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포로전 역사서

포로전 역사서

호리홀리 2022. 5. 25. 17:54

                                               포로전 역사서

 

                             (여호수아서-사사기-사무엘상,하-열왕기상,하) 

 

                                                                                                        박인대교수

 

 

                      여호수아서

 

 

여호수아서는 언약백성이 언약의 성취로서 가나안 땅을 취한 것에 대한 기록이다. 가나안은 여호와의 땅이다.(22:19,32)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1:6,5:6,21:43-44)그리고 그 성취로 여호와의 땅을 위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은 사고 팔수 없다. 나봇은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을 왕이라 할지라도 팔수 없다 하였다.(레25:23)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피 흘리기까지 싸웠던 나봇, 나봇의 행동은 언약적 순교자로 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반대의 인물이 등장한다. 아간이다. 아간은 언약을 파기함으로 가족전체가 죽음을 당한다.

라합은 언약을 지킴으로 가족 전체가 산다(구원 얻는다). 언약을 지키는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셨으나 언약파기시에는 언제든 땅을 뺐겠다는 것이 여호수아서의 주제이다.

세겜에서 언약체결식을 한 것은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와의 언약을 준수하겠다는 결단이다. 과연 이스라엘은 언약을 지켜 행할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경고하시는 이방신을 따라 살 것인가. 이것이 사사기의 관전 포인트이다.

 

1.역사적 사회적 배경

 

성경을 연구 할 때 먼저 해야 할 것은 역사적,사회적,시대적배경을 이해해야한다.  왕상6:1에 솔로몬 성전 건축시기가 출애굽이후 480년이다.  솔로몬 성전건축이 967년인데, 출애굽은 1445년 가나안 입성은 1406년 경이다. 이집트 역사에서는 기원전 1750년 셈족인 힉소스왕조가 19왕조(아하모세)에게 추방될 때 히브리인들도 같이 추방되었다 한다. 또한 팔레스틴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는 아마르나 서신들도 하비루족들이 가나안을 공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가나안은 미개한 족속이 아니었다. 농경과 목축을 겸비한 족속들이며,철기문명을 소유한 발달된 족속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우상을 숭배하는 그들을 심판하기 위한 도구로 이스라엘을 사용하신 것이다. 가나안은 비옥한 반달지역이며, 광야 생활에 지친 그들에게 실제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에게 이 땅을 주시겠다는 언약의 성취로 주신 땅이 가나안이다.

 

2.여호수아서의 신학

 

신명기는 미완성으로 끝난다. 이스라엘이 광야행군을 마친 후 모압고원에 도착했을 때 출애굽1세대는 전멸하고 2세대가 들어가야 했다. 문제는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모압언약(신5-26)을 체결케 한다. 그리고 실제적 언약체결식(제의적절차:신27)은 가나안에 들어가 세겜에서 여호수아에 의해 수행케 했다. 이제 여호수아서는 가나안에 입성하여 세겜언약체결(8) 그리고 24장에서 세겜언약이 최종 완성된다. 이것은 아브라함과의 씨와 땅의 언약의 성취(24:26)이자. 모세와의 시내산 언약 성취이며, 요셉의 뼈를 묻음으로 족장언약이 최종 완성된다. 신명기의 장소는 모압이지만 여호수아서의 장소는 세겜이다.

  거시적 관점에서 세겜언약 (8,24)을 살펴보고 미시적관점에서 어떻게 언약을 이행하는가를 살펴볼려고 한다. 이것을 놓치면 드라마틱한 전쟁의 장면들 혹은 영적전투의 관점에서만 보게되며 균형을 놓쳐버리게 되는 것이다.

 

1)세겜1차 언약체결식(8:30-35)

가나안의 관문이자 남부지역의 가장 강력한 곳이 여리고였다. (북부는 하솔) 여리고를 정복하지 않고는 세겜으로 들어 갈 수도 없었다. 또한 하나님 께서는 요단강 도하와 여리고 정복을 명하셨다. 타이밍이 중요한 것인데 여호수아는 아이성 전투의 패배를 시점으로 세겜으로 올라간 것이다.

8:30-35을 보면 율법책은 토라로 나와 있다. 토라책은 신명기 5-26장인 공적문서이다. 세겜언약은 법적인 측면은 생략되었다. 왜냐하면 이미 모압언약에서 법적인 체결을 했고 세겜에서는 제의적 절차만 실행한 것이다. 그러나 단은 저주를 상징하는 에발산에 세움으로 언약체결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담고 있다.

 

2)세겜2차 언약체결식(24장)

여호수아는 왜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겜으로 불러모아 언약체결식을 하는 것일까? 다음 세대를 위해서이다. 여호수아는 죽기 전 모세가 모압언약을 세운 것처럼 세겜언약을 체결케한다. 서약식을 하고 언약법을 선포하고,언약의 증거로 돌을 세웠다.

사사기가 언약파기로 실패한 공동체를 보여주었다면 여호수아서는 언약을 지킴으로 승리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모세가 주도한 시내산언약이 모압언약으로 완성되었다면 여호수아에 의해 주도된 세겜언약(8장)이 24장 세겜언약으로 완성된 것을 보여주고 있다.

 

3)여호수아서의 구조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고 하신 것처럼 여호수아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또한 모세에게 주셨던 신적 권위도 주신다. 1:1에서 모세의 시종이었으나 24:29에서는 여호와의 종으로 나온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며 열두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돌을 길갈에 세운다. 이것은 22장에서 가나안 전쟁을 마치고 요단동편으로 돌아갈 때 다시 돌을 쌓게 함으로 언약을 성실하게 수행할 것을 강조한다. 이런 것은 일종의 언약갱신으로 볼 수 있다.

 

2장에 나오는 라합과 6-8장에 나오는 아간 사건을 대조한다. 라합은 천한 “기생라합”이라는 말이 계속 반복된다. 그러나 생명을 걸고 언약을 지켰을 때 라합과 모든 가족이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아간은 언약을 어겼을 때 자신과 가족,생명있는 모든 것이 죽임을 당한다. 아간은 라합과 대조적으로 유다지파의 명문가의 집안이었다. 동전의 양면인 구원과 심판의 예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늘 심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동전의 양 면과 같이 구원과 심판은 함께 나타난다. 노아의 심판과 그와 가족의 구원,소돔의 심판과 롯의 구원, 여리고의 심판과 라합의 구원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심판도 두려워 할 것 없다. 구원의 하나님을 오히려 찬양해야 할 것이다.

 

라합과 다시 대조를 보이는 사건이 9-11장의 기브온 거민과의 언약이다. 라합은 2:14에서 헤세드,진실(에메트)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언약은 반듯이 지켜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속에게 속았더라도 한번 맺은 언약은 반듯이 지킨다는 것을 만 천하에 보여주고 있다. 또한 기브온족속이 가나안 연합군들의 총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 달려와 생명걸고 그들을 구원 한 것 역시, 언약은 생명을 걸고 지켜야하는 것을 보여준다.

 

 

4)여호수아서의 내용

1장은 요단을 건너라는 명령으로 시작된다.  약속한 땅을 주겠다. 그러나 역동성을 강조한다. 적극적으로 “토라를 지켜라”이다. 토라는 좁은 의미에서는 율법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가르침이다. 모세오경 전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신약에서도 율법은 좁은 의미로  혹은 부정적의미로 사용된다. 토라는 역사의식을 보여준다. 그들이 누구며, 어떻게 언약백성이 되었는가? 여호와께서 어떻게 그들을 인도하셨나하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의 기술 방법 중 위기상황을 표현 할 때 쓰는 표현이 00가 죽었을 때이다. 모세가,여호수아가,웃시아가,다윗이.사울이 죽은 후(삼하1:1),아합이 죽은 후 (왕하1:1). 이것은 역사서의 기록 방법이다.

모세가 죽은 것은 이스라엘의 위기이다. 이 위기를 여호수아는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몇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여호와께서”란 말이다. 성경의 기술 방법은 한 사건이 시작될 때 주어,주체가 누구인지를 먼저 밝힌다. 여호와께서 이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이다(창12:1).

두번째, 여호수아의 신분은 모세의 시종으로 나온다. 그러나 24:29절에는 여호와의 종으로 나온다. 종은 주인이 있다. 모세의 종에서 여호와의 종으로 바뀌었다. 즉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셋째,모세에게 주신 신적권위를 여호수아에게도 주셔서(1:6-9) 백성들을 이끌게 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신명기에 나오는 신명기적 언약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토라를 다 지켜 행할 것이다.

 

1장은 여호수아의 리더쉽과 16절 이하의 팔로우쉽으로 나누어진다. 가나안 정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신적 리더쉽이지만 동시에 팔로우쉽이 없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영적 상승의 법칙). 그들이 아이성의 싸움이외에 단 한번도 패하지 않은 것은 일치단결이었다. 17절의 순종 18절의 격려 , 리더를 격려하는 팔로워 , 리더가 부족할 때 격려하는 팔로우쉽이 있는 한 실패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또하나의 형통의 원리이다.

 

2장을 보면 여호수아서에서 가장 강조하려고 하는 인물이 라합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여호수아서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다. 1장의 위대한 여호수아와 대조적 인물이다. 천한 기생 라합, 하나님나라의 특징은 역동성이다.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나라의 역동성, 이제 라합을 통해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나라를 보게 된다. 놀라운 것은 믿음의 조상들을 소개하는 히11장에서 여호수아의 이름은 빠졌으나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31) 라합의 이름은 나오고 있다. 여호수아보다 낫다는 말이 아니라, 라합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라합의 믿음은 무엇인가. 언약을 믿는 믿음이다. 2:10절의 하렘(헤렘), 전멸(진멸)이란 말이 나온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길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는 일이다. 14절에 그들의 언약의 확증으로 인자(헤세드)를 쓰고 있다. 언약을 믿고 생명을 걸었던 라합, 그를 통해  가족 전부가 구원을 얻었을 뿐 아니라 후에 예수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구속사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3장,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와 대조를 이룬다. 홍해는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넜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다르다. 1장의 팔로우십이 여호수아서 전체를 끌고간다. 형통의 원리이다. 정탐군을 파송 할 때도 모세는 거창한 파송식으로 보냈으나 여호수아는 몰래 보냈다. 여기서도 팔로우쉽을 보여준다. 여호수아와 제사장 그리고 2세대인 백성들의 일치협력이다. 3장은 계속 “언약궤”를 쓰고 있다. 언약을 믿고 불가능에 도전 할 때 반듯이 언약을 이루어 주시는 것을 보여준다. 여호수아의 상황은 최악이다. 요단강 최남단 하류,모맥 거두는 시기,이 시기는 북쪽의 눈이 녹는 시기로 물이 최대로 불어난 상태이다.

어떻게 건널 것인가?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러나 형통,은혜,축복,응답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아침 일찍이” 이 말씀은 반복된다. 우리가 잘살든지 못 살든지 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죄이다. 2절을 보면 3일을 기다렸다. 하나님은 왜 3일을 기다리게 하셨는가? 4:19을 보면 이 날이 정월 10일 이다. 무슨 날인가? 출애굽한 날이다. 이 두 날을 일치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침묵의 기다림, 그리고 2절의 유사들의 사역,3절 언약궤를 따르라,5절 스스로 성결,그리고 6절 제사장들의 희생과 헌신 ,이것이 가나안 승리의 비결인 것이다.

 

4장 요단을 건넌 그들은 12지파의 숫자대로 돌 12개를 취해서 요단 한가운데 단을 쌓는다. 요단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을 기념하며 12지파, 언약 공동체를 공고히하고 있는 것이다. 강을 건넌 곳을 길갈이라 했다. 길갈의 뜻은 “굴렸다”. 즉 애굽의 모든 것을 굴렸다는 뜻이다.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길갈은 그들의 임시 본부가 되었다. 이제 그들은 두 가지를 시행했다. 이것은 언약의 실행이다.

하나는 할례이다. 언약의 표시로 행했던 할례를 광야에서 하지 못했던 것인데 이제 시행하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코 앞에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불과 2km 그러나 요단을 건넌 그들은 은혜 충만 하였다. 야곱의 두 아들을 통한 세겜의 교훈이 있음에도 그들은 할례를 행하며 우리는 언약 백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유월절이다. 광야에서 지내지 못한 첫 유월절이다. 그들의 정체성 확립, 우리를 구원하신 여호와, 그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이다.  만나도 그쳤다. 그러나 모맥 거두는 추수가 시작 된 때이다.

 

5장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여리고 성의 공격이 시작 될 쯤 적정을 살피던 여호수아 앞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났다. 모세에게 했던대로 신을 벗어라. 신을 벗는 것은 종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지휘권을 내어 놓으라는 것이다. 이전쟁의 지휘관은 여호와라는 것이다. 여리고성의 전투는 이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6장1절,여리고는 굳게 닫혔다. New English Bible 에는 “볼트로 죄고 빗장을 걸었다”라고 번역한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맨 앞에 세운 이스라엘 ,언약궤는 10번 반복된다. 그들은 언약을 믿고 7일 동안 돌았고 마지막 날 7바퀴를 돌았다. 비무장, 말을 끊고,7번 의 완전수, 완전한 언약에 대한 순종이다. 히11:30에 믿음으로 돌았다고 했다.

 

7장,여리고성은 가나안의 관문이자 가장 강력한 요새였다. 가나안 7족속은 이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전투의 승패는 가나안 전체 전쟁을 좌우하는 것이다. 여리고의 함락으로 저들은 물같이 녹았다. 여호수아의 전략은 여리고 정복으로 가나안의 허리를 잘라, 북부와 남부동맹을 차단하고 연합전선을 무너트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두 번째 전투인 아이성의 싸움에서 실패한 것이다. “아이” 우리말의 뉘앙스같이 작은 성이었다.  다 올라가지 마소서  실패의 원인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아간 ,  이싸움의 실패는 자만심,교만,아간의 탐욕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언약을 깨트린 사건이다. 모든 노획물은 여호와의 것이다. 레25:18말씀대로 땅도,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임에도 아간은 언약을 깨트린 것이다. 라합으로 인해 가족 전부가 구원을 얻었다면 아간으로 인해 가족 전부가“ 헤렘”(진멸)된다.(25)  여호수아는 기도한다. 왜 실패했습니까? 7:11 언약을 어겼다. (15절)  그렇다 언약이다. 벌써 승리에 도취되어 언약을 어겼다. 여호수아는 지금이야 말로 언약을 세울때다라고 여겨 북쪽으로 올라간다. 48k 위에 위치한 세겜으로 백성들을 끌고 올라가 세겜언약을 체결한다. 그들에겐 이것이 일종의 하프타임이다. 자신을 돌아보며 우리가 누구인가? 정체성이 필요했다. 우리는 언약백성이란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9:15,16절은 “베리트” 히위족속인 기브온족과 언약을 세운다. 그들은 속았다. 속은 이유는 9절 하나님의 이름으로 왔다는 말에 믿어버렸다. 또 하나는 14절 여호와께 물어보지 않았다. 그들의 결정적 실수였다. 그러나 라합과 같이 그들은 살아남았다.  그들은 언약을 알고 믿었던 것이다. 언약적 사랑인 “헤세드”는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 영원한 언약이다. 그들은 후에 성전의 나무패며 물깃는 자가 되어 섬기는 삶을 살았다.

 

11장은 가장 큰 적과 싸워야 했다. 남부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을 대적하기위해 북부의 연합군들은 하솔왕 야빈을 중심으로 굳게 뭉쳤다. 하솔은 여리고의 30배이며 제국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철기 문명을 이루었으며 강력한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영적전쟁의 메뉴얼을 가지고 있다. 무엇인가. 6절, 두려워말라, 붙였다.(완료시제)

11장에는 진멸(헤렘)이라는 말이 반복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헤렘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또다시 자만에 빠져 가드,가사,아스돗을 남겨둔다. 그들은 불레셋의 5대 수도에 속한 성들이었다. 이일로 후에 겪게될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을 보여준다.

 

15장 이제 전쟁은 끝났다. 땅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유다지파는 땅 분배를 거절하고 나섰다. 지파장인 갈렙의 말을 들어보자. 14:6-12 하나님나라의 특징은 역동성이라 했다. 45년전 파송당시를 떠올리며 그때 정복하지 못한 헤브론 땅의 정복을 요구했다. 그 산지를 내개주소서 , 그 땅을 차지한 자에게 주리라고한 약속대로 요구했고 유다지파는 그 땅을 차지했다. 가장 힘든 요새, 백성의 숙원을 해결한 것이다. 과연 장자지파답다. 유다지파는 늘 어려울 때 마다 앞장섰다. 반면에 에브라임지파는 여호수아를 배출한 것을 이유로 기득권을 행사하며 몽니를 부리게 된다.

 

24장에 반복되는 중심 단어는 “아바드”이다 섬기다는  뜻. 명사는 “에베드”종이다. 우리는 가나안의 주인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바드”하는 “에베드”이다. 이것을 확인하는 세겜언약이다. 모세가 죽기 전 모압언약을 체결 한 것 같이 여호수아는 죽기 전 세겜언약을 체결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세겜에서 시작한 언약이 이제 같은 장소인 세겜에서 성취된 것이다. 씨와 땅의 최종 언약이 성취된 것이다. 이제 언약 백성인 그들은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우상을 “아바드”하며 그들의“ 에베드”가 될 것인가. 이것이 사사기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이다

 

 

 

 

 

 

 

 

 

 

 

 

 

 

 

 

 

 

 

 

 

 

 

 

 

                         사사기

 

 

이제 이스라엘은 남은 땅의 정복과 언약공동체를 세우는 두 가지 과제가 주어졌다. 여호수아가 죽고 하나님은 직접 통치하시는 것보다. 사사들을 세우셔서 다스리게 하셨다. “사사로 다스린다”는 의미인 “솨파트”를 모든 사사에게 사용하고 있으나 명사형인 “쑈페트”는 한번도 쓰지 않고 있다.

11장에서 “사사이신 여호와”를 쓸때 27절에 “하 쑈페트”를 쓰고 있다. 즉 사사이신 여호와에게 판단을 고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유일한 사사이며 인간인 사사는 불완전한 존재로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사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 백성들을 다스리는 대리자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웃 나라와 같은 왕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왕을 허락하지 않은 이유는 고대 근동의 모든 왕들이 가진 비인간성,압제,강압통치,몰인간적 통치수단 ,절대권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보다 강력한 왕을 원했다. 그렇게 세운 첫 번째 왕 사울은 실패한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묻는다. 너는 어떤 왕이 될 것인가.? 왕권을 허락하시며 하나님께서 같이 시행하신 제도가 선지자이다.

사사라는 제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언약적 파기가 그들을 파멸로 몰아가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사사들의 활약상만을 강조하면 사사기 전체의 주제를 놓치게 된다. 마치 여호수아서에서 여호수아의 승리에만 집중할 때 주제를 놓칠 우려가 있듯이...

 

사사기1:1에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역사서의 서술 방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 같으나  2장에 여호수아의 죽음을 다시 기록하면서 10절 “ 다음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알지 못하였더라“ 여호수아가 죽은 것은 이스라엘에게 위기지만 그보다 더 큰 위기는 다음세대로 이어지는 실패를 예고하고 있다. 사사기에서의 하나님나라는 계속 하강한다. 그러다가 결국 언약공동체는 깨어지고 분열된다.  반면 같은 시대의 룻기는 다음세대의 소망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사사시대의 빛과 그림자같이 분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사사시대의 실패는 두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다음세대에게 여호와의 언약을 가르치지 못한 것이다. 여호수아가 죽기전 그렇게 강조하며 세웠던 세겜언약을 잊은 것이다. 두 번째  자기 소견대로 행했던 것이다.(17:6.18:1,6.19:1.21:25) 그러나 이스라엘의 언약파기에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언약적 자비를 이어가고 있다. 그들이 7번 배신하고 징계를 당하면서도 또 넘어지는 연약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헤세드의 하나님, 이것이 사사기의 관전 포인트이다.

 

1.사사기의 특징

 

사사들은 원래 탁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성경의 주제대로 약한 것을 들어 쓰셔서 강한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 차자가 장자보다 앞서는 원리,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되는 원리를 보여준다. 첫 번째 사사 옷니엘은 정통 유대인이 아닌 비유대인이다. 갈렙의 조카 이다. 이방인 출신이 첫 사사가 된다. 에훗은 왼손잡이 라고 나오지만 히브리어 성경엔 “오른손을 쓰지 못하는 왼손잡이 에훗” 즉 불구자이다.

 

드보라는 여성이며(당시 여성의 사회적지위는 보잘것 없었다) 기드온은 나무꾼,삼갈은 소모는 작대기가 유일한 무기였으며, 삼손의 무기는 나귀 턱뼈였다. 입다는 창기의 아들로 떠돌이 깡패였다.  연약한 자들이었으나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나아갔던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한다.

 

사사기의 또 다른 특징은 반복법이다. 반복을 통한 강조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2:11-12.3:7,12.4:1. 6:1. 10:6.13:1). ”여호와 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2:14-15.3:8,12-13.4:2.6:1.10:7.13:1) “이스라엘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2:18.3:9,15. 4:3.6:7.10:10)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하셨고....그들을 구원 하셨으니”(2:18.3:9-10,15.6:8-10) 이러한 반복 전체가 또 반복되는 이중 반복을 통해 사사기의 구조를 알 수 있다.    

 

                   언약파기-징계-구원

 

 

 

2.사사기의 내용

 

사사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이다. 사사기 1:1절은 언약공동체의 위기이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위기를 극복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메뉴얼대로 하면 된다.  무엇인가. “물어 가로되”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다윗도 이렇게 시작한다.(삼하2:1) 기도는 일방통행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다. 우리는 묻고 하나님은 답하는 것이 기도다.

 

또 하나는 “붙였다”는 완료시제이다. 붙였다는 언약을 믿고 나갈 때 승리하는 것이다. 세 번째 매뉴얼은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는 말씀이다. 왜 실패했나? 언약을 믿지 않았을 때 실패한다.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신다. 그러나 그의 백성들은 신실하게 지킬 것인가?  여호수아서는 승리를 보여준다. 메뉴얼대로 했을 때의 승리, 사사기는 메뉴얼대로 할 때는 승리 했으나 그렇지 못했을 때 실패를 보여주고 있다.

사사기는 언약을 지켰던 유다지파의 승리로 시작하여 언약을 파기하고 우상숭배한 단 지파의 실패로 끝난다. 우상숭배를 전파한 단지파로 인한 언약공동체의 분열로 끝나는 것이다.

진멸로 번역된 “ 하렘”을 도올 김용옥은 여호와를 깡패로 묘사하며 하나님의 속성을 왜곡시키고 있다.

 

진멸은

1)죄로 인한 심판이다. 심판은 누구나 예외 없다.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이다. 동시에 언약백성인 이스라엘도 언약 파기시에 똑 같이 진멸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2)그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타락한 우상을 섬겼다.

3)진멸없이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아신다.

 

1장의 실패는 무엇인가? 리더쉽인가? 아니면 그들의 타협인가? 그런 것은 지엽적인 문제이다. 근본적인 것은  언약파기이다.(2:11-12)

유다지파는 선봉에 서게 된다. 그리고 승승장구한다. 강력한 왕인 아도니베섹을 격파한다.갈렙의 역동적인 모습은 옷니엘의 등장과 함께 더 빛난다. 갈렙이 누구인가. 에서의 후손,그나스족이다. 갈렙이 언제 유다지파에 편입되었는지 나와있지 않다. 아마 출애굽 초기 였을 것이다.  전쟁포로일 수도 있다. 갈렙의 이름 뜻은 “물어뜯다” 그런 그가 유다지파의 지파장까지 오르는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가 딸을 전승의 기념물로 내세운 것은 문맥을 살펴볼 때 딸의 동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악사가 아버지에게 우물을 달라하고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부전자전인가. 악사의 역동성을 볼 수 있다.

사사기의 출발은 하나님나라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강력한 적 철병거앞에 무너진다. 이로써 유다지파의 리더쉽은 상처를 받게 되고 이후 계속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나라는 절벽으로 추락하듯 2:1부터 급강하하기 시작한다.  그 원인은 언약파기이다. 언약을 지키면 능력이 주어진다. 그러나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이미 실패한 것이다.

 

성경의 원리는 내적승리에서 외적승리이다.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고 혹은 믿음을 주신 후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요10 소경의 눈이 뜰 때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결코 문제만 해결해 주신적은 없다. 사사기의 실패도 마찬가지이다.  언약은 진멸이다. 그러나 그들은 타협했다. 구태여 진멸할 필요가 없었다. 그보다 오히려 노예로 부려 먹으면 일석이조라 생각했다. 28절, 쫓아내지 아니하였고,27,30,3133절 쫓아내지 아니하고 사역을 시켰다. 언약에 대한 불순종이 사사기의 파멸을 가져다 준 것이다.

 

  1장의 문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두려움, 하나는 타협이다. 19절 유다지파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승리한다. 지금까지는 메뉴얼대로 했다. 그러나 철병거 앞에서 두려움이 왔다. 그래서 쫒아내지 못했다. 이후 계속 쫒아내지 못하다가 드디어 타협하게 된 것이다. 28절 “쫒아내지 아니하였으며” 이제 굳이 쫒아 낼 필요없이 노예로 삼으면 일거 양득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사역을 시킨 것이다. 피흘릴 필요없고 일 안해서 좋고, 그러나 타협은 진멸에 대한 불순종, 즉 언약 파기였다. 오늘 우리의 문제도 두가지, 세상에대한,미래,질병에 대한 두려움세속주의와의 타협이다. 1장에서 이것을 놓치면 사사기 전부를 오해하게된다. 종으로 삼은 그들이 점점 강성해져서 이스라엘을 파멸로 몰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올무가 되며,옆구리의 가시가 되는 것이다.(2:3)

 

2장에서 하나님이 재판관(사사)으로 등장하신다. 법정에 선 이스라엘의 죄목은 언약파기이다. 3절에서 하나님은 판결하신다.  “그들을 쫓아내지 아니할 것이고 그들의 너희 옆구리의 가시,그들의 신이 너희의 올무가 될 것이다.” 그들은 통곡하며 슬피운다. 회개한 것이 아니다. 분해서 운 것이다. 그 뜻이 그 장소가 되었다.보김. 광야세대는 하나님을 섬겼다. “아바드”가 반복된다. 그러나 다음세대는 우상을 아바드했다.(11,13)  언약을 어겼다(20).그러나 언약적 자비는 끊어지지않는다. 그러나 두고 보겠다.  그들을 다 쫒아내지 않겠다.이렇게 너희를 시험하겠다(22)

 

3:1절 여호와의 시험은 무엇인가? 누구를 섬기겠느냐? (1,4)

  놀랍게도 그들은 답안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우상을 섬기겠노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과 잡혼하고  그들 사이에 거할 것입니다. 그들은 속히 하나님을 떠났고(2:17),패괴,패역하였다.(19) 패괴의 죄, 패역의 죄가 시작 된 것이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7절 드디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 고의적 죄이다. 우상을 “아바드”했다(7,8) 사사기의 프레임은 범죄-징계- 구원 이다.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원과 같은 완전한 구원이 아니다. 그 그림자일 뿐이다.  또한 예수그리스도,모양도 없고,형체도 없는 연한 순같은, 사사들의 면모도 그와 같다. 옷니엘-에훗-삼갈

 

4장, 장면은 북쪽으로 바뀐다. 여호수아에 의해 함락된 하솔이 다시 일어났다. 그들은 철병거 900승을 앞세우고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이스라엘은 이미 군사조직이 사라졌다. 이젠 아무도 희생하려고 하지않는다.  삼갈 1인 군사조직.위대한 이스라엘은 이렇게 약화되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을 구원 할 자로 하나님은 여자를 세우신다. 하솔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납달리,스불론 지파만 싸우게 된다. 이미 공동체는 약해질대로 약해졌다. 하나님은 메뉴얼을 제시하신다. 두려워말라 내가 함께가리라. 드보라의 말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선언한 것이다. 동시에  그들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 두려워 산 속에 숨어 있는 이스라엘, 적은 평지에 전차 900승을 일렬로 세운 채 전투태세를 갖추었는데 하나님은 내려가라 하신다. 내가 반듯이 너와 함께하리라?

여러분은 할 수 있겠는가. 이거 시험이다. 14절 붙였다. 내려가라. 자살행위이다. 그러나 그들은 믿고 내려갔다. 5:21을 보면 여호와께서 강물을  표류시켰다했다. 평지에 도열한 전차부대는 수렁에 빠져버렸고 그들은 크게 패하여 도주했다. 전쟁이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도주한 적장 시스라의 최후를 보여준다.

11절은 예고편이다. 겐사람,이방인 ,17절 겐사람 야엘이라는 이방여인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무슨 얘기인가?. 여자,이방인에 의한 완벽한 승리이다. 언약백성들은 쥐구멍에 숨고 싶었을 것이다. 이 전쟁의 승리는 그들이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연약한 자를 들어쓰시는 하나님나라의 특징을 보여준다. 사사기의 청중이 누구인가. 오늘 우리들이다. 너는 어떻게 하겠는가? 이 시험을 치를 자신이 있는가? 하나님이 물으시는 질문이다.

 

6장 언약 파기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점점 강해지고 있다. 동시에 이스라엘도 점점 맷집이 강해져가고 있는 것이다.  연합군들이 메뚜기 같이 이스라엘을 진멸하려 공격한다.  하나님은 나뭇꾼 기드온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다(10) 이 말은 언약의 하나님이란 말이다.“내가 너와 함께하리라”(12) 그러나 기드온은 하나님 함께하시는 확신이 아직 없는 것이다. 표징을 원한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2번이나 보이셨고  기드온은 여호와 샬롬을 고백하며 단을 쌓는다. 일종의 언약체결식이다.(24) 그렇다. 하나님 함께하심을 믿는다면 무엇이 두려운가. 내적승리에서 외적승리로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기드온의 문제는 오늘 우리의 문제이다. 우리는 늘 how의 문제에 부딪힌다. 구원의 확신은 있으나 거기까지이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믿는다면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우린 이미 내적으로 승리한 것이다. 이후의 삶은 받아놓는 밥상인 것이다.

 

7장  붙였다는 말이 계속되고 있다.(2,7,91415) 오히려 숫자를 줄이시는 하나님 ,숫자가 많으면 숫자를 의지하는 교만에 빠진다. 그래서 줄이신다. 오늘 한국교회를 보라 쭉정이를 걸러내고 있지 않는가.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줄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는 300명으로 줄이셨다.  줄어드는 것이 오히려 축복일 수도 있다. 그 만큼 하나님을 더 의지 할 수 있을 테니까.  전무후무한 승리가 눈앞에 다달았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지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로써 요셉의 아들 지파 즉 형지파이다. 그러나 에브라임지파는 여호수아라는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후 기득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에브라임지파의 도움으로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에브라임은 몽니를 부리기 시작했다.  왜 처음부터 우리를 부르지 않았는가? 무슨소리  왜 안불러? 부를 때는 안오고 다 이겨놓은 싸움에 밥상에 숟가락 놓듯이 이제 와 놓고 몽니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9장의 무대는 유서깊은 세겜이다. 기드온이 죽은 후  세겜에서 바알브릿사건이 일어난다. 여호와브릿에서 언약파기, 드디어 바알과 언약을 맺었다는 뜻이다. 더구나 유서깊은 세겜에서, 기드온가문이 주도한 바알브릿 사건인 것이다.  바알을 섬기는 제단에서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그 어미의 형제들에게서 은 70개를 받아 깡패들을 고용한 후 자신의 형제 70명을 모두 척살 한다. 그러나 말째 요담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다. 본문에 의도적으로 기록된 기드온의 다른 이름인 여룹바알(바알이 변호한다)이 계속 사용되는 것도 그들이 바알에게 얼마나 빠져있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요담의 저주

요담은 세겜이 내려다보이는 그리심산으로 올라갔다. 축복의 산에서 저주가 선포되었다. 우화를 사용한 비유이다. 나무들이  한 나무를 지목해 자신들의 왕으로 세우고자 감람나무,무화과나무,포도나무를 찾아가 설득한다. 이 세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들이며,꼭 필요한 열매들을 제공하는 나무들이다. 충분히 왕이 될 자격이 있는 나무들인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거절했다. 반면에 가시나무에게 찾아가 왕이 되어달라고 했더니 가시나무는 당연한 것처럼 받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그늘에 거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라고 협박 까지 했다. 남에게 오히려 화를 끼치는 가시나무, 땔감으로 쓸 수도 없는 가시나무는 바로 아비멜렉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더 큰 잘못은 그런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세겜사람들이다. 너희는 내분으로 인하여 서로 대적하게 될 것이라 선포한다.

 

12장은 최초로 언약공동체의 붕괴를 보여준다. 입다의 승리에 대해 에브라임지파는 또다시 몽니를 부린다. 므낫세지파인 입다의 승리가 에브라임에게는 못마땅했던 것이다. 싸움을 걸어온 에브라임지파에게 입다는 양보하지 않는다. 입다가 누구인가? “길르앗 사람들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라는 말은  “창기의 아들로서 공동체에서 추방된자”라는 뜻이다. 입다는 에브라임과의 전쟁에 승리했고 “십볼렛”과 “씹볼렛”의 발음을 이용해 42,000명을 살해한다.시78:9-11을 보면 에브라임의 언약파기를 지적하고 있다. 언약을 잊은 에브라임,언약을 잊으면 교만해진다. 이 전쟁 이후 사사의 권한은 급속히 축소된다. 입산,엘론,압돈, 그들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14장의 삼손은 나실인이다. 어릴적부터 나실인의 규정 즉 언약적사명이 주어졌다. 언약의 모델로 살아가야하는 삼손 그러나 삼손은 하나씩 언약을 파기한다. 삼손 이야기를 윤리적 측면에서 접근해서도 안되며,블레셋과의 갈등에서 접근해서도 안된다.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접근해야한다.  성경의 원리는  내적승리에서 외적승리이다. 이미 언약을 파기한 삼손은 결코 승리 할수 없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삼손의 힘은 머리카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사사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사사기의 마지막 사사인 삼손의 실패로 끝나고 17장 부터는 연대기를 따르지 않고 있다. 단지파 삼손의 언약파기는 단지파 전체의 언약파기로 이어진다. 삼손이 죽자 단지파는 블레셋에게 쫒겨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선다. 하여, 북쪽 갈릴리 위에 위치한 라기스로 가다가 미가의 집을 지나게 된다. 미가는 자기집에 성소를 만든다. 그리고 자기의 아들중 하나를 제사장으로 삼는다. 이 시대의 상황이 자기 소견대로였다. 미가의 행동은 이 시대상을 표현한 것이다. 가정성소를 만들고 레위지파 아닌자로 제사장 삼고 오직 나에게 복을 주소서라고 행했던 미가. 어느날 떠돌이 레위인이 지나가다 미가의 집에 들어왔고 엉터리 제사장이 되었다.

미가는 정식 제사장(?)을 고용한 것이다.  그러면서 미가가 하는 말은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17:13) 이시대의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눈에 보이는 복, 돈이 었다. 우리시대와 너무 흡사하지 않는가?

단지파의 정탐꾼이 미가의 집에 들러 이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사장이 필요한 단지파는 미가의 집에 고용된 제사장을 충동질했다. 한 가정의 제사장보다. 한 지파의 제사장이 낫지 아니하뇨? 더 많은 연봉과 명예가 주어졌다.  단 지파는 무주공산이었던 평화로운 라기스를 정복하여 그 땅을 차지한다. 미가의 집의 성물을 탈취하여 라이스를 정복하고 그 이름을 단으로 바꾼다.(18:29)

 

19장부터 나오는 기브아의 범죄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라고 맺고 있다. 여기의 사람들은 사람은 “이쉬” 즉 남자이다. 남자들의 죄가, 삼손 아니 그 이전부터 나오고 있다. 그들이 왕이 없는 시대에 왕노릇했다는 것이다. 자기들 멋대로 . 오늘 우리가 ‘로드쉽“ 주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내가 주인인 셈이다. 한 레위인이 밤새 윤간을 당한 ,사실 그는 도망쳐 여자를 죽게했다. 그런데 문지방을 붙들고 죽은 시신을 12토막내어 12지파에게 편지와 함께 돌렸다. 공동체를 지키는 일에는 하나되지 못했던 12지파가 동족을 정죄하는데는 앞뒤 안가리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베냐민 지파를 공격했고 베냐민 지파는 600명의 군사만 남기고 전멸한다. 동족상잔의 비극 후에 정신을 차린 총회는 600명의 처녀를 취하는 놀라운 방법을 보여준다. 이미 자신들의 딸을 주지 않기로 한 그들은 포로 400명과 모자라는 200명은 실로의 축제, 성막이 있는 실로에 매년 열리는 축제에 참석한 여인들을 사로잡아 숫자를 맞추는 파렴치를 저지른다. 이렇게 사사기는 끝난다.

 

 

 

 

 

 

 

 

 

 

 

 

 

 

 

 

 

 

 

 

 

 

 

 

 

 

 

 

 

                       사무엘상

 

 

1.사무엘상의 배경

 

사무엘서는 사사시대 말기부터 다윗까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은 이웃나라들에게 계속 압제를 받아왔다. 언약파기에 대한 징계임에도 그들은 이웃나라와 같이 왕이 없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끊임없는 요구대로 왕을 세우시면서 동시에 선지자시대를 열고 계신다.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은 하나님을 섬기며 백성들을 섬기는 왕이었으나 사울은 이방 왕들과 똑같은 절대권력을 탐하게 된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윗언약을 세우신다.

사무엘 당시 성막은 실로에 있었다. 동시에 사사시대의 마지막, 소망없이 추락하는 하나님나라를 보여주고 있다. 언약파기에서 이제는 언약궤를 전쟁에 이용하려는 발상을 하나님은 거부하신다. 종교적 타락은 이미 심판의 때가 지나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엘리의 가문의 몰락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준다.

사무엘서의 문학적 배경은 철저한 대조법으로 일관하고 있다. 엘리의 자식들과 사무엘,다윗과 사울의 인물대조,반복의 수사학적 기교를 이해해야 사무엘서를 해석할 수 있다.

사무엘서의 중심인물은 다윗이다. 다윗언약을 세우기까지의 과정,다윗언약의 영원성, 다윗언약이후 메시야언약으로 이어지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사무엘서를 이해해야할 것이다.

 

2.사무엘상의 신학

 

1)언약

사울은 엘리의 아들들과 달리 언약을 지킬 것인가. 언약을 지키라는 시내산언약은 영원한 언약이기에 지키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세워 가신다. 시내산 언약의 축복과 저주는 기복적인 사상이 아니다. 언약은 반듯이 지켜야하고 언약파기시에는 그에 따른 댓가를 지불해야만 하는 것이다. 언약은 법적책임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2)다윗언약

다윗언약은 사무엘서의 핵심이며, 중심이다.  다윗언약은 헤세드에 근거한 영원한 언약이지만, 언약파기시에는 시내산언약대로  땅은 뺏기고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다. 하나님 마음에 맞는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발전되어 가는가.?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이 언약 대로 우리도 살아갈 때 다윗에게 허락하셨던 영원한 언약이 성취되는 것이다.

 

3)왕정과 선지자제도

다윗언약은 영원한 언약이지만 불완전한 인간 즉 왕들을 돌이키고 하나님의 언약을 유지,발전시켜야 할 사명이 선지자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왕과 선지자는 종종 대립관계에 놓이기도 한다. 사무엘은 킹메이커로서 실패한 왕을 폐하기도 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기도 하면서 하나님나라를 세워 나간다.

3.사무엘상의 내용

소망이 없는 사사시대. 남자들의 죄, 왕이 없음으로 각자가 왕같이 살아가는 시대, 언약파기의 시대. 이 시대에 두명의 여인을 통한 소망을 보여준다. 룻과 한나이다. 새로운 반전,가물가물하던 하나님나라는 다시 소망의 불씨를 보여준다. 이 둘은 비슷한 시대에 살았다. 개인적으로 아이가 없었던,개인적 소망이 끊어졌던 두사람,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언약백성이 되기로 한 룻을 통하여 이루어져 가는 하나님나라, 자식이 없는  한나가 언약기도를 통하여 하나님나라를 세워가는 공통적인 것을 보라.

 

1장에서 한나와 브닌나가 대조적으로 등장한다.장소는 성막이 있는 실로이다. 한나의 언약기도, 그리고 언약인인 나실인으로 드리겠다는 기도의 응답. 반대로 홉니와 비느하스는 언약을 파기하는자로서 구체적인 언약파기를 지적하고 있다. 다시 사무엘과 이들을 대조하고 있다. 위대한 제사장 가문의 제사장과 아이 사무엘,  이들의 최후를 암시하고 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전쟁의 시작이 아벡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패한 이스라엘은 놀랍게도 그 책임을 여호와께 돌린다.(4:3) 그리고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킬 획기적인 방안을 마련한다. 언약궤를 가져오라는 것이다.  그들의 착각이다. 언약궤가 함께하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인가?   언약궤를 가져온 이들이 누구인가? 홉니와 비느하스이다. 이들에 대한 악행을 먼저 기록함으로 이들의 최후를 암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이들의 심판은 당연한 것이라는 암시이기도하다. 어쨌건 이스라엘군은 사기충천했다. 반면에 불레셋은 사기가 떨어졌다. “우리에게 화로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가나안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알고 있었던 그들은 망연자실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전쟁의 승리는 이스라엘일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은 대패하고 3만명이 전사하는 결과를 보여준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간과 동질성을 갖고 있다. 언약파기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공동체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홉니와 비느하스만의 죄인가?. 모두의 죄이다.

한 병사가 죽을 힘을 다해 실로에 도착했다. 전쟁의 소식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던 엘리는 두 자녀가 죽고 언약궤를 뺏겼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의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죽고 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이를 낳다가 조산의 충격으로 “이가봇”이라하고 죽는다. 아벡전투에서 패한 이스라엘은 가나안 입성후 200년간 지속된 실로마저 파괴되며 충격에 빠졌다.

 

5장은 무대가 블레셋으로 옮겨진다. 이 전쟁의 승리자는 신들의 전쟁에서 승리한 다곤이라 믿은 그들은 다곤신전에 언약궤를 방치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전쟁이 시작된다. 다음날 다곤은 손목이 부러져있었다. 아무것도 못하는, 죽은 것이라는 뜻이다.  아스돗에 전염병이 돌았다. 견디다 못해 또 다른 수도인 가드로 옮겼으나 악성종기로 다시 다른 수도인 에글론으로 ,그러나 에글론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이 전쟁은 하나님의 승리로 끝났다. 결국 그들은 돌려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그냥 돌려보냈다가 더 큰 화가 있을 것을 알고 있었다. 아이러니한 장면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는데 블레셋은 믿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끝까지 랍비라고 부르는데 귀신이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 엎드려 절했다. 바디메오,수로보니게여인,혈루병여인등이 “주”라고 부르며 앞서가는데 제자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버리고 배신하는 아이러니이다.

 

7장 언약궤는 기럇여아림에 모셔졌다. 실로가 파괴되었으니 성막은 없는 것이다.  10년이 지나면서 백성들의 마음은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32세의 사무엘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미스바에서 언약갱신 체결식을 거행하였다. 번제를 드리고 회개할 때 블레셋의 총 공세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뢰소리를 발하여 그들을 물리쳤고 이스라엘은 이를 기념하여 단을 쌓았으니 에벤에셀이다. 

 

8장은 왕을 원하는 백성들의 요구와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 말씀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백성들의 말을 보라. 8:5,6 “우리“ 라는 말을 4번 한다. 19,20절에는 무려 7번 이나 나온다. 자기중심적,이기적인 백성들. 우리를 위하여,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뉘앙스이다. 이에 대한 사무엘를 통한 하나님 말씀은 7-8에 ”나“를 반복함으로 그들이 왕을 요구하는 것은 나를 버리려 함이라고 강조하신다. 1인칭은 강조용법이다. 또한 왕은 너희에게 ”취할 것“(뺏을 것)이라는 말도 반복한다.  백성들은 같은 1인칭 복수를 쓰면서 목소리를 더욱 높이는 것이 8장의 구조이다. 이렇게 세워진 왕 사울. 백성들이 원하여 세운 통일 왕국의 초대왕 사울, 사무엘은 계속 신명기의 언약을 경고한다.(12:20-25)

“두려워 말라 오직 하나님만 섬겨라 그러면 자기백성(언약백성)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언약을 어기면 너희 모두 망한다. ”

 

13장은 사울이 왕이 된지 2년이 지났다.  블레셋과의 전면전이 시작된 것이다. 블레셋의 군사들을 본 백성들은 두려워했다. 사무엘이 오지 않아 더욱 초조해진 사울은 사무엘이 주관해야할 언약체결식을 자신이 거행한다. 9절의 번제와 화목제는 단순한 제사가 아닌 언약체결식의 형식이다. 제사를 드리자마자, 절묘한 타이밍에 맞춰 사무엘이 나타난다. 사울의 변명은 상황윤리였다. “부득히하여” 그러나 사무엘은 상황윤리를 일언지하에 배격하며,사울을 폐할 것을 경고한다.

 

11:14,사무엘은 사울과 모든 백성을 길갈로 모아 언약체결식을 거행한다. 여기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언약체결식을 거행한다. 이스라엘의 정체성,그리고 우리가 누구인가?  “여호와께서” 우리를 인도한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자.그리고 신명기적 언약의 저주와 축복(12:1415,25) 그리고 하나님의 나타나심(16-18)으로 언약체결식은 마친다.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언약파기에도 하나님은 자기백성을 향해 신실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 역할을 선지자가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선지자의 고민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전멸당할 위기에 처했던 베냐민 지파를 구해내었고 가장 약한 베냐민 지파에서 초대왕이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헤세드를 거절한다.

 

16장1절에 나오는 “예선”이라는 단어가 중심 단어이다. “예선”이란 말은 “준비하다”(provide)이다. 16장에 9번  나온다. 우리말 성경엔  주로“택하다‘로 나오고 있다. 동사로서 1,17  7절에서는 3번,명사인 용모,외모는 7,12에 나온다. 자연히 사무엘상 전체의 중심구절은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7절) 세상은 온통 외모에만 관심이 있다. 얼마를 버느냐? 아파트가 몇평이냐? 학교는 어디를 나왔느냐? 이런 것이 가치의 기준이 되고 가치의 판단이 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다윗은 중심이 맞았기에 ”내 마음에 합한 자“라 하셨다.

 

베들레헴,가장 작은 마을,장로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사사이며 선지자,대제사장인 사무엘이 느닷없이 방문한 것이다. 이런일은 한번도 없었다. 책망하기 위해서 온 것일까? 아니면 누가 큰 죄를 지었는가? 그런데 사무엘이 암송아지를 끌고 혼자 온 것을 보면 책망하기위해서 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제사를 드리러 왔나? 사울이 지금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왕을 선택하러 왔다는 특종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  그런데 사무엘의 모습은 너무 슬펐다. 자신이 세운 사울을 폐하고 이새의 아들 중 기름을 부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너무나 슬프게 만들었다. 아직 누군지는 모른다. 그러나 사무엘도 외모에 눈이 갔다. 기품이 이 있어보이는 아들들을 보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아니었다. 이게 전부냐? 아직 말째가 있나이다. 말째는 히브리어로 “학카톤”이다. 순서로서의 끝이 아닌 형편없는 ,싹수가 노란 ,그런 뜻이다. 그런데 여호와 께서 말씀하신다. 이가 그다.  선지자의 들음,혹은 제사장의 들음은 to me 가 아닌 in me 이다. 귀로 듣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눈을 열어주소서“가 영안이듯이..  사무엘은 기름을 붓는다. ”루아흐”여호와의 신이 크게 감동하셨다.

 

18장의 구조를 보자. 첫째 대조는 사울과 다윗이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다윗은 만만이로다“  12절과 14절 ”여호와 께서 사울을 떠나셨고 다윗과 함께 계시니라“

두 번째 대조는 요나단과 다윗이다. 1,3 절 요나단과 다윗의 언약이다.

세 번째 대조는 단어의 대조이다.  사울에게는 악신,다윗은 여호와의 신 .사울에게 떠나 여호와의 신,다윗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천천과 만만,

 

20:14-17의 언약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도 중요하지만 인간과 인간의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더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인간끼리의 언약의 중요성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언약의 근거는 14절의 “헤세드”이다. 이 언약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언약의 영원성 ,하나님의 언약관계에서의 헤세드를 쓰면서 이 언약은 영원하며 불변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요나단은 아버지가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아버지를 도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거스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아버지께 거역하면서까지 다윗을 돕고 있는 것이다.

 

21장은 다윗의 생애가운데 가장 힘들 때이다. 지금부터 다윗의 10년 고난이 시작된다. 하나님은 위대한 다윗을 만들기 위하여 요셉과 같은 광야학교에 입학하게 하셨다. 이 기간 동안 수 많은 시편들이 기록되었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워 지는 시기이다.  미성숙한 다윗이 좌충우돌하기도 한다. 다윗은 여전히 공사중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늘 다윗편 이셨다.

 

실로가 파괴된 뒤 성소는 높땅으로 옮겨져 왔고 제사장마을을 이루어 성소를 섬기고 있었다. 다윗은 제일먼저 이곳으로 도망쳐 온 것이다. 대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다윗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사울의 비밀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초라한 행색의 다윗을 보고 물었으나 다윗은 둘러대었고 먹을 것을 취한 후 칼을 찾았다. 쫒기는 그에겐 무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 골리앗의 칼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사울의 목자장,경호대장인 도엑이라는 자가 이모든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윗의 두려움은 그로하여금 국경을 넘어 원수 블레셋왕의 부하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잘못된 판단은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부하들에 의해 탄로날 위기에 놓였으나 아기스왕의 호탕함이 다윗을 살려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22장 골짜기가 깊을 수록 봉우리도 높다. 아둘람굴에 도망한 다윗에게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선지자 갓도 합세했다. 아둘람공동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을 듣고 예배하고 훈련받는 공동체가 되었다. 사울의 약점은 광야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는 것이다.

사울의 인본주의는 동족을 의지하는 분파주의로 나타났다. 어려움에 처한 다윗은 하나님께 그러나 사울은 동족에게로... 7절 베냐민지파를 선동하여 다윗을 잡는 선봉대로 세웠다. 그때 도엑,에돔출신,기회주의자인 도엑이 다윗을 고해 바쳤고 화가난 사울은 높 땅을 진멸할 것을 명한다. 그러나 아무리 왕의 명령이라도 제사장들을 죽이는 일에 머뭇할 때 도엑이 자청하고 나선다. 도엑을 칼빈의 말대로 구약의 가룟유다같은 인물이다. 높땅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칼로 쳐 죽였다. 제사장 85명을 죽였고 높땅의 성소는 파괴되었다. 사울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이 극적으로 살아남아 다윗에게 합세함으로 다윗은 제사장까지 얻어 힘을 더 얻게 되었다. 소위 정통성을 확보한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으로 인한 불행에 무섭게 회개한다.

 

23장 쫒기는 사람은 원래 불안하고 초조한 법이다.그러나 오히려 쫒는 사울이 더 불안하고 초조해진 것이다. 다윗은 영적 여유가 있었다. 그것은 예배와 말씀에서 나온 것이다. 어려울 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돌 볼 수 있는가. 다윗은 그일라 주민들이 블레셋의 공격하에 있다는 말을 듣고 제국 블레셋과 생명을 건 싸움을 하게 된다. 다윗의 승리의 메뉴얼 “물어가로되”  하나님의 음성은 “네손에 붙였다”  그일라를 구한 다윗은 주민들의 환영을 받는다. 그러나 사울은 그 소식을 듣고 그일라를 포위하고자한다. 그일라 주민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다윗을 사울에게 내어주자.  다윗은 계속 “물어가로되” 기도는 소통이다.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묻고 답하는 다윗과 하나님과의 소통이다. 다윗은 그일라 주민에게 복수하지 않는다. 영적여유.

 

24장 도망다니던 다윗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엔게디 동굴에 숨어있던 다윗을 수색하던 사울이 이 동굴에 발을 가리우러 들어온 것이다. 발을 가린다는 것은 용변을 보기위해 옷자락을 내리는 행위이다. 고양이 눈을 아는가? 밝은 곳에서 갑자기 어두운 곳으로 들어 왔을 때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윗은 사울의 겉옷을 베었다. 다윗의 부하들은 “여호와께서” “붙였다”는 언약적 단어를 쓰면서 다윗을 설득했으나 다윗은 사울을 살려준다. 그의 옷자락을 벤 것 조차 찔려 8절 내주 왕이여,10절 내주를 ,11절 나의 아버지여,14절 자신을 죽은 개,벼룩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울은 감동을 받아  소리높여 울고 다윗을 축복한다. 너는 반듯이 이나라의 왕이 될 것이다. 너는 내 후손을 끊지 말라 .요나단의 언약과 비슷하지만 사울의 감정적인 맹세일 뿐이다. 더욱 성숙해진 다윗 ,부하를 설득하는 리더쉽, 원수를 용서하는 관대함, 사울에게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겸손함, 독을 품고 달려드는 자를 오히려 내편으로 만드는 다윗을 보라.

 

25장 사울을 감동시킨 다윗이 오히려 낙심에 빠졌다. 엘리야의 승리 후의 실패같이 말이다. 다윗의 후견인, 사무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바란 광야로 내려갔다. 가나안의 최 남단 여기서부터 시내광야이다. 사울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도망친 다윗, 얼마나 절박한 심정일까? 다윗은 오랫 만에 조용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 지역의 사람들을 보호해 주었던 다윗 ,양털깍는 축제,추수의 축제에 비교되는 목축하는자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절기인 양털깎는 축제에 다윗은 그의 부하를 시켜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나발은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면박을 주었다. “근일에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사울을 떠난 다윗을 가르키는 말이었다. 다윗의 분노는 400명을 무장시킨채 나발에게로 출발했다.. 그간 쌓은 모든 것이 무너질 위기. 무적자 정도로 변질될 수 밖에 없는 공동체의 위기 앞에 그 누구도 다윗을 절제 시키지 못했다.  다윗의 분노는 의분이었다. 그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음식을 준비하여 나선다. 다윗을 만난 그녀는 엎드려 말한다. 28절 “여호와께서 반듯이 내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삼하7장의 다윗언약이다.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잠시 잊고 있었던 언약의 말씀 .쫒기다보니 기약없는 세월들, 차칫 무적자로 전락할 위기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들은 것이다.  32절이하 ”하나님이 너를 보내셨고” ”나를 막으셨고“

어리석은 나발은 아무것도 모른채 왕과같은 잔치를 배설하고 있었다. 다음날 이 소식을 들은 나발은 몸이 굳어져 열흘 후 여호와께서 치시매 죽었다. 아비가일의 지혜로움과 나발의 이름뜻대로 어리석은 자의 대조를 통해 아비가일을 더욱 빚나게 하고 있다.

 

28장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국가의 운명을 건 한판 대결이 벌어졌다. 사울은 군급했다. 다윗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성경은 같은 군급이란 단어를 쓰고 있다.(30:6) 각기 다른 대응이 그들의 미래를 갈랐다. 사울은 군급하여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 사무엘의 영을 올리라고 명령한다. 사무엘의 진짜영일까? 아니다. 미혹하는 영, 속이는 영이다. 사울은 이렇게 무너져갔다. 반면에 다윗은 아기스왕의 부하로 들어가 시글락을 하사받아 거하고 있을 때,  블레셋왕 아기스는 다윗에게 이 전쟁의 선봉에 설 것을 명한다. 다윗이 전쟁에 나갔을 때 아말렉이 침략하여 모두를 포로로 끌고간 이 사건.,

아말렉의 정체를 아는가? 출 17장에 등장한 이스라엘의 원수 아말렉, 아기스왕은 다윗이 전쟁에 나섰다가 오히려 사울의 편에 설까 두려워 귀환명령을  내린다. 돌아와서 보니 시글락은 불타고 모두 포로로 끌려갔다. 이성을 잃은 부하들은 다윗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 다윗은 힘과 용기를 얻는다. 아말렉을 추격한 다윗은 모든 것을 되찾을 뿐 아니라 전리품까지 얻게된다.

그러나 요나단은 아버지와 함께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길보아산의 전투에서 끝까지 아버지를 지키려 했던 요나단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게된다.

                       사무엘하

 

 

배경

사무엘상,하의 역사적 배경은 가나안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비교적 조용한 때였다. 앗수르는 초기 단계여서 확장할 여력이 못되었다. 앗수르는 다윗 100년후에  살만에셀 3세 때에 가장 번성하게 된다. 애굽도 약해있었다. 소아시아에는 헷제국이 막 멸망하고 몇몇 도시 국가들만 남아 있었다. 다윗과 솔로몬은 그들과 화친조약을 맺는다. 이런 고대근동의 상황 때문에 가나안 땅의 작은 나라들은  독립을 유지한다. 아람,블레셋,암몬,모압,에돔,아말렉,페니키아,이스라엘등이다. 다윗은 많은 나라를 복속시켰고 영토는 유프라데강과 애굽까지 확장하게 된다.

다윗은 왕이 된 후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긴다. 헤브론은 너무 깊숙한 곳에 있었고 세겜이나 실로와는 너무 멀었다. 또한 레위지파가 살았고 유다지파에 속한 땅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유다와 열지파의 중간에 있었다. 또한 원수 블레셋의 위협은 완전히 사라졌다. 다윗은 이곳을 정치적 뿐 아니라 종교적 중심지로 세웠다. 성막은 기브온에 있었고, 언약궤는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다. 그래서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온다. 7장의 다윗언약은 사무엘서의 중심이며 구약 성경 전체의 중심이다. 히브리서에서 다윗언약을 인용하면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이 말은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낸다(삼하7:14,히 1:5) 다윗 언약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언약의 말씀이다.

 

               시내산 언약-갈보리언약의 성취

              다윗언약-예수그리스도의 성취

 

사무엘서의 시작 ,한나의 기도로 시작,그리고 마지막은 다윗의 기도로 끝난다. 한나의 기도는 오실 메시야의 출현을 예언하고 있고 다윗은 기도 속에 이러한 여호와를 찬양하고 있다. 사무엘서 전체는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야)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사무엘하 21장 부터는 에필로그이다. 여기서 전후대칭구도를 보여주며 강조한다.

 

             사울왕국의 연약함(21:1-14)-다윗왕국의 연약함(24)

             영웅적이야기:다윗의 용사들(21:15-22)

             다윗의 찬양(22:1-23:7)

 

결국 이 부분은 사무엘서의 중심이 어디 있는지 보여준다. 다윗이 잘해서 다윗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이아니다. 후에 유다가 북쪽 이스라엘 보다 믿음이 좋아서 오래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언약 때문이다. 이 대칭 구도는 다윗이나 사울이나 모두 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다윗의 찬양은 한나의 찬양과 유사하다.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며 기름부음 받은 자(메시야)이다.(삼상2:10,삼하 22:51,23:1) 한나의 찬양과 다윗의 찬양이 거의 같은 말로 끝난다.”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부은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삼하22:51) 메시야에게 헤세드를 베푸실 하나님을 찬양한다.  한나의 찬송에서 예언한 기름부음 받은자는 다윗이라는 것을 사무엘서는 말한다. 한나가 낳을 사무엘은 바로 이러한 왕을 세우실 것이라는 것이다.

 

다윗이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을 때 ”기름부은 받은자(메시야)라는 표현을 쓴다.  이는 기름부은 자는 여호와 만이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자신이 성령으로 기름부은 메시야인 것을 말씀하신다.(눅4:18).사도행전에서는 시2편을 인용하여 기름부음받은 여호와의 왕이 예수님인 것을 말한다. 또한 다윗의 잘못으로 이스라엘전체에 온역이 임했지만 이를 통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단을 쌓게 되고 바로 이곳이 성전 터가 되고 후에 갈보리 언덕이 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인간의 잘못에도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야곱이 인간적 방법으로 장자권을 탈취했으나 오히려 그를 통해 12지파를 완성하신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를 취했으나 그를 통하여 베레스를 허락하시고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 했으나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신다.

 

다윗은 기름부음 받은자로서 메시야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다윗은 완전한 자가 아니다. 오히려 에필로그를 통하여 보여주려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 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다윗과 맺은 언약은 영원하며, 다윗의 미완(성전건축)은 결국 완전한 메시야를 기대하게 된다. 솔로몬 역시 평화의 왕이었으나 진정한 평화의 왕이 아니란것을 열왕기에서 보여준다. 이를 통해서 진정한 평화의 왕을 기다리게 된다.  솔로몬의 성전도 완전한 것이 아니다.  성전을 절대시하던 유다백성들, 그러나 성전이 불타고 훼손됨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성전 ,영원한 성전이신 메시야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다윗언약에 대한이해

 

많은 이들이 다윗언약을 피상적으로 이해한다. 이는 언약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다. “베리트”의 뜻은 단순한 약속으로서의 의미(promise),선물(grant),법으로서의 의미,(law)

당사자의 공적관계를 법적으로 맺는 의미(covenant)가 있다. 노아, 아브라함은 선물(은혜)언약이다. 시내산언약은  covenant의 의미이다. 다윗도 선물의 의미이다. 언약을 행위언약과 은혜언약, 조건적 언약과 무조건적언약으로 무우자르 듯 나눌 수 없다.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다윗언약이 탄생된 것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다윗의 중심을 보시고 언약을 세우셨다. 그러므로 6장에서부터 다윗의 중심,언약궤를 대하는 태도를 면밀하게 살피고 있는 것이다.

7장에서 대조법을 쓰면서 강조하고 있다.

 

               “네가 나를 위하여 집(성전)을 짓겠느냐?(5절)

             “내가 너를 위하여 집(다윗 왕조)을 지으리라(11절)

 

다윗언약은 왕조에 대한 언약이지만 다윗언약 이전 유다지파로 내려오는 계보를 살펴보자. 메시야 언약은 창3:5의 메시야가 발 뒷꿈치를 물리는 일 즉 일시적 죽음을 통한 대제사장적 언약사역,자신이 희생함으로 인한 구속사역을 보여준다. 이어 유다의 수치가 나오는데(38)성경은 이를 설명하지 않는다. 유다의 수치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족보를 통해 이루어가시는 메시야계보에 대한 설명은 다말-라합-밧세바-심지어 원수 이세벨-아달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계보를 통하여 메시야자신의 피로 정결케하는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야곱의 아들들 중 르우벤은 서모 빌하 와의 통간으로 탈락, 시므온,레위는 세겜성 사건으로 탈락,유다에게 넘어오지만, 유다의 수치로 탈락, 그러나 37,44,49장을 통하여 유다가 회복되어 지는 것을 보여준다. 이후 레위도 하나님 편에 서서 동족을 죽이면서도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가려는 것을 보시고 제사장지파로 삼으시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다윗언약도 은혜언약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성경은 다윗 언약이전에 다윗의 조상들을 철저하게 기록하면서 다윗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큰 틀을 이해하고 그 뜻을 이루어가려는 애씀을 보시고 하나님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다윗이 왜 중요한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신정국가를 언약 백성들이 거부한다. 하나님은 이들을 진멸 시킬 수는 없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 당신은 나의 “주” 나는 종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마음에 맞았다. 그래서 다윗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윗언약에 대해 다윗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왕권이다. 주의 종의 집이 복을 받게 하소서 , 자신을 통하여 메시아가 올 것을 다윗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윗언약에 대한 비밀을 말하게 하셨다. 다윗은 “메시야” 라는 말을 자주썼다. “기름부은 받은자“란 뜻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시편에서 메시야예언을 구체적으로 하게하셨다. 사도행전 2:25절에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하고 있으며,2:34절의 ”주께서 내 주에게“ 앞의 ”주“는 성부하나님, 뒤의 ”주“는 성자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메시아의 고난,죽음,부활에 대한 다윗의 노래는 메시아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언약은 사무엘서의 중심일 뿐 아니라 구약전체의 중심이다. 성경을 한권씩 놓고보면 풀리지 않는 문제로 보인다. 유다의 넘어짐,라합사건, 룻,그들이 어떻게 다윗의 조상이 되었는가 그러나 다윗언약을 이해 할때 다윗 계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 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다윗이후의 계보역시 마찬가지다. 다윗 왕조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원수로 여겼던 바알 우상 숭배자 이세벨의 피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아시는가? 아합과 이제벨의 딸인 아달랴가 유다의 여호사밧왕의 아들 여호람과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 아하시야이다. 다윗의 후손이다. 아하시야가 2년만에 죽자 아달랴가 7년을 통치하며 유다를 바알신앙으로 덮었다. 더구나 다윗의 씨를 말리겠다고 나섰다. 아달랴는 다윗언약을 모를리없다. 다윗이후로 시편과(89)당시기록,정황들을 볼때 누구보다 다윗언약을 알고 있었던 그녀는 다윗의 씨를 말린다.(왕하11:1) 다윗의 후손을 모두 죽인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도전이며 바알 제사장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영적싸움이다. 다 죽였다고 생각했는 데 핏덩어리 요아스가 살아남아 다윗언약을 이어간 것이다.

 

유다왕들 중 가장 믿음이 좋은 히스기야를 보자. 다윗언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그다. 그런데 다윗언약 이 끊어질 위기에 부딛혔다. 자식이 없다. 국토는 앗수르에게 유린되고 예루살렘은 포위되었다. 일촉즉발의 위기. 나라가 망하면 다윗언약도 끝이다. 그때에 죽을 병에 걸렸다. 언약을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었인가. 왕하19,20장은 그 것을 보여준다. 기도이다. 진실과 전심(20:3)으로 드리는 기도를 통하여 언약은 이어진다. “네 기도를 들었고”(5). 6절에 “내 종 다윗을 위함으로 이성을 보호하리라“ 다윗언약을 상기 시킨다. 우리에게도 어떤 이해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 당황한다. 마치 퍼즐조각같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세워가신다는 것을 믿어야한다. 언약백성들, 다윗언약 때문에 하나님께서 끝까지 메시야를 주셨듯이 갈보리 언약을 통해서 반듯이  구원을 이루실 뿐 아니라 우리를 통해 다윗같이 들어 쓰실것이라는 영원한 언약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용

 

사무엘하의 기록자는 다윗언약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1-4장 까지 다윗의 합법성과 적법성을 세워나가고 있다.

1장, 다윗은 아직 시글락에 거하면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윗은 이미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는가? 그동안의 고난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있었다. 이해 할 수 없는 사울의 미움,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현재의 왕 사울과, 미래의 왕 자신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하나님의 광야에서의 훈련 ,그 많은 세월들. 다윗이 여러생각에 잠겨있을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남루한 모습을 한 한 소년이 머리에 흙을 뒤집어 쓴채 다윗에게 왔다. 그는 먼저 다윗에게 엎드려 절하며 이스라엘이 패배한 것과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한 것을 알렸다.  소년은 자신이 길보아산에 우연히 올라갔다가 죽어가는 사울을 발견하고 사울의 요청대로 죽여 달라하여 죽이고 증거품인 왕관과 팔찌를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소년의 말에서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증거한다. 그러나 아말렉 소년의 이야기는 사무엘상 31장과 다른, 거짓말이다. 소년은 상을 얻기위하여 온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아말렉인가? 다윗은 3일 전 아말렉을 추격하여 진멸했다. 그 중의 하나이지 않을까? 왜냐면 아말렉의 거주지는 남방이기에 단독으로 올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더 큰 이유, 기록자의 의도는 사울이 아말렉을 진멸하려 한데서 오는 복수는 아닐까? 

또 하나의 이유는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원수로 사탄의 대리자이다. 출17장 하나님은 대대로 아말렉과 싸우시겠다 하셨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이 어려울 때 꼭 등장한다. 또하나는 사울이 아말렉을 진멸했으면 아말렉에게 죽지 않았을 텐데 불순종의 결과로 오히려 사울의 죽음이 정당한 것은 아닌가?

기록자는 다윗이 왕권에 결코 사심이 없음을 밝힌다. 하여 다윗은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기 옷을 찢으며 해질 때 까지 울며 금식했다. 사무엘상하의 핵심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기에 나레이터는 하나님이 주신 신적 권위를 가지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앞에 아말렉소년은 처형을 당한다. 아말렉소년의 죽음을 윤리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겠는가? 아니다.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도, 그리고 아말렉의 진멸을 보여주는 것이다.

 

2장,사울의 죽음으로 정국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다윗의 승리의 비결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이것은 나래이터의 관점이기도 한다. 신적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있는 나레이터의 눈으로 성경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다윗의 승리의 비결은 무엇인가? 2장은 “다윗이 물어가로되 ”자기의지대로 하지 않고 물었다는 것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올라가리이까? 어디로 가오리까? 우리의 기도는 일방통행이다. 다 결정해 놓고 주시옵소서이다. 기도는 소통이다. 하나님께 묻는 것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기도이다. 사무엘서의 처음부터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이나 한 밤에 일어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했던 사무엘과 무능한 엘리의 대조를 통해서 진실과 전심의 기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다윗은 헤브론으로 올라갔다. 유다사람들은 다윗에게 다시 기름을 부었다. “메시야” 그는 메시야였다. 그러나 불완전한 메시야이다. 사무엘서는 의도적으로 메시야란 말을 반복해서 쓰면서 다윗언약의 영원성, 메시아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북쪽은 이에 빠르게 움직였고 11지파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았다. 정통성은 어디에 있는가? 나레이터는 이제부터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레이터의 신적권위를 믿지 못하면 다윗의 정치력과 용맹과 윤리적이고 교훈적인 것을 찾으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게된다.

 

3장 아브넬을 주목하자.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은 재빨리 11지파를 규합하여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고 정권을 잡게 된다. 그는 급기야 사울의 첩 리스바를 취하게 된다. 그것은  내가 곧 실제적인 사울의 후계자요 왕의 행세를 하는 것이다. 이스보셋이 대항하자 아브넬은 이스보셋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생각하여 나라를 통째로 다윗에게 넘겨주려는 생각을 하게된다. 아브넬은 다윗과 언약을 맺으려했다. 이런 아브넬을 요압이 속여 죽인다. 동생의 원수를 갚은 것이다.  복잡한 이 상황을 이해하기전 하나님나라의 역사 진행 방향과 섭리의 관점에서 살펴야한다.

 

4장,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스보셋은 절망한다. 급기야 그의 부하들이 이스보셋을 암살함으로 사울의 집안은 몰락하고 만다. 남은 아들 므비보셋은 불구라는 사실을 이야기함으로 사울의 집안의 몰락을 선언하고 있다.

다윗이 믿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역사의식이다. 그래서 사울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두 번이나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다.  아브넬이 죽었을 때도, 이스보셋이 죽었을 때도, 그의 정적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다윗은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나라의 역사의식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다.

 

5장 승승장구하는 다윗 ,나레이터는 그 이유를 다시 또 강조한다. 19절“ 물어가로되, 올라가라 ”23절 다시 “물어가로되 올라가지마라” .같은 상황에서 정반대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다. 로드쉽- 주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삶은 다윗을 형통케했다.  오늘 하나님의 사람들이 두 가지를 가질 수 있다면, 하나는 하나님나라의 역사의식,또 하나는 물어가로되 “로드쉽”이다. 이것이 형통의 원리이다.  이제 다윗은 북쪽 장로들의 무조건 항복 과 언약체결식이 거행된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으며 메시아의 예표가 된다. 

 

여부스족은 예루살렘성에서 가나안 정복이후 200년 이상 정복되지 않았다. 두려움때문이었다. 귀신이 사는곳, 망대, 요새 였다. 그들의 자만심은 다윗을 조롱했다. 그러나 난공불락의 요새라도 빈틈은 있는 법. 수로로 침투해 쉽게 정복한다.

 

6장,6장을 이해해야 7장 다윗언약을 이해 할 수 있다.  다윗은 왕이된 후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자 했다. 왕이지만 나는 왕이 아닌 그분의 종으로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국가의 실현 .이것이 다윗이 꿈꾸는 이스라엘이었다. 다윗은 기럇여아림으로 3만명을 보낸다. 이 작은 마을에 이처럼 많은 사람이 모인 적이 없었다. 다윗은 언약궤모시는 것을 전국민의 축제로 삼았다.  언약궤는 제사장 아비나답의 집에 20년간 보관되었다. 아비나답은 제사장인 두아들로 하여금 언약궤를 옮기게하였다. 언약궤는 새 수레에 옮겨져 나곤의 타작마당을 지날 때 소들이 뛰었고 떨어지려는 언약궤를 웃사가 잡을 때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시매 그가 죽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언약궤는 제사장들에 의해서 어깨에 메고 옮겼고 만지지말 것,보지말 것,의 명령이 주어졌다.(신4:4-6,15,17-20,7“9) 다윗은 이소식을 듣고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했다. 웃사를 치셨다는 뜻이다.  웃사는 하나님과 충돌했다. ”자기의에 근거한 믿음“ 자기 방식대로 ,언약궤 즉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전혀없는 웃사를 하나님은 본보기로 치신 것이다.  그 마을에 살던 가드사람,즉 블레셋사람 오벳에돔의 집으로 ”메어“갔다. 제사장은 죽고 이방인이 복을 받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직접 오벧에돔의 집으로 간다. “메어”라는 말이 계속 반복된다. 다윗은 기뻐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리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는 것은 일종의 언약체결식이다. 그러나 나레이터는 다시 미갈을 등장시키므로 다윗을 경멸케한다. “사울의 딸”을 세 번 언급하며 다윗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7장 ,다윗언약은 이미 살펴보았다. 본문에서 언약이란 단어가 없다고 다윗언약을 부인하거나 약화시켜서는 안된다. 시89편 은 공적예배나 모임에서 즐겨 불려졌던 시편으로 에스라인 에단의 마스길이다. 마스길은 교훈시이다. 내용은 다윗언약은 영원하다. ‘헤세드“와 ”베리트“가 계속 반복된다.(2-3,28.33-34)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을 10년간 달아보셨다. 그리고 6장의 언약궤를 모시려는 중심도 보셨다. 사무엘서의 주제대로 중심을 보시고 다윗과 언약을 체결하신 것이다.

다윗언약의 중요성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성경의 통일성의 중심에 언약이 있다. 구약과 신약 . 다윗언약을 중심으로 시내산언약(모세)과 갈보리언약(예수그리스도)로 나누어지며 성경의 구속사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을 놓치면 모든 것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율법주의,신비주의,이성주의,은사주의로 빠지거나 윤리적 ,교훈적인 요소만 찾으려는 잘못된 시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다윗언약은 이후 시2편에서 메시야 언약을 좀더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시89편은 다윗언약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89:39-44은 고난받는 메시야를 보여준다. 시22편에서 다윗은 메시야 예언의 절정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시22편을 인용하시며 다윗언약의 완성을 보여주셨다.

 

8장, 언약을 믿고 싸우는 다윗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다윗은 근동의 강자들을 차례로 정복해 나간다. 승리의 특징을 보면, 정복한 것을 여호와께 드렸다.(11-12) 또한 말을 뺏어 발 뒷꿈치 아킬레스건을 끊어 폐기처분했다. 말은 전쟁의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말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것이다.

 

9장,다윗은 요나단과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므비보셋을 찾았다. 9장에서 계속 “헤세드”가 반복된다.(1,3,10:2) 나도 하나님께 헤세드를 얻었으니 다른이에게 헤세드를 베푸는 것이 헤세드의 원리이다. 다윗은 이것을 실천하고자하는 것이다.  여기서 므비보셋을 살펴보자. 사울의전투를 기다리던 왕궁사람들 그들에게 들려진 소식은 전멸이었다. 왕궁에 있던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친다. 그 와중에 사울의 궁녀가 어린 므비보셋을 들고 뛰다가 넘어진다. 그때 므비보셋은 두다리를 못쓰게 된다. 갈릴리아래 국경마을 “로드발”에 숨어든 궁녀는 신분을 감춘채 살고 있었다. 므비보셋의 비참한 삶, 이모든 것이 다윗 때문이다. 요나단의 아들로서 왕이 될 수도 있었는데 비참한 운명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올것이 왔다. 다윗의 부하들이 므비보셋을 찾아낸 것이다. 그는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다윗앞에선 그는 자신을 “죽은개”라고 표현하며 살기를 구한다. 그런데 이게 왠일,다윗은 그를 복권 시켰고 왕자의 지위를 주었다.

 

9장은 므비보셋에게 베푼 헤세드라면 10장은 암몬족속에게 베푼 헤세드이다.(10:2) 10장은 암몬이 다윗에게 헤세드를 배신했고,11장은 다윗은 밧세바를 취함으로 하나님께 헤세드를 배신한다.  13장-15장은 다시 압삽롬에게 헤세드를 배신당한다.

 

압살롬은 치밀하게 모반을 계획한다. 그가 왕위를 선포했을 때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압살롬에게는 아히도벨이 있었다. 그가 누군가.? 밧세바의 외할아버지이다. 밧세바를 취했을 때 그는 치를 떨었고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다윗을 배신했다. 아히도벨은 제갈공명같은 사람이다. 다윗의 군사고문으로 그는 모든 전쟁의 탁월한 전략가로써 압살롬에게 붙었다. 다윗은 예루살렘성을 내어주었다. 공포에 휩싸인 다윗은 신발이 벗긴채 정신없이 도망했다. 아히도벨은 복수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나님나라의 역사의식이 없으면 우리는 사람에게 실망하고 ,하나님나라를 망치게 된다. 이 시기가 다윗의 생애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때이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대낮에 모든 백성들이 보도록 압살롬이 다윗의 후궁들을 취하는 것을 보여주게 했다. 다윗에게는 치명적이요, 왕의 여자를 취하는 것은 내가 왕이라는 선포였다. 아히도벨의 파괴적전략에 다윗은 낙심한다. 다윗이 감람산언덕을 황급히 지날 때 여러사람을 만난다. 대제사장 사독이 언약궤를 메어다가 다윗에게 왔다. 그러나 다윗은 거절한다. 언약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다. 돌려보낸다. 이어 늙은 친구 후새가 온다. 후새는 아히도벨의 전술을 막기위해 성으로 돌아간다.이어 시바,그는 므비보셋의 종이다. 이런 급박한 상황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는 이기주의적인 인간이다. 이어 시므이가 등장한다. 사울의 친척인 베냐민지파 선지자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역사의식을 볼 줄 모르는 편파적인 선지자는 다윗을 쫒아오며 저주한다. “비루한 자여 가거라” 그러나 다윗은 저가하는 저주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고 달게 받는다. 저주의 영에 사로 잡힌 시므온은 질투에 사로잡힌 사울을 연상케한다. 잘못된 영에 사로잡혀있으면 결코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

 

성에 들어간 후새는 압살롬을 환영한다. 압살롬은 두개의 의견을 듣게된다. 아히도벨은 다윗을 추격하여 죽이자. 속전속결, 그러나 후새는 그래도 백성들의 마음은 다윗에게 있다. 재 정비한 후에 다윗을 쳐라 ,다윗에게 시간을 벌어주겠다는 것이다. 압살롬은 후새의 전술을 택한다. 아히도벨은 자기의 때가 끝났음을 감지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살한다.  다윗은 전열을 재정비해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한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헤세드”의 배신으로 다윗은 밧세바사건과 압살롬사건을 겪게된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앞에서 먼저 “헤세드”의 자비를 구하며 용서함 받았다. 회복 ,하나님과의 회복이 먼저요. 그 회복후에 모든 회복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19장 ,사무엘하는 다윗의 승리(1-10)와 패배(11-24)로 진행된다. 패배속에서 보여주시는 것은 “헤세드”이다. 끝없는 은혜인 것이다.  나단을 보낼 때 보낸다라는 단어가 여러번 반복된다. 이것이 은혜이다.  다윗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해도 회복되기만 하면 그 언약을 영원히 이루겠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일방언약,무조건적언약이 아닌 것은 회복이 없으면 언약은 파기된다. 언약을 이끌어가는 헤세드 없이 어찌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시는 원리는 은혜와 진리(공의)이다. 동전의 양면과같은 이 원리를 이해해야한다. 22장은 “헤세드”(51)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끝난다. 언약적관계에서의 헤세드를 찬양하는 것이다.(26)

 

21-24은 에필로그이다. 여기서는 연대순으로 기록되지 않고 있다. 다만 사무엘서 전체를 정리하며 다시한번 언약을 지킬 것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헤세드”를 배신 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나레이터는 다윗치하의 기근을 이야기하고 있다. 왜 기근이 왔는가? 사울이 기브온 족속들을 죽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브온족은 여호수아와 언약을 맺어 살아났다. 더구나 기브온이 가나안 연합군에게 포위 되었을 때 여호수아는 생명을 걸고 그들을 구해 주었다.그런데 사울이 헤세드를 배신 하고 기브온을 친 것이다.  기브온은 사울의 남은 자식들의 죽음으로 사울의 죄를 갚을 것을 요구하였다. 반복되는 “여호와 앞에서”(1,6,9)  기브온 학살에 대한 징계로 3년 기근이 왔고 여호와의 요구가 사울의 자식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울집안이 문을 닫을 것에 대한 성취를 보여주신다.  죄없는 사울 자식들의 죽음에 대해 의아해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브온과의 헤세드와 사울에 대한 공의를 보여주고있는 것이다. (예, 라합의 구원과 아간에 대한 공의)

 

23장은 언약의 영원성을 찬양하는 다윗의 신앙고백으로 시작된다. (1-5)

 

24장은 다윗의 치명적인 죄 밧세바사건은 탐욕의 육신의 죄였으나 24장은 영적인 교만죄이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에 대해 다윗은 철저한 댓가를 치르며 회복된다. 역시 기도를 통한 회복과 언약체결식을 보여준다.(25)  우리는 연약한 인간일 뿐이다. “헤세드”가 없이 어찌 승리하는 삶을 살수 있겠는가? 어떠한 죄도 회복이 중요하며 회복역시 헤세드인 것을 보여준다. (헤세드 -언약적자비)

여호와를 위하여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단을 쌓으라하신다. 이 자리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곳이다. 이삭은 예수그리스도의 표상아닌가? 죄없이 죽으시는 예수그리스도. 장차 여기에 성전이 세웨지며 또한 이곳에서 십자가에 매달리면서 모든 언약의 완성을 예시한 장소가 모리아산(신약의 갈보리산)이 되는 것이다.

 

 

 

 

 

 

 

 

 

                        열왕기상

 

 

다윗의 영토는 북쪽으로는 유프라테스 남쪽으로는 애굽과 마주하고 있었다. 왕국을 유지하기 위해 다윗은 여러나라와 혼인관계를 맺었다. 그것은 자녀들간의 권력투쟁을 낳게된다. 솔로몬이 왕이 된 것은 밧세바와의 첫아들의 죽음이후 하나님의 헤세드 때문이었다. 솔로몬의 성전봉헌식은 언약체결식의 형식을 띄고 있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솔로몬의 기도는 “주의 백성”이 반복된다. 기도의 내용은 신성한 성전봉헌식에 “주의 백성이 범죄하여 포로로 끌려가거든 ...사하여 주옵소서” 이 기도 가 반복된다. 솔로몬의 기도는 언약백성(주의백성)들이 언약을 지키게 해달라는 것이지만 미래를 예견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특징

 

1) 열왕기에 자주 반복되는 단어는 전치사 “케”(...같이)이다. 다윗같이,다윗이 중심이 되어 다윗같이 하는 왕은 주께서 인정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2)다윗의 길과 여로보암의 길(죄)이 대조적으로 강조되며 동시에 남북을 비교한다.

3)“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아도나이의 눈앞에” 라는 말이다. 나레이터는 곧 주의 눈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나레이터의 눈은 하나님의 눈으로 대처된다.

 

내용

1장 다윗의 나이 70 ,다윗은 노쇄했고 판단력도 흐려 있었다. 왕위 계승권은 아도나이에게 있었다. 아도나이는 비밀리에 군사를 모으고 군대장관 요압과 대제사장 아비아달을 포섭했다. 또한 모든 왕자들과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을 모아 왕위를 선포했다. 그러자 왕궁안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밧세바는 솔로몬을 왕위에 올리려고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선지자 나단이었다.  나단은 사무엘이 어려운 시기에 킹메이커가 된 것처럼 이때 솔로몬이 왕이 되는 것이 다윗언약을 세우는 것이라 믿었다. 다윗은 제사장 사독과 나단과 장군 브나야를 불렀다. 그리고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고 기혼으로 가서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을 것을 지시한다.  아도니야주위에 모여있던 이들은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도망친다. 아도니아는 살기위하여 성막에 들어가 제단 뿔을 잡는다.  열왕기에서 보아야 하는것도 언약적관점이다. 동시에 하나님나라 역사진행이다. 나단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나라 역사을 바로 보았던 인물이다. 이런 나단을 통해 하나님나라는 세워져가는 것이다.

 

2장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하는 내용:

첫째, 토라(율법)을 지켜라 토라의 협의적 해석은 신명기, 광의적해석은 하나님 말씀전부이다. 지키면 형통하리라는 신명기적구도이다. 즉 언약적구도이다.

둘째, 다윗언약(4).

셋째, 요압을 죽여라 .요압은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는 다윗의 간청을 외면하고 무참히 죽였다. 또한 아도나이의 반란에 앞장섰다.

넷째,바실래에게 “헤세드”를 베풀어라. 가장 어려울 때 진심으로 도운 그를 다윗은 죽으면서도 잊지 않았다.다섯째 시므이를 죽여라 편협한 베냐민지파 출신 시므이는 사울의 잘못을 알면서도 편파주의에 사로잡혀 다윗을 저주했던 인물이다.

 

아도니아는 어리석게도 아비삭을 아내로 달라고한다. 다윗이 늙어 죽을 때 까지 곁에 있었던 아비삭. 비록 다윗이 동침하지 않았으나 후궁이었다. 왕의 후궁을 취하는 것은 내가 왕이란 간접표현이다.  왕권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한 아도니아는 처형된다. 대제사장 아비아달도 귀향 보낸다. 이로써 엘리 가문은 증손자 아비아달을 끝으로 제사장 가문의 문을 닫고 사독으로 이어진다. 사독은 후에 사두개파의 원조가 된다.  요압은 성막에 들어가 제단 뿔을 잡는다. 그러나 끌어내어 처형한다. 시므이도 가택연금을 당했으나 벗어나 처형된다. 이렇게 솔로몬의 왕권은 강화된다.

 

3장 솔로몬이 왕이 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솔로몬이 애굽왕 바로와 인연을 맺어 그 딸을 취하고 데려다가 ” 나레이터는 솔로몬이 처음부터 애굽을 의지하는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솔로몬이 말년에 잘못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잘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아도나이의 눈은 계속 지적하고 있다. 7:1 자기의 궁 건축에 13년,8절 이 궁은 8절, 바로의 딸을 위하여 지었더라. 성전건축은 7년인데 바로의 딸을 위한 궁 건축은 13년, 7:12 “그 궁은 마치 여호와의 전 안뜰과 낭실에 놓은 것 같더라“아도나이의 눈은 예리하다. 사무엘서의 주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아도나이의 눈은 솔로몬의 중심을 보고있는 것이다. 솔로몬의 기도후 하나님과 언약체결식을 하는 장면이 15절에 나온다. ”언약궤 앞에서 번제와 수은제 ,(수은제는 감사제의 일종으로 화목제이다)를 드리고 잔치하였더라 .아도나이의 눈은 솔로몬의 기도가 10절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기도의 중심을 보시고 지혜와 부와 영광을 주셨다.

 

6장1절 성전건축은 출애굽한지 480년 만에 건축을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염원인 하나님의 집을 솔로몬이 건축한 것이다. 물론 다윗이 모든 준비를 했으나 성전건축의 의미는 막중한 것이었다. 6-7장 성전 건축사이에 7:1-12절의 왕궁건축이 들어있다. 7:1절은 더구나 자기의 궁을 13년 동안 건축했다고 강조한다. 이 샌드위치 기법을 통해서 역시 아도나이의 눈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호와의 전과 솔로몬 궁을 비교하며 궁에 더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은 것을 아도나이의 눈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솔로몬이 왜 실패했나? 11장 1-2 바로의 딸부터 시작하여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켜 우상숭배할 때 6절“여호와의 눈앞에 “ 우상숭배하는 솔로몬에게  2번이나 여호와께서 나타나 경고하셨지만 (9) 솔로몬은 이미 마음이 떠났다. 솔로몬의 언약파기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파기가 이어진다. 11절 ”네가 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뺏겠다”

 

9장의 구조는 3장의 구조와 비슷하다.  그러나 내용은 3장과 달리 경고로 이어진다. 언약을 파기하면 나도 너를 버리겠다. 9장의 포인트는 5절까지 2인칭이 계속되다가 6절 “너희” 2인칭 복수로 나온다. 솔로몬에게 이야기하다가 언약백성 전부에게 경고하고있는 것이다.

 

12장.남쪽 유다가 망할것에 대한 암시를 솔로몬 사건을 통해 계속한다.  아도나이의 눈을 따라가 보자. 르호보암은 세겜에 백성들을 모았다. 세겜이 어떤 곳인가? 유서깊은 종교적 도시이다. 백성들은 왕에게 요구한다. 12:7절 왕이 이 백성의 종이되어 저희를 섬기면 저희는 영영히 왕의 종이 되겠나이다.  “아바드”하면 “에바드(종)가 되겠나이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전갈과 채찍으로 다스리겠다고 통보한다.  25절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땅에 세겜이라는 같은 이름의 성을 건축하고 수도로 삼는다. (세겜은 원래 므낫세 땅에 있다.)  그리고 금송아지를 섬기게하고 벧엘과 단에 두어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쪽 예루살렘성전으로 가는 것을 차단한다.  또 산당을 짓고 레위인 아닌자들로 제사장을 삼고  절기도 바꿨고 ”자기마음대로“(35)라는 말이 북왕국이 망한다는 암시를 보여주고 있다.

 

13장 여로보암에 대한 징계 . 한 선지자가 다윗의 후손 중 요시아란 인물이 나와  우상을 철폐 할 것을 예언한다. (요시아는 300년 후의 인물이다). 여로보암이 화가나서 저를 잡으려 하니 그손이 말라졌다.  그러나 선지자에게 은혜를 구하니 다시 성하여졌다.

 

15장 .두개의 길이 대조적으로 나오고 있다. 다윗의 길과 여로보암의 길,  다윗같이의 같이는 “케”라는 전치사인데 .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따라”라는 말과 대조된다. 아합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악을 행하였던지 16:34에 여리고성을 재건하는 자는 심판하리라는 말씀을 무시하고 겁 없이 여리고를 재건하던 히엘이라는 자의 심판을 보여주고 있다.

 

16장. 북왕국 이스라엘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가 오므리왕조이다. 장군이었던 오므리는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는다.  그 아들 아합과 페니키아(베니게)왕국의 공주인 이제벨과의 정략결혼을 하게한다. 페니키아는 지중해의 해상권을 독점하고 있었고 이스라엘은 강국이 된다. 그러나 이제벨은 그들이 섬기던 바알을 온 나라에 전파하고 단을 세우며 수많은 제사장들도 데려온다. 이렇게 북쪽은 금송아지로 시작하여 바알로 끝나게 된다. 금송아지는 혼합주의 (신크리티즘)를 가져왔고 백성들은 바알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게 되었다.

오므리가 죽고 아들 아합이 왕이되어 사마리아에서 22년을 통치한다.  아합은 역대 누구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행하여(16:30)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31). 저는 그전의 모든 왕보다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33)

 

17장. 죄악이 깊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하듯이 가장 악한 아합때에 가장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등장한다. 엘리야의 이름뜻 “엘”은 “야”이다. 누가 참 하나님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야는 오직 여호와의 말씀대로만 움직인다. 2,5,8 .첫 번째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은 아합과 정면 승부하기위해서 나섰는데 그릿 시냇가로 숨으라는 말씀이다. 비겁하게 사는 것은 천년,만년을 사는 것보다 부끄러운 엘리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종인 엘리야는 그대로 순종하므로 여호와가 하나님인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두 번째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은 시돈으로 가서 이방인 과부에게 공궤 받으라는 말씀이다. 시돈은 페니키아의 수도이자 바알 숭배의 총 본부에 해당한다. 처음엔 골짜기로 가서 숨으라 하시더니 이제는 적의 심장부로 들어가 그곳 과부에게 공궤 받으라니 내가 자존심도 없는 놈인 줄아십니까? 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엘리야는 순종한다.  이후  엘리야는 무슨 말씀이든 순종한다. 14절 “여호와의 말씀에 ”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6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24절 과부의 고백을 보라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18장1절은 드디어 여호와의 말씀이 떨어진다. 너는 아합에게 가라 계속 “말씀”이 강조된다. 선지자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자이다. 엘리야는 말도 되지 않는 말씀에 순종하므로 여호와가 진실한 하나님인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시대의 엘리야로 살아야 한다. 말씀이 땅에 떨어진 이 시대에 말씀대로 살면 능력과 역사가 반듯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불순종 할때 세상사람들이 얼마나 말씀을 조롱할 것인가?  18:30절 엘리야는 무너진 제단을 먼저 수축한다. 그리고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저들이)알게 하옵소서(36)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하늘 문을 여는 기도가 시작된다.

 

19장. 탈진하는 엘리야를 치료하시는 하나님. 승리 후에 실패이다. ,갈멜산에서 브엘세바는 먼거리이다. 죽고싶다는 엘리야, 모세도 탈진 했을 때 그랬다. 누구나 탈진 할 수있다. 엘리야는 늘 혼자라는 이야기를 했다.(10,14)혼자라고 생각할 때 쉽게지친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회복시킨 후 동역자를 세우신다. 엘리야를 회복시키는 것은 놀랍게도 여호와의 말씀이다. 엘리야가 간곳은 9절 그 굴 ,정관사가 붙었다. 모두가 아는 그 굴이다. 호렙산의 그 굴은 모세가 말씀을 받은 그 굴이었다. 거기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회복은 말씀이다. 떡도,물도 필요하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 말씀인 것이다.

 

20장 . 두 인물의 대조는 아합과 나봇이다. 왕과 농부. 언약을 버린 왕과 언약을 생명을 버려 순교자로 지켰던 나봇. 나봇의 포도원을 탐낸 왕이지만 나봇의 말은 레25:23이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것,양도 할수 없는 것이다. 왕은 그래도 말씀을 두려워했으나 이제벨은 일고의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피흘리기 까지 언약을 지키려 했던 나봇과 또 다른 대조인 이제벨. 엘리야는 아합과 이제벨의 죽음을 예언한다. 언약을 우습게 알던 시대, 언약이 폐기되고 말씀이 땅에 떨어진 시대에 이름없는 나봇을 통해서 언약 폐기에 대한 심판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았던 엘리야를 통해서 여호와가 하나님인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열왕기하

 

 

배경

열왕기하는 주전 9세기 북왕국 아합의 죽음부터  주전562년 까지 290년간 남,북의 흥망성쇠를 다루고 있다. 아람은 길르앗 라못을 국경으로 북 이스라엘과 대치하고 있었다. 아합이 살아있을 때 이스라엘은 강성했으나 아람과의 전투에서 패한 이후 이스라엘의 영향력은 급속히 위축된다. 왕하1:1절은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던 모압의 배신이 기록된다.

  아람은 이스라엘을 이겼으나 오히려 엘리야에게 아람장군 나아만이 무릎끓고 항복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밖에는 온 세상에 신이 없다고 선언한다.” 북 이스라엘이 약해진 것은 그리고 망한 것은 군사력이 약해서가 아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여러번 나라를 구해낸다. 그들이 망한 것은 언약을 지키지 않아서이다.

 

왕하 8:16-10:36은 북왕국의 실패한  예후의 개혁(주전841-814)을 11-12장은 유다 요아스의 개혁을 다룬다(835-796). 13-15장은 북이스라엘의 계속된 패배는 신명기적 저주인 것을 강조한다. 산당을 제하지 않은 연고로 유다의 웃시아는 나병에 걸리고 북쪽은 내리막을 걷게된다.

왕하18:1-12.히스기야는 북이스라엘을 정복한 앗수르에 대항하기위해 블레셋을 비롯한 작은 국가들을 정복한다. 결과 앗수르를 자극하였고  주전 701년 히스기야 14년, 유다를 침공한 앗수르는 46개 성을 함락시키며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받고 철수한다.  앗수르는 18:17-36절 재차 공격 하였고 히스기야의 기도로 앗수르 185,000의 군사는 파멸한다.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아버지의 노선과 반대로 친 앗수르 정책을 써서 봉신국가로 전락한다.  북이스라엘의 남은 백성과 남유다의 지방에 산당을 복원시킨다. 백성의 마음을 추스르기위한 정책이었다. 앗수르에게 짓밟힌 지방사람들의 마음을 추스르기위한 정책이었다.  대하33:11-13에 보면 정신교육을 받으러 앗수르에 다녀 오기도한다. 앗수르에서 유행하던 마술과 점술이 예루살렘에서도 흥왕했고 사람을 태워 신께 드리는 의식,성전안에 앗세라 목상을 비롯한 우상설치등 기상천외한 방법들이 동원된다.

 

요시아의 종교개혁은 므낫세의 잘못을 일시에 고치는 특단의 조치였다. 당시 국제정세는 앗수르에서 바벨론으로 패권이 넘어가는 시기였다.  요시아는 반앗수르 정책과 남북의 옛영토회복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애굽이 앗수르를 도우러 북진하는 것을 막으려 므깃도에서 벌인 전투로 39세에 죽고만다.  요시야의 죽음으로 유다는 23년만에 망한다. (주전587년)

 

경고-심판-회복

열왕기하에는 엘리야-엘리사 그리고 선지학교에서 배출한 수많은 선지자들이 활약한다.  특히 첫 기록선지자인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에서. 그리고 호세아도 이스라엘에서 사역한다.요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남쪽엔 이사야 예레미야등 위대한 선지자들이 집중 사역했던 시대이다. 그들의 멧세지는 세부분으로 요약된다. 즉 경고-심판-회복이다

 

1.경고

우상숭배는 언약의 파기이다. 왕국의 분열은 솔로몬의 우상숭배 때문이었다. (왕상11:1-13)

북왕국의 죄는 “여로보암의 죄,혹은 ”길”을 경고한다. 금송아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가 이어진다. 멸망의 원인은 우상숭배였다. 웃시야이후 유다도 우상숭배에 빠졌다.

 

2.심판

요시야의 개혁은 온국민에게 깊이 퍼진 우상숭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다윗언약은 영원하지만 계속된 언약의 파기는 바벨론 포로라는 징계를 가져왔다.

 

3.회복

므낫세는 55년을 통치하며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므낫세는 눈물로 회개한다. 므낫세는 예표로 보여준다. 유다백성들의 죄 그러나 회개할 때 하나님의 헤세드는 그들을 회복시킬 것이다. 포로는 끝이 아니다. 오히려 7의배수인 70년 포로는, 땅의 안식이다.(대하36:21)“토지가 안식년을 누렸다” 하나님나라의 역사의식이다.

 

내용

 

1장 아합왕때 우상숭배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아하시야의 뜻은 여호와가 붙드신다)가 왕이 되어 어느날 다락에서 떨어졌다. 어디 물어볼 때가 없어 파리의 신에게 물어본다. 파리를 우상으로 섬기는 애굽의 신이다. 질병을 옮기는 파리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그래서 신으로 섬긴 것이다.  사자가 길을 가다가 엘리야를 만난다.  이스라엘에 신이 없어 에글론(블레셋의 수도 중 하나)으로 가느냐? 반듯이    죽을 것이다.

 

3장.아합은 남쪽유다와 사돈관계를 맺는다. 이제벨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아달랴를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요람)과 결혼 시킨다. 아달랴는 이제 남쪽에도 바알 우상에 물들게한다. 북이스라엘은 아하시야가 죽고 아합의 둘째아들 여호람( 유다왕과 이름이 같다)이 왕이 된다. 남유다의 여호람과 아달랴사이에 낳은 아들이 아하시야이다(아합의 큰아들과 이름이 같다) 유다의 여호람이 8년통치하고 죽고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으나, 왕이 된지 1년만에 북 이스라엘에 여호람의 문병을 갔다가 예후에게 죽는다.  이들 모두 여로보암의 길을 따르는 죄를 범한다. 이러한때  왕들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증거한다.하나님나라의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4장 그릇을 빌리라. 문제에 부딪 힐때 누구를 의지하느냐? 우상이 아닌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것을 보여준다.

3장.개천을 파라. 전쟁 중 여호사밧왕은 선지자 엘리사에게 물었고 엘리사는 개천을 파되 많이 파라고 명한다. 여호와를 전적으로 의지해야함을 보여준다.

 

5장.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아람제국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그들의 신이 아닌 여호와께 나아와 굴복한 사건을 통해서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여호와만이 참 신인 것을 증거한다.

 

6장. 아람이 이스라엘을 포위한다. 전쟁에 계속 지고 있었던 이유가 엘리사라는 것을 알고 도단성을 포위한다. 그러나 여호와의 살아계심으로 그들을 물리친다.

 

7장은 버려진 문둥이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대조적으로 왕이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군대장관과 문둥이들을 보여준다. 여호와를 신뢰하지 않았던 장관의 최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1절부터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우상숭배하며 언약을 파기한다.

 

11장 남유다의 아하시야가 죽자 모친 아달랴가 섭정을 시작한다. 항간에 널리 알려진 다윗언약을 중단 시키려는 음모가 시작된다. 하여 다윗의 모든 씨를 진멸한다. 그러나 한살짜리 핏덩이 왕자 요아스가 살아남는다.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성전에서 6년을 숨겨키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우리 속담대로 7살 때 여호야다는 군사들과 신하들을 성전으로 불러 왕의 선포식을 단행한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관점을 놓치면 안된다. 인간의 의도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윗언약의 계승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식에서 보아야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1세대가 전멸한 것은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고 언약 파기이듯이 남쪽 유다의 왕들이 믿음 이 좋아서가 아니라 다윗언약 때문에 다윗의 후손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는 사실말이다.

성전안에서 나는 소리에 놀란 아달랴가 성전문을 열면서 소리친다,.반역이다. 그러나 아달랴는 끌려나가 처형된다.  요아스는 모든 백성앞에 하나님과 언약체결식을 거행한다. (17)

 

15장.아샤라(웃시야)는 탁월했으나 교만하여 성전에 직접분향하려 하였다. (대하26:17)제사장 80명이 막았으나 웃시야가 그들을 물리치고 분향하려 할때에 하나님이 문둥병으로 치셨다. 북이스라엘도 가장 강력한 왕 여로보암2세가 국력을 신장시켰으나 여로보암의 죄를 짓는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업을 얼마나 크게하고 목회를 얼마나 크게 했느냐에 대한 관심보다 네가 어떻해 언약을 지켜 행하는 가를 보신다.

 

17장. 북왕국 19번째왕 호세아는 209년간 지속된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다. 겉으로 볼때 외교정책에 실패한 것 같이 보이지만 15절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언약을 버린것이라고 지적한다. 19절은 남쪽도 경고한다.

 

18장 다윗언약의 관점에서 보면, 다시 언약은 끊어질 위기에 놓였다. 자식은 없고 앗수르는 포위하고,히스기야는 병들어 죽게되었고, 언약을 이어갈 수 있는 수단이 기도 인 것을 보여준다. 20:3절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진실과 전심의 기도를 들으사 20:6절 내종 다윗을 위함으로 (다윗언약 때문에) 이다. 앗수르 산헤립왕의 내시 랍사게가 유다방언으로 백성들을 회유할 때 (고도의 심리전이다) 반복하는 말은 앗수르에 대항한 나라중 살아남은 나라가 없다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히스기야의 말을 믿지 말라.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하나님께 가져가 기도한다. 하나님 랍사게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2장 요시야가 왕이되어 개혁할 때 성전을 청결케 할 때 율법책을 발견한다. (모세의 친필 신명기) 요시아는 23:3절 백성들을 모으고 언약체결식을 거행한다. 이후 북쪽의 모든 산당제거와 주민들을 초청하여 유월절을 지킴으로 개혁의 절정을 이룬다. 

 

24장 요시야의 둘째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으나 석달만에 애굽으로 끌려간다. 다음 요시아의 큰 아들 여호야김이 왕이되지만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는다. 아들 여호야긴 그리고 요아스의 셋째 아들 시드기야를 마지막으로 유다는 멸망한다.

 

바벨론포로는 4차에 걸쳐 끌려간다.

1차 다니엘과 귀족들,

2차 여호야긴과 왕족,방백,모든군사,기술자,

3차 시드기야와 백성들

4차 마지막 남은 백성들

 

애굽으로 간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데리고 간다. 에스겔은 포로된 백성들과 함께 말씀을 전한다. 요아스의 후손들에게 반복되는 것은 “악을 행함으로” 그들은 브레이크 없는 열차와 같이 멸망으로 치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