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다섯 두루마리

다섯 두루마리(성문서)

호리홀리 2022. 5. 25. 19:13

 

          성문서:아가서 룻기 애가서 에스더서

 

                     박인대교수

 

            (다섯 두루마리 중 전도서는 빠짐)

 

                                 아가서

 

 

 

 

 

이스라엘의 가장 큰 절기는 유월절이다. 우리가 누구인가하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절기이다. 언약백성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무교병과 포도주 넉잔, 식사 후 축제의 마무리는 아가서 낭독이다. 구원의 감사,감격,언약백성 삼으신 것에 대한 감사를 시작으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확인하는 아가서로 끝맺는다.

 

출애굽의 구원은 멀리 느껴지지만 아가서의 사랑은 가깝게 느껴진다. 하나님의 친밀감,관계성을 느낄 수 있다. 우리도 자주 아가서를 읽어야한다. 당신은 틀에 박힌 지루한 신앙생활이 이어지고 있는가? 아가서를 읽어야한다. 직분 때문에 신앙생활하는가? 기쁨이 사라져버렸는가? 아가서를 읽어라.

 

아가서의 해석은 다양하다. 초대교부 때부터 알레고리해석이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복음주의적 해석과 비평적인 해석은 극과 극을 이룬다. 그러나 그렇게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아가서는 히 “쉬르 하쉬림” “노래중의 노래”이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욥기 다음에 위치하지만 70인 역에서는 전도서 다음에 두고 있다. 영어와 한국어 성경은 이 배열을 따른 것이다.

 

아가서에는 하나님,여호와란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8:6절의 ‘여호와의 불‘은 히:’샬헤베트야‘이다. 해석은 맹렬한 불이다(KJV,RSV,NIV) 그러나 우리말 성경은 ’샬헤베트‘와 ’야‘를 나누어 두개의 단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히브리 원문은 한 단어이다. 또한 사랑도 “헤세드”가 아닌 “또디”(남녀의 사랑:,남성단수)를 쓰고 있다. 시적인 표현이며 헤세드를 암시하는 ‘또디’를 사용함으로 오히려 헤세드를 강조하고있는 것이다.

술람미여인은 언약백성과 교회로 솔로몬은 하나님에 대한 은유이다.

 

아가서의 특징

 

아가서는 히브리어 성경의 세 번째 부분인 성문서에 위치한다. 잠언-룻기-아가서-전도서-애가-에스더로 이어진다. 이 배열은 의도적이다.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현숙한 믿음의 여인을 묘사함으로 끝난다. 이어 룻기는 믿음의 여인인 룻을 통해서 다윗으로 이어진다.

 

그 다음 순서인 보아스와 룻의 열정적인 사랑과 같은 아가서가 이어진다. 또한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룻기부터 에스더까지 다섯두루마리로 분류하고 있다. 다섯두루마리는 절기때에 낭독되는 책이다. 아가서는 유월절에 ,룻기는 칠칠절에,전도서는 초막절에, 애가서는 성전 파괴를 애도하는 금식일(유다의 멸망일인 아브월 9일에),에스더서는 부림절에 낭독된다. 여기서 세권이 여성들의 사랑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경의 순서로 오늘날 잠언-전도서-아가의 순으로 된 것은 솔로몬을 통한 기록이라는 순서가 있다.

 

아가서 해석방법

 

아가서의 전통적 해석은 알레고리적 해석방법이다. 이스라엘역사와 결부시켜 해석 하기도 했고 등장인물 하나 하나를 해석하기도했다.( 마치 천로역정처럼) 이 해석은 기독교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로마의 히폴리투스(주후 약200년)는 4:5절의 두 가슴을 구약과 신약으로 해석했다.  오리게네스가 가장 위대한 알레고리 해석자이다. 오리겐은 신플라톤주의와 영지주의의 사상을 이어받아 영육의 이원론적인 해석을 했다. 신랑과 신부는 예수와 교회로 해석했다. 오리겐의 해석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일반적 해석으로 여겨져 왔다. 루터는 알레고리해석을 하지 않았으나 알레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1:2절의 입맞춤을 하나님 말씀으로 1:5절의 검은 피부를 교회의 죄악으로 해석했다. 칼빈은 문법적해석과 역사적해석을 했다. 그러나 알레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17세기 개혁주의자들도 역사적 알레고리해석을 강조했다.  그러나 ‘브라이트 맨’은 구속사적으로 해석했다. 카토릭은 철저한 알레고리해석을 한다. 하여 술람미를 성모마리아로 해석한다.

19세기 중반에 와서 알레고리해석에 대한 반성이 크게 일어났다. 이원론적사상에 대한 반성과 영지주의적해석은 비난을 받았다.

현대적 해석방법중에 주목받는 것은 네레티브적 해석방법이다. 네레티브로 이루어진 성경을 그대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해석상의 어려움은 여전히 있는 것이다.

 

또한 시나 노래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으로 보지않기에 더욱 위험하다. 나는 개혁주의적방법인 성경전체의 해석방법인 기독론적해석과 언약적관계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성경은 언약관계를 결혼관계로 묘사해왔다. 출애굽기의 시내산언약은 피의 결혼식 장면을 통해서 하나님과 언약백성의 언약체결식을 보여준다.

 

호세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신약에 와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엡5:22-33절은 부부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로 묘사한다. 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신부된 언약백성이 먼저 사랑을 고백하며 역동적인 사랑을 찾아가는 모습을 통하여 언약백성들의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신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용

 

1장,게달의 장막

 

아가서는 언약백성과 하나님과의 사랑의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은 정체된 것이 아니라 발전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1단계는 미숙하고 단조롭다 그러나 원색적인 사랑이다. 서로 눈이 맞고 대화하고 상대방을 알고 싶은 그런 단계의 사랑이 아니다. 2절“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처음부터 다짜고짜 입맞추는 사랑이다. 사탕을 천천히 녹여먹는 사랑이 아니라 깨어먹고 삼켜버리는 사랑이다. 여자의 적극적고백으로 시작되는 사랑이다. 묵시문학의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3절에는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 기름은 “쉐멘” 이름은 “쉠”(전7:1)의 언어유희를 통해서 아름다움의 극치를 표현하고 있다.  4절에는 그야말로 미친사랑이다.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아가서의 사랑은 언약적 사랑인 헤세드를 뛰어 넘는 사랑이다. (호세아의 예) 만나자 마자 입맞추고 침궁으로 달려가는 역동적사랑이다.  정상적이 아니다. 그러나 아가서를 사실적으로 이해하면 큰 오류에 빠지게 된다.

 

여러분은 이런 사랑을 해 보았는가? 밤을 새워 기도해도 교회를 벗어나 집에 가고 싶지 않은 때, 몇날을 금식해도 너무너무 좋을 때 눈물,콧물을 다 쏟으며 고백하는 사랑. 몸을 흔들며 기도하고 미친 듯이 찬양하는 마치 엑스터시같은 사랑. 이런 사랑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무차별적인 사랑, 판타스틱한 사랑, 그러나 신비주의로 오해하지는 말라. 이런 사랑의 극치를 아가서는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내가 누구인데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가? 술람미 여인이 도데체 누구길래 솔로몬이 이렇게 사랑하는가? 솔로몬의 술람미여인의 사랑을 통해 보여주시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무차별적인 사랑. 우리는 도데체 누구인가?

 

5절의 “게달(케타르)의 장막”이다. 시120;4의 게달의 장막은 흰 사막에 검은 염소털의 모습같이 얼굴에 검은 반점, 햇볕에 그을린, 야생녀같이 막 자란, 오빠들 틈에 끼어 사내같이 막 자란 모습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가 중요하다.

 

우리가 사람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게달의 장막이란 세속적 평가에 기죽지 말라는 것이다.  솔로몬이 볼 때는 “솔로몬의 휘장”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휘장으로 여긴 것이다. 게달의 장막과 솔로몬의 휘장은 대조를 이룬다. 강조하려는 것은 게달의 장막에서 솔로몬의 휘장으로 바뀌는 신분상승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게달의 장막에서 솔로몬의 휘장으로 신분상승하는 것이다. 모압언약의 골자도 우리를 보배라고 하지 않는가. 마귀의 종노릇하던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는 것이다.

 

6절에 “어미의 아들”은 오빠를 가르킨다. 그들이 막 대했던 술람미, 포도원지기를 하며 염소털을 입고 포도원지기조차 힘들어하는 거친일에 익숙해있는 천한 나를 ,9절에는 “바로의 병거의 준마”로 표현한다.  10절엔“네 두 빰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하나님은 나를 너무너무 사랑하신다. 14절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 표현한다.

이 사랑이 영원해야 할텐데 솔로몬이 시골에 나와 잠시 사랑한 것인가? 혹은 술람미를 노리개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이사랑은 과연 어떻게 될까? 드디어 솔로몬은 왕의 식탁으로 술람미를 데리고 왔다. (12)그리고 사랑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2장,위기를 극복한 사랑

 

1:7-8에서 솔로몬은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양치기로 변장하여 술람미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2:1절에서 여인은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라고 선언한다. 나는 더 이상 게달의 장막이 아니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대답해야한다. 나는 보배이다. 동굴 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나는 못해 나는 게달의 장막이야 하면 안된다. 열등감,열등의식을 버려라, 기죽지마라,당당하라.

 

2절은 왕의 선언이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3절은 다시 여인의 고백이다. 그리고 4절에서, 왕은 여인을 잔치집으로 인도한다. “서프라이즈 파티”로 데려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 로구나” 내가 손님인 줄 알았는데 내 위에 깃대가 있는 것이다. 내가 주인이라는 것이다.

 

왕이 나를 보호하며 나를 여주인으로 세운 것이다. 아직 왕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있다. 두 사람은 떨어지지 않고 사랑을 나눈다.(5-6) 그리고 이것이 제발 꿈이 아니기를 여인은 간구한다. 꿈이라면 깨우지 말라(7)

그런데 왕은 떠났다. 사냥철이 지나간 것이다.  사랑에 빠졌으나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우기가 왔고 그들은 긴 이별이 있었다. 위기가 왔다.

 

  세가지 위기이다.

 

첫 번째 위기는 시간적 위기이다. 성도가 처녀적에 성가대봉사도 하고 주일학교 교사도 한다. 열심히 봉사하다가 결혼해서 아이 낳고 기르는 몇 년간 열심이 사라진다. 시간적 위기이다.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주를 떠나있을 때가 있다. 이것도 시간적위기이다.

두 번째 위기는 2:14절의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두려움이 많은 비둘기는 바위 틈에서 벌벌 떨고 있다.  병들고 어려울 때 고난과 환란이 올 때 성도는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다.

 

세 번째 위기는 15절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 포도원은 모든 공동체를 가르킨다. 사탄의 역사이다.  교활한 작은 여우 한 마리가 포도원을 허물고 있는 것이다.  여인은 포도원지기였는데 그녀가 없을 때 와서 뿌리를 파헤치고 망쳐놓았다.

 

그런데 그가 어느날 다시 찾아왔다. 8절 “그가 (와서:우리 말 성경에는 빠져있슴)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그가 벽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9)

위기를 극복한 사랑은 더 깊은 단계로 나아간다. 친밀감의 사랑의 단계이다. 위기가 있었으나 위기를 극복한 단계이다.

 

10절“나의 사랑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13). 11절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이다. 언약백성된 우리에게 제일 먼저 하신 말씀도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성도에게 위기는 온다 그러나 위기를 극복한 사랑은 더 큰 친밀한 사랑으로 발전한다.

 

3장,언약적사랑

 

위기를 극복한 사랑은 더 큰 친밀감 속에 굳어지게 된다. 성도가 위기를 극복한 후에 더욱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깊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어느날 술람미여인과 왕은 침상에 누워 행복하게 자고 있었는데 밤에 눈을 떠보니 왕은 사라져버렸다. 왕은 의도적으로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고난은 갑자기 온다. 이별도 갑자기 온다. 하여 우리는 당황스럽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알려주는 법도 없지만 그런 일이 올때 설명하시지 않는다. 좀 이유를 알려주면 좋을 텐데, 또 언제까지,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면 좋을 텐데 도무지 알려주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엎드려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 물어야하는 것이다.

 

술람미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도데체 이밤에 어딜 간 것인가? 연애하는 것은 참으로 감미롭다. 그러나 그만큼 위험도 큰 것이다. 사랑은 집착이다. 여인은 온 성을 헤메며 연인을 찾는다. 왕은 아직 자신의 신분은 숨기고 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이전보다 더 큰 위기일 수 있다. 그러나 여인은 집요하게 찾는다. 그렇다. 믿음은 찾고 또 찾는 것이다. (마7:7) ‘찾는다“는 단어가 1절과 2절에 각각 두 번씩 나온다.

 

3절 “성중의 순행하는 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순찰자들이다. 그들에게 물었으나 역시 알 수 없다. 그러나 여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가자 마자 극적으로 그가 나타난다.(4)  그런데 그 모습이 놀랍다.  6절“연기기둥과도 같고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거친들에서 오는자가 누구인고” 향기를 발하며 오고있는 행렬과 마주쳤다.  7절 “이는 솔로몬의 연이라(미타토:그의 가마)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인이 옹위하였는데” 드디어 솔로몬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솔로몬의 연은 그의 가마행렬이다. 휘황찬란한 가마행렬이 밤에 여인에게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인가? 결혼식이다.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결혼식은 밤에 거행하는 법이다. 이것 때문에 솔로몬이 몰래 빠져나간 것이다. 여인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은 이일을 더욱 극대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솔로몬은 이벤트에 능숙한 자였다. 2장에서의 서프라이즈 파티를 기억하는가? 7,9,11절에서 솔로몬은 자신을 드러내었다. 술람미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가 왕이었으니 말이다.

 

  게달의 장막같은 우리를 왕이신 하나님이 신부삼아 주셨다. 이제 언약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홍해를 건너는 이벤트를 지나, 하나님은 참으로 이벤트에 능하신 분이다. 그들을 시내산 까지 끌고가셨다. 이유를 말씀하시지 않은 채 그리고 언약을 맺으셨다.  결혼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언약백성들에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그렇다. 이제 신랑은 신부를 떠나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을 함께 하는 것이다.

 

 

4장,신부의 단장

 

솔로몬은 이제 “나의 신부”라는 표현을 즐겨쓰고 있다. 호칭이 바뀐 것이다. (8,9,10,11,12).  8절에 “함께“라는 단어가 두 번 강조된다. 이제 더 이상 이별은 없다.

신부는 아름답게 단장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으면 이제 날마다 단장해야 한다. 우리의 단장은 마음의 단장이다.

 

신부의 단장은 최고의 찬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8가지의 향품이 나오고 있다.(13-14) “향기“가 반복되고 있다. (10,11,16) 16절, 차가운”북풍이 불어와도 남풍이 불어도“ 향기를 발하는 성도 열매맺는 성도가 되어야한다. (13-16)

 

5장,친밀한 사랑

 

천한신분의 여인이 왕의 아내가 되었다. 그런데 잠시 오만과 안일함으로 인해 시험에 들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을 때 그럴 수 있다. 여인은 첫날밤을 지낸 후 신랑을 거부한다. 2절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나의 사랑,나의 비둘기,나의 완전한 자야 문열어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신랑이 문을 두들기는데 열어주지 않고 있다. 마음에 시험이 든 것이다.

 

3절“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렵히랴마는” 안일함과 오만이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신랑이 간절히 문틈에 손을 넣고 애원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동하여 문을 열었다. (4-5)

 

그런데 절묘한 타이밍이다. 남편은 떠나고 몰약만 남아있는 것이다. 이제 정신이 번쩍들었다. 아니 혼이 나갔다.(6) 정신없이 그를 찾고 찾아도 없는 것이다. 순찰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미친 여자인줄 알고 때렸다. 성벽 파숫꾼들은 옷을 벗겨 취하였다.(7)

 

여인은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호소한다. “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므나” 예루살렘 여자들이 말한다. 네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해보라(9) 여인은 당당히 말한다. 성도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선포해야한다. 시험 후의 친밀함은 더욱 커진다. 여인은 더욱 깊은 사랑의 단계로 나아간다.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한 주의 사랑은 계속 문을 두들린다. 문을 열면 풍성한 삶이 주어지는데 나의 고집,자아,오만이 문을 열지 않는 것이다.

 

시내산에 도착하기 까지는 연애하는 기간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을 책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내산 언약후에는 징계와 교정이 반듯이 있게 된다.

 

요한복음은 시험의 복음서이다. 2장의 시험은 어머니에게 하대한다. “여자여 아직 내 때가 아니니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시험을 이기고 오히려 적극적인 믿음을 보여준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3장은 니고데모를 시험하며, 4장은 수가성여인을 시험한다. 6:6에서는 “빌립을 시험코자”그리고 제자들을 시험하신다. ‘너희도 가려느냐’  베드로가 말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사오니 우리가 뉘게로 가리이까”?(요6:68)

 

7장은 형제들을 시험하시고, 11장에서는 마리아를 시험하신다.  시험은 반듯이  있다. 그러나 그 시험을 통과한 후 더욱 친밀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6장,깊은 사랑

 

예루살렘 여자들은 술람미여인의 남편사랑 고백에 감동하여 함께 찾으리라고 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담대히 선포해야 한다. 2절에서 솔로몬을 찾는다.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꺽는구나” 그리고 사랑을 고백한다.

 

3절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4절은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사랑고백한다. “너의 어여쁨이 다르사(초기 북 왕국의 수도)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같고 너의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같구나” 

 

게달의 장막이 완전한 자로,복된 자로(9)바뀌었다. 모든 왕후와 비빈과 시녀들가운데 술람미를 높이고 백성가운데 높인다.(12) 13,14절의 술람미는 솔로몬이 붙인 이름이다. 솔로몬의 여성형이 술람미다. 솔로몬은 남성명사,술람미는 여성명사로 둘다 샬롬에서 온 말이다. 두 사람에게도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둘의 사랑으로 모든 이들에게도,나라에도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성도와 하나님이 샬롬하면 만사가 형통케 되는 것이다.

 

7장,함께하는 사랑

 

1-8절은 남편이 아내에게,9-13은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둘은 이제 떨어지지 않는다. 영원히 함께하는 사랑인 것이다. 11절“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가서 동리에서 유숙하자” 12절“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우리 ,함께” 이제는 어디를 가든지 함께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늘 하시는 말씀이“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8장,영원한 사랑

 

사랑의 절정은 6절이다. “너는 나를 인같이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도장찍은 사랑은 언약체결식의 묘사이다.(다말이 유다와 관계를 가질 때 도장을 받는것도 일종의 언약이다. 유다는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켰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죽음도 떼어낼수 없는 사랑,불멸의 사랑,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사랑이다. 성숙한 사랑이며 여호와의 불 같아서 7절“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 이제 신랑은 신부와 함께 신부의 고향집에 간다. 2절“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미집에 들이고..” 그녀를 멸시하던 오빠들도 솔로몬의 포도원에서 일하며 이제는 모두에게 평화가 온 것이다. ,10절“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시험도,장애도 있지만 모든 것을 뛰어넘는 영원한 사랑,끊을래야 끓을 수 없는 사랑을 보여준다.(롬8:38~39)

 

                                 룻기

 

 

 

 

 

 

1. 저작 시기

 

룻기의 저작자와 저작 시기에 대해 「탈무드」(Talmud)와 「바바 바드라」(Baba Bathra)에서는 사무엘이 사무엘서와 사사기 그리고 룻기까지 기록하였다고 한다.

학자들간에는 룻기 내에 아람어 문체가 있다고 하면서 룻기의 저작 시기를 포로 시대 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기도 하다. 룻기 내에 간혹 아람어의 문체가 있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초기의 구약 문서에는 아람어풍의 문서들이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될 것이 없다. 룻기 내에 다윗 족보의 출처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룻4:18-22)  포로 시대 후의 기록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며, 그보다도 훨씬 이전의 기록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룻기의 연대가 만일 포로 시대 후의 산물로 추정된다면 다윗 이후의 왕에 대한 기록은 그후 시대에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1. 기록 목적

 

룻기의 기록 목적에 관해 많은 학자들은 흥미를 가진 이야기식 문체로 문학적 가치를 보여 주기 위한 책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의 역사만이 아닌 이방인들의 역사를 이어 주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의 유대인들에 의하면 룻기는 케투빔(Kethu-bim) 혹은 성문서 가운데 일정한 위치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오순절 기간에 읽히는 의식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고, 이러한 사실은 여러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도 관련된다. 

 

2.역사성

 

요세푸스(Josephus)는 본서를 고대의 히브리어로 된 정경 중 사사기의 한 부분(삿 17-21장)으로 보고 있다. 칠십인역(LXX)에도 유대교의 전승과 같게 본 서를 독립된 책으로서가 아닌 사사기에 속한 것으로 보고 있다. 유대인들에 의하면 본서는 히브리어로 된 구약의 3개 부분 중 마지막 부분에 속해 있는 케두빔(Kethubim)과 헬라어로는 성문법이라 밝히는 다섯 권의 두루마기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된다.

 

룻기는 다윗의 혈통을 중심으로 하여 이스라엘 왕통의 근거를 나타냈으며, 원시적인 통치의 세계와 왕정 통치를 이어 주는 고리가 된다. 본서에서 중요하게 대두되는 사건은 위대한 왕의 혈통이 유다 족속에서 이어진 것이라는 점이며, 따라서 에스더처럼 사실적인 주인공의 이름에서 그 제목을 취하고 있다.

 

 

3.룻기의 신학

 

사사 시대 동안 믿음의 빛이 되었던 사람들의 생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통찰력을 갖게 해준다. 한 모압 여인의 신앙을 들어 다윗의 혈통을 보여 주며, 다윗의 증조모가 된 모압 여인 룻이 어떻게 다윗의 혈통의 근원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제시해 준다.

 

특히 룻기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신학의 두 가지 흐름이 있는데,

첫째,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대상을 막론하고 전파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설파하신 구원의 보편성을 시사해 준다(막16:16). 그리고 둘째, 하나님께서는 섭리의 역사를 이루시는 데 있어서 낮고 천한 모압의 한 여인에게 은혜를 내리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룻기의 주인공은 룻기를 이어가는 모압 여인이라기보다 흐름 뒤에서 숨어 섭리하시는 하나님임을 알 수 있다.

 

4.룻기의 구속사

 

룻기에 나타나는 인물의 중심은 상징적인 것으로서 기업을 무를 자는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며, 롯과 보아스의 결혼을 통하여 다윗의 혈통을 잇게 됨을 암시한다. 특히 룻이 고난 속에서 기업을 무를 보아스와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은 이 땅에서의 교회의 승리와 궁극적인 구원을 예증한다.

 

예수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내어 주셨다. 사망으로 형벌을 받을 자들에게 이스라엘의 고엘 제도처럼 우리에게 천국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다. 룻이 보아스와의 결혼을 통하여 기업을 무른 것이 고엘 제도에서 온 것처럼 우리에게 고엘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천국을 기업으로 주심으로 우리는 영원한 삶의 희망을 얻게 된 것이다.

 

5.구속사적 의미

 

성경의 역사 가운데 룻의 가정을 통하여 고난과 환난 속에서도 섭리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깨닫을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율법서에서는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는 것조차 금지하시며(신7:3), 모압인과 암몬 사람조차 이스라엘 회중에 오는 것을 금하셨다.

 

그러나 룻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고엘을 상실한 보아스에게 룻이라고 하는 이방 여인과의 계대 결혼을 통해 고엘을 삼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주시고, 고엘 되시는 그리스도를 약속하심으로 룻의 가정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하신다. 역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인내하는 신앙인에게 삶의 승리와 영광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본 서를 통하여 계시하시고 있는 것이다.

 

룻은 마태의 족보 속에도 그리스도의 한 조상으로 영광스럽게 명시되어 있다(마1:5). 룻처럼 믿음 안에서 거룩한 의지와 인내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의 길을 걷는 성도들은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다.

 

 

6.룻기의 저작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룻기를 편집된 것으로 인식하여 그 연대를 포로 시대 후기로 보았으며, 현대주의 신학 비평가들은 책의 내용과 형식을 예로 들면서 연대를 포로 시대 전으로 보았다. 그러나 롯기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본 서의 저자는 다윗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었고, 그 연대도 B.C. 1,000년 이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롯기는 역사성을 부인하여 본 서를 한 단편 소설로 취급하는 어떤 이론과는 달리 문장의 미와 섬세함을 갖춘 하나의 문학적인 형식을 띤 엄연한 정경임을 확신하여야 한다.

 

1) 언어학적 증거

 

첫째, 자유주의자들은 룻기 속에 아랍 사상과 후기 히브리어의 특성을 포함한 단어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히브리어의 형태와 단어가 고대 히브리어와 다른 시기였음을 보여줌으로써 기록 연대가 매우 이른 시기였음을 증거해 주고 있다. 특히 룻기의 문학과 법은 분명히 사무엘 시대의 형태와 단어들에 근접하다.

 

둘째, 롯기의 단순성, 간결성, 진실성 등은 이스라엘 초기 문학의 특징임을 확신한다. 또한 룻기에 포함되어 있는 언어들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셋째, 혈연자의 직무는 분명히 이른 시기이다. 즉 혈연자가 신발을 벗어 주면서 포기하는 것은 수혼 제도가 성문화된 후대와는 분명히 구별된다는 것이다.

 

2) 고대 문서

유대의 전설적인 문헌 「바바바드라」(Baba Bathra)에 의하면 사무엘은 그의 책(사무엘서) 뿐만 아니라 사사기와 룻기도 기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보아스가 낳은 오벳이 다윗의 증조부라는 사실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3) 정통적 입장

룻기의 배경은 이스라엘에 통치자 없었던 사사 시대임이 분명하다(삿1:1)는 이론이다. 룻의 가족들은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잠시 동안 모압 나라로 이주하였다. 사사 시대에는 이방 나라와의 상호 교류가 있었으며 또한 통상 교류를 비롯한 도구들의 제조와 기술의 교류가 있었다. 따라서 룻의 가족이 잠시 이방 나라로 이주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포로 시대 전·후에는 이방인과의 결혼뿐만 아니라 이방 종교에 대해서도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룻기에는 이방인과의 결혼은 물론 신앙의 상호 관용적 입장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룻기의 연대는 사사 시대와 사무엘 시대 사이인 것이 분명하다고 본다.

 

7.룻기의 목적

 

1) 보편주의(Universalism)

 

선민의식에 강하게 사로 잡혀 있던 유대인들에게 신앙과 진리에 굳게 선 이방 여인 룻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더욱이 그녀가 다윗왕의 조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유대인들을 더욱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매우 보편적임을 알게 되는데, 하나님은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순종하며 진리에 굳게 선 사람을 들어서 귀하게 사용하신다. 즉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인종이나 그 밖의 이성적 사고에 의해 제한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2) 헤세드

 

룻기에는 나오미에게 행한 룻의 헤세드가 잘 드러나 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에게 경건과 친절한 행위에 대한 귀감이 된다. 즉 룻은 나오미에게 해야 할 자신의 의무를 잊지 않았고, 엘리멜렉에게도 그러했으며, 최종적으로는 죽은 남편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보아스에게 결혼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3) 다윗의 족보

 

룻기의 또 다른 목적은 다윗의 족보를 열거하는 데 있다. 즉 룻을 포함한 다윗의 조상들을 언급함으로써 앞에 나타날 다윗 왕의 경건한 조상들을 전기적으로 기술하려고 의도했던 것이다. 따라서 룻기의 최고의 목적은 족보의 열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수혼 제도(Levir-ate marriage)

 

룻기에는 그 밖에 수혼 제도에 대해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죽은 남편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남편의 형제들에게 결혼을 요구하는 제도이다. 따라서 결혼 후에 출생하는 첫째 자녀는 바로 죽은 자의 자녀가 되어(신25:5) 대를 계승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가 창세기 38장에도 언급되어 있다.

 

5) 하나님의 구원계획

 

성경의 중심인물은  다윗이다. 또한 다윗언약이 모든 언약의 중심에 서있다. 다윗이 오기전에는  성경에 왜 불의한 여인인,유다의 며느리 다말이나, 이방여인 라합 그리고 룻이 등장하는지 의구심을 자아낸다. 그러나 다윗이 등장한 후에야 이런 의심들이 사라진다. 다윗을 말하기 위해서 그 조상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며 다윗의 족보가 비로소 성경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 이유를 알수 있는 것이다. 마1장의 족보도 다윗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룻기는 단순히 다윗을 찬양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다윗을 세우신 하나님,다윗언약을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창세전부터 ,오래전부터 계획되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룻기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룻기의 뼈대인 ‘고엘’(기업 무를자:룻기에 20회 나옴,구약전체에 118회 그런데 룻기에서 6/1이 나오는 것은 흥미롭다)은 다윗을 넘어 그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아,장차 고엘로서 오시는 메시야를 보여주는 성경이 룻기이다. ‘고엘‘의 실천자 보아스를 통하여 장차오실 메시야의 그림자를 보여주고있는 것이다.

 

누가는 4장에서 예수가 백성들의 고엘(기업무를 자)인 것을 명백히 드러낸다.  고엘의 모델이 보아스-다윗-예수그리스도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보아스는 그 어머니 라합,천한여인, 이방여인인 어머니를 통해서 이방여인인 룻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방인이 언약백성이 되는 것은 개인과 종족들로 나눌 수 있다. 종족은 미디안(겐)족속,기브온족속등, 그러나 이방인들을 언약백성 삼으실 뿐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게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보여주는 중요한 성경이 룻기이다.

또한 룻기는 사사시대에 언약파기를 밥먹듯이 하는 모든 이들에게 신명기의 언약적저주를 통해 경고하는 장치이기도하다.

 

8.고엘제도

 

 

룻기에는 고대 이스라엘의 다양한 생활과 법적 의무와 관습들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위에서 언급한 것과 관련된 제도가 나온다. 다시말해 그 자체의 제도로만 말하자면 그저 고대 이스라엘의 한 풍습에 지나지 않지만, 신약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구속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제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고엘이라는 제도이다.

 

이 고엘이라는 제도는 룻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법을 삶 속에서 어떻게 이해했으며, 어떻게 적용했는지를 살펴보고 이 속에서 나타난 고엘의 구속 신학적 의미를 밝혀보고자 한다.

 

1.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한다.

2. 룻기 속에 나타나는 '구속'의 개념을 설명함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조직신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히 성경 신학적인 입장에 서서 룻기 전반에 깔려있는 제도인 '고엘'을 해석해 보고자 한다.

 

 

A. 고엘의 어원

 

고엘은 가족법의 영역에 속하는 순수한 히브리어로서 이 어근의 원뜻은 친족의 역할을 통하여 자기 친족을 곤란과 위험에서 되찾아 오는(to redeem)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근 ga'al은 학자마다 원래적 의미를 조금씩 다르게 해석한다.

 

드보(de Vaux)는 '되사다', '반환을 요구하다', 특히 '보호하다'를 의미한다고 한다. 존슨 (A. R. Johnson)은 ga'al의 이형(異形)을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그 원래적 의미를 '덮어 가리는 것' 또는 '보호하는 것'이라고 한다. KBL에서는 그 의미를 "어떤 사람이나 어떤 물건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한다. 반면에 프락쉬(O. Procksch)는 '되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스탐(J. Stamm)은 그 의미를 '되사는 것'으로 시작한다. 링그렌(H.Ringgren)은 ga'al의 원래적 의미를 어원적으로 결정 내릴 수 없으며 원래적 의미를 추정하는 것보다 실제 언어상의 용법에서 출발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ga'al의 원래적 의미가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음에도 그 해석들이 모두 상충되지 않고 서로 일맥상통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을 이 단어가 가족법의 영역에서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ga'al의 의미는 추상적이 아니고 구체적인 공동체의 삶의 영역으로부터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 사용된 ga'al의 원래적 의미는 혈연공동체 속에서 친족끼리 서로의 재산과 생명과 권리를 보호하고 만약 한 가족이 어떤 재난이나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경우에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 가족이 당한 재산과 생명과 권리를 되찾아서 회복시키는 구원행위를 의미한다.

 

고엘은 '구속하다', '원수를 갚다', '원한을 풀다', '보상하다', '친족의 역할을 하다'라는 의미의 동사의 현재 능동태 분사형으로서 '구속자'라는 뜻이다. 또 어근과 가족이라는 말이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룻 2:20, 4:1에서처럼 '집안간으로서 맡아야 할 사람' 또는 '집안간으로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으로도 번역될 수 있으며 go'el이 행하는 역할에 따라 '복수자'(신19:12), '피를 보복할 친족'(민 35:19)으로도 번역되었다.

 

B. 고엘의 내용

 

go'el 제도는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 공동체의 결속을 위하여 친족들 사이에 지켜야 할 권리와 의무에 관한 일종의 상보(相保)제도로서 그 안에는 저당 잡힌 것을 돈을 주고 되찾는 즉 속량한다는 뜻이 들어있다. 이 제도는 구약의 여러 상황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는데 그 중에 성경에 나오는 것들로서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토지의 상환자

 

레 25:23-25에는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가난하여 생계를 유지하거나 또는 진 빚을 갚기 위하여 자신의 재산(땅,집)의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판 상황에 대하여 설명한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돠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 너희는 유산으로 받은 땅 어디에서나, 땅 무르는 것을 허락하여야 한다. 네 친척 가운데 누가 가난하여, 그가 가진 유산으로 받은 땅의 얼마를 팔면, 가까운 친척이 그 판 것을 무를 수 있게 하여야 한다(레 25:23-25).

이 경우에는 그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판 것을 무를 go'el이 되어 산 사람에게 그 값을 대신 치루고 동족의 재산을 되찾아 줌으로 동족의 재산을 보존시켰다.

 

2. 종의 속량자

 

go'el의 권리는 재산 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적용되었다. 레 25:47-49에는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가난하여 부자인 외국인에게 종으로 팔렸을 경우에 대하여 설명한다.

 

너와 함께 사는, 나그네 신세 된 외국 사람이나 임시 거주자 가운데는 부자로 사는 사람이 있는데, 마침 그 이웃에게 너의 동족이 살고 있다가 가난하게 되어서, 그 외국 사람에게나, 너와 같이 사는 임시 거주자에게나, 그 가족 가운데 누구에게, 종으로 팔렸다고 하자, 종으로 팔려 간 다음이라 하더라도, 그는 종으로 팔릴 때에 받은 값을 되돌려 주고 풀려날 권리가 있다. 그의 친척 가운데 누군가가 값을 대신 치르고 그를 데려올 수 있으며 (레위기25:47-55).

이 때에도 가장 가까운 친족이 go'el이 되어 그를 자유롭게 해주는 구원자 역할을 하였다.

 

3. 피의 복수자

 

go'el에게 있어서의 가장 엄중하게 부과된 책임중에 하나는 바로 '피의 복수'였다. 민 35:16-19에는 만일 자기 친족중의 한 사람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 되었을 경우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만일 쇠붙이 같은 것으로 사람을 쳐서 죽게 하였으면, 그는 살인자이다. 그러한 살인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들고 있다가, 그것으로 사람을 쳐서 죽게 하였으며, 그는 살인자이다. 그러한 살인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만일 사람을 죽일만한 나무 연장을 들고 있다가, 그것으로 사람을 쳐서 죽게 하였으면, 그는 살인자이다. 그러한 살인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이러한 경우에 그 살인자를 죽일 사람은 피해자의 피를 보복할 친족이다. 그는 그 살인자를 만나는 대로 죽일 수 있다(민 35:16-19).

 

피의 복수는 사막의 원주민들(베두인들, 아라비아인들)의 법과는 달리 반드시 수행되어야 했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돈으로서 보충하는 행위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근거로서 종교적인 원인을 내세우고 있는데, 곧 살해 당하여 흘린 피는 여호와께서 거주하시는 땅을 더럽혀 놓았기 때문에 그 땅은 피를 흘린 자의 피로서 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형 집행 방식은 피의 복수와는 구별되었다. 왜냐하면 go'el은 무죄한 사형 집행이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친족이 그를 다시 죽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피의 복수에도 두 가지 예외가 있었다. 하나는, 동일한 공동체의 내부에서는 피의 보복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았고, 또 하나는 살인이 고의가 아닌 과실의 경우에 예외가 적용되었다. 이 경우에 그 살인자는 도피성에 피신하여 피의 복수자로부터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었다.

 

4.속전의 수납자

 

민 5:6-8에는 남에게 잘못을 범하여 생긴 결과에 대하여 피해자가 죽고 보상받을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설명한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라. 남자나 여자나 가릴 것 없이, 남에게 어떤 잘못이든지 저질러서 그 일로 주를 배신하였을 때에, 그런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는 대로,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고백하고, 피해자에게 본래의 값에다가 오분의 일을 더 얹어서 갚아야 한다. 그 피해자에게 대신 보상을 받을 근친이 없으면, 그 배상액은 죄를 속량하고 바치는 속죄양과 함께 주께로 돌아가, 제사장의 몫이 된다(민 5:6-8).

이 경우에 go'el은 죽은 피해자를 대신하여 가해자의 속전을 수납할 수 있었다.

 

5.서원 예물의 되찾기

 

레 27:13,15,19,31에는 하나님께 바쳐진 서원 예물들 곧 짐승이나, 집이나, 밭이나, 땅의 십일조를 되찾을 수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소유자가 그 짐승을 무르고 싶으면, 그는 그 짐승값에 오분의 일을 더 보태서 내야한다(레 27:13).

 

자기 집을 바쳤다가, 그 사람이 집을 도로 무르고자 하면, 그는 본래의 그 집값이 오분의 일을 더 얹어서 물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 집은 다시 자기의 것이 된다(레 27:15).

 

밭을 바친 사람이 그것을 다시 무르고자 할 때에는, 매긴 값의 오분의 일을 더 얹어 물어야 하고, 그렇게 하면, 그 밭은 다시 그의 것이 된다(레 25:19).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에서 난 것의 십분의 일은, 밭에서 난 곡식이든지, 나무에 달린 열매이든지, 모두 주에게 속한 것으로서, 주에게 바쳐야 할 거룩한 것이다. 누가 그 십분의 일을 꼭 무르고자 하면, 그 무를 것의 값에 각 오분의 일을 더 얹어야 한다(레 27:30-31).

 

하나님께 바친 서원 예물들을 되찾을 때는 부정직한 교환을 피하기 위해 다소 추가 요금이 붙었으며 이 경우에 구속자는 친척이 아니고 원래의 소유주였다.

 

6. 후손의 계대자(繼代者)

 

go'el이 행해야 할 중요한 사항 중의 하나로 형제가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에 가장 가까운 친족의 순서에 의해 죽은 형제의 미망인과 계대결혼을 하여 그 가문의 후사가 끊어지지 않게 해야했다.

 

 

C. 이스라엘 토지법

 

이스라엘 백성과 땅과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매우 밀접한 관계이다. 그러한 점에서 땅에 대한 약속은 오경 전체를 꿰뚫고 흐르는 하나의 커다란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땅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이스라엘은 또한 그들의 삶과 함께하는 하나님과도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분명히 실제로 그러하듯이, 특별한 방식으로 이스라엘과 관계하고 계시다면 그는 역사적인 공간으로서의 땅과도 특별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계신다.

 

이처럼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땅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느 하나만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특히 go'el은 가나안 정착 이후에 생긴 토지법과 깊은 연관성이 있으므로 go'el을 연구하려면 먼저 땅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1. 기업

 

땅은 이스라엘의 역사 이해를 도와준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항상 땅으로부터 땅 상실로, 땅 상실로부터 다시 땅으로, 생명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도상에 있다. 처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땅이 없었다.

 

그들은 가장 초기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에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땅으로 가는 '체류자들'로 표현되고 있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가는 자들로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은 거친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에 도달했고, 하나님은 그 땅을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었다. 처음으로 자기 땅을 가지게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그 땅은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거저주신 선물이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너희에게 주기로 약속하신 그 땅에, 너희를 이끌어 들이실 것이다. 거기에는 너희가 세우지 않은 크고 아름다운 성읍들이 있고, 너희가 채우지 않았지만 온갖 좋은 것으로 가득 찬 집이 있고, 너희가 파지 않았지만 이미 가꾸어 놓은 포도원과 올리브 밭이 있으니, 너희는 거기에서 마음껏 먹게 될 것이다(신 6:10-11).

 

모압에서 선포된 이 메시지는 그 땅이 순전한 선물이요, 철저한 은총에 속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 말에는 이스라엘의 업적이나 공로 또는 계획에 대한 암시가 전혀 없다. 폰 라트(von Rad)는 구원사적 입장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땅의 수여를 여호와의 구원행위로 보며 그것을 여호와의 구원 업적들 중에 최종적인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땅의 주인이 여호와임을 확실히 믿었다.

 

땅이 여호와의 것이라는 개념은 매우 옛 것이며, 제의적(祭儀的)인 것이다. 가나안 땅이 여호와의 소유라고 하는 개념은 이스라엘 백성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난 다음, 시내산에서 알게 된 사막의 여호와가 농경지의 하나님도 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서부터 기인되었다고 볼 수 있다. 神은 그 숭배자들이 거하는 지역의 모든 땅과 포도원과 과수원 등 토지의 주인이라고 하는 생각은 고대 근동세계에 널리 유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7년마다 땅을 묵히는 일(출 23:10, 레 25:1), 첫 열매를 제물로 바치는 일(출 34:26, 레 23:10), 새로 심은 과일나무 열매를 3년간 따지 않는 일(레 19:23), 추수 때 밭에 이삭을 남겨 두는 일(레 19:9)등의 모든 제의(祭儀) 관습은 모두 여호와가 땅의 주인이라는 점과 직결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었기에 이스라엘은 그 땅을 '기업'이라고 불렀다. '주다', '수여하다'라는 뜻을 가진 'nahalah'의 개념은 '재산', '소유물'과도 같은 뜻으로, 가나안 땅을 여러 지파에게 분배해 준 사실과 관련해서 '분할받은 땅(토지, 영토)'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그러나 좀더 일반적인 뜻은 '과거로부터 상속받아 소유한 것'을 의미하고, 성서의 문맥에서는 아버지나 조상들로부터 상속받은 것,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가리킨다.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었기에 공평하게 분배되어져야 했고 이스라엘은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졌다. 또한 제비뽑은 땅은 후손들에게 영속적으로 물려주어야 했다. 또한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이므로 일단 토지가 할당되면 그 받은 몫은 그것을 받은 가족 혹은 가문내에 영속적으로 남아 있어야지, 남에게 양도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토지는 절대로 개인 소유가 되어서는 아니되며 현소유자의 후손의 모든 세대의 소유이어야 한다. 따라서 소유자는 땅의 소유권을 남에게 넘겨서는 안되며 또한 그가 아무리 남의 땅을 탐낸다 하더라도 잠정적으로밖에 많은 토지를 끌어 모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은 땅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며 그 땅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선물로 주신 기업이라는 것을 일깨우기 위하여 이스라엘은 '나그네며 임시 거주자'로 불리워졌다(레 25:23). 

 

2. 보존

 

가나안 정착 이전의 이스라엘 사회상은 근본적으로 평등한 사회였으며 유목민들에게 사회적 불의나 불평등은 사막의 거친 생활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가나안 정착 이후 공평하게 땅을 분배받은 이스라엘 공동체는 평등한 삶을 누렸던 사막의 관습들을 그대로 보존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근과 홍수 또한 여러 질병들의 재해와 전쟁들은 가난한 자들을 생기게 하였고 갑작스런 문화변동과 사회변혁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부의 불균형을 만들어 놓았다. 게다가 많은 땅을 소유하고자 하는 탐심은 이스라엘 기업 보존을 위협하고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런 현상들로 인하여 이스라엘 공동체는 레 25:24-28에 땅에 대한 탐심의 유혹을 제어하고 토지의 사유화를 방지하기 위한 법적 장치들을 규정해 놓았다.

 

너희는 유산으로 받은 땅 어디에서나, 땅 무르는 것을 허락하여야 한다. 네 친척 가운데 누가 가난하여, 그가 가진 유산으로 받은 땅의 얼마를 팔면, 가까운 친척이 그 판 것을 무를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것을 무를 친척이 없으면, 형편이 좋아져서 판 것을 되돌려 살 힘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판 땅을 되돌려 살 때에는, 그 땅을 산 사람이 그 땅을 이용한 햇수를 계산하여 거기에 해당하는 값을 빼고, 그 나머지를 산 사람에게 치르면 된다. 그렇게 하고 나면, 땅을 판 그 사람이 자기가 유산으로 받은 그 땅을 다시 차지한다. 그러나 그가 그 땅을 되돌려 살 힘이 없을 때에는, 그 땅은 산 사람이 희년이 될 때까지 소유한다. 희년이 되면, 땅을 판 사람은, 그 때에 가서야 유산 곧 분배받은 그 땅을 다시 차지할 수 있다 (레 25:24-28).

 

 

첫째, 근족인 go'el이 그 기업을 무를 수 있다. 여기서는 가족이 속한 씨족이 빨리 토지를 되사서 씨족에게 속한 기업이 외부로 매각하지 못하도록 방지하고 보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대천덕은 go'el의 뜻이 한자어로는 '구속'이며 한국어로는 '되무르다'는 말로서 원래 이 말이 토지법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유목민은 사유재산이 별로 큰 의미가 없으며, 재산 사유의 최종적 권리가 씨족에게 있었으므로 토지를 관리하는 가족은 그 땅을 '외국인들'(가나안 사람들)에게 팔 권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러한 유목민적 관습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 정착 후에도 그대로 잔존하게 된 것이다.

 

둘째, 판 사람이 돈을 모아서 판 땅을 스스로 무를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있을 경우에 땅을 판 햇수를 계산하여 남은 값을 산 사람에게 주고 그 땅을 되무를 수 있다.

 

셋째, 희년이 되었을 때에 그 기업은 원소유주에게 돌아갈 수 있다. 희년이라고 번역하는 이 해의 히브리어는 (yobel ; 수양, 수양의 뿔)로서, 이 해가 시작될 때에 양각(羊角)을 부는 관습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그래서 이 해를 '자유의 해(the Year of Liberty)', '나팔의 해(the Year of Trumpet)'라고도 한다. 히브리어 (yobel)은 앞 뒤 문맥에 따라 '나팔(Trumpet)'또는 '기쁨(Tubilee)'이라고 번역된다. '

 

나팔의 해'는 7년마다 한 번씩 오는 안식년이 일곱 번 거듭되어 일곱 번째 안식년, 즉 49가 되는 다음 해, 곧 50년째가 되는 해이다. 희년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방(석방)을 안겨 주었고 매각되었던 농토와 집들이 본래의 소유주에게로 되돌아갔다. 이러한 규정들의 동기는 언약법에 있었다. 토지가 하나님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토지를 판 후에도 그 토지에 대한 모든 권리를 다 내어줄 수가 없었다.

 

넷째는 안식년의 경우인데, 안식년에 관한 것은 출 21:1-6과 23:10-11, 레 25:2-7, 신 15:1-18 에 나타나 있다. 안식년에 관한 보도들에 의할 것 같으면 계약법전인 출 23:10-11과 성결법전인 레 25:2-7은 농경지의 휴경에 관한 규정이며, 출 21:1-6과 신 15:1-8의 내용들을 보면 계약법전에서는 노예가 해방될 때 단지 몸만 해방될 뿐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나 신명기에는 빈 손으로 내어 보내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신 15:12-18). 또 신명기에는 부채를 탕감하여 주는 것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도 명시하고 있다(신 15:1-11).

 

 

이상에서 go'el제도, 안식년, 희년법들은 모두 기업 보존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법들의 실천 여부에 대해서 go'el제도와 안식년은 그 흔적이 나타나나 희년이 실천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go'el제도의 실천 사례는 렘 32:1-10에서 볼 수 있으며 안식년은 법률적인 본문들 이외의 부분에서는 거의 말하지 않고 있으나 외경인 마카비서(Ⅰ마6:49,53)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헬라시대까지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또 안식년은 역사가 요세프스(F. Jesephus)의 보고들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희년의 규정들이 언제 적용되었다는 것에 대한 흔적은 실제로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한편 레 25:25-28에서 go'el과 희년법이 기업을 되무르고 소유권을 회복한다는 내용이 같은 점으로 보아 go'el과 희년 사이에 서로 연관성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기업보존에 대하여 살펴본 바와 같이 이 토지법들 안에는 땅은 이스라엘이 선물로 받은 기업이며 땅의 임자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다. 그래서 땅은 이스라엘 왕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관리할 수 없다. 아합은 땅을 거래할 수 있는 상품으로 생각하지만 나봇에게 있어서의 땅은 '거래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니라 '양도할 수 없는 유업'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다음 세대들을 위하여 땅을 잘 보존하는 관리자라는 사고에 철저해 있다.

 

폰 왈도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땅을 관리하는 것에 대해 이스라엘의 제의와 준법이라는 두 가지 관점으로 본다. 첫째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기억하며 예배하는 일이며, 그 다음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일이다. 이스라엘에게는 땅에 대한 탐심의 유혹을 물리치고 약자를 보호하는 법이 필요하며 또한 그들에게 있어 여호와 계명의 준법행위는 곧 가나안 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표시이기도 하다.

 

반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 행위는 땅을 주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며 땅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지 않는 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토지법은 소극적으로는 땅에 대한 탐욕을 제어하며 또 약자를 보호해 주는 기능을 하며 적극적으로는 선물로 받은 땅에서 이스라엘이 오래 살 수 있도록 축복으로 주어진 법적인 안전장치의 기능을 한다. go'el제도는 이러한 상관 관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D. 고엘제도의 문화적 배경

 

go'el제도의 문화적 배경을 살피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성경이 이 제도에 대해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곳이 없고 단지 도피성 제도나 토지법에 관련한 기업 무르기 등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밖에 증명해 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go'el제도가 가나안 정복과 토지 분배 후 농경 문화속에서 생겨나는 여러 가지 사회적 갈등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go'el의 문화적 배경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go'el제도의 여러 상황들을 하나하나 역추적하여 그 삶의 자리를 알아내는 수 밖에 없다.

 

먼저 go'el의 내용중 가장 오래 된 것으로 보이는 것은 민수기 35장 16-19절의 혈수제도(血讐制度) 즉 피의 복수이다. 그런데 이 혈수제도는 가나안 정착 이후 농경문화의 가족법 보다 훨씬 앞선 광야의 유목민들의 생활 속에서도 나타난다. 곧 고대 근동 아라비아인들의 '타르'법칙은 곧 어느 친척들의 유혈 피살은 반드시 그 피를 흘린 자의 죽음을 통하여 보상되거나, 그 대신의 경우에서는 그의 가족 중에서 어느 식구가 역시 피살을 당함으로써 속죄되어야 한다.

 

이와같은 피의 복수는 라멕의 노래(창 4:23-24)와 가인의 '표(창 4:15)'에서도 보게 된다. 가인의 이 '표'는 저주받은 자의 표시가 아니라, 가인이 엄청나게 가혹한 피의 복수를 하는 집단에 속한 자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표이다. 피의 복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노아홍수 기사에서도 나타나는데 노아 홍수 후에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후손들에게 최초로 이 혈수 제도를 명령하신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창9:6).

이상과 같은 보도에서 혈수제도는 최초의 형제 살인을 저지른 가인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보게 된다.

 

다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후손의 계대자(繼代者)로서 의무이다. 이것은 유일하게 룻기에서만 나타난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바로 신명기 25장에 있는 수혼법인데 이것은 룻기의 결혼과는 외형적 불일치한 점이 있다. 그러나 법의 형식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그 법의 정신인 죽은 자의 이름과 집을 세운다는 데는 같다고 하겠다.

 

수혼법은 이스라엘 외에 고대 근동에서도 그 자료가 많이 발견되고 있는 바, 앗수르와 헷족속과 우가릿에서도 확인되었다. 구약에서 수혼법의 실례는 창세기 38장의 유다와 다말의 사건에서 나타나는데 이것을 보면 수혼법은 족장시대 이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go'el의 의무중 하나인 후손의 계대자로서의 의무는 수혼과의 관계가 밝혀지기까지는 논단할 수는 없지만 수혼법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가나안 정착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go'el의 나머지 의무들인 토지의 상환과, 노예의 속량자, 속전의 수납자, 서원 예물의 되찾기 등은 모두 토지 분배 이 후에 생겨날 여러 상황들의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들로서 가나안 정착이후에 토지법과 관련하여 만들어진 법들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들을 종합하여 볼 때 go'el의 삶의 자리가 가나안 정복 이후 생긴 농경문화 시대의 산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go'el의 기원은 가까이는 가나안 정복 이후 토지법이 실시된 시기로부터 멀리는 가인의 시대까지도 올라가는 오랜 시간적 간격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go'el은 가인의 시대로부터 광야의 유목민 시대를 거쳐 정착된 농경문화 시대까지 이스라엘 공동체의 전통과 관습법으로서 계속적으로 보존되고 발전되어 온

제도라고 말할 수 있다.

 

9.룻기의 고엘제도

 

룻기는 시기적으로 이스라엘 왕정시대 이전의 사사시대에 그리고 역사적 배경으로는 부족 동맹의 사회구조 속에서 베들레헴 출신의 유대인 나오미와 그녀의 며느리이자 모압 사람인 룻이라는 두 여인이 과부가 된 후에 그들이 어떻게 현명하게 삶을 유지해 가면서 대(代)가 끊긴 가문의 이름을 이스라엘의 한 관습법을 통해 계속 이어지게 했는가를 보여 준다. 그 관습법이란 바로 룻기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go'el제도이다. 그러므로 룻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go'el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A. 룻기의 중심,고엘제도

 

룻기의 중심적인 사건은 go'el제도의 수행이다. 이 go'el제도는 룻기에서 점진적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룻기 1:11-13에 go'el의 수행 가능성에 대한 암시가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아직, 내 뱃속에 아들들이 들어 있어서, 그것들이 너희 남편이라도 될 수 있다는 말이냐?(1:11).

 

오늘 밤 내가 남편을 맞아들여 아들들을 낳게 된다거나 하더라도, 너희가 그것들이 클 때까지 기다릴 셈이냐?(1:12-13).

여기서 나오미의 말은 go'el의 의무를 행할 자를 낳을 가능성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절망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룻기 2:1과 2:20에는 나오미의 구체적인 go'el로서 보아스가 등장하는데 그는 재력이 있는 사람으로 소개한다.

그는, 엘리멜렉의 집안간으로, 재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보아스이다(2:1).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운 사이다. 그는 집안간으로서 우리를 맡아야 할 사람이다(2:20).

 

그리고 3:9에서는 룻이 보아스를 go'el로 부르고 있으며 3:12-13에는 보아스가 자신을 룻의 go'el로 인정하면서 자신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go'el의 의무를 행사하지 않을 경우 자신이 go'el의 의무를 수행하겠다고 약속한다.

어른이야말로 집안어른으로서, 저를 맡아야 할 분이십니다(3:9).

 

내가 집안간으로서 그대를 맡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소(3:12).

여기에서 룻은 끊어질 위험에 처한 유다의 대통(代統)을 잇기 위하여 자신의 생과, 자기민족, 그리고 자기의 종교를 버린다. 그리고 자신의 젊음을 끊어질 위기에 있는 엘리멜렉의 가문 즉 정통 이스라엘의 가문을 이어가기 위하여 자신을 철저히 희생제물화 한다.

 

룻기 4장에는 go'el의 구체적인 의무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재산과 몸의 구속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보아스는 룻의 요구를 실천하기 위하여 고대 이스라엘의 법정구실을 했던 성문 어귀에서 룻을 통하여 유다 가문을 일으키실 그 하나님의 구원사적 사건을 위한 법적 절차를 정확하게 끝낸다. 그리하여 나오미와 룻의 구속은 법정적으로 공표되면서 모든 갈등과 긴장은 해소된다. 그리고 룻은 보아스와 결혼하여 오벳을 낳음으로 다윗왕의 고조모가 되고 나아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성취시킬 메시야의 선조가 된다.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룻기는 하나의 지향점을 행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일련의 사건들이 모든 go'el의 의무를 수행하는대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룻기 1장에서는 go'el의 의무 수행의 가능성에 대한 암시가 나타나면서 2장에서 보아스의 등장으로 그것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고 급기야 3장에서 룻은 보아스에게 대담하게 결혼을 요청함으로 go'el의 의무 수행은 구체화 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4장에서 보아스에 의해 go'el의의무가 수행되고 동시에 모든 법적 조치가 취해짐으로 룻기의 문제는 해결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종합해 보면 룻기에 나타난 go'el제도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이 나타남을 알게 된다.

 

첫째는 룻기에 나타난 go'el제도가 실제로 수행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하고 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룻기의 시대적 배경이 사사시대였다는 점에서 더욱 가중된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삿21:25). 이 말은 무책임한 시기에 책임없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사기의 반복되는 주제이다.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보아스는 go'el의 의무를 행해야 할 아무런 법적인 부담이 없으며 또 그는 죽은 말론의 형제도 아니었고, 또 자기보다 더 가까운 근족도 있기에 그는 더욱 go'el의 의무에 대해 자유스럽다. 그럼에도 그는 의무에서가 아닌 인자에 근거를 둔 자발적인 행위로 룻을 구속하는 헤세드를 베푼다. 그러므로 보아스가 실행한 go'el의 사상에는 육신적으로 보아스의 후손인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를 구속하는 go'el로서 자신을 바치는 은혜를 베품으로 하나님의 구속행위는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인격속에 역사적인 초점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는 룻기의 go'el사상에는 보아스와 룻과의 결혼관계를 통해서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go'el제도가 특별한 것은 그것이 여호와의 언약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의 특별한 지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레겟트(Leggett)가 지적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이 의무들을 여호와께서 그들을 부르셨던 언약 관계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런데 go'el에 나타나는 이러한 언약사상은 하나님과 백성관의 관계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백성과 언약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은 또한 땅과도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한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항상 땅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땅으로부터 선물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땅은 선물로서 주어진 땅이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에서 주어진 땅이다. 룻기에 나타난 go'el이 특별히 흥미를 끄는 것도 go'el이 땅과 하나님의 백성을 함께 속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목적 안에서 친족 구원자는 개인적 영역과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영역에 대해서도 책임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룻기에서 보아스가 땅과 룻을 함께 구속한 행위는 go'el의 기능이 언약 관계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땅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필수 불가결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다.

 

B. 룻기에 나타나는 구속신학

 

룻기의 결론을 담고 있는 4장은 룻의 요구를 실천하기 위한 보아스의 빈틈없고 완벽한 법적 조치가 취해지고, 그리고 신학적 의도를 담고 있는 룻과 나오미에 대한 찬양문과 보아스와 다윗과의 족보상의 연결을 입증하는 족보가 기록된다.

 

룻기 4장에는 두 개의 기원문이 나오는데 첫 번 기원문은 4:11-12의 성문의 백성들과 장로들이 보아스가 룻과 결혼하는 것에 대한 축복이며 두 번째 기원문은 베들레헴 여인들이 나오미를 찬양하는 축복문인 4:14-15이다.

 

그러자 성문 위 회관에 모인 온 마을 사람들과 원로들이 대답하였다. "우리가 증인입니다. 주께서 그대의 집안으로 들어가는 그 여인을, 이스라엘 집안을 일으킨 두 여인, 곧 라헬과 레아처럼 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에브랏 가문에서 그대가 번성하고, 또한 베들레헴에서 이름을 떨치기를 빕니다. 주께서 그 젊은 부인을 통하여 그대에게 자손을 주셔서, 그대의 집안이 다말과 유다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베레스의 집안처럼 되게 하시기를 빕니다.(4:11-12).

 

이 기원문에서 보아스와 룻 그리고 그 가족에 대한 백성들의. 관심은 다음의 세가지로 나타난다. 먼저 아내에 대하여 백성들은 룻도 한 유명한 족속의 조상이 되기를 기원한다. 또한 그녀에게서 하나님의 가정과 목적 안에 있는 많은 후손이 나오기를 바란다.

 

다음에 남편에 대해서 그들은 보아스 자신이 이 결혼과 그의 후사를 통하여 풍요해지기를 빈다. 룻과의 결혼을 통해서 보아스 자신의 가명(家名)도 확립됨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가정의 미래에 대해서 백성들은 보아스가 그의 조상 베레스처럼 무수하고 유명한 후손을 거느린 가정을 갖게 되기를 기원한다. 따라서 백성들이 빈 축복의 기원문은 여호와의 날개 아래로 안식처를 찾아 온 한 이방여인 룻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지적한다.

 

룻이 보아스의 가문에 들어오게 된 사건은 단순히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사람들의 인생 승리담을 전해 주는 그런 의미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가문을 일으킨 '라헬'과 '레아', 그리고 유다가문을 일으킨 '다말'과 같은 여인들이 가졌었던 그런 기능을 감당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세계 구원사로 부름을 받은 하나의 메시야적 사건임을 지칭하고 있다. 여기서 룻은 여호와의 구원사적 도구가 되고 있다.

 

그러자 이웃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주께 찬양을 드립니다. 주께서는 오늘 이 집에 자손을 주셔서,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 늘 기리어 지기를 바랍니다.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며느리, 아들 일곱보다도 더 나은 며느리가 아기를 낳아 주었으니, 그 아기가 그대에게 생기를 되찾아 줄 것이며, 늘그막에 그대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4:14-15).

 

룻이 낳은 아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하는 여인들의 기도에 둘려 싸여 있다. 여인들의기도는, 룻기 전체를 함축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섭리적인 다스림과 보호하심을 재차 선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내용

 

1장,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계획

 

우리말 성경에는 빠져있으나 히브리어 성경은 ‘와예히’(그리고 옛적에)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말은 역사적 사건을 기록할 때 그 첫머리에 자주 쓰는 표현으로 여호수아,사사기,삼상하,에스겔등 주로 역사서의 첫부분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역사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하고있는 룻기는 배교의 시대를 보여주고 있다. 배교자의 모델인 “엘리멜렉‘, 베들레헴의 땅을 분배받은 그는 흉년이 오자 미련없이 그 땅을 떠난다. 엄연한 언약파기이다. 그 땅을 양도하거나 떠나면 안되는 것이다. 고난이 온다고 하나님을 쉽게 떠나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이것은 배교이다.

 

1절,’가다‘라는 3인칭 단수동사(바엘레크)가 사용된 것을 보면 주동자는 엘리멜렉인 것을 알수 있다. 무대의 중심은 베들레헴이다.그리고 모압이란 이방 땅과 대조적으로 나온다. 미가의 예언대로 유다의 고을 중 가장 작은 베들레헴이 다윗의 고향, 그리고 메시아의 고향이 되는 성경의 주제인, 변방이 중심이 되는,가장 작은 것을 사용하시어 강한 것을 부끄럽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모압은 이스라엘과 원수인 국가이다. 모압으로 이주한 것은 아브라함언약의 성취로 주신 땅,즉 언약에 대한 배신,언약파기인 것이다. 피흘리기까지 땅을 지킨 ‘나봇’은 ‘아합’에게 레25:23을 죽음으로 증거했는데 여기서는 먹고 살기위해서 언약을 쉽게 파기한 엘리멜렉을 소개하고있는 것이다. 더구나 언약법으로 금지한 이방결혼까지 시킨 것이다. 피언약,언약을 파기한 것에 대한 신명기의 언약적 저주는 아비멜렉과 두아들이, 결혼한지 10년동안 자식이 없이 죽고만다. 이러한 비극이 모두 언약파기에 대한 징계요,모델로 보여주는 사건이라 하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언약을 파기하고 떠난 베들레헴에는 풍년이 들었다. 하나님의 호칭에 주의하자. 6절,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것은 이 모든 사건의 주관자가 여호와임을 보여준다. ‘자기백성‘(암모:그의 백성,즉 여호와의 백성)을 권고하사, 여기서 자기백성은 언약백성의 다른 호칭이다.

 

돌이켜,돌아가다(6,10,11,12,15)라는 단어가 반복된다. 회개를 뜻하는 동사이다. 나오미는 돌이켜 하나님의 ‘헤세드’(선대)를 간구한다. (8) 언약적 관계에서의 자비를 베풀어주기를 원하는 나오미는 ‘언약’과 ‘인자’를 알고있었고 이제 돌아가서 언약백성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있는 것이다.

 

룻은 첫째 며느리와 달리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일종의 언약체결식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두고 맹세한다. (16-17)  룻은 이미 언약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언약의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룻의 고백을 엿 볼 수 있다.

 

나오미(뜻은 기쁨)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오자 온 베들레헴이 소동했다. ‘ 이가 정녕 나오미란 말인가’? 이에 나오미는 더 이상 나오미라 하지말고 마라(패역,쓰다, 출15장 참조)라 하라. 하나님(엘샤다이:전능한 하나님)이 나를 쓰게 했다. 동시에 패역,하나님을 대적했다. 매를 맞았다. 그러나 언약백성으로 다시 돌아왔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나오미의 신앙을 볼 수 있다. 회개하고 돌아온 나오미에게 하나님은 ‘고엘’을 준비시키고 계신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고엘이신 예수께서 돌아오는 자를 외면치 아니하시고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그러나 나오미는 적극적으로 고엘을 찾는 것을 보여준다.

 

때는 보리추수였다. 풍요와 함께 회복이 시작된 것이다. 이 때문에 룻기는 맥추절에 낭독되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역사를 찬양하는 절기, 새로운 출발이 시작되는 룻을 암시한다.

 

 

2장,고엘(기업무를자)의 모델 보아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인이 룻이었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약자는 고아와 과부,즉 보살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남편은 자식도 남기지 않은채, 재산도 남기지 않은 채 급사했다. 아니 하나님이 치셨다. 더구나 시어머니를 모신 룻의 현재의 모습은 떠돌이 거지였다.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간 가련한 여인 룻, 2장에서 강조되는 단어는 모압여인(2,6)과 이방인이다.(10:룻의 고백) 그러나 이와 반대되는 단어가 은혜이다(2,10,15,20) 특히 10절을 주목하라. 이방여인과 은혜가 대조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특히 20절의 은혜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자비, 긍휼인 히‘헤세드’이다.(욥29장,아브라함과 이삭이 아비멜렉에게,다윗과 요나단,다윗이 므비보셋에게,기브온족속의 원한을 풀어주는 다윗의 헤세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속에 있었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20절 ‘고엘’(기업무를 자)인 보아스를 준비해 놓고 계신 것이다.(고엘은 룻기에서 여기에 처음나온다) 가장 불쌍한 여인은 우리의 모습이며 가장 부한 자의 상징인 보아스는 ‘고엘’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한다. 20절은 ‘헤세드’와 ‘고엘’을 보아스에게 적용시킴으로 동의어로서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헤세드의 절정,최고봉은 고엘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고엘제도

 

‘고엘‘의 기본형은 동사 ‘가알‘이다. 고엘제도를 이해하기위해서는 가나안 정착시대의 가족제도를 먼저 이해해야한다. 당시는 씨족사회였는데 아버지를 중심으로 대가족의 수는 수십에서 수백으로 이해된다. 수7:16-18: 유다지파-세라족속-삽디-갈미의 아들 아간, 여기서 볼수 있는 구성은 지파-족속-가족-개인이다. 여기서 가족이 바로 아버지의 집을 가르키는 단위이다. 고엘은 이 아버지집에서 어려운 친척을 돕는 유력한 이를 가르킨다.

 

‘고엘’은 잃었던 재산 뿐 아니라 모든 것을 회복 시켜주는 사람인데 가장 가까운 친척이 고엘이 되는 것이다. (창38:7-10에서 남편이 죽으면 그 동생이 남편의 아내에게 후사를 이어주는것으로 ,다윗이 므비보셋에게,예레미야가 조카 하나멜에게) 레25:24-34절을 보면 친족에게 그 빚을 대신 갚아 주는 것으로, 신19:6,12 민35:19,수20:3에서는 피붙이 복수자로 원수를 갚아주고 재물을 회복시켜주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신25장의 언약법이다. 죽은 친족의 후사를 이어주어 그 기업을 물려받도록 해 주어야하는 것이다. 또한 고엘제도는 파산자가 없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고엘제도이다. 이사야서에서는 고엘이 구속자로 번역되어 장차오실 메시야를 가르킨다. 누가는 회당에서 예수님의 선포식때에 고엘(회복자)로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

 

이제 보아스는 룻에게 언약문구를 사용함으로 그를 통한 언약의 성취를 암시한다 4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후에 ’함께’라는 단어가 의도적으로 반복된다. (6,8,22,23)

 

우연히(3)로 시작되는 한편의 멜로 드라마같은 네레티브가 전개된다. 조연인 룻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2장에서 하나님의 숨어있는 의도를 찾아내는 것이 우리 몫인 것이다. 우연히 어느 밭에 갔다. 추수가 끝난 황량한 밭, 그런데 그 밭은 가장 가까운 친족 중 하나인 보아스의 밭이었다. 늙은 보아스와 젊은 과부의 만남, 이 극적인 네레티브속에 하나님은 놀라운 계획을 준비하고 계신 것이다.

 

보아스는 욕심을 가지고 룻에게 접근한 것이 아니다. 친족 엘리멜렉의 ‘고엘’로서 롯에게 접근한 것이다. (12)12절의 비유는 언약백성이 된 모압여인인 룻에게 언약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

 

3장,고엘과 헤세드

 

‘고엘’인 ‘보아스’는 신랑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한다면 ‘룻’은 신부인 언약백성을 상징한다. ‘나오미’는 거룩한 중매쟁이로 상징된다. 9절에서  룻은 보아스에게 당신은 ‘우리 기업 무를자’라고 한다. 이에 10절에 보아스가 그 말을 받아 ‘너의 베푼 인애(헤세드)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라고 답한다. 역시 ‘고엘’과 ‘헤세드’가 대조되며 강조된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보아스는 첫 번째 고엘이 아닌 것이다. 단 첫 번째 고엘이 거절하면 다음 친족이 고엘이 되는 것이다. 4촌 정도인 ‘고엘’이 거절하고 드디어 6촌 정도인 보아스가 ‘고엘’이 되는 것이다. 첫 번째 ‘고엘’은 자신의 재산에 손해가 날까봐서 두 번이나 거절한다. 그에게는 ‘헤세드’가 없는 것이다. 이제 공은 자연스럽게 보아스에게로 넘어갔다. 보아스는 정식절차를 밟아(공증) 고엘이 된 것이다.

 

 

4장,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룻기는 히브리 네레티브의 진수를 보여주는 성경이다. 그 중에 4장은 인물을 대조하며 (보아스와 다른 고엘) 극적으로 이어진다. 이는 1장의 오르바와 룻의 대조와 비교된다. 룻은 나오미에게 헤세드(선대)를 베풀고 보아스는 헤세드를 베푼 룻에게 헤세드(은혜)를 베푸는 헤세드의 순환원리를 보여준다.

 

4:12절에는 모든 증인들이 룻이 보아스에게서 낳은 상속자가 다말이 유다에게서 낳은 베레스의 집처럼 되기를 빌어준다. 바로 유다지파의 계보에서 이어지는 거룩한 하나님의 계획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다. 

 

후사가 없었던 보아스의 집에 드디어 아들이 태어났다. 이름을 ‘오벳’,‘오벳’은 ‘아바드’의 능동 분사형으로 ‘섬기는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어 ‘베레스’에서부터 ‘다윗’까지 이어지는 계보가 소개된다. 언약의 성취를 강조하고 있다. 

 

이 족보는 헤세드의 족보인 것이다. 대가 끝어질 수 밖에 없었던 보아스에게 헤세드를 베푸신 하나님, 보아스는 늘 헤세드를 베풀어온 것이 그에게 놀라운 축복이 되었다. 또한 대가 끊어진 나오미의 집안에 아들을 주심으로 계보가 이어지는 놀라운 축복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속에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축복과 기적가운데 다윗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끝으로 룻기1:18절의 선대(헤세드)는 룻이 나오미에게 베푼 것이다. 여기서 오르바는 헤세드를 베풀지 않아서 탈락한다. 4장에서는 기업무를 자(무명으로 등장)는 헤세드를 베풀지 않지만 보아스는 헤세드를 베푼다.하여 하나님은 그를 통해 다윗과 예수그리스도를 허락하신다. 성경전체의 주제인 헤세드가 강조되는 것이다. 인물들의 대조를 통해 헤세드를 강조하고있는 것이다.

 

장소의 대조적 배치도 눈에 띈다. 모압과 베들레헴이다. 이방과 성경의 중심지역인 베들레헴이 대조되며 하나님의 언약(베리트)이 베들레헴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강조한다.

마라(슬픔)와 나오미(기쁨)의 대조도 이와 같다.

 

 

 

 

 

 

룻기의 구속사적 해석

 

 

룻기는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고부간의 사랑을 묘사하고 있는 대표적인 책으로 알려져 있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인 룻과의 관계를 통해 보여지는 하나님에 대한 룻의 고백적인 신앙을 통해 인생역전에서 추락한 나오미의 인생이 새롭게 쓰여지는 놀라운 일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룻기가 성경 계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룻의 효행을 강조하거나 그것으로 인해 교회가 효를 주장해야 한다는 명분을 제시하기 위함이 아님을 분명해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룻기에 대한 구속사적인 이해를 통해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행하시는 구원사에 대한 이해를 구해야 할 것이다.

본문에서는 이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룻기의 메시지를 추구함으로써 구속사에서 룻기의 위치를 재확인하고자 한다. 

 

1. 룻기의 주제

 

룻기의 주제를 밝히기 위해선 먼저 성경에서 룻기의 위치를 규명해야 한다. 왜냐하면 룻기의 위치를 규명함으로서 그 주제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히브리 성경에서 룻기는 잠언과 아가서 사이에 위치한다. 어떤 학자들은 먼저 오경과 선지서가 편집된 후 나머지를 모두 성문서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잠언의 마지막 31장은 이상적인 통치자와 현숙한 여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룻을 현숙한 여인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여 잠언의 뒤에 위치시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보아스를 유력한 자라고 할 때 그의 상대인 룻은 현숙한 여인이라는 점에서 잠언과 밀접한 관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룻기의 내용을 보면 룻기가 단순히 현숙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룻기의 배경이 사사 시대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다윗의 족보로 끝맺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룻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이런 점에서 룻기는 다윗 왕조의 역사와 긴밀한 관계가 있으며 단순히 효성 많은 여인의 이야기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성경에서 각 권의 순서를 정하는 것에는 분명한 목적이나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사사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다윗 왕국의 형성 과정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사사기와 사무엘서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 본문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히브리 성경 방식대로 룻기가 잠언과 아가서 사이에 위치하는 것은 내용상으로도 연결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 잠언과 아가서는 어떤 특정한 역사를 배경으로 하지 않는 내용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저작으로 알려진 잠언과 아가서는 특정 시대나 역사와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렇게 룻기를 사사기와 사무엘서 사이에 위치하게 하면 룻기의 주제는 더욱 분명해진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실패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열왕기서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비록 사사기나 열왕기가 이스라엘 역사를 와해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는 구속사로서 인류 역사와 함께 지속되어야 했던 것이다.

 

때문에 룻기는 실패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전개될 새로운 진로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의미를 가진다. 막다른 길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사 시대의 역사로부터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실 구속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역사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따라 진행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실패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즉 사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 대한 신앙이 부패할 때 그들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로 전락하지만 그들이 다시 여호와를 찾게 되면 심판의 길에서 구원을 받게 된다. 이것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가 하나님에 의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 룻기의 구속사적 해석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과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도도히 약속되어온 메시아가 과연 구체적으로 누구인가에 대한 것이다. 즉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된 '여자의 (그) 후손'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 '약속의 씨'로서의 '여자의 후손'은 이후 노아의 후손(창 9:1, 8-9)으로 좀더 구체화되었고, 또한 아브라함의 후손(창 12:1-3)으로 압축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서 인류 구원의 소망을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계속해서 이 언약의 씨는 점차 다윗에게로 초점을 맞추게 되는데, 하나님은 '다윗의 왕권을 계승한 다윗의 후손'(삼하 7:7-17)을 통해 언약을 완성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1)이스라엘의 패역

 

룻이 등장하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사사시대라는 점을 볼 때, 그 시대는 갈수록 부패하고 암울한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사사기에서 볼 수 있듯이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거룩한 문화를 세워나가는 일을 등한시하고 오히려 바알과 아스다롯 우상을 섬김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다(삿 2:11-15).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하는 것은 저희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가나안으로 인도하심으로서 일전에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을 성취하시고(신 7:8-9), 그 약속에 따라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으로 선별하여 이방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로 세워 구원의 빛을 비추는 거룩한 나라와 문화를 건설하고자 하셨던 것이다(출 19:4-6).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크신 권능에 힘입어 가나안을 점령할 때부터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자태가 온전히 드러나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따라 세속과 구별되어 살고, 그 삶의 형태가 거룩한 문화로서 빛을 발해야 하는 것이다. 이 영향력이 온 세상에 나타나 창조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증거하고, 나아가 이방인들에게 참 신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어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오게 함으로서 온 땅에 구원을 이룩하는 제사장 나라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 가지고 있던 시대적 사명이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사명에 충실하지 못하였고 도리어 가나안 땅에 만연되어 있던 우상인 바알과 아스다롯을 숭배하는 악에로 빠져들고 있었다. 당시 가나안 땅에 만연하던 우상인 바알(BAAL)은 그즈음 중동 지방에서 큰 세력을 차지하고 있던 태양신이었다. 이 바알은 바람과 폭풍우를 주장한다고 믿어지고 있었다. 바알의 여신으로는 아스다롯을 섬겼는데, 이 신은 풍요의 신으로 알려졌으며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가나안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에게 제사를 드릴 때에는 온갖 화장과 치장을 하면서 화려하게 축제를 행하던 관습이 있었다. 40여 년 간 광야에서 살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축제란 무척이나 호화스러웠고 마음이 혹할 정도로 화려했기에 조금씩 동요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강한 의식이 있었지만 점차 이스라엘이 가져야 할 시대적 사명에 대한 의식에 대해 무감각해지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약해지자 그 자리에 서서히 우상 숭배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 본연의 모습을 상실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내로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삿 3:6)는 말과 같이 점차 가나안 족속들에게 동화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당시엔 종교가 일상 생활에서 기본적인 의식 구조를 이루고 있었음을 볼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고 가나안 사람들의 신들을 섬겼다는 것은 그들과 문화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크게 다를 바 없는 처지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이것은 마치 아담의 아들 셋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불리움 받았기 때문에 의당히 가인의 후손들과 구별되어 순결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어야 했으나, 도리어 가인의 후예들과 교합하여 그 성별된 특성을 잃어버린 끝에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던 것과 같다(창 6:1-4).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를 구현함으로써 그분의 백성다운 품성을 온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구별되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그 자태를 잃고 가나안 사람들과 섞여 점차 동화되어 간다는 것은, 이제 그들에게 큰 위기가 가까웠고 하나님의 심판이 멀지 않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2)여호와의 심판

 

일찍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기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신 8:19, 30:17-18)고 경고한 바 있다.

 

동시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신 5:32-33)는 축복의 약속도 주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경고하신 것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재앙을 내리시기로 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진 가나안 땅에 흉년과 기근이 든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고 있다는 하나의 표징이다. 이러한 때에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이 그 가족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룻 1:1-2). 하나님의 백성이 약속의 땅에 살지 못하고 이방 땅으로 피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 땅에서 쫓겨남을 상징한다.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엘리멜렉은 모압에 귀화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흉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나그네처럼 살고 있었다.

 

모압 족속은 소돔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할 때 구사일생으로 구출된 롯과 그의 큰 딸 사이에서 태어난 백성으로서(창 19:31-38)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하던 민족이었다(신 23:3). 엘리멜렉은 잠시 재앙을 피하고자 했으나 그가 죽어버리자 나머지 식구들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그만 10여 년을 덧없이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두 아들 말론과 기룐마저도 죽어버리고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두 자부인 오르바와 룻만 남아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중시하여야 할 것은 엘리멜렉이 이스라엘 백성이었기에 의당히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떠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어떠한 경우에도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나갔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멜렉이 모압으로 이주했다는 것은 그가 더이상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사명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두 아들마저도 아버지가 죽은 후 속히 이스라엘로 돌아갈 생각을 못하고 모압에서 머뭇거리다가 횡사하고 만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받은 이스라엘의 한 지체로 태어나 그 본연의 가치를 내보이지도 못하고 이처럼 세 사람이 의미 없는 인생을 살다가 무가치하게 가버린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지 못한 이스라엘에게 임한 심판의 결과였다.

 

비록 저희가 하나님의 계시를 가진 구원의 백성이며 제사장 나라의 백성으로 불리움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에 대한 의식이 불분명해질 때에는 그 인생의 가치도 펴보지 못한 채 죽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거룩한 사명을 행사하지 못할 때에는 버림을 받고 무의미한 생을 살다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절망 가운데서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아보시어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게되었고 결국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두 자부들에게는 각기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하였다. 그녀들에게는 더 이상의 소망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룻 1:6-14). 그러나 이때 룻은 강권하는 나오미의 말을 뿌리치고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로 가겠다고 고집을 하고 나섰다.

 

"나로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이다"(룻 1:16)는 자부의 간절한 설득에 나오미는 룻을 동반하고 베들레헴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3)회복을 위한 여호와의 계획

 

베들레헴에 돌아온 룻은 엘리멜렉의 친족인 유력한 사람 보아스를 만나게 되고 보아스의 옷자락(옷자락을 지칭하는 단어는 룻기 2:12에 나오는 하나님의 '날개'와 같은 의미이다) 아래 보호를 받고, 마침내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를자(고엘:대가를 대신 지불함, 룻 3:9)가 되어 혼인을 함으로서 무너진 엘리멜렉의 가문을 다시 세우게 된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족의 위기에 몰린 엘리멜렉의 가문이 다시 회복됨으로서 이스라엘이 망각했던 시대적 사명을 다시 준수할 수 있는 지위로 회복되었음을 상징해 주고 있다.

 

이러한 의미는 성문의 백성들과 장로들이 보아스를 향하여 축복하는 말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증인이 되노니 여호와께서 내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 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룻 4:11-12)는 축복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축복은 사실상 룻의 장래와 관련하여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예언이다. 왜냐하면 첫째, 룻이 라헬과 레아가 열 두 아들을 낳은 것과 같이 이스라엘을 세울 조상이 될 것이라는 사실과, 둘째, 다말과 같이 유다의 혈통을 세워 왕적 사역을 드러낼 후손을 낳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룻이 이스라엘의 조상인 라헬과 레아의 역할을 대신하고 이스라엘의 왕권을 약속 받은(창 49:10) 유다의 가계를 이을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그 속에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이 예언에 따르면 룻이 낳을 아들은 장차 야곱의 뒤를 이어 새 이스라엘의 시조가 될 것이며 그는 유다의 왕권을 계승할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룻이 아들을 낳은 후 나오미가 그 아이를 품에 안을 때 여인들이 찬송하기를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로다"(룻 4:14)고 한 축복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축복 속에서 우리는 나오미와 새로 태어난 아들간의 관계를 심상히 살펴보게 된다. 왜냐하면 나오미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이미 그 사명을 잃고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사람이었는데(1:20-21), 새로 태어난 아이가 나오미의 생명의 회복자라고 한 것은 새로운 희망이 되기 때문이다.

 

위의 두 가지의 축복을 종합해 볼 때 룻에게서 난 아기는 단순히 나오미의 슬픔을 위로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야말로 지금까지 사명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멸절당한 이스라엘의 회복자로서 새 이스라엘의 시조가 될 것이며, 진정한 왕권을 상속할 자로 무너진 이스라엘에게 새 생명을 가져다 줄 진정한 통치자가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이 예언의 역사적 성취는 마침내 다윗에게서 완성됨으로써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그 본연의 위치를 회복하는 것으로 그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회복된 이스라엘의 사명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적으로 완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6; 18:1; 19:1; 21:25)는 사사기의 반복적인 후렴 구는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을 통하여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에게 왕정 제도가 도입되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사무엘서는 이 필요성과 더불어 마침내 왕정 제도가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게 된 배경과 다윗 왕국의 출현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사이에 있는 룻기는 사사기와 사무엘서의 징검다리로서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곧, 다윗 왕의 탄생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을 볼 때 룻기는 단순히 이스라엘 사람 중 하나인 엘리멜렉의 가정사를 이야기하거나 현숙한 여인으로서 시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한 룻의 이야기이거나 혹은 수혼법과 기업무름을 통해 유력한 자로 등장하는 보아스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특히 룻기의 배경으로 베들레헴이 등장한다는 것과 그곳으로부터 다윗이 출생한 것, 나아가 영원한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곳이 베들레헴이라는 점은 룻기의 주제가 이스라엘의 구속사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게 한다.

 

 

 

 

 

 

 

 

 

                           예레미야 애가

 

 

 

애가서의 제목은 본서의 첫 단어인 ‘애카’에서 시작되었다. 감탄사의 ‘아’ ‘오’(삼하1:19,렘9:19)로 번역된다. 기록연대는  주전 586년 예루살렘 멸망 후 이집트로 잡혀가기 직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멸망 직후인 586-585년 사이가 될 것이다. 유대인들은 유다의 멸망과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을 잊지않기 위해서 아빕월 (7월15-8월15) 제 9일 째 되는 날 애가서를 읽는다. 다섯 두루마리중에 아가서는 유월절, 룻기는 오순절 ,전도서는 장막절, 에스더서는 부림절에 낭독된다. 우리말 성경과 달리 애가의 히브리어 성경의 배열은 예레미야 다음이 아닌 다섯두루마리에 속해있다.

 

역사적배경

 

주전588년-586년까지 바벨론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었다. (왕하25:1-10) 처음에는 흥분하여 전의를 불태웠던 백성들은 점차 두려움과 공포로 바뀌었다. 유다의 동맹국인 이집트는 바벨론을 구하려다 패배했고 유다의 모든 성들은 파괴되었다.(렘34:6-7)

 

이제 예루살렘만 남은 채 포위되었고 멸망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굶주린 부모들은 자기아이를 먹기까지 하는 참담한 일이 벌어졌다.(애2:20,4:10) 백성들은 어느 신이든 자신들을 구해 줄 것을 간절히 원하는 우상숭배가 극에 달했다.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들은 반역자나 첩자로 몰려 죽음을 당했다.

 

드디어 586년7월18일, 성벽이 뚫리고 약탈이 시작되었다.(왕하25:2-4) 시드기야는 포로로 잡혔다. 8월 14일까지 약탈이 자행되었고 이후 파괴가 시작되었다. (왕하25:8-10) 그들은 성전을 비롯한 모든 중요한 건물과 성벽을 헐었다. 예레미야는 불타는 성전을 바라보며 ‘애가’를 부르게 되었다.(렘39:1-14,52:12-14)

 

 

기록목적

 

애가의 내용은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성의 함락,성전파괴에 대한 비탄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한 반성과 언약과 헤세드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회복이  목적이다.

 

 

특징

 

예레미야는 다윗언약보다 시내산언약을 더 중요시 했다. 그리하여 모압언약인 신28장의 언약적저주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애가                                               신명기28장

 

1:3 ‘저가 열방에 거하여 평강을 얻지 못함이여’    28:65 ‘ 그 열국 중에서 네 평안을                                                              얻지 못하며’

1:5 ‘저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                      28:44 ’그는 머리가 되고‘

1:5‘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 잡혔도다’    28:32 ‘네 자녀를 다른민족에게 빼                                                                  앗기고’

1:6                                               28:25

1:18 ‘사로 잡혀 갔도다’                            28:41 ‘포로가 됨으로’

2:15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소하고’                  28:37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

2:20 ‘아이를 먹으오며’                       28:53 ‘네 몸의 소생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

2:21                                               28:50

4:10                                               28:56

5:2                                                 28:30

5:5                                                 28:65

5:10                                                28:48

5:11                                                28:30

5:12                                                28:50

5:18                                                28:26

 

언약 파기에 의한 언약적 저주의 성취로서 애가를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신30장과 같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영원한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데에 애가서의 더 큰 기록 목적이 있다. 애가서5:21-22절의 기도는 언약적자비를 호소하는 간절한 기도이다.

 

애가서의 구조

 

애가서는 다섯장의 장례식 형태를 띤 시이지만 각 장은 독립되어있다. 삼하1:17-27절에서 애가는 장례식에서 사용되는 슬픔을 표현한 것이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장례식을 당한 것 같은 슬픔으로 선포한다. 다섯장 중에 세장의 첫 머리에 ‘애카’를 반복한다. (1:1,2:1,4:1)

 

장례식 형태를 띠고 있는 두 번째는 1-4장에서 자주 사용되는 ‘퀴나’(qlnah)이다. 퀴나의 리듬은 뒤에 나오는 구절이 앞에 나오는 구절보다 조금 작은 운율의 형태를 띠고 있다. 3+2의 고르지 않는 운율은 듣는이로 하여금 극히 불완전한 느낌을 준다. 이는 애가에 슬픈 감정을 더하고  있다.

 

1.아크로스틱(Acrostic)

 

1-4장에 나타나는 아크로스틱배열은 번역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아크로‘는 ’끝에‘ 라는 말이고 ’스틱코스‘는 ’시‘라는 말의 그리스어로서 ’답관체‘라고도 한다. 첫머리글자로 시작되는 단어를 일렬로 배열하면 단어나 문장이 되거나 알파벳의 첫머리 글자로 시작되는 문장으로서 시편에 자주나오고 있다.

 

1,2,4장은 알렙으로 시작하는 22절로 되어있다. 3장은 애가서의 중심인데 66절로 되어있다. 처음 3절은 알렙 그다음 3절은 벧드로 시작된다. 그러나 5장은 22절로 되어있지만 아크로스틱이 아니다. 아크로스틱은 외우기 쉽게 혹은 노래로 불리워지는 것이기에 애가를 장례식 노래로 부르며 슬픔을 잊지말자는 의도인 것이다.

 

2.교차대귀법

 

1-2장과 4-5장은 서로 평형을 이루는 교차대귀법을 사용하고 있다. 2,4장이 하나님의 관점을 강조한다면 1,5장은 인간적관점을 강조한다. 3장은 예레미야의 슬픔을 표현하며 애가의 중심을 이룬다.

 

                            예레미야의 반응(3)

 

       하나님의 심판(2)......................................................여호와의 진노(4)

     예루살렘의 훼파(1)..................................................남은 자들의 반응(5)

 

1-4장은 ‘애카’와 ‘퀴나’를 반복한다. 그리고 5장에서 언약기도를 드리며 백성들의 회개를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내용

 

1장,인간적 관점

 

1:1절은 ‘슬프다 이 성이여’ 2:1절은 ‘슬프다 주께서‘  이 두장의 시작은 병행구의 대귀법을 통해 슬픔을 강조하며 배가시킨다. 1장은 인간적 관점에서 2장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유다 민족의 장례를 치르는 형식으로 기록되었다.

1장에서 다섯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응답은 없었다. (2,9,16-17,21) 오히려 위로하는자도 없었다고 고백한다. 응답도 없고 위로도 없다 .

 

두개의 그림이 1장에 나타난다. 외부인이 보는 광경(1-11)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는 장면이다. 12-22절은 의인화된 예루살렘이 지나가는 자를 불러 세워 자신의 상태를 관찰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안에서 밖을 보는 것이다.

 

1절에는 예루살렘을 과부와 공주로 의인화시켜 절망적 상태를 표현한다. 바벨론포로는 주전 605년부터 538년까지 계속되었다. 절기때 순례자로 가득찼던 예루살렘은 황폐했고 성전도 폐허가 되었다. 제사장들은 탄식했고 예배는 그쳤다.

 

멸망의 원인은 5절 언약파기였다. (우상숭배=언약파기)

이제 12절부터 언약적 자비를 호소하는 기도를 드린다.

 

 

 

 

2장,하나님의 관점

 

백성과 성을 몰락시킨자는 다름아닌 하나님이셨다.  계속 ‘주께서 ’라는 단어가 반복된다. 2장에서 예레미야는 다섯장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첫째 그림:11-12절은 기근이다. 아이들이 당하는 전쟁의 참상과 고난

두 번째 그림:13절은 위로가 없는 성

세 번째:14절은 거짓선지자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촉진시켰다.

네 번째:15-17절은 적의 조롱

다섯째:18-19절은 남은자들의 언약적자비에 호소하는 기도

 

3장,예레미야의 관점

 

3장은 애가서의 중심이다. 1,2장과 4,5장 사이의 일종의 샌드위치기법이다. 모두가 22절인데 3장만 66절이다. 세배에 해당된다. 반복되는 일인칭은 의인화된 예루살렘이다. 그러나 일인칭단수가 40절부터 복수인 ‘우리’로 전환된다. 인칭의 변화는 주위를 환기시키어 강조하려는 것이다.  예루살렘(유다)의 죄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기법이다.  48절부터 다시 일인칭 단수로 전환된다.

 

히브리 성경 22절의 첫 단어는 ‘헤세드’로 시작된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 이니이다.’ 나라가 망한다고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언약적 저주인 징계일 뿐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은 다시 회복케 하신다는 것이다.

 

헤세드를 회상 할 때에 언약적 자비가 아침마다 새롭다. 언약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 말이다. 하여 성실하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자는 것이다.

 

신28장의 언약적 저주에서 신30장의 언약적 축복으로 바뀌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그러므로 40절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 돌아가자’

 

 

 

고난의 7가지 원칙

 

1.고난은 하나님의 구원 즉 긍극적 승리와 회복을 위한 것이기에 소망을 가지고 견뎌야 한다.(25-30)

2.고난은 잠시이며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알면 이길 수 있다.(31-32)

3.하나님은 고난을 기뻐하지 않으신다.(33)

4.고난이 불의하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34-36)

5.고난은 항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37-38)

6.고난은 유다의 죄 때문이다.

7.고난은 언약백성을 돌이켜 선을 이룬다.(40)

언약과 헤세드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신실하신 하나님은 반듯이 언약을 지키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예레미야의 언약기도(41-66)

 

우리(복수)로 시작된 기도는 48절부터 다시 ‘나’(단수)로 전환된다. 일인칭은 언약백성의 대표인 예레미야 자신이다. 마치 민족의 운명을 놓고 언약기도를 드렸던 모세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언약기도를 드리고 있다. 파멸에서 돌이켜 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이어진다.(48-49) 그리고 응답을 받는다.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56)

 

4장,여호와의 심판

 

4장은 2장과 같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러면서 소돔(6)과 에돔(21)에 비유한다. 그러나 그들과 다른 것은 언약백성을 향한 ‘헤세드’로 인하여 회복된다는 것이다.

 

5장.언약적자비를 구하는 기도

 

1인칭 복수로 시작된다. 그리고 11절부터 3인칭으로 바뀐다.  15절부터 다시 1인칭으로 전환되는 인칭의 변화에 유의하자. 22절이 먼저 읽히고 21절이 나중에 읽혔다. 언약적축복을 기대하는 긍정으로 마쳐진다. 영원한 언약은 유다의 범죄로 인해 소멸되지 않는다. 우리가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가면 헤세드의 하나님께서는 언약적저주를 언약적 축복으로 바꿔주실 것이다

                             에스더서

 

 

 

역사적배경

 

에스더서는 페르시아(주전539-331)가 세상을 확장할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대,고레스-2대,칸비세스-3대,다리오1세(선지자는 학개 스가랴)-4대,아하수에로(에스라,느헤미야)-5대,아닥사스다(느헤미야가 활동)로 이어지는 페르샤에서 바벨론 포로이후 5만명 정도는 귀환했으나 대부분은 돌아가지 않았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아하수에로’(히브리어표기)는 ‘크세르크세스’(영어표기:주전485-465)이다.

 

에스라7:1절에 나오는 ‘아닥사스다’는 ‘아하수에로’의 아들이다. 에스더의 사건은 20년이 넘는 기간동안의 기록이며 주전 483년(즉위3년,에 1:3)에서 주전 473년(즉위12년 말 ,에3:7)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에스더서는 성경 가운데 하나님,여호와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더욱 강하게 입증하는 것이 된다. 또한 율법이나 언약,제사등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지 않은 것은 귀환공동체와 달리 불순종한 사람들 혹은 믿음이 적은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하여 동 시대의 기록인 에스라 느헤미야와 전혀 다른 믿음의 시각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겨진 사람들,미미한 사람들,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 역시 언약백성이며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에스더서인 것이다. 또한 남은 백성들은 현실에 안주하는 자들이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다루실 때에 고난을 통해서 성도를 다루시는 분인 것을 알 수 있다.

에스더서의 수신자를 생각해 보자. 1차 수신자는 페르시아에 남겨진 사람들과 귀환공동체이다. 귀환공동체는 성전재건의 어려움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귀환공동체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백성들을 끝까지 보호하시고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알려줌으로 그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 에스더서의 기록목적인 것이다.

 

구조

 

에스더서에 나오는 ‘잔치’는 20번이나 반복된다. (네레티브에서의 반복을 통한 강조,달라스신학교,강해설교의 권위자들의 훈련방법:영상을 보여주며 인물,물건을 체크)특히 2번의 잔치로 시작해서 두 번의 잔치로 끝나며 이 사이에 반전의 네레티브가 삽입되는 일종의 샌드위치 기법을 통한 극적인 효과를 더해주고 있다.

또한 교차 대구법을 사용해서 극적인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잔치로 시작되는 네러티브의 마지막 절정은 부림절의 잔치로 끝난다.

 

 

a1.귀족을 위한 잔치(1:2-4)        a2.유다인의 첫 번째 부림잔치(9:17,19)

b1.수산인을 위한 잔치(1:5-8)  b2.수산 유다인들의 두 번째 부림잔치(9:18)

c1.에스더 왕후 즉위식잔치(2:18)    c2.모르드게의 등극을 위한 잔치(8:17)

d1.왕과 하만을 위한 에스더의 첫 번째 잔치(5:1-8). d2.왕과 하만을 위한 에스더의 두 번째 잔치(7:1-9)

 

 

교차대구법

 

3:10  왕이 하만에게  반지 줌             8:2 왕이 모르드게에게 반지 줌

3:12  하만이 서기관 소집                   8:9 모르드게가 서기관 소집

3:12 조서후 반지 인침                      8:10 조서 후 반지 인침

3:13 유다인들과 처자 학살 명령             8:11 대적 학살

3:14 하만의 조서가 선포             8:13 모르드게의 조서가 법으로 선포

3:15 역졸이 급히 나감                      8:14 같음

3:15 수산성 전체가 어수선 함               8:15 수산성이 기뻐함

4:1 모르드게가 굵은 베를 입고 재를 무릅 씀 8:15 모르드게가 왕실의 조복                                                    을 입음

4:1 모르드게의 대성통곡                    6:11 모르드게가 존귀케 됨

5:14  세레스(하만의 아내)의 충고           6:13 세레스의 예언

 

에스더서의 절정은 반전에서 보여준다. 에스더의 첫 번째 잔치(5장)와 두 번째 잔치(7장)사이의 ‘왕의 잠못 이루는 밤’(6장)에 일어난다. 이것이 반전이다.

6장에서 에스더와 모르드게의 행위는 없다. 보이지 않는 힘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개입하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것이 6장에 나오는 우연의 연속이며 극적인 반전을 이룬다. 6장을 중심으로 데칼코마니 기법을 보여준다.

 

 

신학적 특징

 

1.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유다의 멸망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의 질문은, 하나님은 과연 살아 역사하시는가? 다윗언약은 영원한가? 우리는 아직도 언약백성인가? 하는 것들이다. 그들은 실망 중에 하나님의 이름도 부르지 않고 제사,토라를 멀리하는 삶을 살고있었다. 이런 그들에게 직접적인 선지자들의 말씀도 필요했지만 오히려 믿음이 연약한 이들에게 간접적인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2. how의 문제이다.

 

믿음이 있어도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에스더서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함께하심과 지키심,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여준다. 연약한 그들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유사하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우연의 연속 속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우심)

 

3.하나님나라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여준다.

 

다니엘서의 주제를 참조해 보자, 다니엘서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준다. 또한 다니엘과 친구들의 적극적인,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 준다면 에스더의 등장인물들은 소극적인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반기독교적인 세상에서 승리하는 모습을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해답을 주고 있다.

 

4.부림절에 대한 역사적 기원 및 신학적 권위를 부여한다.

 

유대인이 멸망(대적)에서 벗어나서 평화를 얻음을 기뻐하는 절기이며,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종말론적 소망을 주고 있다. 

 

 

 

내용

 

1장:잔치

 

1. 아하수에로 왕이 큰 잔치를 벌이다.

  1) 넓은 땅(인도로부터 구스까지/127지방)

  2) 그의 나라의 부유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드러냄(180일 잔치/지방 귀족과 관료들을 초청)

  3) 180일의 잔치후 수산에서 추가적인 7일간의 잔치(풍성,법도,)

 

2. 생각지 못한 사건(와스디의 페위로 이어짐)

  1) 왕후 와스디가 왕의 부름에 거절하는 사태가 벌어짐

  2) 왕이 진노하여 마음 속이 불 붙는 것 같음(12절)

 

3. 왕이 이 문제를 법도 있게 처리하는 과정

  1) 왕이 이 사건을 현자들에게 묻고 자문을 구함.

  2) 왕비의 폐위로 이어지고 그와 같은 케이스가 없도록 조서를 내림: 여인들은 남편을 존경하라!

  3) 남자의 권위가 더욱 강해졌다.

 

 

[요점]

1. 아하스에로 왕의 권세란 매우 큰 것이다.

2. 왕의 권위에 반하는 작은 일로 말미암아 와스디가 폐위되다.(훗날을 위한 설정)

3. 남자는 권위는 강해지고, 여자의 위치는 더 약해졌다.

 

반복되는 표현은 ‘잔치’(3,5,9)이다.  중심인물은 아하수에로 왕이다. 바사의 경계는 인도에서 구스까지 127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막강한 힘과 부를 가진 나라로 묘사된다. 그러나 다니엘서의 주제와 같이 영원한 나라는 하나님나라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다니엘서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개입을 보여준다면 에스더서는 간접적인 하나님의 개입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나라의 영원성을 강조한다. 세상나라가 거대한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나라의 승리이다.

 

127이라는  숫자를 통해 페르샤의 거대함을 과장 할 정도로 표현하고 있다. 바사와 메데는 고레스에 의해 통일된다. 고레스의 아버지는 바사인,어머니는 메데인이었다. 이것을 축하하는 잔치가 180일 동안 펼쳐진 것이다. 역시 6개월 보다는 180의 숫자를 쓰는 이유도 나라의 거대함과 막강함을 표현한 숫자이다.(6절의 휘장 셋과 보석 넷의 합 7, 5절의 7일 잔치, 14절의 7방백의 완전수7, 10절의 칠일에 7사람)

 

세상나라의 특징은 물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물질과 잔치로 부하들을 통제하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왕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는 세상나라와 보잘것 없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나라 그러나 영적인 나라의 대조를 에스서는 보여준다.

 

두 번째 장면은 왕의 절대 권력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왕후 와스디의 폐위사건이다. 왕의 명령에 불응한 왕후를 일언지하에 폐위시키는 막강한 힘을 보여준다. 세상나라의 특징은 힘과 권력이다. 그런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에스더서의 주제이기도 하다.

 

2장:에스더의 즉위

 

에스더의 왕후 피택, 모르드개가 반역자 신고(공로)

1. 왕이 새로운 왕후를 뽑게 됨

  1) 전국 각 지방에서 아리따운 처녀들을 다 수산 궁으로 불러 모음

  2) 그 중에 왕이 선택한 여인을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로 삼으려 함.

 

2. 수산 궁에 살고 있는 유다인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등장

  1) 모르드개는 포로로 잡혀왔던 유대인이고, 사촌인 에스더를 딸처럼 키웠다.

  2) 그 때 이뻤던 에스더도 수산 궁으로 뽑혀 갈 수 밖에 없었다.

  3) 에스더는 다른 여인들보다 은혜를 받았다.

  4)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유대인임을 밝히지 않았고, 모르드개는 날마다 에스더의 안부를 물었다.

  5) 처녀들은 왕에게 나가기 전에 12달 동안 잘 가꾼다음 순번에 따라 왕에게 하룻밤 들어갔다가 나오는데, 다시 부르지 않으면 그대로 끝이다.

  6) 에스더가 나아갈 때가 되었는데, 에스더는 모든 여자보다 더 사랑받고 은총으로 받아 와스디를 대신해 왕후가 되었다.

  7) 왕이 왕후를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다.

 

3. 모르드개가 왕의 목숨을 구하다.

  1) 처녀들을 다시 모을 때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있다가 반역자들의 음모를 알게 됨

  2) 모르드개는 그 사실을 에스더에게 알리고,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알렸다.

  3) 조사가 들어갔고, 실증을 얻게 되어 두 사람은 죽고 그 일은 궁중 일기에 기록되었다.

 

[요점]

1. 그와 같은 상황에서 에스더라는 유대인 여자가 왕후가 되는 은총을 얻게 되었다.

2. 에스더는 모르드개와는 사촌인데, 모르드개가 거의 딸처럼 키우다 시피했다. 모르드개의 말에는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관계였다.

3. 모르드개는 궁전문에서 반역자를 신고하는 작은 공로를 얻었다.

4.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모르드개는 에스더가 유대인임을 밝히지 않도록 했다.

 

16절에 보면 아하수에로왕 7년에 에스더가 왕후가 된다.(주전 479년) 이야기는 바뀌어 모르드게를 유다인으로 먼저 강조한다. 이것이 에스더서 네러티브의 주제이다. 에스더서는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이 이방에서 살아가는 애환을 보여주고 있다.  모르드게의 족보를 소개하면서 ‘야일’의 아들,시므이의 손자,기스의 증손,베냐민지파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느브삿네살이 예루살렘을 침공 할 때, 여고냐(주전587년 왕하24:6-17)와 함께 잡혀간 자로 소개하고 있다. 6절의 관계대명사인 ‘누가‘ 잡혀갔느냐는 것은 그의 조상을 가르킨다. 

 

모르드게의 족보와 하만의 족보는 대조를 이루면서 서로 원수관계의 대결구도를 보여준다. 영적싸움이며 하만의 조상인 아각과 그를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사울의 후손간의 치열한 영적싸움 ,그리고 그 배후의 사단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제 모르드게의 소개후에 에스더의 소개로 넘어간다. 에스더는 모르드게의 삼촌의 딸로서 고아이며 히브리어 이름은 ‘아닷사’이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숨긴채 살아간다. 그러나 9절의 은혜(헤세드)는 언약관계에서 사용되는 단어로서 하나님(여호와)의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의 언약백성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에스더가 후궁이 된 것은 에스더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헤세드인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17절에서도 왕이 헤세드(은총:원어성경에는 은총과 은혜의 두 단어로 되어있다)를 베푸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헤세드가 왕을 통해서 베풀어지는 것을 강조한다.

 

헤세드는 에스더서의 주제이다. 하나님은 언약백성을 사랑하셔서 귀환공동체에도 헤세드를 베풀지만 이땅에 남은 자들에게도,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도, 의심이 많은자도, 동일하게 헤세드를 베푸시는 분인 것을 보여준다.

 

3장,하만과 모르드게의 영적대결,배후의 영적세력

 

유대인들에게 닥친 생각지 못한 위기

 

 

1. 하만의 등장과 유대인들에게 닥친 위험

  1) 왕이 하만의 지위를 높이고 왕이 명하여 모든 신하들은 하만에게 절하도록 했다.

  2)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절하지도 않았다.

  3) 왜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가 묻자 모르드개는 자신이 유대인임을 밝히며 그 이유를 든다.

  4) 하만이 그 사실을 알고 진노하는데, 모르드개가 유대인임을 알고는 그 민족을 멸하고자 했다.

 

2. 하만이 유대인들을 멸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실행하다.

  1) 하만이 부르 곧 제비를 뽑아 12째 달 곧 아달월을 얻었다.(왕 11년 첫째달에)

  2) 한 민족이 이 민족의 법률과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않는데 이를 용납하는 것은 왕에게 무익하니 제거하도록 요청. 하만은 그 일을 위해서 은 일만 달란트를 왕의 국고에 드리겠다고 하자, 왕은 그에게 자신의 반지를 주어 소견에 옳은 대로 할 수 있도록 했다.

  3) 하만은 왕의 서기관들을 소집하여 왕의 이름으로 조서를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치고, 12째 달 13일에 하루동안 유대인을 남녀노소 상관없이 도륙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라고 명령했다.

  4) 역졸이 왕의 명령을 받들어 급히 나갔다. 그 조서가 수산에도 반포되었다.

  5) 왕과 하만은 술을 마시고 있었고, 수산 성은 어지러웠다.

 

[요점]

1. 그런데 갑자기 유대인들에게 큰 재앙이 벌어지게 되었다. 12달 후 유대인이 전멸될 상황.

2.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은 왕의 총애를 받는 하만에게 모르드개라는 유대인이 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게 된 것이다.

3. 모르드개가 자신이 절하지 않는 이유를 유대인이기 때문이라고 했기 때문에, 유대인 전체가 보복을 당하게 될 상황이 된 것이다.

 

에스더서 전체의 주제인 하만과 모르드게를 교차대구법을 통해 강조하는 이유는 아각사람과 유대인의 대결,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사탄의 영적대결을 보여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울의 언약파기,즉 아각(아말렉:언약백성을 출애급17장, 처음부터 괴롭힌 적)을 진멸하라는 말씀에 불순종한 사울, 그 언약파기에 대한 징계로 언약백성 전체가 당하는 고통, 그 맨 앞에 선 그 후손 모르드게와 에스더를 부각시키므로 언약관계를 강조하고있는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언약백성들을 보호하심을 보여주는 것이 에스더서의 전체주제인 것이다. 단순히 하만(악)과 모르드게(선)의 대결구도가 아닌 것이다.

 

하만의 계획,즉 유대인을 진멸하기위한 계획으로 하만은 ‘부르’(제비)를 뽑는다. 그리고 국고에서 빼낸 돈은 일만달란트(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약300톤의 금액은 바사왕국전체의 1년 세입)로 뇌물을 준다.

 

4장,언약기도

 

유대인의 유일한 희망은 에스더, 그러나 가능성은 ...

 

1. 왕의 조서로 인해 유대인들과 모르드개가 애통하며 베옷을 입고 슬퍼함.

  1) 왕후 에스더는 왕의 조서가 있었는 줄을 알지 못함

  2) 모르드개를 통해서 유대인에게 큰 위협이 있음을 알게 됨

  3)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자기 민족을 위해서 무엇을 행동하라고 요구하나, 에스더는 자신에게는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없고 왕을 대면할 기회조차 없다고 고백함.

 

2.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경고함

  1) 유대인 중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2) 네가 잠잠하면, 우리는 다른데로 구원을 얻겠지만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은 멸망하리라.

  3)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는가!

 

3. 에스더의 결심/결단

  1) 유다인들에게 자신을 위해 삼일을 금식할 것을 요청함(먹지도 마시지도 말라)

  2) 자신도 시녀들과 함께 그렇게 하고,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다.

  3) 죽으면 죽으리라.

[요점]

1. 유대인에게 유일한 희망은 에스더 뿐이었다.

2. 그러나 에스더라도 그 일이 쉽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3. 일반적인 상황으로 보면 에스더만 괜히 더불어 죽게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 에스더는 와스디의 무례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폐위되고 뽑힌 자다.

    부름없이 왕 앞에 나아갈 수 없고, 30일간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4. 에스더는 비장한 각오(자기 희생적)를 하고 자기 민족을 위해서 시도해보기로 결심한다.

  : 그러나 이 일은 정말 은혜가 필요한 일임이 강조된다.(절박한 금식)

 

1절부터 회개기도가 이어진다. 왕에게 호소하는 형식으로 전개되지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는 것은 회개의 표시이다. 3절에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같은 회개기도가 이어진다. 4:14절은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는 언약기도의 모습을 보여준다(요엘2:14,출33-34).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또한 언약적 관계에서의 구원을 강조한다.(14) 하나님은 반듯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사명이 강조된다. 언약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인 것이다.

 

 

5장.하나님나라의 역동성

 

에스더는 일단 성공했으나, 모르드개의 생명은 풍전등화의 위기.

 

1. 에스더가 왕 앞에 나가다.

  1) 삼일후 에스더는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 앞에 나갔다.

  2) 왕의 눈에 에스더가 매우 사랑스럽게 보였고, 왕은 왕후에게 금 홀을 내밀어 에스더를 가까이 불렀다.

  3) 왕이 에스더에게 소원을 물었고, 에스더는 왕을 위한 잔치에 하만과 함께 올 것을 요청했다.

  4) 왕은 하만을 부르고, 그 자리에서 다시 에스더의 소원을 물었고 에스더는 내일 다시 한번 자신이 준비한 잔치에 와 주실 것을 요청했다.

2. 하만의 자만과 모르드개에 대한 분노로 심판하기를 원함.

  1) 하만은 돌아오는 길에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절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다시 한번 분노함.

  2) 하만은 자신의 집에서 친구와 아내를 청하고 자신이 왕에게 존귀히 여김받음을 자랑함.

  3) 왕후의 잔치에 오직 자기 혼자만 왕과 초대받았음을 자랑함.

  4) 아내의 제안으로 집에 오십 규빗되는 나무를 세워 모르드개를 먼저 처형하도록 허락을 받은 후에 왕후의 잔치에 나갈 것을 결심함. 그리고 집에 나무를 세워둠.

 

[요점]

1. 삼일간의 금식 후 에스더의 행동이 다행히 왕에게 좋게 여겨졌다. 

 

2. 왜 에스더가 하만을 함께 잔치로 초대했는지에 대해서 명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초대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만은 약간 흥분했던 것 같다.(감정적으로 교만해졌고, 충동적이 되었다.)

 

3. 상황은 더욱 급박하게 돌아가게 되었다. 에스더의 잔치로 하만이 오기 전에 하만은 왕에게 모르드개를 나무 위에 달아서 죽이겠다는 허락을 받으려 했기 때문이다. (혹 유대인들을 살려낼 묘책이 에스더에게 있더라도 당장 모르드개는 죽을 위협에 처해지게 되었다. 긴장...)

 

‘죽으면 죽으리라’(4:16)라고 결단한 후  에스더는 믿음으로 행동한다. 소극적에서 적극적으로 바뀐다. 모르드게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내 몰고 계시는 것이다. 1장에서 와스디가 왕의 부름을 거절하고 폐위되었는데 이제 에스더가 왕의 부름이 없는데 왕 앞에 나아가는 상황이 대조적으로 펼쳐진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에스더가 ‘하만과 함께 임하소서’라고 할 때 히브리어의 네 글자의 첫 알파벧을 합하면 ‘야웨’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은 에스더서에서의 암호코드를 찾으려는 시도를 계속한다. 묵시문학적 형태에서 보듯이 이러한 시도도 흥미로운 것이다. 그러나 구태어 그런 시도 없이도 하나님의 명백한 역사하심을 알 수 있는 것이다.

 

6장,잠 못이루는 밤

 

사건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1. 그 날 왕은 잠을 이루지 못하므로 역대일기를 가져다 읽게 됨

  1) 모르드개 사건을 읽게 됨

  2) 모르드개에게 상을 베풀었는가를 확인하고 그렇지 않았음을 왕이 알게 됨

 

2. 하만이 모르드개를 당장에 죽이고자 그 밤에 왕 앞으로 나옴 / 상황의 반전

  1)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자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의견을 물음

  2) 하만은 그 대상이 자신인 줄 알고, 왕의 대접을 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

  3) 왕은 하만에게 <유다 사람 모르드개>에게 그와 같은 대접을 해 줄것을 지시함.

  4) 할 수 없이 하만은 모르드개에게 존귀한 자로 성중을 다니게 하고, 번뇌하며 돌아옴

  5) 하만의 아내 세라는 그 사건을 통해 미래를 예측함: 능히 그를 이기지 못하리라.

  6) 대책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왕과 함께 에스더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나감.

 

[요점]

1. 타이밍이 절묘하다.(왕궁의 상황, 하만의 상황, 모르드개의 상황, 에스더의 상황)

 

2. 하만의 의도와는 달리 상황이 전개됨 / 모르드개가 갑자기 왕의 상을 받게 됨(이전 일로)

 

3. 결정적인 반전의 증후가 보이면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흥미를 가지게 됨

 

지금까지 빠른 속도로 사건이 전개되었다면 6장은 하룻밤의 사건을 자세히 묘사한다. 하나님나라의 운동속도같이 느리게 진행된다. 또한 여러번의 우연히 계속되는 사건속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목도할 수 있다. 우연히 역대 일기를 보던 왕은 마침(4) 하만에게 모르드게를 존귀케하라는 명을 내린다. 우리가 살아갈 때 우연히 되어지는 일도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7장,역전

 

에스더의 반격으로 하만이 나무에 달려 죽다.

 

1. 왕은 에스더가 준비한 잔치에서 에스더의 억울한 사연을 듣게 된다.

  1) 연이은 잔치에 왕과 하만이 초대를 받아 간다.(하만에게는 그 전에 불운한 일이 생겼다)

  2) 왕의 요청에 에스더는 자신과 자신의 민족의 생명이 도륙당하게 되었음을 알리고, 그 일을 꾸민자가 바로 하만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3) 이 일로 인해 하만은 두려움에 떨게 되고, 왕은 분노하여 그 자리를 잠시 떠난다.

 

2. 하만이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하나 오히려 자신의 죽음을 앞 당기는 결과가 된다.

  1) 왕이 자리를 비우자 두려움에 떨던 하만은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걸하기 위해 엎드린다.

  2) 왕은 하만의 이런 행동을 오해하고 오히려 더욱 분노하게 되고, 하만은 신하들로 인해 잡혀간다.

  3) 왕의 내시 중 <하르보나>가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고자 한 나무가 그의 집에 있음을 알리자, 왕은 오히려 그 나무에 하만을 달아 죽이도록 명령한다.

  4) 모르드개를 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진노가 그쳤다.

 

 

[요점]

1. 에스더의 일격이 결정적이었다.

  : 나와 나의 민족이 멸절을 당하게 되었다.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입니다.

 

2. 에스더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몰랐다.(알았다면, 하만은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그리고 에스더부터 제거했을 것이다.) 하만은 그 전 날에 있었던 불운한 사건으로 인해 뭔가 잘못될 것 같은 불안을 느꼈다.

 

3.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한 나무에 자신이 달려 죽게 되는 운명이 되었다.

  : 반전의 드라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악인들의 모함으로 죽임을 당할뻔 한 상황에서 오히려 악인이 심판을 당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것은 시편의 메시지(의인의 길은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는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내용이다.

 

성경에는 많은 반전이 나오고 있다. 부자와 나사로,사울과 다윗,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되는 원리,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승리와 사탄의 패배이다.하만과 모르드게는 역전된다. 하나님나라의 역전이며 하나님나라 백성의 승리이다.

 

8장: 유대인의 대적 하만을 죽이고, 이제는 왕의 조서를 폐해야 유대인이 산다.

 

1. 에스더가 왕에게 하만을 통해 내려진 조서를 철폐해 달라고 요청함.

  1) 왕은 유다인의 대적 하만의 집을 왕후 에스더에게 주었다.

  2) 왕이 에스더와 모르드개와의 관계를 알자, 모르드개를 왕궁으로 불렀고 그에게 하만에게 주었던 인장 반지를 주었다.

  3) 에스더는 하만의 집을 모르드개가 관리하도록 했다.

  4) 에스더는 유다인을 멸하려고 하는 조서를 철회해 달라고 눈물로 요청하니 왕은 이를 허락한다.

  5) 왕은 유다인을 멸하기로 한 조서를 철회하도록 조서를 만들고 반지로 인을 치라고 허락함.

 

2. 전국에 모르드개를 통해서 새로 작성된 조서가 새롭게 내려갔다.

  1) 삼월 23일에 왕의 서기관들은 모르드개가 시키는 대로 조서를 작성하여 전국 127지방(그 지방 언어로)에 보냄/ 왕의 인장반지로 인침/왕의 일에 쓰는 준마를 타고 이동함

  2) 유다인들은 스스로 생명을 보존하고, 유다인들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과 그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그 재산을 탈취할 수 있도록 했다.(원래 정해진 12월 13일 하루 동안)

  3) 모르드개가 왕으로부터 권력을 얻어, 사람들 앞에 보이자 유다인들에게는 큰 기쁨이 되었다.

  4) 유다인들은 이 날을 명절로 삼았고, 사람들은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이 되는 자가 많았다.

 

[요점]

1.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서 유다민족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에스더는 모르드개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민족, 유다인의 문제에 대해서도 눈물로 호소했다.

 

2.하만의 집을 모르드개가 다스리게 되었고, 유다인을 죽이기로 한 날이 오히려 유다인들의 대적자들을 심판할 수 있는 날이 되었다.(마지막 날의 모습도 이와 같으리라 생각한다.)

 

3. 하나님의 능력이 이방인들에게 두려움 뿐 아니라, 그 백성으로 귀속되기 원하는 이방인들을 이끌어 냈다.(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난 사건,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는 사건.

 

 

4. 유다인들은 이 날을 잊지 않고 기념하기 위해 명절로 삼았다.(그만큼 의미있는 사건)

 

9장,부림절의 유래

 

아달월 13일에 벌어진 일(대적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심판)

 

1. 아달월 13일에 벌어진 일

  1) 유대인의 대적들이 그들을 제거하기를 바랐더니 유다인이 도리어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제거하게 된 그 날(아달월 13일)

  2) 모르드개를 두려워하여 사람들은 모르드개를 도와 유대인들을 해하고자 하는 자들을 죽임.(도성 수산에서 500명을 죽임 / 하만의 열 아들을 죽임) 그러나 재산에는 손대지 않음.

 

2. 아달월 14일에까지 확대되다.

  1) 왕이 에스더에게 또 다른 소청이 없는지를 묻자, 에스더는 내일에도 조서가 유효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함(수산에 사는 유대인들에 한해)

  2) 하만의 열두 아들의 시체는 나무에 달리고, 300명의 사람들을 추가적으로 도륙함.

  3) 수산 뿐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도 많은 대적들을 죽였지만,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음.

  4) 다른 지방은 13일에 도륙하고 14일에 쉬며 잔치를 베풀었고, 수산은 13,14일에 도륙하고 15일에 쉬며 잔치를 베풀었다.

 

3. 모르드개는 이 날이 유다인 중에서 폐해지지 않고 계속되도록 이 일을 기록했다.

  1) 모르드개가 기록하여 해마다 아달월 14,15일을 지키도록 했다. 제비뽑아(부르, 3:7) 정한 날짜라는 것을 따서 <부림>이라고 절기 이름을 정하고 두 날을 이어서 지켜 폐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

  2) 왕후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편지를 써서 아하수에로의 나라 127 지방에 있는 유다 모든 사람에게 보내 정한 기간에 부림을 지키게 했다.(부림을 견고하게 하였다.)

  3) 부림절에는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도록 했다.

 

[요점]

1. 부림절이 왜 이틀이 되었는가와 그 후로도 계속해서 지켜지도록 했는지, 이름이 왜 부림이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한다.

 

2.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부림절을 후대에도 계속 지키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왜? 그 날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었다.(절기를 통한 교육)

 

3. 부림의 절기를 지키는 것은 잔치와 즐기고 서로 예물을 나눈다.(축제) 가난한 자를 돌본다. 축제 중심의 절기를 지키면서도 가난한 자들에 대한 의식을 늘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본다.

 

하만과 그의 자손들은 모두 진멸 당한다. 이는 언약의 성취(민24:20)이다. 모르드게가 이 일을 기록하고 해마다 십사일과 십오일을 규례로 지킬 것을 명한다. 이 날의 의의는 ‘유대인이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로 된 것이다. 이 날의 이름은 바벨론식 이름을 딴 ‘부르‘에서 ’부림‘이 된다. 지금도 아달월 십 사일 (2월25일-3월25)에 지키고 있다.

예루살렘,헤브론,여리고 즉 가나안 입성때 성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지킨다. 십삽일은 에스더의 금식일로 지킨다.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을 지키시는 부림의 역사는 계속된다. 2차대전 유대인 학살의 수용소에서도 에스더서를 사모하며 부림을 믿었다. 지금도 부림절에 에스더서를 낭독할 때 모르드게나 에스더의 이름이 나오면 ‘와’하고 하만의 이름이 나오면 ‘우’하며 야유를 보낸다.

 

10장,에필로그

모르드개가 하만처럼 왕에게 높임을 받다.

 

 

1. 아하수에로 왕이 모르드개를 높여 존귀하게 하였다.

  1) 아하수에로는 본토와 바다와 섬들로 하여금 조공을 바치게 했다.(힘을 과시)

  2) 왕의 행정과 모르드개를 높여 존귀하게 한 것은 메대와 바사 왕들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3) 모르드개는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이 되었다. 유다인 중에 큰 존경을 받았다.

  4) 유다인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그의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다.

 

[요점]

1. 모르드개가 하만의 높은 자리를 대신하여 높아졌다.

 

2. 과거 애굽의 총리가 되었던 요셉처럼, 모르드개는 바사 제국의 높은 자가 되었다. 요셉이 자기 백성을 돌보고 살폈던 것처럼, 모르드개도 자기 민족을 돌보고 살피는 자가 되었다.

 

3. 여호와 하나님께서 결국은 자기 백성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하시고 높이셨다.

 

 

 

 

레포트

 

1.고엘제도에 대해 요약하세요.

A4용지 1장 글자크기 11

2.헤세드에 대해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매권마다 어디 나오며, 간단하게 해석을 해보세요.

A4용지 5장 이상 글자크기 11

 

문제

 

1.유월절에 낭독되는 성경은(1)

1)아가서

2)룻기

3)애가서

 

2.부림절에 낭독되는 성경은 (3)

1)아가서

2)룻기

3)에스더서

 

3.룻기는 어느절기에 낭독되었나(1)

1)칠칠절

2)부림절

3)장막절

 

4.애가가 낭독된 절기는(1)

1)성전파괴일

2)성전재건일

3)포로귀환일

 

5.룻기와 관계없는 것은(1)

1)포로기 백성들의 애환

2)하나님의 구원계획

3)이방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6.고엘제도와 관계없는 것은 (3)

1)가장 가까운 친족이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는 제도이다.

2)수혼법과 연결되어있다.

3)법적구속력이있다.

4)관습법이다.

 

7.고엘제도가 아닌 것은(1)

1)친족을 대신하여 종이 되는 제도

2)토지의 상환자

3)피의 복수자

 

8.애가에 대해 틀린 것은 (1)

1)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노래한 것이다.

2)아뷥월 9일째 낭독한다.

3)언약파기에 대한 언약적 저주가 담겨있다.

 

9.에스더서에 대해 틀린 것은(1)

1)아닥사스다 통치하에 기록된 성경이다.

2)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

3)귀환하지 못한자에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계획을 보여준다.

 

10.에스더서와 관계없는 것은(2)

1)부림절

2)바벨론 포로귀환

3)페르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