 고수한 기념설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는 왈도파에 대한 상당한 식견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만남에 참석하기도 했다. 개혁신학의 뿌리를 논할 때 왈도파를 빼놓을 수 없다.

 

로마 가톨릭은 왈도파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오늘날 왈도파의 존재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로마 가톨릭이 왈도파를 종교재판소에 회부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단 판결문 속에서 왈도파의 존재와 정체가 드러났다. 그들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역사의 문헌은 항상 힘 있는 자들에 의해 기록되기 때문이다. 왈도파는 험악한 중세시대를 지나면서도 굳건하게 개혁신앙을 지켰다. 만약 왈도파가 갑자기 생겨난 자들이라면, 로마 가톨릭의 주장처럼 이단으로 규정될 가능성이 높다. 왈도파 이전에 개혁신학의 뿌리를 누구일까? 8세기 로마 가톨릭교회가 만들어지기 전, 순전하게 신앙을 지켜온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체코의 얀 후스, 이탈리아의 사보나롤라, 영국의 위클리프 그리고 프랑스의 왈도파 창시자 페트뤼스 발데스 다. 발데스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개혁주의 신학 특히 장로교회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기독교는 로마 황제 네로가 64년부터 기독교인들을 사자의 먹이가 되게 하고 화형을 시킨 이래 250년 동안 핍박과 순교를 당했다. 312년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핍박이 그쳤고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

 

 

정통과 이단이 뒤바뀐 시대

 

하지만 정통신앙에 대한 핍박은 훨씬 오래 지속됐다. 325년 제1차 범종교회의를 니케아에서 개최했음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누스는 정통신앙을 배제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세 명과 사생아들이 제국을 4등분하여 다스릴 때, 이단 사상인 아리오스주의가 정통 니케아신앙보다 훨씬 세력을 얻었다. 그의 아들 중 콘스탄티우스 2세(350~361년)가 제국을 통일하고 그의 조카인 배교자 율리아누스(361~363년)에게 제국을 넘겨줄 때도 역시 반삼위일체론인 아리오스주의를 여전히 지지하고 따랐다. 그 이후 황제가 된 요비아누스(363~364년)와 발렌티니아누스 1세(364~375년) 역시 아리오스주의자였다. 이후 황제가 된 테오도시우스 1세(379~392년; 392~395년)에 이르러 381년 2차 범종교회의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개최되면서 마침내 정통 니케아신앙이 재확언되었다.

 

바른 신앙은 여전히 핍박을 받았다. 반삼위일체론자인 아리오스파는 제국을 등에 업고 여전히 정통신앙인들을 핍박했다. 이 핍박을 피할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은 은자생활을 하는 길이었고, 두 번째는 로마 제국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장소에서 신앙을 지키는 것이었다.

 

 

클라우디오 “가톨릭은 거짓교회”

 

이탈리아 북서쪽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피에몬테(Piemonte)에서 정통신앙을 고수한 이들이 있다. 사람들을 이끌었던 지도자는 클라우디오 데 토리노(Caludio I de Torino, 약 871년 사망)이다. 그는 스페인 출신으로 프랑스 아끼뗀느 왕 루이(778~840년)의 궁정 신부며 성경학교 교사였다. 황제 샤를마뉴가 814년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루이가 황제로 있을 당시 816년 창세기, 마태복음,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및 빌립보서 주석을 썼다.

 

클라우디오는 817년 토리노에 감독으로 임명받아 로마를 방문했을 때, 타락해 가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말씀 중심보다는 미신에 사로잡히고, 복음과는 상관없는 우상들을 섬기고, 스스로 베드로 후계자라고 억지 주장하는 것을 비판했다. “로마 가톨릭교회를 거짓교회”라고 맹공격했다. 클라우디오는 <변증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로마 가톨릭교회)은 진리에서 떠났으며, 허무한 것을 찾으며, 그리고 무의미한 것에 안주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고 있으며 그분을 다시 욕보이고 있다. 그들은 사탄의 협력자들로 영혼들을 훔치고 있다. 불경건한 모양들에서부터 멀리 하지 않으면 창조주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영원한 저주를 직면할 것이다.”

 

 

결국 로마 가톨릭교회는 클라우디오를 이단자로 정죄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떤 종파를 전파한 것이 아니고 교회의 단일성을 고수하고 진실성을 설명했을 뿐이다. 나는 종파와 분파를 제거하고 이단들과 미신들을 진멸하려고 했다. 나는 그것들과 싸웠을 뿐만 아니라 전투를 벌였다…왜 당신은 스스로 굴복하여 어리석은 형상들 앞에 엎드리는가? 지상의 헛된 모양들과 형상들 앞에 노예처럼 몸을 숙이는가? 얼굴을 들어 하나님께 향하시기 바란다. 그분을 찾으면 아래 것에 대한 미련을 잊을 것이다.”

 

클라우디오를 보면서 개혁신학의 뿌리가 얼마나 고상하고 외롭고 힘들었는지 상상된다.

 

 

개혁파의 뿌리는 16세기가 아니라 초대교회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개혁신앙의 중심에 있던 왈도파를 언급했다. 16세기 개혁신학을 이끌었던 대부분의 초기 선배들은 잠정적으로 왈도파이든지 아니면 그와 유사한 신앙을 고수하고 있었다.

 

 

개혁의 징검다리, 왈도파

 

‘왈도파’라고 불리는 이들은 무명의 개혁파로 활동하고 있다가 피에르 왈도가 등장하면서 편의상 왈도파로 불렸다. 피에르 왈도는 프랑스 리옹 출신으로 피에르 부드(Pierre Vaudès, 약 1140~약 1206년) 또는 피에르 봘도, 즉 왈도라 불린다. 그를 추종하는 이들을 왈도파(Waldensians)라고 부른다.

 

그가 부유한 장사꾼 출신으로 사악한 방법으로 재산을 가졌다고 전하지만, 구체적으로 그의 삶에 대해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왈도는 복음서에 나오는 부자 청년처럼 아내에게 부동산을 준 후 나머지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줬다. 그리고 거지처럼 방황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다방면으로 도와줬다. 후에 왈도의 영향을 받아 프란체스코(1182~1226년)도 동일한 삶을 모방하게 된다.

 

왈도의 청순한 삶을 보면서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고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가리켜 ‘리옹의 가난한 자들’이라 불렀다. 또 왈도는 원어 성경을 읽고 싶어 사제들에게 복음서와 시편만 아니라 교부들의 책을 라틴어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의 제자들이 프랑크푸르트와 뉘른베르크를 비롯하여 독일 전역과 이탈리아로 뻗어 나갔다. 왈도의 죽음과 상관없이 왈도파는 꾸준히 성장했고 그의 가르침을 본받아 유럽 여러 곳을 다니면서 자국어로 복음을 읽고 선포했다는 것이다.

 

1179년 왈도파는 3차 라테란 종교회의에 참석하여 자신들의 프랑스어 역 성경을 로마 교황에게 헌정했지만 그들을 꾸짖고 그냥 돌려보냈다. 하지만 1184년 베르노 종교회의에서 왈도파를 ‘휴밀리아티’(Humiliati) 또는 ‘리옹의 가난한 자들’이라 부르면서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이후 유럽 전역에서 왈도파는 핍박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결국 이들은 13세기 알비파 십자군운동(Albigensian Crusade, 1209~1229년)으로 인해 진짜 이단 카타르파와 함께 수많은 자들이 학살을 당한다. 생존한 자들은 피에몬테의 깊은 골짜기로 숨어 들어갔다.

 

 

 

1000년 동안 ‘오직 성경’을 지키다

 

하지만 왈도와 왈도파에 대해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왈도파가 왈도를 따랐다면 그가 남긴 사상이 나타나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또 왈도를 따르는 자를 ‘리옹의 가난한 자들’이라 불렀지만, 무명의 개혁파는 이탈리아 피에몬테라는 골짜기 사람들이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교회 내에 우상화가 심해질 때, 교회의 타락을 안타까워하던 이들이 피에몬테의 알프스 산 깊은 골짜기로 모여들었다. 여기에 있던 일부가 왈도와 관련을 맺으면서 왈도파로 가톨릭에 의해 불린 것이다.

 

왈도파로 불린 무명인의 개혁파 또는 개혁신앙인은 이미 왈도 이전에 알프산 깊은 골짜기에 살면서 부패한 교회, 즉 로마 가톨릭교회에 속하지 않으면서 신앙을 지켜 나갔다. 피에르 왈도가 전한 신앙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왈도파 신앙은 우리에게도 전해진 것이다.

 

피에르 왈도가 사제에게 부탁한 프랑스어 역 성경 이전에 왈도파는 이미 프랑스어 역 두 권의 성경을 지니고 있었다. <숭고한 교훈>이라는 시를 보면, “사도들 이후부터 어떤 교사들이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세주의 도를 계속해서 가르치고 왔다. 지금까지도 그런 가르침을 계속하여 가르치는 교사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보도와(Vaudois)”라고 했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주의가 아니라 하나님께 더 순종하고, 성경 말씀을 신앙의 근원으로 여겼다. 그리고 복음 선포에 중요성을 뒀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무서운 칼날 앞에서도 성경의 권위를 두었다는 것은 개혁신앙의 기준이 되었다. 왈도가 태어나기 전부터 무명의 개혁파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연옥, 미사, 면죄부, 성자의 기도, 성상 등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이것을 <왈도파 신앙고백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왈도파는 피에르 왈도의 이름에서 유래했지만 그 이전부터 ‘무명의 개혁파’로서 성경의 진리를 지킨 신앙인들이었다. 지금 왈도파로 통칭하는 이들은 1517년 종교개혁보다 무려 400년 이전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상숭배와 미사를 거부하고, 오직 성경 말씀에 입각한 진리를 지켜나갔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500년 동안 핍박하며 죽였다.

 

핍박과 개혁

 

피에르 왈도가 태어나기도 전 무명의 개혁파들의 신앙고백서가 1120년에 작성되었다. 현재 <왈도파 신앙고백서>로 불리는 이 신앙고백서의 신학이 개혁신학에 입각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그 신앙 때문에 누구보다 처절한 핍박과 순교의 길을 걸었다.

 

1487년 약 1만8000명의 십자군들은 왈도파가 거하고 있던 피에몬테 골짜기를 공격하여 무참히 그들을 학살했다. 1530년 왈도파 지도자 모렐과 피터 마손은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 오콜람파디우스를 비롯한 개혁파 종교개혁자들을 만나 신앙의 지도를 부탁한 후 돌아오는 길에 검거되어 참수형을 당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왈도파는 개혁신앙에 입각한 종교개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1532년 샹포랑 종교회의에 왈도파는 참석하여 개혁교회에 동참하고 그 지침에 따라 목회자를 선출하고 교회 조직을 만들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이 일어나자 프로방스 지역의 왈도파가 거의 죽임을 당하고, 이탈리아 남부에 있던 왈도파도 대학살을 당했다. 1655년 피에몬테 부활절에 수백 명의 왈도파가 죽임을 당했다. 핍박과 순교의 역사 속에서도 그들은 신앙을 지키면서 현재까지도 제네바 범종교회의와 개혁교회들의 세계연맹 정식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왈도파는 개혁신학을 고수한 개혁신앙인 또는 개혁파로서 개혁신앙에 입각한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부터 그들은 개혁신학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들은 칼빈 이전에 개혁신학을 이끌었던 오콜람파디우스, 기욤 파렐, 티어도르 드 베자, 올리베땅, 마틴 부처와 같은 개혁신학자들과 교제를 가지면서 어두운 중세 1000년 동안 성경적 개혁신앙을 고수한 개혁신앙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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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도파 신앙고백서> (1120년 작성)

 

1. 우리는 ‘사도신경’이라 불리는 12항목이 포함된 모든 것을 믿고 주장하며 12항목과 모순되는 것을 이단성 있다고 여긴다.

 

2.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을- 믿는다.

 

3. 성경책들을 거룩한 정경이라 인정한다.

 

4. 성경책들은 우리에게 한 분 하나님, 전능하시고, 지혜가 한이 없으시고, 무한히 선하시며, 선하심으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임을 가르친다.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아담을 창조하셨다. 하지만 사탄의 적개심과 불순종으로 인해 아담은 타락하게 되고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아담 안에서 우리는 범죄자가 되었다.

 

5. 율법을 받은 조상들에게 그리스도를 약속하셨다. 율법, 불의와 결점으로 인해 죄를 알고 있었던 그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렸고 그는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다.

 

6. 성부의 정하신 때가 되자 그리스도는 태어나셨고, 우리들에게 어떠한 선이라도 없다는 것과 죄인임을 명시하셨다. 진실하신 그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7.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 진리, 평화, 그리고 의이시다. 우리의 목자, 변호자, 희생,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고 의를 위해 부활하셨다.

 

8. 예수 그리스도 외에 우리와 성부 하나님과의 사이에 어떤 중보자나 변호자도 없음을 확실히 믿는다. 동정녀 마리아는 거룩하고, 겸손하고, 그리고 은혜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성자들, 즉 심판 날에 그들의 육체의 부활을 위해 하늘에서 그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는다.

 

9. 이생이 끝난 후, 두 장소가 있는데 하나는 구원을 받는 자들을 위한 곳이고 다른 한 곳은 멸망 받는 자들을 위한 장소가 있음을 믿는다. 전자를 낙원이고 후자를 지옥이라 부른다. 적그리스도가 가공해낸, 진리와 반대되는 연옥을 부인한다.

 

10. 무엇보다도 ‘종교적 목적으로’ 인간이 만든 모든 가공물들을 하나님 앞에 언급조차 할 수 없는 혐오스러운 것들로 여긴다. 축일, 축일 전야, 성수, 특정한 날에 육체 학대와 같은 것들과 미사를 혐오한다.

 

11. 적그리스도로부터 나온 모든 인간적 가공물들을 -가톨릭들이 자발적으로 행하는 고해나 회오를- 증오하며 인간의 마음을 빼앗는다고 여긴다.

 

12. 성례를 거룩한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불가시적 축복의 전형으로 여긴다. 신자들에게 이런 상징들이나 형식들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이런 상징들을 간직하지 않거나 없어도 구원을 받는다.

 

13. 세례와 성찬 외에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가 아니다.

 

14. 복종, 순종, 엄수, 그리고 납부와 같은 세속적 권력을 존중한다.

 

 

 

3.종교개혁과 장로교

초대교회 이후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이던 장로정치가 성경적인 형태로 다시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종교개혁 이후이다.. 그 결과 성경적인 정치 형태는 한 사람에 의해 다스려지는 교황정치가 아니라 교직자 사이의 평등, 지역 교회의 자율, 그리고 교회적 연합을 강조하는 장로정치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하나님이 규정해 주신 법에 따라 교회를 다스려야 한다는 칼빈의 주장은 장로정치의 원리가 되어왔다. 칼빈의 '하나님의 법 사상'은 스코틀랜드의 개혁자 앤드류 멜빌과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하였던 총대들에게도 계승되었고, 이들에 의하여 장로교 정치 원리의 틀이 마련되었다. 곧 칼빈의 교회정치 원리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서 모든 지체들이 누리는 평등성, 직분을 맡은 자들을 통하여 자유롭게 운영되는 자율성, 대표를 통하여 실시되는 연합성으로 요약된다고 본 것이다.

 

루터의 교회론

1) 교회 만인제사장론(벧전 2:9) 

(1) 신분의 차이가 아닌 임무와 일의 차이- 교회 직분자로 부름 받은 사제들 무효화하지 않음(독일 귀족 교인들에게, 1520)

(2) 루터는 개인주의 조장자나 교회 반성직주의자가 전혀 아님(교회의 바벨론 포로, 1520). 하지만 로마 교회의 수장은 적그리스도(Antichrist)

(3) 교회 밖에는 진리 없고 그리스도도 없으며 은총도 없다

 

2) 교회의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말씀)

말씀(로고스)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

 

3)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로서의 교회

 

4)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집행되는 장소로서의 교회

 

 

칼빈의 교회론

 

칼빈은 1536년 7월에 제네바로 갔다. 거기서 파렐(Farel)을 통해 칼빈은 생애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며 종교개혁자가 된다. 그는 이곳에서 1536년 9월부터 바울서신을 강의했다. 그리고 동지들과 함께 개혁교회를 조직해 나가기 시작했다. 

 
1537년 1월 16일에는 칼빈이 중심이 되어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항”(Articles Concerning the Organization of the Church and of Worship at Geneva)을 만들었고, 이것은 후일 교회 헌법이 된다. 같은 해에 교육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교리문답서인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다. 
 
1538년 2월, 반대파 지도자들이 실권을 잡게 되자  제네바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 
 
제네바에서 추방된 칼빈은 그동안 중단했던 공부를 다시 하기 위해 바젤로 갔다. 그는 소란스런 제네바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로 하여금 조용히 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칼빈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마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는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프랑스인 교회의 목사가 되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로부터 18개월 뒤, 스트라스부르그에 도착해 칼빈은 3년 정도 머물며 신학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이곳에서 성경을 강의하고 목사후보생을 훈련시켰다. 이때 칼빈은 <로마서 주석>을 집필하게 된다.
 
더불어 <기독교강요> 증보판을 발간했다. 또한, 목사로서 피난민 교회에서 500여명의 성도들을 목회했다. 여기서의 경험이 후일 제네바의 목회를 더욱 풍성케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교인 훈련, 성만찬, 회중 찬송, 심방, 교회 예배의식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미완성 상태의 제네바는 칼빈이 떠난 뒤로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였고 도덕적 타락은 극에 달하였다. 이때 제네바 교회는 다시 칼빈을 필요로 했다. 
 
제네바 재입성
 
1541년 9월 13일 칼빈은 다시 제네바로 돌아가게 된다. 칼빈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한 열정과 단호한 결단을 갖고 일을 했다. 칼빈이 제네바로 돌아오던 날, 그는 교회를 재조직할 것을 요구했다. 위원회에는 교회의식서(Ordonnances Ecclesiastiques)를 작성하여 이를 칼빈이 수정한 후 총회에서 통과시켰다. 이것은 초대 개혁교회의 조직 체제를 잘 반영하고 있다. 
 
교회의 네 가지 직분은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등으로 구분하고 그들의 역할과 사명을 잘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개혁교회에는 계급이 없었고 누구나 쉽게 성직자가 되었다. 칼빈은 성직자의 규범과 표준을 세우고 모든 분파의 사람들을 모아서 교회를 형성했다. 제네바는 성베드로, 성제르베, 라 마들렌 등 세 교구로 나누고 이를 다섯 명의 목사가 섬겼다. 1542년에 전염병, 부인의 사산아 출산, 외국인인 그를 싫어하는 사람으로 인해 칼빈은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547년 2월에는 칼빈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대거 의회에 입성했고, 7월에는 그들을 거스르는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칼빈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1549년 3월에는 아내의 죽음으로 잠시 낙담했다. 칼빈은 이 밖에도 육체적 고통으로 편두통과 통풍, 발열, 이질, 폐결핵으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그는 병상에서 일어나 설교하러 가는 때가 많았다. 
 
개혁운동 
 
1549년 10월, 의회의 지시에 따라 칼빈은 제네바에서 이틀에 한 번씩 하던 설교를 매일 한 번씩 하게 된다. 자주 설교를 하게 됨으로써 칼빈은 엄청난 양의 설교를 남겼다. 그의 설교가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난민 협회’로 알려진 한 단체가 칼빈의 설교 가치를 파악하고 돈을 내어 설교를 받아 쓸 수 있는 비서를 구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늘 고국인 프랑스 교회의 안녕을 걱정했다. 프랑스 교회 역시, 칼빈을 지도자로 생각했다. 이런 목적에 따라 1546년 <기독교 강요>를 프랑스어로 번역했으며, 프랑스의 그리스도인들을 권면하고 격려하기 위해 소책자들을 집필했다. 
 
그러나 칼빈의 개혁운동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1553년에 세르베투스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스페인 학자 세르베투스는 니케아회의에서 결정된 삼위일체 교리와 칼케돈 회의에서 결정된 기독론 그리고 유아세례 교리가 교회를 부패시키는 요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칼빈의 저서 <기독교 강요>를 비판했다.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신학적 관점 차이로 처형시켰다는 오해로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칼빈을 만나기 전, 이미 스페인과 프랑스의 로마교회 종교재판소로부터 공석 상태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로 인해 칼빈이 있던 제네바에서 체포되었으나 제네바 시의회의 재판을 다시 받게 된다. 프랑스인으로서 시민권이 없던 칼빈은 종교회의에서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재판에 다른 영향력이 없었다. 
 
결국 제네바 시의회는 세르베투스를 이단자라는 명목으로 화형에 처했다. 그리하여 세르베투스는 칼빈 생전에 제네바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 당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 사건은 이 사건과 관련된 어느 누구도 칭찬받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제네바에서 일어난 괴로운 싸움의 절정이었다. 
 
일부는 칼빈에게 노골적인 악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속주의자들에게는 칼빈이 하나의 걸림돌이 되었다. 특히, 칼빈을 가장 반대한 자들은 자유사상가들이었다. 도덕 폐기론자들, 방탕한 자들 그리고 부정부패한 자들이 칼빈의 종교개혁을 좋아할 리 만무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한 개혁운동은 중단될 수 없었다. 칼빈은 하나님이 주시는 가운데 가장 강력한 이론과 조직을 통해 이끌고 갔다. 힘겹고 괴로운 투쟁의 나날이었으나, 1555년부터는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몰락하고 칼빈은 제네바를 그의 이상대로 이끌어갈 수 있었다. 
 
1559년 칼빈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유럽의 젊은이들을 모아 개혁주의 사상을 가르치는 제네바 아카데미(Academy of Geneva)를 설립한 것이다. 칼빈은 자신이 학장으로 취임할 수도 있지만, 신약성경학자이며 그의 제자인 베자(Theodore Beza)에게 학장의 책임을 맡기고, 자신은 교수로 강의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1559년 3월 5일에 아카데미를 열었을 때 불과 162명의 학생이었으나 1565년에는 1600여명으로 열 배가 되었다. 
 
말씀의 종
 
칼빈은 그 당시 가장 훌륭한 학자이었으며, 평생 열정적인 학자였다. 성경 지식뿐만 아니라 법학, 언어, 신학, 철학, 역사 등에 능통하였다. 그의 생애 중 27년간 성피어레(St. Pierre) 교회에서 일주일에 5-6회 설교할 정도로 열정적인 설교자이기도 했다. 또한 신학강론, 저술, 토론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의 설교는 속기로 기록되어 출판되었다. 
 
칼빈의 설교집과 주석, <기독교강요>는 속속 번역되어 화란, 영국, 스코틀랜드,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전역에 칼빈의 사상이 전달되었다. 1564년 2월, ‘천식’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된 칼빈은 복음서의 조화에 대한 마지막 설교를 했다. 그는 몇 달 동안 병으로 고생하다가 점점 쇠약해져서 마침내 5월27일 저녁에 임종했다. 
 
그의 유언에서 자기를 소개하기를 “나, 존 칼빈, 하나님의 말씀의 종”(I, John Calvin, minister of the Word of God)이라 고백했다. 우리는 이 고백 속에서 칼빈의 소명과 사명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이것이 그가 설교 사역에 대한 정체성과 소명에 대한 분명한 근거였다. 
 
설교자 칼빈
 
칼빈의 설교에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가톨릭 성직자들의 비행을 더욱 비판하였다. 이런 비판은 당시로서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의 노력으로 기독교는 여러 면으로 개혁되고 갱신되고 있다. 
 
칼빈의 설교에는 또한 봉건 영주들에 대한 비판도 많이 나온다. 칼빈은 근대 민주주의의 아버지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발전하자, 칼빈의 설교 가운데 많은 부분이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애석하게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오히려 칼빈의 민주주의적 설교를 감사하게 회상하고, 우리 시대에 있어서 더 나은 민주주의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칼빈의 대적자들 
 
칼빈의 종교개혁은 결코 순단치 않았다.
첫째, 칼빈은 교황주의자(당시 로마의 신학자)들과 스콜라주의자, 궤변론자인 소피스트라는 용어를 습관적으로 사용한다. 칼빈이 이러한 로마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오직 성경’에 대한 생각으로 인한 것이었다. 
 
둘째, 재세례파(the Anabaptists)다. 이들을 광신도, 열광주의자, 자유주의자라고 부른다.
셋째, 극단적 인문주의자들(Humanists)이다. 라블레(Rabelais), 돌레(Dolet), 페리에(Périers) 같은 파리의 자유사상가들과 신이교주의를 표방한 에피쿠르소 학파 추종자들이다. 
 
넷째, 제네바에서 개혁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반대파들이다. 이처럼 칼빈은 수 없이 많은 적들로부터 공격과 비방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하며 더욱 말씀의 예리한 칼날을 세워 나갔다. 
 
이처럼 삶의 정황에 나타난 시대적 산물들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점점 더 교권화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 적실한 적용의 눈을 갖게 한다. 또한 극도의 아픔과 시련은 칼빈을 겸허하게 만들었고, 전적으로 성령께 의탁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칼빈의 대적자들이 있었기에 그의 설교는 날카로운 적용이 있는 설교를 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칼빈의 삶의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편으로 사용하셨다.

 

 

4.프랑스 장로교회

 

위그노

 

(프랑스어: Huguenot)는 프랑스 개신교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칼빈주의를 추종한 프랑스 개신교 신자들은 스위스 주네브에서 세력을 규합하는데, 후에 이들을 프라이부르크, 베른, 제네바의 동맹이라는 뜻으로 위그노라고 불렀다. 프랑수아 1세는 그의 통치 기간에 위그노의 수가 늘어나도록, 그들을 관대하게 다루었다. 앙리 2세 때는 위그노들이 큰 세력있는 단체가 되었다. 그들이 강해지자, 정부는 그들을 더욱 더 박해하였다.

 

1562년 위그노 전쟁,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등으로 로마 가톨릭 교도들과 갈등을 겪었으며, 교리적으로도 혼란을 겪었다. 부의 정당한 축적을 인정한 칼빈주의의 특징상 주로 상공업자 중에서 신도가 많았다. 프랑수아 2세가 1560년 사망하자, 샤를 9세와 황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정부를 지배하였다. 카트린은 기즈 공에 대항하는 위그노들의 균형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두 교파 간의 기분은 내란이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원인을 가져왔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프랑스 전국에서 가톨릭 교도들이 수천명의 위그노들을 학살하였다. 앙리 3세가 암살되고, 나바라의 군주 앙리(엔리케)가 부르봉 왕조를 열고, 앙리 4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개신교 신자들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낭트 칙령을 세워 위그노들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이후 루이 14세가 가톨릭을 프랑스의 국교로 삼기 위하여 낭트 칙령을 폐기하자, 수 많은 위그노들이 네덜란드, 영국, 프로이센 등지로 망명하였다. 일부는 북아메리카 (현재의 뉴욕과 캐롤라이나지역)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상공업은 물론, 여러가지 기술을 지니었던 그들이 망명하자, 프랑스의 경제는 몰락하고 말았다. 이것이 후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는 원인을 가져왔다.

 

파리에 개혁교회를 세우다

 

뚜상(Toussaint, 만성절)날 칼빈의 친구인 니콜라 꼽이 마튀랭(Mathurins)교회에서 파리대학교 총장 취임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이 연설문 초안을 작성한 칼빈은 박해를 받고 도망자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분노한 프랑수와 1세는 12월 10일 의회에 루터 이단에 대한 내용의 서한을 보냈고, 파리 소르본 신학부 교수진과 로마 가톨릭 고위 사제들은 그 연설문이 이단자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박해를 가하게 된다.

 

이때 칼빈은 앙골렘으로 피신하여 친구 루이 듀 띠에(Louis du Tillet) 집에 은신하였다가, 1534년 5월 4일 생가 느와용에 가서 사제직을 반납한다. 긴장이 고조되고 있던 시기에 왕의 침실문에까지 미사를 반대하고 성직자를 비난하는 벽보가 나붙은 사건으로 개신교 핍박은 더 강해진다. 프랑수와 1세는 수백 명의 개신교들은 투옥하고, 이중 35명을 화형에 처하였으며, 칼빈의 친형제 중 하나를 처형하였다. 그 다음해에 교황 바오로 3세에게 더욱 잘 보이기 위해 자기 영토 내의 모든 이단들을 완전 제거하겠다는 칙령을 반포한다.

 

칼빈 역시 망명자가 되어 프랑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26세의 나이로 개신교의 실상을 왕에게 알리는 변증서인 <기독교 강요>(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1535년 8월 23일에 완성하고, 1536년 3월 바젤의 인쇄업자 토마스 플래터가 이를 출판한다. 그 후 1547년에 프랑수와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앙리 2세(Henry 2)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개혁자들에 대한 박해는 더 심해졌다. 앙리는 1551년 샤토 브리앙 칙령을 선포하여 성경과 관련된 책이나 제네바에서 출판된 책들을 금지했다.

 

그러나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개신교회는 성장하고 있었다. 또한 1550년 경부터 제네바에 망명 중이던 칼빈이 자신의 제자들을 프랑스로 보내어 부르주아 계층을 중심으로 복음 운동을 시작하면서 개혁 운동은 점차로 확산되게 된다. 이 때 칼빈의 가르침을 따른 프랑스 개혁자들을 위그노(Huguenots)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세력은 지식층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나간다. 대학 교수, 의사, 변호사와 같은 지식층은 개혁 운동만이 프랑스를 살릴 수 있는 대안이라고 주장하면서 적극 동참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위그노 최대 박해자 중 하나인 앙리의 재위 중인 1555년, 파리 최초의 개신교 교회가 비스꽁티(rue Visconti) 거리에 세워진다. 과거 이곳은 많은 야채(maraîchère)를 재배했기에 마레 거리(rue des Marais)라 불렸다. 이 거리는 현 개신교에 있어 아주 중요한 장소요, 개신교 교회의요람과 같은 곳이기에 ‘작은 제네바’라 불린다. 이 거리가 개신교인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던 장점 중 하나는‘이중 사법권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23미터 길이의 이 거리동쪽 7개의 집은 성당의 권한에 속하는 곳이었기에 개신교 신자들은 자신들의 집을 비밀히 개방하여 교제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파리 최초의 개혁교회가 세워진 비스꽁티 거리. 과거에는 마레 거리라고 불렸다. 지역의 매력은 이중 사법권만이 아니다. 그 당시는 이곳에 많은 건물이 건축되지 않았고, 기존에 있던 집들은 시골집이거나 시골 기와집이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는 강을 따라 긴 들판과 많은 초목들이 있었기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파리 시내에 있는이 좁은 길에 많은 사람들이 모임을 가졌으나 소리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교회의 설립은 라 페리에(La Ferriere)라는 가정에 아이가 출생하는 일로 시작된다. 당시 개신교도들은 교황청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야간에 모이고 헛간이나, 동굴, 인적 없는 장소에서 은밀히 예배를 드렸다. 목사가 없는 가운데서 성경공부와 예배를 위한 모임으로 가정 중심의 모임으로 신앙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라 페리에는 자신의 아이가 신부가 아닌 개신교 목사에게 세례받게 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 지역에는 목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목사에게 세례를 요청하기 위해서 파리에서 540km나 떨어진 제네바까지 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성례를 위해 개혁교회의 설립은 긴급한 요청이었고, 23세의 쟝 르 마송(Jean le Maçon)이 라 페리에의 집에서 파리 최초의 개혁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교인들은 쟝 르 마송을 목사로 선출하고 장로와 집사를 선출하여 교회를 조직한 후, 라페리에의 아이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었다. 이로써 파리 최초의 교회에서, 개신교 최초의 세례가 베풀어졌으며, 최초의 총회가 열린다. 이들은 극한 위험 가운데서도 사제들에 의한 미사를 거부하고 목사에 의한 말씀과 세례와 성찬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모(meaux), 엉제(Angers), 루동(Loudon), 쁘와띠에(Poitiers), 그리고 아베르(Arvert) 지역 등 4개 처에도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 후에는 디에프(Dieppe), 뚜르(Tours) 등에도 교회가 설립되어 1559년경까지 개혁교회 수는 72개에 이르렀다. 또 1561년 말에는 프랑스 전역에 670 여개의 개혁교회가 설립되었다.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가 프랑스 내에서 속속히 세워지자, 제네바에 더 많은 목회자를 파송하여 줄 것을 요청한다. 제네바에서 훈련받은 사역자들이 교회를 맡게되자 사회 지도적 인사들도 많이 출석하게 된다.

 

생 제르망 데 프레 성당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은 바로 옆 비스꽁티 거리에서 열매를 맺어 개신교 교회의 요람이 된다. 이 거리의 지하실은 다른 곳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경찰의 습격에도 도주하기에 용이했다. 1685년 예배의 자유를 허락한 낭트 칙령이 취소된 후 위그노를 박해할 때에도 이곳 거리에 비밀리 총회를 갖는다.

 

1572년 바돌로매 대학살 때 비스꽁티 거리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필립 아구스트(Philippe Auguste) 시대의 성벽이 있는 곳에서 대부분 순교한다. 작은 제네바에 거주하던 위그노들은 세느강 쪽으로 도주하지만 이곳 문을 닫는 바람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다. 이곳은 프랑스 개신교의 요람임에도 불구하고 이 거리에도 이곳의 개신교 역사를 알리는 표지가 하나도 없다.

 

종교개혁에 대하여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는 위그노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 그의 누이 마르그리트로 인해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는 환영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마르그리트의 딸 쟌느 달베르는 개혁운동을 지지하였고, 그녀의 아들인 나바르의 앙리는 개혁운동의 후원자가 되었다. 칼빈 역시 수도원장 Guillaume Briconnet의 부름을 받아 파리로 오게 되며, 이름도 Jean Cauvin에서 Jean Calvin(라틴어로는 Ioannis Calvinus)로 바꾸게 된다. 칼빈은 1521년 브리소네의 도움으로 설교를 시작하게 된다.

 

인문주의적인 개혁운동은 급진적인 개혁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개혁 사상의 보급과 함께 많은 무리가 로마 천주교회의 미신적인 예배와 폭정을 급진적으로 개혁할 것을 촉구하였다. 개혁에 대한 요구가 거세게 일어나자, 프랑스 왕실은 1525년부터 개혁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최초 루터주의자 쟝 발리에르(Jean Vallière)가 산 채로 화형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브레소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며, 개혁주의적 친구들에게 더 이상 자신의 교구에서 설교하지 말도록 금지하였다. 그러나 파렐은 그런 금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복음주의 설교를 계속하였다. 그 후에 브리소네는 지역 공의회(synod)를 소집하여 루터의 저작들을 정죄하였고, 연옥과 성인 숭배, 마리아 숭배 등을 비판하는 설교를 하는 사제들을 책망하였다.

 

하지만 브리소네는 소르본느에서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프랑수와 1세는 그를 투옥시킨다. 그러자 르페브르와 그의 제자들은 스트라스부르그로 도주하게 된다. 그리고 남이 있는 사람들은 1546년에 비밀리에 모(Meaux) 지역에 최초로 개혁교회를 세우게 된다. 그러나 얼마 후 박해로 인하여 폐쇄되었다. 불행한 것은 개신교의 자유를 일부 허락한 낭트 칙령이 취소되면서 프랑스 내 모든 개신교회들은 다 파괴되었기에 오늘날  건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5.화란 장로교회

 

아브라함 카이퍼의 교회론

카이퍼는 당시 국가교회에 대해서 매우 실망했다. 그는 말하기를 현대 기독교 국가는 신앙적인 것이 10퍼센트라면 90퍼센트가 철학으로 혼합되어 옛날 이방인의 속성을 그대로 갖고 있는데, 그 속성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에 잠입해 들어와서 그 교회를 파괴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카이퍼가 실망한 대로 화란국가교회인 개혁교회는 정통신앙에서 한참 벗어나서 현대주의적인 불신앙 풍조의 온상이었다. 즉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서 카이퍼는 참된 교회란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가입시키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다. 카이퍼는 하나님의 선택을 교회의 근본으로 보았다. 사람은 그 영혼이 본질이기 때문에, 택함 받은 사람들이 참된 교회를 구성하며, 그 안에서 교회라고 알려진 가시적인 종교 조직체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실제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거기 택함 받은 자들이 있기에 교회라고 한다. 교회는 조직적이고 기구로서의 교회도 중요하지만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선포되고 성례가 바로 집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카이퍼는 교인들을 훈련시키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기능이라고 인정했으나 그것이 필요 불가결한 특징으로 보지는 않았다.

카이퍼는 교회의 규례와 관리에 대해서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그 당시 화란에서는,모든 국민은 국가교회의 일원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이에 대해 카이퍼는 이런 유의 낙관주의 사상을 강력히 반대했다. 동시에 카이퍼는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선언한 사람들의 사회로 만든다는 견해도 수용하지 않았다. 카이퍼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누구나 회원이 되는 것이지 기구적인 교회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듯이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한 카이퍼는 교회가 지역사회의 중심이 되는 것을 장려했다. 또 교회는 그 지역의 회중을 섬기고 봉사해야 한다고 했다. 카이퍼는 지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 집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역을 성취하는 1차 도구로 생각했다. 

카이퍼는 생각하기를 민주국가를 지향하는 주권재민설(主權在民說, Popular Sovereignty)이 교회에 적용되는 것을 반대했다. 왜냐하면 교회는 신자들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며, 교회의 근원을 통제하는 구속력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고 했다. 

카이퍼는 교인들이 교회 일을 주관하는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신념을 가진 것이 불란서혁명 사상과 주권재민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또 그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절대적 지배를 받는 엄격한 영적 군주국이다’라고 했다.비록 카이퍼가 교회를 영적 군주국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 목적을 위해서 세우신 직분자를 통해서 그 분의 교회를 다스린다고 했다. 

그런데 그 직분자들은 교회의 관리자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종이다. 

성도들은 장로 중심의 조직체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며 거기서 선택된 장로들이 권위를 행사하며 교인들을 훈련시킨다. 목사는 교육시키는 장로이며, 지도력을 은사로 받는 평신도들이 장로들을 견제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등급 매기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시다. 집사들은 성도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해결해주는 책임이 있다. 그러나 집사들이 장로보다 낮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의 봉사를 실천한다.

참된 교회는 성직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목사들이 서열을 주장할 여지가 없다.성도들은 목사의 가르침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성직자이며 영적인 분별력을 행사해야 하기 때문이라 했다.

그러기에 평신도들은 태만하거나 교리적으로 잘못 가르치는 목사를 항거할 수 있다고 했다. 

카이퍼의 교회관리지침은 화란의 국가교회인 개혁교회를 비판하고 참된 개혁교회를 만들기 위한 충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특히 카이퍼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는 성직자란 말은 종교개혁의 만인제사장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카이퍼의 사상은 영역 주권 사상에 기초한다. 그는 가정과 교회와 국가는 각각 고유한 책임 영역이 있고, 각 영역에 대한 주권은 하나님으로부터 유해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상에 근거하여, 정치, 경제, 신앙 등 다양한 영역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업무와 영역이 있으므로 상호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역 주권 사상에 기초하여, 그는 정부의 지배로부터 교회의 자유와 생의 모든 영역에서 칼빈주의 원리를 실천할 것을 주장하였다.

 

6.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존 낙스의 교회론

 칼빈의 도움으로 낙스는 제네바에서 영국 피난민들을 섬기며, 교회 직분을 목사, 장로, 집사로 나누고 평등과 자율과 연합을 근간으로 한 장로정치를 시행했다.
그러던 중 낙스는 세인드 앤드류스, 스터링, 에딘버러, 퍼스 등지에서 개혁교회가 비밀리에 형성돼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1555년 은밀히 귀국해 전국을 순회하며 가톨릭교회의 교직 제도와 미사 등을 비판하며 종교개혁 사상을 고무했다. 이에 스코틀랜드 교회 당국은 낙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를 체포하려 했다. 그리하여 낙스는 1556년 제네바로 돌아오지만, 소위 ‘종교개혁 추진 동맹’(Lord of Congregation)이라 불리는 스코틀랜드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1557년 12월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회중을 위하여” 모든 권력, 재산, 생명을 바치겠다고 엄숙하게 선언하는 한편, 낙스의 편에 서서 스코틀랜드 교회의 개혁을 이루겠다고 다짐하는 〈제1 스코틀랜드 언약〉(The First Scottish Covenant)을 맺었다. 그리고 그들은 낙스의 귀국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런 와중에 “피의 메리(Bloody Mary)”라고 불리던 영국의 메리 여왕이 사망했으며 이후 시행된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관용정책의 영향으로 스코틀랜드에서도 개신교에 개한 핍박이 누그러졌다. 당국은 민심 이반을 막기 위해서 제한적인 종교관용을 선포했던 것이다. 이에 낙스는 1559년 5월 2일 귀국해서 스코틀랜드에 팽배한 미신과 우상 숭배, 폭정을 제거할 것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내전과 낙스의 스코틀랜드 개혁

 

낙스와 종교개혁자들이 가는 곳마다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당시 섭정이었던 기즈의 메리(Mary of Guise)는 종교개혁자들을 박해했다. 종교관용 정책을 어긴 당국에 분노한 군중이 3개의 수도원을 약탈하고 교회당을 파괴하고 왕궁을 불태우는 등 강경 대응에 나서면서 프랑스의 지지를 받는 섭정 측과 영국의 지원을 받던 종교개혁자 사이에 내전이 발생했다.

그러던 중 아가일의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 경, 레싱톤의 메이트랜드 등 정계 주도 인사들이 섭정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종교개혁자 진영에 합류했다. 그 결과, 기즈의 메리는 10월 섭정에서 물러났다. 이에 힘을 얻은 존 낙스 일행은 설교 운동에 박차를 가했으며, 1560년 1월 엘리자베스 여왕이 배와 군대를 보내 종교개혁자들을 지원해 가톨릭교회의 중심지인 리스를 공격해 함락시키면서 스코틀랜드는 종교개혁자들의 수중에 들어오게 됐다.

그해 8월 낙스 일행은 의회를 소집해 가톨릭교회의 모든 집회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프랑스와의 외교 단절을 선언하는 등 종교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우선, 교황의 관할권을 폐기하고, 미사를 금하고, 이를 세 번 이상 위반할 시 사형에 처하기로 했다. 또한 계급적인 교회 제도의 악습과 오류를 비판하고, 교육 개혁과 빈민 구제를 결의했다. 이에 대해, 권징서와 신앙고백서를 마련하기 위해 낙스를 비롯해 윌록(John Willock), 스포티스우드(John Spottiswood), 더글라스(John Douglas), 로우(John Row) 등 6명으로 구성된 신조작성위원회를 구성했다.

 

신조작성위원회는 4일 만에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 Confession)을 작성했다. 25개 조항으로 구성된 신앙고백서는 의회의 승인을 얻어 스코틀랜드의 신앙고백으로 채택되었다. 이 신앙고백서는 성경 해석과 교회론에서 칼빈의 가르침을 채택했다. 신앙고백서는 성경이 교회의 권위가 아닌 성령의 조명 가운데 해석되어야 하며, 성경만이 무오하고 절대적 권위를 가진다고 진술하고 있다. 또한 교회 의식 가운데 미신적인 것이 많으므로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은 모두 제거할 것을 주장하며, 칼빈의 가르침대로 성찬을 영적 임재로 해석했다. 이어 1561년 12월 5일 낙스는 5명의 목사와 36명의 장로와 함께 스코틀랜드장로교총회를 조직해, 스코틀랜드 역사상 최초의 장로교 총회가 시작됐다.

 

이 같은 스코틀랜드에서의 개혁운동은 후일 장로교로 발전했고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지로 전파되어 그 곳에 장로교회가 세워졌다. 또 미국, 호주, 캐나다 장로교회가 1880년대 이후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함으로써 한국에 장로교회가 설립됐다. 이런 점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한국 장로교회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다.

 

 

7.영국 청교도와 장로정치:

이와 같이 청교도들은 예배의 원리로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 한 분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며, 인간이 고안한 예배를 금하며,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예배하된 특별히 주일을 구별하여 예배할 것을 주장하였다. 청교도들의 '성경에 명한 것만을 예배의 내용으로 해야 한다'는 사상은 개혁주의 신학 전통에 따른 것으로, 현대 개혁주의 교회의 예배 모범이 되고 있다.

 

8.미국 장로교회

분리주의자들은 신앙적인 자유에 기초하여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보장하는 국가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비분리주의자들은 성경에 근거하여 거룩함과 정의가 다스리는  개혁된 정부와 교회를 세우고자 하였다.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이 채택한 교회정부 형태는 일반적으로 회중정치라고 부른다.. 회중정치주의자들은 지역 교회의 자율성과 교직자와 교회 사이의 평등성을 강조하며, 장로교회주의자들은 교회의 자율성과 평등성 외에 교회 간의 연합을 강조한다. 학자들은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정부 형태를 장로교적 회중정치, 또는 회중교회적 장로정치라고도 부른다.. 청교도들은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우러러보게 될 모범적인 사회, 곧 '언덕 위의 도시'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미국 장로교회 운동은 '미국 장로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랜시스 매케미에 의하여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미국 최초의 노회인 필라델피아노회는.. 장로교회의 특성인 복수주의와 양극성을 예견하면서, 두 개의 서로 다른 전통..에 의하여 세워졌다.. 모든 권위의 순서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성경 교리가 가장 잘 함축된 것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생활과 신앙의 규범으로 삼았다.

 

장로교회는 신앙의 주관적인 면을 강조하는 신령주의자와 객관적인 면을 강조하는 자들 사이에서 중간적인 입장을 추구하여 왔다.. 영국 또는 뉴잉글랜드 청교도 배경을 갖는 장로교도들은 개인적 신앙을 추구하지만, 교직자의 권위를 배척하는 저교회(low church)적 입장을 취한 반면, 스코틀랜드 계통의 장로교도들은 신앙의 객관성과 권위, 유산을 강조하여 고교회(high church)적 입장을 취하였다.. 전자의 전통은 18세기.. 신파 19세기 진보파로 이어졌고, 고교회 전통은 18세기에 구파 또는 19세기의 보수파로 이어졌다.

 

미국에서 1730년대 중반에서 1740년대 초반 사이에 일어난 대표적인 사건은 칼빈주의자들, 특히 장로교도에 의해 일어난 대각성운동이다. 

 

미국 장로교회는 이민자 가운데 가장 활동적이었던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계통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스코틀랜드 계약파의 후손으로 장로교회의 예배와 정치만을 수용하고 개혁주의적인 신앙 수호에 앞장섰다. 북부에는 청교도적인 배경의 장로교회들, 남부에는 위그노 계통의 장로교도, 서부에는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계통의 장로교도들이 교회를 세움으로, 1776년 미국 장로교회는 500여 개가 넘게 되었다. 장로교도들은 뉴욕에서 새로운 헌법에 따라 연방 의회가 한창 열리던 1789년 5월 21일 필라델피아 제2교회에서 미국 최초로 장로교 총회를 조직하였다.. 이와 같이 장로교회는 총회의 조직으로 미국의 중심적인 교단이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장로교회는 미국 정신계의 지도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다.

 

9.미국 장로교: 진보와 보수:

18세기의 제1차 대각성운동이 회중교도와 성공회교도와 장로교도 중심이었다면, 19세기의 제2차 대각성운동은 장로교도와 침례교도와 감리교도 중심이었다. 서부 개척과 선교지에서의 연합 계획이 성사되면서 선교 운동은 효과적으로 운영되었고, 장로교회는 크게 성장하였다.

알렉산더와 함께 리빙스턴 신학을 세운 사무엘 밀러는 장로교회 예배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①장로교회는 기도문을 가지고 기도하지 않는다.

②성일을 지키지 않는다.

③대부모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④세례를 베풀면서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십자가 표시를 긋는 것을 금한다.

⑤성경적 근거가 없는 견신례를 부인하고, 성찬상 앞에 무릎 꿇는 것을 반대한다.

⑥성찬의 사적인 시행을 반대한다.

1838년 진보파는 총회에 회원권을 요청하였으나 보수파가 묵살하자, 그들을 떠나 새로운 총회를 구성하였다. 결국 미국 장로교 총회는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고, 미국의 남부와 북동부 지역은 보수파가, 북부 지역은 진보파가 득세하였다.

 

10.자유주의 신학의 도전:

미국 교회의 몰락은 진화론의 도전과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이 장로교를 우측에서 공격해 왔다면, 주관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신비주의가 좌측에서 공격해 왔다. 성령의 은사와 방언을 강조하는 신비주의는 20세기 초에 오순절 운동이라는 모습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한편 미국 장로교회는 세대주의의 도전을 받아 성경 해석의 혼란을 빚게 되었다. 미국 장로교회를 대표하는 두 개의 교단. 대형 교단이지만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연합장로교회와 보수적인 신앙을 유지하면서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미국장로교회가 바로 그것이다.

 

11.한국 장로교회:

 한국의 선교는 두 가지 면에서 특이한 점이 있다. 첫째는 선교사보다 성경이 먼저 들어온 것과, 다음으로는 한국인에 의해 최초로 교회가 세워진 점이다. 1907년은 대부흥운동 때문만이 아니라 교회 조직 면에서도 한국교회사에 기억될 만한 해였다.

1.한국 장로교 역사상 최초로 노회가 조직되었다.

2.최초로 한인 목사가 배출되었다.

3.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한 해였다.

  신사참배와 함께 한국 장로교회의 발전에 장애가 된 것은 공산주의 운동, 신비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이었다. 수백만의 신자들이 모이는 대중 집회가 성공을 거두자, 교회는 수적인 확장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한국교회가 이처럼 사회 문제에 대해 통일된 입장을 취하지 못한 것은 사회 참여에 대한 인식 차이에 있었다. 보주주의자들은 사회 참여를 정교 분리의 원칙에 어긋난 것으로 보았고, 진보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시대적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장로교회는 성장이 지체된 침체시기를 맞았다. 이는 앞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교회가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데 대한 하나님의 징계요,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한 결과이기도 하다. 교회연합운동은 교회가 하나 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한국 교회가 다시 한번 부흥을 체험하고 영적인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여야 할 것이다.

 

 


V. 교회의 직원
    항존직과 임시직
    1. 임시직: 
       가. 사도들: 
           사도들이란 12사도와 바울
          1).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사명을 받았다.  마가 3:14, 갈 1:1
          2).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었다. 고린도전서 9:1
          3). 자신이 성령으로 감동된 것을 인식하는 사람이었다.  고전 2:13 살전 4:8
          4). 그들의 멧세지를 이적과 기적으로 확증지을 수 있었음. 고후 12:12, 히 2:4,
          5. 그들의 수고함에 하나님으로부터 축복 받은 증거가 있는 사람 고전 9:1, 고후 3:2, 갈 2;8
     
      나. 선지자:
         신약에도 선지자란 말이 나온다. 가령, 행 11:28, 행 13:1-2, 행 15:32, 고전 12:10, 고전 13:2, 고전 14:3, 엡 2;20,

       엡 4:11.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었다.


     


다. 전도자:
        신약에 “전도자” 라는 말이 나오는데. 예를 들면,  행 21:8, 엡 4:11, 딤후 4:5 등.
        빌립, 마가, 디도나 디모데가 모두 전도자


 


   2. 항존직
      가. 장로
      행 11:30, 14:23, 15:2, 6, 22  16:5, 20:17, 21:18 등에 보면, 장로와 목사가 상호 같이 사용됩니다.  행 20:17, 28, 딤전 3:1, 5:17, 19, 딛 1:5,7 벧전 5:1-2  두 직분이 서로 혼동되어 사용되지만 장로는 주로 나이에 중점을 두고 목사는 교회를 돌보는 직책에 중점을 두고 있음. 


    


나. 교사
      처음에는 교사직이 없었는데 이유는  사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후에 교리를 바로 가르칠 교사라는 직책이 필요하게 되었음 . 엡 4:11,  딤전 5;17, 딤후 2:2. 등이 말하고 있는데 이단들이 침투하자 전문적으로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필요하였다.  계 2:1, 8, 12, 18, 3:1, 7, 14 


   


다. 집사
       빌 1:1, 딤전 3:8, 10, 12,  사도행전 6:1-6에 초대교회의 첫 7 집사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deacon” 은 dia, con. os 등 세 단어의 합성어로서 먼지 속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어원을 갖고 있다.


 


  3. 교회 항존직의 부르심
     교회의 항존직에는 두 가지 부르심이 있어야 하는데  외적인 부름과 내적인 부름. 
교회의 항존직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내적인 부름이 있어야하고 또한 외적인 부름이 있어야 합니다.  내적인 부름은 하늘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말이 아니고  본인이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직분을 받아 충성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그런 자질을 구비하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내적인 부름입니다.  본인이 그런 마음만 있다고 해서 되어 지는 것은 아니라 자격도 갖추어져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외적인 부름이란 교회에서 그의 신앙과 인격적인 자질을 인정하여 그를 직원으로 선출해 주는 것들 말합니다.  이런 두 가지 부름이 있어야 교회의 직원으로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일꾼을 세울 때 이런 자격을 따지는 일은 매우 중요한데 본인이 교회에서 직원으로 봉사하겠다는 마음만으로 되어 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또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 인격이 훌륭해 보인다고 해서 되어 지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성경은 많이 안다고 해도 머리로만 알 뿐 심령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교회의 직원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6장의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는 모두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믿는 도리를 알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인격자들이었고 이런 사람들이 사도들의 임명으로 교회의 일을 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행 6:2-6, 행 14:23


   4. 임직과 안수
     지교회에서 직책을 부여하는 예식은 임직식과 안수 이며,  임직과 안수는 항상 동시에 행해지는 예식입니다.  가령 임직을 먼저 받고 나중에 기회 있을 때에 안수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임직에는 안수가 따르는데 안수 한다는 말은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은사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고 구원 여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안수 하는 일을 구원과 연관시키려 하지만 잘 못된 생각입니다.  구원은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는 정도의 안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보다는 차원이 높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 지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사울 같은 사람은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임직 식을 받고 기름으로 안수를 받았지만 결코 구원받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세례가 구원을 받는 방법이거나 구원을 인치는 행사로 오해하고 있는 분들이 많지만  세례를 받는다고 구원이 자동적으로 임하는 것도 아니고 또 세례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세례는 단지 속 사람이 회개하고 거듭났을 때 그 거듭나서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되는 사실을 겉으로 나타내 주는 표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속 사람이 중생하지 않은 상태로 세례를 받으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구약 때는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임직할 때 기름으로 안수 하였지만 신약시대에는 행 6:6, 행 13:3, 딤전 4:14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손을 머리에 얹어 안수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안수의 원래의 의미가 점점 잊혀져 가고 있고 단지 하나의 의식 정도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VI. 교회의 치리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에서는 성도들을 관할할 치리회가 여럿 있습니다.   당회가 있고, 노회가 있고, 대회, 대회위에는 총회라는 기관이 있는데 이들 기관들은 세상적인 권력 기관과 다릅니다. 이들은 어디 까지나 주의 몸된 교회, 즉 성도들을 세워 나가기 위한 목적을 갖습니다.  당회는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되는데 목사는 교회의 대표자로서 노회의 관할 하에 있으며 노회에서 안수 받고 노회의 지도를 받게 되고 장로는 지 교회의 교인들의 대표자로서 당회에서 안수 받고 당회의 지도를 받으며 목사나 장로, 안수집사 등의 직원 선출은 세례교인들이 모인 교인 총회 (공동의회)에서 3분의2 이상의 득표로 선출됩니다. 


 


    만일, 지 교회에서 당회원간에 문제가 생기면, 상회인 노회의 지도를 받는데 흔히 노회의 시찰회에서 일을 처리합니다. 노회나 대회, 총회에는 이런 일을 대비한 기관들을 두고 있습니다.  노회는 양자의 소송내용을 모두 정중하게 듣고 공평하게 처리해야 하며 어느 한편의 이익을 두둔해서는 안됩니다.  요즘 문제는 여기에서 기인하는데. 노회 시찰부나 재판국에서 어느 한 편만 유리하게 편을 들어주어 교회의 분쟁이 해결되지는 커녕 더욱 악화되고 결국은 교회 분열이라는 슬픈 결과를 낳게 되는 일을 많이 봅니다.  만일 교회가 어느 교단에도 가입하지 않고 독립해 있다면 이런 때에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상회 (上會, higher court) 가 없으니 호소할 곳이 없고 개 교회가 혼자서 처리해야 하니 일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총회가 여럿 모이면 교단 협의회를 만들게 되는데 가령 미국의 보수 장로교단과 개혁교단이 합하여 “북미주 보수 장로교단 및 개혁교단 협의희” (NAPARC) 를 1975년에 만든 것 같은 것이나 비교적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여러 교단 총회가 합하여 1948년에 화란의 Amsterdam에서 WCC 라는 세계 교회 협의회를 만든 것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오늘에도 개혁주의 입장에서 볼때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WCC 나 그 산하의 NCC 같은 기구는 성경을 바로 믿으려는 NAPARC 와 대립하여 있어서 각자 자기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WCC 는 회원 교단이 130 여개가 되는데 반하여 보수 개혁교단인 NAPARC 는 7개에 불과하고 그중에서 CRC라는 화란계 교단은 자유화 되면서 NAPARC 의 정 회원권 (正會員權)을 박탈당하여 CRC 에 속한 많은 한인 회원들은 KCPC (Korean Christian Presbyterian Church) 라는 교단을 창설하여 교회 생활하고 있습니다.  미국 회원들은 CRC에서 탈퇴하여  ARC 즉 Allied Reformed Church 라는 교단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이 머리인 교회는 점점 말씀에서 불순종하게 되어 분열되는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VII. 교회의 권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창설하시고 또한 필요한 권세와 권위를 부여하셨는데 그는 왕으로, 교회의 머리로, 영적인 세계에서 영적으로 백성을 다르시도록 이런 권세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맬 권세”와 “풀 권세”를 주었는데  마태복음 16:18에 보면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푼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용인할 일과 금할 일등을 결정할 권세를 사도들에게 주었고 그 권세는 하나님의 교회에 주셨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직원들은 교인들을 통해서 선출하지만 직원들의 권세는 교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교회의 권세
      그리스도가 교회에 부여하는 권세는 영적권세다.
     교회의 권세는 어디까지나 영적인데 이 말은 보이지 않게 영적으로만 역사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동시에 다스리신다는 말입니다.
가령, 집사들의 사역은 대부분 보이는 육적인 일인 반면, 목사의 일은 말씀을 통해서 사역하는 무형적이며 영적인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개교회의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서 폭력 사용은 금물이지만 기독교 전체가 악의 세력에 위협을 받을 때 혹은 종교개혁자들처럼  마땅히  십자가의 군병으로 무력으로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개 교회에서 행정적인 문제나 금전 문제로 인한 폭력 해결은 금하며 어디 까지나 교회의 치리를 통하여 평화적으로 은혜롭게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권세는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일과  말씀에 의거해서 권세를 행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교회의 권세의 종류
      그리스도가 왕의 직분, 선지자의 직분, 제사장의 직분 등 3중직을 갖고 있듯, 교회는 3중직을 갖고 있습니다.
     1).  가르치는 권세
          교회는 진리를 전승 받았고 말씀에 나타난 진리를 순수하게 보존하여 대대에 계승하며 불신앙의 풍조와 싸우며 진리를 사수할 엄숙한 책임과 권세가 교회에 있습니다.. 딤전 1:3-4 나 딤후 1:13, 딛 1:9-11 등이 이를 증명합니다.  죄인이 죄를 회개하도록 말씀을 순수하게 전하여 만방이 복음을 듣도록 해야 하는데 가령 고후 5:20 이나, 딤전 4:13, 딤후 2:15 등에서 그런 권세가 있음을 읽어봅니다. 또한 교회는 신앙고백서나 신경(信經)을 만들어서 믿는 도리를 바로 전해야 할 권세가 있습니다. 세 번째로, 교회는 목회자들을 양성할 권세가 있다.  딤후 2:2.


    2). 치리권.
        교회의 치리권은 두가지가 있는데
       ( 1) 조정하는 권세
           하나님은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고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4:33).  교회에서는 모든 일을 질서 있고 정             중하게 해야 하는데  교회를 다스릴 규정을 제정하여 주셨습니다.
       ( 2).권징의 시행.
            교회의 순결을 위해서 권징을 행해야 합니다.  마태 16:19, 마 18:18, 요 20:23, 고전 5:2, 7, 13, 고후 2;5-7  


  


3). 구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할 때 말씀을 전하면서 귀신을 내 쫓는 권세를 주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런 권세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어서 그들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했습니다.. 이런 은사는 성경 완성과 함께 중지되어 오늘에 와서는 주로 빈자를 구제하는 일로 제한되게 되었다.  행 4:34에 보면, 초대교회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의 대상으로 알고 일한 것을 알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빈자를 구제하는 일을 중요시하고 있다. 행 11:29,  행 20:35,  고전 16:1-2,  고후 9:1,6-7,  12-14,  갈 2:10, 딤전 5:10 



VIII. 은혜의 방편
       은혜의 방편은 말씀과 성례등 두 가지.
      1 말씀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편인데,  말씀이 은혜의 방편이라는 말은  기록된 성경 말씀을 말함이며 새로 오는 어떤 특별한 계시를 말함이 결코 아닙니다. 흔히들 어떤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분들이 많지만 바른 신앙은 아닙니다.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말씀은 비단 교회에서만 아니라 어디에서든지 모든 성도들을 통해서 역사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성례가 은혜의 방편이라는 말은 성례 식을 할 때에 말씀이 동반해야 함으로 그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은혜를 받는다는 말인데 말씀은 어디서나 증거할 수 있지만 성례 식은 반드시 자격 있는 성직자가 집전할 것이며 또한 성례식은 교회에서만 되어 지는 행사입니다.


      


 1). 말씀과 성령과의 관계
        Pelagius 파 , 18세기 19세기의 합리주의자들은 말하기를, 성령의 도움이 필요없이 지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면 회개의 결과가 온다고 믿는가 하면, 또한 도덕폐기론자들 (Antinomians)은 말하기를 성령의 도움만 있으면 된다고 가르치는데 외부로부터의 말씀 선포는 필요 없고 내부에서 나오는 음성, 내부의 빛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적인 가르침은 말씀은 성령의 도구이며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그 말씀이 죄인을 회개시키는 역사를 가져올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말씀은 성령의 역사와 같이 역사할 때 열매를 맺게 됩니다.


    


  2).율법과 복음과의 관계
      율법과 복음을  서로 적대시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이 없이 복음을 알 수 없고 복음이 없이 율법을 알 수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복음을 믿을 것을 말하고 있고, 복음은 구약의 율법이 우리 생활에서 성취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율법과 복음 혹은 은혜의 관계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이 없이는 죄인이 죄인된 것을 알 수 없으며 따라서 복음의 필요성을 모릅니다.  신약성경에서 율법을 상당히 중요시 하는 것은 다음 신약구절을 미루어 알수 있습니다, 즉, 마태 5;17-19, 롬 13:10, 엡 6:2, 
야고보서 2:8-11, 요일 3:4 등


  


   3). 율법의 역할
     이 세상에서 죄악을 억제하고 선을 권장하는 것이 율법이 하는 일이지만  그 보다도 크게 세 가지를 하는데 첫째, 윱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인됨을 깨닫게 해 줍니다.  로마서 3:20을 보십시오.  둘째, 그래서 자신이 율법을 지키지 못함을 깨닫고 몽학 선생인 그리스도에게 스스로 나아가게 해 줍니다. 갈 3:24.을 참고하십시오.  셋째, 생활의 길잡이를 제공해 줍니다. 율법은 우리가 살아 갈 생활의 법칙입니다.


  


  4). 복음의 역할
     구약의 율법이 제시한 구원의 길을 그리스도의 계시의 말씀으로 밝히 보여주는 구실을
하며 죄인에게 믿음과 회개로 그리스도에게 나아 오라고 권면하며  진정으로 믿고 회개하는 이들에게 현재와 미래에 걸처서 모든 구원의 축복을 약속해 주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말입니다.



      2. 성례
   천주교에는 성례의 종류가  영세(세례), 견진, 미사, 혼인, 신품, 고해, 종부 등 일곱 가지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성례는 두 가지 뿐입니다.  세례 와 성찬입니다. 세례는 구약의 할례에 해당하는 것이며 성찬은 구약의 유월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양피를 베어 할례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 징표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양피를 베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고 그 전에 이미 거듭나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는데 할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된 징표를 보여 준 것 뿐입니다. 애급의 장자들이 죽던 그 날 밤,  이스라엘백성은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서 한 사람도 인명의 손실이 없이 보존되었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그 죽음의 천사가 지나간 것은 문설주의 양의 피를 보았기 때문인데 양의 피가 무슨 대단한 위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상징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을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유월절을 대신하여 신약시대에는 성찬식을 행합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일을 생각하며 더욱 더 믿음을 돈독히 하여 주님 앞에 충성스럽게 생활하겠다고 다짐하는 예식이 바로 성찬 예식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나타 난 말씀은 우리를 위해서 살을 찢기고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생각하면서 주님에게 충성하려는 각오를 더 하는 마음으로 떡을 받습니다. 또한 잔을 받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성찬식에 참여 할 수 있으므로 어린이는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성찬식에 대해서 천주교에서는 떡과 포도즙이 실제로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이를 화체설 (化體說transubstantiation) 이라고 합니다.   성찬식 할 때 마다  예수 님이 죽는다고 이들은 가르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번에 (單番)에 자기 몸을 드렸다” 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여러 번 드릴 것을 한번으로 대신했다는 말입니다. 구약에서는 같은 제사를 여러 번 되풀이해서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루터 파에서는 성찬식 때 예수님의 피와 살이 성찬상에 공존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공존설(共存說 consubstantiation)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개혁파에서는 신비설(神秘說) 혹은 “영적 임재설” 을 주장합니다. 즉 성찬식 때 “떡과 잔을 통해서 또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신비스럽게 연합된 것을 확인하는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은혜가 임한다” 고 가르칩니다. 이것을 신비설 이라고 합니다.   성찬식에는 개방식과 폐쇄식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다른 교회 사람들이라고 교파에 관계없이 모두 참여하도록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성경적으로 믿는 사람, 즉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만 참여 시킵니다. 이를 폐쇄적 성찬식 이라고 합니다. 개혁파 교회는 대부분 폐쇄적인 성찬식 제도를 택하고 자유주의 교회에서는 개방식 성찬식 제도를 택합니다.  성찬식은 은밀한 죄를 짓거나 재판에 계류 중인 사람, 죄를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본 교회 세례 교인이라도 성찬 예식에 참여 할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을 보면 분변하지 못하고 즉 준비 없이 성찬식에 참여 했다가 죽은 사람들이 있는 것은 경종을 울려 줍니다.


 


     세례란 소속교회의 목사가 베푸는 의식인데  속 사람이 중생한 것을 겉으로 나타내 주는 표에 불과합니다 그것 자체가 구원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세례를 받는 다고 자동적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거짓으로 신앙고백하여 세례를 받아도 그 세례는 아무 효과도 없으며 아무런 축복도 없게 됩니다.  침례교에서는 어린이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습니다 이유는 아직도 믿는 도리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파에서는 어린애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근거는  창세기 17장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어약을 맺을 때 아브라함과 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녀와도 언약을 맺은 언약의 백성이므로 그 말씀에 근거하여 부모중 어느 한 분만 믿어도 유아 세례를 베풀게 되는데,  이때 부모는 하나님 앞과 회중 앞에서 그 어린이를 위해서, 또 그 어린이와 함께 기도할 것을 서약하며 그가 15세가 되어 다시 회중 앞에서와 하나님 앞에 서서 신앙을 확증하게 되는데 이를 입교(入敎, confirmation)라고 합니다. 


 


세례는 반드시 구원의 필수 조건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지 않아도 속사람이 중생했다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례식은 모두 성직자가 집례하며 성직자가 아닌 분이 집례할 수 없습니다.  옛날 1880년대 영국에서 출현한 세대주의의 창시자 John Nelson Darby 라는 사람은 Plymouth Brethren 이라는 형제교회를 만들어서 기성교회의 모든 체제를 부인하여  교인들끼리 서로 돌아가면서 성찬식을 베풀었는데 이는 비 성경적입니다.  오늘의 세대주의는 이를 시정하여 개 교인이 집전하는 폐단을 시정한 것은 다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   칼빈의 교회론

역동적인 교회
 
 칼빈이 성경에서 발견한 교회관은 이처럼 힘있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오류를 극복하고자 초대교회에서 찾아낸“역동성”에 있었다. 그리하여 칼빈은 교회란‘역동적’인(dynamic) 것이 특징이며,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도상의 공동체로서 세상 앞에 하나님을 보여주는 기관이요(a show in progress),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구원의 여정을 보여주는 곳(a traveling salvation show)이라고 보았다.
 
어려운 정치적 박해 상황에서 목회하면서 교회의 회복을 꿈꾸고 노력하던 칼빈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신뢰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개신교 교회가 공적으로 모임을 허락받기에는 불가능하던 상황이었음을 칼빈은 잘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참된 교회가 본질을 회복하고 다시 돌이킬 수 있다는 확신은 비로소 종교개혁에서 발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교회를 다시 모으시는데, 이것은 마치 바빌로니아에서 돌아온 이후에 성전에서 참된 교회가 회복하는 것과 같다. 고난을 당하고 박해 속에서 매일 같이 피를 흘리고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하나된 몸은 다시 세워질 것이요, 순전한 교회가 서게 될 것이다.

칼빈의 모든 노력들을 바로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소망에 근거하고 있었다. 다윗과 같이, 그리고 포로된 백성들과 같이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면서, 칼빈은 당대 종교개혁의 모든 난관을 헤치고 교회의 전진을 거듭해 나가고자 도모했던 것이다. 교회는 항상 전진하면서 나아가는 것이다는 칼빈의 영적인 확신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높이 평가하고 본받아야할 안목이다. 칼빈은 교회라고 하는 특별한 기관은 정체된 교리적 조항으로 정형화시킬 것이 아니라, 역사라는 구체적 현장 속에서 전진해나가는 역동성(the Church in Progress)을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칼빈의 교회론은 그의 목회적 안목이 반영된 시편주석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그는 로마 카톨릭의 상하구조로 된 조직체로서 교회론을 개혁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 급진적 과격파들이 주장하는 자신들만을 분파적으로 강조하는 폐쇄된 교회론을 벗어나고자 했다. 제네바 교회와 프랑스 휴그노들의 개신교회는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야만 했었다. 그들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멸절 시키고자 창검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쳐들어오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특히,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계시의 원천으로서 교회”, 매일 일어나는 이 세상역사의 분요한 소동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참된 교회의 첫 번 째 표지로서 교리 (doctrina)와 선포 (praedicatio)라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들려지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지 참된 교회를 발견한다” 칼빈이 제시한 성경적인 신앙 교훈 중에서 아주 탁월한 신학적인 개념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과 이 우주 만물들에 대한 포괄적인 세계관이다. 칼빈은 우주 공간에 널리 펼쳐져 있는 현실 세상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극장’(theater as the show of God’s glory)이라고 생각하였다. 
 
선택받은 언약공동체
 
칼빈의 교회론의 기초는 선택론이다. 이것은 <기독교강요>에도 들어있고, 성경 주석에서도 자주 강조된 것으로, 칼빈이 이해하는 교회란 언약공동체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자신을 섬기고 따르기를 원하셨다(롬 11:36). 하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 않으므로(롬 1:18-2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소수의 사람들을 택하셔서 이를 수행하게 하셨다. 칼빈은 바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 즉 교회와 거룩한 언약관계를 맺으셨다고 확신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교회를 선택하시고 지상에서 천국의 생활을 인도해 나가도록 영적인 언약을맺으셨다.

 교회는 언약의 공동체로서 두 가지 방식으로 드러난다고 칼빈은 정리하였다.
첫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상호 교통을 통해서 언약의 시행이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되는 장소로서 기능을 한다. 그리고 두 번 째로, 교회는 믿는 자들사이의 상호 결속을 하게 하므로서 전진하고 발전하게 한다. 이 언약적 기초가 확고하게 세워져 있기 때문에, 지상의 교회는 흔들리지 않고 발전하는 것이다.
 
교회의 영광은 이러한 영생의 언약을 교회에 부여하여 주신데서 찾아야 한다. 칼빈이 다시 발견한 교회의 영광이란 늘 나라의 빛과 광채가 교회를 통해서 어둠을 밝히 비춰주는데 있었고, 이것은 복음의 선포라는 사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교회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세와 친절하심과 의로우심을 드러내 보여주는 극장과 같은 곳이다. 마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여 아름다운 화음을 선사해 주듯이, 이 세상에서 교회라는 곳은 하나님이 자신을 찬양하도록 지정하고 세워놓은 거룩한 공동체라는 것이다.
 
 
부록

para church & local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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