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지혜서

지혜서

호리홀리 2022. 5. 25. 18:29

 

                  시가서(지혜서:잠언 전도서 욥기)

 

                                                박인대교수

 

                                잠언

 

 

잠언의 주제는 지혜(호크마:הסכח)이다. 이것은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이다. 지혜는 39번 반복된다. 잠언의 주제구절은 1:7절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미련한 자(에윌림:경외하는 자의 반대자, 하나님을 믿지 않는자를 가르킨다:시편의 의인과 악인 사상 비교)는 지능이 낮은자가 아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시겠다는 것이다.

 

잠언에서 비교 사용되는 “다하트”는 지식이다. “키슈론”은 기술이다. 그러나 “호크마”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그러므로 잠언에서 강조되는 것은 지혜의 근본은 경건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인 것이다. 그리고 예배할 때 지혜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경외는 예배뿐 아니라 삶의 자세를 포함한다.

 

시편의 장소는 광야이다. 광야에서 고백되고 찬양하는 시편이다. 그러나 잠언의 장소는 삶의 현장이다. 삶의 기술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모세오경의 기록자 모세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가이드이다. 마찬가지로 잠언은 솔로몬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있다 하겠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중요한 지혜는 ‘헤세드(10번 나옴)’를 아는 것이다. 헤세드는 언약적 관계에서의 사랑이라면 ‘아헤브‘(20번 나옴)는 인간의 사랑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헤브‘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헤세드‘하신다.(19:22,20:6,3:3,14:22,16:6,20:28,31:26)

잠언은 언약을 지키며 ‘헤세드’를 베풀 것을 지혜를 빌려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지혜자는 누구인가?

 

렘18:18절에 나오는 ‘지혜로운 자’들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함께 또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다.  삼하8:17에 나오는 서기관들이며 후에 랍비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들은 왕에게 조언하기도 했고 종종 선지자들과도 부딛힌다. (사29:13-15)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언약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면 이들은  인간적관점에서 개인,사회의 윤리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지혜자들을 위한 학교가 있었고 이는 후에 랍비학교로 발전한다. (잠16,31장)

 

잠언을 이해하는 유형들(스코트,R.B.Y.Scott)

 

1.동일성:잠언(1:7),비유(6:6-9),격언(24:14),수수께끼(30:18-19) 14:4'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양식을 얻기위해서는 소가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을 회화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가 없는 것은 양식이 없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2.대조법:25:15,27:7

3.유사법:25:12-14( 이것은 저것과 같다)

4.가치비교법:17:12(이것이 저것보다 낫다)

 

 

내용

 

1장,지혜자의 사명

 

시편이 조용한 영성이라면 잠언은 세속에서의 영성이다. 시편의 현장이 광야라면 잠언의 현장은 20절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21절“길머리”성문어귀” “성중” 이것들이 잠언의 삶의 현장이다.(예루살렘거리의 모습,성문 앞은 재판이 열리고 시장이 서고,백성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지혜”는 여성명사이다. 여성을 의인화하고 있는 단어가 “지혜”이다.

지혜자는 외친다. 20절 “부르며”,”높이며” 점점 크게 외치고 있다. 21절에서는 소리를 지르며 말한다. 이스라엘의 여인들은 품위를 위해 소리지르지 않는다. 천박한 여인이나 소리친다. 그러나 이 여인은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점점 크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다.

 

  외치는 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23절“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회개를 외치고 있다. “돌이키라“ 그것은 책망이다.

 

듣는 사람은 세 부류로 나뉜다. 22절 어리석은 자들 ,거만한 자들, 미련한 자들이다. 어리석은 자는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 이고,거만한 자들은 교만한 자들이며, 미련한 자들은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결국 재앙을 당한다.(26절) 그리고 멸망한다.(32절)

 

그러나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이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33절)

10절의 악한자(하타임:헬라어의 하마르타네이로서 하나님에게서 떠난자이다)는 도덕적인 표준이 아니다.

 

2장,감추인 보배

 

잠언에 자주 등장하는 ‘내 아들(베니)’은 제자들에게 호칭하는 표현이다. 신약에서도 바울과 요한이 이런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고전4:15,요일2:2,5:2)

지혜는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이다.(4) 누가 찾는가? 5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이다. 반대로 어리석은 자는 지혜를 무시하는 자이다. (12-15) 그들은 언약을 잊어버린 자이다.(17) 결국 생명길을 얻지 못한다.(19)

17절의 ‘남편을 버린‘ 자는 언약을 파기한 음녀로 묘사된다.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언약파기자의 결국은 멸망이라는 것을 의인화를 통해 가르친다.

2장에서는 성실하게 언약을 지키는 자의 화평과 언약 파기자의 언약적 저주를 보여준다.

 

 

 

 

3장,생명나무

 

18절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생명나무가 무엇인가? 창3:22-24에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쫒겨나 저주가 그들에게 임했다. 그리고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하나님이 막으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혜가 없었다.

 

  계시록의 주제인 “이긴 자”들에게 계22:2절의 생명나무를 주신다. 3절 그들에게 다시 저주가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생명나무와 같다. 곧 영생의 말씀이다.

3장은 잠언의 핵심이다. 생명나무의 지혜는 어떻게 얻는가?

 

첫째, 1절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나의 법“ ”나의 명령“은 언약과 언약법,그리고 말씀을 가르친다. 언약을 지킬 때 평강을 주신다(2). 언약을 어기면 하나님과의 샬롬(평강)이 깨진다. 17절에도 지혜로운 자는 평강이라 한다.

 

둘째,3절 “인자(헤세드)와 진리를 네게서 떠나지 않게하고...” 헤세드를 잊지 않고 마음판에 새기는 것이다. 범죄하더라도 헤세드 때문에 우리는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잊지마라. 헤세드를 아는 것이 지혜이다. ‘ 네 목에 매며‘ 이 말씀은 잊어서는 안되는 헤세드를 강조한다 . 이것은 신명기언약(모압언약)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신6:4-9)

 

셋째,5절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언약을 이루시는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이 지혜이다.

 

넷째,6절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 모든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 (7,-9)

우리가 기억 할 것은 징계는 반듯이 있다.(11-12) 시편에서 의인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 같이 말이다. 잠언에서는 징계로 표현되는 고난,환란,시험,시련,연단이 있다. 그러나 호크마(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자는 복이 있고 생명나무를 얻는 자이다. 그리고 22절 “그리하면 그것이 네 영혼의 생명이 되며.....”

하나님께서 성도를 다루시는 방법을 아는 지혜, 이 지혜(호크마)를 아는 자는 복이 있고 생명나무(영생)을 얻은 자인 것을 강조한다.

9-10절은 신26장2,10절의 언약적축복이다. 땅에 대한 축복이다. 앞부분이 ‘씨‘에 대한 복이라면 여기서는 땅에 대한 약속을 하고 있다.

21-35절은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헤세드를 가르킨다. 헤세드의 순환원리를 기억하라.

 

4장,마음을 지켜라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언약)에는 관심이 없고 선악과(먹을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보암직스럽고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운 선악과를 탐하다 저주받고 에덴을 상실했다. 오늘날도 영생에 관심 없고 오직 먹음직,보암직,탐스러운 것만 관심을 갖고 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에 마음을 뺐겼다.

 

영생의 첫번째 지혜는 샬롬이라면, 두번째는 마음을 지키는 것이다. 4,21,23절에 마음을 지키라고 하고 있다. 마음을 뺏기면 다 잃는 것이다. 3:1,3에도 마음을 지키고 마음판에 새기라고 하고 있다. 신6:4절 이하의 해석이 본문이다.  이스라엘은 나라 이름이 아니다. 언약백성의 호칭이다. 잠언에 나오는 “내 아들아“라는 말과 같다. 신6:5”너는 마음을 다하고..“6절 ”...너는 마음에 새기고“ 마음을 강조하고 있다.

 

5,6,7장.언약을 지키는 자와 언약파기자

 

5,6,7장의 구조

1.내 아들아(5:1)(6:20)(7:1)

2.주의하고 귀를 기울이라(5:2)(6:20)(7:1)

3.지혜는 근신이다.(5:2)(6:21)(7:3)

4.음녀를 가까이 하지말라(5:3-20)(6:23-26)(7:25,6-23)

5.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다.(5:21)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려든다(5:22-23)(6:27-35)(7:27)

 

8장,지혜자 예수그리스도

 

지혜를 의인화하고 있다. 시편의 현장은 광야지만 잠언의 현장은 2절,길가,사거리 3절,성문 곁,문 어귀,문이다. 지혜는 여기서 소리를 높이고 있다.  8장에 나오는 1인칭은 지혜이다. 12절,“나 지혜는...” 17절,“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를 만날것이니라” 여기의 사랑은 “아하브“이다. 잠언에 ‘헤세드’는 10번, ‘아하브’는 20번 나온다. ‘아하브’는 인간적 사랑이며 이기적 사랑이다. 인간은 ‘아하브만 찾는다. 마치 생명나무엔 관심이 없고 선악과에만 관심이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헤세드’하지만 우리는 ‘아하브’하고 있는 것이다. ‘헤세드’의 결정판은 십자가이다. 22절부터 1인칭을 예수로 대입해 보라. 여기서부터 끝절 까지는 요한복음1장의 해석이다.

 

22절“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를 가졌으며”23절“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30절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5절“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36절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시편은 깊은 영성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잠언은 깊은 지혜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다.(칼빈)

 

호세아서를 보면 당대의 위대한 선지자 호세아가 당대의 유명한 창기인 고멜을 찾아가 청혼한다. 하나님이 하게 하셨지만 호세아는 진심으로 사랑한다. 호세아가 쓰는 사랑은‘ 헤세드’이다. 그러나 고멜이 쓰는 사랑은 ‘아하브’이다. 이 절묘한 언어유희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을 극대화시킨다.

 

고멜로서는 선지자와 결혼하는 것도 괜찮다 싶었다. 그러나 얼마 후 집을 나가 배가 남산 만하게 불러서 들어왔다. 그러나 호세아는 여전히 고멜을 헤세드한다. 자식을 낳은 얼마후 또 가출하여 임신해서 돌아오지만 호세아는 변함없이 헤세드한다. 우리가 죄를 범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헤세드’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아하브’하는 것이다.

 

 

9,14,15장,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

 

9: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언약(법)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이다. 여기서는 언약을 지키는 자는 지혜자로 언약을 지키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 자로 대조된다.

 

10장,지혜의 기초

 

10장부터 22:16절 까지는 지혜의 모음집이다. 여기서는 대부분 --보다 낫다(better...than)는 비교법을 쓰고 있다. 이 모음집의 결론은 21:21‘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의와 영광을 얻느니라’ 인자는 ‘헤세드’이다. 헤세드를 베푸는 자에게 주시는 생명과 의와 영광이 결론이다.

 

11장,의인과악인

 

잠언의 의인과 악인은 도덕적 관점에서 보면 안된다. 시편의 의인,악인과 동일하며 의인은 칭의, 즉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 자이다. 그러므로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다. 그러나 악인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자이다.

 

먼저 의인의 물질관을 살펴보자. 성전에는 저울이 있었다.  겔 45:13에 곡물은 수입의 60/1,기름은 10/1,양은 200마리 중에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드렸다. 그런데 제사장들과 성전관리자들이 결탁하여 성전의 저울을 속였다. 백성들은 병든 것,저는 것,눈먼 것을 드렸다. 서로 속고 속이는 양상이었다. 그들은 악인이다.1절“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24절-31절은 구제에 관한 말씀이다. 구제는 소극적이 아닌 적극적으로 하라는 명령이다. 신명기 24장에는 추수에 대한 명령이 나온다. 곡식을 추수 할 때 땅에 떨어진 것은 줍지 말아라. 포도를 딴 후에 남은 것을 따지 말라.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품삮은 당일 주라. 가난한 이들과 약자를 배려하기 위한 것을 의무로 정해놓고 있다.

 

  유대인의 구제(헤세드를 베푸는 자)의 8등급을 살펴보자.

 

1등급은 레25:35-38절이다.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먼저 도와주는 것.

2등급은 성전 은밀한 골방에 구제물을 가져다놓고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게 했다.

3등급은 도와준 사람만 아는 경우

4등급은 도움 받은 사람만 아는 경우

5등급은 서로 아는 경우

6등급은 도와 달라고 할 때 도와주는 것

7등급은 1000원 도와 달라 할 때 500원 도와 주는 것

8등급은 얼굴을 찌푸리며 도와 주는 것

구제의 목적은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28) 영혼 구원에 있다.(30). 30절“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16장,지혜의 가치-마음경영

 

19세기 위대한 목회자였던 스펄젼 목사가 작은 교회에서 목회할 때의 일이다. 어떤 부인이 몸이 불편하여 심방기도를 요청했다. 다 쓰러져가는 집인데 가구가 화려하진 않지만 품위있어 보였다. 간절히 기도해 주었다. 얼마 후 또 심방 요청이 들어와 갔더니 많이 나아서 일어나 앉았다. 목사님이 기도해 주셔서 많이 나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세 번째 갔을 때 방 주위를 둘러 보다가 깜짝 놀랐다.

 

이상한 종이가 벽에 붙어 있었다. 부인 이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은 누굽니까? 왜 이렇게 사십니까? 저는 영국의 갑부의 집에서 평생 섬겼던 하녀였습니다. 그 갑부를 지극 정성껏 섬겼는데 죽으면서 이 쪽지하나 주고 가셨습니다. 너무 섭섭해서 버렸지만 그래도 그 영감을 생각해서 여기 붙여 놓았습니다. 부인 저것은 어마어마한 액수의 수표입니다. 목사님 제가 뭘 알아야지요 .목사님이 가져가세요.

 

이렇게 해서 지어진 교회가 런던에 있는 당시 세계제일의 교회인 터버너클 교회이다. 교회 뒤편에 부인을 위한 집을 지어드렸고 부인은 평생을 교회를 섬기다. 돌아가셨다. 부인은 마음의 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했으나 자유함을 얻었다.

 

16장은 마음의 경영을 반복 강조하고 있다.(1,3,18-24,32) 마음의 경영은 모든 경영의 시작이다. 그런데 마음의 경영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1절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마음의 경영에 실패하면 교만하게 된다.(5,18-19)

 

16장은 거의 매절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가 주어로 나온다. 1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반듯이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 여호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절과 끝절은 구조가 같다. 33절“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성공적 마음경영은 여호와께 맡기는 것이다. 3절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성공적 경영은 5절 인자(헤세드)와 진리로 행하는 것이다. 인자와 진리가 죄를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되는 잠언의 큰 두개의 주제인 헤세드와 경외를 강조한다.(3:3)

성공적 경영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7절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

 

20장,헤세드

 

헤세드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6절‘자기의 인자(헤세드)함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다.  7절 ‘완전히 행하는 자’이다. 8절부터 헤세드에 대한 구체적 행동강령이 기록되어있다.

 

24장,지혜의 가치-기초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고 지혜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이다. 그러면 지혜자가 기억해야 할 가치는 회복이다. 16절“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 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의인은 도적적 개념에서의 의인이 아니라 했다. 칭의,의롭다고 인정한 자이다. 욥을 생각해보라 7번 고난을 당한다. 모두가 포기했지만 욥은 일어난다. 내 의지,경험이 아닌 헤세드이다. 야곱이 속임을 통해 하나님나라 전부를 무너트렸어도 하나님은 야곱을 포기하지 않았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맹세,저주했을 때 그 정도면 끝나지 않았는가? 그러나 주님은 다시 베드로를 찾아오셨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다.

 

7은 완전수이다. 완전한 끝이지만 의인은 다시 일어난다. 그러나 악인,역시 도덕적 개념에서의 악인이 아니다. 악인은 엎드러진다는 말은 멸망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악인이 형통 할 때는 어떻게 해야하나.

 

1절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지어다.”악인이 잘되든 망하든 신경쓰지 말라는 것이다.  19절에도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지혜자의 기초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고 그런자를 반듯이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것이다. 3절“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되며” 여기서 집은 건물이 아닌 삶의 모든 기초를 의미한다.  삶의 모든 기초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고 그럴때 견고케 하신다는 것이다.

 

25-29:27 히스기야의 편집

 

이 부분은 히스기야의 서기관들이 편집한 것이다.

 

29장,지혜의 가치-비젼

 

본장에서는 세그룹이 등장한다. 1그룹은 왕,관원,주권자(1-14,26)등 지배 계층이다. 2그룹은 자녀(15-17),백성. 3그룹은 피지배 계층인 종(19-21),하인(12)이다. 이 모든 그룹에 대한 성장과정에 있어서 소극적교육은 책망이다.(1,15,17,2123) 책망은 당연히 필요하다. 딤후3:16,17절에 성경을 주신 목적이“교훈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 

 

적극적교육은 비젼이다. 18절“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율법은 토라이다. 토라는 책망적 요소가 강하다. 그러나 묵시는 히“하존”(비젼)이다. 하존이 없으면 목표가 없다. 그러므로 타락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인 1세대는 “하존”이 없었다. 노예근성으로 늘 불평,불만이 가득했다. 결국 그들은 서서히 소멸되어 갔다. 그러나 모세,여호수아,갈렙은 하나님나라의 비젼이 있었기에 온갖 방해와 고난에도 승리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비젼이 있는 백성은 살고 없으면 망하게 되는 것이다.

 

흠정역(KJV)에는 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 (비젼이 없으면, 백성들은 망한다) RSV에서는 “예언이 없으면 백성들이 자제력이 없어진다“ 비젼이 없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서 살게 된다. 그러나 비젼이 있으면 하나님나라의 역사의식이 생긴다. 영적 독립군같이 하나님나라의 고난을 기뻐하며 역동적인 삶을 살게된다.

 

바울은 행26:19절에서 아그립바왕에게 ”하늘이 내게 보이신 것(비젼)을 나는 거슬릴 수 없다“라고 했다. 

 

30장,지혜의 가치-기도

 

30장은 유일하게 솔로몬의 잠언이 아니다.동시에 유일하게 기도가 나와있다. 가장 큰 지혜의 가치는 기도이다. 기록자 아굴은 솔로몬시대의 대표적 지혜자이다. 그가 얻은 지혜는 인간의 전적 부패,전적 무능력이다. 2절“나는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계속 1인칭이 강조된다. 3절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하여 선을 행할 여지가 전혀없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 줄 아느냐? 4절에 나온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어라(5) 그리고 말씀을 더하지 말라(6) 그런 다음 연약한 인간인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기도이며 나는 평생 이렇게 기도한다고 자신의 기도를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 연약한 인간이기에 우리는 기도 할 때 마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구해야 한다. 언약적 자비를 간절히 구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이다.

 

아굴의 평생 기도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8절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또 하나는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9절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

 

아굴의 기도는 중용의 기도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늘 욕심을 부리며, 기도 할 때도 더 달라고한다. 이 기도는 말씀대로 살려고 평생드리는 기도이다. 우리는 얼마나 허탄한 것을 구하는지 모른다. 허탄한 것이 아닌 가장 가치있는 일을 구해야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전 여호수아에게 그 땅의 지경을 미리 정하셨다. 유프라데부터 애굽까지 , 그리하여 다윗도 그 경계를 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제국의 멸망은 교만이었다. 더 큰 땅, 더 많은 백성,더 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40년 훈련시키실 때 만나를 통해 두가지 훈련을 시키셨다. 하나는 일용할 양식이다. 그들은 날마다. 자신의 수고로 먹을 것을 구해야 했다. 욕심을 부리고 더 거두면 어김없이 썩었다.

또 하나는 안식일 훈련이었다. 안식일을 위해서는 이틀 분의 양식을 거두게 했고 썩지 않았다. 안식일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는 훈련을 그리고 매일 매일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 탐욕을 제거하는 훈련을 시키셨다.

 

우리는 흔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복수의 개념에서 인용하곤 한다. 허나 이것은 성경을 거꾸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오히려 보복을 금지하는 법이었다. 나에게 해를 끼친 자에게 최소한 그 이상의 경계를 넘어선 안된다는 법이지 그렇게 복수하라는 것이 아니다.

 

아굴의 평생기도는 자족하는 삶이다. 예수님도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도를 가르치며 자족할 것을 명하셨다. 탐욕이 난무하며, 믿음의 순수성이 상실 된 이 시대에 아굴의 중용의 기도가 얼마나 귀한가?

 

잠언의 삶의 현장은 시장,성문어귀,광장등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이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지혜롭게 살 것인가가 잠언의 주제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지혜의 가치들을 적용하며 살아야하겠다.

 

 

31장,어머니의 지혜

 

이 부분은 잠언의 에필로그 부분으로 아크로스틱(답관체)형식으로 마친다. (10-31)

 

 

 

 

 

 

 

                             전도서

 

 

 

 

시편의 배경은 광야였다. 잠언의 배경은 저자거리,즉 삶의 현장에서의 지혜의 가치들이다.그러면 전도서의 배경은 어디일까? 나이트클럽이라고 현대적 해석을 해본다. 여기의 주인은 당연히 솔로몬이다. 그는 단순한 주인이 아니라 나이트클럽에서 뭐든 다해본 경험자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타락으로 인도한 장본인이다. 그런 그가 나이트클럽의 문을 걸어닫고,불을 끄고 소리친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되다는 히브리어의 “헤벨”이다.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이다.

 

다윗 시대에는 열정이 있었다. 남북 통일왕국,12지파 통일,예루살렘으로 수도이전과 왕국확장 그러나 무엇보다 간절한 소망은 성전건축이었다. 그런데 솔로몬 시대에는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목표가 사라진 것이다. 목표(비젼)가 없으니 백성들이 방자히 행했다. 결국 다음 왕 르호보암때 망하고 말았다. 남북이 분열된 것이다. 목표가 없으면 방황하고 유리한다. 솔로몬시대의 특징은 허무주의 쾌락주의 염세주의였다. 오늘 우리시대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시대에 전도서를 주셨다.

 

아이러니하게도 전도서는 3대 절기 중에 장막절에 선포되었다. 유월절이 이스라엘을 구원한 날, 어린양의 피로 구원얻은 날, 예수님은 어린양으로 유월절에 피흘리시고 죽으셨다. 그리고 구원을 완성하셨다. 이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완성이다.

 

유월절은 성자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이다.  오순절은 구약의 맥추절이다. 첫 추수,첫 열매,성령의 사역이다. 첫 성도들, 성령의 역사와 교회의 첫 역사였다. 장막절은 마지막추수인 성부의 사역이다. 마지막 추수는 심판이다.

 

신약시대의 마지막추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장막절 축제는 풍성하다. 가난해도 먹을 것은 풍족했다. 모든 것이 넘치는 축제,추수,풍요,번영의 때 초를 치는 성경이 전도서이다. 흥청거리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엊는 성경이 전도서이다.  이해 되시는가? 너희들 심판을 기억하라. 너희의 모든 것이 헛되다. 심판이 온다. 까불지 마라. 헤벨은 전도서에 40번 등장한다.

 

솔로몬은 고생,고난을 통과하지 않았다. 다윗의 아들들이 서로 왕권을 다투는 사이 반사이익으로 왕이 되었다. 어머니 밧세바의 품에 쌓인 성인아이였다. 사람들은 왕이 될 인물로 생각하지 않았다. 솔로몬은 왕이되어 모든 것을 누린 후 전도서의 피끊는 간증을 하고 있다. 아가서가 청년기에 잠언이 중년에 그리고 전도서는 노년에 기록된 것이다.

 

  솔로몬 2기에 해당하는 전도서는 이방여인으로 인한 우상숭배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은데서 오는 염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 이후 전도서는 사회정의가 무너지고 염세주의가 편만했던 시대를 살던 포로 이후 백성들에게 뼈저리게 읽히게 되었다.  포로 후 여전히 이방의 압제속에 살던 백성들은 전도서를 통해서 염세주의를 극복하려고 했다.

 

전도서는 잠언과 같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원리아래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음이 회의주의의 원인이며 여호와를 경외할 때 이를 극복할 수 있음을 천명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사는 지혜의 가치를 보여준다

 

1장,지혜의 가치:인생의 목적1

 

첫째,영원한 것은 무엇인가?(3-7) 수고하고 애쓰는 것 모두가 헛되다. 주의 할 것은 “해아래에서“라는 말이다. (3,9,14) 이 땅에서,하나님없이 라는 말이다. 동사를 주의하라. 오고,가고,흐르고...영원한 것은 없다고 선언한다. 허무주의

 

둘째,가치있는 것이 무엇인가?(8) 역시 없다.“만물이 피곤하다“ 눈은 족한 줄 모르고 귀는 차지 않고... 사자도 배부르면 먹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다. 만족이 없는 것이다. 쾌락주의

 

셋째,새로운 것이 무엇인가?(9) 해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결론은 염세주의,냉소주의,

 

마지막으로 눈을 들어 (해)위를 바라본다. 그리고 12:13절에 전도서 전체의 결론을 맺는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라“ 영원한 분은 하나님 한분 뿐이다. 그리고 가장 가치있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1:12-2장,지혜의 가치:인생의 목적2

 

반복되는 단어는 1인칭 “나”이다. 나 중심의 삶은 하나님과 대조된다. 결국 하나님과 부딛힐 수 밖에 없다.

 

첫째, 지식이 최고다(1:12-18) 그러나 지식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결론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14,17) 성경에 대한 지식의 욕구는 모세오경을 해석한 것을 “미쉬나”라고 한다. 미쉬나를 해석한 것이 “게마라”이다. 신약성경에 예수님이 경계한 장로들의 유전이 이것들이다. 그것들은 성경의 지식을 더하기 위한 인간의 굴레일 뿐이었다.  18절에 지식이 더하면 근심이 더한다 했다.

 

둘째,쾌락이 최고다.(2:1-11) 어떤이들은 웃음을 추구한다. 강단에서도 온통 웃음 찬치이다. 웃을 때 복음을 쏙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4-7절은 사업이 인생의 목표인 사람들도 있다. 계속 내것이 강조된다.(부자농부) 오늘 교회도 본당,교육관,수양관,선교센타,묘지등 더 더 하는 세상적 세속적인 것을 볼 수 있다. 결론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이 무익하다는 것이다.

 

2:11-26절은 물질이 최고라 한다. (8-10) 이런 전도자가 죽음을 생각한다(16). 그리고 사는 것을 한 스럽게 여긴다.(17-18) 그리고 고백한다. 다 바람을 잡으려는 거와 같다.  그리고 19절에 자식이 관리하지만 다 헛되다 라고 한다. 그 자식은 르호보암이다.  그는 결국 나라를 망쳐 둘로 쪼개 놓는다.

 

이제 24절-26절을 보라. 주어가 “나”에게서 “하나님”으로 바뀐다. 전도서는 전체의 결론도 말씀하지만 매장마다 결론을 맺고 있다.  24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다“

26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신다.

 

 

3장,지혜의 가치:때를 아는 지혜

 

‘때’ 라는 말은 히브리어 “에트”이며 헬라어의 “카이로스“이다. ”크로노스”는 인간의 시간,무의미한 시간이나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에트“는 시간을 푸는 열쇄이다. 3장에는 28번의 ”에트“ 중에 14번은 긍정적인 것,좋은 것,그리고 시작이다. 14번은 부정적,나쁜 것, 끝이다.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10-11) 그러나 눅12장의 농부는 그것을 착각하고 살았다.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며 살아라(11)

주어진 때에 최선을 다하라(심을 때:2절)

주시는 때를 놓치지 말아라. 열처녀 중 다섯 처녀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바디메오)

주어진 때에 선을 행하라.(12)

그러나 무엇보다 심판을 생각하라(16-17)

 

인간이 짐승과 같은 점은 똑 같이 죽는다.(20) 그러나 짐승의 혼은 땅으로 사람의 혼은 위로 올라간다.(21)

 

4장,지혜의 가치:모순된 세상

 

솔로몬 왕이 평복으로 갈아입고 민정시찰을 나섰다.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가 보니 학대받는 자들,그들에겐 위로자가 없다. 1절은 탄식으로 시작한다. 오호라는 히브리어의 “히네“ 두 번째는 4절,속이는 자 셋째는 8절,돈의 노예가 된 사람들 . 결론은 모순 된 세상이라는 것. 모순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나?

 

첫째는 위로자로 살아라.(1절) 11절,서로의 체온 유지(상호의지). 10절, 상호격려. 12절(상호보호)

 

둘째,세상은 모순되지만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보상이 있다. 13절,세상은 불공평하나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보상이 있다. 14절의 가난한 자는 아버지 다윗을 가르킨다. 옥은 고난을 가르키며  지혜로운 소년은 고난을 이기고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때문에 뺏긴 것, 사기당한 것,억울한 것은 반듯이  보상하신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진급이 늦어지고 불이익을 당하고 손해보고, 직장을 잃기도,부당한 대우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듯이  세고 계신다.

 

5장,지혜의 가치:회의주의와 염세주의에서 벗어나 승리하는 법

 

그 비밀은 역동적 예배이다. 헛된 예배가 아닌 역동적 예배이다. 역동적 예배는 회의주의와 염세주의를 벗어 날 뿐 아니라 삶을 역동적으로 만들어 준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가장 가치있는 것은 예배인 것을 가르친다.

 

예배의 1단계는 듣는 것이다. 1절“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드리는 것 보다 나으니...”

 

2단계는 행하는 것이다. 2절“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4절에 반복되는 “갚으라”

 

3단계는 확대하여 물질을 잘 사용하라고 강조한다.(8-20)

 

7장,지혜의 모순

 

전도서에 나오는 지혜자와 우매자는 세속적 기준으로 보면 안된다. 신약의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역설적이다. 어거스틴은 기독교는 패러독스라고 한 말이 맞다. 예수님은 좁은 길로 가라, 십자가 지라,희생하라,죽으면 살리라,고난을 기뻐하라.....

 

첫 번째 역설:1절“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기름은 부의 상징이다.  이름은 히“쉠”, 기름 즉 향유는 “쉐멘”이다. 언어의 유사한 표현을 통해 강조하는 표현으로 역설적 지혜를 시작하고 있다.(아1:3)

 

두 번째 역설은 1절하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세 번째 역설은  2절“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네 번째 역설은 3절“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종말론 적인 삶을 강조한다. 내세지향적인 삶을 살라는 것이다.

다섯 번째 역설은 :8절“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여섯 번째: 10절 “옛날이 오늘보다 낫다”

일곱 번째: 13절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굽게하신다. 고난,고통,환란을 주신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과 사건을 보아야한다. 이것이 역설에 대한 지혜의 가치이다.

 

14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형통과 곤고를 병행하신다.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남편이 문제가 없으면 자식이 가난해도 건강을 ,부해도 질병을 ....곤고만 주시거나 형통만 주시지 않는다. 역설을 푸는 지혜의 가치이다.

 

16-18절은 중용의 지혜이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 날 것임이니라” 회색분자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러나 회색은 검은색과 흰색의 중간이 아닌 또 하나의 색이다. 검은 색을 지닌 악인이 얼마나 되겠으며 흰색을 지닌 선한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대부분은 회색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런 우리에게 최고의 지혜의 가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

 

9장,지혜의 가치:인생의 승리자가 되려면

 

1.1절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보여준다. 질병,환란,죽음에서 어떻게 지혜로운 삶을 살것인가?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는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럴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다.

 

2.종말론적 삶을 살아라.(3-5) 3절하“...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4절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 천한 개이지만 살아있는 것이 은혜고 축복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희망을  잃지 않으면 반듯이 회복시켜주신다. 인간이 살아 갈 때 종종 미친 마음을 품을 때가 있다.(3) 죽고 싶을 때 그때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라.

 

3.즐겁게 살아라. (7-10). 아무리 힘들어도 즐겁게 살면 하나님이 받으신다.  그리고 최선의 삶을 살게 된다. (10)

 

10장,지혜의 가치: 승리하는 삶

 

인생에는 늘 변수가 있다. 8절은 예기치 않는 상황이다.“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

그럴때 우매자는 작은 일을 가볍게 여겨 실패한다.(1)

지혜자는 늘 오른 편에 있다.(2) 오른편은 언약이다. 오른편은 구원이다. 오른편은 천국이다.

우매자는 그럴 때 말을 많이 한다. (12-14)

 

11-12,지혜의 가치:사람의 본분

 

불확실한 미래에 대처하는 법을 가르킨다.

1.1절“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2절은 “일곱이나 여덟에게 나눠주라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 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할 수 있는데로 많이 나누어 주라는 것이다. (눅6:38) 1절의 식물은 양식이다. 6절의 “씨”는 종자이다. (고후9:10,창47:24) 양식과 종자를 최선을 다해 뿌리라  6절에는 아침(동트기 전)부터 저녁까지 쉬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풍세를 살피지 말라. 즉 상황윤리에 빠지지 말라.4절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 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힘쓰라는 것이다.

 

특히 젊을 때 (11:9-12:7) 이것을 기억하라(12:1,7)

인생은 길지 않다. 12:3절의 집은 육신,맺돌은 치아,창틀은 눈,4절의 문은 귀,새의 소리는 작은 소리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노인들,음악하는 여자들은 시끄러운소리 5절의 살구나무에 꽃이 피는 것은 백발을, 너의 장례식에 조문객들이 왔다갔다 할 것이다. 이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끝으로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라(11:9,12:14)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켜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다(13)

 

 

 

 

 

 

 

 

 

 

 

 

 

 

 

 

 

 

 

 

                             욥기

 

 

기록목적

 

욥기의 주제는 의인에게 오는 고난과 극복이다. 욥은 지루할 정도로 친구들과 논쟁한다.  표면적 주제는 고난이지만 내면적 주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인 것이다.

 

특징

 

대표적인 지혜문학으로 욥기와 잠언,전도서가 있다. 전도서는 ‘의인의 사색’이라면 욥기는 의인의 부르짖음이다. 룻기와 비교하면 침묵하시는 하나님은 같다. 그러나 룻기에서 나오미는 긍정으로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는데 비해서 욥은 부정을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고 있다. 룻기는 하나님나라의 역동성을 보여준다면 욥기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으로 하나님나라를 세워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공통점은 승리와 회복이다.

 

욥기는 시적인 문체로 기록되었다. 많은 부분에서 시적 대귀법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아랍어,아람어,아카드어,애굽어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대화체를 사용하고 있다.(4장-37장)

 

겔14:14-20에 의인에 대한 기록에서 에스겔,욥,다니엘을 증거하고 있다. 약5:11에는 성도의 인내의 모델로 욥을 제시하고 있다. 욥이 살았던 우스땅은 애가4:21에 팔레스틴 동부 에돔 근처에 위치한다.(창10:23,22:21,36:28) 그렇다면 욥은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욥의 활동연대는 족장시대로 추측한다.

 

1. 욥42:11에 ‘케시타’ (금 한 조각)는 족장시대에 사용하던 화폐단위이다. (창33:19)

2.욥은 고난후 140년을 더 살았으므로 (42:16) 거의 210년을 살았다. 이는 족장들의 수명과 유사하다.

3.욥의 재산은 가축의 수로 측정했는데 역시 족장시대의 부의 측정방법이다.

4.스바인과 갈대아인은 아브라함 당시의 유목민이었다.(욥1:15,17)

5.욥의 딸들은 아들들과 같은 상속인이었다. 그러나 모세 이후의 시대라면 불가능한 것이다.

6.욥기에는 모세이후 시대에 나오는 제사장이나 율법,성막,절기,축제에 대한 기록이 없다.

7.욥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인 ‘(엘)샤다이’는 족장시대에 사용되던 하나님의 이름이다.

 

아브라함과 동시대인 욥을 통해서 언약백성인 아브라함과 이방인 욥을 통해서 참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주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역동적인 삶을 통해 이루어가는 하나님나라,욥은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가는 하나님나라를 보여주고 있다.

 

욥기의 구조

 

1.1-2장과 마지막장은 이야기체 즉 산문으로 기록되었다. 산문으로 기록된 부분에서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한다. 네레티브 형식이기에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나 운문으로 기록된 부분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산문으로 된 부분은 역사적이며 운문으로 된 부분은 철학적이며 시적이다.

 

2.운문 부분(3:1-42:6)은 처음에는 온화한 대화로 시작되다가 열띤 논쟁으로 바뀐다.

 

3.욥의 세친구들은 차례로 욥과 대화를 나눈다. 세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며 연장자인 엘리바스가 먼저 말하는 형식이다.  세 번째 대화에서는 소발이 빠진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32장에 가면 가장 나이어린 엘리후가 등장한다. 욥은 엘리후의 말에 답변하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한다.

 

4.마지막 대화는 엘리바스이다.  연장자답게 늘 경험을 이야기한다. 빌닷은 전통에 근거해 말한다. 소발은 가장 거칠었다.분노하며 내뱉은 말은 모두 가설에 불과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율법주의자이며 욥을 정죄한 것이다.

 

 

 

욥기의 등장인물들

 

엘리바스(엘리파즈):에돔의 도시인 ‘데만’출신으로서 많은 지혜자를 배출한 곳이다. 세 친구 중 가장 연장자이며 대변인 역할도 한다. 인과응보를 주장한다.

빌닷(빌따드):율법주의자이다.

소발(초파르):독선적이고 도덕적인 자였다.

엘리후:그들 중 최연소자였으며 세 친구와 가까운 사이는 아니다. 욥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내용

 

1장,울타리가 무너질 때

 

고난을 통과하지 않은 믿음은,검증되지 않은 믿음이다. 하나님은 욥을 시험하시듯 우리를 시험하신다. 욥은 순전(히:탐)이란 말이 반복된다.(1,8) ‘탐’은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을 말한다. 그는 정직했고 하나님을 경외했다. 이런 것은 욥의 내면의 울타리였다.

 

욥의 외면의 울타리는 10명의 자녀들, 즉 7명의 자녀가 뜻하는 완전수, 세명의 딸이 뜻하는 하나님의 수이다. 양떼 7,000 도 7,완전수의 1,000배수,즉 10x10x10(3번), 1,000마리의 수,500의 나귀,넓은 땅, 많은 종들,그는 동방의 가장 큰 부자였다. 또한 욥의 지혜,존경 이 모든 것이 욥의 울타리였다. 오늘 여러분의 울타리는 무었인가?

 

욥에 대한 모든 평가는 사람들의 평가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어떠한가? 하나님은 시험하시기를 원하셨다. 아브라함의 일생도 시험의 연속이었듯이 욥에게도 하나님은 시험코자 하신 것이다.

 

1장의 배경은 천상이다. 1:1-6절은 지상,6절부터는 천상이 대조적으로 보여진다. 6절의 스랍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워진다. 하나님은 주위를 둘러보신다. 그때 스랍들 사이에 사탄이 끼어들어왔다.  욥기 1,2장에 나오는 사탄은 정관사가 붙어 ‘그 사탄‘이 된다. 사탄은 히브리어 동사다. 히브리어 명사는 동사형에서 파생된 경우가 많다. 사탄은 ’대적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명사가 되면 ‘대적자’,‘고소인’이된다. 사탄은 언약 백성들을 밤낮 고소한다. 사탄은 타락한 천사장으로 탁월한 교활성과 이중성을 가진 인격체이다.

 

1장은 재판 형식을 빌어 욥을 시험하신다. 사탄은 고소자로 등장한다. 피고는 욥이다. 고소장은 ‘히남’(까닭없이)이다. 모든 사람들이 어떤 이유나 댓가로 신앙생활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욥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욥을‘ 내 종‘이라 호칭하신다.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이다.사탄의 음모는 욥을 무너뜨리고 하나님께 타격을 입히며,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도전이었다.

 

울타리를 제거하시면 욥은 저주할 것이라는 것이다. 욥의 신앙은 거짓신앙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탄의 논리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을 신뢰하고 있었다. 욥이 이유나 댓가 없는 순수한 신앙인이었는가? 아니면 그저 그런 신앙인이었는가? 당시의 사람들은 신관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다. 또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잘 모를 때 욥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려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1차적으로 그 시대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시듯이 욥기도 그런 관점에서 기록된 것이다. 이제 욥의 믿음이 진짜인가? 댓가를 바라는 믿음인가가 판가름 날 것이다. 이것이 욥기의 관전포인트인 것이다.

 

이제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속에 욥의 울타리를 하나씩 제거한다. 첫번째는 재물이다. 사탄은 신속하게, 그리고 욥이 정신을 차릴 여유도 주지 않고 점점 더 강하게 공격한다.

두 번째 공격 목표는 자녀들이다. 욥의 울타리는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이제 욥의 반응을 보자.

 

20절 ‘욥이 일어나’ (와아캄 이요브) ‘일어나’는 ‘쿰‘의 기본형 능동태 남성 단수 3인칭 미완료이다. 쓰러져있지 않고 일어났다. (달리다,아브라함이 일어나,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그 다음 반응은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회개의 표현) 땅에 엎드려(복종의 표현) 경배했다. 이것이 욥의 자세이다. 성경은 자세에 대해 매우 강조한다. 우리의 예배는 어떠한가.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자세는 아닌가? ‘엎드려‘는 ’일어나‘의 반대말이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표현이다. 우리는 말씀에는 순종한다. 그러나 환경이나 고난에 순종하기는 어렵다. 욥은 말씀에도 고난에도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0절을 히브리 성경을 보면 아홉 개의 단어로 되어있다. 그 중에 다섯 개가 동사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항상 동사에 유의해야한다. 동사는 이야기의 핵심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반응은 적신신앙이다. ‘적신으로 돌아갈지라‘

네 번째 반응은 하나님의 주권신앙이다. ‘주신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다섯 번째는 여호와를 찬송했다.

여섯 번째 범죄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1장에서 보여주는 고난의 원리를 살펴보자

 

1.사탄은 시시때때로 성도를 공격한다.

2.하나님은 이유없는 고난을 허락하시어 시련을 주시어 이를 감당하게 하시는 것이 성도를 다루시는 방법이다..

3.우리가 이 모든 고난의 의미와 이유를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신다.

4.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성도 편이시다.

5.고난은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갖게한다. 고로 신앙의 성숙을 갖게된다.

6.검증되지 않은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하여 하나님은 성도를 시험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아브라함,야고보 1장)

 

2장,고난과 승리

 

사탄은 두 번째 욥을 기소한다. 하나님은 사탄이 1:9에서 첫 번째 고소장에서 썼던 ‘히남’(까닭없이)을 사용하시고 있다.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하나님은 늘 우리 편이다.내가 연약할 때도 나를 믿어주신다. 그러나 사탄은 거짓말쟁이이다. 1:12절에 ’그의 몸에 손을 대지 말라’하셨는데도 욥의 생명을 노리고 있었다.

 

5절’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우리도 세상에서 당하는 대표적인 고난이 재물,자녀 ,육신일 것이다. 욥은 고난의 대명사이다. 성경의 한권,한권의 주제가 66개의 다이아몬드의 한면을 이루어 통일성을 보여주시는 것 같이 욥은 최대의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이다.

7절의 악창(삐쉬힌)은 고통(2:7),가려움(8),식욕이 사라짐(3:24),의지상실(25),기력상실(6:11),종기에 구더기(7:5),호흡곤란(9:18),냄새(19:17),열(30:30),피부가 벗겨짐(30:30)등이다.

 

성문에 앉은 재판관이었던 그가 이제 쓰레기와 거름더미의 재 가운데 앉았다. 그리고 깨진 기와조각으로 종기를 끍고 있었다. 9절,욥의 아내가 순전(탐)을 버리고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강요한다. 이것이 일반적 반응이고 사탄의 계락이었다. 그러나 욥은 달랐다.

 

욥의 반응을 보자 10절, ‘그대의 말은 어리석도다‘(히:나발 영적으로 무지하고 분별력이 없는) 후에 욥은 친구들에게 죽기까지 순전(탐)을 지킬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렇다 욥기의 주제단어는 ’탐’이다. 그 시대의 대부분이 댓가를 바라는 신앙이었다면 욥은 순전한 신앙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욥의 두 번째 반응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 즉 재앙도 받지 않겠느냐’?

 

세 번째 반응은 ‘이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고‘ 사탄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나님을 대면하여 욕하리이다‘라고 한 사탄에게 욥은 입술로 범죄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욥의 위대한 승리를 보여주고있는 것이다. 야고보서5:11에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다‘고한다. 인내의 ’후포모네’의 뜻은 ‘시련을 굳세게 감당했던‘이다.

 

욥의 아내는 첫 번째 고난에서는 침묵한다. 그러나 두 번째 고난에서 참지 못하고 소리친다. 70인 역은 욥의 아내에 대해 설명을 붙이고 있다.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속에서’ 몰락해 가느니 차라리 죽기를 비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 우리말 성경은 욥의 아내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그러나 70인 역은 욥의 아내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욥의 아내가 욥의 고난 이후에도 계속 옆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에 주목하자. 70인 역에서는 ‘ 그 동안 나는 그 지긋지긋한 일거리를 찾아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떠돌아 다녔습니다. 애써 일거리를 얻어 놓고도 너무나 괴롭고 억울해서 잠시라도 쉬기위해 ,빨리 해지기만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또 다른 긍정적해석은 42:13절에 10자녀를 다시 얻었을 때 그 부인에게서 얻었다는 것이다. 욥의 아내는 입술로는 원망했지만 욥을 떠나지 않았다. 욥과 같이 믿음의 기본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욥의 세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멀리서 왔다. 그들은 욥과 달리 큰 소리로 울부짖고,옷을 찢고 티끌을 머리에 뿌렸다. 욥과 비슷한 표현이지만 근본이 다른 것이다. 그들은 일주일 간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욥과 함께했다.

 

3장,욥의 탄식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자주하는 말은 (사영리 1단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에 대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이다. 이 말은 언뜻 믿기만 하면 성공적인 삶이 보장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도 예비하신다. ’놀라운 계획‘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1,2장은 산문으로 쓰여졌으나 3장 부터는 운문으로 쓰여졌다. 이야기를 전개할 때 산문으로 한다. 소설은 산문이다.  논문이나 신문도 산문이다.  하지만 3장 부터는 운문으로 기록되었다.  즉 밋밋한 산문에서 리듬을 갖춘 운문으로 바뀐다. 운문은 42:6절 까지 이어진다. 욥기의 대부분이 운문인 시의 형태로 기록되었다. 시는 대개 비유와 은유 그리고 형상언어와 댓귀법(대조와 반복)을 사용한다.  하여 기록자가 아니면 이해 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3장의 구조를 보면

 

욥이 생일을 저주(1-10)

태어 날 때 차라리 죽었으면하는 심정(11-19)

욥이 죽기를 소원함(20-26)

 

경건하고 인내심이 강한 욥이 이제 입을 열어 탄식한다. 인간은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께 소리도 지르고 비틀기도 하고 회의도 품고 그런 과정을 통해 믿음은 더욱 단련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욥의 탄식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신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욥과 나오미를 비교하면 나오미는 남편과 자식들의 죽음을 그대로 받아드린다. 그리고 하나님의 헤세드를 신뢰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기대한다. 하나님이 나를 선한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신뢰가 확고하다. 그러나 욥은 절망가운데 몸부림치며 하나님의 헤세드를 알아간다.

 

7일간 침묵을 깬 욥은 먼저 죽기를 간구한다. 고난을 바라볼 때 욥은 영적침체에 빠졌다. 4-6절에 4개의 단어를 사용해서 5번이나 어두움에 대해 언급한다. 어두움(호세크),사망의 그늘,유암(킴리르),두렵게(5절),심한 어두움(오펠)(6)등 욥은 혼란스럽다. 고난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한채 괴로워한다. (어찌하여,11,12)

 

3절에서 9절 까지 ...했으면,....하게 했으면과 같은 표현이 반복된다.  3장은 욥의 말 중에서 가장 거칠게 반항하는 부분이다. 26절,맨 마지막단어는 ‘봐이야보 로게즈’(혼돈만이 임하였구나)이다. 영적침체 ,육체적,정신적,영적고난이 온 것이다. 그러나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  끝까지 포기하면 안된다.(히13:5)자식이 부모를 신뢰하지만 부모에 대해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그런 관계로서 이해 할수 있는 것이다. 하여 하나님은 욥의 탄식을 받아들이셨다.

 

4장,첫번째 대화(엘리바스의 발언)

 

욥의 친구들은 신학자적 소양을 갖고 있다. 그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나 욥에게 일방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일반적인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4:7-8절은 삼단논법이다.

 

    모든 고난은 죄에 대한 징벌이다

    욥은 고난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욥은 죄인이다.

 

친구들은 4장-14장에서 욥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한다.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고(엘리바스5:8),네가 만일 정결하고 정직하면(빌닷8:6),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려라(소발11:14)

 

연장자였던 엘리바스는 3-4절에서 욥 너는 과거에 탁월한 위로자였다. 그런데 이제 너에게 닥친 고난에 대해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구나.(5) 엘리바스는 인과응보에 대해서 강조한다.(7-11) 그러나 욥은 인과응보와 거꾸로 고난을 당하고있는 것이다. 잘 섬기고 믿었으면, 욥은 헤세드의 원리를 잘 실천한 사람인데도 인과응보가 아닌 것이다.

 

일반적원리를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안 믿는 사람이나, 제대로 믿지 않는 사람은 잘 사는데, 아니 내가 믿기전에는 잘 먹고 잘 살았는데 더 잘 믿고 더 잘 섬기고 있는데 인과응보와 거꾸로 가고있을 때 얼마나 당황스러운가? 이것이 지금 욥의 심정인 것이다.

 

이제 엘리바스는 자신의 신비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12절 ‘말씀’이 임했다. 13절, 그 말씀은 이상중에 임한 것이다. 15절, 영(루아흐)이 내 앞으로 지나갔다. 그러나 형상은 알수 없었다. 형체가 있었으나 볼 수 없었고 소리만 들을 수 있었을 뿐이다.(16)

하나님의 형상은 보지 못하고 그 음성만 들었다는 신비한 체험을 소개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그때 그 음성은 17절 ‘인생(에노스:사람,욥기에 30번 나옴)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게베르:강한 인간)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수사학적인 질문을 욥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허무한 존재가 아니더냐?  욥의 친구들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원리를 욥에게 적용시키는 데 문제가 있고 또한 욥이 받아들이기에 무리가 있는 것이다.

 

5장,복된징계

 

8절,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고난에서 벗어나는 유리한 해결책은 회개인 것이다. 구하고(다라쉬)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욥의 고난의 이유는 교육적 차원에서의 징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징계를 받아드려라. 이는 복된 징계이다. 19절, 여섯가지 환란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가지 환란 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하나님의 보호와 우리의 신뢰를 이야기한다. 네가 회개하면 주위의 돌 짐승 모두가 너와 언약을 맺고 화평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마음문이 닫힌 욥은 받아들일수 없었다.

 

6장,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의인의 고난)

 

욥은 엘리바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4절에서 고난이 하나님의 공격이라고 한다.  욥이 바라는 것은 오직 죽음이다. 죽고싶다는 것이다. 사실 욥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인데 반하여 친구들은 정죄하고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욥이 견딜 수 없는 부분이다. 하여 욥은 14절에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헤세드)라고 호소한다.

 

헤세드를 베풀어다오.(15) 친구들은 ‘와디’와 같다는 것이다. (15) 데마와 스바의 행인들도 물을 사모하다가 와디를 보고 길을 잃은 것같이 헤세드를 간절히 원하지만 친구들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친구들은 사막에서 만나는 ‘와디’와 같다는 것이다. 장례식에서는 같이 울어주고 위로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는 유족들에게 천국에서 다시 만날텐데 믿음없이 울지 말라느니, 오히려 기뻐하라느니 등의 말씀은 신학적으로 맞는 말씀이지만 오히려 사막의 ‘와디’와 같은 것이다.

 

7장,계속되는 욥의 답변

 

7절부터 하나님에게 탄식한다. 나의 생명이 호흡(루아흐:여기서는 바람같은 존재)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름이라는 것이다.나의 겉모습은 사람이나 환경, 그리고 사탄의 공격, 그러나 가장 큰 적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하나님이 내 대적자가 되셔서 나를 과격삼아 화살을 쏘시는 (20),하나님께 대한 욥의 비통한 기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다.

 

아무런 구원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욥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고난의 이유를 말씀만 해주셔도 견딜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고계신 것이다.

 

8장,빌닷의 첫 번째 발언

 

1.하나님의 성품(3-7) 욥 위를 봐

2.과거의 지혜(8-10) 욥 뒤를 돌아봐

3.자연의 증거(11-19) 욥 주위를 둘러봐

 

욥의 대답을 듣고 있던 빌닷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욥에게 화를 내며 말한다.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지 않는 욥에게 책망하는 것이다. 빌닷은 인과응보를 욥의 자녀들에게 까지 적용하고있는 것이다. 4절,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 욥의 회개를 촉구하며 회복의 과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욥은 아직 회개할 마음이 없다. 더더군다나 자식들도 인과응보로 다루는 빌닷에게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깊은 상처가 된 것이다. 우리도 책망은 조심스럽게 해야할 것이다.

 

회복의 순서를 살펴보자

 

       첫째 ‘부지런히 구하고(샤카르) 전능하신 자에게 ’빌고‘(하난:은혜를 간구하는 것)(5)

       둘째 ‘청결하고 정직하면‘ (성결한 삶)

 

회복은 첫째‘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둘째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인과응보는 틀린 것이 아니다. 일반적 진리의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과응보를 뛰어 넘고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인과응보와는 거꾸로 갈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내 대적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9장, 빌닷에 대한 욥의 답변

 

빌닷의 무모한 논리 즉 욥의 자녀들의 죽음에 대해 욥은 항변한다. 세상에 의인이 어디있느냐(2)  욥은 친구들이 아닌 하나님께 질문하고있는 것이다. 그리고 저항한다. 그러면서 친구들에게는 이미 위로도 소망도 사라지고 이제는 간절히 중보자를 원하고 있다. 33절,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모키아흐:중보자)도 없구나’

 

10장,하나님을 향한 호소

 

욥의 탄식은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내 마음의 괴로운대로 말하리라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1-2) 욥은 고뇌에 차서 탄식하며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알게 하옵소서’

 

11장,소발의 반박

 

소발은 전형적인 율법주의자이다. 목소리를 높여 말과 억양에 가시가 돋혀있다. 공격적이다.

 

욥 너는 죄를 지었다.(1-4)

욥 너는 무지하다.(5-12)

욥 너는 죄인이다.(13-20)

 

소발은 더욱 강경한 어조로 욥을 책망한다. 불경죄라는 것이다. 너는 말이 많다(2),너는 오만 불손하구나(3) 너는 무식하다.(7-8) ,교만하다(11)  욥에게 숨겨진 죄가 있을 거라고 정죄한다. 11절의 ‘허망하다’는 ‘골빈 놈‘’멍청이‘라는 욕이다.  함부로 말하는 소발은 욥을 더욱 궁지에 몰아 넣었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가는 구도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비록 투박하고 무지하고 쟁론하지만 그 속에서 조금씩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다.

 

12장,소발에 대한 욥의 답변(인과응보:하나님의 주권신앙)

 

욥은 친구들 모두에게 반박한다. 친구들의 공통점은 인과응보의 진리이다. 욥의 고민은 의인의 기도는 듣지 아니하시고 악인(강도:6)은 형통한 것이다. 9절의 ‘여호와’는 욥에 의해서만 고백되는 이름이다.(1:21,12:9,38장,40,42장) 다른 곳에서는 산문체로 나온다. 1:7에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욥은 언약의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또한 인과응보에 맞서는 욥의 고백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13절‘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계속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한다.14절‘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이지 못하느니라’ (=풀리지 못하느니라) 인간의 주인은 하나님인 것을 고백한다.

 

23절에도 ‘만국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열국으로 광대하게도 하시고 다시 사로잡히게도 하시며’ 욥의 주권신앙은 욥기의 주제이며 성경의 주제이다. 인과응보와의 대결은 결국 욥의 주권 신앙으로 끝난다. 하나님은 욥의 손을 들어주신 것이다.

 

욥1:21절,2:10은 사실 욥기의 결론이다. 지루한 이후의 싸움 3장-41장까지 욥이 끝까지 붙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신앙인 것이다. 42장7절 하나님이 친구들에게 하신 말씀은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르켜 말한 것이 내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하느니라’ 8절에도 반복된다. 결론은 계속 ‘여호와께서‘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며 위대한 욥기가 마쳐지는 것이다.

 

13장,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13장은 법정 형식을 빌리고 있다. ‘리브’는 ’소송하다’라는 뜻이다.(변론:3,6) 친구들은 변호사의 자격이 없다.(4-5) 하여 욥이 직접 자신을 변론하고 있다. 그러나 욥의 변론은 13절 생명을 건 변론이다. 15절에 ‘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죽이실 지라도) 내가 소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  하나님을 대면하려는 욥,죽는다 하더라도 죽어 하나님을 뵐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리라는 신앙고백이다.

 

욥은 하나님앞에 나가기전에 기도한다.(20-28)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도 침묵하신다. 침묵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고난받을 때 일일이 설명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기도하며 스스로 그 해답을 얻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14장,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욥

 

14장은 인생의 허무함과 유한함에 대한 것부터 시작된다. 수명은 짧다.인생은 괴로움,혼란,번민으로 가득차있다. 인생은 번성하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이것은 욥기 전체의 강조점이다. 3절에서 자신을 ‘이와같은 자‘로 고백한다.

 

그러나 아직 욥이 깨닫지 못한 부분이 있다. 욥은 이 모든 고난에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하여 영원한 안식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욥의 고난은 욥을 염세주의로 몰고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욥은 부활을 사모한다. 14절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15장,두번째 대화그룹, 엘리바스의 발언

 

엘리바스의 두 번째 발언은 처음과 달리 정죄로 시작된다.  마치 글러브를 벗어 던지고 맨주먹으로 욥을 치는 격이다. 6절 ‘너를 정죄한 것은 너의 입술이다‘ 고난에 대해 탄식하는 욥을 이해하지도 용납하지도 않고 정죄한다. 함부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행동이며 기도하지 않는 행위를 책망한다.(4)

 

욥을 이해하고 욥의 편에 서서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보다 권위를 앞세우며 정죄하는 율법적 신앙을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서 복음적 신앙과 율법적 신앙을 비교해 보자. 권위,정죄,책망속에는 숨을 쉬기조차 어렵다. 욥의 친구들은 위로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욥을 더 큰 고통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16장, 엘리바스에대한 욥의 답변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위로를 말했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을 오히려 ‘고난의 위로자들’(2) 즉 ‘고난을 주는 자들‘이란 뜻이다. 7절부터 하나님에 대한 인칭변화를 볼 수 있다. 3인칭(그)으로 시작하다가 2인칭(당신)으로 그리고 8절에서는 2인칭이 주어가 되었다가 9-14절은 다시 3인칭이 주어로 나타난다. (11절은 하나님)

나레이터가 인칭의 변화를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강조용법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더욱 힘들어하는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17장,욥의 비탄의 기도

 

나의 보증이 되어달라고 기도한다. 3절 ‘청컨데 보증물을 주시고’(시마-나 오르베니 임마크) ‘시마‘는 ‘주시고‘ ’나‘는 ’청컨대‘ 이며 ’오르베니‘는 서약하다‘는 ’아라브‘에서 파생된 남성명사이다. ’임마크’는 전치사 ’함께’로서 직역하면 ‘청컨대 나의 서약을 당신과 함께 두소서’  즉 나의 서약을 하나님이 인정하소서 라는 탄원이다. 

욥의 신앙은 역경에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실의 고통을 이기기 힘들어 괴로워하고있는 욥을 당신은 이해할 수 있는가?

욥은 하나님의 계속된 시험과 침묵에 지쳐있다. 그리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18장,빌닷의 두 번째 발언

 

빌닷은 형상언어를 사용해 죽어가는 욥을 묘사한다

 

  1.빛의 소멸(5-6)

  2.그물에 걸려 죽을 운명(7-10)

  3.추격당하는 도망자(11-15)

  4.뿌리가 뽑힌 나무(16-20)

 

욥의 신앙 역시 처음에는 인과응보였다. 구제,예배,예물,번제,정성이 나로 의인이 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욥은 고난을 통해서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 신앙을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친구들의 인과응보에 맞서고 있는 것이다. 빌닷은 욥을 저주한다.

 

욥은 악인이며 멸망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막말을 하고있는 것이다. 1절의 ‘너희’는 주어로 친구들을 가르킨다. 언제까지 좋은 말로 욥을 권면하겠느냐는 것이다. 빌닷은 욥에게 저주,폭설을 통해 두려움을 주어 순종하게 하려는 것이다. 욥의 반발은 더욱 커진다.

 

 

 

19장,욥의 답변

 

말로 죽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른다. 다윗도 고난을 받으면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독한 말이라고 고백한다.(시64:1-4,시57:4)

 

욥은 ‘고엘’을 청원한다. 25절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 26절은 부활을 믿고있는 신앙을 보여준다.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고난받는 우리도 ’고엘‘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며 부활의 소망을 가져야 할 것이다.

 

고난받는 이들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위로,긍휼이란 것, 고난 받는 욥이 소외된 것을 통해 하나님을 찾으려 몸부림치는 모습,그리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나를 구원하실자에 대한 확신, 그리고 부활까지이다. 고난을 겪을 때 주의해야 할 것들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쉽게 판단하지도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오미와 비교하면 나오미는 적극적으로 고엘을 찾아나선 반면에 욥은 소극적으로 고엘을 기다리는 것이다.

 

20장,소발의 발언

 

소발 역시 욥을 악인으로 취급한다. 분노와 악의에 가득찬 소발은 6절 드디어 욥에게 욕을 하고 있다.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있느냐 하리라’ 소발의 독설은 계속 이어진다. ‘가난한자를 학대하고 버림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로다’(19) ‘그는 마음에 족한 줄을 알지 못하니 ’(20).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일어나 그를 칠 것인즉‘(27) 고난에 처한 욥을 더욱 절망적으로 만드는 소발이다. 욥은 큰 상처를 받았다.

 

21장,욥의 답변

 

세친구들의 ‘악인의 멸망’에 대한 욥의 답변이다.  욥은 인과응보의 문제점을 말한다. 악인이 반듯이  벌을 받는 것은 아니다. 악인은 오래 살고 세력이 강하다(7),그들은 더욱 강성하다가 늙어서 죽는다(13)  악인은 재앙을 받지 않는다(17-26) 이러한 인과응보로 나를 괴롭히지말라. 제발 악인 취급하지 말라

 

그렇다 욥의 말대로 하나님은 인과응보에 종속된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으로 예측할 수 없다. 따라서 악인이 번영하고 의인이 고난 받더라도 조급하거나 쉽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22장,엘리바스의  세 번째 발언

 

하나님의 심판은 네 죄 때문이다.(1-5)

욥의 죄목을 고발함(6-11)

악인의 운명(12-20)

회개의 촉구와 회복의 약속(21-30)

 

욥의 친구들은 인과응보의 교리를 계속 강조했다. 욥은 하나님의 주권을 제기하며 하나님 앞에 무죄를 선고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정에 호소했다.  그러나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욥의 변화가 포착된다. 처음에는 죽기를 갈망했던 욥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무죄를 기대하고 있다.

 

엘리바스는 연장자 답게 처음엔 점잖게 타일렀다. 그러나 두 번째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격노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는 이둘이 모두 포함된다. 그러나 내용은 모두 똑같다. 욥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욥을 심판하신다는 인과응보였다. 친구들의 인과응보교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님을 새삼 강조한다.

 

다만 코끼리 만지기식 혹은 어린아이들 정도의 기본적인 교리만 고집하고있는 것이다. 인과응보는 하나님의 주권의 지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차단하는 우를 범하고있는 것이다. 전통에 매여 욥을 정죄하며 인과응보에 대항하는 욥을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으로 여기는 친구들의 잘못은 편협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욥이 무지한 것은 끝까지 회개할 것없는 의인이며 무죄라는 주장이다. 욥 또한 고집스러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엘리바스의 회개를 촉구하는 장면은 그냥 지나쳐서는 안된다. 이것은 회복의 순서이기도 하다.

하나님과 화목하라.(21) 예수그리스도는 화목의 제물이 되셨다.  롬5:11‘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 즉 화목된 자로서는 그의 살으심을 위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과 평화하라. 예수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복은 샬롬이다.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22) 말씀을 받아드리는 단계이다. 복음을 받는 단계이다.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라.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라.

재물을 의지하지말라.

 

회복의 순서는

 

복을 주신다.(21) 복은 영적,육적으로 샬롬에서부터 시작

하나님과의 관계회복(26)

기도응답(27)

성공(28)

높임(29)

 

23장,욥의 답변 (하나님을 찾는 기도)

 

지금까지는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했던 욥에게서 변화가 일어난다. 이는 22장 엘리바스의 회복에 대한 반응이기도하다.

 

첫째,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변호를 용납할 것을 기대한다. (6) 내가 원망의 말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들으실 것에 대한 기도이다.

둘째,‘거기서는‘(샴) ’영영히’벗어나리라. 현실을 넘어 그곳에서의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

셋째,고난을 연단으로 받아들인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10)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신앙의 정절을 굳게 지키는 고백이다.

넷째,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받아드린다. ‘내게 작정한 것을 이루 실 것이라 이런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14)

 

그러나 아직 욥은 냉험한 현실앞에서 탄식한다. (8-9,15-17) 인간은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욥은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구도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욥의 다섯가지 소망기도(3-7)

 

1.하나님을 만나기를 소원한다.(3) 지금까지의 욥의 신앙은 제의에만 집중했다. 드리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1:5자녀를 위한 속죄제) 이제 자신을 둘러싼 모든 울타리가 넘어진 지금 욥은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며 38장에 이루어진다.

 

2.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자신의 사정을 아뢰기를 원한다.(3-4) 친구들과의 변론에서 이제 직접 하나님 앞에 나가기를 원한다. 또한 지금까지 중보자를 찾았으나 이제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시지만 그러나 욥기를 읽는 청중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듣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욥의 기도는 이미 응답되고 있는 것이다.

 

3.욥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닫기를 원한다.(5)

 

4.하나님이 나와 다투기보다 내 항변을 들어주시기를 기대한다. 그렇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지만 어린아이 같이 우리는 투정도 부릴수 있는 것이다.

 

5.자신의 정직이 증명될 것을 기대한다. 이것은 42장에서 응답된다.

 

이제 욥은 고난의 긴 터널을 경험하면서 신앙의 성숙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시고 혼란스럽고 이해 안되는 고난이 이어져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변함없는 것이다. 우리의 울타리가 하나씩 무너질 때 우리는 비로소 울타리 때문에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울타리가 무너질 때 나의 삶의 경계는 더욱 넓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다루시는 방법이 시편에서와 같이 욥기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울타리가 넘어질 때 많은 이들이 상처받는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욥은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을 용서하고 자녀와 재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변함없는 신뢰에 있는 것이다.

 

25장,빌닷의 세 번째 발언

 

빌닷은 더 이상 욥을 책망하지 않는다. 또한 욥의 답변과 고백에서 더 이상 논쟁거리가 없었던 것이다. 빌닷은 인간이 거스릴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선포한다. 지금까지 빌닷은 거칠게 말했으나 여기서는 논조가 바뀌었다. 친구들은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미숙했고 상담자로서도 미숙했다.

 

1.그들은 욥을 전혀 긍휼히 여기지 않았다.

2.욥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

3.욥의 안타까운 호소를 무시했다.

4.욥의 말을 듣기보다 너무 말이 많았다.

5.그들은 공격적이고 논쟁적이었다

6.그들은 정죄의식으로 가득찼다.

7.그들은 율법적이었다.

8.욥의 고통의 원인을 인과응보로 밀어부쳤다.

 

26,27장,욥의 답변,욥의 맹세

 

27장에서 욥은 위를 바라본다. 그리고 11번이나 하나님을 언급한다.

‘죽기 전에는(히 ,아드-에그와:죽을 때까지 ,1인칭 미완료)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미완료) (27:5-6) 욥은 신앙의 순수성과 정직성을 고백한다. 또한 1인칭과 미완료시제를 반복함으로 자신의 신앙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28장,욥의 독백

 

결론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28) 욥은 이제 고난을 받아드린다. 하여 이 고백은 실천적 고백이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며(24),만물의 창조자이시다.(25-26) 세상을 창조하실 때, 지혜는 창조질서를 의미한다. 욥은 친구들과의 논쟁을 접고 하나님을 경외함을 고백한다. 그러나 아직 욥은 완전한 해답을 얻은 것은 아니다.

 

29-30장,욥의 독백

 

그때는 (3,5,7)이 반복 된다. 욥은 전에 존경을 받은 것은 남을 위한 베품에 있었다. 헤세드를 베풀었던 욥, 그 때는 참으로 행복했었다. 그런데 현재(30장)의 고통에 탄식하고 있다.

 

29장은 과거, 30장은 현재의 상태이다. 30:1절은 ‘그러나‘로 시작한다. 16절,’이제는‘ 환란이다.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만 있다. 이 모든 이유는 11절 ’하나님이‘ 하셨다. 인칭의 변화를 통해 현재의 고통을 극대화하고 있다. 1인칭으로 시작하여 11절에는 주어가 하나님으로 바뀐다.  20절부터 다시 주어가 바뀐다. ’내가’는 욥을 가르킨다.

 

21절 하나님은 욥을 대적자로 원수같이 여기신다. 그렇다 시편과 같이 나의 가장 큰 대적자가 하나님이 되실 때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드릴 것인가? 욥기는 구도자의 번민에서부터 최고의 영성까지 다루고 있다.

 

24절은 다시 ‘그러나’를 통해 반전이 일어난다.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 침묵하시는 하나님, 언제까지 침묵하실 것인가?

 

31장,언약

 

31:1절은 명사 ‘베리트’로 시작된다. 언약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철저하게 언약을 지켰다는 것이다. 하여 오경의 언약법들을 나열한다. 우상숭배도 하지않았다.(24-28) 언약을 지켰습니다. 이제 침묵하지 마시고 응답해 달라고 욥은 하나님의 응답을 촉구하고 있다. 일종의 언약기도이다. 언약적자비를 호소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32-37장,엘리후의 네가지 발언

 

첫 번째 발언(32-33)

가장 나이가 어린 엘리후는 지금 까지 양쪽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가 오랜 침묵을 깨고 발언한다. 엘리후는 욥에게 하나님 앞에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고 발언한다. 욥의 태도에 대해서 회개를 유도하고있는 것이다. 엘리후는 세친구들도 책망한다. 증거도 없이 욥을 몰아세우며 정죄한 것이다. 엘리후의 발언은 하나님의 등장을 기다리게 하는 긴장감을 더하고 있다.

욥의 불만은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엘리후의 답변은 아니다.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환경이나 꿈을 통해서 고통속에서 말씀하신다.(33장)

 

욥은 하나님은 나의 고통을 구해주지 않는다. 엘리후는 하나님은 의로우시다.(34장)

욥은 하나님은 무관심하시다. 엘리후는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35장)

욥은 친구들과 달리 엘리후의 말에 청종한다. 엘리후의 접근방식은 세친구들과는 달랐다. 엘리후는 욥과 세친구의 중보자로 그리고 욥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로 등장한다.

 

두 번째 발언(34장)에서 욥을 회개의 자리로 인도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한다.

 

세 번째 발언(35) 엘리후가 소개하는 하나님은  10-11절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 우리를 교육하시기를 땅의 짐승에게 하심보다 더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지혜주시기를 공중의 새에게 주심보다 더하시는 이가 어디계신가 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구나’ 인간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헛된 부르짓음(13)을 하며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욥의 조급하고 교만한 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네 번째 발언(36-37)은 하나님의 공의와 주권을 강조한다. 하나님을 만나길 원한다면 인내를 가지고 교만한 마음을 버리며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기다리라는 것이다.

 

38-39장,하나님의 답변

 

길고 긴 침묵 후에 드디어 하나님은 욥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욥이 기대했던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듣고 난 욥의 대답은 회개의 고백으로 이어진다. 욥이 얻은 해답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폭풍가운데 나타나신다. 꾸중으로 나타나시는 것과 폭풍으로 나타나는 것은 같은 표현이다.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답변은 신관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말씀이 이어진다.

 

40장3-5 욥의 첫 번째 답변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4-5) 욥의 대답은 소극적이다. 나는 미천(칼로티:작고 보잘것없는)하고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욥은’ 입을 가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에게 말하라고 다그친다. 하나님은 70개가 넘는 질문을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욥에게 대답을 촉구한다. 그러나 욥은 한마디도 답할 수없었다.

 

42:1-6,욥의 두 번째 답변

 

두 번째 답변에서는 욥이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대답을 한다.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한다. ‘주께서는 무소불능 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룰것이 없는줄 아오니’ 자신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고백한다. 이제 알았다는 것이다.

믿는것에서 체험적 단어인 ‘야다’ 알았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듣는신앙에서 체험신앙으로 바뀐 것이다.(5) 욥은 비로소 하나님을 이해했다. 그리고 회개한다. 의인이라고,무죄라고 외쳤던 욥이 회개하는 것이다.

 

42:7-17, 욥의 승리

 

본문은 1-2장과 짝을 이루는 산문체의 결론이다. 욥과 세 친구 중에 욥의 손을 들어주시고,욥의 친구들을 위한 기도와 욥의 회복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은 세 친구중 대표격인 엘리바스에게 책망하신다. (7) 하나님은 욥의 말을 처음부터 듣고 계셨고 욥의 편에 서있었던 것이다. 이어 하나님은 친구들에게 속죄를 위한 번제를 드리라고 명하신다.  그러자 세 친구는 욥에게 부탁했고 욥은 그대로 한다.(9) 그토록 공격했던 자신들의 죄를 욥에게 고백하고있는 것이다.

 

욥의 위대한 승리이다.  이에 욥은 묵묵히 하나님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한다. 욥의 회복의 결정적 시점은 친구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릴때 였다.  그렇다 용서는 회복의 시작이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첫마디는 용서가 아니었던가?

엘리바스는 연장자의 권위,전통으로 욥을 눌렀고 빌닷은 욥의 아픈 부위를 계속 건드려 자녀들의 죽음이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정죄했고 소발은 욥을 악인이라고 몰아부쳤는데 모두 용서한 것이다.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가?

 

욥의 회복의 순서는 떠나갔던 형제들이 돌아왔다. 그다음 소유의 회복이다. 그리고 자녀의 회복이다. 그리고 건강과 장수의 회복이다. 욥의 회복은 인과응보가 아니다. 당연한 결과의 부수일 뿐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욥의 승리이다.

고난에 대한 욥의 승리,인간관계에 대한 욥의 승리, 사탄의 고소에 대한 욥의 승리인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승리는 하나님이 욥을 인정하셨다는 것이다.

7-8절에 ‘내 종’ 이란 말이 네 번 나온다. 이것은 매우 명예로운 호칭이다. 1:8절, 고난 받기전 하나님께서 부르신 호칭이다. 네 번이나 내 종으로 호칭하며 욥을 인정해 주신 것이다.

 

 

 

 

 

 

 

 

 

 

 

 

 

 

 

레포트

 

1.잠언1~9장 중에서 한 장을 택하여 기독론적 해석을 하시오.

A4 용지3장 글자크기 11호

2.욥기1장과 42장을 묶어 설교문을 작성하시오

A4 용지3장 11호

 

 

문제

 

1.잠언에 나오는 지혜는(1)

1)호크마

2)다하트

3)키슈론

 

2)잠언의 주제는 (2)

1)고난의 문제를 다룬다.

2)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3)지혜자의 자세

 

3)전도서가 선포된 절기는(1)

1)장막절

2)오순절

3)유월절

 

4)전도서의 주제는(1)

1)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2)인생의 목적

3)성공비결

 

5)욥기의 활동연대중 틀린 것은 (3)

1)족장시대

2)아브라함시대

3)다윗시대

6)욥기의 구조는(1)

1)산문과 운문이 섞여있다.

2)산문체로 되어있다.

3)운문체로 되어있다.

 

7)욥의 세친구가 아닌 사람은 (1)

1)엘리후

2)엘리바스

3)빌닷

4)소발

 

8)욥의 친구들의 신학은 (1)

1)인과응보

2)자유주의

3)보수주의

 

9)욥의 친구들 중 가장 연장자이며 데만출신은(1)

1)엘리바스

2)빌닷

3)소발

 

10)욥의 회복이 아닌것은(1)

1)친구들의 심판

2)소유의 회복

3)사탄에게 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