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언약신학(박사과정)

언약 신학

호리홀리 2022. 1. 31. 09:39

 

                     언약신학

                                                     

                                                         박인대교수

 

 

1장 창조 언약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창조 사역으로  여섯째 날에 관한 것,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으로 창조한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다. 여기에서 언약이란 말은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구절은 하나님의 언약이며, '창조언약'이다.

 

첫째, 인간 창조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고 있다.

둘째, 창세 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계획이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카일. 델리취(C. F. Keil and F. Delitzsch)는 "사람의 창조는 하나님께서 땅에 발하신 말씀을 통하여 일어나지 않고,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라는 신적 작정의 결과로 일어난다"라고 말하였다.

 

창조 이후 제2위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곧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그리스도란 명칭은 직접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관련해서 예언된 그리스도로서 사용되고, 주로 '여호와'이신 하나님으로 등장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아직 아무 것도 창조되지 않은 때부터 존재하신 분으로서 모든 만물을 자신의 목적과 영광을 이루려고 지으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이 있는 사람에게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또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말씀에 대해서는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라는 말로 잘못 이해되어 왔다. '문화명령'이라는 말은 용어 자체부터 문제성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문화'(文化)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1)인지(人智)가 깨어 세상이 열리고 생활이 보다 편리하게 되는 일. (2)철학에서, 진리를 구하고 끊임없이 진보·향상하려는 인간의 정신적 활동, 또는 그에 따른 정신적·물질적인 성과를 이르는 말. [학문·예술·종교·도덕 따위.] 문명. (3)문덕(文德)으로 백성을 가르쳐 이끔을 의미하여서 삶에서 사람이 근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문화를 발전, 발달시켜 나간다. 이러한 문화명령의 관점에는 사람이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위한 삶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 만일 문화명령의 차원에서 창세기 1장 28절을 이해한다면,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 이행을 사람에게 가지고 있는 것일지라도 사람이 다스리고 지배하는 문화란 인본주의의 발상(發想)을 가져올 뿐이다. 이는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사람이 임의로 먹은 것에서도, 그리고 가인과 그 후손들이 세상을 다스리고 지배한 데 따른 문화에서도 그 모두에서는 하나님이 없는 바벨탑 문화만 세울 뿐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여 만든 세계의 지배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정복하라', '다스리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작정에서 갖는 뜻과 그 의지에 따른 것으로 먼저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과 함께 주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온 땅에 충만하여 나가게 하시면서 또한 그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신 것이다.그에 따라서 사람은 번성하고 온 땅 곳곳에 충만할 것이다. 그리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은 이름을 지어준(창 2:19) 사람의 다스림을 받는 것에서 사람은 동일하게 자신을 지으시고 사람(아담)이라고 이름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져나갈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복하라', '다스리라'고 하신 말씀은 문화명령을 내리시는 차원에서의 말씀이 아니라, 오직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세상의 지배자임을 증거하고 보여주어야 될 책임에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은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작정하신 하나님의 작정이 지닌 약속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첫 사람에게 선포된 것이며, 이는 온 세상에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나라를 충만케 하실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여 주시는 것으로 언약의 성격을 가지는데서 창조언약으로 불려질 수 있다. 그에 따라서 이 하나님의 언약이 의미하는 궁극적 결국은 작정된 하나님 나라의 성취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하셨으며, 그 지으신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정복할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을 사람에게 나타내시는 것으로서의 언약의 성격을 가진다. 이때 하나님의 작정은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기에, 이 땅에서 이룰 일인 동시에 또한 하늘에서 이루어질 일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은혜로 오래 전에 정하신 그 계획은 때가 차면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자이나 땅에 있는 자이나 모두를 사방에서 모아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게 한다면서 그 계획에 따라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말하였다(엡 1:9-11).

 

창세기 1장 28절의 창조언약에서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시는 언약의 형식은 아브라함 때에 와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서 '땅'과 '자손'과 '하나님이 주가 되심'을 약속하셨다. 그래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창 12:3)이란 약속을 주시는 언약으로 주어졌는데, 예수께서는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마 8:11)을 것을 말씀하셨으며, 모든 나라가 와서 이스라엘의 구원에 참여할 것이라는 사실은 구약 예언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였다(사 45:6; 49:12; 59:19; 렘 3:18; 말 1:1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세 전의 영원한 작정에 따라 "때가 차매" 세상에 오셨다. 그리스도의 이 오심은 자기 백성들에게 오신 것이며, 그리스도는 그들 중에서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에게서만 영접을 받는다(요 1:11-13). 이 영접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흠 없는 거룩한 자로 만드실 것을 작정하신 데 따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요 1:29)이 되셔서 그 일을 이루심으로써 그를 믿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있게 하셨는데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권능이 그 사실을 입증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구속 사역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의한 언약과 연계해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창세기 1장 28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구속를 통해서 이룰 것을 작정하신 데 따라 세상 창조에서 그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사람에게 알리시고 또한 이를 온 세상에 선포하신 '창조언약'이었다.

 

 

 

 

2장 아담 언약

 

 

하나님은 특정한 사람들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아담,노아, 아브라함. 이스라엘, 다윗과의 언약 수립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새로운 언약(렘31:31)이 성취될 날을 예언했고, 그리스도 자신은 최후 만찬을 언약적인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눅22:20). 하나님은 이처럼 언약을 통해서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에게 자신의 뜻인 구원의 비밀을 알리셨다. 그러나 유기된 자에겐 알지 못하도록 감추셨다(마13:11-15). 그것은 유기된 자에겐 하나님의 은혜를 허락하시지 않아 그들의 귀를 둔하게 하시고 눈은 감게 하여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키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의 주권이다.

 

'언약'이란 명칭은 창세기 6장 18절에 나온다. 이전에는 언약이란 말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언약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호 6:7) 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아담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언약은 창세기 2장 16-17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것을 금지한 명령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렇게 언약이란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선지자는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명령을 '언약'의 개념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 언약이라는 말은 창세기에서 25회나 발견되며, 창세기 이외의 모세오경,시편 그리고 선지서에서도 20여 차례나 나타난다. 신약에서도 언약(Covenant)이라는 단어는 매우 분명하게 나타난다. 예수의 죽음이라는 위대한 기념비가 세워질 때 주께서는 "이 잔은 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눅22:29)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들에게 주셨던 축복들을 열거하면서 그들에게 '언약들'(롬9:4)을 세우셨음을 선포하였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도 '두 언약'을 설명한다. 그런가 하면 에베소 성도들은 그들이 거듭나지 않은 시절에 자신들이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엡2:12)이었음을 회상했으며,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가 중보자되신 '더 좋은 언약'(히8:6)에 대한 설명이다.

 

행위언약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언약은 에덴 동산 중앙에 두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는 것을 금지한 '선악과'로 다루어진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은 통상 '행위언약'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져 왔다. 윌리암스(G. I. Williams)는 소요리문답 강해에서 "첫 언약은 '생명언약'이라 부르는 데,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을 약속하셨다. 또 이것을 행위언약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선물을 주기 전에 먼저 순종을 요구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박윤선도 그의 주석에서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것이 언약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행위계약(行爲契約)의 말씀이다."라고 말하였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k)의 견해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윌리암스를 비롯하여서 각 사람이 이렇게 선악과를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을 생명언약, 또는 행위언약이라고 규정한 것은 웨스트민스터 삼대 표준문서의 하나인 소요리문답서에서 이를 다룰 때, "사람이 창조함을 받은 본 지위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저를 향하여 섭리하시는 중 무슨 특별한 작정을 하셨습니까?"(제12문)라는 질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완전히 순복하는 것을 조건으로 삼아 생명의 언약을 맺고, 선악을 분별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것은 사망의 벌로써 금했습니다."라고 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지은 죄는 자신의 타락과 함께 자신 안에서 전인류의 타락을 가져와 죄와 죽음 아래 있게 하였다. 아담이 인류의 시조인 동시에 또한 인류의 대표자인 까닭에 아담 안에 들어 있는 그의 모든 후손들도 아담과 함께 죄와 죽음 아래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그 이름을 사람을 의미하는 뜻인 '아담'이라고 지은 것에서 전인류의 상태가 예시되어 있었다. '아담'이란 이름은 붉은 땅을 의미하는 말에서 나왔는데, 이 말도 같은 어원인 '붉음', '흙', '먼지'를 의미하는 데서 나왔다. 이렇게 붉은 흙에서 나온 인간에게서는 선한 것을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결과가 아담이란 이름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며, 이는 또한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는 것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흙에서 나온 인간은 흙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고 선언하신 '죽음'이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다. 아담의 후손으로 오는 모든 인간은 죄의 종[노예]의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으며, 죄 값으로 죽음의 형벌을 받는다. 이런 인간은 그 마음이 하나님을 상실한 자로서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거짓된 것을 섬기는 악한 죄를 행할 뿐만 아니라 육은 죄성에서 나오는 온갖 욕망에 이끌려 산다. 이것이 아담의 불순종 이후의 인간의 실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은혜는 아담의 불순종 이후에도 계속되어지는데 더욱 크게 나타난다. 범죄한 아담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창조 하셨을 때 하셨던 것처럼 언약에 담은 생명을 구원의 약속으로 주셔서 그 약속에 따라서 구속의 역사를 경영해 가실 것을 계시하신 것이다. 아담언약은 그렇게 이 언약으로 말미암아서 올 하나님의 은혜인 구원의 약속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 준비되어지고 먼저 주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증표로 죄로 인해서 오는 수치 속에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서 입혀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리워주었다.

 

 

 

3장 구속언약

 

 

4장에서부터 5장에 이르기까지 죄 아래에 있는 사단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되는 두 부류의 사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 4장은 아담의 자손인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등장한다. 아담은 가인을 낳고는 하나님께서 돌봐주셔서 내가 사내아이를 얻었다라고 하여서 이름을 ‘얻음’이라는 뜻을 지닌 가인이라고 지었다. 아담이 아들의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은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담은 그 아들에게서 창세기 3장 15절에 말씀하신 '후손'인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아담의 기대는 산산이 무너져버린다. 가인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만한 의를 전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담은 가인에게서 오히려 슬픔을 겪는다. 가인이 그의 동생 아벨을 죽이기 때문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에게서 모든 인류에게서 보게 되는 ‘죄의 힘’을 말해준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대담히 살해하는 살인죄를 저지른다. 그러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그뿐이 아니다. 그 죄는 감추어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여실히 드러나는데도 결코 회개하지 않는다. 가인의 마음에서 우리는 전적 타락한 인간의 부패한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를 본다. 완전 부패한, 그래서 ‘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죄성을 띤 마음이 타락한 죄인인 인간의 마음이다.

 

가인에게서 보는 죄는 그가 제사를 드리지 않은 데 있지 않다. 그는 제사를 드렸으며 이는 그 동생 아벨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가인이 아벨처럼 짐승으로 제물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인가?

 

히브리서 기자는 그에 대한 대답을 해준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 아벨이 하나님께 가인이 드린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제물을 드린 것은,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을 드린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를 아벨과 그의 제물을 기꺼이 받아들이심으로 증명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믿음’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대체적으로는, 가인이 ‘피 있는 제사’를 드리지 않은 데서 그 대답을 찾으려고 한다. 아벨은 짐승을 제물로 삼아 피 있는 제사를 드렸으나, 가인은 곡식을 제물로 삼아 피 없는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인의 이러한 처신은 그가 ‘속죄의 은혜’에 대한 아무런 믿음 없는 행동이었다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당시 가인은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었기 때문에 수확한 곡식으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가축을 치는 목자였기 때문에 양이 낳은 새끼 중에서 첫 번째 것을 잡아 제물로 드린 것으로, 이들이 제물 삼은 것의 차이에 의해서,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서 피 있는 제사와 피 없는 제사를 드린 것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히브리서의,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린 것은,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을 드린 것은 ‘믿음’ 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심으로 그가 믿음으로 제사를 드리는 의에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증명해 주셨다.

 

이렇게 아벨의 ‘믿음’이 말해지고 있는 것이 아벨이 드린 제사였다. 그러면 아벨에게 믿음이란 무엇인가? 이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약속에 근거하여서 말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창세기 3장 15절에서 범죄하여 타락한 아담에게 구원의 약속이 주어짐 속에서 그 후손인 가인과 함께 아벨의 제사가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인과 아벨은 다 같이 아담의 후손이다. 즉, 첫 사람 아담 안에서 죄인 된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주신 구원의 약속을 실천해 나가신다. 그리고 구원의 약속이 주어지는 ‘여자의 후손’의 선택으로 아벨이 등장한다. 여자의 후손인 그는 사단의 후손과 적대 관계에 있게 되는데, 그것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믿음’이다. 아담의 후손으로 오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이는 가인에게서만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동생인 아벨에게서도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세 전에 택정하신 아벨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은혜를 입히셨다. 이 은혜는 아담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육은 육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죄성의 아담에게서는 그 후손에게 역시 죄성만 전해진다. 이것이 원죄의 전가설이다. 그러한 아담의 후손인 아벨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은혜는 그의 조상인 아담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즉, 혈과 육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죄인 된 사람인 아담과 상관없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경건한 자를 아담의 후손이 아닌 ‘여자의 후손’으로 약속하셨다. 이 여자의 후손은 아담의 몸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정에 따라서 아담과 상관없는 여자의 몸을 통해서 오게 하신다. 그러므로 ‘여자의 후손’으로 말해지는 것이다.

 

가인과 아벨 모두가 다 아담의 후손이나, 아벨은 하나님의 택정하심을 입은 자로 오는 ‘여자의 후손’이다. 하나님은 그를 창세기 3장 15절의 구원의 약속인 ‘의’ 속에 두시고서 그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이끌어 가신다. 그래서 그를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게 하시는 것으로 가인과의 제사 속에서 그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리는 일이 있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벨이 하나님을 믿은 믿음의 의는 창세기 3장 15절의 구원의 약속과 상관이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약속을 받은 자로서 그에 대한 이해와 그 믿음 속에서 제물을 바쳐 제사를 드린 것이다. 창세기 4장 4장에서 아벨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라는 제물에 대한 설명도 아무런 뜻 없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닌 필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바라보아 의존하게 하시는 것으로서의 계시가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즉, 아벨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의존하여서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말씀에 따르는 행동을 취하는 것으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아벨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택정하심에 의한 ‘여자의 후손’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가 하나님의 택한 자에게 실현되는 것을 보여준다. 아담의 후손인 가인과 아벨은 어렸을 때부터 필시 그 부친에게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과 함께 그들이 참여하고 또한 드릴 제사 생활을 배웠을 것이다. 가르침과 직접 제사에 참여하는 것에서 말이다. 그것의 중심은 아담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 언약에 관한 내용이다.

 

아담은 가인과 아벨을 낳고 하는 가운데서 '여자의 후손'이 육체의 후손에게서 오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해서 오는 은혜인 것을 점차 깨달아 갔다. 그러한 사실은 그가 두 번째 아들을 낳고서는 그 이름을 '아벨'이라고 부른 데서 잘 알 수 있다. 아벨이란 이름의 뜻은 ‘무’(無), 그러니까 ‘헛되다’ 이다. 이를 통해서 아담은 '여자의 후손'을 거시적(巨視的)이고도 원시적(遠視的)으로 보다 새롭게 인식하였음을 볼 수 있다. 아담은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며 소원을 갖는 기원제(祈願祭)요,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는데 대한 감사제(感謝祭)를 드리며, 그 믿음을 아들들에게 계승시켜 갔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거론되고 있는 문맥 전후에서 충분히 인지(認知)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것임을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해서 보여준다. 그에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아벨의 믿음이 말해지고 있다. 그가 어떻게 ‘믿음으로’ 사단의 후손과 대적하는 삶을 살았는지, 곧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죄에 대하여 싸우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물을 드린 아벨의 제사인 것이다.

 

 

가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아벨의 죽음을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 라고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한다’ 라고 말하여 가인에 의해서 죽은 아벨에게서 우리는 지금 가르침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벨은 비록 죽었으나 그 후에도 그를 믿음으로 살게 한 그 믿음은 여전히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벨 이후의 ‘여자의 후손’에게서 본다. 하나님은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셋을 주신다. 아담은 130세 되던 해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셋이라고 지었다. 아담이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하여서이다. 아담은 아벨이 죽은 후 아내 하와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고는 그에게서 ‘하나님의 씨’를 본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아벨을 잃은 슬픔 중에서 다시 아들을 얻고서 그 아이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본 것이다. 그것은 아벨 대신에 주신 아들에게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자에 대한 위로와 소망을 계속해서 가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이 끊기지 않고 계속해서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고 그에 대한 믿음 속에 있게 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셋의 출생과 관련해서 주목할만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던 날 하나님의 형상 곧 그 모양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는 그 이름을 ‘사람’이라 부르셨는데(창5:1-2), 아담이 아들인 셋을 낳을 때는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창5:3)이라고 하고 있는 사실이다.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한 죄인된 아담 안에서 낳은 모든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사람이 아닌, 아담의 형상 곧, 단지 흙에서 나온 형상, 그러니까 흙에서 나온 몸으로서의 육의 사람의 형상인 것이다. 하나님이 떠나고 죄의 지배 아래 있어 사망이 왕노릇하는 사람에게서는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없이 다만 죄인 된 아담의 형상인 육으로서의 형상만 남아 있다.

 

그러한 아담에게 하나님께서는 셋을 주셨고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지어 불렀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을 모시고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의 은혜를 입히셨다. 여기서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것은 그 이전에는 여호와란 존재를 알지 못했고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는데 에노스 때에 와서야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의 비로소는 접두사 'upon'이란 단어가 쓰여졌다. 이는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데, 그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에 근거하여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셋과 그의 계열인 에노스, 곧 셋 계열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에 의하여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은 그들 자신에 의하여 계시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없이 사는 세상 나라 사람들 앞에서 셋과 그 후손인 에노스는 "우리들의 생명을 이끌어 가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을 담대히 말하며 사는 것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서 보인 하나님의 의는 여자의 후손이 뱀(사단)의 머리를 깨뜨려 부수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있는 하나님의 구속사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그와 같이 경건함을 가지고 살아갔으며, 이는 노아의 홍수 시대에 이를 때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자들의 이름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사실에서 하나님께서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알게 해주시고 있다.

 

이 사실은 가인의 계열에게서 보는 ‘사단의 후손’의 삶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것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아벨을 죽인 가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형벌의 내용은 그가 더 이상 땅에서 혜택을 입지 못하고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죽인 아벨의 피를 땅이 입을 벌려 받아들인 까닭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의로운 아벨을 죽인 피 값이 가인이 농사짓는 땅에게로 돌아가고 결국 그 저주가 가인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땅이 더 이상 가인에게 곡식을 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인은 땅에서 농사를 지어도 아무런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음의 심판 아래 있는 자의 고통스런 불행을 경험하게 하였다. 그럼으로써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한탄뿐이다. 뿐만 아니라 가인은 이 땅에서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쉴 곳 없는 가인의 처지는 안식을 잃어버린 자의 모습이다.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고서는 그 벌이 너무 크고 무거워 견딜 수 없다고 하소연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을 이 땅에서 쫓아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정처 없이 헤매게 한다면 필시 자기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기를 죽이려 들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하나님은 결코 가인을 헤치는 자가 없을 것이며, 만일 누군가가 가인을 죽이려는 사람이 있을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일곱 배나 무거운 벌을 내리겠다고 다짐시켜 주었다. 그리고 나서 가인이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의 몸에 표를 주셨다. 그러자 가인은 하나님의 앞을 떠나 에덴 동편에 이르러 '유리함'의 뜻을 지닌 놋 땅에 거주하고 살았다.

 

놋 땅에 거한 가인은 그곳에서 아들을 낳고 그 세력을 펼쳐갔다. 그러나 가인의 후손들에게서도 계속되는 죄의 무서운 힘을 보게 된다. 가인의 후손은 세상 나라 문화의 중흥을 꾀한다. 가인의 아들인 에녹은 성읍을 건설하며 위용을 떨쳤고, 이후 이랏-므후야옐-므드사엘에 이어지는 라멕은 두 여인에게 장가들어 육체의 쾌락을 꾀하는 정욕적 특성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싸우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 손자인 야발은 목축업에 성공하여 그 이름을 후세에 남겼고, 그 아우인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연주하는 음악가의 조상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야발의 이복 형제인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는데 그는 쇠나 놋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대장장이였으며, 이로부터 문화의 발전은 급상승하게 된다. 기계 발명은 세상 문화의 전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온 것이 세상 문화의 역사이다. 그리고 이는 또한 무기의 발달로 이어져 서로 간에 죽이는 일을 예사롭게 여기는 죄의 극치를 보게 된다. 라멕이 노래한 것을 보면 그는 두 아내를 거느리는 자였고,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고 헤치는 일을 예사롭게 하며 즐긴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 그는 가인과 자기를 견주어 말하기도 하였다. 가인을 죽이면 그 대신 일곱 명을 죽여 그 앙갚음을 하겠다고 하였지만 라멕 자신을 죽인다면 일흔 일곱 명을 죽이는 앙갚음을 하겠다고 말이다. 그가 얼마나 포악한 사람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가인의 계열에서는 죄의 문화가 중흥하며 그 세력이 확장되어 갔다. 하나님이 없는 자의 문화가 이렇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자가 살아가는 세상 나라는 죄가 득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인의 계열이 보여주는 것은 땅이 그 입을 열어 가인이 죽인 의로운 자의 피 값을 저주로 찾는 것이다. 그에 따라서 땅에서 얻는 것이 아무리 크고 위대하며 문화의 중흥을 꾀하는 것일지라도 전혀 복이 되지를 못하고 저주가 되니 죄 값은 사망일뿐이다. 그러므로 가인의 계열의 사람에게서 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란 것의 성취인 ‘죽었더라’가 인생의 결국의 전부이다.

 

그러나 이런 세상 나라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주어진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한 여자의 후손을 아벨 이후에 다시 아담에게 주셨다. 셋이 그인데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가진 경건성은 그 아들 에노스에게로 이어진다. 이때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은 당시 하나님이 없이 사는 세상 나라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생명의 주가 여호와 하나님이신 사실을 담대히 말하며 사는 믿음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서 보인 하나님의 의는 여자의 후손이 뱀(사단)의 머리를 깨뜨려 부수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있는 하나님의 구속사이다. 하나님은 뱀(사단)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과의 사이에 있게 되는 적의(敵意)와 그에 따른 싸움을 이런 식으로 세상 역사 앞에서 펼쳐 나가셨다. 이런 그들은 비록 죽음이 그들을 삼킨바 됨으로써 ‘향수하고 죽었더라’에 있게 되지만, 그래서 가인과 그 후손에게서 보는 대로 죄 값인 죽음을 당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녹)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않더라”(창5:24)고 말한 바와 같이 에녹에게서 보는 대로 뱀(사단)의 후손과 적대 관계에 있어 죄와 싸워나가는 ‘여자의 후손’은 뱀(사단)의 머리를 부순 ‘여자의 후손’인 메시야에 의해서 그들의 생명이 죽음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로 옮겨져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

 

 

 

4장 노아 언약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은 언약은 단순히 노아 한 개인의 차원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하나님의 계시 방편이다. 노아 언약은 하나님께서 앞서 언약하신 창조 언약, 아담 언약, 그리고 ‘여자의 후손’에 의한 구원의 약속에서 계시해 주시고 있는 데 따른 연결고리에 의한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고 있다. 그것은 ‘생명의 보존’이다.

 

하나님은 노아 언약을 통해서 앞으로 주실 아브라함 언약을 펼쳐나가신다. 노아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항상 악할 뿐이므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이을 자를 하나님은 구원하시고 그에게 생명의 보존을 언약하심으로써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계획을 준비해 나가신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언약은 아브라함에게 계시된 구원 언약의 필요 불가결한 서론이 된다 할 수 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노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후손들은 그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이 ‘항상 악할 뿐’으로서 죄악이 세상에 관영했다. 사람들이 불어나기 시작하면서 땅 위 곳곳에 퍼져나가 살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다”(창6:12). 그래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악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노아 시대에서의 아담의 후손들의 악함은 이전의 사람들과는 차이 나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이전에는 사단의 후손으로 대변되는 가인의 계열에서의 두드러진 악한 죄성의 발휘와 여자의 후손으로 대변되는 셋의 계열에서의 하나님의 의가 대조적으로 다루어져온 반면에, 노아 시대에서는 인류의 죄를 총체적 관점에서 고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셋의 계열인 하나님의 아들들과 가인의 계열인 사람의 딸들의 통혼의 계기가 당시 죄의 관영을 급속히 부추긴 사실을 우회적으로 시사한다(창6:1-3). 이후 ‘죄의 관영’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함을 도처에서 지적한다(창15:16; 18:20-21, 눅17:26-30). 이런 원리에 근거하여서 신약의 기자는 죄의 값은 사망이요(롬5:12; 6:23), 그 결국은 종말론적 심판임을 경고한다(히9:27) 따라서 노아 시대에 내린 온 세상을 멸망시키는 홍수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을 통해서 사실은 죄를 고발하고 정죄하며 심판하시는 성격의 것으로 장차 있게 될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을 예표한다.

 

한편, 노아 홍수의 본질적인 성격은 노아를 포함해 여덟 식구가 당시 모든 인류가 물 심판을 당한 것에서 구원 받는 것에서 이들의 구원이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해준다(창6:8). 노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특성은 그의 의로움에서가 아니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특이성에서 나타났다. 노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특이성은 구원 언약 속에서 계속 나타나는 주제로 사도 바울에 의해 강조된 것처럼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의 경험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선물로서 오게 되는데(엡2:1-2; 8-10 참조), 이는 여자의 후손 언약 속에 암시된 구속의 원리에 근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노아와 세우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창6:18). 하나님께서 ‘내 언약’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이 언약의 세우심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과 그 계획이 항상 악할 뿐으로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을 드러내시는 홍수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에서 하신다. 그리고 그 언약의 내용은 땅 위에서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을 모두 쓸어버림으로써 모든 것이 다 죽고 말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노아와는 언약을 맺어 그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 며느리는 구원하여 주실 것이므로 노아가 지은 배 안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와 함께 또한 살아 숨쉬는 것은 무엇이든 암수 한 쌍씩 배 안으로 들어가게 하여서 목숨을 보전케 하시겠다고 하였다.

 

여기서 ‘언약’이라는 말이 최초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이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는 일은 창세기 9장 1-17절이다. 창세기 9장에서 세울  언약을 하나님은 창세기 6장 18절에서부터 말씀하셔서 6장에서 9장에 이르기까지에 있게 되는 홍수를 6-9장의 전체 언약에 속한 경험(covenant experience)으로 있게 하시고 있다.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기 위해서 먼저 그에게 은혜를 입히는 일을 하셨다. 창세기 6장 9절에서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 하였으며”라고 말씀해주시고 있는 것에서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한 것은 당시의 사람들의 실상과는 대조되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앞 절인 8절에서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직 악한 죄성만 보이는 타락한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에게는 그들과 대조되는 은혜를 보이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노아로 하여금 그 시대 사람들의 타락 상태로 빠지지 않게 하셨다. 노아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은혜’는 그 말뜻이 죄악된 상황에 자비를 베푸는 식의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은혜’라는 단어는 용서받지 못한 죄인에게 거주 주시는 자비로운 태도를 뜻한다. 노아 시대에는 사람이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노아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입음으로써 항상 악할 뿐인 당시에 의로운 사람으로 있을 수 있었다. 노아가 의로운 사람인 것은 그에게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될만한 ‘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실로 말미암아서 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처럼 노아에게 은혜를 입히셔서 그를 의로운 사람으로 있게 하신 것은, 곧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의로움에서가 아니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특이성에 따른 것으로, 그에게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보이게 하여 그가 어떤 자인지,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세상 앞에서 증거로 삼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는 것으로 처음 말씀하신 것은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가득 차 그들의 끝 날이 이르렀으므로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실 것인데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을 것”이라고 하면서(창6:17),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창6:18-20)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노아를 물로 심판하는 홍수에서 구원하실 것이며, 또한 그와 함께 배에 들어가는 그의 가족들도, 그리고 동물들의 생명까지도 구원하시겠다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인의 후손을 통해 전개될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의해서 언약의 중보자기 될 노아를 택하사 자신의 은혜를 무한히 베푸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선택하시고 그를 의롭게 하시고 또한 홍수의 심판에서 그를 건져내시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주도권을 가지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실 그 언약 때문에 그분은 노아뿐만 아니라 노아의 가족과 동물들의 생명까지도 보존하셨던 것이다. 즉, 홍수 심판에서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생명들을 구원해 주겠다는데 언약의 특징이 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실행되었다. 하나님은 배에 들어가는 노아에게 그와 함께 한 모든 생명들이 먹을 양식을 배에 저장하게 하여서 홍수가 있는 동안에, 그리고 홍수가 멈춘 후에도 땅에서 물이 다 빠져나가 육지로 나올 수 있을 때까지의 그들의 생명을 보존케 하셨다. 그리고 또한 배에 물이 전혀 스며들어오지 못하도록 배에는 역청을 발라 방수가 되게 하였으며, 배의 문은 완전하게 닫히게 하셨다. 창세기 7장 16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에서의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는 표현은 노아를 임박한 홍수 심판으로부터 철저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홍수가 있기 전에 예비케 하신 방주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동물들의 생명을 보존하심으로 있는 것으로 홍수 심판으로부터의 하나님의 구원이었다. 그 방주가 하나님에 의해 제공된 유일한 구원의 도구였다는 사실은 창세기 7장 23절에 진술되어 있다.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이렇게 노아와 그와 함께 있던 자들만 홀로 살아남을 수 있었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배에 문이 닫히자 곧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고, 엄청난 양의 비는 홍수를 불러 일으켰다. 땅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의 양을 다 받아들이지 못하여 땅이 터져 물을 쏟아냈다. 이렇게 하늘에서 내려붓는 비와, 그리고 땅에서 쏟아내는 물은 낮과 밤 온종일에 걸쳐서 40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한 세상은 물로 잠겼다. 땅 위에 솟아 있는 높은 산봉우리까지도 물속에 잠겼으며, 계속 불어난 물로 급기야는 산봉우리 위로 물이 7미터 가량이나 넘쳤다. 여기에서 살아남은 생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던 모든 것들은 물에 잠겨 모두 죽고 만 것이다. 땅 위에 살아 움직이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가축과 들짐승 및 땅 위에 기어 다니던 길짐승도, 그리고 하늘에 날아다니던 날짐승도 모두 다 죽임을 당하였다. 무릇 뭍에서 살아 숨쉬던 것들은 모두 죽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시에 의하여 만든 방주에 타고 있던 노아와 그의 가족들과 동물들은 모든 살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다 죽임을 당하는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살아남았다.

물은 150일 동안 땅을 뒤덮고 있었으며, 150일 째 되던 7월 17일에 방주가 아라랏산 봉우리에 걸리게 되었다. 그리고 물은 계속해서 빠져나가 노아가 601세가 되던 해 정월 초하루에는 물이 모두 빠져 마침내 땅이 말랐으며, 그해 2월 스무이렛날에는 물이 완전히 빠져 땅이 다 말랐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 하리라”(창8:16-17) 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노아는 아내와 아들들과 며느리들을 데리고 배 밖으로 나왔다. 또한 함께 방주에 들어갔던 동물들도 각각 그 종류대로 배 밖으로 나왔다.

 

배 밖으로 나온 노아는 가장 먼저 여호와께 제사를 올릴 제단을 쌓고 제물로 드리기에 적합한 정결한 짐승과 새를 각 종류대로 가려내어 제물로 잡아 제단 위에 번제물로 바쳤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그 제물의 향기를 맡고 만족해하시면서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1-22) 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방주에 나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노아에게 다시는 물로 홍수를 내려서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을 것이며, 이는 땅이 있는 동안에는 씨 뿌리고 거두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에서 이어질 것임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또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 내리시며 이르시기를,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9:1-3) 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노아의 후손의 생육과 번성과 땅에 충만할 것을 말씀하시며, 또한 모든 짐승들을 양식으로 삼을 수 있게 하신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의해서 되어지고 있는 것으로 생명의 주도권이 하나님 자신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는 중에 이미 양식으로 삼고 있는 식물과 함께 짐승들을 양식으로 삼음으로써 그들의 생명이 보존되고 있는 것도, 또한 살아있는 모든 짐승들이 사람들의 양식이 됨으로써 그들의 생명이 사람들을 위하여 제공되고 있는 것도 모두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허락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짐승의 고기를 피와 함께 먹지 못하게 하셨다. 피는 그 생명인 까닭이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그리고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이 짐승을 양식으로 허락함으로써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무릇 짐승의 생명은 피에 있는 까닭에 그 피의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이 그 피를 함부로 다루지 않게 하시는 것으로 금하셨다.

 

그리고 또한 어떤 경우에도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해서는 안 될 것을 말씀하셨다. 만일 사람의 피를 흘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피값을 그에게서 찾을 것을 말씀하셨다.사람의 피를 흘리게 해서는 안 될 이유를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9:6) 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하나님은 노아와 그에게 속한 가족들을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지은 사람’으로 말씀하시고 있다.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한 아담으로 말미암아서 아담의 후손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아담의 형상’, 곧 ‘흙의 형상’, ‘육의 형상’으로 있게 되는데, 하나님의 언약에 들어 있는 노아와 그에게 속한 가족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 곧  사람의 피를 흘려 생명을 빼앗으면 그의 생명의 주가 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피값의 갚음이 되시겠다는 것으로 “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창9:6) 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는 실질적인 언급은 창세기 9장 8-17절에서이다. 1-7절에서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여 나가실 것을 말씀하신 것에 이어서, 이제 10-1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가족뿐만 아니라 이들의 뒤를 이을 자손들과도 언약을 세우실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또한 노아와 그의 가족들과 함께 배 안에 있던 모든 짐승들과도 언약을 세우실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이처럼 언약으로 세우심으로 하나님이 노아와 맺은 약속을 확정하시고 확고히 하셨다. 이 노아 언약은 창세기 9장에 와서 세워지지만, 사실은 홍수 심판이 행해지기 전, 곧 방주에 들어가기 전인 창세기 6장 18절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노아와 세우시는 언약이 홍수 심판이 행해지기 전인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기 전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은 홍수에 의한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지기 전에 이미 노아와 그의 가족이 구원에 포함된 것이 언약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노아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그의 가족들의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작정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사실 전우주적인 홍수에 의한 세상의 심판은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시는 것을 위해서 있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온 세상에 말해가기 위하여서 노아 시대에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심판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미 홍수 전에 노아에게 하신 말씀에서 드러났듯이,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기 위해 그와 그의 가족들의 생명까지 보호해주심으로써 자신의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는 노아와 그의 가족 뿐만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모든 후손에게도 미치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은 대(代)를 이어 당사자의 후손까지도 포함하는 영원한언약의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세우시는 범주가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노아와 함께 방주 안에 들어갔던 살아 있는 모든 짐승들과 또한 땅까지도 포함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에는 사람은 물론이고 생물들과 땅까지도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저주하시는 심판 아래 있기에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마침내 구원이 완성되면 사람만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만물까지도 새롭게 되는 ‘새 하늘과 새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는 내용은 이미 창세기 8장 21-22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생각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인데,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니…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고 표명하신 하나님의 뜻을 노아와 언약으로 세우시면서 언약화 하신다. 곧 언약의 내용으로 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 언약을 통해서 사람과 생물과 그들이 사는 땅을 보존하실 것을 약속으로 주셨다. 이런 까닭에 노아 언약은 ‘생명의 보존 언약’, 또는 ‘노아의 보존언약’ 이라고 불리운다.

 

하나님은 노아와 세운 언약에서 나타내 보이시고 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입증하시기 위해서 무지개를 표징으로 주셨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로 노아와 세운 언약은 노아 당대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시기에 자신의 신실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언약도 영원히 지키실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에게 속한 가족들과 그리고 그들과 함께 숨쉬며 살아가는 모든 짐승들과 함께 영원토록 언약을 맺었다는 표징으로 구름 사이의 무지개를 삼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즉, 구름 사이의 무지개를 노아 언약의 표징(sign)으로 삼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노아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의 통일된 뜻을 계시해 주시고 있는 것은 창세 전에 작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서 창조 언약과 아담 언약에서 약속으로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 의한 하나님 나라의 이룸이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구속하신다. 노아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여인의 후손’으로 오게 하는 그들을 물에서의 구원과 그 생명을 보존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에 계시된 하나님의 최종 목적인 하나님 나라 사상을 상호 연합시키는 성격을 띤다. 이런 관점에서 노아 언약은 이전의 모든 언약과 동질적 상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후 노아의 생명의 보존 언약을 통해 진행되는 것에서도 동일하게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어 가는 것으로서 노아의 세 아들 중 특별히 셈의 계보를 선택적으로 선용하는 일이 있게 된다(창9:26). 그리고 셈의 셋째 아들인 아르박삿을 통해 데라와 아브라함에게까지 연결된다(창1:10; 26).

 

 

 

 

5장 아브라함언약

 

 

창세기 15장에서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두 기둥을 이루는 ‘믿음’과 ‘언약’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는 창세기 15:6을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 정의하며(롬4:3; 갈:3:6),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15:18; 17:4)은 이후, 모세의 중보를 통하여 맺어진 시내 산 언약의 기초를 이루게 된다(출19-24). 따라서 창세기 15장과 뒤 따라 나오는 17장은 신구약 성경의 핵심을 이루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과 그의 백성들의 책임을 아름답게 조화시켜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절하)에는 세 가지 말씀이 담겨 있다.

(1) ‘두려워 말라’는 가장 중요한 언약문구이다.

(2) ‘나는 너의 방패요’와 ‘나는 너의 상급’이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자기 소개 형식으로 주어지고 있다. ‘방패’는 바로 앞 장의 이야기와 이 장을 밀접하게 연결시켜 주고 있다. 앞에서 멜기세덱은 아브람에게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miggen)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말하였다(창14:20). 이제 하나님께서 멜기세덱의 축복을 아브람에게 확증해 주신다. 즉, “이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내가 너를 방패처럼 보호해 줄 것이다.” 언약백성을 보호하신다는 보호의 약속이다.

(3)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은 소돔 왕이 주는 상급을 거절하였고, 오직 그의 동맹군들 만이 ‘분깃’을 취하였다(14:24). 여기에서 ‘분깃’은 ‘용병의 급료’이다(Kaiser, 사40:10; 62:11; 겔29:19).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지극히 큰 분깃’이 되시겠다고 약속해 주신다. 오직 하나님 만이 아브람에게 참된 분깃이 되신다(창17:8; 신10:21).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는 진술은 몇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두려워 하는가?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무슨 ‘상급’을 주시려고 하는가? 14장의 전쟁이 아직도 위협으로 남아 있는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아브람이 하나님에게 말한 것이 기록된다(2절). 이 때까지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순종하였다. 15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질문을 던진다. 사실 아브라함은 이 장에서 너무 많은 문제를 던지고 있기 때문에 그가 참으로 ‘믿음 가운데 있는지’ 혹은 ‘그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지 않는지’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창세기의 저자는 그의 흔들림이 없는 신앙을 강조해 주고 있다(15:6).

(1)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2절). " 씨"에 대한 질문이다.

이 질문은 아브람의 두려움을 잘 드러낸다. 사라의 불임은 이미 언급되었고, 하나님은 앞에서 아브람에게 세 번이나 큰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12:2, 7; 13:16). 그러나 아직까지 그에게는 ‘자식이 없다’ (레 20:20-32; 렘 22:30). 여기에서 ‘무자하다’는 ‘자식 없이 가다’인데, 즉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라는 뜻이다(시39:13).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에 대한 위기감을 표명하고 있다.

(2)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 입니다"는 이 구절은  14장에서 아브라함이 다메섹 근처에서 승리한 것과 연결시키며, 14장의 사건과 15장 사건 배후에 있는 주제를 묶어준다. 15장은 아브라함이 다메섹의 힘을 통해서가 아니라, 선택된 ‘후손’에 대해 믿음을 갖는 것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강조한다(사 7:4-9).

(3)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않았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3절).

 

아브라함의 질문은 이 장의 중심 문제에 대한 배경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약속 이행을 늦추고 계신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같은 문제를 직면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이 약속된 축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직전에 놓여있다. 약속이 무(無)로 돌아가는 위기에 처하였다(렘25:11). 그러나 예레미야가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면서도, 궁극적 축복을 약속한다. 이방 땅에서의 포로 기간은 제한이 있다(렘25:12). 다니엘은 바로 이 약속을 기다린다(9:2). 이와 같이 창세기 15장은 조상에게 준 약속을 기다리는 청중들에게 말해준다. 그들은 ‘주를 기다리는 자들’(사 40:31)이다. 그들은 “그들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이다(합 2:4).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약속이 이루어지길 기다려야 했다(히 11:13; 벧후 3:4, 9).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4절). "그 사람이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 사실을 각인시켜 주기 위하여,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신다.’ 때는 밤이었다. 하늘에는 마치 은하수의 별들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속으로 씨름하고 있는 ‘아브람’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고 말씀하신다. 하늘을 바라보고, 찬란하게 빛나는 별을 보게하시면서,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으리라”고 말씀하여 주신다. 이 표현은 창세기 14:22에 있는 아브라함 자신의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상급에 대한 희망이 ‘하늘과 땅의 창조주’에 있다고 소돔 왕에게 말하였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이 말을 이어 받으시면서, “만약에 내가 하늘에 있는 저 수많은 별들을 만들었다면, 너의 후손도 그만큼 많이 만들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별 같이 많을 것이다”라는 약속은 오경에서 여러 번 반복되어 나타난다(이삭, 22:17; 26:4; 모세, 출 32:13. 신명기 1:10; 28:62; 민수기 24:17).

 

“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주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아브람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계산과 판단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음을 믿었다”라고 평가한다.

구약성경에서 ‘그가 믿었다’는 “어떤 사람을 의지한다. 상대방의 메시지에 대해 신임하고, 그것이 진실이고 믿을 수 있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적극적인 뜻으로 나오는 경우가 드물며, 대부분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 사용된다. 왜냐하면, 위기 상황에서 믿음과 불신이 구별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사 7:9; 시 78:22, 32). 

      

‘의’라는 단어는 오경에서 의는 대부분 인간의 활동에 적용된다(창18:19; 신24:13; 창 6:9; 7:1; 18:23ff, 28; 20:4; 출9:27; 23:7f; 신 4:8; 16:19; 25:1). 창세기 18장에서는 ‘의인’이 ‘악인’과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께서 악인과 의인을 함께 멸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은 소돔을 위해 기도한다. 아비멜렉도 같은 입장을 갖고 있다(창20:4). 노아는 의롭기 때문에 홍수에서 건짐을 받았다(6:9; 7:1). 일반적으로 ‘의’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바른 행동’으로 정의된다(겔 18:5). 하나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하신다 (신 32:4; 시 7:9, 11). 그러나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의를 행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믿음이 올바른 행동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직 구약성경 중에서 오직 여기에서만 믿음이 의로 여겨지고 있다.

 

요약하자면, 아브람은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정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을 때, 그것을 믿었다. 이 믿음을 하나님은 법적으로 ‘의로운 행동’으로 여겨주신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이신칭의의 기본 개념이다.

 

15:6은 7절에서 나타날 내용에 대한 배경이다. 하나님은 이제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려고 한다. 이후의 이야기에서 아브람과 그의 후손의 미래가 제시된다(15:7-21). ‘언약’이나 ‘순종’이 그를 의롭다고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믿음으로 그는 의롭다하심을 받는다. 그가 의롭다함을 받은 후,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언약으로 들어간다.

       

아브라함은 먼 미래에 대한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위로를 얻는다. 이 환상은 아브라함에게 보다, 독자들에게 확신을 준다. 독자들은 이 환상이 모세 시대에 이루어졌음을 안다. 따라서 환상과 그 성취는 아브람에게 주신 예언적 말씀을 확증해 준다. 그는 참 환상을 받았다. 아브람은 참된 선지자이다(신 18:22; 렘 27-29). 그는 예레미야처럼(렘 30:3 이하), 노예생활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것을 바라본다(창 15:14). 이런 빛 속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첫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렘 30:10).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7절)는 형식은 언약 체결에 있어서 ‘서문’(prologue)을 이루어준다. 이 형식은 바로 시내 산 언약의 서문인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로라"(출 20:2; 신 5:6)와 기본 형식에서 일치하고 있다. 단지 ‘애굽 땅’이 ‘갈대아 우르’로 대치되었을 뿐이다. 여기에서 ‘갈대아 우르’는 창세기 11:28, 31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아브람이 첫 출발을 하던 지점을 되돌아 보게하고 있다. 시내산 언약은 애굽에서의 구원을 되돌아 보는 것처럼(출 20:2), 아브라함 언약은 ‘바벨론으로부터의 구원’을 되돌아 보고 있다. 이 형식은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갔을 때, 새로운 의미를 띄게 되었을 것이다.

이 구절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여호와’라고 부르는 4구절 중 하나이다. 이 이름이 여기에 사용된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낸 것과 후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낸 것 사이의 연관성을 강화시켜 준다. 이것은 11-18절에 명백히 나타난다.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8절). 아브람은 그가 믿고 있는 것을 알고 싶었다. 따라서 여기에서 믿음의 표적을 구하고 있다. 그가 믿음의 확인을 구하는 것은 불신앙이 아니며, 6절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다(삿 6:36-40; 왕하 20:8-11). 표적을 구하거나 거절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믿음의 태도로 구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 7:10-14).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9절). 하나님은 언약을 맺는 데 있어서, 여러 짐승들을 준비하게 하신다. 이 짐승들은 제사음식이라기 보다(레 9:2, 3), 언약 체결을 위한 제물로 보아야 한다. 즉, 언약 체결에서는 짐승을 죽이는 것은 ‘언약 파기는 죽음을 내포하는’ 맹세 의식과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짐승들을 그냥 죽이지 않고,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있다”(10절). 비둘기를 둘로 쪼개지 않는 것은 그것이 너무 작았기 때문일 것이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2절)에는, ‘깊은 잠’과 ‘두려움’, ‘어둠’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이제 아브람은 하나님을 두 번째 만나게 되며, 이 때 그는 ‘깊은 잠’에 빠지게 된다. ‘깊은 잠’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직전의 상태’로 나타나기도 하며 (욥 4:13; 33:15; 단8:18; 10:9),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못하는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사29:10; 잠 19:15[게으름]). 여기에서는 긍정적인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이 단어는 ‘하와가 탄생하기 직전에 깊은 잠에 빠진 아담의 모습’을 상기시켜준다(창2:21-22). “그렇지만, 이 잠에서는 여인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 하다가 큰 재물을 얻고 나오는” 계시가 주어지고 있다.

‘두려움’(창15:12; 신32:25; 에스라3:3; 욥39:20; 41:14; 사 33:18)과 ‘캄캄함’(시82:5; 139:12; 사8:22) 역시 무서운 하나님의 강림을 준비해 주고 있다(사 29:10; 출 10:21, 22; 14:20; 15:16; 23:27; 신 4:11; 수 2:9). 이것은 출애굽과 시내 산 계시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아브람에게 임한, 캄캄함과 두려움과 뒤에 나오는 ‘타는 횃불’(창 15:12, 17)은 시내 산 신현을 말해준다(출19:18; 20:18; 신 4:11). 저자가 여기에서 시내 산 언약체결을 가져온 것은 아브람 언약과 시내 산 언약을 밀접하게 연결시키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행하신 것은 족장 아브람에게 행하신 것과 이어지며, 이 둘은 하나님의 크신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출애굽과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 뿐 아니라 그의 신실하심을 상기시킨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객이 되고, 400년간 괴롭힘을 당하다가, 해방될 것을 말씀해 주신다. 여기에서 400년은 어림수로서, ‘4대’를 가리킨다(16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로 430년간 이집트에서 지내게 된다(출12:40-41; 행7:6; 13:20). 그 당시 한 세대는 약 100년으로 산정되었기 때문에, ‘4대, 혹은 400년’이라고 말한다. 혹은 여기의 ‘4와 400’은 상징적인 숫자로서 ‘전체성’을 뜻할 수 있다(창23:2, ‘네 도시’, 23:15, ‘400세겔). 어쨌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며 사는 데에는 고난의 세월을 인내하며 잘 감당하여야 했다(창6:3; 벧후3:8-10).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이집트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출6:6; 7:4; 12:12),에서 ‘출애굽’이라는 언급이 분명해진다(15:14, ‘이끌고 나오리라,’ and after this they will go out). 이리하여, 아브라함 언약은 그 출발에 있어서, 이미 시내 산 언약을 바라보고 있다. 이 두 언약은 분리된 언약이 아니며, 밀접한 연속성 속에서 주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이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라는 말씀은 그들이 이집트인에게 종살이한 대가로 여겨질 수 있다(출12:35-39).        

아브람은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다’(15절). 여기에서 ‘장수하다’는 ‘백발’을 뜻한다. 왜냐하면, 큰 슬픔 없이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창42:38; 44:29; 왕상2:6, 9).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에게 주신 약속을 끝까지 지키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아모리 족속의 죄가 다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 ‘열 족속’(창15:19-21)에 대한 ‘제유법’(synecdoche)으로 여겨진다(Waltke, 244).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실 때, 그의 도덕적 통치의 기준을 따라 역사하신다. 따라서 열국의 죄가 가득 찰 때까지 그들을 땅에서 몰아내지 않으실 것이다(레18:24-28; 20:23).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에도, 의인 10명이 없는 것을 먼저 확인하신다.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에서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은 무서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해준다. 이 영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함께하는 영상을 예시해준다. ‘구름,연기’와 ‘불’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출19:18; 20:5; 24:17; 34:5-7; 신4:11, 24, 33).

그러나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시는 데’ 있다.

언약 체결은 상호 동등한 관계에서 맺는 언약(parity covenant)과 주종관계에서 맺는 언약(suzerainty covenants)이라는 두 가지 형식을 갖고 있었다. 두 번째 형식의 언약 체결에서 마지막 맹세 의식은 ‘낮은 자가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감으로써’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그가 주인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을 때, 쪼갠 고기처럼 생명을 잃을 것을 상징하기 위함이었다(렘34:18-20을 보라). 바로 이점 때문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무조건적, 일방적, 은혜 언약’이라고 부른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15절) 말씀에 ‘언약을 세웠다’(karat berit)라는 구절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창세기 15장은 전형적인 언약체결 장면을 담고 있지 않지만(출19-24), 언약체결과 연관된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을 모두 담고 있다. 즉, (1) ‘언약을 세우다’는 형식(18절), (2) 자손(5절)과 땅의 약속(18-21절), (3) 제물준비(9-10절)와 맹세의식(17절), (4) 하나님의 강림(12절) 등의 핵심 요소들이 여기에 모두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본 장을 ‘아브라함 언약 체결 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은 기본적으로 약속형이다. 아브라함에게 땅의 경계를 확정하여 선물로 주신다. 이리하여 창세기 저자는 땅의 약속 주제를 다시 가져온다. 언약의 땅에 대한 지리적 경계를 묘사한다. 여기에 있는 땅의 경계는 역사적이라기 보다, 이상적인 경계로 알려져 있다. ‘나일 강’은 이집트에 있는 ‘나일 강’이라기 보다, ‘나일 강 동쪽 끝 지류’를 가리키는 것 같다(Lake Sironbis). 그렇지만, 솔로몬의 전성기 때에도, 이스라엘의 경계는 여기에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다윗과 솔로몬의 황금 시대에 ‘유프라테스’까지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영향을 미쳤지만(삼하8:1), 이곳을 지배하지는 못하였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경계 너머에 있는 백성들을 몰아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런 점에서 여기의 경계는 ‘이상적인 경계’이며, 영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이해된다.

 

 

 

 

 

 

 

 

 

6장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

 

 

1.시내산언약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 들어가는 것은 출애굽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애굽 땅에서의 시간들은 이스라엘이 숫자에 있어서 민족으로 형성되는 것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가는 것과 출애굽은 그 자체가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라 더 중요한 목적인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을 언약이라는 최종 목적을 위한 과정이나 수단과 같은 것이다. 출애굽기의 19장 이전의 사건들은 모두 시내산 사건을 정점으로 집중된다. 19장 이전의 본문들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시내산에서의 언약체결이 완벽히 준비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19장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심판하시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출애굽의 역사가 진행될수록 이스라엘의 범죄가 쌓여 감을 볼 수 있다. 결국 17장에 이르러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심각한 범죄에까지 이르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죄악들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를 찾아볼 수 없다.  이스라엘의 죄악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시내산 언약을 기점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시내산 언약 본문이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공적인 관계형성이 이루어진 후에 나타남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여러가지 준비를 거쳐서 드디어 언약을 맺을 수 있도록 예비된 현장인 시내산에 도착하였다.(출19장) 이 사건의 중요성을 나타내기 위해 저자는 이스라엘이 이 산에 도착한 사실을 강조하여 두 번이나 언급한다.(19:1,2) 먼저는 애굽에서 시내산까지의 시간과 여정을(19:1), 두 번째는 바로 앞의 이스라엘의 출발점인 르비딤에서 시내산까지의 여정을 표현한다. 또 모세가 하나님의 별도의 명령 없이도 주저없이 시내산에 올라간 것은(19:3)이미 이 산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예견이 있었기 때문이다.(3:12)

  19장의 모든 내용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을 맺는 것을 일관성 있게 묘사한다. 이 가운데 어떤 한 부분도 언약을 맺는 일에 불필요한 것도 없고, 또 중복된 부분도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언약 당사자(출19:4)

4절의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출애굽 시킨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신 행동에 근거하여서 이스라엘의 현재가 있게 된 것을 말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역사적인 관계들은 3절에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야곱 족속”,“이스라엘 자손”) 이것으로 하나님은 족장들에게 맺은 언약을 이제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을 맺으심으로 성취하고 계심을 나타내신다.

 

 

2)언약 당사자의 관계(출19:5-6)

언약 당사자들인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있어서 시내산언약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쓰여졌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어떤 관계로 서는가에 대한 서술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선언에 있어서 근본적인 언약관계 정의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세가지로 표현된다.

 

첫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배로운 자(백성)가 될 것이다.(19:5b) 이러한 가치는 그 대상인 이스라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와의 특별한 관계 속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지므로 그런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엄청난 권위와 영광을 가지신 분으로 언약의 상대방을 스스로 택할 권리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바로 그런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개념이 첫 번째 정의 안에 있는 것이다.

 

둘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다.(19:6a) 여기서 의도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하는 역할(functionn)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는 가장 높은 위치(position)fm 차지하는 것이다. 이 말은 제사장이 왕과 같은 위치에 있거나 거의 그와 버금가는 지위를 차지하던 고대의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셋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19:6b) 이 표현은 ‘거룩하다(qadosh)'는 히브리 단어의 원초적인 의미인 ’구분하다‘는 뜻에서 유래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당사자로 선택함을 받아 구분된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언약의 당사자들의 관계에 대한 정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개념 속에서 강조되어진다. 첫 번째 정의를 두 번째, 세 번째 정의가 보충하는 형식을 통해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표현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하신 가장 근본적인 언약적 선포는 첫 번째 약속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하여 가장 귀중한 소유가 될 것이다.    

 

3)중재자 모세(출19:7-8)

모세는 하나님이 제시한 약속(19:5-6)을 가지고 백성에게 내려갔고, 백성은 그것에 대하여 화답하였다.(19:7-8) 그리고 다시 모세는 그 말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가고(19:8), 하나님은 그런 백성을 향하여 다음의 행동을 명령하신다.(19:10 이하) 그 이후에 모세가 계속 산에 오르내리면서 언약당사자를 중재하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모세만이 하나님 앞에 서있을 수 있었으며(19:9), 이것으로 인해 모세가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게 된다.

 

4)언약 당사자 대면(출19:9-25)

언약은 중재자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에는 언약 당사자들이 직접 대면함으로 성사되어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온 백성 앞에 강림하시는(19:11,16) 장면은 이스라엘이 가졌던 가장 원초적이고 놀라운 것으로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늘 회상되고 기억되었다. 시편(50,24편)과 선지서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다. 그러나 이 현상을 보통 신현(神現, theophany)으로만 해석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19장 10-25절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본문은 언약의 당사자끼리의 직접대면을 나타낸다.

시편과 선지서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언약적인 만남의 하나님을 근본적으로 다시 회상하는 것이고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상기하는 효과를 가진다. 즉 이스라엘이 범죄하였을 경우에 있어 이스라엘이 엄위롭게 임재하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림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이 원초적으로 만난 하나님의 임재를 통한 심판을 각오해야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위태로울 때에 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하여 엄위롭게 임재하실 것을 나타내신다. 

 

5)언약조건(1) : (출20:1-17)

19:10-25의 본문을 ‘단순한 신현’으로 해석하는 견해는 그 다음 구절인 십계명과의 관계에 있어 아무런 설명을 할 수 없다. 이 본문은 단순히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내려오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언약관계를 만들기 위하여 당사자들의 직접 만나는 장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단순한 신현’이 아니라 ‘언약관계조건의 규정’을 위한 신현으로 이해해야되며, 이제 백성들은 언약의 당사자인 하나님이 하시는 직접적인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19장에서 언약의 당사자들이 만나서 언약의 조건을 결정한 것 가운데 가장 처음 것이 바로 20장의 십계명으로 이해한다면 십계명은 이스라엘이 따라야할 하나님이 제시한 언약적인 조건이다. 20장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지킬 언약적인 조건이 명시되어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나 이는 이미 19:4절에 암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자신의 유일한 언약의 대상으로서 절대적인 보호와 섭리로 역사를 통하여 인도하신 것이다. 19장 5절에 표현된 “(보배로운) 소유물”로 이스라엘을 삼으신 것 자체가 이미 이스라엘이 누리는 절대적인 권리임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다.

 

십계명에는 두가지 내용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규범(1-4계명)이고, 또하나는 언약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규범이다.(5-10계명) 전자는 후자의 기초가 되며, 후자는 전자가 없이는 무의미하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해져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온전해진다. 그리고 이 두 내용은 앞으로 중재자를 통하여 줄 언약조건의 주제들 속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6)언약조건(2) : 중재자를 통하여 준 조건․규범(출21-23장)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나머지 언약의 세부적인 부분들(21-23장)을 중재자인 모세가 전달해줄 것을 청원하였고 이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이것은 중재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주어진 언약의 조건인 것이다. 이것은 조약이나 관계를 맺을 때에 원칙적인 사항만을 당사자들이 정하고 세부적인 사항은 중재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제시한다. 이 본문은 20장과 언약의 조건이라는 주제 하에 연속성을 가진다.

 

7)언약비준예식(출24:3-8)

이제 백성들은 언약의 근본적인 조건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고, 또 언약의 세부적인 조건들을 중재자 모세를 통하여 간접으로 들었다.(24:3) 이어서 나오는 본문은 언약비준예식을 보여준다. 두 번의 예식이 나오는데 이 두 예식은 내용과 형식면에서 명확하게 구별된다. 전자(24:3-8)는 어떤 공식적인 관계가 수립되는 것, 즉 비준예식을 나타내고 후자(24:9-11)는 그 관계가 합법적으로 수립된 이후에 가지는 비준 축하 예식이다. 따라서 이 두 예식을 한 사건(언약수립) 속에 연속된 두 국면, 즉 언약비준예식 자체(24:3-8)와 언약비준 축하연회(24:9-11)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이스라엘은 공적으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언약을 지킬 때에 이스라엘에게 축복이 임할 것이며 깨어버릴 때에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따를 것이다. 시내산 언약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최초의 언약이라는 점에서 축복과 저주의 요소가 명확하게 표현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역사가 진행될수록 그러한 부분들은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8)피로연(출24:9-11)

시내산언약의 마지막 본문은 언약비준을 축하하는 축제이다.(24:9-11) 이제 그 엄숙한 순간이 지나가면 긴장이 완화되고 그렇게 어렵게 해서 완성된 관계를 축하하는 기쁨의 시간이 찾아온다. 이 상태는 보통 관계에 있어 ‘샬롬’의 상태로 표현되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24:11) 외형적인 표시로 드러난다. 이 본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체결된 언약의 축하 피로연’으로 정의할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 두가지 요소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체결된 언약에 대한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의 이스라엘 하나님에 대한 알현과 경배, 둘째로 언약적인 공동 식사의 두 요소로 볼 수 있다.

이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이스라엘의 대표들인 “존귀한 자”들이 하나님을 보고 만날 때 죽거나 해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과의 언약이 완성되었으니 이스라엘의 대표들은 언약의 당사자인 하나님과 축제를 벌이는 것이 허용되었다. 첫 만남은 긴장되고 위험한 것이었으나(19:10-25), 둘째 만남은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공적인 언약 관계는 형성되었다.

 

 

 

2.모압언약

 

 

신명기 29:1을 모압언약의 결어로서 이해할 때, 이 절 가운데 표현된 두 언약인 시내산언약(호렙언약)과 모압언약의 관련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전제되어 있는 것은

첫째 언약인 시내산언약의 신적인 권위이다. 첫째언약과 둘째 언약의 동질성을 드러냄으로서 둘째 언약의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언약, 모압언약의 새로운 변화는 ‘너희가 요단강을 건너 갈 때’(11:30, 27:10), ‘에발과 그리심’(11:29, 27:12-13), 그리고 ‘장로와 레위인 제사장들’(27:1,11)에 의하여 되어진다는 것이다. 현재 모세와 함께 모압에서 언약을 맺는 기초를 세우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래에 건너고 나서 미완성된 언약을 수행해야 한다. 이것은 과거의 사건 즉 첫 언약의 ‘현재화’나 ‘현실화’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언약을 갱신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모압언약의 도입부는 1:5-4:43이며 이 거대한 도입부에 대한 결어는 4:44,45이다. 4:45-49까지는 모압언약의 시간과 장소에 대한 언급이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4:45,46), ‘요단강 저편’(4:46,47,49). 신명기의 현재적인 상황은 사막여행 끝의 모압 땅인데, 이제 이스라엘의 가장 본래적인 출발점인 출애굽의 상황에 들어가서 거기서 일어났던 가장 중요한 사건에 기초하여 중대한 내용을 선포하려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신명기에서는 드물게 쓰는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러한 ‘시간일치’는 과거의 시내산에서의 사건의 본질이 여전히 현재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시간일치의 통일성은 5:2-3에서 호렙산에서 첫 언약에 참여한 세대와 현재 모압평원 위의 세대간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음을 나타낸 것과 일치한다. 결국 현재의 특수한 목적인 언약갱신을 위하여 모압평원 위의 현재의 상황은 근본적으로 호렙산(시내산)위의 상황과 다를바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1)언약관계 정의(신26:17-19)

26:17-19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선포된 언약관계 정의의 가장 명확한 형태를 읽는다. 동시에 여기서 ‘신명기의 심장부분’을 읽는다. 26:17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해서 선언하는 내용이며(“여호와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이 선언은 “우리는 다른 어떤 신도 우리의 신으로 삼지 않겠다”라는 의미를 포함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스라엘이 한 선언의 실제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제시하는 언약적인 조건에 순종하겠다는 것이다. 반면, 26:18-19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향해서 선언한 것(“너는 내 백성이다”)으로,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유익을 위하여 세가지 약속을 이행하실 것을 서약하신 것이다.(보배로운 백성, 지존자, 거룩한 나라) 

시내산언약에서는 언약관계에서 한 당사자의 입장에서만 이루어졌으나, 모압언약에서는 양 당사자의 입장이 다 반영된 것을 볼 수 있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도 신26:18-19이 출19:5-6을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중재자 모세를 통한 교섭(신5:1-6:4)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것을 모세가 명령하는 것이 5:1에 시작되었다가 자신의 말로 명령하는 것이 시작되는 것은 6:5이다. 이 과정을 통해 모세가 신적권위를 과정이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부분의 주요 관심사는 언약의 당사자가 아니라 중재자 모세이다. 5:4의 관심사는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무엇을 말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했느냐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나는 방식의 관건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당사자인 이스라엘을 만나시는 과정 속에서 모세를 택하시고 그에게 신적 권위를 부여하신다.

 

3)언약당사자의 만남(신5:4-5)과 언약조건(신5장-26장)

모압언약 역시 시내산언약의 전례를 충실히 따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언약 당사자인 하나님과 백성들은 직접 대면함으로 언약이 체결되어진다. 5:5는 모세가 언약의 중재자요 언약법의 교사로서 백성에 의해서 요구되었고 하나님에 의해서 인준된 사실이 다음의 단락에서 취급되는 준비를 한다. 이런 구조를 통하여 십계명(신5장)―주요법설교(신6-11장)―모압언약 세부법(신12-26장)의 연관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며, 십계명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이지만 그 이후의 것은 모세를 통해서 주신 것이다.

 

 

      언약조건(1) : 언약 당사자가 직접 준 조건․규범(신5:6-22)

      언약조건(2) : 중재자를 통하여 준 조건․규범(신6-26장)

 

 

하나님의 언약적인 약속과 백성의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신명기에서 볼 수 있는 두가지 핵심주제이다. 다시말하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관계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오늘날’ 모압에서 근본적으로 선언되었다.(26:18-19)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의 파트너로서 이스라엘이 특혜를 누리는 위치는 오직 하나님이 제시하는 언약의 조건에 머물 때만 유지되었다. 그러므로 언약관계는 한편으로 이미 ‘성취된’ 것으로서(27:9-10) 언약조건을 지킬 권면의 근거가 된다. 또 한편으로 언약관계는 ‘조건적인’ 것으로서(28:1,9) 언약조건의 계속적인 수행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언약조건에 대한 결과의 내용들이 26:16-28:69의 본문에 나타나 있는데 모압/현재와 세겜/미래의 언약갱신제사로 구분되어 관련되어진다.

 

이 본문들의 주제는 축복과 저주, 서약 등이 포함된 언약갱신제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본문에서 언약갱신이 두 장소(모압/세겜), 두 시간대(현재/미래)에서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본문이 가지는 의도는 언약의 중재자 모세가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기 전에 죽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결코 모세와 같은 권위를 가지지 못할 것이며, 그러므로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는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고 나서 견고하게 세우기 위하여 언약갱신을 죽기 전에 준비하여야 했다.

또한 이스라엘의 세대교체가 언약갱신의 또다른 이유가 되기도 한다. 특히 5:2-3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시내산언약의 출애굽 1세대와 현재 모압언약의 출애굽 2세대를 동일시하는 것은 대표적인 것이다. 그리고 모압언약의 실제적인 언약갱신제의를 서술하고 나서 29:11-15에서 다시 현재의 언약이 미래의 세대를 위한 것임을 말한다. 즉 과거와 현재의 시간일치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일치가 신명기 내에서 일어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본문은 요단강이라는 자연적인 경계로 인해 두 그룹으로 나누어질 것을 전제로 한다. 이 경계로 말미암아 생긴 긴장에 대해서 보고하는 수 22장의 경우와 같은 사건이 하나님나라의 통일성을 방해할 수 있다. 그래서 언약갱신을 요단 동편과 서편의 두 장소에서 나누어 행하게 되었고 이로서 미래의 통일성이 보장되었다.

이러한 본문의 특성들은 모압언약이 최초의 언약이 아닌 갱신되는 언약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명기의 중요한 과제는 이렇게 시간적으로, 장소적으로 차이가 난 가운데 형성되어져야 할 언약갱신이 사실상 하나라는 것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두 언약이 아니라 ‘두 장소/두 시간대’에서 일어나는 한 언약‘임을 드러난다.

 

모압에서 한 일 : 1. 언약법(5-26)  2. 언약관계의 선언(26:17-19)

세겜에서 할 일 : 1. 언약제사, 공동식사, 언약문서작성(27:1-8)

                 2. 축복과 저주의 선언(28:3-6, 16-19)

                 3. 12서약(27:15-26) 

 

 

 

4)언약비준예식(신27-28장)

모압과 세겜에서의 언약갱신 예식은 다음의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언약문서의 작성(27:2-4,8), 언약체결제의(27:5-7), 언약의 공동식사(27:7), 축복과 저주의 선포(27:11-13, 28:3-6, 16-19), 서약(27:14-26)

 

 

3.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의 비교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은 각각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체결과 언약갱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다. 두 본문은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같은 신학적 구조를 가지며, 동일한 언약형성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두 언약은 서로를 보충하며 증명한다. 여기에서는 각 본문의 통일성과 주제를 중심으로 비교하되, 두 본문의 연속성과 차이점을 하나님의 ‘점진적인 계시’라는 관점에 살펴볼 것이다.

 

 

1. 언약관계의 정의(출19:3-8/신26:17-19)

 

1)백성이 여호와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언약체결의 첫 번째 관건은 언약 당사자가 쌍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즉 서로의 관계 정의를 밝히는 것이다. 여호와 편에서는 이스라엘은 언약의 당사자로서 당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이고 백성은 여호와는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시내산언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부분에서 모압언약과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시내산언약은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다. 대신에 그것을 전제로 하고 필수적으로 따라야하는 언약법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출19:5)

따라서 이러한 외형적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양 언약의 실제적인 내용은 동일하다. 출애굽기의 시내산언약이 언약의 한 당사자인 여호와의 관점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이고, 이것은 고대 근동의 불평등조약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기서 쌍방간의 선포 대신에 약한 당사자인 이스라엘의 선포의 실제적인 의미, 즉 이스라엘의 순종에 관심을 둔 것이다.

 

2)여호와는 백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두 언약의 유사성 가운데 가장 특이한 부분이 여호와가 이스라엘과 특별한 관계에 들어가는데 이것이 세가지 약속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시내산언약 : 출19:5-6 ― “보배로운 자․제사장나라․거룩한 나라”

모압언약 : 신26:18-19 ― “보배로운 백성․지존자․거룩한 나라”

 

이 세 약속은 실제로 세가지 다른 종류의 약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약속, 즉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보배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약속의 내용은 첫 번째 약속을 보충 설명하는 것이다. 또한 두 번째 약속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데(제사장나라/지존자), 시내산언약의 ‘제사장나라’는 기능적인 의미(제사장의 역할)가 아니라 비유적인 의미(특권, 위치)를 가지는 것으로 이런 의미에서 모압언약의 ‘지존자’의 의미와 유사하다. 이렇게 두 언약의 약속들은 사실상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약속들은 하나의 주제를 표현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두 약속 사이에 역사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모압언약의 약속들은 철저히 시내산언약의 약속들을 의식하고 있고 그것에 근거하여서 모압언약의 문맥 속에서 재정리하고 있다.

 

3)언약관계 정의의 역사적인 관련성과 본문 속에서의 위치

역사적인 관련성을 생각할 때 쌍방의 선언으로 된 모압언약이 실제적으로 표현된 시내언약 보다 후대의 것이고 시내산언약의 표현에 의존하여서 신명기의 신학적인 목적에 맞게 조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시내산언약의 표현은 고대근동의 현실적인 표현에 가깝고 모압언약의 표현은 훨씬 더 신학적으로 정리되어서 원리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또한 시내산언약과는 달리 모압언약에서 언약관계정의(신26:17-19)를 모압언약본문의 후반부에 위치한 것을 볼 때, 시내산언약은 ‘시간적 순서’로 표현하였으나 모압언약은 ‘신학적 순서’로 표현되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출19:3-8이 현실 그대로의 표현이라면, 신26:17-19은 후대의 것으로 출애굽기를 의존하고 그것을 새롭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언약 당사자들의 직접 만남(출19:9-25/신5)

 

출19:16-19은 단순한 신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당사자들의 직접만남을 의미한다. 언약관계를 공적으로 수립하기 위하여 언약당사자들이 대면하는 것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언약당사자로서의 연약함 때문에 중재자로서의 모세가 이 만남을 위하여 준비하게 된다. 그러나 모압언약에서는 백성들이 그 만남을 준비하는 과정이 생략되었다. 그러나 신5:4에 이 만남이 명확하게 표현되었으며(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여호와께서 너희들에게 말씀하셨느니라), 이 만남의 현장을 짧게 보고하고 있는 것은 모압언약의 보고가 시내산언약의 보고의 압축형이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오심에 대한 백성의 즉각적인 반응은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백성들은 중재자를 요구하게 된다. 이것은 또한 시내산언약 본문에 비하여 모압언약 본문에 새로운 요소인 ‘주요법에 의한 모세의 설교문’(신6-11장)이 도입되었다. 모압언약에서의 새로운 요소는 백성들이 언약조건에 순종하면 누리게될 번영(신5:29,33, 6:3)이었다. 이것은 모압언약에서 법에 대한 순종이 강조된 것과 연관되며 신44:45-28:68에 많이 나오는 축복에 대한 암시와 연관된다.

 

시내산언약의 법체계 : 1.십계명(출20장)  2. 시내산언약 세부법(21-23장)

모압언약의 법체계 : 1. 십계명(신5장)  2. 주요법에 의한 모세의 설교(신6-11장)  3. 모압언약 세부법(신12-26장)

 

모압언약에서 모세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일 뿐 아니라(신5:28) 그것을 가르치는 자로서 서게 된다.(신5:31, 6:1) 양 본문의 연관성을 고려하면 모든 것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논리적이며 조직적이며, 새로운 요소인 ‘주요법에 의한 설교’(신6-11장)가 있는 모압언약 본문은 시내산언약 본문의 묘사를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3. 하나님의 법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모세의 권위(출19:9,20, 20:18-21/신5:23-6:3)

 

중재자로서의 모세의 권위가 준비되어지는 과정은 시내산언약에 잘나타나 있다. 하나님에 의해서 임명되었을 뿐 아니라 백성들에 의해서도 요구된 것이다.(출19:19-20:21)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미리 예비하신 과정을 통해서 된 것이다. 모압언약에서는 이러한 준비과정은 보이지 않지만, 모세의 중재자로서의 위치는 십계명이 언급되기 전에 이미 표현된 것을 볼 수 있다.(신5:5)

  모압언약에서 준비과정은 생략되었지만, 언약법이 하나님에 의해서 직접 주어지던 것이 중재자 모세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주어지는 과정은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중재자로서의 신적 권위를 주시게 된다. 출20:19, 24:3에서 모세는 ‘전하는’ 혹은 ‘선포하는’ 역할을 하는데 비해, 신5:31, 6:1에서는 ‘가르치는’ 기능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모세의 권면적 말과, 법에 순종할 경우 축복이 주어질 것도 추가되었다. 이것들은 모세가 받은 법의 교사로서의 사명과 부합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모세의 권위에 대해 모압언약은 시내산언약을 자세히 설명하고 논리적으로 확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4.언약조건:십계명(출20:1-17/신5:6-22)․세부법(출20:33-23:19/신6:4-11:25, 12:1, 26:15)

 

두 언약에 있어 이 부분에 관한 공통점은 십계명이 인용상태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출애굽기에서 십계명의 우선성에 연관된다. 시내산언약에서 십계명의 우선성은 출24:3-8의 법적인 용어의 사용을 통하여 나타났다. 즉 ‘여호와의 모든 말씀’(출2:43) 자체는 십계명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하나님이 직접, 간접으로 주신 모든 말씀을 가르킨다. 모압언약에서도 유사한 현상을 발견한다. 십계명목록 뒤에 신5:22에서 “더이상 추가하지 않으리라”란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십계명의 완결성을 나타낸다. 이것은 먼저 하나님이 직접 주신 언약조건으로서 십계명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신명기에서 주요법을 통한 모세의 긴 설교(신6-11장)가 있는 것으로 보아 신명기가 출애굽기를 의존하고 있으며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모압언약에만 있는 주요법을 통한 모세의 긴 설교는 모세가 맡게된 ‘교사’로서의 역할과 직결된다. 이 주요법에 의한 모세의 설교는 십계명 중에서 1계명에 기초한 것이며 신명기 세부법(신12-26장)도 십계명을 따라서 정리된 것이라면 십계명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는 모압언약이 시내산언약을 모체로 발전된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5.언약비준예식(출24:1-11/신27, 28:3-6, 16-19), 축복과 저주(출23:20-33/신11:8-28, 28장)

 

1)언약문서의 기록(출24:3,8/신27:2-4,8)

모압언약에서 동일한 목적을 가진 행동이 시내산언약에 비해서 길게 묘사되었다. 그러나 모압언약에서 차이나는 점은 문서가 쓰여질 재료(‘거대한 돌’)가 명시되었고, 기록에 대한 세밀한 준비가 언급되었다는 것이다. 이 차이는 모압언약의 신학적인 주제인 언약법에 대한 순종의 강조와 관련된다.

 

2)언약의 증인(증거물, 출24:4/신4:26, 30:19, 31:28, 32:1)

모압언약의 ‘증인’에 대한 언급은 모압언약 본문(신4:45-28:69)안에서는 발견할 수 없고 오직 그 밖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서 돌이 아니라 다른 대상이 증인으로 역할한다.(하늘과 땅) 시내산언약에서도 증인(증거물)이 약하게 표현되었다. 모압언약에서는 예식부분이 많이 축약되었고 그 주에 증인(증거물)이 생략되었다. 이것은 신명기의 주제인 언약법에 대한 순종의 강조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모압언약에서도 거대한 돌이 세워졌지만 이것은 증거물로서가 아니라 언약법의 문서로 건립된 것이다.

 

3)언약체결제사(출24:4/신27:5-7)

두 언약에서 제사는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 혹은 여호수아가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책임있는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 그 중에서 그들의 대표들이 드리는 것이다. 두 언약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그룹은 둘이다. 시내산언약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젊은이들’과 ‘이스라엘 자손의 존귀한 자들’이고, 모압언약에서는 ‘장로들’과 ‘레위인 제사장들‘이다. 모압언약에서 장로들이 모세의 명령에 참가하는 것은(신27:1) 그들이 미래/세겜에서 언약체결 예식의 어떤 부분의 수행을 감당할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레위인 제사장들이 모세의 권면에 동참하는 것이(신27:9) 미래/세겜에서 그들이 어떤 부분을 수행할 것을 의미하는 것과 상응한다.(신27:11-13, 14-26)

 

4)축복과 저주(출23:20-33/신27:11-13,28:3-6,16-19)

시내산언약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축복과 저주의 균형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직 축복만을 볼 수 있는데 그것도 언약체결예식이 진행되기 전이다.(출23:20-33) 시내산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첫 번째 언약이기 때문에 아직 저주의 위협이 필요없다. 오직 피 뿌림을 통한 서약에 이스라엘이 참여해야하고 여기에 어느 정도 저주의 요소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언약체결예식에서의 피의 예식은 언약을 지킬 때의 생명을 의미하고, 언약을 지키지 않을 때의 죽음을 의미하여 죽음은 저주의 요소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내산언약에 있어서 저주에 대하여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었고 오직 격려하는 축복의 선언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반면 모압언약에는 두 종류의 축복과 저주가 나타나있다.

첫째는 모세가 현재의 모압에서 설교형태로 제시하는 축복과 저주(신11:8-28,28:1-2,7-15,20-68)이며, 두 번째는 레위인 제사장들이 미래의 세겜에서 선포할 축복과 저주(신11:29,27:11-13,28:3-6,16-19)이다. 이는 시내산언약과 명확한 차이를 보이는데, 이러한 차이는 시내산언약을 맺고 난 뒤 얼마 안되어 이스라엘이 황금송아지를 섬긴 것과 같은, 여러 가지 범죄로 언약을 파기하였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5)서약(출24:6-8/신27:14-26)

출24:6-8의 피의 제사가 공적인 관계형성에서는 서약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제단에 피를 뿌리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서약을 의미하고(출24:6), 백성에게 피를 뿌리는 것은 백성의 서약을 의미한다.(출24:8)

모압언약에서는 하나님 편에서의 서약을 볼 수 없다. 신27:15-26을 서약으로 간주한다면 이것은 백성 편에서의 서약인 것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점을 고려할 수 있는데 첫 번째로는 불평등 조약의 서약이 없는 경우이다. 대다수의 조약들에 약자이 서약에 참여하며 이 현상이 모압언약에서 발견될 수 있다. 두 번째는 모압언약에서는 언약의 특별한 면, 언약법의 준수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첫언약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강조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더 엄중히 언약법을 지킬 것을 강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6)결론―“이스라엘과의 언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점진적인 계시”

이 모든 것을 정리할 때 두 언약에 대한 각 본문의 역사적인 상관성을 정리하면 시내산언약 본문은 모압언약의 기본으로서 먼저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언약은 모든 내용에서 거의 대부분이 서로 일치한다. 전체적으로 시내산언약 본문은 보다 원초적인 표현을 쓰고 있고 연대기적으로 기술되었다. 그러나 모압언약 본문은 더 논리적이고 조직적이며 신학적으로 설득력 있게 기술되었다. 중요한 차이점은 하나는 첫 언약이고 다른 하나는 갱신된 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압언약은 시내산언약을 철저히 근거하고 있으며 그 위에 갱신되어야 할 언약의 내용들을 잘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선택하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작정하신 점진적인 계시의 발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7장 다윗 언약

 

구속사적 관점에서 성경을 볼 때, 사무엘하 7장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언약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다윗 왕조의 언약’은 ‘모든 질서의 시작에 관한 언약을 담고 있는 창조 언약’(창 1~2장), ‘창조 질서의 보존을 약속한 노아 언약’(창 8:20~17), ‘후손과 땅을 약속한 아브라함언약’(창 15:1~21), ‘계명의 언약인 시내산 언약’(출 19~24장)과 밀접하게 이어지며, 나아가 구약에서 마지막으로 구원사의 완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여 주신 ‘새 언약’(렘 31:31~34)으로 나아가는 주요 발판이 되기 때문이다.

 

다윗 언약이 창조 언약과 이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돌보고 다스리는 권세를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아담에게 주셨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왕권을 올바로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새 아담인 다윗에게 주님은 자신의 왕권을 이제 위임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어 다스리게 하셨기 때문이다(시 8, 72편).

 

다윗 언약이 보존언약인 노아 언약과 이어지는 것은,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이 계속되는 ‘무조건성’이 다윗 언약에서 ‘징계에도 불구하고 언약이 지속되는 무조건성’으로 이어질 뿐 아니라(삼하 7:14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전하시는 방편이 장차 오는 다윗 왕권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사야가 바라본 다윗의 후손 메시아 왕은 온 우주에 참된 평화와 질서를 가져오는 분으로 그려지고 있다(사 11:1~9).

 

다윗 언약이 약속의 언약인 아브라함 언약과 이어진 것은, 두 언약이 모두 ‘은혜 언약’으로서 중심 성격을 띨 뿐 아니라, 두 언약이 항상 언약의 당사자에게 ‘믿음’을 요청하고 있으며(창 15:6; 사 7:9하), 아브라함 언약의 중심 약속을 이루는 ‘후손’과 ‘땅’이 다윗 언약에서 ‘후손’과 ‘보좌’와 ‘땅’(시 2:8)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윗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의 틀 속에서 다윗의 왕권을 중심으로 움직여지는 언약의 체계이다. 달리 말하자면, 다윗 언약은 이전 언약을 폐기하지 않으며, 강화시키고 있다. 특히 이 언약에서 주님은 자신의 왕권을 다윗에게 위임하셔서, 다윗 왕을 통한 통치를 시작하셨다. 이제 주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다윗에게 순종하는 것이며, 다윗을 거스르는 것은 주님을 거스르는 것이 되었다. 다윗과 그의 후손들은 주님의 율법 아래에 있었으며, 주님께 순종하는 모범을 보여야 했다.

 

불행하게도 다윗 언약은 다윗 후손들의 범죄와 연약함으로 하나님께서 원래 목적하신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윗 왕조는 파산하며, 성전은 무너지고,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우리의 마음을 말씀과 성령으로 새롭게 하시는 새 언약의 은총을 바라보게 되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주된 언약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이루는 하나님의 계획으로서 통일성을 이루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사의 완성을 이루어 가는 주된 과정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무엘하 7장은 단지 이스라엘 왕국사에서 역사의 한 단면만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 전체의 맥을 이루는 중요한 장으로 자리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무엘하 7장은 사무엘상하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다. 사무엘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사시대가 끝나고, 왕정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시작되어, 다윗 왕조가 완전히 자리를 잡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특히 본서는 “한나의 기도”로 시작하고(삼상 2장), “다윗의 기도”로 마치는(삼하 23장) 수미일치의 형식으로 짜여져 있다. 한나의 기도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통한 주님의 통치를 바라보고 있는데(삼상 2:10), 다윗은 그의 유언에서 자신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이며(삼하 23:1),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웠다고 고백한다. 즉 사무엘상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바라보며, 사무엘하는 그 사람이 바로 다윗임을 증거해 준다. 이 중앙에 고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사무엘하 7장의 다윗 언약이다. 물론 다윗 언약은 사무엘서로 끝나지 않고 열왕기서로 이어진다. 다윗은 임종 직전에,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그가 여전히 ‘모세 언약’ 아래에 있음과(왕하 2:3), 그가 다윗 언약의 당사자로서 ‘왕조’와 ‘후손’의 약속을 갖고 있음을 말해준다(왕하 2:4). 열왕기서에서 다윗의 후손은 계속 하나님 앞에 실패하지만, 주님은 ‘다윗을 위하여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있음’을 열왕기서 저자는 언급함으로써, 다윗 언약이 계속 효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증거해 간다. 그는 끝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의 석방’을 다룸으로써, 다윗 언약의 약속이 새롭게 이루어질 것을 희망하고 있다(왕하 25:27~30).

 

사무엘하 7장의 인접 문맥을 살펴보면, 다윗은 이제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삼하 5장). 왕으로서 다윗은 무엇보다도 먼저 아비나답의 집에 수십 년 동안 방치된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와,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신앙의 구심점으로 만들며, 장차 시온신학의 발판을 만들었다(삼하 6장). 이런 배경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안치할 수 있는 ‘성전’을 짓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며, 자신의 뜻을 선지자 나단에게 전한다(삼하 7:1~2).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집’을 짓고자 하는 소원을 나단에게 말한다. 그때 나단은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무릇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소서”라며, 크게 기뻐하였다(삼하 7:3).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의 종 선지자 나단과 달랐다. 주님께서는 나단을 통하여 “너가 나를 위하여 나의 집을 세우겠느냐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하여 너의 집을 세우리라”다윗 언약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주신 신탁의 형식으로 제시되고 있다.

 

(1)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5절). 대답은 “아니다”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다윗뿐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실 집을 건축할 수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다. 이후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 봉헌을 드리면서,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라며, 자신이 지은 성전이 하나님께 보잘 것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왕하 8:27).

(2)“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으며”(6절), 나아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그 어느 사사에게도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7절). 즉 주님은 자신의 구원사를 성막 중심으로 그동안 이끌어 오셨으며, 이방 나라들과는 달리 성전이 없어서 한번도 섭섭하신 적이 없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하여 성전을 짓고자 한 다윗을 하나님은 기뻐하셨으며, 그에게 ‘임마누엘’의 약속과(9절상반절), “너의 이름을 위대하게 해주겠다”는 약속과(9절하반절), “평화의 통치를 이룰 수 있도록 도우시겠다”는 약속을 주신다(10~11절). 즉 다윗은 주님의 집을 지으려고 하였지만, 오히려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지어주실 것이다”(11절하반절). 여기에서 ‘집’은 ‘왕조’를 의미한다. 이리하여 나단의 신탁은 ‘왕조창건의 신탁’이 된다.

 

(4) 이리하여 다윗에게 주신 모든 약속은 다윗의 당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약속이 되었다. 구체적으로 ‘후손’(zera)과 ‘보좌’(kisse)를 약속하셨다(12, 13절). 여기에서 ‘후손’은 구체적으로 ‘솔로몬’을 가리킨다. 솔로몬은 “네 몸에서 날 네 씨”로 언급되며(12절),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고 한다(13절). 사실 ‘후손’과 ‘보좌’는 왕권을 구성하는 두 개의 중심 요소이다. ‘왕의 후손’에게는 ‘보좌’가 있어야 하며, ‘후손’이 있어도 ‘보좌’가 없다면 그는 더 이상 왕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 따라서 주님은 다윗에게 ‘후손’과 ‘보좌’를 동시에 약속하신다.

 

(5) 다윗 언약에서 하나님과 다윗 후손의 관계는 ‘부자관계’로 수립된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14절상반절). 이리하여 다윗의 후손은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며, 언약관계를 맺게 된다.

 

(6)이제 다윗의 후손들과 무조건적인 언약을 맺으실 것이다. 이 언약은 “그가 만일 죄를 범 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로 소개되고 있다(14절하반절~15절). 즉 다윗의 후손이 범죄할 때 징계는 있겠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완전히 거두시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무조건적인 언약이란 언약 속에 조건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이 인간 당사자에 의해 파기되어도, 그 후손을 통하여 계속 관계를 유지해 간다는 점에서 무조건적이다.

 

(7) 다윗의 집은 영원할 것이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16절). 이 하나님의 불변하는 약속은 역사적인 가변성과 근본적으로 갈등을 갖고 있다. 다윗의 후손들은 다윗만큼 주님을 향한 충성심이 없었다. 만약 그들이 계속해서 실패한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될 것인가? 따라서 이 약속은 수많은 역사적 가변성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있다.

 

사무엘하 7장에 있는 왕조의 약속은 이후 선지서와 신약성경에서 메시아 왕의 도래를 기다리는 메시아 사상의 모판이 되고 있다. 나단의 신탁은 궁극적으로 장차 오실 다윗 왕과 그의 왕국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다. 그 완성은 장차 올 다윗의 후손들뿐 아니라, 한 명의 이상적인 후손 왕에게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사무엘하 7장에 담긴 메시자적 기대는 이후 시편과 선지서와 신약성경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확장되고 강화되며, 그 왕과 왕국의 정체는 구속 역사의 발전 속에서 점차 명료해질 것이었다.

 

이후 사무엘 7장에 나타난 다윗 언약은 먼저 다윗의 유언(삼하 23:1~7)에서 새로운 강조점과 함께 발전되며 심화되고 있다. 여기에서 다윗은 이제 선지자적인 은사를 받은 자로서(2~3절), 왕조 약속의 신적 기원과 영원한 정당성을 천명하고 있다. 특히 다윗은 (1) ‘높이 들린 자’이며, (2) 주님께 ‘기름 부음 받은 자’이며, (3) 이스라엘을 지키는 자의 ‘사랑을 받은 자’로 소개된다. 나아가 그의 왕국은 (1) 주님을 경외함과 (2)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것을 중심 특징으로 갖고 있다(3~4절). 요약하자면, 다윗의 후손만이 정당한 통치권을 가지며, 그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축복과 풍년과 평화와 안녕을 가져온다고 말함으로써, 다윗 왕국의 영속성이 주님께서 허락하신 ‘영원한 언약’에 근거함을 밝히고 있다.

 

사무엘하 7장의 나단 신탁은 이후 시편 2편에서 이상적인 왕권을 가진 왕으로 새롭게 그려진다. 여기에서 다윗 왕은 (1) 하나님께서 시온 산에 세운 왕이시며(6절), (2) 하나님의 아들이며(7절), (3) 열방을 유업으로 물려받은 자이며(8절), (4) 그의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를 것(8절하반절)을 약속 받고 있다.

나단 신탁에 나타난 메시아 사상과 다윗 언약은 시편 89편에서 만개되어 나타난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단지 ‘왕’이나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주님의 택한 자’(bachir), ‘주의 종’(‘ebed), ‘경건한 자’(chasid, 19절), ‘용사’(gibbor, 19절), ‘기름부음 받은 자’(mesiach, 20절), ‘주의 아들’(ben), ‘주의 장자’(bekor, 27절), ‘세계 열왕의 으뜸’(‘elyon, 27절)으로 나타나고 있다. 시편 89편에서는 다윗 왕뿐 아니라, 그의 왕조도 이상적으로 묘사된다. 그의 나라는 ‘태양과 달’의 은유로 비교된다(36~37절). 오직 다윗의 후손에게만 주님께서 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셨다. 다윗의 왕권은 주님께서 친히 세우셨으며, 주님의 왕권의 기초가 되는 ‘의, 공평, 인자함, 성실함’ 위에 서 있다(14, 30~33절). 무엇보다도 다윗 왕은 여기에서 수난 받는 메시아 왕이다. 그는 주님께 버림받았으며(38절), “그의 왕관은 땅에 던져져 더러워졌으며”(39절), “그의 보좌는 땅에 엎어지고”(44절), 그의 원수들은 그를 포위하고 노략하고 능욕한다(31~42절). 그의 영광은 사라졌고(44절), 그는 수치로 몸둘 바를 모른다(44절). 수난 받는 주님의 종으로서의 다윗 왕의 모습은 이후 수난 당하는 메시아 사상으로 전개될 것이다.

 

사무엘하 7장은 사무엘하 23장의 다윗의 유언과 시편 2, 72, 89편뿐 아니라 선지서의 수많은 예언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본문을 전체적으로 기독론적 관점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즉 나단의 신탁에 담긴 모든 약속들은 궁극적으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궁극적으로 성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사무엘하 7장이 바라본 다윗의 후손으로서, 주님의 선택된 자요(삼하 7:8), 임마누엘이시며(9절), 위대한 이름을 얻으신이시요(9절하반절; 빌 2:9~11), 모든 원수를 물리치고 평화의 나라를 가져오시며(10~11절상반벌), 주님의 아들이시며(14절), 성전인 교회를 짓는이시요(13절), 새 왕조인 하나님나라를 세우신 분이시다(11절하반절, 16절). 그의 보좌는 영원히 세워질 것이다(13절). 나아가 사무엘하 7장을 역사적인 위기 속에서 심화시킨 시편 89편에 나타난 다윗의 모든 칭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며, 나아가 수난 당하는 종으로서의 다윗의 모습 역시 수난 당하는 종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다.

 

 

 

 

 

 

8장  옛언약과 새언약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상대적 차이는 인정해야 하지만 그 차이가 계시의 점진성으로 인해 야기된 차이이지 그 본질의 차이는 아님으로 옛 언약을 새 언약과 전혀 다른, 혹은 보다 열등한 언약으로 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새 언약은 앞서 있었던 더 이상의 언약갱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모든 언약의 마침이며 성취라는 점에 있어서 새로운 언약이지 그 본질에 있어서 새로운 언약은 아니다.

‘이전 언약’과 ‘새 언약’, 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구분은 예레미야 31:31과 성찬제정의 말씀, 그리고 히브리서에서 다양한 표현으로 여러 번 발견된다.

렘31:32절에서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땅을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으로 문자적으로는 여기서 옛 언약은 모세언약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또 고후3:6에서는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하심으로 새 언약과 모세의 율법을 대조하고 계시며, 갈4:24에서는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말씀하심을 볼 때 바울은 옛 언약을 모세의 율법체계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히9:1이하에서도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라고 이야기 함으로 히브리서 기자 역시 옛 언약을 모세의 율법체계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옛 언약은 모세 언약을 가리키는 것이요, 새 언약은 선지서에서 예언된 언약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언약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1.예레미야서에 나타난 새 언약의 약속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1-34)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렘31:33)”

새 언약은 순종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옛 언약에 순종하는 일에 있어서의 백성의 실패를 배경으로 주어진다. 언약이 선포될 때 축복과 저주의 개념이 소개된 것으로 보아서 언약에 대한 순종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이스라엘로서는 심비에 새겨지지 않고 돌비에 새겨진 율법에 대한 순종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불순종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그들의 마음으로 받는데 실패하였다.

  

그런데 새 언약은 새로운 마음, 즉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합당한 순종의 태도를 약속하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새로운 율법이 아니라 순종할 수 있는 새로운 힘에 있었다. 새 언약 아래서 율법은 직접 마음 안에 놓여지고 그것은 동기유발의 요인, 모든 행동이 지배받는 기준, 진정한 순종을 산출하는 생동적인 원리가 되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 맞는 자발적인 순종을 얻으려 인간의 마음속에 자신의 율법을 기록하기 위한 새롭고 성공적인 시도를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이다.

 

갱신으로서의 새언약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3)”

이것이 새로운 약속, 새로운 이상, 새로운 관계는 아니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래로 계속해서 자기 백성들과 자기와의 특별한 관계가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셨다.

   옛 언약하에서 그들은 언약을 파기함으로 “내 백성이 아니라(호1:9)”고 여겨졌었는데 이제 다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신다. 주께서는 자신에게 심한 범죄를 저질렀던 언약백성들에게 그의 사랑을 표현하시고 또한 출애굽 구속 후에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거룩한 나라로 세우셨을 때처럼 마치 그들을 다시 찾으셔서 그들을 새롭게 하신다.

   새 언약에서 ‘임마누엘’의 약속은 옛 언약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부분이다. 구약에서 회막이라는 상징체를 통하여 되어진 임마누엘의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오심과(요1:14)과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취될 것이다(계21:3-4)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지식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렘31:34)”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경험은 아니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이스라엘의 유산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호4:2)”고 그들에게 비난하였으니 그것은 비극이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적 지식에 근거하여 알지 못했다. 그러나 새 언약하에서는 옛 언약하에서 누리는데 실패하였던 하나님과의 깊은 교계-연합-가 가능해질 것이다.

   옛 언약하에서는 모세와 같은 중보자가 필요하였으나 앞으로는 제사장이나 특별한 임무를 맡은 선지자 등과 같은 중재자들과 그들이 옛 언약하에서 작동시켜왔던 교육적인 제도들을 유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자들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새 언약아래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교육이 폐지될 것이다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이론적인 지식이 아니라 ‘알다’라는 단어에 담겨진 하나님과의 내적이며,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질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새로운 상황에서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알 것이고 그 지식은 직접적인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완전히 개인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성령님 안에서 가능해질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주어질 것임을 동일하게 말하고 있는 에스겔 16:63절에는 “너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고 말한다. 이 어구는 에스겔서에서 50번 이상이나 나타나고 있는데, 이 어구에서 나오는 ‘야다’(עדי, to know)라고 하는 히브리어는 지적인 지식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그것은 마음의 지식이며 사랑을 필요로 한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라고 기록된 요일서 2:27절의 말씀은 새 언약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실행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는 아무리 약하고 미천한 자라도 새 언약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이는 만인이 똑같이 가지는 특권도 아니요 또 교제를 돕기보다는 방해하는 그런 머리(지성적)의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된, 그리고 전적으로 동화가 되어 버린 그런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 것이며, 영원한 생명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 것이다. 성부 하나님과 하나시며 하나님 안에 거하시므로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를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그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영적조명을 받게 된 것이다.

 

완전한 용서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렘31:34)”

   죄의 용서에 대한 약속은 옛 언약하에서도 이미 존재했었다. 예레미야는 죄가 옛 언약 아래서 용서함 받았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 이미 죄를 용서할 것에 대해서 약속하셨고 이와같은 약속은 옛 언약하에서 계속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죄 용서는 제사를 통한 제도화된 접근체제와 한데 묶여 있었다. 하나님은 제사제도를 통하여서 죄를 용서하였다. 그렇지만 렘31:34절에는 새 시대에서의 그와 같은 제도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즉, 여기에는 죄가 한번에 그리고 완전히 다루어지는 상황이 고려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새 시대에는 죄를 상쇄하는 어떤 다른 제도가 요구되지 않을 것이다.

   죄의 완전한 용서에 대한 약속은 예언적 과장법의 어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새 시대의 하나님에 대한 심리적 태도를 가리키는 어구도 아닌 것으로서 이는 말 그대로 하나님이 ‘잊으심으로 죄를 용서’하실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새 언약 아래서 하나님은 더 이상 죄를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징벌의 위협이 사라지며 계약은 결코 파기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을 옛 계약 아래서 약속의 실현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옛 계약이 아무 효력도 없는 것으로 만들었던 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죄였고 그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는 일에서 풍성해질 것이다.

   선지자들에게 있어 죄사함은 메시야 시대의 축복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었고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다. 예수와 서기관들 사이의 논쟁은 예수가 죄를 용서하심을 선언하셨을 때에 시작되었다. 예수께서는 죄사함의 선언을 실제로 이룩하셨다. 죄사함은 선지자들이 종말론적 나라에서 있을 것을 약속하셨던 것을 사람들이 현세에서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예수의 인격 가운데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다.

 

2. 에스겔서에 나타난 새 언약의 약속

 

   예레미야 31:31-34절의 새 언약처럼 에스겔의 영원한 언약도 역시 죄의 용서를 약속하고 있다. 그리고 예레미야에 의하여 율법이 백성의 마음에 있어야 한다고 진술되었듯이 에스겔의 언약에서도 새 마음과 새 영이 약속되었다(겔36:27). 순종은 율법의 새로운 조항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촉진 될 것이다.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레를 지켜서 행할지라”(겔36:27)

    예레미야의 새 언약이 율법의 내면화로 말미암아 순종을 촉진하도록 약속하였던 것과 꼭 같이 에스겔의 새 언약도 하나님의 영이 심령에 임하심을 통해 순종을 확실케 할 것이다.

 

3.새언약의 성취

 

   포로귀환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예언에 대한 소망의 성취를 어느 정도 나타내었다. 분명히 그것은 외적인 회복을 나타내었으며, 그 이후에는 우상숭배를 했다는 눈에 보이는 증거나 혹은 명백한 기록이 더 이상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포로귀환은 완전한 치료를 가져다 주지 않았다. 새 언약에 관한 예언이 휠씬 더 근본적으로 성취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새 언약의 성취가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드신, 그리고 당신이 이처럼 제정해 놓은 성만찬이 끝날때까지 마시게 될 그 포도주가 새 언약의 피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맹백하게 주장하였다. 이 말씀들은 십자가에서 당신이 죽으심으로써 선지자에 의해 예견된 소망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날 밤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식사를 나누시면서 식탁에 있는 떡(빵)을 하나 집어들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이것이 내 몸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 주셨다. 잠시 후에 그는 포도주 잔을 취하여 축사하신 후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고전11:23-25), 또는 “이것은 나의 피 곧 언약(new covenant)의 피니라”(막14:24)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에게 나눠 주셨다.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신 것은 예수께서 몸을 내어 주신 일과 피를 흘리신 일로 말미암는 은혜를 그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표였다. 떡과 잔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가져 오실 주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는 그 나라에 참여한다는 뜻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것으로 인해 자신들의 그 언약에 포함되며 하나님 나라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성찬식을 이렇게 시작하심으로 자신의 피흘림과 새 언약의 제정을 연관시켰다. 그분의 피는 언약을 인준(認准)하는 피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가 “많은 사람을 위해” 흘려진 피이며,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선언한 ‘새 언약’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대속적 죽음의 일반적인 성격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의 피흘리심은 우리들의 죄사함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고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찬식은 죄사함을 위한 최종적인 성례였다고 볼 수 있다.

   구약의 제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된 자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메시지를 한결같이 담고 있다. 구약의 제도들 역시 나름대로 효력을 발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제도들이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실제적인 효력을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죄의 문제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근복적인 해결을 보게 된 것이다. 이제 주께서 행하신 성찬식은 언약이 완성되었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예수께서 제정하신 새 언약에서 볼 수 있는 심대하고 중심된 사상은 예수님의 죽음이 전적으로 대속적 제사이며 옛 언약하에서 상징되어 오던 모든 것의 성취라는 것이다.

   주의 만찬은 구약에서의 유월절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완성하신 구원을 기념하는 의식이다. 과거 유월절이 언약갱신의식으로서 정기적으로 계속 행해졌던 것처럼 주의 만찬도 계속행해져야 한다. 그러나 만찬과 관련하여 “...때마다”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은(고전11:25) 이 만찬이 유월절보다 더욱 자주 행해져야 할 것임을 시사한다.

 

4.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히8:6)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파기한 모든 죄인들의 저주를 홀로 담당하신 언약의 중보자이시다. 또한 그 분은 언약 아래 계시며 동시에 언약을 세우시는 분이시며 절대주권자이시라는 점에서 이중적인 역할 - 그러나 상충되지 않는 - 을 감당하였다. 그는 성격상 왕이시지만 고통을 담당해야 할 주의 종이며 백성에 대한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도록 지명받은 하나님의 특별한 도구인 것이다. 이 한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목적은 결정적인 완성을 보게 된 것이다. 그 분은 율법을 성취하셨을 뿐만 아니라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신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이었으며, 그는 율법의 저주를 대신받으신 것이다.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생긴 저주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떨어졌다.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율법을 어긴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저주를 제거하신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담당해야 할 저주를 ‘아멘’ 이시요 ‘충성’이신 그리스도께서(계3:14) 자신이 대신 지고 죄인의 자리에서 죽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사하려고 다시 말해 계약적 저주의 희생제물로서 죽으심으로 부르심을 입은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셨다(히9:15). 그리스도는 옛 언약하의 범죄의 총 결과를 담당함으로써 그 저주로부터 우리들을 구원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옛 계약안의 범죄를 지워버릴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새 계약의 축복된 상태로 인도하고 있다.

   이제 저주와 축복의 이중 역할은 그리스도안에서 완성적인 의미를 찾게 된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면서 동시에 축복된 새 계약을 세운다. 계약에 명시된 저주로부터의 장차 구원의 약속이 구약에 나타나는 반면, 이 약속이 실현된 사실이 신약성경에서 처음 나타난다. 이 증거는 특히 히9:15-20과 새 계약 수립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마26:28, 눅22:20)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사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9:15).” 히브리서 기자는 첫 언약에서 범한 죄를 사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으로 해석한다. 새 언약을 세운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의 파괴로 인한 저주로부터 구원을 제공하였다. 그의 “언약의 피”는 새 언약을 세웠으며 동시에 옛 언약의 저주를 없애는 역할을 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는 율법 파괴자의 자리에 자신을 대신하였다. 그리스도는 언약의 저주를 자신이 담당하면서 그들의 자리에서 죽었다. 그분은 언약의 저주는 자신이 담당하시고 대신에 언약의 축복은 우리에게 전가시키신 것이다. 이러한 축복은 우리들이 믿음으로 노력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순간 우리에게 부여된 축복들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축복이 우리에게 전가 되어지고 반대로 우리의 죄로 인한 저주는 그리스도께 전가되어지는 즐거운 교환이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중보자는 그리스도시다.

 

5. 새 언약과 성령

 

    옛 언약하에서 솔로몬은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필요를 인식하였고(왕상8:23,38,39), 선지자들도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구속을 인(印)치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성별시키기 위하여 성령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후손들에게 내릴 것을 가르쳤다. 이렇게 약속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심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이 가능해진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롬8:3-4절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은 이제 우리의 영혼에 역사하여 모든 거룩한 본분을 다하게 하고, 모든 실제적인 죄악들을 범하지 않을 수 있게 하심으로써 영혼을 더러움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새로운 약속(new covenant)의 교훈을 따라 그것을 순결하고 거룩하게 보존해 주신다. 하나님의 언약에서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지키시는 것이다. 새 언약에의 참여는 이처럼 성령의 선물을 받음으로 가능해지고 그것은 구원의 은사를 받는 것으로 연결되어진다. 성령은 구원의 보증이 되시고 부활의 보증이 되시는 것이다.

   이처럼 새 언약 하에서는 인간의 내적 자기갱신이 아니라 인간 속으로의 거룩한 신적 속성이 주입 될 것이다. 새 언약의 갱신은 회복시대의 시작을 표시할 뿐 아니라 또한 성령의 시대로 표시된다. 앞서 언약들의 집행시에도 표징이 있었던 것처럼(노아 언약에서 무지개, 아브라함 언약에서 할례, 시내산언약에서 안식일) 새 언약의 표징은 약속으로 오신 성령이다.

 

6. 옛 언약이 파기된 이유

  

우리는 위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이 이스라엘의 범죄 즉, 언약규정을 이행하지 않은 율법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파기되어졌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이렇게 볼 때 표면적으로는 언약파기의 이유가 율법을 불순종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사실을 오해하면 율법주의에 기초한 율법의 완전한 성취로 인해 언약이 유지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처럼 언약존속의 여부를 율법주의적인 율법의 수행에 둔다면, 옛 언약 하에서는 율법주의적 공로를 언약유지의 수단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러나 옛 언약 하에서는 결코 완전한 의미에서의 언약순종이란 사실상 불가능했었다라는 사실을 전제하면 율법을 불순종한 것만이 언약파기의 이유가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이렇게 보면 옛 언약은 유명무실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옛 언약이 인간의 욕구를 불러 일으키고, 인간의 노력을 부추기고, 하나님께 의존하고자 하는 생각을 깊게 해주고, 인간의 죄와 약함에 대해 확실히 알게 해 주며,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는데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불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면 옛 언약파기의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참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율법을 순종했느냐 하지 못했느냐 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있지 않는냐를 나타내는 표식이지 율법순종여부가 언약파기의 참된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행하지 않은 것이 궁극적인 언약파기의 원인이 될 수 없고, 믿지 않은 불신앙이 언약파기의 궁극적 원인인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과 순종의 행위는 대조되는 것이 아니고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믿어 순종케(롬1:5, 롬16:26)” 된다고 하면서 참된 믿음은 순종이란 열매를 자연스럽게 맺게 된다고 말한다. 바울은 이처럼 믿음과 순종을 대조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믿음에는 순종이 반드시 동반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언약파기의 원인을 불순종이라기 보다 불신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7. 옛 언약의 불완전성

 

새로운 언약이 왜 필요했는가? 하는 새 언약의 필요성의 문제는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한 옛 언약의 파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옛 언약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불완전성으로 인해서도 대두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옛 언약이 불완전하다고 하는 의미가 옛 언약 자체가 언약으로서 구비되어야 할 조건이 불충분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옛 언약이 불완전하다는 말은 옛 언약이 인간의 불순종으로 파기되어져 온 언약이고 새 언약을 바라보게 하는 예표성을 띤 언약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히8:7)”라고 하면서 옛 언약이 불완전함을 말하였다. 옛 언약하에서의 희생제사는 그 자체로서 죄를 없이 하는 능력을 갖지 못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제한적이었고 세상의 죄를 제거할 하나님의 어린양의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했었다. 물론 앞서 언급한대로 죄사함의 본질은 옛 언약이나 새 언약이나 동일하지만 상징자체가 실체가 아님으로 옛 언약은 불완전하였던 것이다. 구약의 모든 계시가 그 자체로서의 효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그 계시의 실체가 드러났고 또한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새 언약을 예표하는 면에서 불완전한 언약이라고 할 수 있는 옛 언약은 성령님에 의한 인간의 내면적 변화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의한 완전한 대속의 실체를 약속하는 새 언약을 요구하였다.

 

오직 율법의 요구만이 역사적 실체로 주어졌고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은혜는 상징적 의식과 예표로 주어졌던 옛 언약은 율법적 요구가 더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옛 언약은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고 그리스도를 대망케 하는 몽학선생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모세언약을 끼어든 것이라고 말한다(롬5:20). 그러나 실제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이질적인 언약이 아닌 것이다.

   옛 언약의 요구는 새 언약의 요구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의한 계명순종과 이로인한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의 교제에 동참하라는 은혜의 요구였으며,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의의 기준도 동일한 율법의 말씀이며 이 율법은 단순히 의문에 그치지 아니하고 옛 언약과 새 언약 하에서 공히 심비에 새겨져야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옛 언약 하에서도 새 언약과 같이 동일한 속죄의 효력을 누렸고 동일한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했던 것이다.

   다만 새 언약은 이제 상징과 예표로 주어졌던 그리스도의 은혜가 실체로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주어진 구속의 은혜가 놀랍게도 분명하고 풍성해졌다는 의미에 있어서 옛 언약과 다른 것이다. 이 차이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라고 요한이 말씀하실 만큼 그 풍성함과 분명함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옛 언약의 축복이 그 자체로서는 매우 중요하고 풍성하지만 휠씬 더 풍성하고 중요한 축복과 비교해 보면 너무 미미한 것이어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이 보일 정도다.

   그러나 만일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위와 같은 동질성을 부인한다면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나라 전체가 단순한 허위와 환상으로 변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없다. 다만 새 언약은 옛 언약의 온전한 실체와 그 성취라는 점에 있어서만 새로운 것이다.

 

 

 

 

 

 

 

 

 

 

 

 

 

 

 

 

 

 

 

 

 

 

 

 

 

 

 

 

 

 

 

 

 

 

 

 

 

 

 

 

 

 

 

 

 

 

 

 

 

 

 

 

 

 

 

 

 

 

 

 

 

 

 

 

 

 

 

 

 

'세미나 > 언약신학(박사과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 언약의 4가지 원리를 중심으로  (0) 2020.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