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대선지서

대선지서

호리홀리 2021. 12. 20. 13:00

대선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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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강좌

2021. 12. 20.

                                  대선지서

            (이사야서,예레미야서,에스겔서)

 

                                                                           박인대교수

                                이사야서

 

백성들이 왕을 원했을 때 하나님은 허락하시면서 왕과 함께 선지자 제도를 출범시키셨다. 선지자는 왕을 견재하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며 가르치는 사명을 받았다.

처음의 선지자들은 구전선지자였다. 아모스 때부터 기록선지자들이 나타난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 직전부터 하나님은 기록선지자들을 들어 쓰셨다. 이제 북 왕국은 망했고 남 왕국 유다의 멸망이 가까웠을 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들어 쓰셨다. 10지파의 북쪽이 망하고 남은 두지파가 하나님나라 전부였다. 이 때 하나님은 기록 1세대 선지자 중에 가장 강력하고 자세하게 메시지를 전할 도구로 이사야를 쓰신 것이다. 

 

모든 선지자들의 멧세지가 시내산언약에 기초한 경고,심판,회복에 두었듯이 이사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사야가 더욱 강조한 부분은 회복에 있었다. “고엘“(이사야서에는 주로 구속자로 번역, 원래의 정확한 뜻은 기업무를 자이다.)이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사야서의 주제

 

프린스턴 대학의 J.J 로버츠는 이사야서를 “거룩한 자의 비젼”이라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하나님은 거룩한자로 나온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초반에는 심판자로 중반에는 구속자로 후반에는 시온의 회복자로 나온다. 왜 이사야에서는 거룩을 강조하고있는가?

 

먼저 거룩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카도쉬”(set apart from:~로부터 구별되다)라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를실 때 “내가 선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신을 벗어라” 또한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이라 불렀다.

 

출19:1-6절에 시내산언약의 세 골자인

“내소유”는 이스라엘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내것이라 한다.

“제사장나라” 그리고 “거룩한 백성”이다. 거룩한 백성은 이방인 에게서 구별된 백성이다. 이방인의 제사는 나 중심,나를 위하여,다산과 축복을 위해서 예배드리는 것이다. 이방신은 다산의 이익의 극대화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다. 신5:15“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먼저 기억해야한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우리의 신분이 과거 애굽의 종이었다는 사실 ,이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예배는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의 종이었는데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입은 것을 기억하는 것이 예배다 .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의 삶의 교정과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잊으면 이방인과 똑같이 되는 것이다. 더 좋은 차,집,명예,물질을 얻기 위해서 올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할 때 소유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방은 다산문화이다. 옷,장식,도구등 모든 것에 다산 문화가 물들어있는 것이다. 이사야시대에는 이미 안식년,희년제도는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약자(고아와 과부)가 고통당하고 있었다. 또한 절대적 진리는 다수에 의해 유린되었다.

 

그러므로 첫번째,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는 심판자로 나타나는 것이다.(1~39)

부정한 백성들을 심판하는 심판자. 언약을 파기한 것에 대한 심판자. 이 심판이 바벨론 포로로 나타난다. 이 기간동안 그들은 통회하는 심정,상한심령,회개하며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40장부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는 구속자로 나타난다. (40~59)

사41:14절“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구속자는 히 “고엘”이다. 고엘은 동사 “가알”에서 왔다. 가알은 “되찾다” 고엘은 명사형으로서 “되찾아 주는자 “ 레위기에서는 ”기업무를자“이다. 사47:4절”우리의 구속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포로된 백성들에게 나는 너희의 “고엘“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포로가 되어 땅을 잃고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런데 거룩한 자가 회복 시켜 주실 것이다. 기업을 물어주겠다. 모든 것의 회복이다.

 

세 번째,60장부터 시온의 회복자로서의 거룩한 자이다.(60~66)

  시온신학의 특징은 열방의 순례이다. 열방이 시온으로 몰려 올 것이라는 유니버설사상이다. 60:9“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원방에서 네 자손과 그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드리려하는 자들이라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니라” 60:14절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의 시온”이라 했다. 열방의 백성으로부터 경배를 받으시고 열방의 백성이 참여하는 ,열방이 몰려와서 예배를 드리고 받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다.

 

  다윗,솔로몬 시대에 잠시 이루어진 이 일이 이스라엘의 멸망,유다의 바벨론 포로로 흩어진 백성들이 다시 회복되는 긍극적 회복은 행2장에서 나타난 방언의 역사이다. 바벨탑사건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다시 모여 회복되는 긍극적 회복이 방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성령이 오셨고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또 하나는 교회를 통하여 시온의 회복이 성취되는 것이다. 계7:9절“이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수 없는 큰 무리...” 모두가 모인 공동체 이것이 이사야의 거룩한 비젼이다.

 

역사적배경

 

다윗과 솔로몬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당시 세계에서 강국으로 부상하며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하나님나라의 전성기였고 세계의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이했다. 그러나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은 급속히 약해졌다.  앗수르가 등장한 것이다. 앗수르의 지상목표는 오직 정복이었다. 이웃 나라들을 하나씩 정복해 나갔고 순식간에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다. 언약을 파기한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속국이 되어버렸다. 이사야가 부름받았던 시기는 바로 이때였다.

당시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은 기원전 744년부터 727년 까지 앗수르를 최강국으로 만들었다. 처음 그가 세계무대에 등장했을 때 당시 이스라엘과 유다는 여로보암2세와 웃시야 때였다.  여로보암2세는 이스라엘의 영토를 유프라데까지 넓혔고 웃시야는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이미 우상숭배의 극을 달리던 이스라엘,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은 빌레셀의 침공을 받고 하솔과 납달리에 이르는 영토 절반을 잃게 된다. 그리고 이때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다.(왕하15:29) 이사야9:1절이 그 당시의 참상을 보여준다.

 

앗수르는 남쪽으로 블레셋을 침공했고 이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킨 호세아는 이스라엘 왕 베가를 죽이고 왕이 되었고 앗수르는 이것을 인정해 주었다. 앗수르의 왕이 죽자 호세아는 반란을 시도했다. 이 일은 앗수르의 강력한 보복을 받게 되었고 사마리아는 3년간 포위되었다가 722년 마침내 사르곤 2세에게 함락당한다.  이사야 28:1-4은 여기에 대한 역사적상황을 잘 보여준다. 당시 27.290명이 포로로 잡혀가 유프라데 강 상류지역으로 강제 이주하게 된다.

 

한편 유다에서는 히스기야(715-687)가 왕위에 올랐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멍에를 떨쳐버리려고 노력했으나 국내의 상황은 녹녹치 못했다. 나라 밖으로는 블레셋,에돔,모압,아람이 국제정세를 불안하게 했다. 사실 애굽이 가장 문제였다. 약소국들을 앗수르에게서 보호해 주겠다고 했지만 큰소리만 치고 있던 애굽은 이러한 나라들을 동맹국으로 여겼으나 앗수르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715년 왕위에 오른 히스기야는 이사야의 요청인 블레셋동맹에 가담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는다. 히스기야는 그 경고를 듣고 동맹에서 탈퇴한다. 갈그미스전투에서 승리한 살곤2세는 사마리아를 정복하여 포로로 끌고갔으나 다른 나라는 그대로 둔다. 이집트에게 붙었던 블레셋도 멸망한다. (711)

 

사르곤2세가 죽은 후 산헤립이 왕이된다. 이 때 히스기야는 산헤립에게 대항한다. 산헤립은 유다 46개 마을과 도시들을 정복했고 200.150을 포로로 잡아갔다. 히스기야는 전쟁배상금 금300달란트,은 800달란트를 바친다. (왕하18:14,300달란트)

 

 

내용

 

1장,언약파기

 

2절의 “자식” 3절의 “이스라엘” “나의 백성“은 모두 언약백성에 대한 호칭이다. 그들은 4절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이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이사야는 거룩한 백성(언약백성:구별된 백성)이 거룩을 버려 거룩한 자의 직접적인 고소를 당하고 있다. 하나님은 친히 고소자가 되시어서 언약백성을 재판하시고 있다. 2절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하늘과 땅을 증인삼아 고소하시는 하나님. 9,10절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그들이 받았던 헤렘을 상기시킨다. 고소의 내용은 세가지이다.

 

첫째,종교적인 죄로서 불의한 재물을 거부한다.(11). 또한 예배를 거부한다. 형식적인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15절은 기도 거부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16절의 4가지, 스스로 씻으며,스스로 깨끗게하여,악업을 버리고 악행을 금하라는 것.

17절의 다섯가지, 선행,공의, 학대 받는자를 도와주며,고아와 과부를 변호하는 것이다.

 

둘째는 윤리,도덕적인 죄이다. (21-27) 22절,경제타락,23절,정치타락,24절 총체적 부패에 ,하나님의 노는 점점 더해간다. 웃시야왕이 통치하던 이 시대는 위에서부터 아래에 까지 썩고 부패하고 교만했다.

유다가 강한 것은 사실 껍데기에 불과했고 앗수르는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만 모두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인칭 복수는 16절부터 20절까지 고소의 대상자로 나타났으나 22절부터 2인칭 단수로 좁혀진다. 대중을 향해 묻던 죄가 하나 하나를 손가락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24절에서는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케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수하겠으며” 여기 원수는 앗수르가 아니다. 언약백성이 원수와 대적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1인칭을 반복 사용하고 있다.

 

세 번째 죄는 종교적 혼합주의 이다. 28-29절 “우상숭배로 인하여”  28절 경고하신다.“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자도 멸망할 것이라” 20절에서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칼로 목을 따버리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화는 강력하여 불로 삼킬 것 같은데 그들은 듣지 않고 있다.

 

오늘 우리시대는 어떤가? 6장에서 이런 백성들에게 가서 말씀을 전하겠는가?하고 하나님이 물으신다. 이사야는 나를 보내소서라고 요청한다. 듣든지 아니듣든지 가서 전해야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시대의 이사야로 살아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2장,시온의 회복

 

1:4 “...이스라엘의 거룩한자” 이사야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호칭을 주의 하자. 하나님이 언약백성을 거룩하게 하셨다. 구별된 백성으로 삼으시고 시온의 회복을 보여주신다. 2절의 말일은 히 “아카리드 하야밈” “그 날들의 뒤끝“ 이것은 구약시대의 끝을 의미한다. 이 말은 뒤에 나오는 ”그 날에“(2:11,4:1,2)와 같은 의미이다. 즉 ”메시야가 오시는 날에” 라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다시 2절을 보면 “모든”이 반복된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3절에는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 임이니라“

  이사야의 1부는 1장-59장으로 경고와 심판이다. 그러나 2부인 60장부터 회복을 보여주는데 1장은 1부전체의 시작인 경고와 심판을 보여준다면 2장은 2부 전체의 회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60:9절과 2:16절을 비교하고 60:14절과 2:3절을 비교하라. 60:14절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의 시온“ 시온의 회복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그들은 거룩을 버리고 우상숭배,(8),물질의지(7),언약파기(6),교만과 오만(11)이 하늘까지 닿았다.

 

  이 당시의 왕은 웃시야이다. 웃시야는 그 시대의 상징 인물이다. 그가 교만하여 제사장 80명을 뿌리치고 제단에 분향하려다가 즉시 문둥병에 걸리고 만다. 당시 유다가 부흥한 것 같지만 실상은 껍데기인데 실체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7절과8절은 병렬구조를 보여준다.  7절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8절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의 시대상은 물질지상주의, 우상지상주의로 가득한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현실과 이상을 바라보는 이사야의 심정을 오늘 우리는 느낄 수 있는가? 이백성이 듣지 않아도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소명의 길을 걸었던 이사야. 오늘 우리는 이 시대의 이사야로 살아야 한다.

 

3장,심판

 

1장부터 심판과 회복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계속 반복된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은 어떵게 진행될 것인가? 2:22절에서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선언함으로 심판을 선언하셨다. 이제 3장1절“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그 의뢰하는 모든 양식과 그 의뢰하는 모든 물과 ” “의지“라는 단어가 반복되며 심판의 대상자들이 나열된다. 먼저는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이 시작된다.

다음은 말과 행동으로 여호와를 거스려 살았던 장로와 방백들을 심판한다(10-15)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포도원을 맡겼는데 그들은 오히려 포도원을 삼키고 백성들을 짓밟았다.

 

4장,회복

 

2절,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싹(체마흐)은 메시야적 용어로 사용되었다. 렘23:5,33:15,슥3:8,6:12 모두 메시야를 가르킨다. 또한 2절은 병행구이다. 성경에서는  병행구가 자주 나타난다. 병행구는 양쪽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같아야한다. 앞에 것이 메시야에 관한 것이라면 뒤엣것도 같아야한다.  ”여호와의 싹“ 과 ”땅의 소산“은 모두 메시야의 신적기원을 보여준다.

 

4장에 나타난 종말론적 회복은

첫째,영화로움을 입음:메시야를 통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영화로움을 입는다.(3)

둘째,죄사함을 얻음:그들의 죄를 씻으며 그들에게 거룩함을 입혀준다.(4)

셋째,교회를 보호함:하나님은 그들의 집회위에 천막을 덮으셔서 보호하신다.(5-6)

메시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옛 영광을 찾을 것이며 그의 죽음으로 백성이 죄사함을 받을 것과 부활하신 후에도 계속 살아계셔서 교회를 보호하실 것이다.

 

5장,포도원에 대한 심판

 

5장은 1장에서 4장 까지의 결론인 동시에 6장의 충격적인 말씀을 완화시키고 있다. 이사야에게 주신 사명은 백성이 회개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6:9-10)  이해 할 수 없는 사실을 5장에서 이해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포도원의 비유이다.(1-7)

한 농부(하나님)가 가장 좋은 종자의 포도나무를 가장 좋은 땅에 심었다. 농부는 정성을 다해 포도나무를 보살폈다. 당연히 농부는 좋은 포도를 기대하고 포도주를 만들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그런데 너무 형편없는 포도를 생산한 것이다. 들 포도를 맺은 것이다. 나쁜 포도보다 농부의 노력을 더 헛되게 한 들 포도는 누가 보살피지 않아도 자연히 맺혀지는 것이다.

즉 포도나무는 농부의 모든 수고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농부는 말한다. “내가 이 포도원을 위하여 더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당연히 답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연히 울타리와 담을 먼저 없엔다. 적이 쳐들어 오도록 하나님의 보호의 장벽을 허문 것이다. 심판이 시작된 것이다. 강력한 적을 불러 이 땅을 초토화 시킬 것이다.(26-30)

 

6장,거룩한 씨의 비젼

 

6장은 주전 740년 웃시야가 죽은 해이다. 웃시야는 다윗이후 가장 위대한 왕이다. 군사뿐 아니라 농업,공업,모든 분야에서 탁월했다. 앗수르의 노도같은 공격에 주변 모든 나라가 무너졌으나 웃시야는 굳게 지켜냈다. 그런데 웃시야가 죽었다.

‘웃시야 신드롬‘ 웃시야는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하나님이 하신 것인데 내가 한 줄 착각한 것이다. 하여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성전 분향을 하려했다. 그것도 몸으로 만류하는 제사장 80명을 뿌리치고서 말이다. 우리도 웃시야 신드롬에 빠질 수 있다. 힘이 있고 능력이 있다고 착각하고 내가 다 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착각과 자본주의의 생각을 갖고 거대한 자본으로 일을 해 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한다.

 

웃시야가 죽자 유다는 위기에 봉착한다. 이사야는 절박한 심정으로 성전에 들어갔다. 그는 이상 가운데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거룩이 세 번 반복된다. 1-4절에 “가득하다”라는 단어도 세 번 나온다. 주의 영광,연기,옷자락이 가득채우게 된다.

스랍은 동사 “사라프”(불타다)에서 온 명사로서 “ 타는자“이다. 천사의 모습이 불붙는 것 같았기에 스랍이라 부른 것이다. 하나님을 본 자는 죽어야한다. 이사야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죽게 되었음을 슬퍼한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치료하시고 사명을 주신다. ”가라 가서 이 백성이 회개하지 못하도록 막으라“ . 충격으로 가득찬 이사야는 언제까지입니까 라고 울부짖는다.

 

하나님의 심판은 추상같이 떨어진다. 온 땅이 황무할 때 까지 포로로 끌려가고 10/1이 남았을지라도 그것 마저도 삼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란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여 6장의 핵심은 13절이다. 하나님의 헤세드이다. ”밤나무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땅의 그루터기니라“ 회복과 구원이다. 이것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이어지는 주제이다. 노아홍수의 심판과 남은자, 계시록의 심판과 남은자이다. 

 

거룩한 씨는 메시야를 가르킨다.(Young) 메시야에 의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이다. 이는 창3:15절부터 나오는 씨의 개념이다.(창22:18)

 

7장,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웃시야가 죽은 후 유다는 급속히 약화되었다. 1절의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반 앗시리아 동맹을 맺고 유다를 압박했다. 앗수르를 대항하자는 반 앗시리아 동맹에, 이사야의 권고로 유다왕 아하스는 거절한다. 이에 북 이스라엘과 아람이 유다를 침공했다. 두려워떠는 아하스(2)에게 이사야는 말하기를 “”그들은 ...연기나는 두 부찌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말며 낙심치말라“(4)고한다

 

여러분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이사야는 실체를 보고 있다. 우리가 이사야서를 보면서 일관된 주제 중의 하나는 거시적관점이다. 미시적으로만 사물,사건을 보게되면 그것이 점점 커져서 우리를 삼키게된다. 이사야는 거시적관점에서 하나님나라를 바라 볼 때 위로와 비젼을 통해 위대한 메시야 예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권면한다. “구하라” 그러나 아하스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마음이 없었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12)

하여 이사야의 위대한 메시야예언이 시작된다. 14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 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마1:22-23) 위기에 처한 유다에게 함께하신다는 표적으로 주신 것이다. (사8:8)  또한 이사야는 동정녀 탄생을 예언한다 처녀는 히 “알마”로서 앞에 정관사가 붙어있다.

 

오늘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무엇인가? 동시에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임마누엘하신 하나님,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므로 현실을 이기고 극복해야겠다.

 

8장,거시적관점과 근시적관점

 

아하스는 머리를 굴렸다. 이스라엘-아람을 택할 것인가? 앗수르를 택할 것인가? 아하스는 앗수르를 택했다. 결국 아람과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했다. 아하스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머리가 참 좋다 나는 지혜로운 자야”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이제 앗수르와 유다는 직접 국경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완충지대가 사라졌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었인가? 다음 차례는 유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시적관점에서 봐야한다.

 

이제 하나님은 아하스가 아닌 백성들에게 징표를 보이신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큰 서판에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마헬살랄 하스바스”라고 쓰라 명하신다. 히 “약탈이 속히 온다”는 뜻으로 이스라엘,아람이 속히 멸망할 것을 예언한다. 다시 5절부터 임마누엘의 징표가 계속된다.

“창일한 큰 하수”는 유프라테스강이다. 그 강이 범람하듯 앗수르는 무서운 기세로 유다를 침입할 때 임마누엘의 약속을 다시 주신다.(8) 9-10절은 임마누엘을 다시 강조하며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신뢰할 것을 보여준다.

 

9장,변경이 받을 축복

 

7:14절의 “임마누엘”의 메시야 예언은 9장에 와서 더욱 구체화된다. 메시야는 어디서 오시는가? 1절의 “전에 고통 당하던 자”는 스불론,납달리를 가르킨다. 그것은 갈릴리를 가르키고 있다. (1) 납달리,스불론은 비옥한 땅을 가졌으나 원래 이방인들의 거주지였고 전쟁의 길목에 위치해있는 관계로 늘 수탈의 대상이 되었던 지역이었다. (고대의 전쟁은 현지조달)

 

1절,변방은 늘 멸시를 당한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수 있느냐”(요1:46)라고 했다. 예루살렘은 독선과 폐쇄적 기질이 있었다. 그러나 갈릴리지역은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이었으나 열린마음이 있었다. 그들은 열린마음 때문에 복음을 쉽게 수용했다.

 

고난과 고통이 점점 커질때 현재적 시각으로 보면 안된다. 미래적 시각으로 볼 때 소망이 생기고 비젼이 생긴다. 미시적 관점에서만 보면 상처만 파먹다가 지친다. 컴컴한 동굴에 쪼그리고 앉아 “나는 안되 나는 못해“를 외치고 있지는 않는가? 자기 무덤을 파고 그 속에서 웅크리고 있지는 않는가?

 

9:1-7절의 내용은 과거시제로 쓰여졌다. 그러나 미래도 벌써 일어난 일로 쓰여지기도 한다. 선지자는 미래를 먼저보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돌아보기 때문이다. 그런다음 이렇게 선포한다. 그것을 기대하라 그것은 확실하다 여호와께서 이미 그일을 이루셨다.  그리하여 이사야는 2절의 빛을 8:22절의 흑암과 같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1절의 고통당하던 자는 2절의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다. 메시야는 그들에게 빛으로 오신다. 3절은 그로인해 시작되는 하나님나라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의 나라는 창성케되며 즐거움으로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그의 나라는 멍에와 채찍을 꺽으실 것이다.(4)

 

메시야는 어떻게 오시는가? 6절은 아기로 오신다.“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오실 메시야는 하나님의 아들이며,그의 사역은 정사를 메었다. 즉 십자가사역이다. 그리고 섬기는 사역이다. 기묘자는 히 “펠레”로서 “경이“로운 하나님을 가르킨다. 모사는 기묘자와 같이 메시야에 대한 형용적 이름이다. 모사는 히”요에츠“로서 책략가이다. 성령을 모사로 표현하기도 한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7절,다윗언약은 영원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열심은 반듯이  그 언약을 이루실 것이다.

 

9:8-10:4,세상나라와 하나님나라

 

세상나라 즉 이스라엘의 멸망원인은

첫째,교만이다.(8-12) 하나님의 징계의 의도는 회개였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교만하고 완악했다.(9) 그들은 말하기를 10절“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도다” 끝까지 인간적 노력으로 일으켜 세우겠다는 것이다.

두 번째,지도자들의 죄(13-17)

셋째,형제를 미워하는 죄(18-21)

넷째,사회적불의(10:1-4)

 

북 이스라엘은 10년도 채 남지않았다. 그러나 이미 숨이 끊어져가는 짐승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으면서도 아모스,호세아 선지자의 경고를 듣지 않는다. 이사야는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남쪽 유다는 망하지 않게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결국 이사야 때문에 유다의 멸망은 연기 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민족을 놓고 언약 기도하는 이사야, 온몸을 둑으로 삼고 막고있는 이사야, 하나님의 나라는 때로는 부정적으로 진행되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이사야같은 역동적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세워나가신다.  시대를 탓하거나 환경을 탓하지 말고 지도자를 탓하지도 말고 이 시대의 이사야로 살아야한다.

 

10:5-11장,심판과 회복(세상나라와 하나님나라)

 

세상나라는 영원하지 못하다. 이스라엘도 최 강대국 앗수르도, 모두 망한다. 세상나라의 특징은 교만이다. 강력한 앗수르도 교만으로 망한다. 그러므로 세상나라에 소망을 두지말고 썩어질 세상것에 미련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앗수르를 도구로 사용하셨다. 언약백성을 향한 몽둥이로 사용하셨다. 그러나 몽둥이는 교만하여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10:5-15) 하나님은 그들을 소멸하실 것이다.(17-18) 그러나 끝까지 남은 자들은 돌아올 것이다.(20-23) 남은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이다. 언약을 믿는자들이다. 그들은 위대한 승리자들이다.

 

첫 번째 하나님나라의 특징은 미약하다. 1절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다윗이 아니고 왜 이새인가?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인간적 연약함이다. 거기에서 나오는 싹은 6장13절의 그루터기의 이상과 같다. 다윗왕조가 끊어진 것이 그루터기라면 거기에서 나오는 또 다른 싹은 장차오실 메시야,완전한 회복을 가져올 메시야인 것이다. 또한 포로로 말미암아 육신적 다윗왕조는 끝나지만 새로운 다윗이 그루터기의 비젼이다. 보잘 것 없는 싹으로 오실 메시야, 그 메시야를 통한 완전한 회복의 비젼이다. 오실 메시야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이다.

 

두 번째 하나님나라의 특징은 2절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위에 강림하시리니” 1절이 성자 예수님의 사역이라면 2절은 성령하나님의 사역이다. 메시야의 오심으로 시작되는 하나님나라는 성령이 함께하시는 사역이다.

 

세 번째,성부하나님의 사역이다(4-5) 하나님은 공의로 사역하신다.

 

다시 10절,메시야 예언이 계속된다.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예수그리스도는 만민의 깃발이 되어 그 깃발 아래로 열방이 돌아오며 예루살렘으로 모이는 비젼이다. 가까이 남은 백성은 포로에서 돌아올 것이요 (16) 그것을 제2출애굽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장차 메시야의 오심은 제3 출애굽이 될 것이다.

 

13장-14장,교만과 심판

 

13-23장은 언약백성들을 괴롭힌 이방나라들(22장에 이스라엘 포함)의 심판을 선포한다. 그들 중 애굽,구스를 제외한 모든 나라들은 사라졌다. 그들이 받은 저주는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이다.(창12:3)

14:12절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히 “솨하르”(새벽별),계명성은 라틴어 계통에서 루시퍼라 했다. 흠정역(KJV)도 오/ 루시퍼로 번역했다. 바벨론에 대한 은유이다.13절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위에 의 보좌를 높이리라 가 북극집회의 산위에 좌정하리라” 14절 “가장 높은 구름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이말은 극도의 교만을 상징한 것이다. 개인이나 국가의 패망의 원인은 교만이다. 고대 바벨론제국의 상징인 바벨탑도 교만한 인간경영의 극치였다. 15절“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밑에 빠치우리로다”

 

22절부터 바벨론과 앗수르에 대한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역사,경영을 선포한다. 하나님의 경영은

1.계속 1인칭이 반복 강조된다.

2.만군의 여호와가 반복된다. (22,23,24,27)

3.반듯이 (24절X2)

4.경영(24,26,27)을 반복 사용함으로 반듯이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선포한다.

 

19장,이방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

 

언약백성을 괴롭히는 인근국가들의 멸망을 예언한다. 이제 앗수르, 바벨론에 이어서 애굽이다. 애굽은 요셉 이후로 세계의 식량창고 역활을 해왔다. 나일강은 애굽의 젖줄로 늘 풍성한 소출을 가져다 주었다. 가나안 사람들은 흉년과 전쟁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곤 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진노의 몽둥이는 애굽을 향해있었고 애굽도 다른 나라들과 똑같이 멸망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1절 “애굽에 관한 경고라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으리로다” 애굽의 멸망이 긴박했음을 이사야는 경고한다.

 

애굽의 멸망 원인은 2절, 상호불신으로 인한 내전, 3절,정신분열로 인한 약해진 마음들,그리하여 미신에 의지하는 것,4절,앗수르의 공격, 5-10은 자연현상이다. 그들이 의지했던 나일강의 이상현상이 일어났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예루살렘만 남겨둔 상태였다. 그리고 애굽의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다. 애굽은 그야말로 공포분위기였다. (16-17)

 

  유다의 거민들이 애굽으로 피난와서 앗수르의 무서움을 전하자 그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18절,“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여호와를 가르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중 하나를 장망성이라 칭하리라”  “맹세”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언약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장망성은 히 “이르 하헤레쓰” 직역하면 태양의 도시이다. (헤레쓰:태양) 그러나 의역하면 멸망의 도시이다. 다시 해석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시로 변하게 된다는 예언이다.  19절에도 “제단” “기둥”등 언약체결식을 상징하는 단어들이 등장하고 있다. 어쨌건 애굽은 회개하고 돌아온다.

 

  이사야의 멧세지를 들은 애굽사람들이 기도하기 시작했다. (20) 21절에는 예물을 드리고 경배 할 뿐아니라 그대로 행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망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국가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땅을 고친다고 했다. 멸망직전의 니느웨가 그랬다. 

 

1장부터 심판과 회복에 대한 멧세지가 계속 반복되다가 19장에 와서 획기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이는 이사야 때문이었다., 하여 우리도 이 시대의 이사야가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돌팔이 의사가 환자에게 위암말기라고 선언했다. 돌팔이 성도는 그 말을 듣고 한 주간 내내 기도했다. 그 가족들도 그렇게 했다. 일주일 후에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오진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기도중에 변화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돌팔이 의사를 통해서도 사람을 변화시키는데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담대해져야겠다.

 

22절 하나님은 그들을 치시지만 망하게하지 않고 고쳐주셨다. 주위의 모든 나라들이 멸망했으나 애굽은 살아남았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25절에 보면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 애굽을 가르켜 “나의백성“ 언약백성이라 칭하셨다.

 

19장은 이사야서의 중심이다. 이사야서는 크게 나누면 1-59장,60-66장으로 나뉜다. 심판과 회복이다. 그러나 이사야서의 결론은 단순한 회복이 아닌 이방인을 내 백성 삼겠다는 것이다.  66:21은 이사야서의 결론중의 결론이다. ”나는 그 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사야의 말이 아니다. 제사장,레위인은 실제적인 그들을 그렇게 삼겠다는 말씀일 수 있으나 하나님이 쓰시겠다는 것이다. 이미 라합,갈렙,다말을 비롯한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었으나 이사야는 충격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약백성 주위의 나라들을 경고한다. 이는 언약백성인 네가 들으라는 것이다. 너도 언약을 파기하면 이렇게 망한다. 또한 이방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누구든지 돌이키면 내 백성 삼겠다는 것이다.

 

20장,고난의 종

 

앗수르는 북 이스라엘을 함락시켰고 블레셋 최남단에 있는 블레셋 5대 수도 중 마지막 수도이며 강력한 요새인 아스돗을 함락시키고 애굽의 국경을 위협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행위멧세지를 전하게 하신다. 2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라” 선지자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무얼 요구하든지 순종한다. 백성들이 말로해서 듣지않자 행위멧세지를 전하게 한 것이다. 북 이스라엘의 우상숭배가 극에 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행위멧세지를 전하게 하셨다. 이제 남쪽 유다의 백성들에게 3년간 이사야가 벌거벗고 돌아다니게 하심으로 행위멧세지를 전하게 하신 것이다.

 

  겔24:15-21절에 보면 유다의 멸망 직전에 백성들이 듣지 않자 에스겔의 아내를 희생시키면서 까지 백성들에게 돌아올 것을 말씀하신다. 에스겔이 말하기를 오늘 밤 하나님께서 내 아내를 데려간다 하신다. 유다의 멸망이 내일이다. 그래도 듣지 않느냐? 백성들은 그래도 듣지 않았다.  이것이 선지자의 아픔이다. 이것이 선지자의 고난의 종으로서의 아픔이며 장차오실 메시야도 고난의 종으로 오실 것이다.

우리의 행위멧세지는 어떤것일까 생각해보라. 우리는 어떤 행위로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해야 할 것인가?

 

23장,열방의 심판

 

23장을 끝으로(13-23)열방에 대한 심판을 마치고 있다. 두로는 예루살렘 북서쪽으로 160키로 해안에 있는 페니키아의 항구도시이다. 1-7절은 두로의 멸망,8-14절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15-18절은 두로의 회복이다.

두로의 멸망의 계획자는 누구인가? (8) 하나님이다. 왜 두로가 멸망하는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 때문이다.(9) 그러면 언제 회복 시키시는가? 70년이다.(14-17) 70년을 반복하며 바벨의 멸망을 예언한다.

 

 

24장,온 땅에 대한 심판

 

1-12장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심판,13-23장은 열방에 대한 심판,24-27장은 온 땅에 대한 심판이 기록되어있다. 24-27장은 흔히 이사야의 묵시록이라 부른다. 1절을 보면 공허,황무,뒤집는다는 단어와 흩으신다는 말이 나오며 심판의 임박성을 보여준다. 2절에는 “일반일 것이다”가 6번 나온다. 3절에는 “온전히“가 두 번 반복된다. 파멸의 절대성과 총체성이다.  이땅의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심판의 이유는 5절 “땅이 거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기 때문에 ”즉 인간들의 죄 때문이다. 또하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파하였기 때문(5)이다.결국 이것은 언약적 저주이다. (6)

 

26장,하나님나라와 세상나라

 

1절의 견고한 성읍과 5절의 솟은 성은 대조를 이룬다. 1절은 하나님나라, 5절은 세상나라이다. 하나님나라는 세속적관점으로 보면 보잘것없다. 그러나 왜 견고한 성인가.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기 때문이다.(1) 세상나라 즉 바벨론은 솟은 성,거대한 성이지만 무너진다. 낮추시며 엎으시되(5) 밟으리니(6) 그들은 교만하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의 백성 즉 의인은 어떻게 해야하나? 심지가 견고해야한다.(3)그리고 여호와를 신뢰해야한다.(4) 하나님은 반듯이  신(언약을 나타냄)을 지키시기 때문이다.(2)

 

세상나라는 망한다. (14)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반듯이 크게 세우신다(15) 14절과 15절을 대조한다. 이제 하나님나라의 백성,의롭다고 인정된 의인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16절,간절히 기도해야한다. 17절,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구로하며 부르짖음같이 해야한다. 때로 바람같은 (18)일이 일어나도 포기하지 말고 20절, 밀실의 문을 닫고 기도하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해도 기도를 쉬지 말 것을 선지자는 당부한다. 현재의 이스라엘이 죽었다할 지라도(19)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라”(19)

 

 

 

27,그 날이 오면

 

주께서 혼돈의 용 리워야단을 죽이시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실 것이다. 묵시문학에 있어서의 용은 사탄의 세력을 의미한다. 날랜 뱀 리워야단은 빨리 흐르는 티그리스강에 있는 앗수르의 니느웨를 가르킨다.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은 굽은데가 많은 유프라테스강에있는 바벨론을 가르키고 바다에 있는 용은 애굽을 가르키고 있다.(사51:9) 원래 리워야단은 가나안 신화에 나오는 혼돈의 바다를 상징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세기의 혼돈을 정복하시듯이 악을 제거하시고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는 것이다.

 

2절은 포도원을 회복하는 것이다. 1절과 2절은 “그 날에”로 시작하는 병행구조를 띠고 있다. 심판과 구원,심판과 회복의 양면성과 대조를 보여주며 강조한다. 회복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1인칭에서 “야곱의 뿌리”(3인칭)로 넘어간다.(6)  회복의 단계는 뿌리박음,움이 돋음,꽃이 핌,결실함,지면에 채움으로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보여준다. 

 

  12-13절은 이사야 묵시록의 절정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서 모으시고(12) 이스라엘은 귀환한다.(13) 하수는 바벨론을, 애굽시내는  애굽을 의미한다. 열국에 흩어진 포로들을 모으는 목적은 예배를 위해서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다시 언약을 체결할 것이다. 이사야의 묵시록은 주께서 리워야단과 바다의 용을 죽이시고(1) 포도원을 회복하시며(2-6)이스라엘의 포로귀환을 알리는 나팔소리로 끝난다. (13) 그럼에도 미련한 백성들은 주의 자비를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나 참 하나님의 백성은  한 사람씩 돌아와 성산에서 경배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과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완성된다.

 

28장,역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

 

아하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속박을 벗어날 기회를 기다렸다. 주전 713-711, 앗수르에 대한 반역이 블레셋 아스돗에서 시작되었을 때 히스기야도 가담한다. 그러나 선지자 이사야의 권면으로 반 앗수르 동맹에서 탈퇴하여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친다. 705년 앗수르왕 사르곤이 전쟁터에서 죽자 후계자 문제로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애굽과 함께 반 앗수르 전선을 구축한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산헤립은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701년 애굽과 이디오피아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애굽으로 가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유다로 방향을 틀어 예루살렘을 포위한다. 앗수르와 애굽을 의지하는 히스기야에게 이사야는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권자임을 선포한다.

 

예루살렘은 언약을 파기하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자만에 빠져 멸망했던 사마리아에게서 반면교사를 삼아야했다. 언약을 파기하면 유다의 운명도 에브라임과 같다. 이사야는 기름진 골짜기의 높은 산지에 위치한 사마리아를 면류관에 비유하면서 그의 교만과 술취함을 고발한다. (1) 하나님은 심판의 도구로 앗수르를 들어 북 이스라엘을 침략 할 것이다. 외적인 화려함을 자랑하는 면류관(사마리아)은 침략자들의 발에 철저하게 유린 당할 것이다. 그러나 남은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다.(5)

그런데 유다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7)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 있어야 할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술에 취해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사야의 예언을 조롱한다. 이사야는 유다의 멸망을 예언한다.

 

29장,징계와 구원

 

본문은 주전 701년 앗수르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이다. 모든 소망이 끊어지고 함락만 기다리던 때에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으로 구원을 체험한다. 1절 아리엘은 예루살렘의 별명이다. 다윗이 진 친곳 ,하나님이 택하신 성이, 이제 하나님이 직접 공격자가 되신다.(2) 버림받은 예루살렘,언약백성이라는 자만으로 가득한 그들,종교행위만 일삼는 그들에게 대한 경고이다. 오늘 우리도,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릴수 있다는 것을 경고한다. 예루살렘은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극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신다.

 

언약백성은 언약체결로 보호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백성답게 살 것을 경고하신다. 아니면 무너뜨리겠다는 경고이다. 13절,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그 마음은 내게서 떠났다” 하나님의 진노는 종종 언약백성에 대한 호칭을 “이 백성”이라 하셨다. (출 32:9)

 

30장,애굽을 의지하지말라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친 애굽 정책을 경고한다. 애굽을 의지하는 것은 불신앙이다. 유다의 생존은 다윗언약을 신실하게 지킬 때만 가능하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11,12)는 이사야서의 주제인 ”구속자“이며 그는 언약의 하나님인 것을 강조한다. 본문의 배경은 역시 주전710년 앗수르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 할 때이다. 지도자들은 애굽을 의지하며 현실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한다. 근시안적인 그들은 드디어 눈이 멀었다.

 

애굽의 도움을 요청하기위하여 소안과 하네스(4)로 내려가 협상한다. 소안은 출애굽의 출발지가 아닌가. 바로를 초라하게 만들었던 그곳으로 내려가 애굽의 도움을 구하는 행태를 이사야는 경고한다. 그러면서 애굽을 무력한 라합으로 묘사한다. 여기의 라합은 태초에 여호와에 의해 베임을 당한 세력(사51:9)인데 애굽을 가르킨다. (시89:10,욥26:12) 유다는 어리석게도 승리자 여호와 대신 패배자 라합을 택하고 있다. 애굽은 세상,세속을 의미한다. 오늘 우리는 언약의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세상을 의지하는가?

 

1세대 기록선지자인 이사야는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을 서판에 기록한다.(8) 9절의 패역한 백성은 언약을 파기하고 범죄한 언약백성들을 호칭하고 있는 것이다. 유다의 운명은 산산조각이 난 옹기그릇과 같게 된다. 실수로 부서진 항아리는 다시 쓸 수 있지만 유다는 산산조각난 항아리같이 철저하게 멸망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멸망이 목적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위한 거룩함의 회복에 있는 것이다. 헤세드는 여전히 유다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약백성에게 고난의 떡과 물을 주신다. (20) 회개를 강력히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돌아오면 회복시켜주시겠다는 것이다. (23-26)

 

36-39장,하나님을 신뢰하라

 

36-39장은 이사야의 긴 네러티브이며 7-35장의 결론이다. 히스기야는 25세부터 왕이 되어 29년을 통치했다. 북쪽 이스라엘은 호세아3년에 앗수르의 공격으로 3년후 사마리아가 함락된다.  히스기야는 앗수르를 대적하고 남쪽으로 블레셋을 정복하고 개혁을 통해 산당을 철폐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망한 5년후 히스기야 재위 14년 앗수르의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하여 예루살렘이 포위된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자신의 잘못(반 앗수르 정책)을 인정하며 앗수르에게 은 3백 달란트,금 30달란트를 바쳤고 성전문과 기둥에서 벗긴 금을 주었다. 그러나 산헤립은 다시 유다를 공격하여 사면초가에 빠뜨린다.

 

산헤립은 유다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랍사게에게 편지를 주었다. 랍사게는 이름이 아닌 관명이다. 랍사게는 “윗못 수도곁 세탁자의 밭 큰 길“에 서서 항복을 요구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자리는 이사야가 아하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경고한 자리였다.  이제 그 아들 히스기야에게 랍사게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말고 앗수르를 의지하라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랍사게는 타협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항복이냐 몰살이냐(36:4-10)이다. 랍사게는 포위된 성의 모든 백성이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유다말로 말하는 고도의 심리전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애굽을 의지하지말라,하나님을 의지하지 말라, 히스기야를 의지하지 말라‘이다.

 

랍사게는 목청을 더욱 높혔다(36:12-20) 하나님을 신뢰하지 말라는 것이다. 선지자의 메시지는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인데, 랍사게는 이제 백성들을 회유하며 백성들에게 풍요와 곡식과 땅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어떤 나라이든 앗수르와 싸워 이긴적이 없다, 그러므로 여호와도 너희를 구원 할 수 없다는 것으로 말을 끝낸다. (영적 전쟁도 이와 같다)

 

이제 히스기야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이사야에게 이 말을 전하라고 했다. :오늘은 환란과 능욕과 책벌의 날이다. 이는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계시를 히스기야에게 전한다.(37:3-4) 강조하는 단어들은 “들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들으셨다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이 개입하실 차례이다. 우상과 다른, 다른 종교와의 차별성이다. 살아계신 하나님.

 

산헤립은 이제 항복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들고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펼쳐놓았다.  그리고 언약기도를 드린다. 이제부터 전쟁의 양상이 바뀌어졌다. 앗수르와 유다의 싸움에서 앗수르와 여호와의 싸움으로 바뀐 것이다. 우리가 언약기도를 드려야 할 이유가 여기있다.

 

열방을 무릎꿇게 만든 앗수르와 여호와의 싸움, 그리고 기도하는 히스기야와 백성들 .하나님의 최종응답은 35절이다.“대저 내가 나를 위하여,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삼하7:12절의 다윗언약을 상기시킨다. 다윗언약은 영원하다.

36-37장이 국가의 위기 앗수르의 위협이라면 38장은 히스기야의 개인적위기 ,죽을 병이다. 유다의 멸망으로 다윗언약이 끊어질 위기라면 자식이 없는 히스기야의 죽음도 다윗언약의 위기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선포하셨다. 다윗언약은 영원하다. 이제 히스기야가 이것을 믿느냐 아니 믿느냐이다.

우리도 이런 위기 앞에서 믿음의 시험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요16:33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셨는데 이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이다.

 

37:35절을 전후로 두개의 위기가 히스기야와 유다에게 다가왔다. 38장의 위기 역시 끝난 상황인 것을 이사야가 전한다. 앞에는 적인 랍사게로부터 왔고 이제는 선지자 이사야에게서 듣는다. 유언하라 너 죽는다. 히스기야는 배수의 진을 치며 벽을 마주하고 기도한다.  그 기도의 근거와 내용은 역시 37:35절이다. 또한 헤세드를 간절히 기도한다.  응답의 단어를 보자 “들었고 보았다”이다. 앞의 위기와 같은 응답이다.

성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 고난을 주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 히스기야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여주는 이사야의 긴 네레티브는 오늘 우리에게도 선포되어지고 있다.

 

39장은 바벨론 포로예언에 대한 내용이다. 병에서 나은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신들을 환영하고 무기고와 보물창고를 보여주는 죄를 범하였다. 앗수르가 망한 것이 하나님을 모독한 교만 때문이라면 이러한 히스기야의 행위 역시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교만 죄인 것을 지적한다. 하여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모든 소유가 바벨론으로 노획되어 질 것이며 그의 후손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왕궁의 환관이 될 것을 예언한다. 이사야는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지켜보며 유다도 곧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현실감있고 생동감있게 증언하고 있다.

 

40-48장,유다의 회복

 

2부에서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가 고레스를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과 그림자인 고레스 대신에 실체로 오시는 여호와의 종, 그리고 그분은 고레스와 어떤 점이 다른지 , 즉 그의 고난,죽음,부활의 예언들을 보게 될 것이다. 이사야 2부의 목적은 포로된 언약백성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기위해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제1청중이며 이후에 오실 메시야까지 그리고 그를 통해서 세워지는 영원한 하나님나라까지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2부는 세부분으로 나뉜다. 40장은 서론,41-48장은 고레스를 통한 해방과 귀한,49-56:8은 여호와의 종의 구속사역이다.

 

40장은 이사야2부의 서론이며 2부 전체의 요약이다. 40장은 매우 아름다운 시가체로 기록되었으며 전란으로 지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다. 내용은 세가지이다.

1.포로로 잡힌 백성들을 위로한다.

2.그들의 죄의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복이 온다.

3.돌아와서 누리는 안식

 

1절의 “내 백성”은 언약백성의 호칭이다. 이 백성에서 내 백성(암미)으로 바뀐 것이다.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고 부르시는 음성은 “내 백성을 위로하라“이다. 2절에서는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죄사함의 선언으로 구속이 이루어진다. 5절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이것은 바벨론 귀환을 제2 출애굽으로 묘사한 것이다. 광야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셨듯이 말이다. 요한은 1:14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을 제3 출애굽으로 묘사하고 있다.

 

첫 번째 엑소더스는 애굽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

두 번째 출애굽은 바벨론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

세 번째 출애굽에서 예수님은 별세(엑소더스:눅9:29-31)를 쓰시면서 자신의 오심이 제3출애굽인 것을 묘사하신다. 

그러나 아직 4번째 출애굽이 남았다. 사탄은 아마겟돈 전쟁으로 최후의 발악을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백성을 세상에서 구원하신다. 바로 재림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엑소더스때 마다 구원 받은 백성들은 상이 있었다. 마지막에도 상급은 있다고 강조하신다.

 

40:27절의 “야곱”“이스라엘”은 언약 백성의 호칭이다. 그들은 언약백성이 고통당하는 것을 하나님이 외면하신다고 불평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명철(테부나:깊은 생각(현대인의 성경))이다. 그들은 옛 출애굽같이  사막을 지나면서도 피곤하거나 곤비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독수리처럼 말이다.

 

41장:하나님의 구원계획

 

41:2절 “로 불러서”세운 이는 고레스이다.

42:6절 “나 여호와가 로 너를 불렀은 즉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라” 여기는 여호와의 종 즉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 고레스와 여호와의 종이 교차하면서 등장한다. 고레스는 그림자, 그리스도는 실체이며 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백성을 향한 계획의 전모가 밝혀진다. 종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의를 드러낼 것이다.

 

41장부터 언약백성의 호칭이 더 정답게 불려진다.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이 드러나고 있다. 41:8“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그리고 언약백성들에게 늘 하시는 말씀(언약문구)은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10,13) 14절에 다시 언약백성을 호칭하며 발전시킨다. “네 구속자(고엘)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14절의 너희 이스라엘 사람은 “메테 이스라엘”로서 적은 이스라엘이며 이것은 지렁이라는 표현과 같다. 적지만 끝까지 보호하시고 사랑하시는 이유는 내 백성,내 새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종의 노래(42:1-17)

 

1절의 종(아브띠:아바드에서 나온 소유격 양성단수)은 41:8절의 언약백성을 호칭하는 종과 다르다. 종은 노예가 아닌 언약관계(계약관계)의 종이다. 즉 사명이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종의 임무는 공의(미쉬파트)를 실현하는 것이다. 1절은 메시야의 사역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3절은 위로와 회복사역을 묘사한다. 종의 사역은 6절의 두 가지로 요약된다. “백성의 언약이 되며 이방의 빛이 되는 것“ 백성의 언약은 백성이 언약파기로 포로가 되었으나 다시 언약백성이 되게하는 것이며 이방의 빛은 이방인을 구원하는 사역을 가르킨다.

 

7절은 예수께서  눅4:18-19절을 회당에서 선포하심으로 자신에 대한 예언의 성취를 선언하셨다(사61:1) 이 모든 계획은 8절 자신의 이름을 밝힘으로 확인하신다.”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언약의 하나님이며 반듯이 언약을 성취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종의 사명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전수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철저하게 하나님만 의지하는 종으로,겸손한 종으로 ,긍휼의 종으로,낙심하지 않는 종으로 이방의 빛이 되어야하겠다.

 

43장,언약백성에 대한 사랑

 

회복의 근거는 사랑이다. 언약적관계에서의 끊을 수 없는 사랑(헤세드)이다. 4절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아니 아하브티카“ 곧 ’내가 너를 사랑한다”이다. 1인칭이 강조된다.  하나님의 사랑의 시작은 창조이다. “야곱‘,”이스라엘“은 언약백성에 대한 호칭이다. 언약을 맺어서 내 백성 내 새끼가 아니라 훨씬 그 이전을 창조하셨다. 여기서 창1:1절의 “바라“를 쓰고 있다. 너는 내 것이다는 것은 내 새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소유이다. 시내산 언약의 골자 인 출19:5-6을 보면 내소유,제사장나라,거룩한 백성이다. 이사야선지자는 시내산언약을 이야기하고 있다.

 

  4절의 ”보배”는 모압언약의 골자인 ”보배“이며 ”내소유‘이다.(신26:18-19) 언약백성을 향한 언약문구인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는 말씀이 반복된다. (2,5)

 

순서를 보자.

   창조-조성-구속-지명

  창조와 구속이다. 너를 구원한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자”(3,14)이다. 구속은 “가알”을 쓰면서 역시 출애굽할 때 쓰던 단어를 쓰고 있다.  그러므로 바벨론은 제2출애굽으로 이사야는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언약백성을 증인 삼기 위해서이다. (9,12) 바벨론은 단순한 제2출애굽 사건이 아니라 장차오실 메시아로 이어지는 구원사역, 하나님나라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44장,사랑의 확증

 

언약을 파기한(43:22-24)그들의 죄를 사하신 (25) 하나님은, 44장에서 다시 사랑을 확증하신다. 1절 “나의 종 야곱,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며(앗싸) 모태에서부터 너를 조성(야차르)하고 언약을 맺어 이스라엘이라 호칭하였다는 것을 강조한다.(5,6) ‘두려워 말라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8) 21절 다시 ”야곱,이스라엘”아 잊지마라 하시며 하나님의 계획을 예언한다.

1. 예루살렘의 회복(26)

2. 유다의 회복(26)

3. 고레스의 사명

4. 성전재건(28)

 

150년 후에 올 인물인 고레스에 대한 예언은 놀랍다. 고레스는 알지 못할지라도(45:5)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신다. 앗수르를 이스라엘의 징계도구로 바벨론을 유다의 징계도구로 사용하신 하나님은 이제  페르샤의 고레스를 들어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

 

46장.바벨론의 멸망

 

1절의 “벨”은 바벨론의 수호신인 “벨-말둑”이고 “느보“는 ”벨‘의 아들이다. 바벨론제국은  신들을 앞세워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그것들 역시 죽은 우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선언한다. 바벨론의 멸망원인은 사치와 교만이다. (47:8) 그리고 우상숭배(47:9)와 언약백성에 대한 학대이다. (47:6) 요한계시록에서는 로마를 바벨론으로 해석하며 세상역시 바벨론으로 증거한다. 바벨론의 멸망을 통해 세상나라의 멸망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교회의 가장 큰 적은 세속주의 이며 교만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48장,하나님의 구원계획

 

고레스를 종으로 사용하신 하나님은 고레스 이후에 오실 여호와의 종, 곧 메시야와 연결시키고 계신다. 16절에 보면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내가” 누구인가?  하나님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음에 여호와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메시야를 가르키는 것이다. 예수께서 요한복음에 자주사용하신 표현이다(에고 에이미) 다시 16절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 “나와 그 신‘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가르키는 말이다. 나를 혼자 보내지 않고 성령을 같이 보내셨다.42:1절의 종의 노래에서도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 즉” 메시야와 함께 오실 성령에 대한 예언이 집중되고 있다.

여기의 1인칭은 49장1절부터 본격적으로 나오는 1인칭을 미리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49장은 대표적 메시야 예언이다.

 

49장,종의 사명

 

여호와는 나(종)를 부르시고 내 이름을 말씀하셨다.(3) 나를 부르신 목적은 단순한 회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의 빛“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땅끝까지 이르게 하려 하심이다.(6) 또한 그들로 백성의 언약 즉 새 언약을 세우려 하심이다(8)

 

52:13-53:12,종의 고난

 

종은 높이 들려 존귀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얼굴과 모양이 상하게 되니 열방이 놀랜다. 즉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해 사역을 완성한다. 종은 멸시,간고,질고를 겪으신다. 종은 십자가를 지고 우리 죄를 위해 죽는다.

 

52:13절의 형통은 “사칼”(썩시-드)이다. 세속적 관점으로 보는 종이 아닌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형통한 종, 존귀한 종이다.그러므로 종은 고난을 통과해야한다.

53장의 종은 대속적 고난이다.(4-6),종의 죽음(7-9), 그리고 종의 승리(10-12) 종으로 사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종으로 살아야한다.

 

54:1-55:13, 영원한 언약

 

53장이 남종의 노래(대속적고난)라면 54장은 여종의 노래(실제적고난)이다. 종의 현실은 파괴된 시온,예루살렘,성전파괴,포로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이다. 과연 회복 될 수 있을까? 주변 국가는 ‘아니오‘ 라고 한다.

첫째,이스라엘을 잉태치 못한 여인으로 비유한다. 4절,수치,부끄러움.

두 번째 4절의 과부“알마나”는 가장 불쌍한 과부이다. 돈도 없고 보호도 받지 못하는 과부이다.

셋째 6절의 버림받은 여인.

네째,죄 때문에 쫒겨난 여인(8)

 

하나님과의 깨어진 계약관계, 버려진 성도,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  이런 자들이  과연회복될 수 있을 것인가?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그렇다 이다. 그래서

1절,노래 할 지어다 라고 명령하신다.

5절 하나님의 호칭이 너를 지으신자.남편,만군의 여호와, 구속자,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온 세상의 하나님이다. 회복케하시는 하나님.  그 이유는 “영원한 자비“ 헤세드 때문이다.

10절‘,인자“ 헤세드,다시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

55장,이스라엘의 거룩한자(5.) 그는“고엘“로 오셔서 완전한 회복을 주신다.  그리고 영원한 언약을 세우신다.(3)

 

61장,메시야사역

 

메시아사역은 회복에 있다. 1.가난한 자에게 기쁜소식을  2.마음상한 자를 고치시고  3.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4.갇힌 자에게 해방을  5.슬픈 자에게 위로를  6.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자로 일컬음을 얻게하는 것.

그런데 메시야사역은  기름부음을 받으므로 시작된다. 성령을 떠난 그리스도를 생각 할 수 없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셨고(눅3:2),성령의 인도를 받으셨고(눅4:1),제자들에게도 성령을 기다리라(눅24:49)고 하셨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오셨고 그리스도와 함께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운동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운동이어야지 여기에서 이탈하면 신비주의에 빠지고 만다. 성령의 역사는 성령 자신을 증거하고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를 드러내야할 것이다.

 

63장,심판주 그리스도

 

3절의 포도즙 틀은 계시록에서 심판 모티브로 등장한다. 계19:15절의 재림주의 모습은 이사야가 예언한 것과 같다. 63:7-64:12절은 구원받은 백성의 감사 기도이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간절한 기도이다. 64:1,3에 “주는 강림하시고‘, ”주께서 강림하사“

 

65-66장,새 하늘과 새 땅

 

앞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66장은 새 하늘과 새 땅이며 제외될 자와 거기에 영원히 거할 자를 구별한다. 이사야서는 성경66권의 요약 같으며 66장은 계시록의 마지막부분을 보여준다.

 

                          예레미야서

 

 

 

예레미야가 살던 배경은 앗수르의 멸망과 신흥 바벨론의 등장 그리고 애굽 사이에 낀 약소국 유다였다. 요시야가 죽고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이 605년 왕이 되었다. 이후 598년 예루살렘공격,여호야김의 죽음,여호야긴의 1차 포로,그리고 시드기야에 의한 멸망으로 숨가쁘게 진행된다. 결국 586년 유다가 망하고 남겨진 자들은 총독 그다랴를 죽이고 모두 애굽으로 내려간다.(역 출애굽)

 

유다의 소망이었던 요시야왕 13년(627년) 요시야의 종교개혁(622)이 시작되기 전 예레미야의 사역이 시작된다. 요시아의 개혁은 역사상 가장 위대하며 산당 전체를 철폐 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직 백성들의 마음을 파고들지 못하였다. 예레미야의 사역은 바로 이때 시작된다. 예레미야서에는 언어유희와 행위메세지가 특히 강조되고 있다.

 

1장-25장(전반부):예레미야의 애통

언약백성들이 언약을 파기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이 직접 때리시며 유다를 망하게 하시는 슬픔이다. 마지막은 바벨론에 끌려간 여호야긴과 백성들에 대한 권면과 소망이 나온다

 

26-52(후반부):역사적 사건에서의 예언

여호야김의 즉위 초부터 유다의 멸망이후까지 기록된다. 마지막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애굽으로 떠나는 백성들을 향한 심판이다. 예레미야가 슬픈 이유는 유다의 멸망과 함께 애굽으로 끌려 내려가야하는 슬픔이다.

이사야는 아직 포로가 안된 가운데 예언했고 에스겔은 바벨론으로 끌려갔지만 안정된 상황에서 기록되었다. 그러나 예레미야서는 불태워지고(36)다시 기록되고, 훼손,불에 탐,파괴, 속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서에 나타난 신학

 

철저하게 모압언약(신명기 전체)의 패턴을 따르고 있다.

심판의 선언

대부분의 내용이 정죄와 심판의 언약적저주이다. 소망의 멧세지는 30-33장 뿐이다.  언약적저주의 근본은 “내 백성이(언약백성) 두 가지 악을 행하였는데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언약의 하나님을 버린 것과 다른 웅덩이 즉 우상 숭배한 것이다.  이 죄는 용서가 불가능하다.(17;1)

 

외로운 선지자 예레미야는 애굽과 손 잡고 바벨론과 대항하자는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바벨론에 복종하고 포로로 잡힌 자들은 70년을 기다리라는 친 바벨론주의는 그들이 보기에는 민족의 반역자였다. 그래서 감옥에 가두고 죽이려고 모함하고 실행했던 것이다. 마지막에는 애굽에 내려가지 말라는 예언을 거부하고 예레미야를 강제로 애굽으로 끌고가는 것은 신명기의 언약적저주를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44-46장)

 

소망의 선포(새언약)

언약적 소망은 조건적 소망과 무조건적 소망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예레미야서에는 무조건적 소망이 강조된다. 즉 회개를 요구하지 않는 소망이다. 70년이 미리 결정된 것도 그와 같다. 유다의 멸망은 회개와 관계없이 필연이다. 그리고 남은 자를 통해서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30-33)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새 언약이다.(31:31-34) 그러나 기존 언약체결식은 돌을 세웠으나 이제 마음에 새길 것이라는 것이다. 영원한 언약이기에 하나님은 다시 시작하신다. 이것은 이사야서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연결되며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과도 일치한다. 징계 후에 다시 시작하시는 하나님은 영원한 언약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내용

 

1장,소명

 

예레미야는 아나돗출신의 제사장이었다. 아나돗은 솔로몬과 아도니야의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난 제사장들이 유배되었던 곳이다. 아도니야는 솔로몬보다 왕위계승 서열이 앞섰고 지지한 사람들도 강력했다. 군대장관 요압,대제사장 아비아달이 지지했다. 그러나 솔로몬은 선지자 나단과 제사장 사독 뿐이었다. 결국 다윗이 솔로몬을 결정하자 분위기는 반전되어 아도니야와 그의 추종세력은 피의 댓가를 치르게 된다. 아도니야는 죽었으나 아비아달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추방된 곳이 아나돗이다. 이곳으로 쫒겨온 제사장 계열은 사독계열의 다윗언약과 솔로몬 성전보다,시내산언약의 기초위에 실로와 같은 곳을 더욱 사모했다.

 

소외된 제사장 그룹의 대변자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던 예레미야(그러나 예레미야는 환경이나 배경을 탓한 적이 없다)는 기득권 세력의 핍박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그의 예언조차 거부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예레미야가 사역을 시작한 요시야 13년은 아직 종교개혁 전이라 므낫세 시절의 우상숭배가 편만한 시절이었으며 개혁이후에는 철저히 요시아를 도왔다. 그리고 안타깝게 요시야가 므깃도 전투에서 느고에게 죽었을 때 요시야의 죽음을 슬퍼했다.

 

예레미야의 첫번째 환상,살구나무인 “샤케드는 ”쇼케드(지켜보다)와 비슷한 발음이다. 즉 랭귀지 프레이 (언어유희)를 통한 강조이다. 예레미야가 보고있는 것은 살구나무이나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심을 강조한다. 또한 가지로 번역된 “막켈”은 진노의 심판을 상징하는 단어로서 하나님이 진노의 심판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이다.

 

두 번째 환상은  끊는 가마솥 이다. 이 환상을 통해 앞의 환상이 더욱 구체화되는 것이다. 이미 유다 쪽으로 기울어진 가마솥은 장차 유다에게 향할 재앙을 상징하는 것이다.

재앙의 이유는 언약파기(우상숭배,16절)였다. 두 개의 환상은 예레미야가 어떻게 사역 할지의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예레미야가 평생 역동적인 사역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5절 “알았고”‘구별하였고 “ ”세웠다“ 자신의 의지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이다. 과거,현재,미래를 속속들이 아신다. 구별은 ”카도쉬“ 시내산언약의 용어이다. 예레미야는 거부한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라 말 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6) 모세도 그랬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아는 것 보다 하나님이 나를 아심을 알아야한다.

 

나의 관점에서 나를 보기가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보기이다.하나님은 언약문구를 사용하신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8,17,19) 또 하나는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9) 이 말씀은 네가 말하는 것이 곧 내가 말하는 것이란 뜻이다.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 말씀은 “내가 너를 견고한 성읍,쇠기둥,놋성벽이 되게 하였은 즉“(18) 누구도 예레미야를 대적할 이는 없는 것이다. 우리도 이런 확신이 있어야한다. 그리고 이시대의 예레미야로 살아야한다.

 

2장,언약파기

 

“...네 결혼 때의 사랑..”(2) 언약관계를 말하고 있다. 언약을 파기한 그들을 묘사한다.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으니” 하나님을 버린 것(언약파기)과 웅덩이를 판 것(우상숭배) ,그러나 그 웅덩이는 터진 것이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을 잘 따랐는데 가나안에 들어와 배신 한 것이다. 바알은 히브리어로 발음하면“헤벨”이다 전도서에 나오는 “헛되다‘라는 뜻이다. 고로 바알의 의미는 헛되다는 것에 대한 언어유희이다. 무익한 것을 쫒는 자들에 대한 비유이다.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백성들.

 

16장,행위멧세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이지만 청중들이 듣지 않을 때 하나님은 좀더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방법으로 행위메세지를 전하게 하셨다. (호세아)

 

1.결혼하지말라(2-4)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들이 듣지 않을 때 자극적인 처방을 내리셨다. 선지자는 극단적인 명령에도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호세아에게는 음란한 아내와 결혼하게 하시지만 예레미야에게는 결혼하지 못하게 하신다. 모두가 죽게 될 텐데 결혼 할 필요가 없다. 회개를 촉구하는 행위메세지이다. 자손이 끊어진다는 것은 미래가없다. 파멸이라는 것이다. 유다의 완전한 멸망 ,회복의 불가능이다.

 

2.초상집에 들어가지 말라(5-7)

초상집에 가는 강장 큰 이유는 위로인데 유다에게 위로나 긍휼은 없다는 상징메세지이다.

 

3.잔치집에 가지말라(8-9)

이제 잔치 할 일도 없다. 기쁨은 사라진다는 상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헤세드는 포로로 끌려간 그들이 제2출애굽할 것을 말씀하신다.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실 것이다.

 

18장,토기장이의 집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의문에 휩싸인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토기장이의 집으로 가라 명하신다. 당시 유다의 마을 마다 토기장이의 집이 한개 정도 있었다.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토기를 빚는 모습을 본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시고 당신의 작품을 빚으신다. 그런데 작품이 망가졌다. 하나님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신다. 경고와 소망이 동시에 보여진다.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6). 8절, 돌이키면(11) 재앙을 거두겠다. 계속되는 1인칭은 강조용법이다. 예레미야가 깨달은 것은 우리를 빚으시는 토기장이 되시는 하나님은 포로가 되는 과정을 통해서 다시 빚으시는 것이지 결코 버리는 것이 아니다.

 

1:5절의 지었다는 말은 “야짜르”이며 토기장이는 “요쩨르”이다. 나를 “야짜르‘하신 하나님은 ”요쩨르“이시다. 그러나 그들은 돌이키는 것을 거부한다. 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파상하듯(4), 산산조각 내신다는 뜻으로 회복 불가능을 의미한다.  이같은 언어유희는 예레미야1장부터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

 

20장,제사장과 선지자

 

제사장은 제도권 안에 있었으므로 왕의 눈치와 백성들의 눈치도 보아야했다. 고로 자연히 타락할 소지가 많았다. 그러나 선지자는 제도권 밖에 있었으므로 보다 자유로웠다. 하여 둘은 견원지간이 될 소지가 많았다. 하나님께서는 왕의 제도를 원하는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주셨으나 왕을 견제하기 위해서 선지자제도를 시작하셨다.

 

제사장의 우두머리인 바스홀은 성전 수호자였다. 이제 개혁은 시작되었고 성전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바스홀은 제일 인기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기도를 받으려고 사람들은 줄을 섰고, 많은 제사장들을 관리하고 조직하며,제사를 회복하고 여러모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바스홀의 설교는 인기절정이었다. 그의 설교 주제는 늘 “샬롬”(8:11)이었다. 그는 낙관주의자였다. 걱정하지말라.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평안을 담보로 받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낙관주의, 번영주의는 위험하다. 예레미야는 참을 수 없었다. 8:10, 평강,평강,뭐가 평강이냐?  그렇다.선지자는 바로 잡아주는 것이다. 평강을 얻기위해서는 치열한 영적싸움이 있어야 한다. 고난도 이겨야한다. 뜨거운 회개와 자아성찰도 있어야한다. 무조건 평강은 마취제나 말 장난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설교하면 아무도 안 듣는다. 그러나 바스홀이 설교하면 구름떼 같이 몰려든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일부러 모여든 사람들을 쫒아 보내셨다.

 

바스홀에겐 예레미야가 눈에 가시였다. 심판,포로,회개를 외치는 예레미야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급기야 체포한 후 태형을 치고 착고에 채웠다. 예레미야는 거짓선지자로 낙인이 찍혔다. 성공지상주의, 축복지상주의, 샬롬지상주의는 늘 위험하다. 

 

우리는 이시대의 예레미야가 되어야한다. 아니 예레미야로 살아야한다.  예레미야는 세가지 고난을 받는다.

첫째는 육체적 고난이요

둘째는 영적고난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따진다. “주께서 나를 권유하셔서“(7) 권유는 꼬셔서이다.  왜 나를 조롱하십니까?  왜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되게 하십니까?(8) 그러나 예레미야는 잠시 흔들렸으나 다시 회복된다. ”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 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해서 견딜 수 없나이다.“(9)

예레미야의 세 번째 고난은 비방이다. 거짓비방, 이것은 정말 견디기 어렵다. 10절의 고소. 적들은 내가 타락하고 유혹에 빠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그러나 승리의 이유는 11절이다. “그러하오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언약문구이다. 하여 13절 ,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께 노래하고 찬양하여 영광을 돌리고 있다.

 

21장,지도자의 책임

 

예레미야는 요시아의 아들들 중에 시드기야를 먼저 책망하고 있다. 연대순으로 기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마지막왕 시드기야에게 가장 큰 책임을 묻는 것이다. 시드기야는 방백 바스훌(20장의 바스훌과 다르다)과 제사장 스바냐(스바냐서 기록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 바벨론의 침공에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물었다. 왕 뿐 아니라 모든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다.

시드기야의 기대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4번 반복)기사를 행하실 것이었다. 즉 극적인 구원을 기대한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의 헛된 희망을 좌절시킨다. (3-7).여기서는 대조적으로 1인칭이 반복된다. 과거에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언약백성을 친히 공격하시는 거룩한 전사로 묘사된다. (5:든 손과 강한 팔) 살아남는 길은 오직 항복 뿐이다.

 

25장,23년간 열심히 전했으나

 

본문의 중심단어는 ‘부지런히’(3,4) 하쉬켐(동사)이다. 명사는 세켐(세겜)이다. 세겜언약으로 유명한 단어이다. 동사로 쓰일 때는 “짐을 어깨에 올리다“라는 뜻이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깨에 메고 23년을 쉬지않고 달려왔다. 역동적인 삶을 살아온 것이다. 예레미야는 새벽마다 기도했다.(애가3:18-23) ”소망이 끊어졌으나... 여호와의 헤세드(긍휼)가 아침마다 새로우니 ..“ 넘어졌으나 새벽마다 깨닫는 헤세드 때문에 23년을 달려온 것이다.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기, 그러나 가장 역동적인 삶을 살았던 예레미야의 고백을 기억하라.

 

31장,새언약

 

새 언약이 무엇인가? 시내산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 백성들(32).“헤렘”(진멸)되어 마땅하나 하나님의 헤세드는 다시 시작하신다. 이것이 새 언약의 시작이다. 새 언약은 새로운 언약의 내용이 아니다. 33절, 시내산언약을 그대로 가져온다. 언약의 연속성, 그리고 영원한 언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가 무었인가? 기록판이다. 시내산 언약에서는 돌판에 새겼으나 새 언약은 마음판에 새기는 것이다. 고로 파기 할 수 없는 언약이란 것이다. 그리고 언약체결식을 한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33)의 언약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새 언약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며 일방적인 것이다. 또 하나, 새 언약에서 나타나는 것은 죄의 용서이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34)라는 일방적 선언을 하신다. 금강석 철필로 기록 된 그들의 죄(17:1)가 사해지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32장,위기

 

예레미야는 유다의 최후를 목도하고 있었다. 언약백성과 위대한 예루살렘 성, 성전이 있는 영원한 도성이 바벨론 군대에 포위되어 있었다. 적은 토성을 쌓아 올렸고 성문은 공성무기에 의해 쿵 쿵 소리를 내며 부셔지기 직전의 상황이다.  백성들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놀라운 것은 백성들이 뒷문을 통해 왕래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루는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5k 떨어진 고향 아나돗에 가려고 성문을 나서는 순간 수문장이 그를 체포했다. 명분은 적에게 항복하러 간다는 것이었다.

 

위대한 요시아왕의 고문이었고 당대 최고의 선지자였지만 그들은 예레미야를 함부로 대했다. 고관들은 예레미야에게 태형을 가한 후 옥에 가두었다. 시드기야 치세10년 예레미야는 10년 동안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다. 시드기야는 그때는 듣는 듯 했으나 신하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인물이었다. 하여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다 했던 예레미야였다. 외교정책도 그와 같았다. 애굽에 붙었다,바벨론에게 붙었다 하다가 바벨론이 쳐들어온 것이다.

 

감옥에 갇힌 예레미야를 제일 먼저 찾아온 사람은 다름아닌 시드기야였다. 시드기야는 몰래 예레미야를 만났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 했으나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왕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진흙구덩이에 던져넣었다. 예레미야는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신속히 구출하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37장:예레미야서는 비 연대순으로 기록되었다.) 환관이며,이디오피아사람 에벳멜렉이 급히 왕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리고 왕의 허락을 받았다. 그는 급히 30명을 데리고 의복창고로 달려가 밧줄과 옷을 엮어 예레미야를 끌어올렸다.

 

예레미야는 고독했다. 선지자들이 그러하지만 늘 외로왔다. 모두가 대적자들이었다. 그러나 진실한 친구가 있었으니 서기관 바룩이었다. 그는 끝까지 예레미야와 함께했다.

예레미야가 다시 감옥에 갇혔을 때 한 사람이 면회를 왔다. 유일한 피붙이 조카 하나멜이었다. 너무나 반가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카가 이런 요구를 했다. 내가 지금 어려우니 고향의 땅을 팔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레25)에 가장 어려울 때 가장 가까운 친척이 사주게 되어있는데 삼촌이 그 땅을 사주시오. 조카가 제 정신인가? 이미 적의 수중에 떨어진 땅을 팔겠다니?

예레미야의 멧세지는 “너희는 포로가 된다. 그러나 곧 반듯이 돌아온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지 않았느냐? 이 땅을 사십시오. 아니 사셔서 그 말씀을 증명해 보이십시오. 교활한 조카는 증인들과 수많은 구경꾼까지 끌고 온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예레미야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반응을 보는 것은 재미있어했다. 예레미야는 값을 치르고 증인들을 세우고 매매계약서에 서명한 후 봉인하고 바룩에게 이 문서를 토기에 담아 보관하라, 지금은 적의 수중에 떨어졌으나 반듯이  돌아오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질 것이다. 

 

28절부터 매절마다 1인칭이 강조된다. 예레미야의 확신은 네 말이 내 말처럼 되리라는 말씀 같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이 행위 멧세지를 통하여 예레미야의 멧세지는 더욱 강력하게 선포되어진 것이다.

 

34장,언약체결식

 

8절은 시드기야가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들과 언약체결식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언약의 핵심은 신15:12-18절의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속하셨듯이 이스라엘도 종이 된 동족을 7년째 되는 해에 놓아주어야 했다. 그러나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언약체결식을 통하여 이일을 실천하기를 원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587년 애굽의 견제로 바벨론이 포위를 풀자 상황은 달라졌다. “방백과 모든 백성들은 ”이 언약을 파기하고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복종시켜 노비로 삼았다.(11)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뜻이 변하여 내 이름을 더렵혔다”(16)

 

하나님은 “드롤”이라는 단어를 두 번 쓰셨다. 하나님께서 자유케 하시겠다는 것이다. 언약체결식을 할때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가운데로 지나가는 의식을 행한 것(창15:17)은 쌍방 중 언약파기자는 쪼개어진다는 의미였다. 이 말씀대로 바벨론 군대는 다시 돌아왔고 유다를 쪼개버린 것이다.

 

35장,레갑족속의 순종

 

  35장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조법으로 강조된다.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는 말씀이 1절과 12절에 나오고 있다. 앞의 부분은 말씀에 순종하는 레갑족속에게 뒤의 말씀은 불순종하는 백성들에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상반된 명령이 떨어진다. 레갑족속에게는 말씀을 어기라는 주문과 함께 성전 방에 들어가서 레갑족속의 조상인 요나답의 명령을 어기고 포도주를 마시게 했고 반면에 유다백성들에게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경고와 권고, 즉 말씀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레갑자손은 요나답의 명령에 순종했고 백성들은 듣지 않았다. 이 극명한 대조를 통해 유다백성들은 더 이상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레갑족속이 누구인가? 때는 여호야김3년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가 땅에 떨어진 때, 시원한 한 줄기 소낙비와 같이 우리를 시원케하는 사건이다. 예루살렘 함락과 함께 1차 포로 직전의 상황이 펼쳐진다.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이 예루살렘에 들려왔다.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은 갑자기 피난민들로 북적거렸다.  그런데 어느날 이상한 사람들이 거리에 나타났다. 그들은 레갑족속이라 불리웠다.  그들은 일정한 곳에 집을 짓지 않고 여기저기 천막생활을 하며 살았다. 그들은 마차,전차,금속무기를 만드는 장인들이었다. 그들은 자유롭게 다니며 도시의 외곽에 캠프를 설치하곤했다. 비뚤어진 마차바퀴,무기를 수리하거나 주문하는 일들이 그들이 오기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들은 많지 않지만 똘똘 뭉쳐살았다.

 

레갑족속의 조상은 미디안족속이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 ,즉 겐 족속이다. 그들은 귀화하여 언약백성이 되었고 야베스와 같은 인물은 서기관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드보라와 싸웠던 시스라의 전차부대를 기억하시는가? 그 시스라의 이마에 쇠를 박아버린 여인 “야엘”도 겐 족속이다. (삿5:24) 그들의 후손 중에 레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후손들에게 절대 술을 먹지말라고 가르쳤다. 후손들은 신실하게 이 명령을 지켜왔다.

 

이 독특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나타나자 마자 온 예루살렘에 소문이 퍼졌다. 예레미야는 이들을 성전의 방으로 초청하여 포도주를 내어 놓았다. 그 방은 탁트인 공개된 방으로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방이었다. 탁자위에는 포도주와 잔이 놓였을 뿐이다. 레갑족속도 이 위대한 선지자 예레미야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터라 기쁜 마음으로 이 초대에 응했다. 예레미야가 히브리 말로 외쳤다.“르차임”(건배)! 그들은 과연 “르차임” 할 것인가?

 

포도주를 먹는 것이 그렇게 죄가 되는 것일까? 예수님도 가나의 혼인찬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들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습니다.  우리 조상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너희는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시대의 조류를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절제되고 훈련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제 예레미야는 주위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말한다. 이들은 조상의 명령을 생명같이 여기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이 본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다. 이들은 조상의 명령을 지키려하는데 너희는 내가 직접 말하고 거듭 말하고 있으나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언약을 지켜라”15,16,17 듣지 않는 자는 포로로 끌려가고 18,19 레갑족속은 영원하니라.

 

37장,예레미야의 투옥

 

유다의 멸망 직전 시드기야 9-11년(588-586), 느브갓네살은 여호야긴을 폐위시키고 꼭두각시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어리석고 줏대없는 시드기야는 고관들의 압력에 굴복해서 바벨론에게 반기를 들게 된다. 바벨론은 즉시 군대를 동원해 유다를 공격했으나 애굽의 개입으로 인해 군사를 잠시 물린다.(37:11) 그러나 곧 예루살렘은 다시 포위를 당하고 예레미야는 친 바벨론인사라는 이유로 투옥된다. 유다는 멸망하고 느브갓네살은 그다랴를 유다총독으로 임명한다.(39:14)

 

시드기야는 신하들을 예레미야에게 보내어 기도를 요청한다(3). 이것은 그의 두 번째 기도요청이다. 처음은 21:1-10,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였다. 지금은 588년 여름(5)이다. 이때 자유케했던 노예들을 다시 종으로 삼는 언약파기가 일어난다. (34:8).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요청한 이유는 701년에 있었던 이사야의 기도로 산헤립의 군대 18만 5천을 물리친 사건을  기대하는 것이다. 더구나 애굽이 유다를 돕기위해 군대를 보냈다는 소문이 바벨론을 잠시 물러가게 했으니 시드기야는 기대를 갖고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예언은 단호했다. 바벨론은 다시 올 것이다.그리고 예루살렘은 불살라진다.(10)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참 선지자로 믿고 있었다. 하여 다시 묻는다. 여호와께 받은 말씀이 있느냐?(17) 예레미야는 항복을 권유한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신하들에게 눌려 우유부단한다.

 

38장,예레미야의 수난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선포한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2-3) 방백들은 예레미야를 다시 투옥한다. 그리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매국적 발언에 대해 예레미야를 처형할 것을 청한다. (4)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호의적이었으나 더 이상 그를 보호 할 수 없게 된다. (5)  하여 예레미야는 구덩이에 던져지게 된다. 물이 말라버린 진흒구덩이에 빠진 예레미야는 점점 수렁에 빠져들게 된다. 죽게 된 예레미야, 그때 이디오피아 출신 환관 에벳멜렉이 왕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린다. 왕은 즉시  예레미야를 끌어올리게 하고 극적으로 살게된다.

 

시드기야는 다시 예레미야와 비밀히 면담한다. 시드기야는 악한 왕은 아니었으나 예레미야에 대해 이중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신하들의 압력을 뿌리칠 힘이 그에겐 없었다. 예레미야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임을 밖힌다.(1:10) 주사위는 던져졌으나 시드기야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음을 예레미야는 강조한다. 여호와의 목소리를 들으면 살리라는 것을 여러번 강조한다.

 

 

 

39장,예루살렘의 멸망

 

586년 유다의 멸망(52:4-16,왕하25:1-12). 이것은 예레미야의 예언의 성취인 것을 강조한다. 예루살렘은 불타고 성전은 약탈을 당했다. 시드기야는 탈출을 시도했으나 잡혀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간다. (9).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고 (34:2-3의 예언의 성취) ,소유가 없는 백성들을 그 땅에 남겨 포도원과 농토를 돌보게 했다(10). 이제 유다는 사라지고 바벨론의 한 지방으로 전락한 것이다. 유다는 망했으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약속이 예레미야에게 의해 선포된다.(18) .

이방인 에벳멜렉은 예레미야를 믿고 하나님을 신뢰한다. 그러나 언약백성들은 언약을 파기하고 불순종함으로 멸망하는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40장,유다의 미래

 

예레미야는 백성들 속에 섞여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던 중, 바벨론 시위대장의 눈에 띄여 석방된다. 그러면서 시위대장의 입을 통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곳에 이 재앙을 선포하시더니 여호와께서 그 말씀하신대로 행하셨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이니라”(2-3). 언약파기로 멸망한 것을 설명하고 있다.  시위대장은 예레미야가 원하면 바벨론으로 초대할 것이라는 제안을 한다. 또한 어디든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 땅에 남아 백성들과 함께 있겠다한다.

 

총독 그다랴는 예루살렘의 유력한 정치인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아히감은 예레미야에게 우호적이었다.(26:24) 그는 바벨론의 신임도 얻고 백성들에게도 실용주의 정책을 펴서 흩어졌던 백성들이 미스바롤 돌아왔다. 그러나 자객 이스마엘(왕족의 후손:41:1)에게 살해된다.

 

3개월 통치로 끝난 그다랴를 이어 이스마엘은 미스바에 있는 왕의 딸들과 모든 백성들을 인질로 삼아 암몬으로 향했다.(41:10) 요하난은 군사를 이끌고 이스마엘을 추격해 싸운다. 이스마엘은 암몬으로 도주하고 백성들은 요하난을 선택하여 돌아온다.(14) 요하난은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워 애굽으로 향하게 된다.

 

42장,남은자들의 불순종

 

애굽으로 향하던 그들이 잠시 베들레헴 근처에 도착했을 때 백성들은 모두 예레미야에게 나아와 그들의 갈길과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는 남아있는 모든자“라는 표현을 쓰고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할 것을 서약한다.(5-6) 예레미야의 대답은 그들이 애굽으로 가지 않고 유다에 머무르는 것이다. 애굽으로의 도피(역 출애굽)에 대해 언약적 저주가 선포된다. (13-18)

 

43장,애굽으로

 

요하난과 소수의 교만한 이들은 거부한다. 오히려 예레미야에게 거짓말한다라고 공격한다. 결국 그들은 애굽으로 내려갔고 예레미야도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 함께한다. (3-7)   예레미야는 또 한번의 행위멧세지를 전한다. 큰 돌들을 벽돌 밑 진흙에 감추고 느브갓네살은  이 돌 위에 화려한 큰 장막을 치게 된다는 것이다. 전에 썩은 허리띠(13장),깨진 오지병(19장),줄과 멍에(27:2)는 즉각 예레미야가 행동으로 보여 주었으나 여기의 숨긴 진흙은 나중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이다.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된다. 586년 느브갓네살은 애굽을 침공하고 애굽은 항복한다.

 

44~끝, 최후의 멧세지

 

예레미야의 마지막 메시지는 언약파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인 것을 강조한다.

 

 

 

 

 

 

 

 

 

 

                            에스겔서

 

 

 

1.역사적 배경

 

에스겔은 제사장 출신이며 선지자이다. 그의 나이 30세 때 여호야긴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간지 5년째 되는 593년이었다. 605년 다니엘과 지도자들이 1차로 끌려갔고 2차로 597년 에스겔과 4600명(렘52:30)정도가 끌려갔다.이들은 정치,종교지도자 그룹이었다.

 

바벨론 포로 정책은 유다의 반란을 사전에 차단하고 경제를 약화시키며 바벨론을 위한 노동력제공이 그 목적이었다. 에스겔은 함께 포로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포로가 된 이유와 회복의 말씀이다. 에스겔의 멧세지는 593년부터 586년, 예루살렘이 멸망 할 때 까지이며 포로후 25년인 573년, 27년인 571년의 기록도 있다.(40:1) 에스겔은 30세부터 53세 까지 사역하게된다.

 

포로된 백성들의 고난을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가장 큰 고통은 언약백성이 왜 망하는가? 우리에게 과연 소망이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셨는가? 하는 것이다. 에스겔서는 이러한 것에 대한 해답을 보여준다.

 

 

<에스겔 활동시기의 역사적 배경>

 

640년     요시야의 즉위

627년경   앗수르 왕 앗수르바니팔의 죽음

627년     예레미야의 소명(렘 1:2)

626년     바벨론 제국의 창건자 나보폴랏사르

623년경   에스겔의 출생

622년     유다에서의 종교개혁(왕하 22-23장)

612년     니느웨의 멸망 : 앗수르의 통치의 종언

609년     므깃도에서 요시야의 전사(왕하 23:29-30)

609년     여호아하스(살룸)가 애굽인들에 의해 폐위됨(겔 19:1-4)

609년     엘리야김(여호야김)이 애굽의 꼭두각시로서 통치함

605년     느부갓네살의 즉위 : 갈그미스 전투

601년     느부갓네살에 대한 여호야김의 반란

597년     여호야김의 죽음 : 여호야긴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감

          (여호야긴과 함께 에스겔이 바벨론으로 끌려감)

597년     맛다냐(시드기야)가 바벨론의 봉신으로 통치함

          (겔 12:8-13, 17:5-21, 19:11-14, 21:25-27)

595년경   바벨론에서의 반란 : 시드기야 조공을 거부함

593년     애굽의 바로 프사메티쿠스 2세가 반란을 부추김

588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인들에 의해 포위됨(겔 24:1-2)

588년     애굽의 바로 호브라가 포위를 푸는데 실패함

586년     예루살렘의 멸망

584년경   유다 총독 그달랴가 암살됨

562년     바벨론 왕 아멜마르둑(에윌므로닥)

561년     여호야긴이 풀려남(왕하 25:27-30)

566년     바벨론 최후의 왕 나보니두스

548년경   고레스의 루디아 정복

539년     바벨론의 멸망 : 바사 통치의 시작

 

 

2.사회적 배경

 

  여호야긴 왕과 예루살렘의 지도급 인사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난 다음의 유다는 한 마디로 쓸만한 인물이 귀했기 때문에, 나라 살림을 제대로 꾸려나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시드기야는 비록 유다의 왕이긴 했지만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형편이었고, 궁궐 내의 친 이집트 강경세력에 밀려 어리석게도 반기를 드는 대 실수를 저질러 화를 재촉할 뿐이었다.

 

  시드기야 통치의 말엽에 다가서면서 사림(왕실의 고관이나 귀족)이 왕에게 예레미야를 고소하면서 그가 백성의 사기에 미친 악영향 때문에 처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렘 38;4). 라기스 문서 제6호에도 보면 용병대 사령관에게 한 애국적인 군장관이 서신을 보내며 사림이 보낸 순환 서신에 대해 심하게 불평하고 있는 것이 나오는데 같은 말로 “그들이 백성의 손을 약하게 만들고 있다”고 항변한다.  

 

  주전 598-586년 기간은 완전히 침울한 때였는데 여호야긴이 유다의 지도자들 및 최고의 장색인들과 함께 유배를 가게 되었다. 예레미야는 당시 섭정의 모습에 대해 냉혹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시드기야와 그의 추종자들을 ‘나쁜 무화과’라고 부른 반면, 갈대인이 취한 것은 ‘좋은 무화과’라고 하였다. 결국 시드기야와 그의 추종자들은 완고하게 사메티쿠스 2세 및 그의 아들 아프리스와 갈대아 영주에 대항해 반역을 공모하다가 파멸의 길을 걷고 말았다.

 

  이 같은 상황 하에서 민심은 흉흉하며 도덕은 땅에 떨어졌다. 에스겔의 환상을 통해 비쳐진 예루살렘은 “피 흘린 성읍”(22:2)이며, 그 곳에서는 살인, 착취, 강탈, 음행, 불경, 불손 등 갖가지 범죄가 자행되는 무법천지였다. 그리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불쌍히 생각 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의 토지를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될 지경이었다. 종교적으로도 요시야 종교개혁의 반작용을 일으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가나안 여신, 바벨론의 타무즈 신, 이집트의 호루신, 그리고 태양신들을 숭상할 정도였다. 한편 거짓 예언자들은 평화가 곧 찾아오리란 거짓된 낙관론을 펴기도 하였다.

 

  주전 586년과 581년의 커다란 이송 사건으로 유다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잃어버렸다. 많은 지식층 인사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든지, 아니면 이집트나 다른 주변 나라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유다에서는 포도원을 가꿀 농부들만 남게 되었다. 이 같은 몇 차례의 대이동, 거기에 따른 유다 도시들의 황폐함이 많은 인구들을 흐트러 놓았고, 소수의 남은 사람들은 초근목피로 생계를 유지하는 절박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바벨론 왕국은 앗시리아와는 달리 외국인들을 조직적으로 데려다가 유다 땅에 강제로 풀어 놓아 섞여 살도록 하는 이민 동화정책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다에서는 “땅의 백성”들이 땅을 갈아 먹으면서 자기 고향땅에서 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예레미야 52:30절 이하에는 전체 3번의 추방을 합해 4,600명에 이르는 바벨론 추방자의 공식서로 일람이 나와 있는데, 598년에 추방된 숫자는 열왕기의 8,000(혹은 10,000)명이 아니라 3,023명이었는데 이러한 차이는 후자가 부분적으로 상상에 의한 계산이었고, 또 바벨론으로 오랫동안 끌려가면서 많은 사람이 굶거나 병들어 죽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은 포로로 잡혀 와서도 왕의 신분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여호야긴과 그의 다섯 아들이 바벨론 왕실에서 매달 제공하는 식량을 보급 받았다는 사실이 ‘여호와긴 문서’를 통해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문서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10실라의 기름을 야휴의 땅의 왕 야우킨에게 2와 2분의 1실라의 기름을 에후드(유다) 땅의 왕...들에게.” 에스겔 자신의 예언활동을 여호야긴왕의 연대로 계산하였다.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지 오년 그달 오일이라”(겔 1:1-2). 여호야긴은 바벨론 포로민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된 것이다.

 

  에스겔은 자신이 “그발강가에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겔 1:1)라고 자신의 거처를 명시한다. 바벨론에 잡혀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몇 군데 흩어져 살았지만 대개 집단거주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중 한곳이 에스겔이 살던 텔아빕(겔 3:15)이다.

 

  ‘섬’은 이곳이 고대 도시 니푸르(니볼) 근처에 있는 그발 운하 곁은 농경부락이라고 본다. 이 운하는 느부갓네살 왕이 유프라테스강의 물을 관개 수로로 끌어올리기 위해 지은 것이며, 따라서 이스라엘 집단은 농경 사업에 종사했을 것이라고 본다.

느부갓네살의 정책은 바벨론 제국에 쓸모 있는 사람들만 데려온 것이다. 처음에는 정부의 개간사업에 고용되었으나, 나중에는 각자의 재능대로 교역이나 공예분야까지 종사하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기 집도 짓고 정원도 가꾸며 윤택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바벨론 당국은 이들에게 특별한 정치적 또는 종교적 박해를 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장로도 선출하고 또 모여서 예배도 드릴 수 있었다. 물론 희생제사는 용납되지 않았으나 이 때 회당 제도가 시작되었고, 또 그들의 민족적인 종교성을 유지하기 위해 안식일 제도와 할례 제도가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짧은 기간이긴 했으나 한동안 유다의 왕이 두 사람 나온 적이 있다. 고국에 남아 있는 시드기야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이다. 이 두 사람을 옹호하는 지지 세력은 각자 자기파가 주체 세력이나 정통 세력이라고 주창 하였다. 노트는 이 두 집단 중 어느 쪽이 참 이스라엘의 ‘남은 자’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바벨론으로 잡혀간 이들은 여호야긴을 중심으로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언젠가는 고국에 돌아가 정통성을 다시 찾겠다고 그 날을 고대했을 것이며, 시드기야는 포로 사건으로 고국을 떠난 이들은 그것으로 끝장난 것이니, 남은 이들끼리 뭉쳐 살길을 찾아보려고 애쓴 것이다. 결국은 시드기야나 여호야긴이나 그 어느 쪽도 합법정부를 다시 세울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신앙의 정통성을 누가 이어 받았느냐 하는 문제는 귀한 공동체에서 다시 대두되는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한편 바벨론 포로민들이 자유롭게 모여 예배를 드렸다고 하지만, 뉴섬이 추측하는 대로 많은 사람들 마음속에 여호와는 예루살렘 성전과 함께 불타버리고 결국 마르둑의 승리로 끝난 상황에서 이스라엘  여호와종교의 신앙이 영원히 상실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을 지워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들에게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이다.

 

 

 

 

3.문학적 형식

 

  에스겔서는 다양한 문학적 형태를 띠고 있다. 시와 산문은 물론이고 꿈과 환상의 구조(1-3장; 8-11장), 계시적 문학(37:1-14; 40-48), 드라마(4-5장; 12장), 알레고리, 풍유, 잠언(14:44; 18:2), 장례 노래(19; 26-28; 32장) 등의 형태를 보이고 수사학적 용법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꿈과 환상은 주전 6-7세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나타나는 문학적 형태이기도 하다. 에스겔서는 회복과 축복의 메시지를 위해 계시적 환상을 많이 사용하고, 내용상 대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예를 들면, 24장은 예루살렘의 포위에 대한 예언의 시작에 이어 33장은 마침내 멸망을 선포하며, 3장에서 에스겔이 처음 사명을 받을 때 파수꾼으로 부르심을 받고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33장에서 다시 파수꾼의 소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6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산에 임하신 심판과 파괴와 황폐, 36장에서는 같은 산에서 회복과 새롭게 임하시는 풍성함을 묘사하고 있다. 7장에서는 끝을 언급하고 있지만, 37장에서 끝난 마른 뼈의 환상에서 성령님을 통한 회복을 보여 준다.

 

4.에스겔의 신학

 

  포로로 잡혀간 공동체에서 사역한 선지자 에스겔은 예루살렘에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고, 예루살렘이 멸망하자 회복의 메시지를 계속 선포한다. 혹자는 에스겔이 사역한 곳이 예루살렘이며, 포로 공동체가 머물던 바빌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1:1-3과 3:15에서 사역지를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에스겔서의 신학은 포로 공동체의 소망 신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에스겔서는 하나님의 본질, 심판의 목적, 개인적 책임, 이스라엘의 윤리적․종교적․도덕적 역사와 회복 등을 강조하고 있다.

 

 

(1). 언약 백성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구원하실 뿐 아니라(사 40장) 열방의 구원과 회복에 대한 관심을 잊지 않으신다(사 2장)고 강조한다. 그러나 에스겔은 철저히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과 대적들의 멸망에 대한 메시지에만 관심이 있다. 이것에 대해 편협주의(parochialism)라고 부를 만큼, 에스겔은 철저히 유다 백성의 회복에만 초점을 맞춘다. 이방 민족의 회복에 대해 특별한 관심과 언급이 없고, 유다 백성의 과거 모습과 현재 상태 그리고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계획만을 묘사한다.

 

  과거에 유다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범죄를 저질렀던가? 이런 유다 백성에 대해 16, 23장은 영적 행음자로, 20장은 하나님의 언약을 끝까지 버린 자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철저하게 자기 조상들에게 죄를 전가하는 모습을 보이며(18:1-2), 조상들처럼 영적으로 음행하는 모습을 보인다(6장; 8:5-17; 14:3-5; 16:15-22; 20:30-31). 유다 백성의 이런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계획과 언약대로 그들을 회복시킬 것을 약속하신다(34-39장). 그리고 개인뿐 아니라(36:26-28) 민족적 회복을 묘사하고 있다(37:15-28).

 

(2).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케도쉬 이스라엘)으로 언급하는 이사야서와 유사한 내용이, 에스겔서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로 나타난다. 시작부터 하나님을 우주를 통치하시는 분으로 묘사하며(1장), 성전에도 영광으로 임하시는 모습으로 기록한다(43:5; 48:35).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이 유다 백성의 죄악으로 인해(8-11장)성전에서 떠났다가 다시 회복되는 내용이다. 처음에 하나님의 영광은 지성소 안 언약궤에 있었지만(9:3), 성전 문지방으로 가시고(10:4), 그곳에서 동문까지 떠나시며(10:18-20), 마침내 성읍에서 떠나 성읍 동편 산에 머무시게 된다(11:23), 그리고 다시 성전으로 돌아와 가득히(43:5) 유다 백성중에 거하시게 된다(48:35)

  성경 외의 다른 근동 자료들은 그 신당에 돌아오는 신들의 마음이 먼저 변화될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에스겔서는 하나님에 의해 사람들의 마음이 먼저 변화됨을 강조하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11:18-21). 사람의 전인적 변화는 하나님의 임재와 연관시켜 이해할 수 있다.

 

(3). 회복자 성령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와 연관된 에스겔서의 회복은 바로 성령님의 임재이다. 선지자 에스겔은 메시지를 받을 때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의 영에 철저하게 의존한다(3:12, 14상; 8:3; 11:1; 24상; 37:1; 43:5). 하나님의 영은 에스겔을 들어 올려 환상 가운데로 데려가기도 하시며(3:15; 8:3; 11:1) 움직이게도 하신다. 즉 성령님께서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주고 계시하시는 것이다. 이는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 주었다는 히브리서 3:7의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이라는 신약성경의 언급과 일치한다.

 

  에스겔은 성령님께서 절망 가운데 있는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주셨을 뿐 아니라 유다 백성의 완전한 변화조차 성령님의 내주하심으로 일어난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새 영’이고, ‘나의 신’(36:26-27)이신 성령님께서 유다 백성의 마음속에 임하여 그들을 완전히 변환(transformation) 시키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신학적 강조점은 다른 선지자들과 차이를 보인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은 때가 주전 627년임을 참고하면 그의 출생 연도는 대략 주전 643년이 된다. 에스겔이 소명을 받은 때가 주전 593년이었고 그는 30세였으니(1:1-3), 그가 주전 623년생이라면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20세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동시대에 사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새 언약(31:31-34)의 말씀을 통한 회복을 강조한 반면, 에스겔은 철저히 성령님을 통한 회복을 강조했다. 이런 면에서 예레미야의 말씀을 통한 회복과 에스겔의 성령님을 통한 회복은 우리에게 신앙적 균형을 제공한다(참고 엡5:18; 골3:16).

 

(4). 회복자 예수 그리스도

  에스겔서에 하나님의 영광과 성령님에 관한 예언만 있는 게 아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에 관해 예언했듯이, 에스겔서도 그리스도를 회복자로 묘사하고 있다. 논란이 있긴 하지만, 8:2의 ‘불같은 형상’을 ‘사람 같은 형상’ 또는 ‘인자 같은 형상’으로 해석하는 성경도 많다. ‘불같은 형상’을 1장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로 이해하는 것이다(1:26-27).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예표로 ‘이마의 표’(9:4)를 지적한다. 이것이 십자가를 직접적으로 예언한다고 말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이마의 표’는 엑스자형 즉 십자 형태로써 십자가를 예표 한다. 이표를 받은 무리만 심판에서 제외된다는 약속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과 연관되어 있어야 한다.(참고 고전5:7; 계7:3; 14:1).

 

  그리고 ‘연한 가지’(17:22-23)가 참 소망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것도 메시아적 사역으로 이해할 수 있다.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는 역사를 감당하는 것이 바로 ‘연한 가지’( 라크)의 사역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는 ‘한 목자’(로에 에하드)로 묘사되고 있다(34:23-41). 주로 선지서에서는 목자를 인도자인 왕으로 봐야 하는데, 그리스도는 거짓 목자와 달리 양들을 돌보는 참 목자로서 구원 사역을 감당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왕’(나시)이시며 (37:25. 참고 44:3; 45:7-8; 45:21-46:12; 48:21), ‘나시’는 영원한 성전에서 높아진 인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하며 그 임무도 신비적이다. ‘나시’의 역할이 그리스도와 연관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이 있는데, 이것은 ‘나시’ 자신을 위해 속죄제를 드리기 때문이라고 한다(참고 45:22).

  그러나 40-48장은 죄를 사함 받기 위한 제사를 보여 주는게 아니기 때문에 메시아적 인물의 역할로 이해한다.

 

(5). 구원자 성부 하나님

  에스겔서에서 많이 나타나는 표현 중에 하나가 ‘너희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6:7, 10, 13, 14; 7:4, 27; 11:10, 12; 12:15, 16, 20; 13:9, 14, 21, 23; 14:8; 15:7; 16:62; 20:20, 26, 38 42, 44; 22:16; 23:49; 24:24, 27; 25:5, 7, 11, 17; 26:6; 28:22, 23, 24, 26; 32:15; 33:29; 34:27; 35:9, 15; 36:11, 23, 38; 37:6, 13, 28; 38:23; 39:6, 7, 22, 28)이다. 에스겔서에서 이 표현은 ‘열국의 목전에서’, ‘내 거룩한 이름’, ‘여호와의 거룩’이라는 주제와 연결되어 주로 사용되었다. 또 이 표현은 유다 백성에 대한 심판뿐 아니라, 이방 심판을 통한 유다 백성의 회복과 연관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심판과 구원을 행하는 분이시다(17:24; 22:14; 36:36; 37:14). 그리고 유다 백성에게 구원을 베푸는 분이시다(출6:7; 7:5). 민족적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는 유다 백성에게 이런 표현들이 많이 사용된 것은 하나님은 새 출애굽을 행하는 분이심을 강조하며 백성을 위로해 주시려는 의도인 것이다.

 

 

5.특징

 

포로기와 이후 선지자들은 언약백성들이 겪는 고통과 갈등에 대한 해답을 주기 위해서 기록한다.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간 언약백성이 이방인들 속에서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인 것을 보여준다. 학개는 하나님나라의 회복을 위해서 언약백성들이 역동적으로 성전재건에 참여 할 것을 촉구한다. 스가랴는 하나님께서 회복을 주실 것, 말라기는 하나님은 변함없으신 분이니 그 분께 신실하게 대하라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에스겔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1장)로 시작해 마지막은 회복 될 하나님의 임재인 “여호와 삼마”로 끝난다. (48:35) 또한 그들이 멸망한 이유는 언약파기이며 (8-10장) 하나님을 대적한 이방도 심판하실 것이며(25-32장), 언약백성을 위한 회복을 계획하신다.(33-39) 그리고 미래의 성전(40-48)을 통하여 완전히 회복하실 것이다.

 

에스겔서의 특징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그리고 “영”에 대한 것이다. “영”(루아흐)는 바람,마음등 여러 뜻을 가지고 있으며 구약에서 389회 나타난다. 아람어로 11번, 히 378번 강조된다. 에스겔서에는 52번 나오면서 다른 성경보다 더 강조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임재할 뿐 아니라 백성의 회복을 위해 우주적으로 그리고 역동적으로 역사하심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내면적으로 완전히 변화시키시며 (36:26-28)언약백성을 살아있는 군대로 변화시킨다.(37:9-10)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이 백성들을 변화시킨다고 강조하고 에스겔보다 20살이 많은 예레미야는 내면적 말씀을 통해서 백성을 변화시킨다고 강조한다.

 

6.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은 여러 성경들에 단편적으로 인용되었으나 에스겔서 만큼은 전체적으로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계시록 22장 가운데 9,13,14,16장을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계시록 4장(하늘 보좌)에 대한 것이 겔 10:1절이하 그리고 1:26-28까지 인용된다. 18장의 바벨론 멸망 그리고 21장에서 가장 많이 나오고 있다. 하늘 보좌음성(21:3) 새 예루살렘(21:9-22:2), 성전묘사(21:22)이다.

 

 

7.내용

 

1장,절망에서 소망으로

 

2600년전,바벨론 “델아빕”(홍수로 폐허가 된 그발 강가의 언덕)에 유대인 포로들이 이주해 살고 있었다. 척박한 환경,포로된 백성,나라잃은 백성,소망없는 백성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끌려온 에스겔,그의 나이 30세,포로된지 5년,제사장인 그를 하나님은 선지자로 부르셨다. 그리고 포로된 백성들에게 환상을 통하여 소망을 보여주셨다.

 

에스겔은 그림언어(영상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마치 그림을 보듯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늘이 열리면서 북쪽에서 엄청나게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하늘에서 전광석화같이 빠른 것이 내려온다. 에스겔은 두려웠으나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짙은 구름이 불이 타오르고 주변에 번쩍이는 것이 보인다.  바퀴달린 기계는 살인기계를 연상시킨다. 사면에 사람과 짐승의 얼굴을 달고 사방으로 자유롭게 이동하는 섬뜩한 살인기계가 보인다. 심판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21절 까지는 시각적 이미지를 보여준다면, 22-25절은 청각적 이미지를 첨부한다. 앞에는 궁창 아래이며 뒤는 궁창 윗부분이다. 25절에 들리는 소리를 듣고 에스겔은 위를 본다. 거기에 보좌가 있고 보좌 환상을 본다.  그 보좌에는 사람모습의 형상이 있었다(26). 에스겔은 그 형상을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으로 보았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에스겔은 두려움과 경외함으로 엎드린다. 하나님은 엎드린 에스겔을 일으키며 인자라고 부르신다. 에스겔의 고백 역시 인자라 스스로 부른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선 나약한 인간 에스겔의 고백이기도 하다.

 

포로된 에스겔과 백성들은 절망에 빠져있었다. 그들의 질문은 하나님은 죽으셨는가? 하는 것이다. 에스겔 역시 그러한 질문을 품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섰다. 그러나 환상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땅의 숫자를 의미하는 네바퀴, 네생물은 땅에서 일하고계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쉴새없이 움직이는 바퀴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심판도 하나님의 섭리이며 회복도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

 

  에스겔서에 등장하는 불은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다. (13,27) ,20절의 신은 성령을 가르킨다. 일을 시행하시는 성령하나님의 역사이다. 에스겔은 성령의 감동으로 일어난다. (14) 그리고 백성들을 성령의 사역으로 회복케하는 사역을 시작한다.

환상을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에스겔은 보았다. 세상과 자연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영의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는 여전히 일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섭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시는 하나님,모든 생물이 복종하는 하나님을 에스겔을 보았던 것이다.

 

 

 

 

 

2장,패역한 백성들

 

2장의 중심단어는 패역이다.(3,5,6,7,8). 대조되는 단어는 말씀이다.(2X2,4,9). 패역은 히 ‘마라드‘와 ’마라‘ 두가지가 있다. ’마라드‘는 폭동,’마라‘는 배반을 뜻한다. 고로 패역은 고의적인 대항을 뜻한다. 패역은 이렇게 심각한 단어이다 (창6). 단순히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대적하며 훼방하는 그들에게는 ’헤렘‘(진멸)밖에는 도리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헤세드는 이런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그런데 이런 패역한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에스겔아 두려워 말라하신다. (6X4)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는 것이다. 듣지 않는 줄 아시면서 가서 전하라는 것이다. 이사야는 아니 들을 것이다. 가겠느냐고 물으셨다. 에스겔도 같은 상황이다.  이제 하나님은 두루마리를 먹으라 하신다. 그 두루마리의 내용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10)이다.

 

3장,파숫꾼의 사명

 

말씀을 먹으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 .에스겔이 먼저 그 말씀을 먹어야한다.  재앙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새기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말씀이 될 때 담대하게 전할 수 있는 것이다. 남의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 내가 체험한 말씀을 전해야한다. 그리고 가서 고하라 하신다. 에스겔이 답답하여 있는데 하나님은 에스겔을 들어올리셨다. 이 표현은 세 번 나온다(2:2,3:12,14). 답답한 에스겔은 7일간 기다린다. 드디어 말씀이 떨어졌다. 너를 이스라엘의 파숫꾼으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파수꾼은 히 “초페”인데 원형은 “차파”이며 여기서 “미스바(미츠파)가 파생되었다.

 

파수꾼의 사명은

1. 18절,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악인에게 전하지 않을 때  악인은 죄가운데 죽고 에스겔도 책임이 있다.

2. 19절,에스겔이 악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악인이 깨우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죽고 에스겔은 책임이 없다.

3. 20절,에스겔이 의인을 거치게해서 의인이 악을 행하는 경우,의인은 자신이 저지른 악으로 죽고 에스겔도 책임이 있다.

4. 21절,에스겔이 의인을 깨우쳐서 죄를 범치않게 하는 경우 의인도 살고 에스겔도 산다.

 

이제 하나님은 가라 가서 전하라고 하시지 않고  이상한 명령을 하신다. 도대체 처음부터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만 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선지자의 자세이다. 22절, 들로 나아가라. 그 후에 집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24) 그리고 에스겔을 줄로 묶고(자신이 묶고) ,혀를 입천장에 붙게 해서 말을 못하게 하고 방안에 가두신다.  7일간 민답(답답)했었는데 이제 또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벌이시는 하나님. 에스겔도 답답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이다. 하나님도 답답하시다는 표현이다. 패역한 백성들, 듣지 않는 백성에게 선지자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자.

 

4장,무엇을 의지하는가?

 

백성들은 멸망 직전 까지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했다. 그러나 언약을 떠난 긍정은 세속적 낙관에 불과하다. 성경은 오히려 그것을 경고하고 있다. 말씀을 떠난 긍정은 인본주의에 불과하다. 자기최면일 뿐이다. 4-5장은 유다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위메세지로 선포한다.

 

첫 번째, 흙벽돌 한 장을 가져다가 그 위에 예루살렘성을 그리고 그 성의 사방에 운제(망대)를 세우고 토성을 쌓고 공성퇴를 둘러 세웠다.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경고였다.

 

두 번째 행위 메시지는 좌편으로(북 이스라엘 쪽으로) 390일을 누워있었다.  북왕국이 지은 죄,390년(솔로몬 시대부터 북왕국이 멸망할 때 까지)을 의미한다. 우편으로 40일,남왕국의 마지막 범죄 40년을 상징한다. 합하면 430. 이것은 애굽의 노예생활 430년을 의미한다.  너희가 포로가 된다는 상징이다.  7절-8절은 다시 하나님께서 줄로 묶어 꼼짝 못하게 하심으로 포로될 것을 상징한다.

 

 

 

5장,행위메세지의 절정

 

백성들이 더 이상 말로해서 안들을 때 행위멧세지는 절정을 이룬다.  면도칼은 바벨론을 상징한다. 면도칼로 머리털과 수염을 깎는 행위는 수치이다. 저울에 다는 것은 정확한 심판을 상징한다. 바람에 날리는 것은 비참함이다. 3/1은  포위되어 기근과 염병으로 죽고,3/1은 함락으로 죽고,3/1은 포로로 끌려 갈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남은 부류도 시련을 당할 것이다.

5-7절은 레26,신28장의 언약파기에 대한 댓가이다.  행위 메시지는 충격요법이다. 이렇게까지 전하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는가?

 

6장-7장,칼(심판모티브)의 심판

 

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3,8,11,12) 그런데 칼끝은 산당(바모테켐:너희의 산당들)을 겨누고 있다.(6,13) 산당(바마)은 원래 ‘산등성이’ 혹은 ‘높은 곳’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대부분 야외에 있었다.물론 일부는 건물을 포함하기도 한다. 산당에서 하나님도 섬겼으나 우상도 섬기는 혼합주의가 성행했다. 또한 이런 것들은 문화로 발전해서 백성들의 생활속에 뿌리 박혔다. 산당은 원래 가나안의 종교적 유산(바알숭배)이었으나 백성들이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문화적 관습과 함께 제의적 요소도 받아들였던 산당은 하나님의 칼끝으로 정조준 된 것이다. 솔로몬 성전이 봉헌된 이후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제의적 요소가 행해져야했다. 아니면 모두 우상숭배로 규정했다. (신명기의 언약적저주)

 

이제 심판선언은 더욱 강렬해진다. 11절,손벽치며,발을 구르며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라고 하신다. 가나안전역에 산당이 널려있었다. 제단과 분향단이 즐비했다. 상수리나무 아래, 푸른나무 아래에도 가득했다. 그들은 이것들을 신성시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산당들 마다 시체가 가득하게되었다. (13)

 

그들이(너희가)나를 여호와 인줄 알리라. 인칭을 바꾸시면서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3인칭(10,14)에서 너희(7,13)로 바뀐다. 또한 1인칭이 반복 강조되고 있다. 인칭의 변화에 유의하라.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에서 전세계로 확산된다.(7:2 이 땅의 네기둥 :네기둥은 전세계)

심판의 목적은 멸망이 아니다.하나님이 어떤분인가?를 알려주시는 것이다. 우리도 성경을 모르거나 잘못해석 할 때 ,혹은 자의적으로 해석할 때 당시 백성들과 같은 죄를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하여 호세아는 ‘하나님을 알자’,‘힘써 하나님을 알자’라고 선포한 것이다.

 

8장,성전을 떠나시는 여호와

 

에스겔은 제사장이면서 선지자였기에 포로로 끌려온 장로들이 자주 찾아와 질문을 던질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 (8:1,14:1,20:1) 포로가 된지 6년째 주전592년 6월5일 장로들의 방문을 받는다. 8장부터 11:24절 까지 장로들에게 들려주는 대답이 환상의 내용으로 되어있다. 11:24,25절에 나오는 ‘사로잡힌자’는 장로들을 가르키고 있다.

 

장로들의 방문을 받은 에스겔은 여호와의 권능에 이끌려 긴 환상을 체험한다. 에스겔은 성령에 이끌려 예루살렘성전으로 가는 환상을 체험한다. 성에 들어서자마자 먼저 눈에 띄인 것은 ‘투기의 우상’이다. 이것은 므낫세왕이 세웠으나 요시아왕에 의해 파괴된 바알의 우상이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임재)를 보게된다. 성의 주인은 하나님인 것을 보이시는 것이다. 이제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본다. 성전 문 어귀에 ‘투기의 우상’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로 인해 성전을 떠날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이 차지하고 있으니 떠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전 뜰의 문으로 인도함을 받은 에스겔은 성전 담벼락의 구멍을 발견한다.(7)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 담을 헐자 한개의 문이 나타난다. 그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보니 가증하고 악한일 곧 사방 벽에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우상들을 그려놓고 그 앞에서 분향하는 모습이 보인다.(8-11)

 

에스겔이 본 우상숭배자들은 놀랍게도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70명의 장로들이었다. 그 중에는 요시아왕의 서기관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 사반은 경건한 신앙인이었는데 그 아들과 70장로들이 은밀하게 우상숭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향연이 오르는 향료를 들고 있었다. 분향은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데 장로들이 더구나 우상앞에 분향하는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예전에 웃시야가 분향하다 문둥병에 걸렸는데 이것은 그 이상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은밀하게 자행되고 있었던 우상숭배를 보여주심으로 심판의 당위성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돌보지 않고 버렸다고 불평한다.(12)

 

우상숭배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더 가증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북문 어귀로 데려가신다. (14) 그곳에선 여인들이 앉아서 ‘담무스’신을 애도하고 있었다.‘ 담무스’는 ‘이난나‘의 남편 신으로 바벨론의 신이다. 당시 사람들은 6-7월 지하세계로 내려간 담무스를 위해서 애곡하는 의식을 행했다.

 

성전 안에 들어서니 더 가증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25명이 성전을 등지고 얼굴을 동쪽으로 향해 태양에게 경배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제 하나님은 종교적 탈선에서 사회적 불의를 지적하신다. (17)  그들은 그 땅을 폭력으로 가득 채움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있을 뿐 아니라 나뭇가지를 코에 두는 새로운 우상숭배에 빠지기도 했다. 이는 우상에게 입을 맞추는 행위(욥31:27)와 같은 우상에게 경배하는 행위이다. 이에 하나님은 긍휼도 자비도 없는 그리고 그들이 아무리 부르짖어도 분노의 심판이 있을 것을 보여주고 있다.

 

9장,성소에서 시작되는 심판

 

심판을 명하시는 분노에 찬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떨어진다. 무기를 들고 나아오라. 놋제단 옆에 6명이 서있었다. 심판의 첫 단계는 지성소에 있던 하나님의 영광을 거두시어 성전 문지방으로 옮기신다. 성전을 떠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먹그릇을 찬 심판자에게 예루살렘을 다니며 우상숭배에 탄식하는 자들에게 이마에 표하라 하신다. 그후 심판자에게 그들을 긍휼이 여기지 말고 우상숭배의 진원지인 성소부터 치되 이마에 표가 있는 이들은 살려두라 하신다. 심판자들은 성전앞에 있는 장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한다. 그런 후에 우상숭배자들을 죽여 성전 뜰에 채우라하신다.

 

이를 본 에스겔은 엎드려 기도한다. 재난을 피해 살아남은 자들 마저 죽이려 하십니까? 라고 항변한다.(8) 에스겔의 중재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의 죄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10,성전을 떠나시는 하나님

 

1장에서 본 것과 비슷한 수레바퀴들로 하나님이 떠나시는 장면이 구체적으로 보여진다.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 문지방을 떠나 그룹들 위에 머문다.  이것은 4절에서 이어지는 것으로 심판을 집행하기 위해서 성전을 떠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어 하나님의 영광은 그룹들과 성전 동문으로 옮겨가신다.

장면은 다시 11:23절로 이어진다.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에서 동편산 (감람산)에 머물고 심판을 집행하신다.

 

11장,심판과 회복

 

10:19절의 장면을 이어간다. 성전동문으로 여호와의 영광이 옮겨가는데 그곳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는 25명이 보인다. 고관들(싸레하암)이다. 그들은 불의를 꾀한 자들이다. 부동산을 탈취하며 불의를 행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진다. ‘그들을 쳐서 예언하라‘(2번 반복)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 것을 보여주며 5절 마음(루아크)속에 있는 것을 모두 알고계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14절 부터는 회복을 보여주신다. 예루살렘 성전의 심판은 예배의 회복을 위함이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에 한 마음을 주시고 새 영을 부어 주셔서 돌 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셔서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실 것이다.(19) 하여 하나님의 뜻(토라)을 기쁨으로 행하게 하실 것이다.(20) 그리고 언약관계를 회복 할 것이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12장,두가지 행위메세지

 

유다의 멸망을 예고하는 에스겔의 행위메세지는 이사가는 것(17-20)과 공포속에서 먹고마시는 것(17-20)이다. 짐을 싸서 배에 오르는 이유는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고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2) 이미 이사야6:9에 나오는 말씀이다. 이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유배라는 것이다.

10절의 왕은 시드기야이다. 시드기야는 밤에 어깨에 짐을 지고 나갈 것이며 사람들은 그를 위해 벽을 뚫지만 그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붙잡혀서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이다.(실제로 시드기야는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도망치다 체포된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16절에서 희망을 보여주신다. 그때 사람들은 여호와가 하나님인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인 말둑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 유다의 잘못인 것을 지적하고 있다.

 

두 번째 행위메세지는 황폐한 땅에 남아서 음식을 먹는 행위를 통해서 예루살렘이 포위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 모든 것이 속히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15장,쓸모없는 포도나무

 

15장은 산문이 아니라 운문으로 된 글이다. 열매를 맺지 않는 포도나무는 아무 쓸모없고 오직 땔감으로 아궁이에 들어갈 뿐이다. 농부와 포도나무의 관계는 사5:1-7,렘2:21,겔17:6,호10:1,시80:9-17,마20:1,요15장에 나온다.

1-8절은 이스라엘을 열매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로 비유한다. (호10:1) 에스겔은 2-5절에서 그림언어로 6-8절은 그 뜻을 설명한다. 즉 포도나무는 열매가 없어 아궁이로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얼굴을 돌려 자비를 주실 때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여호와가 하나님인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에스겔서의 주제이다.

 

16장,영원한 언약

 

예루살렘을 여성으로 의인화하여 은유적으로 말씀을 선포한다. (사5:1,렘47:6,암5:19)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부정한 태생임을 선언한다. 즉 예루살렘이 태어난 곳은 가나안이고 그의 아버지는 아모리사람이고 어머니는 헷사람이다.  모두 가나안 7족속이며 음란하고 우상숭배하는 자들이다. 이런 예루살렘을 택하셔서 거룩한 다윗의 도성으로 만드셨다.

 

예레미야는 유배지역의 아나돗 출신의 선지자로 모압언약을 강조했다면 에스겔은 사독계열의 제사장으로서 다윗언약을 강조한다. 성경은 이렇게 균형을 맞추고 있다.  다윗언약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다윗왕조를 세우신 것과 하나님께서 자기이름을 두시려고 예루살렘을 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예루살렘에 대한 애정을 갖고 망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부스족에게 속해있던 예루살렘을 택하신 것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던 버려진 아이를 양육하셔서 아름다운 왕비로 만드셨다. 존귀한 자가 되어 이방에 까지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행음하여(언약파기) 창기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예루살렘을 택하시고 성전을 세우신 것은 신명기 말씀대로 국가의 중앙성소로서의 기능이다. 광야에서 성소가 진의 중앙에 자리한 것같이 말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산당을 꾸미고 그곳에서 음행한다.(16) 더구나 이방 종교를 받아들여 자녀를 재물로 드리는 행위를 하고있는 것이다.

 

또한 이집트를 의지하여 하나님을 분노케한다.(26) 북쪽의 호세아왕도 앗수르의 침략에 이집트를 의지했다가 망하고 말았다. 이것 역시 음란이라고 지적한다. 그후 예루살렘은 앗수르와 바벨론의 우상까지 끌어들여 섬겼다. 이 모든 행위는 남편을 배신하고 음행한 여인과 같다는 것이다. 돈을 받고 음행하는 것보다 그들은 돈을 주고 음행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심판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시며 다시 언약을 세우는 이유는 영원한 언약이기 때문이다.(60)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깨닫게 해서 다시 시작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다.(새하늘과 새땅)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무조건적이 아닌 회개를 전재로 하는 용서와 회복이다. 다윗언약에 대한 맹신이 그들을 멸망으로 인도했다면 오늘 우리도 구원 받았으니 됐다. 혹은 한번 택한 백성은 버리지 않는다는 안일한 생각에 젖어있다면 그들과 동일한 결과를 초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7장,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17장은 독수리와 두 나무 비유의 예언으로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행위를 묘사한다. 유다왕국은 요시아(주전639-609)가 므깃도 전투에서 죽으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여호아하스,여호야김,여호야긴,시드기야를 끝으로 망하고 망한다. 이런 배경으로 15절,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 유다가 이집트의 왕에게 외교사절단을 보낸 시점에 선포된 예언이다.

 

1-2절은 도입부로 17장 전체의 서론이다.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수수께끼(히다)와 비유(마샬)로 말하라 명하신다. 예언의 이중적구조이다. 수수께끼와 비유는 평행적으로 사용되었다. 비유의 이중적 구조는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비유로 말하지만 모두가 다 아는 것은 아닌 것이다.

 

독수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로 쓰여지지만 여기서는 힘세고 재빠르며 적대적인 정복자 바벨론에 대한 상징으로 쓰였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나무의 왕으로 일컫는다.  독수리가 레바논에서 높은 가지를 꺽어 교역의 땅(가나안)상인들의 도시에 둔 것은 느브갓네살이 유다를 침공해서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끌고가서 그곳에 포로로 둔 것을 가르킨다.  그리고 독수리는 그 땅의 씨앗을 가져다가 물 많은 종자의 땅에 심었더니 포도나무가 자라서 독수리의 보호아래 있게 된다. 이것은 여호야긴 대신 시드기야를 왕으로 삼아 유다를 다스리게 한 것이다.  여기서 유다의 두 왕은 백향목과 포도나무로 나오는데 이것은 시드기야가 여호야긴에서 스룹바벨로 이어지는 합법적인 왕조가 아닌 곁가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7-10절은 포도나무의 배반과 그 결과가 서술된다. 여기의 다른 독수리는 애굽의 왕을 가르킨다. 물가에 심긴 포도나무는 독수리 아래 머물면서 많은 열매를 맺어야했다. 즉 바벨론왕의 영향아래 있어야했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독수리를 배반한다. 즉 느브갓네살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애굽과 동맹을 맺는다. 이것은 당시를 기준으로 100년전 이사야 때와 같고 따라서 에스겔도 책망한다. 하여 포도나무에 대한 심판은 당연하다.

 

9-10절의 심판은 이중으로 진행된다. 독수리가 포도나무의 뿌리를 뽑아 마르게하며 또 동풍이 그 나무를 마르게 한다. 유다의 멸망은 언약파기에 있음을 계속 반복 경고한다.

 

19-21에서 바벨론왕과의 언약파기는 ‘내 언약’ ‘내 맹세’를 깨트린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한 언약이기에 깨트린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파기이며 멸망은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19장,심판과회복

 

19장은 애가의 형식으로 장송곡을 부르고 있다. 죽은 자를 기리며 안타까워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은 반듯이 다가올 죽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애가는 암사자와 포도나무의 비유를 사용해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노래한다. 두가지는 모두 다윗 왕조와 연관된다. 창49장에서 유다를 사자새끼에 비유하며 왕권에 대한 예언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통치자의 홀이 될 만한 가지가 없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메시지를 증거한다.

 

첫 번째 사자는 3개월이라는 짧은 통치를 끝내고 애굽으로 끌려간 여호아하스를 의미한다. 두 번째 사자는 597년 바벨론으로 끌려간 여호야긴을 의미한다. 애가를 통하여 에스겔은 다윗왕조의 단절을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유다는 물이 풍성한 포도원에 심긴 포도나무로 비유된다. 이 포도나무는 열매를 많이 맺고 성장한다. 그러나 뽑혀서 땅에 던짐을 당하고 실과는 동풍(바벨론 침공)에 마르게 되며 그 풍성함은 파괴된다.  결국 광야에 심기게 되며 다윗왕조의 단절을 의미한다. 19장은 현재적 실패를 강조하며 회개를 촉구한다.

 

20장,실패와 회복

 

15-19장은 비유였으나 20장에서는 실제적 사실로 시작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패역과 배교로 인한 실패의 역사임을 묘사한다. 그들의 패역은 불순종으로 나타났으며 배교는 우상숭배를 뜻한다. 그러나 메시지는 포로시대와 회복에 두고 있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실패가 반복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거룩한 백성이라 칭하시며(의인 삼아주심) 언약백성으로 삼아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의 가장 기본인 안식일조차 지키지 않고 언약을 파기한다. (13) 따라서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인도되지 못하고 징계를 받게된다. 40년간 광야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패역(마라)를 계속 반복 사용하심으로 그들의 반역이 고질적이고 지속적임을 강조한다.

 

그들의 실패는 광야에서 뿐 아니라 약속의 땅에서도 여전히 지속되며 포로 징계 후에도 계속된다. 하여 하나님은 장로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을 약속하신다. 37절‘,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며 언약의 줄로 매려니와‘ 징계는 있으나 언약은 영원하다는 것을 확인하신다.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언약의 하나님은 끝까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실 것이다.

 

24장,가마솥에 눌러붙은 녹

 

선지자들을 통해 이미 예고한 대로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한다. 주전588년 1월이다. 에스겔은 이 사건을 끊는 가마로 비유한다. 하나님께서 패역한 족속들에게 이 비유를 전하라고 명령하신다. (3) 예루살렘을 가마로 비유하고 그 안에 사는 백성들을 양고기로 비유한다.  침략자들은 양고기를 요리해서 먹을 것이다.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거기서 빠져나올 사람은 아무도 없고 방법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 녹슨가마가 첨부된다. 녹슨가마는 녹을 없에지 않은 가마로서 패역한 백성들을 가르킨다. 바벨론 군대가 닥치는대로 백성들을 살상 할 것이다. 하나님은 가마의 녹을 제거하려 계속 애쓰지만 녹은 없어지지 않는다. 결국 가마가 깨끗해져야 하나님의 진노는 그친다.

 

이제 하나님은 극단의 조치를 취하신다. 행위메세지의 극단의 방법은 에스겔의 아내를 죽이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에 애도도 하지 말 것을 명하신다.  이 예언은 아침에 선포되고 저녁에 아내가 죽는다 그리고 에스겔은 애도도하지 않는다.(18) 백성들은 에스겔의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묻는다. 에스겔의 아내를 희생시키면서까지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그러나 여전히 외면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에스겔의 아내는 예루살렘을 비유한다. 예루살렘이 멸망해도 애도하지 않는 지금 포로된 백성들, 그들의 완악함, 하나님은 에스겔의 가정까지 파괴하심으로 선지자를 사용하신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에스겔의 메시지에 반신반의 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의 죽음과 에스겔의 행위 메시지를 보고서야 믿을 것이다. (27) 이제 에스겔의 메시지는 더욱 강력하게 선포된다.

 

25장,열방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제 에스겔의 예언은 전환을 갖는다. 유다를 넘어 세계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이다. 지리적으로 유다의 주위에 있는 나라들을 다루고 있다. 열방의 심판이유가 무엇일까?

 

첫째는 언약백성들이 망하지만 이는 그들의 신인 여호와가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죄에 대한 징계라는 것이다. 언약백성들을 괴롭히고 멸망시킨 나라들은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열방은 이것을 잘못해석하고 언약백성의 멸망에 대해 조롱하고 저주까지 한 것이다. 하여 이제 여호와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나를 여호와 인줄 알리라‘는 말씀이 60여회나 반복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아브라함언약의 성취로서의 심판이다. 아브라함언약의 골자는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지만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하리라는 창12:2-3,22:18의 성취이다.

 

셋째는 언약백성들에게 소망을 주려는 것이다. (23:25-27,28:24-26) 역사의 주인되시는 여호와, 그리고 그분의 백성을 괴롭힌 족속들에 대한 심판, 그리고 언약백성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1.암몬심판(25:1-7)

암몬은 사사 입다 이후 이스라엘과 자주 적대관계에 있었다. 사울은 암몬과 싸워 길르앗 야베스를 구했고 다윗은 암몬을 정벌했다. 암몬은 여호사밧때에 모압,에돔과 연합해서 유다를 공격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망할 때 영토를 확장했고 여호야김 통치때에 느브갓네살의 연합군으로 유다를 공격했다. 주전 588년 반 바벨론 동맹에 유다,두로와 연합했다. 느브갓네살이 암몬을 공격하지 않고 유다를 공격하자 반사이익으로 유다의 멸망으로 인한 영토확장을 노렸다. 암몬은 어부지리를 노리고 여기저기 붙었던 비열한 족속으로 심판의 이유는 유다가 망하고 성전이 불탈 때 그리고 포로로 잡혀갈 때 기뻐하며 조롱하며 저주했다. 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동방사람(아랍민족)에게 멸망할 것을 말씀하셨다. 미꾸라지같이 심판을 피했으나  그들의 수도는 짐승의 처소가 될 것이며 그때에야 암몬족속은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5,7)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2.모압 심판

모압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대적 할 때부터 적대관계가 시작되었다.(민22-24장)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은 모압왕 에글론의 폭정을 겪었다.(삿3) 사울왕 때에 악화되어 다윗에 의해 정벌 되지만 여호사밧때에 반역하여 암몬,에돔과 연합해서 유다를 침공한다.

모압의 죄는 언약백성을 경멸한 죄이다. 언약관계를 부정한다.(8)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 할 때 선민이라는 교만 때문에 벌을 받았다고 조롱했다. 에스겔의 예언 후 얼마되지 않아서 모압과 암몬이 나바티안족들에게 멸망하게 된다.

 

3.에돔 심판

에돔은 에서의 후손이다. 에서와 야곱의 대립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일찍 하나님의 복을 받아 제국을 건설했다. 이스라엘이 아직 국가의 형태를 갖추기전 그들은 이미 대제국을 세웠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려할 때 길을 막았다. 사울은 에돔과 싸웠고 다윗은 에돔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에돔은 솔로몬통치 말기에 봉신국가가 되었고 여호람때에 독립했다. 그후 에돔과 이스라엘은 적대관계를 유지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망할 때 에돔은 바벨론과 합세했다. (오바댜1:11) 그리고 유다를 조롱하고 재물을 약탈했으며 유다의 멸망을 복수의 기회로 삼았다. 에돔이 현대 아랍인의 조상인 나바티안족에게 망하지만 에돔의 남은 자들은 유다 마카비우스에게 종속되었다가 요한 힐카누스에게 강제로 할례되어 유다로 합병된다.

 

4.블레셋심판

블레셋은 앞의 족속들 같이 유다와 혈연관계가 없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올 때부터 적이었다. 다윗이 블레셋을 복속시켰으나 솔로몬 사후 대적관계가 이어졌다. 블레셋의 죄는 “옛날부터 미워하는 마음으로 원수를 갚아 진멸코자 한 것“이다. 그렛사람은 그레타인이다.(신2:23,렘47:4,암9:7,창10:14) 마카비 시대이후 블레셋은 사라졌다.

 

 

26-27장,두로심판

 

두로의 죄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뻐하며 무역을 통한 이익만을 추구한 것이다. 두로 심판예언은 성경의 다른 곳보다 훨씬 길다(세장:사23:1-8,슥9:3-4,암1:9-10) 두로는 해상무역의 중심이고 예루살렘은 육상무역의 중심이었는데 예루살렘이 멸망하면 해상무역이 증대되리라는 계산에 기초한 교만이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에 의해 이뤄질 것이며 두로는 사라 질 것이다. 물질에 대한 풍요함에서 오는 유혹, 그리고 교만이 두로의 멸망원인이었다.

 

28장,소망

 

언약백성을 괴롭힌 국가와 족속들의 멸망,또한 그들의 교만죄로 인한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 그리고 언약백성들이 회복 될 때 열방은 하나님을 인정 할 것이다. 하나님은 반듯이 언약을 지키신다.

 

29-32장, 7개의 예언

 

제1예언:29:1-16

바로는 저주를 받을 것이고 애굽은 과거의 전성기를 다시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이유는 바로의 교만(3-5)이다. 1인칭이 반복된다. 또 하나는 애굽은 갈대와 같이 동맹을 맺을 때 마다 배신한 죄이다.  호세아왕의 이스라엘,시드기야의 유다가 애굽과 동맹을 맺었다가 애굽의 배신으로 상처를 받고 망하게 된다.  또한 애굽을 의지할 때 오는 징계이기도하다.

 

제2예언:29:17-21

바벨론 느브갓네살이 애굽을 정복 할 것이다.

 

제3예언:30:1-19

언약백성을 포함해 애굽과 동맹한 모든 나라의 멸망. 세상(애굽)을 의지한 결과는 멸망이다. 세상과 함께 의지한 나라들도 같이 멸망하게된다.

 

제4예언:30:20-26

바로의 성한 팔과 이미 꺾인 팔이 모두 꺾일 것이다.

 

제5예언:31:1-18

백향목과 같던 앗수르의 멸망. 그 이유는 교만한 마음이 구름에 닿았기 때문이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 웅장함과 화려함에 제국들은 앞 다투어 그것을 차지하려했다. 솔로몬도 성전건축에 그것을 사용했다. 하늘 높이 솟은 백향목은 메마른 근동에서 미와 부의 상징이었다. 그런 백향목에 비유된 것이 앗수르의 왕이다. 그러나 그 이면의 교만과 폭행, 무자비한 억압이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온 것이다.

 

제6예언:32:1-16

바로에 대한 애가

 

제7예언:32:17-32

장송곡

애굽,앗수르,엘람,메섹과 두발,에돔과 시돈 모두가 무덤에서 떨고 있다.

 

33장,파수꾼의 사명

 

유다와 열방에 대한 심판(4-32장)에서 유다의 회복으로 전환점을 이루는 33장은 두개로 나눌 수 있다. 1-20절은 파숫꾼의 사명과 그 결과,그리고 21-33절은 예루살렘 멸망 후 공동체에 대한 경고이다.

 

1.파수꾼의 사명이 얼마나 막중한가. 7절에 보면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우신다.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 할 지어다’ 2절의 주어는 그 땅 백성이다. 그러나 7절은 여호와이다. 언약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헤세드이다.

 

2. 파수꾼의 사명도 3절에서는 칼의 위협에 대해 ‘보고 경고하는 것’이지만 7절에서는 칼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다. 그리고 ‘듣고 경고’하는 것이다.  언약 백성을 위협하는 것은 칼이 아니라 여호와 자신인 것이다. 우리의 위협은 환경이나 사람이 아닌 하나님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3.경고에 대한 반응도 두 가지이다. 경고를 듣고도 돌이키지 않으면 그는 죽는다 그러나 에스겔은 산다. 그러나 경고하지 않고 악인이 죽으면 그 피의 댓가를 에스겔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34-37장,8가지 회복

38-48장은 하나님의 주권과 임재에 대한 것이며 여기서는 회복을 다루고 있다. 특히 성령을 통한 회복은 회복의 핵심이다.

 

34장1-6절은 타락한 목자들에 대한 말씀이다.‘ 자기만 먹어‘(1)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백성들을 악용했다.  또한 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돌아보지도 않았고(4) 영적지도력과 도덕성도 부족했다.(5-6) 목자(로에)는 ’라아‘(양을 치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이다. 이런 목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양을 먹여야 할 이들이 오히려 양을 먹었다. (2) 이들은 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사역한 것이다.

 

여호와는 목자없는 양들에게 친히 목자가 되셔서(15) ‘내 양’을 찾고 계신다. 사랑으로 찾으시며 구원하시며(12) 돌보시고(13) 먹이신다. (14-15) 8개의 동사가 강조된다.

 

찾고,건져내며,만민 중에 끌어내고 ,열방중에 모으며,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고,그들을 먹이며 좋은 꼴로 먹이고, 그들은 살진 꼴을 먹으며, 그들을 높은 산에 두실 것이고, 그들은 좋은 우리에 누울 것이다.  즉 구원, 인도, 보호, 먹이는 사역등 참 목자의 사역을 담당하신다. 또한 여호와는 공의로운 목자시다.(16)

 

그리하여 한 목자를 세우실 것인데 그가 다윗이다. ‘내 종 다윗’은 하나님의 종이다. 24절의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는 언약체결,문구이다. 다윗언약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24절의 ‘내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는 것은 다윗언약을 통해서 오실 메시야를 가르키는 것이다. 또한 25절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베리트 샬롬)을 세우고‘도 메시야의 오심과 그를 통하여 세우시는 새 언약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36:16-38, 이스라엘의 회복

 

회복의 도래(16-23)

회복의 7가지 요소(24-32)

회복의 결과(33-38)

 

하나님의 회복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나의 거룩한 이름(명예)를 위해서이다. (22) 언약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렵혔고(20) 포로로 잡혀간 열국에서 더렵혀졌다.(22)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큰 이름’이며 열국 중에서 거룩해 질 것이다.(23)

 

하나님께서 그 분의 명예회복을 위해 백성들을 회복시키신다. (24-32) 즉 포로귀환,용서와 속죄,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심,성령을 통해서 말씀을 지키도록 도우심이다. 이 모든 회복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심령의 변화로 일어난다.  에스겔은 성령의 도우심의 회복을 강조하고 예레미야는 말씀을 마음속에 두어 내면의 변화를 통한 회복을 강조한다.

 

28절에서 성령의 오심은 여호와와 언약백성들의 관계에서 언약을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땅에 거하는 것’은 언약의 회복을 뜻한다.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것은 역시 언약적 표현이다.  그러나 이것을 위해서 구하여야 할 것을 강조하신다. 이것은 조건 구원이 아니라 구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37장,마른뼈 환상

 

언약백성들의 절망은 그들의 모든 것을 무너트렸다 마치 마른 뼈들이 널려있는 골짜기 같다. 하나님께서 그런 절망가운데 ‘여호아의 손’(여호와의 권능)이 임하고 먼저 말씀을 대언하게 하신다. 이 예언을 통해 영이 들어가 그들을 살리게 될 것이라 하신다.

 

두 번째는 사방에 있는 생기(영)의 불어옴(9)에 대한 간구이다.  이 예언을 통해 뼈들은 큰 군대가 되었다. 그리고 살아있는 생명력이 되었다.

11-14절은 환상에 대한 해석이다.  이 뼈들은 이스라엘백성들이며 그들이 고백하기를 우리의 뼈들은 말랐고 소망이 없으며 우리는 모두 멸절되었다고 고백한다.  자신들에 대한 인식,고백을 들으시고 회복을 약속하신다.  이 회복은 무덤을 열고 나오시게 하는 것이다.(12) 이 회복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며 ‘내 신(루아흐)을 통한 회복이 주어진다.

 

그들 스스로의 회복은 불가능하다.  하여 하나님이 11회 반복,루아흐(영,신,생기,바람)이 10회 나온다. 하나님의 신으로 만이 회복되는 것을 강조한다.

24절25절에서 다시 다윗 언약을 강조하며 26절에서 화평의 언약(베리트 샬롬)이 영원한 언약(베리트 올람)으로 되게 하신다고 약속하신다. 즉 성령을 통한 샬롬의 언약은 하나님의 종인 다윗을 통해 그리스도가 나서 ‘한 목자’가 되어 영원한 언약을 이룰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회복이다. 또한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과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은 ‘내 성소’(그리스도와 성령)를 그들 중에 영원히  두겠다는 것이다.

 

38-39장,곡을 멸망시키는 하나님

 

마곡의 곡과의 최후전쟁에 대해 많은 해석의 어려움이 있다. 곡은 계20:8과 여기서만 등장한다. 하나님이 멸망시킬 최후의 전쟁대상이 곡이다. 마곡은 히브리어 자음 세 개인 멤,끼멜,끼멜로 이루어졌다. 이것을 알파벳순서로 하나씩 당겨 읽어보면 라멕,벳,벳이 되고 거꾸로 읽으면 발음이 바벨이 된다. 우연의 일치일 수 있으나 에스겔은 묵시문학의 형태를 빌려 기록하며 이런 이유로 마곡을 당시의 바벨론으로 암호와한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계시록의 바벨론 (배후의 사탄)과의 전쟁과도 같은 것이다. 언약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괴롭히는 나라가 바벨론인 것이다.

 

또한 지명을 해석하면 로스는 러시아 메섹과 두발은 두로의 무역 상대국(27:13)이다. 동맹국은 바사,구스,붓,고멜,도갈마이다. (창10:2-6) 모두가 흑해쪽에 위치해있다. 예언의 이중구조로 볼때 계시록의 아마겟돈전쟁과 오버랩되는 것이다.

 

40-43장 성전 회복

  유다가 멸망하면서 수많은 유다백성이 포로로 붙잡혀 바빌론으로 “사로잡힌 지 25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14년 정월 10일 곧 그 날에” 이는 B.C. 573년으로 에스겔 선지자가 소명을 받을 때(B.C. 593)로 부터 약 22년이 경과한 시기이다(1:1, 2;33:21). 한편 본 구절은 원전상 ‘그 해의 시작’이란 구절이 두 문장 사이에 첨가되어 있는 바, 이 구절의 해석과 ‘새 달’이란 문자적 의미의 ‘정월’(호데쉬)의 해석 여하에 따라 두 가지 견해로 대별된다.

 

먼저 첫 번째 견해는 ‘그 해의 시작’에 ‘정월’의 의미를 찾아, 이 ‘정월’을 이스라엘 종교력상의 첫 달인 ‘아빕 월’(민간력-7월)로 보는 것이다. 곧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유월절을 예비하던 날인(출 12:3, Havernick, Delitzsch, Schmieder) 동시에 요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첫 발을 내디딘 의미 있는 날이었다(수 4:19).

 

두 번째 견해는 본 구절의 연도를 B.C. 575년으로 보고, 그 해가 희년이라는 사실에 주안점을 두어 ‘그 해의 시작’을 ‘신년’ 곧 49년이 지난 후 오십 년째 되는 ‘희년’으로, ‘정월’을 1월이 아닌 종교력상의  ‘첫 달’이란 의미에서 희년을 시작하는 첫 달로서의 7월 10일인 ‘속죄일’(레 25:9)로 이해 한다(Hitzig, Rdak). 곧 이 속죄일은 희년에 이루어질 자유와 회복을 위한 전제로서의 속죄가 행해지는 날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견해 중 어느 것을 취해야 할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본 구절에 특정하게 제시된 ‘그 날’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잘 알려진 날이었으며, 회개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함축하고 궁극적인 자유와 회복의 의미를 내포한 특별한 날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호와의 권능이 에스겔을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신다. 여기서 에스겔은 환상 중에 이스라엘 땅의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으시는데”(40:2절) 여기서 ‘매우 높은 산’은 1장 이하에 언급된 에루살렘의 멸망과는 대조적으로 온전한 회복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들 거룩한 산 ‘시온’을 지시한다(17:22, 23;욜 2:32). 곧 시온산은 본래 기드론과 두로베온 골짜기 사이에 솟아있는 봉우리의 명칭이었으나, 후에 예루살렘 동남쪽에 위치한 ‘다윗 성’(왕상 8:1;대하 5:2)을 지칭했으며, 더 후대에는 예루살렘 전체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명칭으로 바뀌었다(사10:24). 따라서 이 ‘시온 산’은 곧 새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예루살렘을 이처럼 탁월하게 묘사한 것은 여기서의 새 성전이 궁극적으로 온전하게 회복될 하나님 나라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 나라의 영광스런 위상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사 2:2;미 4:1;계 21:10, Michaelis, Delitzsch, Schroder).

 

  에스겔은 그곳 높은 산에서 산 아래로 펼쳐지는 한 성읍을 보게 된다. 이것은 장차 이스라엘이 회복된 후에 나타날 아름다운 성읍의 형상이다. 또한 놋같이 빛난 사람 곧 천사가 모시로 만든 끈과 척량하는 막대기를 손에 들고 성읍 입구에서 환상 중에 에스겔에게 말한 내용도 언약 백성의 회복에 관한 내용이다. ‘인자야 지금부터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모든 것들을 네 눈으로 자세히 주목하고 또 네 귀로 잘 듣고 마음에 깊이 새겨 두어라. 이것이 바로 너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가 보는 모든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라’(4절).

  4절에는 네 개의 중요한 명령형 동사가 나온다. ‘너는 보라’( 레에), ‘너는 들으라’(쉐마), ‘그리고 너는 두라’(ים 붸심), ‘말하라’( 학게드). 이 단어들은 에스겔 선지자를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알려 준다. 하나님이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 장래의 일에 대해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비록 그들은 죄를 범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포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대로 징계의 기간이 끝나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 주실 것을 재확인하며 구원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주시는 것이다.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이스라엘 땅의 지극히 높은 한 산은 언약의 시온산이며 산 아래로 펼쳐지는 한 성읍은 예루살렘 성이다. 이것은 장차 이스라엘이 회복된 후에 나타날 아름다운 성읍의 형상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한 언약의  회복 곧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 사건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영적 회복을 의미한다. 따라서 새 성읍과 새 성전의 환상은 심판 중에도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을 보여 준다. 또한 언약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신실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곧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에야 비로소 회복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40:5~27

  에스겔은 환상중에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을 본다. 놋같이 빛난 사람 곧 천사가 모시로 만든 끈과 척량 막대기로 재어 본 결과, 그 담의 두께와 높이는 척량 막대기 하나 정도(약 3.2m)였다. 또 제단을 지나 문의 입구를 척량하고 문지기들의 방도 재었다. 그리고 성전을 향하는 출입문의 현관도 재었다. 동쪽 문 안쪽에 크기가 같은 작은 방 세 개가 있고 그 방들의 크기도 재었다. 천사는 계속해 에스겔을 데리고 북쪽 문과 남쪽 문으로 가서 각각 그 문들과 주변 방들을 척량했다. 남쪽으로 난 문과 북쪽으로 난 문의 크기는 같고 주변의 방이나 창문의 크기도 같다. 이렇게 척량하는 모습을 자세히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성전의 회복이 반드시 이뤄짐을 의미한다. 성전의 회복은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질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대한 그림자이다.

 

  에스겔이 본 모든 환상들은 미래의 영적 실체인 교회에 대한 완전한 회복이 모형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파괴되었지만 지금 에스겔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성전의 동쪽, 북쪽, 남쪽으로 난 문들을 척량하는 모습은 장차 이스라엘의 회복과 함께 실제로 성전의 회복을 의미한다. 동시에 신약시대의 메시아로 인한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새 성전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한 영적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 곧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말한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성전 제도의 회복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를 뜻하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뜻하기도 한다.

 

43장 두 번째 탐사

  에스겔은 40-42장에서 성읍과 성전의 구조와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한 후에 43장부터 두 번째 탐사를 시작한다. 첫 번째 탐사를 마친 에스겔은 지금 바깥뜰에 있는데, 곧 동문 쪽으로 간다.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43:1).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43:2절) 본 구절은 성전의 구조적 측량에 이어 19년 전 이스라엘의 패역으로 그 동문을 통해 성전을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 (10:18-22;11:22-24)이 그 동문을 통해 다시 완성된 성전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한편 5절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와 그 영광의 회귀는 모세의 성막 봉헌식(출 40:33, 34)과 솔로몬 성전 봉헌식(왕상 8:11) 당시에도 보여진 바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와 새롭게 갱신된 교회의 회복을 암시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곧 성전 완공의 마지막 단계인 성전 봉헌식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Delitzsch). 에스겔도 성령에 이끌려 안뜰로 들어가서 여호와의 영광이 성소에 가득 찬 것을 보고(43:5), 거기서 성전과 동문 사이에 있는 제단을 보며(43:13-27)바깥뜰로 나온다.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에 영원히 있을 곳이라”(43:7)는 말씀은 선재적으로 성취된 에스겔 성전의 성격을 규정하는 구절이다. ‘내 보좌의 처소’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의 핵심이 되는 곳을, ‘내 발을 두는 처소’는 하나님의 안식처가 되는 곳을,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할 곳’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삶을 지배하시며 그들과 교제하시는 곳이란 의미를 각각 내포한다. 한편 여기에 언급된 ‘내 보좌 의 처소’와 ‘내 발을 두는 처소’(나의 발등 상-시 132:7;사 60:13;66:1)는 모두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를 지칭하는 말로 쓰여졌다(출 25:22;삼상 4:4;대상 28:2;시 132:7, 8).

여기서 하나님의 거처로서의 언약궤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영원함(레올람)의 적용 여부에 따른 것이며 (37:26, 28) 에스겔 성전의 영원성과 완전함을 암시한다. 곧 이전 성전에서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가 될 수 없었다는 점과 에스겔 성전의 완성 때인 메시야 시대에는 그 언약궤가 필요치 않다는 점, 궁극적인 의미에서 메시야 시대의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을’, ‘하나님의 발등상’은 ‘땅’을 상징한다는 점(사 66:1;마 5:35)에서 언약궤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는 범죄 하지 않을 것을 기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 바로 곁에 산당들을 만들고, 거기서 하나님이 원치 않는 종교 행위를 했다. 하나님은 그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가?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서 그 부친 히스기야의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이스라엘 왕 아합의 소위를 본받아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하여 섬기며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전의 단들을 샇고 또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단들을 쌓고 또 그 아들을 불 가운데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격발하였으며 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아세라 목상을 전에 세웠더라”(왕하 21:2-7상).

 

  여기서 므낫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 이방신을 섬기는 제단을 쌓고 우상을 만들어 세웠다. 이런 행위는 하나님을 완전 무시하는 것이다. 8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 안뜰로 들어가는 북문에 우상을 세웠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제 너는 눈을 들어 북편을 바라보라 하시기로 내가 눈을 들어 북편을 바라보니 제단 문어귀 북편에 그 투기의 우상이 있더라”(8:5). 이런 망령된 행동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성전과 예루살렘에서 떠나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귀가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짐케 하신다. 지금까지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던 모든 행위들을 그만 두겠다고 약속케 하신다. 그럴 때 비로소 “내가 영원토록 그들이 가운데 거하리라”(9절)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성전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알려 주고 백성으로 하여금 성전법을 철저히 준행하게 하라고 명령하신다. “너는 이전의 제도와 식양과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11절).

 

44장. 예배 회복

  44:4절에서 “북문을 통하여 성전 앞에 이르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한지라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 혹자는 이를 성벽에 위치한 바깥 북문으로 이해하나(Kliefoth) 43:5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곳이 안뜰로 제시된 점과 안 북문이 바깥 북문보다 약 4척이 더 높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선지자가 직접 그 영광의 현현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안쪽 북문임이 분명하다(Delitzsch, Schroder, Hitzig). 한편 이처럼 여호와의 영과의 현현을 재삼 언급한 것은 이하 전개될 내용에 비추어 함부로 근접 할 수 없는 새 성전의 거룩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Delitzsch).

 

  이 구절부터 성전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자에 대한 규정이 9절까지 이어진다. 그들은 새 성전에 합당한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는 자들이다. 이러한  제 규정은 새로 회복될 이스라엘에서 그 백성들의 성결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며 학개(학 2:14), 에스라(스 4:1-3;10:10-44), 느헤미야(느 13:1-9) 등에 의해  계승된 사상이기도 하다.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내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그들로 내 성소 안에 있게 하여 내 성전을 더럽히므로”(7절)너희가 내 음식과 기름과 피를 제물로 바치며,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고, 육체에도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 사람들을, 내 성소 안에 데리고 들어옴으로써, 내 성전을 이렇게 더럽혀 놓았다. 너희가 저지른 온갖 역겨운 일들 때문에, 너희는 나와 세운 언약을 어겼다(44:7절).

 

또 너희가 나의 거룩한 물건들을 맡은 직분을 수행하지 않고, 그 일을 이방 사람들에게 맡겨서, 그들이 내 성소에서 너희 대신에 나를 섬기는 일을 하게 하였다(44:8). 그러므로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고 육체에도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 사람은 어느 누구도 내 성소에 들어올 수 없다.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사는 이방 사람도 들어올 수 없다(44:9).

 

  하나님은 레위인들의 행동에 대해 몹시 불쾌하게 여기셨고 이방인들을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레위인들도 하나님 가까이 나아올 수 없도록 하셨다. 따라서 그들은 제사장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소를 지키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그들이 비록 제사를 드리는 일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성전을 지키고 성전의 일들을 돕는 것은 여전히 맡게 된다.

 

  레위인들이 문책을 당해 제사를 담당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독의 자손들로 하여금 제사를 담당하게 하신다. 이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임에 틀림없지만,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지켜야 할 규정도 많다. 17-31절에서 모두 일곱 가지 규정을 언급한다. 17-19절은 제사장이 성전에서 일할 때 입는 옷에 관한 규정이다. 제사장은 성소에서 나갈 때 입고 있던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42:14). 여기서 특이한 것은 성전에서 일할 때 땀이 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20절은 머리털에 관한 규정이다. 21절은 성전에서 일할 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는 규정인데, 이것은 나답과 아비후 사건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참고 레 10:8-11).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술을 마시고 성전에 들어가는 행동을 엄격하게 금하신다. 그렇게 할 경우에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하신다. 레위기 10:10-11에 기록된 것처럼, 23-24절은 이스라엘 백성을 바르게 가르치고 법도를 지키게 하는 직무에 대해 말씀 하신다(신 33:10에도 레위인의 직무를 이렇게 규정한다). 또 제사장들은 재판도 담당했다(신 17:8-13에서 사람들이 재판할 일이 생겼을 때 제사장과 재판장을 찾아가라고 한다).

 

그리고 31절은 제사장이 먹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규정이다. 이 모든 규정들은 제사장들이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 얼마나 신중해야 하며,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철저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와 달리, 28-30절은 제사장들이 받는 혜택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며, 그들은 백성이 제물로 드리는 것을 먹고 살게 된다. 백성은 제물들 중에 일부를 제사장들에게 줘야 한다(참고 민 18:8-20). 이렇게 백성이 제사장의 생계를 책임지면, 제사장은 백성에게 복을 빌어준다(참고 민 6:22-27)

 

  하나님은 성전 밖을 지키는 임무를 레위인들에게 계속 맡기셨지만, 성전 안에서 하는 일들(제사를 비롯한 중요한 일들)은 사독의 자손들에게 맡기셨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지켜야 할 여러 가지 법도를 일러 주신다. 그 법도들을 지켜야 정결함을 유지할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일러 주신 법대로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은 분명 은혜로운 일이지만 동시에 매우 위험한 일임을 알아야 한다. 부정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간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요구받고, 사소한 실수에도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따라서 제사장직이란 특권만이 결코 아니다.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45-46장.새 시대 새 생활의 회복

  새 시대는 땅 나누기부터(45:1-8) 잘 해야 한다. 제비를 뽑아 땅을 나누는 것은  이스라엘의 오랜 전통이다. 이는 일종의 계획 국가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일정한 땅을 받아서 그것을 기업으로 삼아 살게 했다(참고 민 35:1-8). 땅 분배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48:8-35에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왕에게 땅을 주어 그 땅으로 왕가의 기업을 삼게 하라는 점이다. 즉 왕에게도 기업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왕들이 다시는 내 백성을 압제하지 아니하리라”(8중절)고 말씀하신다. 이는 왕이 백성을 압제하고 그들의 땅, 양도할 수 없는 ‘기업’을 빼앗은 것을 암시한다. 이 일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누리며 살 권리를 빼앗는 심각한 범죄 행위이다. 그런데 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은 그런 행동을 끊임없이 저질렀다. 따라서 하나님은 왕이 백성을 압제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신 것이다.

 

  본문에는 왕에 대한 언급이 지속적으로 나온다. 비록 왕에 대한 기술이 부정적이긴 하지만 43:7, 9과 44:3에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45:7-8, 9-17, 22; 46:2, 4, 8, 10, 12, 16-18에서도 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런 빈번한 언급은 왕이 이스라엘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본문은 왕의 현실적 권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왕이 탈법을 자행해도 무방한 무소불위의 권세를 갖는 것이 아님을 명시한다. 그들도 하나님 앞에서 백성에 불과하다.

 

  땅을 나누는 것은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생활 여건을 마련해 주는 동시에, 그들이 누릴 삶의 한계를 정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한계를 넘어서지 않게 한다. 모든 땅을 지파별과 가족별로 나눠 주고 남은 땅이 없게 되었다. 따라서 자기 영역을 넘어서 더 가지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땅을 빼앗는 일이 된다.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삶을 파괴하는 범죄 행위에 해당한다. 이것을 특히 권력자들이 명심해야 한다(참고 46:18).

  그런데 땅을 나누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한 구역을 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거룩한 구역에 성소를 둔다. 성소는 지극히 거룩한 곳이다. 그곳을 중심으로 왕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나눠준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을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왕궁이 중앙에 있는 게 아니라, 성소가 중앙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통치자들에게 특별히 명령하신다. 포악과 겁탈을 일삼지 말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도록 촉구한다. 그래서 ‘내 백성’을 속여 빼앗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왕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천명하신다. 이것은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리는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내 백성’이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왕이 백성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기는 것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내 백성’으로 칭하면서 왕에게 당부하는 것은 백성을 잘 다스리라는 것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백성을 억압하거나 겁탈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도량형을 정확하게 할 것을 명령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왕의 본분에 대해 말씀하신다. “왕은 본분대로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절기에 드릴지니 이스라엘 족속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와 감사제물을 갖출지니라”(17절). 왕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각 절기마다 하나님께 제대로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본문은 왕의 정치적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그 역할을 제의적 차원에서 정의한다.

 

  하나님은 절기들을 제대로 지키라고 명령하신다(45:18-46:15). 왕이 지원해야 하는 절기들 중에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신정(1월 1일)인데, 이 날에 해야 할 일은 성소를 정결케 하는 것이다. 성소가 백성의 범죄로 인해 더럽혀졌기 때문에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성소를 정결케 해야 한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는 실수로 죄지은 사람들을 위해 속죄제를 드려 성소를 정결케 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신년 초하루를 성전 정결로 시작하는 것은 의미가 깊다. 이스라엘 백성이 1년 동안 죄짓지 않고, 성전을 정결케 유지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언급되는 절기는 유월절이며, 일주일 동안 이 절기를 지키면서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먹으라고 한다(21절). 이것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동일시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로써 정월 14일에 지키고, 정월 15일부터 일주일 동안 무교절로 지킨다. 무교절은 보리를 거둬들이는 농사 절기인데, 바로 앞에 유월절이 있기 때문에 후대로 내려갈수록 무교절이 유월절화(化)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원래 유월절은 가족 중심으로 지키는 것이었는데, 본문에서 왕이 주관하고 있다. 이것은 요시야가 유월절을 국가적 차원에서 지킨 것을 떠올리게 한다(대하 35:7-9). 유월절이 가족 절기에서 국가적 행사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원래 유월절의 제물은 양인데, 여기서 송아지를 제물로 삼는다. 유월절의 제물은 양(출 12:1-28)에서, 양을 예물로 드리고 나서 다시 소와 염소를 예물로 드리는 것(민 28:16-25, 대하 30:15-17)에서, 양과 소와 염소를 함께 드리는 것(대하 35:7-9)에서, 소를 드리는 것(겔 45:22)에서, 다시 양을 드리는 것으로 바뀌었다(스 6:17-22).

 

  7월 15일에는 일주일 동안 수장절을 지킨다(레 23:39-44, 신 16:13, 16). 그런데 절기 때에 드리는 제사는 대체로 속죄제이다. 그만큼 속죄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언급되는 절기는 안식일과 초하루이다. 이 절기들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동쪽 안문을 통제하는 것이다. 왕은 이 문을 통해 출입해야 하며(46:8), 다른 사람은 이 문을 사용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것은 매일 아침에 드리는 제사이다. 아침마다 일 년 된 양 한 마리를 드려야 하는데, 소제도 함께 드린다. 여기서는 저녁 제사에 대해선 말씀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은 통치자들도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하신다(46:16-18). 본문은 통치자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언급하는데, 여기서 왕의 기업에 대해 말씀하신다. 즉 왕이 받은 기업도 다른 사람들처럼 보존되어야 한다. 그리고 왕이라고 해서 원래 받은 것 이상으로 기업을 늘리지 말아야 하며, 기업을 잘 유지해 후손들에게 그대로 전수해야 한다. 하나님은 왕이 기업을 늘리기 위해 백성의 기업을 뺏고, 삶의 터전을 잃은 백성으로 하여금 살 길을 찾아 어디론가 떠나게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것은 당시에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음을 암시한다.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 그 좋은 예이다. 따라서 본문 기자는 왕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업을 잘 지키고 보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왕이 일정한 땅을 소유하고 그것을 임의적으로 늘려갈 수 없는 상황에서, 신하에게 땅을 선물로 주면 왕의 가업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에 희년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기업을 되돌려주면, 그것을 왕의 자손들에게 물려 줘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왕의 기업을 회복한다. 왕의 기업도 희년에 환수 대상이라는 게 아이러니다. 이것은 왕도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법 적용을 받아야 함을 의미한다.

왕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법을 준수하는 것이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죄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신 17:18-20).

 

  왕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율법이다. 그런데 제사장과 왕에 대한 규정들이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것은 제사장과 왕이 동일한 책임과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47-48장.새로운 나라의 회복

 

  이제 40장부터 전개된 성전의 측량과 새로운 율법의 지침이 일단락되면서 새로운 내용 곧 하나님의 거처인 성전을 중심으로 성취될 이스라엘의 축복이 생명수의 환상을 통해 12절까지 제시된다. 실로 물과 기름짐, 축복 등은 구약에 있어서 서로간에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갖는 말인 바,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이 강을 이루어 사해까지 흘러 들어가 황무하고 죽어있는 땅을 기름진 땅으로 변화시키는 본문(1-12절)의 회화적 묘사는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풍성한 축복을 상징한다(시 46:4;65:9;사 33:20). 한편 이 부분은 궁극적으로 구원의 원천이 바로 하나님이심(계 22:1)과,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온 우주를 풍성하게 소생시킨다는 점을 보여준다(요 10:10).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역으로 성도들의 죄악을 담당하셨으며 친히 자신을 ‘생수의 강’으로 언급하셨다는 점에서(요 4:10;7:38) 이 ‘생명수의 강’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한다 하겠다

 

(1). 생명을 주는 강(47:1-12절)

. 물이 강으로 됨(47:1-5절)

가. 스며 나오는 물(47:1-2절) 

  성전 둘러보기를 마친 에스겔은 이제 성전 건물의 문에 이른다. 거기서 동쪽을 향한 성전 건물의 문지방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본다. 원문에 있는 ‘히네’라는 단어는 에스겔의 발견에 극적 효과를 더한다. 이 단어는 독자들의 시선을 에스겔의 시선과 일치시킨다. 그 나오는 물을 카메라가 클로즈업해 보여 주는 것과 비슷한 장치이다. 문지방에서 나오는 물은 성전 안뜰에 있는 제단 쪽으로 흐른다. 그리고 제단을 지날 즈음에 제단의 남쪽을 둘러 흐른다(1절).

 

  물은 계속해 동쪽으로 흘러 그 물줄기가 동쪽 문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그 동쪽 문은 영광이 돌아온 이후 닫혀 있었다(43:1이하; 44:1-2). 이에 성전 안내자는 에스겔을 북쪽 문을 통해 성전 담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고, 성전담의 북동쪽 모서리를 돌아 동쪽 문의 바깥에 이르게 한다. 그곳에서 에스겔은 문을 통과해 스며 나오는 물을 다시 만난다. 1절에 사용된 ‘히네’가 여기에서 다시 사용되어 독자들로 하여금 한 번 더 에스겔의 시선에 동참하도록 초대한다.

  ‘스며 나오다’라는 표현의 히브리어는 ( 파카) - ‘쏟다’란 문자적 의미를 가지는 바, 이는 단순하게 물이 배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차게 솟구쳐 나오는 것을 묘사하는 말로서  1절의 ‘흘러 내리더라’와 비교해볼 때 그 물의 양이 성전 안에서 이미 상당하게 불어나 있음을 암시한다(Delitzsch, Neumann, Gesenius).

 

나. 넘쳐흐르는 강(47:3-5절)

  이제 안내자는 스며 나오는 물이 만드는 물줄기를 따라간다. 1,000척씩 즉 약 450m식 거리를 재며 동쪽으로 나아가는 그는 에스겔로 하여금 매번 그물을 건너게 한다. 처음에 발목, 다음에 무릎, 그다음에 허리까지 오는 물이었다(3-4절)

 

  이 단락의 마지막 장면인 5절을 개혁한글에 기초해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그가 1,000척을 척량했다. 내가 건너지 못할 강! 왜냐하면 그 물이 깊었다. 헤엄칠 만한 물! 건너지지 못할 강!’

 

  5절에서 물의 변화에 대해 최소한 두 가지 관찰을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물을 ‘강’(나할)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졸졸 흘러나온 물이 이제는 ‘강’이 된 것이다. 두 번째는 그 강의 깊이에 대해 ‘건너다’라는 동사를 한 번은 능동태(‘내가 건너지 못할 강’)로, 또 한 번은 수동태(‘건너지지 못할 강’)로 사용해 물의 깊이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에스겔이 건너지 못할 만큼 깊은 강이 된 것이다.

 

  불어난 물의 양에 대한 강조는 그것이 점점 더 많아지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표현한 3-4절의 묘사와 더불어 맨 처음 그 물의 근원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성전 문지방 밑에서 스며 나온 물이 조금씩 불어나더니, 마침내 큰 강으로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물의 양의 변화는 에스겔이 보게 될 성전 너머 세상의 변화에 대한 환상의 서곡에 불과하다.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47:5절)라는 말씀은 성소에서 발원한 물이 기적적으로 증가하여 이처럼 한길 이상되는 생수의 강으로 가득하게 된 사실은 여기서의 생수가 구원과 축복의 상징이란 점에서 새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관심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②. 강이 가져올 변화(47:6-12절)

 

가. 강가의 많은 나무를 봄(6-7절)

  성전 안내자는 물이 강으로 변함에 대해 이미 놀랐을 에스겔에게 목격한 것을 확인한다(‘보았느냐? 인자야’). 아직은 놀라기에 이르다. 에스겔에게 보여줄 것이 더 있다. 그가 이편 저편에 있는 장면이 펼쳐진다. 여기서도 ‘히네’( 흔히 ‘보라’라고 번역하기도 한다)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에스겔의 시선에 독자들을 초청함 그의 놀람에 동참시킨다.

 

“나를 인도하여 강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6절) - 여기서 이 말은 생수의 강의 가장자리 곧 '뚝 위로'란 뜻으로서 선지자가 그 물 속에서 세 번째 측량때까지 따라 내려갔다가 그 물 속에서 네 번째 측량을 목격하고 다시 뚝 위로 올라온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Schroder, Hengstenberg). “나무가 심히 많더라”(47:7) 여기서 ‘많더라’( רב, 리브)는 원어상 ‘(양이나 질에 있어서)풍성한’이란 뜻으로 단지 나무의 많음을 말한다기보다는 나무와 함께 그 열매의 풍성함까지도 내포한 말이다(Schroder). 따라서 본 구절은 새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축복으로서의 비옥함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나. 풍성한 생명을 가져오는 강물(8-12절)

  두 번째 부분은 그 강물이 가져올 풍성한 생명의  모습들에 대한 인도자의 설명으로 이뤄져 있다. 이 강물은 요단 계곡을 지칭하는 듯한 ‘아라바’를 내려가 지금의 사해로 생각되는 ‘바다’의 물을 되살릴 것이다(8절).

  또한 이 강물은 바다만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르는 모든 곳과 그 속의 ‘모든 생물’(네페쉬 하야)을 살릴 것이다. 물고기도 심히 많아질 것이다. ‘되살아나다’(라파), 이 동사가 수동형으로 쓰였을 때 가장 일반적인 의미는 (‘치료되다’)라는 동사는 8, 9절의 핵심 단어다. 이 강물은 치료와 회복을 의미한다.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물이 되살아나리라( 라파)는 '고치다'란 뜻인 바(왕하 2:22), 본 구절은 사해 곧 죽은 물이 성전에서 발원한  생수로 인해 모든 생명체가 살 수 있는(9, 10절), 살아있는 물로 고침을 받게 된다는 의미다. 이는 상징적으로 죽음의 자리에서 영생의 자리로 당신의 백성을 옮기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암시한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여기서 ‘강물’(나할)은 원어상 복수형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혹자는 이를 그 강의 지류들이란 뜻으로 해석한다(Kliefoth). 그러나 이는 그 물의 창일함과 강한 흐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Hengstenberg, Delitzsch, Umbreit). 그러한 강의 강력함이 모든 죽음의 세력을 휩쓸어 버리고 생명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바다가 강을 흡수하는 현상과는 달리 그 생수의 강은 죽음의 바다(사해)로 들어간 후 생명의 능력으로 죽음의 바다를 생명의 바다로 변환시킨다.

 

  이 강은 자연 세계를 넘어 사람들에게도 복이 될 것이다. ‘엔게디’(‘염소의 샘’)와 ‘에네글라임’(‘두 송아지의 샘’)은 각각 사해의 서편과 동편 해안 지역으로 보인다. 아무것도 살지 않는 죽음의 바다가 생명으로 가득 차게 될 때 그 주변 지역들도 유익을 누리게 된다. 지중해를 의미하는 ‘큰 바다’처럼 각양각색의 물고기들이 사해에 많아지면 그것들을 잡고자 하는 어부들도 모여들 것이다.

 

  11절은 언뜻 보기에 강물의 능력의 한계를 묘사하는 부정적인 진술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구절을 그 강물의 ‘사려 깊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면 더욱 적절하다. 사해의 모든 부분이 되살아나면, 즉 염분이 없어지거나 옅어져 물

고기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사해에서 더 이상 소금이 생산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당시 제사와 생활에 소금이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에 소금을 얻을 수 있는 장소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라는 11절의 진술은 긍정적의미로 이해해야 하며 ‘소금 땅이 될 것’이라는 번역보다 ‘소금을 위해 남겨질 것이다’라는 번역이 긍정적 의미를 좀 더 잘 전달해 준다.

 

  생명을 가져오는 강물의 능력에 대한 마지막 부분의 관심은 6-7절에서 언급된 나무들로 다시 돌아간다. 그 대신에 이번엔 그 나무들과 열매와 잎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진술을 곁들이다. 생명을 주고 치유하는 강물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 그것이 자라게 한 나무의 열매와 잎조차 그런 강물의 능력을 여전히 소유할 것이다. 강물이 대단한 능력은 7, 9, 10절에서 강물이 만들어내는 각종 생명체들이 ‘심히 많다’라고 반복해 묘사된 점에서도 느낄 수 있다. 12절에서 ‘그 물이 성소를 통해 나옴이라’는 진술은 모든 생명들의 변화의 근원이 성소에 있음을 재확인한다.

 

47:13-48:29.다시 사람이 살게 될 땅

 

①. 전체 땅의 외적 경계(47:13-23)

 

가. 땅 분배에 대한 원칙(47:13-14; 21-23절)

   땅의 분배하는 원칙에서 자주 나오는 ‘기업’이라는 단어와 그와 관련된 동사들은 이스라엘이 회복된 땅에서 살게 됨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옛 약속을 지키신 결과임을 보여준다. 14절의 “이 땅을 너희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하였나니”라는 옛 약속에 대한 재확인은 이런 사실을 더욱 강조한다.

 

  “공평하게 나누어 기업을 삼으라” ‘공평하게 나누어’란 어느 한 편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공평하게 분배하라는 말이다. 이 말은 가나안 땅 분배에서 보여지듯이 단순히 땅 넓이가 동일하게 분배하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고려해서 서로가  아무런 불만이 없게 분배하라는 것이다. “이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되리라”(47:14) 이는 다음과 같은 삼중적 의미로 고찰해 볼 수 있다.

(1) 여자적 해석으로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벗어나 고토로 귀환하여 그 땅을 다시 소유하게 되리란 의미,

(2) 신앙적 해석으로 가나안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증표로 주신 약속의 땅이란 점에서 이스라엘의 약속의 땅에 대한 회복은 곧 그 동안 그들의 죄로 인해 파기되었던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새롭게 갱신된다는 의미,

(3) 긍극적이고 종말론적 해석으로 가나안 땅이 하나님 나라의 예표였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의 의미(계 21:1) 등이다.

  땅을 기업으로 평등하게 나눠 갖는 주제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이다. ‘기업’과 더불어 자주 나오는 단어인 ‘지파’와 그것을 사용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는 표현은 남북 분열 왕국 이전에, 심지어 왕정 이전에 있었던 언약 백성의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합의를 가진 것으로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지파들의 체제에 ‘타국인’(게르)들도 포함될 것이다. 즉 지파간 평등의 범위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22절). 이스라엘 속에서 여러 계층으로 살아가던 타국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어느 정도 유사한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할례를 받으면 유월절 식사에도 참여할 수 있었고(출 12:48), 원한다면 제사와 같은 종교 행위에도 온전히 참여할 수 있었다(참고 레 22:18).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은 권리가 있었는데, 곧 땅에 관한 것이다. 타국인들은 땅을 차지할 수 없었다. 이 한계는 그들로 하여금 ‘이등 시민’으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에스겔의 마지막 환상에서 이 제한마저 철폐된다. 이런 보편성 혹은 포괄성이 원칙이 이상적 기업 분배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음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나. 땅의 사방 경계(15-20절)

  땅의 사방 경계의 특징은 첫째,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소유했던 땅의 최대 영역 혹은 좀 더 큰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특히 북쪽 경계에서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이 본문은 ‘역사적 지리’가 아닌 ‘신학적 지리’로써 크기보다 여기에 나타난 경계들이 싸고 있는 곳(당연한 이야기 같지만)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 땅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즉 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오래되고 빛바래지 않은 약속의 성취를 누리는 것이다.

 

  둘째, 요단강의 동쪽 지역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겔 47:18절 ‘동쪽은 하우란과 다메섹과 및 길르앗과 이스라엘 땅 사이에 있는 요단 강이니....’). 역사적으로 요단강의 동쪽 지역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비파가 치지했던 곳이다. 그런데 이 지역이 에스겔의 신학적 약속의 땅에서 빠져 있는 것이다. 우상 숭배(참고 수 22장) 혹은 소돔과의 관련(참고 창 13장)을 통해 요단 동편의 부정적 합의를 찾아내는 설명들은 설득력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요단 동편은 원래 주어진 약속의 땅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에 제외되었다는 설명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조상들에게 약속한 전체의 맥락과 더 잘 어울린다. 즉 이 새로운 땅을 기업으로 회복하는 환상은 요단 동편을 포함하는 역사적 회복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언약과 연관된 신학적-상징적 회복에 관한 것이다(비교 수 14-21장). 실제로 바빌론의 포로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올 수 있는 지파로 유다 지파가 유일했다.

 

또한 포로 이후 이스라엘은 물리적으로 여기에 기록된 경계들로 이뤄진 땅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제부터 살펴볼 동서로 반듯한 경계로 각 지파들에게 땅을 나눠 주는 것도 지리적 불가능하고 역사적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 본문들을 신학적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48:1-29절. 땅의 내적 구획

 

①. 예물로 드릴 땅, 북쪽과 남쪽의 지파들(1-7, 23-29절)

  각 지파들의 위치는 그들이 역사 속에서 차지했던 위치보다 야곱의 자손들의 지위를 반영한다는 원칙이 좀 더 지배적이다. “예물로 드릴 땅”(참고 48:8)에서 가장 먼 북쪽과 남쪽에는 야곱의 첩들인 실바와 빌하의 아들들의 지파(1-3; 27-28절)가 위치한다. 그리고 좀 더 중심에 가까이 야곱의 본처인 라헬과 레아의 아들들이 북쪽과 남쪽에 각각 네 지파씩(4-7, 23-26) 위치한다.

 

  여기서 ‘예물로 드릴 땅’에 가장 인접해 북쪽에는 유다 지파, 남쪽에는 베냐민 지파가 위치하는데 이는 그들의 역사적 위치와 반대이다(7, 23절). 즉 ‘남유다 왕국’으로 대표되던 유다 지파도 새로운 땅에서 ‘북쪽’에 위치할 것이다. 이런 새로운 배치는 다시 회복할 나라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눔이 없는 하나 될 것임을 상징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새 땅에 대한 이상은 왕국 시대 이전의 모습에 기초한다.

 

  48:7절에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유다의 몫이요”유다 지파가 야곱의 장

자된  르우벤 대신 거룩한 땅에 연접 할 수 있었던 것은 야곱의 축복을 통해 메시야의 출생을 언약 받은 영적 장자의 신분이었기 때문이다(창 49:8-12). 또한 유다 지파는 베냐민 지파와 함께 반역한 북이스라엘 왕국에 동참한 10지파를 대항해 이스라엘 왕국의 정통성을 이어갔다는 점에서 타지파 보다 신앙적, 역사적인 우월성을 가졌다. 한편 거룩한 땅을 분기점으로 북쪽과 남쪽의 지파 배열이 동등한 6:6의 비율로 정해지지 않고 7:5의 비율로 배분된 것은 완전수 ‘7’은 항상 대표적인 수로, ‘5’는 그 ‘7’의 보충적인 수로 여긴 히브리적 개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Hengstenberg). 따라서 이러한 배분은 북쪽 일곱 지파 중에서도 대표적인 유다의 탁월한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② ‘예물로 드릴 땅’

  ‘예물로 드릴 땅’의 위치도 회복될 땅의 새로움을 잘 보여 준다. 이 특별한 땅의 위치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라이트의 지도를 살펴보면 ‘특별 보류지’의 남쪽에 위치한 지파들의 땅의 폭이 북쪽에 위치한 지파들의 그것보다 좁은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특별 보류지’의 위치를 역사적인 예루살렘의 위치와 동일시할 때 그려진다. 반면, 두굿의 지도는 각 지파들의 땅의 폭이 모두 동일한 반면에 ‘거룩한 땅’의 위치가 역사적인 예루살렘의 위치보다 북쪽으로 약 48km쯤 떨어진 곳으로 예루살렘 이전에 회막과 언약궤가 위치했던 예배의 중심지인 실로(참고 수 18:1; 삼상 1:3, 24; 4:3) 근처가 된다.

 

  예배 중심지의 새로운 위치는 예루살렘이 우상 숭배로 더러워졌던 것(참고 8-11장)을 생각해 볼 때, 그리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 또한 새로운 땅의 기업 분배가 왕정 이전의 전통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 비춰 볼 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울 수 있다. 요컨대, 에스겔서는 좀 더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회복을 바라보고 있다.

 

48:30-35. 여호와 삼마

  에스겔서의 마지막 부분은 48:15-19에서 언급된 성읍에 관해 문들과 그 성읍 자체의 이름을 언급하며 마친다. 성읍 기지의 중앙에 위치한 성의 출입문들을 언급한다. 곧 이 출입문들은 성의 사면에 각각 3개씩 모두 12개가 있게 되며 그 각각의 출입문에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명명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2대문에 12지파의 이름을 명명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예루살렘 환상 기사가 수록된 계 21:12과 연관되어 있다(Delitzsch). 왜냐하면 본장의 새 성전의 성읍 역시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성취될 온전한 하나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성의 출입문들이 12지파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는 것은 곧 그 성읍이 온 이스라엘의 공동의 소유인 것을 암시하는데, 이러한 성읍이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로 명칭 되었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새 이스라엘 공동체와 항상 함께하시리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35절에서 “그 날 후로는”(יוֹם, 미욤) 여기서 ‘그 날’은 하나님의 모든 구원 사역이 완성되는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의 날인 동시에 완전하게 성취되는 때를 가리킨다.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원전상 본서는 ‘여호와께서 거

기에 계시다’란 뜻의 ‘여호와 삼마’는 에스겔 선지자의 사역을 함축하는 총괄적인 주제라고 말할 수 있다.

여호와의 영광의 떠나심(10:18-22;11:22-24)과 다시 돌아오심(43:4)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새 성전에 거하시면서 다시는 당신의 백성을 떠나지 않으시리라 하신 약속으로 귀결되며(43:7) 결과적으로 그 모든 사역이 '여호와 삼마'로 종결되는 것이다.

이 성읍이 12지파, 곧 전 이스라엘의 공동 소유란 점에서, 단순하게 여호와의  처소를 지칭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새 이스라엘과 그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라는 보다 포괄적이고 궁극적인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이 성읍은 정사각형 모양이 상징하는 것처럼 완벽할 것이며(참고 계 21:16), 각 문의 이름이 보여 주는 것처럼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 되며 그 성읍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