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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소선지서

호리홀리 2021. 12. 20. 12:57

소 선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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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강좌

2021. 12. 20.

 

                                  12소선지서

                                                                                         박인대교수

 

 

 

<선지자 연대표>

 

 

선지자                 역사적배경                        연대 BC

 

1.오바댜        왕하25,대하36:11~21            853~841(586~583)

2.요엘          11~15:17                                 835~796

3.요나          13~14                                    793~753

4.아모스        14:23,15:7                                760~755

5.호세아        15~18                                   753~715

6.이사야        15~20                                   740~680

7.미가          15:8~20                                 735~690

8.나훔          요나,사10                                640~630

9.스바냐        22~23                                   640~630

10.예레미야     22~25                                   626~585

11.하박국       23:1~24:20                              608~597

12.다니엘       23:35~25:30                             600~530

13.에스겔       24:17~25                                592~570

14.학개         에스라5~6                               520~519

15.스가랴       에스라5~6                               520~475

16.말라기       느헤미야13                               435~425

 

 

 

 

 

 

 

 

 

                      

                           1.호세아서

 

역사적배경

 

호세아는 유다왕 웃시야(주전792-740),요담,아하스,히스기야(729-686)까지 그리고 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793-753)때 활동한 선지자이다. 여로보암 통치 첫해인 793년부터 히스기야의 마지막 통치인 686년 사이이다. 즉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직전까지 사역한 것이다. 여로보암2세의 시대는 물질적 풍요와 영적빈곤의 시대였다. 심판은 먼 것 같이 보였으나 732년 다메섹이 함락되고 722년 마지막 왕인 호세아 때에 수도 사마리아는 함락되고 백성들은 앗수르에 끌려간다.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6명의 왕들이 바뀌는 혼란의 30년, 격동기에 사역한 것이다. 호세아의 사역시기는 대략 753-715년 정도이다.

 

호세아의 이름은 구원을 뜻한다. 그는 북 왕국 출신이며 이스라엘에서 사역한 선지자이다. 주로 사마리아 벧엘,길갈에서 사역했다. 호세아는 아모스보다 조금 늦게 사역을 시작했으며 유다에서는 이사야, 미가가 활동했다. 

 

특징

 

호세아서의 가장 큰 특징은 그의 결혼이다.  그것은 호세아의 소명이자 호세아서의 주제이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충격적인 행위메세지를 전하게 하신다. 이스라엘의 멸망이 다가옴에 따라 하나님은 말로해서 듣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충격적인 사건을 통하여 회개케 하신다. 당대의 유명한 창녀인 고멜에게 찾아가 결혼하라는 것이다. 당시 종교적으로 간음하고 음란한 이스라엘에 대한 죄악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간음하는 고멜을 계속 사랑하는 호세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헤세드,인애)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호세아서의 중심 단어는 헤세드(인애)이다. 언약관계에서의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이다. 헤세드는 창 24:12,14에 처음 나온다(은혜). 24:8에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 다메섹 엘리에셀이 언약적 관계에서 반듯이 성취되기를 원하며 하나님께서 헤세드를 베풀어 달라는 기도를 드린다.

창39:21절에는 인자로 번역한다. 호세아서에서는 인애로 번역한다. 하나님께 헤세드를 받았으면 헤세드를 베풀어야한다.(순환적 원리) 그러나 이스라엘에게서 그러한 것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주제

 

언약 파기에 대한 언약적저주가 선포된다. 회개하고 돌아올 것에 대한 경고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심판 그러나 그것은 파멸이 아닌 종말론적 희망이다.

 

내용

 

1장,이해할 수 없는 사랑

 

여로보암2세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은 급격히 쇠락한다. 그의 아들 스가랴는 6개월 통치 후에 살룸에게 살해되었고 1개월 통치한 살룸도 므나헴(752-742)에게 살해된다. 그의 아들인 브가히야도 베가(752-732)에게 살해된다. 베가는 733년 앗수르의 공격을 받는다. 마지막 왕 호세아(732-722)도 살만에셀에게 침공을 당해 722년 망한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행위메세지를 전하게 하신다. 가히 충격적이다. 창기 고멜과 결혼하라는 것이다. 더구나 고멜이 낳은 자녀를 입양하라는 명령이다. 자녀들의 이름은 멧세지를 갖고 있다.

 

첫째아들 ‘이스르엘‘은 ’하나님이 흩으시다’라는 뜻이다. 이스라엘과 발음은 비슷하지만 이스라엘은 언약백성의 호칭이나 이스르엘은 반대의 의미인 버린 자식(멸망)을 가르킨다. 이 이름은 예후가 아합의 집을 심판한 도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이 섬기던 바알을 부신 후 똥간으로 만들어 버린 곳이다. (왕하10:19-24)  이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서 북 왕국을 폐하실 것과(4) 이스라엘의 활(5)을 꺾으실 것(패배)을 예언하는 저주의 이름인 것이다.

 

예후의 개혁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 없었다. 그는 바알은 폐했으나 여로보암의 금 송아지는 용납했던 것이다. 하여 이스라엘은 바알의 패망으로 잠간 부흥하는 듯했으나 다시 부패하여 패망하게 된 것이다. 예후왕조의 3대 왕인 여로보암2세는 나라를 부강케했으나 우상숭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것이다.

 

두 번째 딸은 ‘로루하마‘이다. 뜻은 ’불쌍히 여기지 않다’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7절에 유다는 불쌍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언약관계를 의미)로 구원하겠다는 말씀은 6절과 병행을 이룬다. 유다는 70년 기한부로 포로가 되었으나 이스라엘은 무기한으로 포로가 된 것이다. 

 

세 번째 아들인 ‘로암미’(나의 백성이 아니다)는 언약관계의 파기를 보여주며  7절의 유다백성과 대조를 이룬다. 9절의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 할 것이라’는 말은 1인칭을 강조하시며 언약파기를 강조한다.(언약문구의 반대표현) 또한 모세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주신 것을 거두시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네 하나님이 아니다는 말이 얼마나 저주스런 말인가? 너와 나는 관계없다. 너는 언약 백성이 아니다, 나는 너를 이방인 취급하겠다. 너는 소망도 없다는 저주스런 말이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며 ‘내 백성’(암미)이라 호칭하셨는데 이것을 거두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심판 후에는 이스라엘을 축복하신다. ‘모래알 같이’(10), 이것은 아브라함언약의 성취이다. 지금은 내 백성이 아니나 장차 ‘사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불림을 받는다. 심판과 회복을 통해 여호와가 살아계신 하나님인 것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또한 유다와 이스라엘이 한 지도자(두목)를 세워 그 땅에서부터 올라올 것 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회복의 말씀이다. 이런 회복의 징조로 이름을 바꾸어 주신다. ‘암미’(내 백성) ‘루하마(’긍휼히 여기심),라고 부르며 회복을 약속하신다.

 

언약을 파기하고 패역한 백성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아시는가? 호세아는 자신과 가정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2장,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소송

 

2장은 1장의 결혼관계에 대한 해석이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소송을 다루고 있다. 죄목은 간음이다. 5절, 이스라엘이 연애하는 바알에게 ‘떡,물,양털,삼,기름,술을 바치며‘ 그런데 1인칭이 반복 강조된다. 모두가 내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9절은 병행구이며 하나님도 1인칭을 강조하며  내 것을 뺏으리라 하신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바알에게 갖다 바치며 내 것을 연애하는 자에게 바친다고 강조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남편이신 하나님은 다시 받아들이신다. 그리고 회복시켜주신다. 언약을 회복시키신다.(18)  19절 ‘장가들어’는 언약관계 회복을 뜻하며 그 이유는 ‘은총과 긍휼‘( 늘 붙어 나오는 단어) 은총이 ’헤세드‘이다. 언약적 관계에서의 사랑 때문에 회복시키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단순한 사랑과 긍휼이 아닌, 하나님의 속성 때문이 아니라 언약적 관계에서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르엘은 흩어버린다는 말인데 23절에는 ‘이 땅에 다시 심고’ ‘너는 내 백성이라 하겠고’ 라고 하면서 언약관계의 회복을 강조한다.

 

3장,다윗언약

 

5절은 다윗언약을 강조한다. 1절의 지식에 정관사가 붙어 언약을 가르킨다.

 

4장,하나님을 아는 지식

 

1부(1-3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면 2부(4-13장)에서는 죄의 확대와 심판, 그리고 돌아올 것을 호소한다. 돌아오는 자에게 언약을 시행할 것을 선포한다.

 

헤세드(인애)는 순환 원리이다. 하나님이 언약백성에게 베푸신 인애는 다시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인애를 베풀기는커녕, 반대로 저주,살인등을 베풀었다. 더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하게 되었다. 이는 사사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던 것과 같은 죄이다. 제사장은 말씀을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그리하지 않았다.(제사장들의 타락) 하여 하나님은 먼저 제사장들을 버리겠다고 하셨다.

 

아브라함언약의 골자는 ‘씨와 땅’인데 ‘그 땅’(1,3)과 ‘씨’(내 백성,6)를 버리겠다는 것이다. 첫째 책임은 제사장,다음은 선지자이다. 그 다음은 언약파기에도 깨닫지 못하는 백성들, 완강한 백성들이다.

‘길갈’(15)이 어떤 곳인가? 처음 요단을 건넜을 때 첫 수도이며 첫 할례를 받았고 처음 언약을 체결한 곳이다. 또한 사울이 왕이 되면서 언약을 체결한 곳이고 그가 왕이 되어 다스린 곳이며 후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신학교를 세운 곳이다. 그들에게 성지와 같은 길갈이 우상숭배의 본부가 된 것이다.

‘벧아윈’은 벧엘을 가리키는 곳이다. 원래 아이성 근처에 있었던 곳이지만 여기서는 벧엘을 가르키고 있다. 벧엘이 어떤 곳인가? 야곱이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한 장소가 아닌가? 하나님의 집으로 역시 성지와 같은 곳이다. 언약궤가 실로에서 벧엘로 옮겨 온 적도 있다. 그런데 이제 우상의 집이 되어버린 것이다.

 

‘힘써 하나님을 알자‘ 할때 안다는 것은 ’야다‘이다. 이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다. 언약의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즉 언약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면 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망할 것이다.(삼상2:12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였더라’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를 무시하는...혹은 섬기지 않는...) 13:4절‘’....나 밖에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6:6)

 

5장,교만죄(가장 큰 죄)

 

‘ 미스바’와 ‘다볼’은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여기 미스바는 베냐민 지파의 미스바가 아니다. ‘길르앗 라못’으로 불리우는 미스바(파수하는 곳)는 높은 곳에 위치해있었고 여기에 우상의 제단을 세운 것이다. ‘다볼’은 납달리 지역에 있는 곳이다.

 

언약백성의 호칭인 이스라엘을 사용하는 대신에 에브라임을 호칭하고 있다. 여호수아와 사무엘을 배출한 에브라임,그래서 유다지파와 라이벌 관계를 갖고 있었고 늘 불평을 일삼았다.(땅 분배) 사사시대부터 몽니를 부려온 에브라임의 교만(기드온,입다) ,북쪽 11지파를 압박해서 이스라엘을 세우고 첫 번째 왕으로 자기지파 사람인 여로보암을 세우고 금송아지를 숭배했고 북쪽에 우상을 전파하는데 앞장섰던 에브라임이었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도 에브라임 땅이었다. 그가 쫒겨 죽은 곳도 여기다.  그들의 고집,아집,교만을 지적한다. 분열,불평,불순종은 그들의 교만에서 나온 것이다. 이제 그들은 나라를 망치려하고 있는 것이다.

 

6장,인애의 결핍

 

6장은 탄식으로 시작된다. 1절,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자

                          2절,우리가 그 앞에서 살자

                          3절,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실패한 이유는 여호와가 누군지 알지 못해서였다. 우리가 살길은 여호와가 누군지 힘써 알자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 때 인애(헤세드)를 알고 헤세드를 실천 할 텐데 헤세드를 모르니 헤세드를 실천 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인자로 번역,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헤세드라면 여기의 인애는 우리가 베풀어야 할 헤세드인 것이다.

 

언약을 어긴 아담(7)은 아내와 자식에게도 헤세드를 베풀지 않고 핑계만 대었다. 아니 오히려 아내 책임으로 전가시키려 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헤세드도 없이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이다. 하여 아담이 에덴에서 쫒겨나듯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도 이 땅에서 쫒겨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7장,혼잡의 죄1

 

1절의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은 같은 표현이다. 에브라임 땅에 있었던 수도 사마리아의 악을 지적한다. 그들의 죄는 7절의 혼잡의 죄(혼합주의,세속주의)곧 뒤지지 않은 전병이라는 것이다. 한쪽은 타서 못 먹고 한쪽은 익지 않아서 못 먹는, 그래서 버릴 수밖에 없는 죄,종교적 위선과 세속주의의 죄를 지적한다.

 

8장,혼잡의 죄2

 

4절 ‘저희가 왕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멸하기 위해 허락하신 것이다. 북 왕조 200년동안 19명의 왕들 중 모두가 그 다음 왕에게 죽고 만다. 이는 심판이다. 여로보암부터 언약을 어겨 금송아지를 섬겼다. 그는 단순히 다윗을 반역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반역한 것이다.

5절의 노(분노:아네프)는 헤세드의 반대말이다. 진노만이 기다릴 뿐이다.

 

9장,패괴(음행)의 죄

 

9절,‘저희는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패괴 한지라‘ 베냐민의 기브아에서 일어난 레위사람의 죄로 인한 12토막 살인사건과 베냐민지파에 대한 응징으로 인한 이스라엘 전체의 죄를 아시는가?

 

10장, 두가지 큰 죄

 

하나는 5절의 ‘벧아윈의 송아지’ 즉 벧엘에 세운 금송아지 우상이요 또하나는 7절의 ‘사마리아왕’이다. 이는 다윗의 집을 배신한 결과이다.

 

11장,멸망의 원인:계책

 

계책은 인본주의적인 수단과 방법을 가르킨다. 또한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반역이다. 계책의 모델로 야곱을 말한다. 그러나 그는 울며 회개했다.(12:4) 그러나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는다. 그들은 7절, 결심하고 하나님을 배반한다. 그러나 8절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멸망한 성이다.

 

12장,인애와 공의

 

야곱의 행위 즉 발 뒤굼치를 잡은 것 그리고 천사와 힘을 겨룬 것,형을 피하여 도망한 것은 벌을 받아야 마땅한 소행이었다(2) 그러나 그는 울며 회개하여 오히려 복을 받게 되었다. 또한 야곱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므로 복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4절에 보면 ‘...거기서(벧엘) 우리에게 말씀 하셨나니’ 이 말은 언약의 대표성인 야곱과 한 언약이지만, 언약의 영원성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7절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너희 하나님을 바라볼지라’.

 

14장,사랑의 승리

 

‘로루하마’가 ‘루하마’가 되고 ‘로암미’가 ‘암미‘가 될것이며 ’이스르엘‘이 ’이스라엘‘이 되어 축복으로 회복케 되는 것을 보여준다.

                  2.요엘서(유다의 선지자)

 

 

요엘의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 이시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사역의 주 무대라는 것 외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요엘서는 메뚜기 재앙과 가뭄이 동기가 되어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을 예비하며 백성을 회개의 자리로 초대하는 것이다. 또한 회개하는 자에게 이방의 공격에서 구원하시며 구원의 확증으로 이방의 심판을 예언하고 있다.

 

구조

 

1.회개기도

 

1:15 여호와의 날의 전조인 메뚜기 재앙(1:4-7)과 가뭄(1:9-12), 백성들의 기도(1:19-20)

2:3-8 여호와의 날 선포와 메뚜기 같은 이방의 침입, 백성들의 회개기도(2:17)

 

2.응답과 구원

 

2:18-27 백성의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2:28-32 모든 사람에게 영을 부어 줄 것과 여호와의 날의 무서운 재앙에서 구원해 주실 것 그리고 이방을 심판 하실 것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오니 인애(헤세드)를 베푸사 뜻을 돌이켜 주소서... 뜻을 돌이키사‘(2:13-14) 회개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다.

 

신학적주제

 

여호와의날(사2:12,13:6,9.22:5,34:8렘46:10,겔7:19,13:5,30:3,욜1:15,2:1,11 .3:4.4:14 암5:18-20 욥15 습1:7,8,14-18 슥14:1) 원래 여호와의 날은 교만한 자에 대한 심판의 날로 사용되었다. 즉 하나님의 대적들을 심판하는 날이었다. 따라서 청중들이 이미 알고 있는 여호와의 날이 어떻게 성취되는 가를 요엘은 보여주고 있다. (멸망과 구원)

 

대하7:14 말씀대로 기도하고 금식하면 하나님이 그 땅을 고칠지라(2:12) 언약적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은 여전히 언약백성을 사랑하시고 인애(헤세드)를 베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가 반듯이 구원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적자비를 호소하는 기도가 필요하다.

 

요약하면

첫째,메뚜기 재앙과 여호와의 날의 재앙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통해서 현재의 재앙은 미래의 심판에 대한 준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심판과 구원이라는 이중적구조를 통해서 재앙은 멸망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오히려 구원하시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그러나 구원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며 그럴 때 하나님의 영이 주어지고 하나님을 부르는 자들은 구원받을 것이다.

 

 

                               역사적 배경

 

주전586년 바벨론 포로 이전으로 보는 견해 (크레드너1831,이.제이.영1949)로 요아스왕의 통치초기로 보고 있다. 여호사밧과 아합이 동맹하여 사돈관계를 맺고 아합과 이제벨의 딸 아달랴와 여호사밧의 아들 요람과의 사이에 태어난 비운의 왕 아하시야, 그가 북쪽의 왕 사돈인 요람을 문병갔다가 예후에게 죽으면서 짧은 1년의 통치를 끝낸다. (왕하9:11-28)

 

이제 아달랴가 섭정하며 아하시야의 아들들 즉 자신의 손자를 모두 죽인다.(직계아님)  북쪽은 이미 그 어미 이제벨이 죽었고 바알종교도 뿌리 뽑혔다. 아달랴의 음모는 남쪽 유다에서 바알을 부활 시키는 것이었다. 동시에 다윗언약을 끊으려는 사탄의 음모인 것이다. 그러나 언약의 하나님은 아하시야의 누이인 고모 여호시바(여호사브앗:대제사장 여호야다의 부인)를 통하여 어린 요아스를 성전에서 몰래 양육한다. 어린 요아스는 6년을 숨어 지냈고 7년째 여호야다는 다윗언약의 계승을 선포하며 구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오르게 한다.

왕위에 오른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도움으로 선정을 베푼다. 아달랴의 아들들이 성전을 파괴하고 우상숭배하던 모든 것을 개혁한다.(대하24:4-7) 그러나 여호야다가 죽은 후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 요아스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시작되는데 바로 이런 때에 요엘은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 것이다.

 

또한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제사장 스가랴를 통해 경고하지만 요아스는 은혜를 원수로 갚아 스가랴를 성전 뜰안에서 돌로 쳐 죽인다. 측근들의 모략에 의해서 요아스는 휘둘리고 만다. 요엘은 이런 시기에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 것이다.

 

언약을 파기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경고는 이어진다. 스가랴가 순교한 1년후 소수의 아람군대가 대군의 유다군대를 격파했으며 이때 부상 당한 요아스는 신복들에 의해 살해된다.(스가랴의 피의 댓가) 대제사장 여호야다는 열왕의 묘에 장사되지만 요아스는 열왕의 묘실에 장사되지 못하는 수치를 안게된다.

 

‘여자의 후손’(창3:15)을 통하여 계시된 메시야는 이사야를 통해서 임마누엘로 오시고 동정녀를 통해서 오시며 종으로서 오실 것이다. 이사야가 ‘의로써 통치하실 메시야의 오심’(사32:1)과 ‘위에서부터 부어주실 성령‘(사32:15)을 강조한다면 요엘의 선포도 메시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21-23) 그리고 성령의 오심을 예언하며 구속사의 목표가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주심으로 ( 2:28)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32),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건설에 있는 것을 예언한다. 또한 여호와의 날은 이중적구조를 띠고 있으며 장차 계시록의 심판을 상징한다.

 

1장,여호와의 날

 

메뚜기라는 단어가 4번 나온다. 땅의 것(숫자 4)에 대한 완전한 파괴의 메뚜기떼는 공포 그 자체 였을 것이다. 언약파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여호와의 날인 것이다. 재앙이 올 때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는 제사장들이 먼저 1차적인 책임이 있다. 오늘 이 땅에 재앙이 임하면 1차 책임은 언약백성들에게 먼저 있는 것이다. 하여 제사장들에게 회개를 촉구한다.

 

2장,언약과 성취

 

23절의 우리말 성경은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 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오역된 부분)

 

맛소라 사본에는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그가 너희에게 먼저 의의 스승을 주고 너희에게 비, 곧 이른비와 늦은 비를 내리게 하리라’

우리 말 성경에는 ‘의의 스승’이 빠져있다. (벌게이트 역,탈굼 역에 나옴), 그러나 킹 제임스역에 빠져있고 우리말 성경은 킹 제임스역을 참조했기에 빠져있는 것이다. 화란역과 독일어번역은 ‘의의 스승’으로 나와 있다. 23절 먼저 ‘의의 스승’을 주고 28절 그 후에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이 23절의 문맥과 일치한다. 23절의 먼저 주시는 것은 의의 스승이고 나중에 주시는 이른비와 늦은비는 성령을 가르키는 것이다. 또한 비(히:모레)라는 말에 정관사가 붙어있음으로 단순한 비는 아닌 것이다.

 

그러면 의의 스승은 누구를 가르키는가? 사3:20을 보면 ‘네 스승’ 은 그리스도를 가르킨다. 호10:12절을 다시 번역하면 ‘...마침내 그가 와서 너희에게 의를 가르치리라’ 가 된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반복 강조된다.(12,13)는 것이다. 마음으로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면 인애(헤세드)가 크신하나님, 13,14절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은 백성들을 회복시키신다. 하여 17절에 ‘주의 백성’ ‘시온의 자녀들’(23),‘내 백성’(26,27)으로 호칭하신다.

또한 땅도 회복시켜주신다. (18절,21-22절) 아브라함 언약의 골자가 씨와 땅의 축복인데 내 백성과 땅의 회복을 통하여 완전한 회복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와 성령으로 이어지는 완전한 회복을 보여주고 있다.

 

창6:3절 인간의 죄악으로 성령을 거두어가신 하나님은 요엘을 통해서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예언한다.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새 언약이 마음에 새긴 것이고 에스겔을 통해 성령의 회복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요엘을 통해서 놀라운 예언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전에는 필요할 때만 주셨는데 이제는  모든 저주가 풀리고 회복된 것이다.

 

성령의 오심으로 인한 완전한 회복은 성령의 단독사역이 아닌 그리스도와 함께 하시는 사역이다. 또한 바벨탑 범죄로 언어가 나뉘었는데 오순절 성령의 오심으로 언어가 통일 되는 것을 보여주심으로 인한 저주의 풀림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라 30-31절에 마지막 여호와의 날에 대한 예언은 요한 계시록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3장,완전한 회복

 

1차 회복은 포로귀환이다. 1절의 그날은 바로 포로 귀환이다. 언약을 파기했으나 죄사함을 선언하시고 내 백성(2,3) 나의 땅(2)의 회복을 보여 주신다. 동시에 그날은 열방에는 심판의 날이다. 언약 백성을 괴롭힌 나라들에 대한 심판의 날이다. 동시에 예언의 이중적 구조는 그날을 최후 심판의 날과 연결시키고 있다.( 14-21)

 

메뚜기 재앙으로 시작된 요엘서는 실제 메뚜기재앙을 비유로 발전시킨다. ‘그 이가 사자 같고‘(1:6) ’그 모양은 말같고‘(2:4) 계시록에 나오는 묵시문학의 형태를 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요엘서는 계시록의 축소판같이 보인다. ’여호사밧의 골짜기’는 심판 모티브로 그리고 포도주 역시 계시록과 같이 심판모티브이다. 14,15절은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는 ‘여호사밧의 골짜기’와 같은 뉘앙스이다.

16-18절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연상케한다. 영원한 피난처(16) 포도주와 젖이 흐르는 새 땅(18)은 종말론적 표현이다. 언약백성들의 궁극적 승리를 보여주고있는 것이다.

 

 

 

 

 

 

 

 

                 3. 아모스(북왕국 선지자)

 

 

배경

 

아모스는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787-747)때 활동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이집트가 자국의 문제로 힘을 쓰지 못할 때였고 유다와 이스라엘에게는 영토확장의 좋은 기회였다. 당시 이스라엘의 영토는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홍해)까지 이르렀는데 이는 솔로몬시대의 영토와 비슷하다. 다메섹을 속국으로 두었고 왕의 대로를 확보하였다.(통행세) 이스라엘의 국제무역은 육로와 해상 모두 활발했으며 부자(상인)들이 생겨났고 사치스런 별장들이 생겨났으며 집과 가구들은 수입품인 상아와 고급제품으로 채워졌다. 따라서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었으며 사회적 약자들은 더욱 피패해졌다.

 

상업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도시화 현상이 생겨났고 범죄와 타락,부패한 사회가 되었다. 예후의 개혁이 잠시 있었으나 바알종교는 다시 급속히 퍼져나갔으며 여호와의 종교는 지극히 형식적인 것이 되었다. 여로보암2세가 죽은후 국력은 급격히 쇠약해졌고 25년동안 6명의 왕이 바뀌면서 수도 사마리아가 함락되고 722년 아모스가 예언한 대로 다메섹 밖으로 포로로 끌려갔다.

 

이스라엘의 멸망기사는 역대기에서는 관심이 없고 열왕기하에만 기록되어있다. 여로보암2세-스가랴(그의 아들 ,사마리아에서 6개월 통치)-반역자 살룸(한달)-므나헴(딥사를 정복한 후 모든 사람들 학살, 임신부까지 죽임,10년 통치)-그의 아들 브가히야(2년 통치)-군대장관 베가가 길르앗 사람 50명의 도움으로 반역, 그의 통치기간 중 앗수르왕 빌레셀3세에 의해 갈릴리지역이 점령당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감.

베가는 아람왕 르신과 함께 반 앗수르 동맹에 섰다가 앗수르의 지원을 받은 호세아의 반역으로 살해당함- 호세아는 9년 통치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다 애굽과 동맹을 맺었고 이에 살만에셀 5세에 의해 사마리아 3년 포위후 멸망 (남북 모두 애굽을 의지하다 망함)한다.

 

신명기의 언약적저주가 성취된 것에 대해 열왕기에 왕들의 범죄와 언약파기,우상숭배가 계속 기록되고 있다. 아모스는 여기에다가 사회적인 죄와 정치적인 죄를 추가한다.

여로보암2세의 사회적 상황을 좀더 살펴보자. 어느때 보다도 정치적,경제적 안정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내부적 요인보다 외부적 요인이 크다 하겠다. 아람은 극심한 쇠퇴기에 접어들어 이스라엘을 위협할 수 없었고 앗수르는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데 만족하였다. 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은 반세기동안 평화를 유지했고 상업과 무역에 힘쓴 결과 부강을 얻게된다. 그러나 문제는 빈부의 차이였다. 도시와 농촌의 차이, 대지주와 소작인의 차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상대적 빈곤을 가져다 주었다.

 

므나헴왕때는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칠 때 큰 부자에게 각각 50세겔씩, 합계 은1000달란트(은한달란트=3000세겔) 는 계산하면 최소 6만명 정도의 부자들이 북 왕국에 있었다는 셈이다.

언약법은 토지매매를 금지했지만 이제 토지는 중요한 재산증식이 되었고 부동산 투기현상도 일어난다. 소작인들은 급기야 벼랑 끝에 내 몰리게 된 것이다. 결국 채무로 인해 노예로 떨어진다.

 

토지를 잃은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나갔고 도시에는 극빈자들이 생겨났으며 가족의 연대는 약화되고 개인주의가 만연하게 된다. 따라서 ‘고엘‘제도는 유명무실하게 되고 안식년(노예해방)도 지키지 않게된다.

 

상법체계가 무너지고 뇌물이 성행했으며 일반백성들 까지 뇌물을 받고 거짓증인으로 나서는 일이 일반화되었다.(나봇사건) 여기에다가 정치적인 불안정, 구테타가 이어지자 국가는 응집력을 잃어버리고 분열되어 앗수르의 침략에 제대로 맞서보지도 못하고 무너진다. 결국 사마리아는 함락당하고 28,000명이 포로로 끌려간다.(왕하17:1-6) 이스라엘이 망한 후 북왕국은 앗수르의 ‘주’로 편성되어 ‘사마리아’로 불리게 된다.

 

앗수르는 정복한 지역 백성들을 혼합시키므로 저항세력을 사전에 차단하는 정책을 펼쳤다. 하여 사마리아도 혼혈민족이 되어버린다. 많은 북 왕국의 백성들은 유다로 망명했고 이로인해 예루살렘의 인구는 급증하게 되었다.

아모스의 멸망예언은 사회지도층의 분노를 야기시켰고 아모스는 이스라엘에서 추방된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에 의해 사역이 지속되었고 아모스는 최초의 기록 선지자가 된다.

 

언약법

아모스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호칭은 86회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핵심은 ‘아도나이’이다.  또한 아도나이를 다른 호칭과 붙여서 사용하기도 한다. 아도나이는 ‘주’로 번역되어 언약의 하나님의 호칭이 되어왔다. 아모스가 언약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주'의 호칭 속에 이미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시내산언약과 모압언약의 세부법을 인용하며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아모스는 아브라함언약의 골자인 ‘씨’와 ‘땅’을 강조한다. 언약파기는 씨와 땅을 뺏아감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은자를 통해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특히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재건 할 것을 예언한다.(9:11) 이는 메시아예언이며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오시는 하나님나라,언약의 성취로 오시는 메시야를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모스는 처음부터(1:2) 다윗언약으로 시작한다. ‘시온과 예루살렘에 좌정하신 하나님’시온과 예루살렘은 병행법으로 동일한 장소이다. 이사야서에 ‘너 야곱아 이스라엘아’ 하듯이 말이다. 하나님은 다윗언약을 세우신 다음 예루살렘을 신정국가의 중심으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시온,예루살렘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다윗언약의 시작인 것이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언약,시내산언약,모압언약과 그 세부법을 통해서 현재의 이스라엘을 진단하고 경고한다. 동시에 종말론적인 예언 즉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강조하며 메시야까지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내용

 

6장7절:‘마르제아흐’

 

아모스는 백성들을 착취하는 사회지도층을 경고하며 ‘마르제아흐’라는 사회제도에 대해서 경고한다.  ‘마르제아흐’는 이스라엘의 지도층들의 사회생활과 종교생활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마르제아흐’는 어원과 성격이 불분명하지만 결사체나 모임의 회원들을 의미하기도하고 집회의 장소이기도하다. ‘마르제아흐’는 고대 근동부터 로마제국까지 거의 2000년동안 나타난다. 마르제아흐는 하나가 아닌 여러개의 단체로 등장한다. 최상위계층의 ‘마르제아흐’는 왕실을 중심으로 군부,대지주등 사회고위층이었다. 이들은 주기적으로 모였고 종교적의식을 행하기도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연대감을 돈독히했으며 상호간의 이익을 추구하기도했다.(암6:7,렘16:5)

가난한 이들은 신발 한 켤레에 팔리고, 짓밟힐 때 그들은 ‘기지개 켜는자의 떠드는 소리’(미르자흐)로 흥청거렸다. ‘기지개켜며’의 히 ‘사라흐’는 ‘대자로 드러눕다’의 뜻이다. 값비싼 상아 상에 누워 게으르고 무감각한 그들과 대조적인 고단한 백성들의 삶이 대조된다. ‘마르제아흐’는 번역하지 않고 그냥두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아모스는 ‘마르제아흐’에 참여하는 특권층은 결국 사로잡혀 갈 것이라 경고한다.

 

4-7절은 종교적 타락을 경고한다. 5절의 비파는 하프를 뜻하는 ‘네벨’이다. 가장 큰 악기인 하프는 거의 종교적 상황에 사용된다. (예외 느12:27,사14:11) 암5:23절은 절기와 성회와 제사에 ‘네벨’연주가 있었다고 기록한다.  6절의 기름부음(마샤흐)은 선지자,왕의 임직에 사용되는 단어이다.‘바르기’보다 ‘붓기’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기름붓기’는 제의적요소에 사용되는 것이다. ‘대접’(미즈라크)역시 제의적도구로 사용된다.  ‘마르제아흐’는 주변 나라에서 유행하던 이교도적인 것이나 혼합주의의 형태를 띠고있었던 제의행위였다.

 

7장,아모스와 아마샤

 

아마샤는 기득권층을 옹호하는 위선적인 제사장이다. 7장은 두 인물을 대조하며 누가 참 선지자인 것을 보여준다. 다섯 개의 환상,즉 메뚜기재앙(7:1-3),불과 가뭄(7:4-6),다림줄(7:7-9),여름과일 광주리(8:1-3),성전붕괴(9:1-4)이다. 다섯 환상은 모두 심판을 예고하는 것인데 4개는 사물의 이미지를 통해서 이스라엘 멸망을 경고하고 다섯 번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준다.

 

첫 번째 환상인 메뚜기 재앙에서 아모스가 하나님께 뜻을 돌이켜 달라고 언약기도를 드린다.‘...주 여호와여 청컨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찌 서리이까 하매’ ‘아도나이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의 호칭이며, 대조되는 ‘야곱’은 언약백성의 호칭이다. 변화되지 못한 야곱이 의미하는 언약백성들, 그들에 대한 메뚜기 심판을 거두어 달라는 아모스의 간절한 기도이다. 북 이스라엘을 온몸으로 막고있는 아모스의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3)이다. 그렇다 언약기도는 반듯이 들으신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정하시지만 우리에겐 언약기도가 필요하다.

 

두 번째 환상에서도 불이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덮치려 하자 아모스가 뜻을 돌이켜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5)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신다.(6) 그러나 이후의 환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모스는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이어진다. 마치 아브라함의 롯을 위한 언약기도와 유사하다. 이스라엘 스스로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는 한 심판을 지연할 수 있을 수는 있지만 심판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5개의 환상은 언약기도로 뜻을 돌이킨 두개와 그렇지 않은 세 개를 나누어 볼 수 있다. 세 번째 환상은 대화형식이다.  하나님이 손에 다림줄을 들고 성벽 곁에 서서 아모스에게 묻는다. ‘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다림줄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언하신다.  다림줄은 ‘아나크’로서‘납’ 또는 ‘주석’을 가르킨다. 성벽의 기울기를 측정하기위해 추가 달린 다림줄을 사용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측정하기위해 손에 다림줄을 들고 계신 것이다.

 

아모스와 아마샤의 대결은 10-17절에 압축되어있는데, 벧엘의 제사장,가장 중요한 종교적도시인 그곳의 제사장 아마샤는 남 유다 출신인 아모스가 못마땅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여로보암2세에게 사람을 보내어 아모스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고한다. 아모스는 ‘이삭의 산당들은 황폐해지고 이스라엘의 성소들은 파괴될 것이다. 내가 칼을 들고 일어나서 여로보암의 나라를 치겠다’(9)고 선포했다.  ‘이삭의 산당들’은 언덕위에 작은 숲으로 둘러 쌓여 있었으며 제단을 갖추고있는 개방된 성소로 가나안 원주민들이 이스라엘이 들어오기 전부터 여기서 바알을 숭배했다.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장소로 사용되면서 혼합주의의 온상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산당을 철폐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성소들’은 여로보암 1세에 의해 단과 벨엘에 세워진 북 이스라엘의 공인된 성소를 가르킨다.  주전922년 왕국분열후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과 대항할 성소이며 남쪽으로 가는 것을 차단하는 성소였다. 특히 벨엘은 여로보암2세 때 북 왕국 성소의 중심이 되었다. 여기의 제사장이 아마샤이다.

 

‘여로보암의 나라’에서 여로보암은 1세가아닌 여로보암2세를 가르킨다. 아모스의 활동시기이기 때문이다. 아모스의 경고를 접한 아마샤는 왕에게 보고하기를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수 없나이다’(10) 모반(카샤르)이란 말은 섬뜩한 단어이다.북 왕국 200년 역사에 7번 모반이 일어났고 예후왕조 역시 모반으로 탄생한 정권이었기에 여로보암2세에게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아모스는 아마샤의 반응에 강도를 더욱 높였다. ‘여로보암은 칼에 찔려죽고 이스라엘 백성은 틀림없이 사로잡혀서 그 살던 땅을 떠나게 될 것이다’(11) 아마샤가 말하기를 ‘선견자야 사라져라 유다 땅으로 도망가서 거기서나 예언하면서 밥을 빌어먹어라’(12) 이 말에 아모스의 예언이 이어진다. 아마샤의 아내가 창기가되고 자식들이 칼에 찔려죽고 땅을 뺏기며(3번 반복:언약파기에 대한 심판 강조) 포로가 되어 끌려갈 것이라는 것, 이것은 아마샤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전체의 파국인 것이다.

 

아모스와 아마샤는 여러가지에서 대조를 이루는 인물이다.  아모스가 남 유다의 농부출신인데 아마샤는 북 이스라엘의 정통교육을 받은  제사장이며 아모스는 빈민을 대변하고 아마샤는 기득권층을 대변한다. 아모스는 미래에 대해 회개를 촉구하지만 아마샤는 현상유지를 위해 급급할 뿐이었다.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대조를 찾아보시라.

 

 

 

 

 

 

 

 

 

 

 

 

 

 

 

                4. 오바댜(유다의 선지자)

 

 

 

오바댜서는 구약에서 가장 작은 분량의 책으로 신약의 유다서에 비교할 수 있다. 오바댜라는 뜻은 ‘여호와의 종’ 혹은 ‘여호와를 예배하는 자’이다. 구약에 12명 정도 나온다. 그럼에도 본문의 오바댜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없다. 오바댜서는 에돔과 유다자손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들의 분쟁의 역사는 리브가의 뱃속에서부터 시작된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25:23)는 예언 속에 두 민족의 역사가 들어있다.  두 형제의 분쟁은  야곱이 형의 장자권을 뺏음으로 시작되지만 후에 화해한다.  그러나 그들의 자손들은 적대관계로 남게 된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기에 오바댜서에서 에돔은 언약백성을 괴롭히는 이방의 대표민족으로 선택된다.

 

내용

 

1장1-9,에돔의 미래와 심판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신다.

 

오바댜의 묵시로 시작되는 본문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강조한다. 에돔이 이방을 대표하는 국가로 선택되었다면 에돔을 향한 말씀도 이방 전체를 향한 말씀으로 받아야한다. 2절,‘에돔을 열국 중에 미약하게 하시고 크게 멸시를 받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미약하게 하시고‘는 예언자적 완료시제를 사용해 여호와께서 하시려는 일이 이미 성취된 것을 선언한다.  ’멸시를 받게 하시다‘라는 동사는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다‘(창25:34)라는 동사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며 에서의 과거행위와 현재 에돔의 미래를 연결시키고 있다.  에돔은 작은 나라가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에돔은 주전 312년 나바티안족(오늘 아랍의 조상)에게 망하고 에돔족속은 팔레스타인 남쪽의 이두매로 이주하게 된다. 그 이유를 4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1.지형학적 교만(3-4)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에돔은 자신의 교만에 속아 심판을 받게 된다. 에돔은 ‘붉은’이라는 형용사 ‘아돔‘에서 나왔다. 에서의 몸의 색깔이었고,장자권을 판 팟죽의 색깔이었으며 에돔의 땅의 색깔이기도하다. 에돔의 남쪽 경계는 아카바만이고 북쪽은 사해와 함께 세렛시내를 사이에 두고 모압과 경계를 이루었다. 에돔족속이 사는 곳은 붉은 색의 기암절벽이 주를 이루는 험준한 곳이다. 그들의 거주지는 요새였다. 

 

바위는 ‘셀라’이며 에돔의 수도 이름과도 같다. 문자적 해석은 ‘바위 틈에 거하는 자들’이다. 나바티안 족이 이곳을 점령하고 그들의 수도로 삼고 ‘페트라’로 불렀다. 남동쪽의 좁은 협곡이 유일한 통로이며 이 길은 남쪽 끝 항구인 에일랏으로 연결되는 ‘왕의 길‘이다. 이 길은 교통의 요충지로서 홍해를 통해 인도까지 무역하는 길이며 위로는 바벨론으로 이어진다. 하여 막대한 통행세로 부를 누렸다. 이러한 지정학적요소로 인한 교만으로 가득차 있었고  ’누가 나를 능히 땅에 끌어 내리겠느냐‘라는 수사학적인 질문에 ’ 아무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처럼 교만이 극에 다달았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독수리처럼 높게 오르고’ ‘별 사이에 깃들지라도’ 그들보다 더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기서 직접 끌어내시겠다고 말씀하신다.(4)

 

2.물질적 교만(5-6)

두가지 비유를 통해 에돔의 철저한 파멸을 탄식조로 예언하신다. 도적이나 강도도 얼마만큼만 가져갈진데  에돔은 철저하게 파멸될 것이라는 것. 또 하나는 포도따는 자가 얼마는 남겨둘진대 에돔은 하나도 남겨두지 않는 포도원같이 수탈될 것이며 6절, 감추인 보화까지 철저하게 수탈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3.동맹국에 대한 교만(7)

‘너와 약조한 자들’ ‘너와 화목하던 자들‘ ’네 식물을 먹는 자들‘은 같은 표현이다. 모두가 신뢰하던 자들인데 ’지각‘(지식,지혜)이 없어 언약을 깨트린 결과가 어떤 종말을 가져올지 몰랐다는 것이다.

 

4.지혜에 대한 교만(8-9)

‘드만아 네 용사들이 놀랄것이라’에서 드만은 에서의 손자이다. 드만의 용사들이 놀라는 이유는 위기에 대처할 지도자가 없기 때문이다. 에돔은 원래 모사꾼이 많은 나라였다.

 

1:10-14,에돔이 유다에게 행한 행위에 대한 심판

 

‘형제의 날’ ‘재앙의 날’ ‘유다자손의 패망의 날’ ‘고난의 날’ 등  ’날‘이란 단어가 10번이나 사용된다. 13절에서는 ’ 환란을 당하는 날‘을 세 번 강조함으로 언약백성이 당하는 고통과 환란을 강조한다. 환란이란 말의 ’에이담‘이 에돔과 비슷하기에  환란의 날에 에돔도 환란을 당할 것이라는 언어유희를 쓰고 있다.  ’이 날‘은 유다의 멸망의 날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12-14절의 모든 동사들이 간접명령법이며 부정을 나타내는 부사인 ‘알’과 함께 사용됨으로 에돔이 하지 말아야 할 8가지를 점진적으로 나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심판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에돔은 형제가 재앙을 당하던 날에 방관했고,형제의 패망의 날에 기뻐했다.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늑탈할 때 동참했고 도망하는 자들을 막고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자들을 적에게 넘겨 주었다. (14) 이런 에돔이 어찌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는가?

 

1:15-21:만국에 대한 심판과 회복(언약백성을 구원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실 것이다.)

 

15절,히브리어 성경은 ‘키’(왜냐하면)로 시작한다. 16절도 ‘키’로 시작한다. 왜냐하면 모든 만국이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분노의 잔’은 심판모티브이다.

17절 ‘오직 시온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족속은 자기기업을 누릴 것이며’ 시온은 다윗 언약의 장소로서 은유로 사용된다. 언약백성의 호칭인 ‘야곱‘도 은유이다. 언약백성에 대한 회복을 예언한다. 또한 아브라함언약의 성취로 ’씨‘와 ’땅’의 회복을 강조한다.(20)

 

 

 

 

 

 

                         5. 요나서

 

 

요나는 ‘비둘기’라는 뜻이다. 왕하14:25절에 요나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는 갈릴리 스불론 땅 가드헤벨 출신으로 당대의 위대한 선지자였다. 왕하의 기록대로 요나는 여로보암2세 치하에서 사역한 것을 알 수 있다. 기록목적은 하나님의 헤세드는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같은 시대 호세아,아모스를 통한 이방의 심판과 동시에 하나님의 헤세드는 이방구원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 언약백성이 된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갈렙,라합,롯등 그러나 민족과 족속이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이기는 하나 겐족속(미디안족 혹은 레갑자손:모세의 장인 이드로,야베스),기브온족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멀리까지 찾아가시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보여주신다.

유대인들은 종교적 교만이 있었다.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인 그리고 언약백성(선민의식)이라는 자만이 멸망의 원인이었다. 하나님의 이방민족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 요나서의 특징이다.

 

내용

 

1장,풍랑속에서

 

‘피노키오’나 ‘백경’은 모두 요나서의 내용을 담고 있다. 둘다 풍랑과 고래가 등장한다. 그리고 풍랑을 헤쳐나간다. 풍랑엔 이유가 있다. 바울의 풍랑과 반대되는 내용을 요나서는 보여준다. 바울은 순종하지만 요나는 불순종한다. 그러나 풍랑은 둘다 일어난다. 요나의 풍랑은 요나 한사람의 범죄 때문이었다. 요나의 불순종으로 공동체전체가 고난을 당한다. 아간 한사람 때문에 공동체전체가 고통을 당한다. 아간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다. 다윗에게도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둘다 거부한다.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토설한다. 다윗은 그가 너라고 할 때까지 버틴다.

 

  1장과 2장은 풍랑을 헤쳐가는 모습이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1장은 인본주의적 방법으로 13절 ‘힘써 노를저어’, 그러나 2장은 기도와 회개로 풍랑을 헤쳐나간다.

 

요나에 대한 1차소명(1:2-3) 그리고 2차소명(3:2-3) 모두 ‘일어나’(쿰)으로 시작된다. 역시 병행구를 이룬다. ‘쿰’은 ‘일어나다’라는 동사지만 여기서는 명령형으로 쓰이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쿰’이라고 명령하신다.

 

  1차소명과 2차소명을 받는 요나의 자세가 역시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1차는 불순종, 2차는 순종이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신다. 유다에 대해서도 이방에 대해서도 우리 개인에 대해서도 오래 참으신다.

1장에서는 풍랑을 헤쳐나가는 요나의 모습이 돈으로 해결하려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3절‘...선가를 주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3,10) 그러나 바울은 역동적인 믿음으로 헤쳐나갔다. 당신은 어떻게 풍랑을 헤쳐나가려는가?

뺀질이,돈으로,기도하지 않는 선지자. 위대한 선지자 요나가 배 믿창으로 숨어들었다. 내려가는 신앙, 다시스는 당시 지중해 세계관으로서는 세상끝이다.  다시스는 히 ‘타르수사‘로서 ’산산이 부셔지다‘라는 뜻이있다. 다시스를 향해가던 요나의 배는 산산이 부셔진다. 일종의 언어유희이다.

 

하나님은 이런 요나를 가혹하게 대하신다. 2:2절 ‘스올의 뱃속은 2:1절 물고기 뱃속과 병행을 이룬다. 스올(쉐올)은 음부,저승,죽음이란 말인데 이 표현은 예수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예표하기도 한다. 성경에서 ’스올‘은 대체로 사망에 대해서(시6:5),죽음후의 장소로(창37:35),지옥(하데스)으로,의인의 피난처(욥14:13)로 묘사된다.

 

요나는 막다른 골목에서 항복한다.(우물속의 고양이처럼) 풍랑속에서 요나는 이 모든 계획이 하나님의 계획의 전모임을 알게된다. (2:3,6;주께서,4절에 주의X2) 그리고 이때부터 요나의 믿음은 회복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모든 문제는 영혼의 문제였다. 영적침체말이다. 7절,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5절,‘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으며’ 요나의 영혼이 탈진 한 것이다. 불순종의 결과는 이렇게 비참하다. ‘영혼’(네쉬페)은 구약에서 780회나 나온다. 영혼,마음, 인격,생명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흠정역에서는 무려 28가지로 번역하고 있다. 70인 역이나 벌게이트역에서는 모두 ‘영혼’으로 번역하고 있다.

 

영적침체에서 벗어나는 길은 기도 밖에 없다. 물고기 뱃속,스올의 뱃속에서 생명건 기도가 시작된 것이다. 이제 요나의 영혼이 회복된다. 영혼이 회복되니 모든 것이 회복되는 것이다. 9절, 예배,감사,서원등  그리고 요나는 다시 일어난다. 사역자들이 탈진할 때, 벽에 부딪힐때, 인본주의로 풍랑을 헤쳐나가려 할때, 풍랑은 더욱 거세진다. 그러나 기도할 때 이모든 풍랑이 해결되는 것이다. 2장은 요나의 신앙고백이다. 주로 시편을 인용한다. 먼 길을 돌았지만 기쁨으로 다시 시작하는 요나. 그렇다. 인본주의를 버리고 기도로 시작할 때 풍랑의 문제는 해결되고 모든 문제도 해결되는 것이다.

 

3장,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우리는 쉽게 포기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신다. 2:9절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끝까지 요나를 추적하시는 하나님,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여호와(히13:5). 그러므로 포기하는 것은 죄이다.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재소명,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라. 처음은 불순종했으나 두 번째는 순종한다. 체험신앙은 흔들리지 않는다. 3절,‘여호와의 말씀대로’ 말씀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함께계심을 믿고 나아갔을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는가? 5절,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전적으로 나의 문제였다. 요나가 의미하는 뉘앙스는 바로 ’요‘ ’나‘였다. 내가 변하니 모든 것이 변했다.

회개는 신속했다. 6절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왕이 회개하고 조서를 선포하여 사람이나 짐승이나 먹지도 말고 물도 마시지 못하게했다. 사람도 짐승도 여호와께 부르짖어 돌이키면 9절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사(9,10) 멸망치 않게하시기를 구했다.(대하7:14)

 

4장,편협한 선지자 요나

 

자아가 강하면 고난이 많다. 왜냐하면 사사건건 하나님과 부딪히기 때문이다. 1절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적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싫은 것이다. 순종해서 말씀을 전했으나 전무후무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요나는 싫었던 것이다. 2절은 1인칭(내가)이 반복된다.  요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헤세드(인애)의 하나님을 알았다. 그러나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죽기를 세 번이나 간구한다. 5절의 ‘앉되’,‘앉아서‘는 앞의 ’일어나‘의 반대말로 불순종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집스런 요나는 앉아서 구경꾼,방관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끝까지 니느웨의 멸망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요나는 시므이와 함께 편협한 선지자로서 거시적관점에서 하나님나라를 보지 못했다. 하나님은 이방까지 멀리 메시야까지 하나님나라를 준비하고 계시는데 편협한 요나,고집스런 요나는 근시적시각에 멈춰버린 것이다. ‘준비하시는 하나님’(6,7,8)은 박넝쿨,벌레,뜨거운 바람을 준비하셨다. 그러나 요나는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 지라도 합당하나이다’(9)라고 소리지른다.

 

돌이키는 니느웨 백성과 돌이키지 않는 선지자 요나는 대조를 이룬다. 인생은 퍼즐과 같다. 마지막 퍼즐을 맞추기까지 하나님의 그림을 다 볼 수 없을 때가 있다. 묵묵히 순종하며 나아가는 자세가 아쉽다. 요나의 사역은 여기서 중단된다. 하나님은 더 이상 요나와 논쟁하지 않으신다. 마치 미완성 교양곡 같이 요나의 사역은 중단되고 요나는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오고 만 것이다.

 

 

 

 

 

 

 

 

 

 

 

 

 

 

 

 

 

 

 

 

 

                  6. 미가서(유다의 선지자)

 

 

 

역사적배경

 

호세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사역했다면 이사야는 주로 예루살렘에서, 미가는 유다의 백성들을 위해 사역했다. 미가는 요담(742-735)때 시작해서 아하스,히스기야때까지 사역했다.(렘26:18-19) 이사야서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미가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의 기록이 담겨있다.

주전 734년 앗수르는 영토확장을 위해 이스라엘의 해안평야를 침공했다. 그래서 미가의 고향 모레셋 근처인 블레셋을 거쳐 시내광야인 와디-엘-아리시까지 도달했다. 그들은 다메섹을 정복하고(732)갈릴리와 트랜스요르단지역을 점령했다. 그리고 허수아비 호세아를 이스라엘 왕으로 세웠다.(왕하17) 이어 사르곤 2세는 사마리아를 정복했다.(이스라엘 멸망)

 

사르곤 2세는 반란을 사전에 차단하기위해 상류층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갔고 이스라엘은 사마리아란 이름으로 앗수르의 한 도로 전락했다. 사르곤 2세이후 산헤립이 왕이 되었을 때 유다는 히스기야가 통치하고 있었다. 히스기야는 주위의 여러나라와 동맹을 맺어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이 포위될 것을 대비하여 지하수로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사야는 반 앗수르 동맹에서 탈퇴를 권고했고 히스기야는 순종한다.

 

미가는 이일로 말미암아 유다가 망하고 포로가 될 것을 예언한다. (미1:8-16,4:9-10) 특히 701년 산헤립의 침공은 유다에 치명적이었다.  산헤립은 시리아를 거쳐 샤론평야 그리고 욥바를 정복했다. 그리고 미가서1:10절의 아홉 개의 도시를 포함해서 46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라기스를 함락시킨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예루살렘은 인근지역과 사마리아에서 몰려온 피난민으로 인구가 3-4배 급증하게된다. 이에 하나님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유다를 구원하신다.

 

 

 

사회적,종교적상황

 

앗수르의 침공,이스라엘의 멸망속에 유다도 휘청거렸다. 백성들의 생활은 피패해졌으나 소위 지도층 인사들의 부패와 탐욕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미가의 예언이었다. 거기다가 거짓선지자들의 사욕을 채우는 모습,불의한 재판관, 심지어 가족까지도 신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히스기야는 이전의 왕들과 달리 여러 산당을 제하며,주상을 깨트리고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종교개혁을 단행했지만 유다의 죄악은 그치지 않았다. 종교지도자들의 죄악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교만과 물질을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미가는 ‘미가야’의 줄인 말이다. 뜻은 ‘여호와 같은 이가 누구인가’?이다. 그의 고향 모레셋은 예루살렘 서남쪽 40k에 위치해있다. 미가는 당대 최고의 인격과 영혼을 지닌 선지자였다. 이사야가 왕궁에서 왕의 고문 역할을 했다면 미가는 시골에서 약자들과 함께 사역했다.

 

미가서의 신학(메시야 사상)

 

2:12절‘야곱아’ 내가 정녕히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 양떼 같이 하며 초장의 양떼같게 하리라‘라고 한다.  야곱은 언약백성의 호칭이며 양떼는 언약백성을 가르키고 있다. ’한 처소‘ ’야하드‘는 한 연합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신약교회에 대한 연상을 갖게 된다. 보스라는 고유명사이지만 뜻은 ’양의 우리‘로서 신약의 교회를 예표한다. 미가는 보스라의 평화로운 양떼와 ’한 우리’안의 지체를 동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언어유희이다.

 

  2:13절의 ‘길을 여는 자’는 메시야를 가르킨다. 히브리어 원문의 해석은 ‘막힌 담을 헐어 버리는 자’이다. 즉 구원자이시다.  그분은 ‘앞서 올라가고’ ‘선두에 행하시리라’는 미가의 메시아 예언은 ‘앞서 행하시는 왕’이시다.

4:8에 보면 ‘너 양떼의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는 양떼를 지키시는 메시야로서 비유적 표현이다.

 

5:4-5절‘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그는 평강이시라’ 메시야의 별명이 살롬이다. 임마누엘이기도 하고 살롬이기도 한 것이다. 미가는 메시야의 출생지를 예언한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 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5:2) ‘베들레헴 에브라다’는 창35:19,48:7절에 ‘에브랏 곧 베들레헴‘이라고 되어있다.

베들레헴의 옛 이름이 에브라다인 것이다. 에브라다는 슬픈 역사가 있다. 라헬의 묘비가 있는 곳이다. (창35:9) 어린 자식 베냐민을 위하여 슬퍼하며 죽은 곳이다. 그의 통곡은 가장 슬픈 통곡이라(렘31:15) ,마2:18절에 헤롯왕에게 어린아이들이 학살 당할 때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했다.  이렇게 슬픈 장소가 가장 기쁜 장소가 된 것이다. 바로 그분은 샬롬으로 오시는 메시야이기에 가장 슬픈 장소를 가장 기쁜 장소로 바꾸시는 분이시다.

 

5:4절 ’그‘는 계속 메시야를 가르킨다. ’그의 나라는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치리라’ 5절에도‘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평강의 왕으로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고 있다. 9절은 메시야의 최후승리를 보여준다. ’네 손이 네 대적위에 들려서 네 모든 원수를 진멸하기를 바라노라‘

 

내용

 

1장,언약파기

 

1장은 법정에서의 모습이 전개된다. 언약을 파기한 유다를 피고로 법정에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죄가 낱낱이 드러난다. 1:5절에 허물,죄 7절 우상,음행,목상,기생. 그들의 죄는 2장 이후에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어 언약적저주를 선포하신다. 1:6-7에 사마리아에 내려졌고 8-16절에 유다에 내려질 것이다.  8절에는 미가의 행위메세지가 선포된다.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하리니’ 꺼억 꺼억하며 벌거벗고 예루살렘을 다니는 미가의 치욕은 장차 백성들의 모습인 것이다.

6절에서 ‘사마리아로 돌의 무덤같게 하고’ 사마리아와 비슷한 발음 의 뜻인 돌무덤(세마마)은 언어유희로 강조된다.

 

 

2장,언약적저주

 

언약을 파기하고 언약법을 지키지 않은 죄가 나열된다.(1-3절) 그리고 언약 백성을  3절에 ‘이 족속’(망할 족속)으로 호칭하신다. 4절,8,9,의 ‘내 백성’과 대조를 이룬다. 그들의 죄는 지도자들의 착취,거짓예언,유괴와 인신매매(8-9),술취함과 방탕(11)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 시대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우리는 이미 도를 넘고있는 것이다.

심판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이제 회복을 보여주고 계신다. 미가서는 미시적 관점에서의 죄악상과 현실 그리고 거시적 관점에서의 하나님나라와 메시야를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3장,영적어두움

 

2절 ‘내 백성’(언약백성)의 살을 뜯어 먹는 지도자들, 내 백성(5)을 유혹하는 거짓 선지자들 .유혹은 히 ‘타아’(그릇 인도하는 자)이다.  이들은 돈과 이익에 좌우되어 사역하는 자들 (5)이다. 주면 평강을 선포하고 주지 않으면 ’전쟁‘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이상‘(히,하존:비젼)을 보지 못한다. (6) 이러한 시대에 미가의 사명,곧 우리의 사명은 무엇인가? 8절 ’여호와의 영으로 권능과 공의,능력으로 충만‘해야한다.  그리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언약백성의 죄)‘를 알리는 것이다.(8)

대접만 받으려하는 선지자들(5),돈과 물질을 위해 사역하는 것,(11) 그러므로 이상을 보지 못하는 지도자들(6), 현실에 안주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사역하는 사역자들 ,그들 때문에 이스라엘과 유다가 망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떠신가?

 

4장,언약의 회복

 

언약의 회복은 시온(2)에서부터 시작된다. 곧 다윗에게 약속한 영원한 언약이다. 10,13절의 ‘딸 시온‘은 유다를 가르키는 언약백성의 비유이다. 언약백성의 회복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동시에 언약 백성의 긍극적승리를 보장하신다. 13절’딸 시온이여 일어나서 칠지어다 내가 네 뿔을 철같게 하며 네 굽을 놋같게 하리니 네가 여러백성을 쳐서 깨트릴 것이라 ‘

 

5장,다윗언약의 회복

 

베들레헴부터 시작되는 하나님나라의 회복은 베들레헴이라는 가장 작은 곳에서 다윗이 탄생한 것을 보여준다. 이는 ‘이새의 줄기’(사11:1)와 같은 표현이다. 다윗언약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다윗언약은 다윗부터가 아니라 태초부터 계획된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메시야를 통한 회복을 말씀하신다. 심판과 구원의 양면성 특히 심판보다 구원과 회복에 초점을 맞추어야한다. 심판이 목적이 아니란 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6장,베리트와 헤세드

 

그러면 우리(언약백성:내백성,2,3)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8절이다. ‘오직 공의(미쉬파트)를 행하며 인자(헤세드)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언약 문구이다 즉 언약을 지키며 언약백성으로 사는 것)이다. 공의,인자,겸손 이 세가지는 오늘 우리 시대에도 반듯이 행해야 하는 것이다.

 

7장,하시드(언약적 자비를 행하는 자)

 

18,20절에 ‘인애‘는 헤세드이다. 헤세드를 베푸는 신실한자를 ’하시드’라한다. 언약적자비를 베푸는 자,이것이 미가의 소망이었다. 오늘 무너지는 세상에서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헤세드는 순환적 원리를 가자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면 우리는 그것을 베풀어야할 의무가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받으시고 더 큰 헤세드를 우리에게 주신다.그러나 그 시대나 이 시대나 모두가 자기이익의 극대화를 위해서 살아간다면 소망이 없는 것이다. 미시적으로는 하시드가 필요하다. 거시적으로는 메시아의 소망을 예언하는 위대한 미가 선지자의 시각이 우리에게도 있어야하겠다.

 

 

 

                       

 

 

 

 

                   7.나훔(남왕국 선지자)

 

 

배경

 

나훔은 ‘위로‘ 혹은 ’위로자‘의 뜻이며 그의 고향은 ‘나훔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있는 가버나움으로 추정하기도하고 오늘날 예루살렘 서남쪽 약32k 지점에 위치한 베이트 제브린(블레셋과의 국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나훔이 사역했던 시기는 앗수르가 절정에 달했던 주전 663년 애굽의 수도 테베스를 함락한 때부터 주전 612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함락될 때 까지이다.

 

나훔은 이스라엘에 대해 회개를 촉구하지 않는다. 하여 편협한 민족주의자로 공격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관자이며 죄에 대한 심판자라는 나훔서의 주제를 이해하지 못해서이다. 앗수르와 니느웨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사탄의 하수인으로 상징한다. 그러므로 앗수르의 패망은 결국 하나님이 승리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훔은 요나와 같이 니느웨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은 같다. 그러나 요나서는 회개하고 돌아오지만 나훔서는 그들의 죄로 인한 멸망을 보여주고 있다.

 

내용

 

1장:1-8,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묵시‘라고 번역된(1) ‘하존’은 ‘계시’혹은 ‘비젼‘으로 해석된다. ’하존‘은 ’보다‘라는 동사 ‘하자’에서 유래되었다. 특별한 영적체험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전달하는 말씀을 ‘하존’(비젼,계시)이라 한다. 니느웨는 티그리스강 동편, 오늘날의 ‘모술‘ 맞은 편에 위치한 고대도시로서 주전 8세기 말엽 앗수르의 산헤립에 의해서 수도가 되었던 고대 근동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2절의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란 표현은 성경에 자주나오는 표현이다. 언약을 체결한 이후 하나님께서 자주 사용하시는 언약문구이다. 하나님은 언약에 충실하시며 언약백성을 보호하시며 헤세드하시기에 언약백성들의 충성,인애는 반듯이 요구된다. 하여 보복하시는 하나님(3번),진노하시는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시기에 언약백성의 대적자들에게 당연히 심판하신다. 또한 언약백성에 대한 공격이 하나님에 대한 공격이 되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은혜와 심판은 6-8절 병행을 이루며 강조된다. 하나님은 언약백성들이 언약을 파기했을 때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그러나 그 기다림이 끝날 때 하나님은 심판하신다. 그러면서 선지자들을 보내어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1:9-15,니느웨의 심판

 

니느웨에 대한 심판과 종말이 선포된다. 니느웨가 어떤 간교한 일을 행해도 하나님은 그들을 패망시킬 것이다. 11절의 적은 앗수르 왕이다. 왕은 사탄의 하수인을 상징한다.  ‘사악한 것‘으로 번역된 히 ’벨리알‘은 헛된 것,무가치한 것,사탄적인 것을 의미한다. 15절은 사40:9절과 같은 표현이다.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보(전)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위에 있도다‘.

앗수르는 언약백성을 징계하는 도구로 쓰여졌다. 그러나 그 도구가 교만하여 자신이 모든 역사의 주관자로 생각했다. 결국 니느웨는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 시대는 영적전쟁에 무감각하다. 하여 사탄이 원하는대로 움직이는 세상이 된 것이다. 사탄의 노예로 살아가는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1장은 영적전쟁에서의 승리,사탄의 세력(벨리알과 니느웨)에 대한 승리,하나님의 절대주권,승리와 구원의 확실성,하나님의 신실하신 보호하심,회개로의 부르심,하나님의 인내와 기다림 그리고 긍휼,심판의 확실성에 대해 가장 신약적인 접근성을 보여준다.

 

2장,하나님의 대적자

 

나훔서의 주제는 악에 대한 심판이다. 그리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인 것을 보여준다. 심판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게는 심판이지만,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되신다. (1:7) 심판이 니느웨에게는 죽음이지만, 유다에게는 위로가 된다. ,이는 영광의 회복이요(2)손뼉을 치며 즐거워 할 위로와 구원이 된다.(3:19) 우리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

 

2장은 난공불락의 니느웨가 어떻게 망하는가를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1절‘파괴하는 자’는 니느웨를 함락시킬 바벨론과 메대의 연합군을 의미한다. 자신의 힘만 의지하고 살아온 니느웨에 대한 비웃음이 선포된다. 그러므로 1절의 파괴하는 자는 사실은 하나님이시다. 니느웨성을 둘러싼 강이 범람함으로 니느웨는 물바다가 되고 만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던 것들이 오히려 자신을 망하게 하는 결정적인 수단이 되고마는 것이다. 너무도 허망하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가장 강력한 앗수르는 허망하게 무너져버린 것이다. 본문은 그림언어를 사용하여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3장,역사의 주관자

 

감탄사 ‘화 있을 진저’로 시작한다. 앗수르가 얼마나 잔인하게 살육하고 약탈했던가? 이제 거꾸로 된 것이다. 앗수르의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무시한 것이다. 8절에서 노아몬(아몬의 도시=테베스)의 예를 들고 있다. 노아몬은 역사상 세계최고의 요새였던 애굽의 수도였다. 그러나 663년 앗수르에게 멸망했다. 1400년 이상 애굽의 요새였던 ‘테베스’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아몬’은 그 성의 태양신이었다. 그러나 망했다. 이제 ‘니느웨’에게 묻는다. 네가 어찌 ‘노아문‘보다 낫겠느냐?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교훈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강하고, 많이 알고,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겸손하지 않으면 ’노아몬‘ 같이 되고 마는 것이다.

 

 

 

 

 

 

 

 

 

 

                    8.하박국(유다의 선지자)

 

 

배경

 

하박국은 레위인으로 추정된다. 그는 성전에서 노래하는 자였다. 즉 성전선지자였다. 3:19절에 ‘영장(지휘자)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바’ 라고 되어있고 3:3,9,13절에 ‘셀라’가 자주 반복되는 것을 보면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 그리고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는 자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레위인 야하시엘이나 스가랴도 이들 중 한사람이었을 것이다.(대하20:14,24:20) 그러나 하박국은 다른 선지자와는 달리 말씀을 선포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불평을 토해내고 있다. (1:2,313,14)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찿는 것을 보여준다. 성전 선지자는 엘리야나 아모스같이 제도권 밖의 선지자와 구별된다.

 

이 시대는 갈대아(신 바벨로니아제국)가 번성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아직 앗수르는 건재했다. 아래에는 애굽이 앗수르와 동맹을 유지하며 신흥 신바벨론을 견제하고 있었다. 유다의 요시아왕은 반 앗수르였다. 하여 애굽이 앗수르와 동맹하여 므깃도로 올라올 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싸웠던 요시야는 안탑깝게 전사하고 만다. 이에 유다의 국력은 급속히 쇠하여졌다.

 

당시 예레미야는 애가를 지어 백성들을 위로했다. 동시대의 선지자였던 하박국은 ‘어찌하여‘ 이런일이 일어나는가?라고 탄식하는 슬픔은, 그 시대의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므깃도의 슬픔‘은 왕을 잃어버린 슬픔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케하는 슬픔인 것이다. 우리도 이런 급작스런 슬픔을 대할 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요시야같은 의인이 왜 죽어야만 하는가? 왕하23:25절에 ‘요시야같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더라’하지 않으셨는가? 모든 성경은 그 시대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다. 하박국서도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주고있는 것이다.

 

요시야가 죽자 이후의 왕들은 더욱 악행을 저질렀다. 그 중에 여호야김은 가장 악했다. 율법책은 불태워졌고 선지자들은 큰 핍박을 받았다. 이러한 때에 하박국은 사역을 시작한다. 1:3절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2:1절에 하박국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위해 기도한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3절 ‘비록 더딜 지라도 기다리라’ ‘기다리라‘는 강조용법(피엘 형)이다. 기다림(짜페) 이것은 신앙의 본질이 아니던가? 소극적 기다림이 아닌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기다림, 그것은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주를 기대하고 앙망하고 소망을 갖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단순한 기다림은 오히려 불신앙이며 포기하는 것이다. 

 

‘그가 내게 무엇을 말씀하실는지‘ 이것을 영문으로 번역하면 ,He will speak in me'이다 ’내게‘란 말은 'to me' 가 아닌 'in me' 인 것이다. 육체의 청각으로 들려 주시는 음성이 아닌 심령에 들려지는 소리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표현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귀로 듣는 청음이 아닌 영음인 것이다.

 

2:2절에 ‘너는 이 묵시(하존:비젼)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원문의 번역은 ‘그것을 읽는 자는 뛰어 달려가도록 하라’이다. 다시 의역하면 그것을 읽는 자는 뛰어가면서 그것을 전파하라는 것이다. 묵시를 들은 자는 역동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 열정은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내 의지나 결심,결단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또한 2:3절은 묵시의 성격을 보여준다.

 

   1.정한 때가 있다.  2.그 종말이 속히 이른다.  3.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4.비록 더딜     지라도 기다리라  5.지체치 않고 정녕 응하리라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하존’이며 종말론적인 것을 보여준다. 특히 ‘지체치 않고 정녕 응하리라’에서 원문을 직역하면 ‘Surely it(He) will come, it(He) will not tarry' 인데 여기서 대명사 'it'를 히브리서에서 인용하면서 (히10:37) '오실 이'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약속된 그분이 오실 것이다’라는 것이다.

 

또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에서 바울은 칭의를 강조했으며  히브리서에는 의인은 승리하는 삶을 살 것을 강조한다.(히10:35-39)

 

3장에서 하나님의 주권속에 메시아가 어떻게 오시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소망을 가진자는  환란을 당하고 몸이 떨리고 양식이 없어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는 믿음의 승리를 선포하고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이 수년내에 나타내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이제 우리는 현실에 웃고 웃는 존재가 아니다. 높은 곳에 있는 우리의 위치와 신분은 엡2장 5절과 같이 하늘에 있는 자이다.

 

내용

 

1장,탄식과 질문

 

요시야왕 이후 왕들의 폭정에 하박국은 탄식하며 하나님께 질문한다. 하나님의 응답은 갈대아인을 보내어 그들을 심판하리라는 것이다. 하박국은 다시 질문한다. 비록 하나님의 도구로 쓰인 바벨론이라 할 지라도 잔인한 침략을 일삼는 바벨론에 대해 탄식한다. 

 

하나님의 답변은 바벨론의 멸망이다. 2:6-20절에는 5번의 ‘아이고’라는 초상용어가 반복된다.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애곡이다. 3장에서 하박국은 다시 속히 이일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한다. 도구가 교만하여 마치 주권자인양 행세 할 때 하나님의 심판은 급속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박국이 이해 할 수 없었던 것은 어떻게 언약백성들이 자신들 보다 더욱 악한 바벨론에게 악행을 당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자신들의 죄 때문에 오는 결과인 것은 알지만 하나님은 유다를 징계하시기 위함인가, 아니면 멸망시키려는 것인가?

 

또 한가지는 하나님은 바벨론의 잔악함을 그냥 보고만 계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나님의 자녀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자녀들에게 징계와 환란은 무엇인가, 오히려 믿지 않았을 때에는 잘먹고 잘살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보니 인과응보가 거꾸로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악인은 더욱 잘되고 의인은 더욱 비참해지고 말이다.  하나님은 과연 공의의 하나님이신가?

 

하박국은 이 회의를 품은 채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박국의 불평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다.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믿음이 깔려있다. 오늘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때 하박국같이 딜렘마에 빠지게된다.  그러나 그 해답을 얻기까지 기다림이 필요한 것이다. 기도하며 기다리는 기다림 말이다.

 

 

2장,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1절은 주어가 ‘나’이다. 나의 질문에 2절은 ‘여호와께서’대답하신다. 세상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보여주신다. 하박국이 받은 묵시(비젼)를 오늘 우리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역동적으로 증거해야 할 것이다. 달려가면서 전하는 자들 (보발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의인은 견고하다. 의인은 흔들리지 않는다. 의인은 결국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3장,부흥

 

해답을 얻은 하박국은 이제 기도에서 승리의 찬양으로 바뀐다. 그것도 시기오놋에 맞추어서 말이다. 시기오놋은 시7편의 표제에 ‘식가욘’이라고 나온다. 열정적인 스타카토와 빠른 리듬으로 마치 황홀경에 빠진 듯 부르는 찬양이다. 하나님의 호칭도 ‘아도나이’가 반복된다.

 

‘데만’과 ‘바란산’은 유다의 남쪽 에돔과 바란광야를 말한다. (3) 구산과 미디안(7)은 시내광야의 동쪽 미디안지역이다. 즉 시내광야를 말한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하나님이 함께하셨고, 언약을 체결하고 성막을 세우며 언약백성으로 훈련받던 장소이다. 하나님은 친히 여기로 다시 찾아오신 것이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구원자와 심판자로 오시는 것이다. 언약백성에게는 구원자가 되시며 바벨론에게는 심판자가 되시는 것이다. (12-15)

하박국의 노래는 의식적인 기호로 마친다. 시편에도 이러한 표제가 자주 나타난다. 20절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라‘ 이것은 하박국이 성전 예배에 이것을 자주 사용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9.스바냐(유다의 선지자)

 

 

 

스바냐는 왕족 출신으로 히스기야왕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선지자이다.(1:1) 그렇다면 당시의 왕인 요시야와 가까운 친척 관계였으며 요시야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스바냐서에 언급된 우상숭배는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으며 그의 활동시기가 요시야의 종교개혁(621) 이전이었음을 보여준다.

 

역사적배경

 

유다 최악의 왕이었던 므낫세는 북쪽 최악의 왕이었던 아합을 본받아 유다전역에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세웠다.(습1:4)  예루살렘 성전 뜰에는 일월성신을 위한 단을 쌓았으며 심지어 성전안에 아세라목상을 세웠다. 므낫세의 기발한 착상은 하나님도 짝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므낫세는 힌놈의 골짜기에 자신의 아들을 암몬민족이 섬기던 몰렉신에게 바쳤다. (1:5, 말감은 몰렉과 동일 신이다)

역대하33:6에 보면 ‘아들들’이라고 복수로 나오는 것을 보면 둘 이상을 바치기 위하여 불속에 던져넣었다. 므낫세의 배교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점쟁이,요술,사술,무당,박수를 옆에 두고 자문을 구하곤 했다. 또한 므낫세는 이것을 백성들에게까지 강요했다. 하여 이전 어떤 왕보다 악했다고 했다. 더구나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무고히 죽였는데 그들이 흘린 피가 예루살렘 끝에서 끝까지 흘러 넘쳤다고 했다.(왕상21:16)

 

이런 므낫세를 하나님은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고 그의 회개를 받으시고 돌아오게 하신다. 이후 므낫세는 종교개혁을 단행한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아몬(642-640)은 므낫세 못지않게 우상을 섬기고 악을 행한다. 결국 그의 신복에 의해 죽고 요시야가 왕위에 올랐다. 므낫세가 공들인 것중의 하나는  전 국토에 요새를 세우고 예루살렘 외곽공사를 통하여 요새화했다(1:10)는 것이다. 하여 백성들은 바벨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런 그들에게 심판이 먹힐리 있겠는가?

 

스바냐의 신학

 

‘주의 날’은 구원과 심판이다.  심판의 범위는 유다와 주위의 열방이다.  나아가 사람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까지 포함된다. (1:2) 이는 인간의 죄 때문이다.(창3:17) 유다의 심판은 언약파기이다. 그러나 열방의 심판은 교만과 언약백성들에 대한 압제 때문이었다.

 

주의 날은 또한 구원의 날이기도 하다.(예:시험치는 날)  3:17을 보라. 구원의 대상은 유다뿐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즉 여호와를 믿는 자들을 말한다.(요엘2:32)  습3:9 그들은 영적으로 ‘남은 자’들이다. 끝까지 승리한 자들,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한 자들이다.(2:3)

 

주의 날은 역사적이면서 종말론 적이다. 가까운 심판과 멀리 있는 심판을 미시적,거시적 접근으로 보여준다. (3:9-10) 예수님도 눅17:22,26,30절에 ‘인자의 때‘ ’인자의 나타나는 날‘이라 하셨고 고전5:5에 ’주 예수의 날‘이라했다.  그리고 베드로는 ’말세‘(3:2),’주의 날‘(3:10)요한은 계14:5에서 습3:13절을 인용하며 ’주의 심판의 날‘이라고 했다.

 

내용

 

1장,부흥

 

므낫세와 아몬이 죽고 요시야가 왕이 되었으나 8살인 요시야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여 세상은 여전히 우상숭배하에 놓여있었다. 이런 상황에 스바냐는 심판의 날을 외치고 있었다. 다른 선지자와 달리 스바냐는 자신이 히스기야의 4대손 인 것을 소개한다. 그러나 스바냐의 의도는 히스기야와 요시아를 나란히 소개하고 있다. 우리말 성경에는 떨어져있으나 히브리어 성경에는 ‘벤 히스기야 비메이 요시야후’로 되어있다. 왜 그랬을까? 스바냐는 히스기야를 언급함으로 요시야가 히스기야처럼 종교개혁을 단행하기를 원하며 자신의 위치를 소개한 것도 같은 왕족으로 히스기야 같은 개혁의 왕이 되어주기를 원하는 마음이 아닐까한다.

 

2-3절은 심판을 선포하면서  3절은 마치 창세기 1장과 같은 내용이 전개된다. 창조의 목적은 번성,충만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거꾸로 진멸이 반복된다.(2-4)비슷한 발음의 ‘아솝’(진멸), ‘아셉(멸절)의 언어유희를 통해 심판을 강조한다. 마치 노아시대 같은 모습이다. 심판의 이유는 언약파기와(6절:여호와를 배반한 죄) 혼합주의,불의였다.

 

1:3절은 창조순서를 거꾸로 배열한다. 창1:5-6절의 순서는 바다-하늘-짐승-사람 인데 여기서는 사람-짐승-하늘-바다이다. 왜 그럴까? 이 모든 심판의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환경오염)

1975년 고고학자 홀랜드는 예루살렘에서 므낫세 시대로 추정되는 말들의 머리에 태양모양의 디스크가 달려있는 것을 600개나 발견했다. 말 인형은 당시의 우상이었다. 왕하 23:11을 보면 ‘태양을 위하여 드린 말들을 제하여 버렸으니 이 말들은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곳의 근처 시종 나단멜렉의 집 곁에 있었던 것이며’ 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는 이들 뿐 아니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를 멸절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충격적이다. 배교나 우상숭배하지 않더라도 신앙이 차갑게 식은 자, 형식적인 신앙을 가진자도 심판에 포함된 것이다.

 

8절에 보면 여호와의 날을 ‘여호와의 제사의 날’이라했다. 여기에는 두가지 뜻이있다. 우상숭배자로 전락한 제사장을 대신하여 여호와가 직접 제사하는 날이란 것 또 하나는 그  제물은 짐승이 아닌 유다백성이란 것이다. 이 제사는 예배가 아닌 심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날을 구원의 날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자신들이 제물이 되는 심판의 날이라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기에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무감각하다. 그러나 사시는 하나님은 12-13절에 이런자들을 찾으려 등불을 들고 예루살렘을 돌아다닌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14절부터 심판은 유다를 넘어 전 세계에 임할 주의 심판의 날로 전환된다.  특히 그 날을 강조하기 위하여 ‘날’(욤)을 여섯 번이나 반복한다. 주의 심판의 날에는 그렇게 의지하던 재물이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다. 이 시대를 향한 스바냐의 멧세지를 기억하라. 오직 예수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2장,회복

 

므낫세 통치 55년, 아몬2년 그러나 마치 언 강 밑을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혹은 언 땅에도 꽃이 필 준비를 하는 것처럼 부흥의 불씨는 살아있었다.

부흥은 어디서 오는가? 스바냐는 회개를 외친다.(2:1-3) 모여라, 찾으라,구하라.  우리말 성경에는 ‘찾으라’ ‘구하라’이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바슈크’(찾으라)가 반복된다.

 

3장,심판

 

2:13-15절에는 니느웨의 심판을 다루고 이어서 3장에는 예루살렘의 심판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예루살렘의 죄는 니느웨의 죄와 같다. 그러므로 심판을 피할수 없다. 아니 유다의 죄악은 열방의 죄악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더구나 예루살렘은 그 분께 경배도 하지않았고 신뢰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3절은 정치 지도자, 4절은 종교지도자를 책망한다. 종교지도자는 선지자와 제사장이다.

  선지자들은 경솔하며 간교한 자로 묘사된다. ‘파하즈’(경솔)는 거만하게 날뛰는 오만한 행위를 가르킨다.  특히 이 단어는 개인의 이익의 극대화를 꾀하는 욕망에 사로잡힐 때 사용하기도 한다. (창49:4,삿9:4)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언약을 범한다. 더구나 이교도의 의식을 성전에서 행한다. (에스겔서 참조)  그들은 그들의 권위를 이용해서 제물을 착복하는 행위를 책망한다.

 

이러한 소망이 없는 세상과 달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가 대조된다. 17절,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회복을 준비하고 계신다. (3:9-20) 회복의 시작은 입술이다. (9) 입술이 회복되며 하나님을 부르며 찬양할 것이다.  그리고 흩어졌던 열방의 백성들이 다시 여호와께 돌아올 것을 선포한다. 심판으로 흩어진 백성들이 다시 돌아오는 비젼이다.

 

구원과 용서에 익숙해 있는 백성들에게 심판의 심각성을 강조한다. 예레미야때에 심판의 메시지는 사라졌다. 그것은 심판이 온다는 전조현상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재림에 대한 선포는 사라졌다. 이단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만큼 재림을 원하지 않는 시대이다. 하여 재림은 다가온다. 그러나 이런 심판과 멸망과 환란속에서 우리는 어떤 신앙을 가져야하는가?  3:14절 노래하라,기뻐하라,즐거워하라는 명령형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10.학개서

 

 

 

축제 혹은 절기라는 이름 뜻을 가진 학개 선지자는 포로이후 최초의 선지자이다. 스가랴와 동시대의 선지자였고 그의 사역은 16년이나 중단된 스룹바벨 성전완공을 독려하는 일이었다. 본서의 예언은 주전 520년 8월과 12월 사이에 선포된 것이고 성전건축은 4년후(516) 완공되었다. 학개는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하였다. 그의 사역은 에스라서에서도 나온다.(스5:1,6:4)

 

역사적배경

 

페르샤의 고레스왕이 바벨론을 완전히 점령했을 때 유대인의 귀환을 허락했고 성전을 세울 수 있도록 허락했다.  주전 536년 성전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주변의 적들이 연합하여 페르샤왕에게 상소를 올림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외부의 반대 때문에 중단된 것만은 아니다. 귀환한 5만명 모두 영적무관심과 나태함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다리오왕이 즉위할 때 까지 16년간 방치되었다. 하여 학개와 스가랴가 백성들을 각성시켜 성전건축의 재개를 촉구했다. 학개는 현안 뿐아니라 메시야의 오심과 그로부터 세워질 하나님나라, 불의한 자들에 대한 심판,하나님께 나오는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선포한다.

 

신학적주제

 

시내산언약과 다윗언약

 

1.2:5의 내용은 시내산언약을 가르키고 있다.  그 때와 같이 너희와 함께하실 것이라는 것을 약속하신다. 성전건축과 함께 언약적저주를 끝내고 언약적축복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2.스룹바벨에 대한 예언은 다윗언약의 갱신이다. 이 예언은 예레미야가 여호야긴에게 준 언약적저주를 회복하는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왕 여호야김의 아들 너 고니야(여호야긴)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 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 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의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 ...너희는 이 사람이 무자하겠고 그 평생에 형통치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니라’(렘22:24-25,30)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언약을 파기하시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가히 충격적이다. 에스겔의 성전을 떠나시는 하나님 ,언약파기에 대해 성전파괴를 예언하는 것과 같은 충격적인 예언이다. 아니 실제로 다윗언약의 파기를 강력하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학개서의 예언은 같은 표현인 인장을 사용해서 스룹바벨이 여호야긴에 의해 파기된 다윗언약을 새롭게 갱신 할 것을 예언한다.

다윗언약의 영원성을 선포한 것이다. 그들의 언약파기에 대한 죄의 댓가는 이미 포로기 70년으로 치러졌고 죄사함이 선포되었기에 학개에 의한 다윗언약의 지속성과 연속성이 선포된 것이다. 이 말씀은 스룹바벨과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건축을 마무리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스룹바벨은 예수그리스도의 예표로서 그리고 당시의 백성들에게 다윗언약의 회복과 보증으로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2:23절에 스룹바벨을 인장으로 삼으신다는 약속과 장차 오실 메시야를 함께 예언하고있는 이중적 예언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성령의 사역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나라를 세우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학개서에는 ‘영’(루아흐)가 네 번나온다.(1:14,2:4,5)  2:5절에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지어다’  1:14절에는 ‘스룹바벨의 마음(루아흐)와 여호수아의 마음(루아흐)과 남은 백성들의 마음(루아흐)를 흥분시키셨다.’ 스가랴서에도 8번 나온다. 4:6절에는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내용

 

1장,너희 소위가 무엇이냐

 

에스라 2장에 귀환 공동체의 숫자는 42,360명이었다. 그들은 돌아오자마자 성전지대를 완성했다. (스3:1-6) 그러나 대적자들에 의해 성전공사는 중단되었고 시간은 15년이 흘렀다. 영적인 무관심,영적나태함속에 먹고 사는데는 바빴다. 

열심히 농사를 지었으나 재앙만 반복되고 그들의 생활은 형편없었다. 또한 귀환한 사람들은 대부분 상류층 이었고  그 땅에 남아있던 자들은 하층민들이었다. 이들간의 갈등은 심각했다. 귀환자들은 포로가 되었으나 신앙을 간직한 자들이었다면  그 땅에 남은 자들은 전혀 믿음이 없는 자들이었다. 자기가 살던 옛집으로 돌아와 보니 이미 남의 소유가 되어있었다. 이 모든 갈등을 하나로 묶는 것이 성전건축이었다.  그러나 이 꿈이 좌절된 것이다. 이 때가 학개가 예언한 시기였다.

 

이런 답답한 현실을 타개한 것이 학개의 외침이었다.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8) 하나님의 응답은 성전을 짓는 동안 함께하겠다는 것이다. (13)언약 문구를 사용하신다. 이 언약 문구는 메시야의 별명인 임마누엘이 되는 것이다. 구약에는 언약의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신약시대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함께 하셨고 이후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물론 삼위하나님이 함께하신다.

 

학개서에 나타난 하나님은 3번 나온다. 그러나 여호와는 35회나 나온다.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 언약을 이루시는 여호와의 말씀인 것이다. 예레미야의 70년 포로 예언은 제1성전 파괴로부터 제2성전 재건 까지인 70년인 것이다. 언약을 반듯이  성취하시는 여호와였다. 하여 여호와란 호칭이 집중된다. 동시에 ‘내 백성’이 아니라 ‘이 백성’이라 호칭하신다.(1:2,2:14) 너희는 언약 백성이 아니라는 것은 진노하실 때 하시는 표현이다.

 

2장,흥분시키시는 하나님

 

1-9절은 성전을 짓되 성전의 외형이 중요하지 않음이 강조된다. 솔로몬 성전에 비해서 크기가 작고 화려하지 않아서 좌절하는  자들을 위로한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한 것을 강조한다. (4) 은과 금이 모두 주의 것이니 성전의 화려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격려하시는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는 반듯이 언약을 이루시는 것을 강조한다. 하여 4절 다시 언약문구인 ‘내가 너희와 함께하노라’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5절에서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라고 하시면서 시내산언약을 상기시킨다. 동시에 ‘루아흐’(신:성령)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며 역시 언약문구를 쓰고계신다. 우리도 어려울 때마다 언약문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해야할 할 것이다.

 

10-19절은 성전의 외형이 아니라 성전 짓는자의 자세가 더욱 중요한 것을 강조한다. 성전재건에 참여한 자들의 오해는, 참여하면 거룩해진다고 생각했다. 학개는 제사장들에게 문답형식을 통해서 잘못을 바로 잡아준다. 거룩한 고기를 싼 옷자락이 다른 음식물에 닿았다해서 음식이 성물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체를 만져서 부정해진 사람이 음식을 만지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거룩함은 전염되지 않지만 부정한 것은 전염된다는 것이다. 성전을 짓는다고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정결케하면 하나님께서 오늘부터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1:14절‘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마음은 ‘루아흐’ 심령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에 먼저 심령을 변화시키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이다. 흥분(야아르)는 일어나다라는 뜻의 ‘우르’의 히필형 (사역형) 능동 3인칭 남성단수 미완료시제로서 일어나게하다, 흥분시키다라는 뜻이다.

2:20-23절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흔들어 각 민족을 무너뜨리고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새 나라를 세우실 것을 예언하신다.

 

 

 

 

 

 

 

 

 

                         11.스가랴

 

 

 

제사장 가문 출신인 제사장 스가랴는 부친이 일찍 죽고 조부 잇도를 계승하고 있다.(느12:4) 스가랴의 이름을 가진 자는 구약에서 29명이나 된다. 그 뜻은 ‘하나님이 기억하신다’이다. 스가랴는 학개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학개는 당시 나이 80세가량, 스가랴는 매우 젊었다. 520년에 사역을 시작하여(1:1,학1:1) 그의 마지막 예언은 다리우스왕 4년인 518년이다.(7:1)

 

역사적배경

 

페르샤의 고레스는 주전538년 포로귀환의 명령과 동시에 성전건축을 허락했다. 이에 따라 약 5만의 유대인이 귀환한다. 536년 성전건축의 기초를 쌓았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의 방해와 귀환자들의 나태함으로 15년이나 중단된다. 그후 다리우스가 왕이되자(522) 학개와 스가랴는 백성들을 각성시켜 성전재건을 시작한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지휘한다. 갖은 방해 공작이 있었으나 학개와 스가랴의 독려로 다리우스 6년,즉 516년 성전이 완공된다. 586년 성전 파괴후 꼭 70년 후였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스가랴는 미시적 관점에서 성전건축, 그리고 거시적 관점에서 메시야와 재림을 동시적으로 선포한다. (예언의 이중적 구조)

 

구조

 

1.1-8:  주전520-518년, 평화의 시기

2.9-14: 날짜 없슴,전쟁의 시기

 

스가랴서의 신학

 

성전

 

학개는 미시적관점에서 성전건축의 문제를 다루었다면 스가랴는 거시적 관점에서 메시야의 오심과 통치와 재림을 다루고 있다. 귀환공동체가 어언 20년이 지나가는데도 성전건축은 완성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그 시대적 상황이었다. 차칫 성전재건이 미루어질 경우 귀환공동체는 하나되지 못하며,민족의 정체성을 상실케되고, 성전중심의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국가의 실현은 요원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장차오실 메시아로 시작되는 하나님나라는 자연히 늦어질수 있을 것이고 ,제 1성전 파괴를 회복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제2 성전건축임은 자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재건할 성전은 제1성전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을 강조한다.

 

성전은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집인 동시에 언약백성과 함께 거하는 집이며, 언약백성들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성전에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성전에서 피흘린 제물을 받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다. 성전은 곧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속히 건축해야 할 것이 성전건축이었다.

 

정체성, 우리가 누구인가? 언약백성이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보이는 성전인 동시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윗언약은 끊어졌는가에 대한 해답 역시 성전건축이 말해주는 것이다. 영원한 언약 ,메시야의 오심까지 사명을 다할 성전은 다윗언약의 영원성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스가랴는 여호야긴(여고냐)의 후손인 스룹바벨을 메시야의 그림자로 묘사한다. 다윗언약은 이렇게 스룹바벨을 통해서 계승된다는 것이다.

 

메시야예언

 

스가랴는 포로 이전의 선지자보다 메시야예언을 더욱 구체적으로 예언한다. 에스겔서는 포로이전 마지막 예언서이면서 스가랴서와 비슷한 묵시문학의 형태를 띄고 있기에 에스겔서와 연결해서  살펴보는 것이 더욱 이해가 빠를 것이다.

 

에스겔은 주전 597년 여호야긴 왕과 함께 포로로 끌려간지 5년 후 부터 예언을 시작한다. 그러니까 593-571년(겔29:17)까지 선포한다. 유다 멸망 전까지는 심판에 집중하다가 망한 후에는 회복에 집중하는 것을 보여준다. 포로기간 동안 백성들은 회복의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며 귀환을 준비하게 된다. 그러다가 고레스 원년 538년 조서가 떨어지자 5만의 백성들이 성전건축의 소망을 안고 돌아온다. 총독은 여호야긴의 손자 스룹바벨이다. 그들은 고난속에서 기어이 성전을 완공한다.

 

에스겔서에 반복되는 표현은 ‘나의 이름을 위하여’이다. 열국중에 실추된 하나님의 명예회복이 관건인 것이다. 에스겔의 회복의 절정은 성전회복이었다. 하여 성전회복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40-47장) 곧 성전중심의 예배회복이다. 이러한 회복은 스가랴서에 그대로 이어진다. 회복공동체가 예배공동체인 것을 에스겔과 스가랴는 똑같이 보여준다. (슥14장)

스가랴서의 두 번째 주제는 메시야의 초림과 재림으로 이어진다. 오실 메시야는 그의 직분과 사역으로 나뉘어 예언된다. 즉 제사장,왕,목자로서의 사역이다.

 

1.제사장과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슥3:8-10,4:11-14,6:9-15)

 

6:9-15절은 메시야가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함께하는 다윗의 후손으로 예언한다. 스가랴는 스바냐의 아들 요시야의 집에 가서 바벨론에서 귀환한 자들의 금과 은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운 후 ‘순’에 대한 메시야 예언을 선포한다. 순은 다윗의 후손을 가르키며 메시야는 왕권과 제사장권을 함께한다는 것이다. 6:13절을 다시 번역하면 ‘그(순)가 그의 보좌에 앉아 제사장이 될 것이다.’그리고 이 둘은 평화(샬롬)를 이룰 것이다. (시110:4,메시야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 될 것이다)

 

슥9:9-10에서 왕이신 메시야는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를 타고 오시는 왕은 시온과 예루살렘의 기쁨의 근거가 된다. 시온과 예루살렘은 다윗언약을 가르킨다. 다윗언약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겸손한 왕이지만 우주적 평화를 선포하고 우주적인 정권을 갖는다.

 

2.선한 목자로 오시는 메시야(슥10:1-12,11:4-17)

 

겔34장은 목자이신 메시야를 예언한다. 슥10:2절은 목자가 없어 백성이 양떼와 같이 유리하며 곤고를 당하고 있음을 묘사한다. 결국 여호와께서 그 책임을 물으시고 그의 지도자를 세울 것이다.(10:4) 여호와께서 다윗의 후손을 목자로 세워 그의 회복을 약속하신다. (겔34:23-24)

 

3.죽임당하는 메시야(슥12:10,13:7-9)

 

슥12:1-9절은 열국이 미래의 한 날에 예루살렘을 파괴하려고 모일 때 여호와께서 친히 그 대적들을 물리치시고 예루살렘을 보호하실 것을 예언한다. 이날에 여호와께서 ‘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실 것을 예언한다. (12:10) 결과는 대대적인 애통과 통곡이다(12:11-14)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회개한다.  히브리어 성경을 직역하면 ‘그들이 그 찌른바 나를 바라보고’가 된다. 그들이 찌른자는 여호와이다.  여호와가 곧 목자가 되는 것이다.  13:7절에서 칼로 침을 (찌름) 당한자로 묘사되며 사53장과 슥12:10절은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는 메시야를 예언하고있는 것이다.

 

제2성전에서 회복의 공동체를 구현한 언약공동체는 다가올 메시야에 대한 위로를 더욱 소망하게 된다. 메시야 득망사상은 이렇게 구체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 그분은 왕으로, 제사장으로, 메시야로 오실 것이다.

 

 

에스겔서와의 연결성 속에서 살펴본 스가랴의 메시아 예언

 

  제롬은 스가랴서를 구약성경 중 가장 모호한 책이라 부르며 해석의 어려움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 중의 하나가 스가랴가 전하는 메시아 예언들이다. 구약의 예언서 자체가 주는 어려움과 더불어 메시아 본문 해석의 난제는 해석자에게 메시아 본문을 다룸에서 주저함을 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에도 스가랴서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중요한 예언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신약의 기록들에서 스가랴 9-14장은 구약성경 중 가장 자주 인용되는 본문이며, 메시아의 재림을 기록한 계시록에 미친 영향 또한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전 구약성경의 저자들이 선포하는 메시아 예언을 재해석하여 새롭게 적용하면서 이를 포로 후기의 정황 속에서 보다 구체화한다. 그러므로 스가랴서에 나타난 메시아 예언을 다룸에서 스가랴가 이미 선포된 메시아 예언을 어떻게 수용하고 재해석하는지를 살피면서 스가랴의 메시아 예언을 고려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먼저 에스겔서와 스가랴서의 시대적 연결성을 살펴본 후, 두 예언서간의 신학적 관점의 연결성을 다룰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스가랴의 메시아 예언을 이해하는 데 준비 과정이 된다. 이를 바탕으로 에스겔서와 스가랴서에 나타난 메시아 예언의 연결성을 논하면서 스가랴 선지자가 선포하는 메시아의 모습을 추적할 것이다.

 

1). 에스겔서와 스가랴서의 시대적 연결성

  에스겔은 주전 597년경에 여호야긴 왕과 더불어 바벨론으로 끌려간 지 5년이 되는 해에 수레를 타고 나타난 여호와의 영광을 본 이상으로 시작한다. 에스겔서에서 언급하는 연도들에 따르면 에스겔 선지자가 593년(겔1:2)에서 571년(겔 29:17)까지 여호와의 말씀을 받고 선포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에 포로지로 끌려갔으며 포로지에서 예루살렘의 멸망 소식을 접하게 된다(겔 24:25-27; 33:21-22).

 

예루살렘 멸망이 있기 전(586년)까지 에스겔의 메시지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심판에 집중하다가 예루살렘 멸망을 계기로 그의 메시지는 예루살렘의 회복으로 전환된다. 에스겔이 지적하는 유다의 죄악은 여호와께 대한 배교와 패역으로 요약 될 수 있다(참고 겔 20:1-44). 유다의 배교와 패역은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 그리고 바벨론 포로라는 심판의 결과를 낳게 되었고 이를 경험하는 유다 백성은 심각한 신학적 충격에 빠지게 된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지는 가증한 행위들로 여호와의 영광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게 되고(겔 8-11장), 이것은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당연하게 하였고 유다 백성을 약속의 땅에서 추방하여 열국 속으로 흩어지게 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이것은 바벨론의 신인 말둑(Marduk)에 의해 예루살렘의 신인 여호와가 패배한 모습으로 보이게 되고 여호와의 명예가 실추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유다 백성에게 다윗 왕조의 멸망과 함께 심각한 신학적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심판이 성취된 후 에스겔은 이 백성에게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을 본격적으로 선포한다(겔 34-48장).

 

  고레스 왕 원년인 주전 538년에 고국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라는 왕의 칙령이 내려지자 많은 수는 아니지만 성전건축에 대한 소망을 갖고 고국에돌아온다. 돌아온 이들은 에스겔의 회복의 성취를 갈망하였겠지만 실제 그들의 정황은 쉽게 성취를 경험하지 못하게 한다(참고, 에스라 4장). 이들이 귀환 초기에 시작하였던 회복 사역은 중단되고 회복의 때가 그들의 세대에 속하지 않았다는 결론 속에 지내게 된다(참고, 학 1:2).

이러한 정황 속에서 등장하여 회복 성취를 선포하는 선지자가 학개와 스가랴다. 이들은 회복이 성취되는 시기인 포로기 이후의 시대를 맞이하여 이미 선포된 회복의 성취적 측면을 다루게 된다. 하지만 고레스의 칙령과 함께 이스라엘의 회복이 시작되었는데도 완전한 회복을 경험하지 못하는 포로 후기 백성의 문제와 실패에 직면하게 된다.

 

이 정황 속에서 학개와 스가랴는 백성의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길과 보다 구체적인 여호와의 회복 계획을 선포하게 되며 이 계획은 성전건축의 중요성과 메시아 예언을 중심으로 전달된다. 회복은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포로기와 같은 정황을 그대로 이어가는 백성에게 스가랴는 에스겔 선지자와 밀접한 신학적 연결성을 갖고 그의 회복 메시지를 전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스가랴와 에스겔 사이에 나타나는 신학적 연결성을 살펴보는 것은 스가랴서의 메시아 예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2). 에스겔서와 스가랴서의 신학적 관점의 연결성

  에스겔의 신학적 관점은 스가랴의 회복의 틀을 제공하며 이러한 연관성은 스가랴의 메시아 예언에서 구체적으로 발견된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선포되는 내용 중 중요한 주제는 그의 백성 중에서뿐만 아니라 열국 중에서 실추된 여호와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에스겔서에는 여호와께서 “나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표현과 함께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회복을 이루실 것을 선포한다. 즉,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사용한 열국을 친히 심판하여 그의 백성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모으실 것이며, 그들을 정결케 해 신정 통치가 실현될 그의 나라를 친히 세우실 것이다. 따라서 에스겔 선지자가 제시하는 회복에 대한 신학적 관점은 이 중심 주제를 통하여 드러난다. 에스겔이 선포하는 메시아 예언 역시 이러한 신학적 관점 속에서 그 특징을 나타낸다.

 

  포로기의 정황 속에서 선포하는 에스겔의 메시아 예언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에스겔이 예언하는 메시아는 여호와의 강력한 왕권과 권위 아래에 있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둘째,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회복 사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회복의 주도권은 여호와께 있으며 에스겔의 메시아는 우주적 통치나 권력을 행사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루는 인물로 묘사되지 않는다.

셋째, 그런데도 메시야의 임재는 여호와의 신실하심과 통치를 확언해 주며, 특히 여호와의 임재를 보증하는 역할을 한다.

넷째, 에스겔의 메시아는 과거의 잘못과 실패를 역전시키는 과정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즉, 과거 지도자의 실패를 회복시키고 역전시키는 대체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다섯째, 에스겔이 예언하는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제사장들과 협력하여 올바른 예배를 회복할 것이다. 에스겔서 40-48장에서 메시아의 제의적 위치와 역할이 구체적으로 표시되며 제의에 필요한 제물을 제공하고 예배 의식을 주도하는, 예배 회복의 중요한 인물로 제시되고 있다.

 

  에스겔은 회복 사역에서 여호와의 주도적인 역할을 강조하면서 또한 이에 축을 이루는 여호와의 약속과 인간의 책임과 의무 사이의 긴장을 강조한다. 후자의 측면에서 인간의 소홀함이 심판의 근거가 되었으며(참고 겔 18장), 회복의 성취에서 인간 책임과 의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에스겔의 성전 환상의 내용이다(참고 겔 40-48장), 성전 환상에서 에스겔은 이미 세워진 성전을 둘러보는 것을 통해 여호와의 약속의 성취를 드러내 주며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와 제사 규정을 통해 인간의 책임과 의무의 중요성을 지적해 준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갖고 있는 계획의 이러한 신학적 관점(여호와의 주도적 사역과 인간의 책임과 의무)은 포로 후기 선지자들의 회복에서도 여전히 반영되고 있다.

 

  에스겔이 바라보는 이스라엘 회복 공동체는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공동체다. 성전과 예배의 회복은 이스라엘의 회복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에스겔이 전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회복에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예배와 성전의 회복이다(참고, 겔 20;39-44; 36:24-31; 37:26-28; 40-48장).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라보는 에스겔의 이러한 신학적 관점은 포로 후기의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성전건축과 회복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학개와 스가랴서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연결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3) 에스겔서와 스가랴서에 나타난 메시아 예언의 연결성

  스가랴 1-14장은 두 개의 큰 단락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 단락인 스가랴 1-8장은 보다 임박한 미래의 회복 공동체를 이상과 환상의 말씀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 이 단락의 주제는 네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의 우주적 심판을 통한 열방의 심판과 예루살렘의 회복(슥 1:7-21; 6:1-8), 두 번째로, 하나님의 개입과 예루살렘의 정결(학 2:1-13; 5:1-11), 세 번째로, 대제사장과 지도자의 회복(슥 3:1-10; 4:1-14; 6:9-15), 네 번째로, 정의와 다가올 축복(슥 7:1-8:23).

 

  두 번째 단락인 스가랴 9-14장은 미래적, 묵시적 예언을 통해 마지막 날(“그날”)에 성취 될 하나님의 나라에 집중한다. 스가랴서 전체를 볼 때 포로 후기의 이스라엘 회복과 더불어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를 함께 그려 주고 있다. 따라서 이 흐름과 함께 등장하는 메시아 예언은 자연스럽게 메시아의 초림과 재림에 대한 예언을 함께 담게 된다.

 

  스가랴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오실 메시아를 두 가지 측면에서 조명하고 있다. 하나는 직분의 측면이며 다른 하나는 사역의 측면이다. 직분의 측면에서 스가랴가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은 제사장, 왕과 목자다. 사역의 측면에서 스가랴는 메시아가 직분과 관련된 사역을 감당할 것을 선포한다.

 

⑴ 제사장과 왕이신 메시아(슥 3:8-10; 4:11-14; 6:9-15)

  스가랴는 6:9-15에서 메시아를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통합하는 다윗의 후손으로 예언한다. 스가랴는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가서 바벨론에서 온 자들에게서 금과 은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든다(6:9-11). 그리고 이 관을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운 후, ‘순’에 대한 예언을 전하면서 메시아 예언을 선포한다(12-13절). 성전을 건축하는 인물이 바로 이 ‘순’이며 이 예 언은 오실 메시아의 정체성과 사역을 다룬다. 스가랴가 선포하는 ‘순’은 다윗의 후손을 의미 하며(슥 6:12, 참고 사 4:2; 렘 23:3-5; 33:14-26; 겔 17:22-24), 그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것이며, 영광을 얻고 왕의 보좌에 앉아 통치권을 행사할 것이다(슥 6:13).

 

메시아 안에서 제사장직과 왕권이 통합되는 것은 스가랴만의 독특한 예언이 아니다. 시편 110:4은 이미 메시아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 될 것을 선포하였다.

 

  스가랴 6장의 “순” 라고 불리는 다윗 후손이 제사장직과 왕권을 왕의 보좌에 앉아 통합하리라는 해석은 스가랴 3-4장의 예언과 함께 살필 때 더욱 분명해진다. 스가랴 3장은 사탄(“고소자”)이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여호와 앞에서 대적하는 장면을 스가랴가 목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1절). 여호와의 명령에 의해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벗어 버리고 대신에 아름다운 옷을 입고 정한 관을 쓰게 된다(4-5절). 여호수아가 정결케 되는 사건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결케 됨에 대한 전조다.

 

여호와의 도와 율례를 준행할 때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집(“내 집”)과 여호와의 뜰(“내 뜰”)을 지킬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더 나아가 죄 사함을 입어 정결하게 된 여호수아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예표의 사람들이 되어 여호와의 종(“내 종”)인 “순”이 날 것을 보증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9절에서 언급하는 돌은 성전이 세워질 기초석이라기보다는 4:7에 나오는 머릿돌과 연관하여 고려할 수 있다. 즉, 이 돌은 성전건축의 완성을 확증하는 증표가 되는 머릿돌을 의미하며 성전완성을 통한 죄 사함과 평안을 이루는 데 정결케 된 제사장과 여호와의 종 ‘순’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가랴는 3장에서 이미 제사장과 다윗의 후손으로 올 메시아(“순”)의 중요한 관계를 언급하면서 6장에서의 통합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과정은 4장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순금 등대와 이 등대 곁에 있는 두 감람나무의 이상을 통해 스가랴는 성전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축될 것(4:6)과 이 성전건축에서 다윗의 후손인 스룹바벨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4:9)을 선포한다. 스가랴의 이상에 등장하는 순금 등대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이것이 성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때 이 등대가 계속 불을 밝힐 수 있도록 기름을 내는 두 감람나무의 역할은 성전과 관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두 감람나무가 “기름 발리운 자 둘”이라는 14절의 설명을 볼 때 이 감람나무 중 하나는 성전 예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로 해석 될 수 있다.

 

두 감람나무는 순금 등대  (“성전”)에 금 기름을 제공하며 “온 세상의 주”를 섬기는 사역을 감당한다. 즉, 정치적 지도자와 종교적 지도자가 같은 위치에서 성전건축 과업과 성전을 이끌어 갈 하나님의 원동력을 공급하는 통로가 되리라는 것이다. 이들은 여호와의 신에 의해 건축된 성전(슥 4:6)을 유지하고 섬기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과 성전의 회복에서 여호와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는 에스겔의 신학적 관점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또한 성전 건축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약속으로 완성을 보증하는 학개의 예언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참고, 학 2:5). 성전을 중심으로 한 이들의 상호 보완적 역할이 6장에서는 메시아 안에서 통합되는 것이다.

 

  제사장과 왕인 메시아 예언을 정리하면, 정결하게 된 대제사장이 여호와에 의해 세워지고, 이것은 성전 예배의 가능성을 기대하게 한다(3장). 이 대제사장은 왕과 함께 성전 예배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며(4장), 결국 왕의 보좌에 앉게 되는 다윗의 후손(“순”)안에서 제사장직과 왕권이 통합될 것이다. 스가랴는 이 메시아를 통해 이스라엘 회복 공동체가 종교적, 정치적 질서를 새롭게 갖출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회복 공동체에서 왕과 제사장의 협력 및 중요한 역할은 이미 예레미야의 예언(렘 33:14-18)에서 강조되었다.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서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렘 33:15)과 여호와 앞에서 제사를 항상 드릴 레위사람 제사장들도 끊어지지 않을 것(렘(33:18)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포로기 이전에 선포하였다. 포로기가 되어서는 에스겔 선지자가 그의 성전 환상(겔 40-48장)에 이들의 역할과 중요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같은 맥락에서 포로 후기에 스가랴는 제사장과 왕의 역할을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메시아 안에서 이 두 직분이 통합될 것을 예언한다. 신약의 히브리서 저자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논증한다(참고 히 7:1-28; 8:1).

 

  스가랴는 9:9-10에서 왕이신 메시아의 모습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왕은 시온과 예루살렘의 기쁨의 근거가 된다(슥 9:9, 참고 마 21:1-11; 막 11:1-11; 눅 19:28-40; 요 12:12-19). 겸손한 왕의 모습이지만 이 왕은 우주적 평화를 선포하고 우주적 정권을 가진다.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 9:10).

두굿(Duguid)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시편 72편을 이 예언의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라”(시 72:8). 이 통치의 특징은 공의(슥 9:9; 시 72:3)이며 그 결과는 우주적 평화와 구원이다(슥 9:9; 시 72:4)

 

   에스겔이 바라보는 회복이 이스라엘 안에만 한정되는 반면 스가랴는 우주적 회복의 소망 속에서 왕이신 메시아의 모습을 예언하고 있다. 겸손한 모습을 하고 구원을 얻어 등장하는 메시아지만 그는 이방인들과 열방에 화평을 전하게 된다. 이러한 메시아 사역의 우주적 측면을 6:15의 성전건축에 관한 예언에서 이미 암시된 바다(“먼 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참고 슥 4:14; 8:20-23).

 

  결론적으로 스가랴가 3장, 4장, 6장, 9장에서 제시하는 메시아는 제사장직과 왕권을 통합하는 다윗의 후손이며, 그의 위치와 역할은 예배 공동체 회복에 집중하고 있는 포로기와 포로 후기 선지자들의 신학적 관점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메시아가 하나님 백성의 회복 사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지만 그의 임재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증하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상징하며, 더 나아가 예배 공동체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⑵ 선한 목자이신 메시야(슥 10:1-12; 11:4-17)

  목자의 이미지로 메시아를 예언하는 것은 스가랴에게서 처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이 주제는 이미 이전 선지자들을 통해 언급되었던 것이며 구약의 메시지에서 자주 등장하는 비유다. 목자의 이미지가 지도자를 비유적으로 묘사하는 것임을 구약성경과 고대 근동의 문헌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바다. 특히 에스겔 34장은 스가랴가 전하는 목자이신 메시아 예언의 배경이 된다.

  스가랴 10:2는 목자가 없어서 백성이 양떼와 같이 유리하며 곤고를 당하고 있음을 묘사한다. 이는 실제적으로 목자의 부재 문제가 아니라 목자는 있지만 양떼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신실한 목자의 부재 문제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친히 신실하지 못한 목자들과 숫염소들에게 책임을 묻고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슥 10:3), 여호와께서 친히 그의 백성을 돌보실 것이다(슥 10:6-12). 스가랴 10:4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그의 양떼를 위해 불의한 목자들을 대신할 지도자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는데, 이 지도자가 모퉁이 돌, 말뚝, 싸우는 활, 권세 잡은 자로 묘사되고 있다.

 

불의한 목자들을 대체할 지도자가 여호와 때문에 세움을 얻게 되리라는 사실이 “그에게로”라는 표현의 계속적인 반복을 통해 강조된다. 이러한 문제와 해결 패턴은 에스겔 34장이 이미 선포하고 있는 바다.

①목자들의 실패, ②여호와의 심판, ③여호와의 회복 사역, ④선한 목자를 세우심. 에스겔 34:1-6은 불의한 목자들로 인한 백성의 고통을 서술하며 7-16절은 여호와께서 친히 그의 백성의 목자가 되어 돌보실 것을 약속한다. 불의한 목자들은 결국 여호와의 심판 대상이 된다(겔 34:18-22).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친히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 더 나아가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후손을 목자로 세워 그의 회복 약속을 보증하신다(겔 34:23-24).

 

  스가랴는 10장에서 언급한 선한 목자의 공급을 11장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어 주고 있다. 하지만 11장의 목자 비유를 통해 에스겔 34장과 상반되는 예언을 추가하면서 12장과 13장에 등장하는 찌름을 당하여 죽음을 겪게 되는 목자에 대한 예언을 예비한다.

 

스가랴 11장에서 여호와가 양떼를 위해 두 목자를 세우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 여호와는 죽임을 당할 양떼를 먹일 목자를 세우신다(슥 11:4). 스가랴 선지자가 이 목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그들의 양떼를 불쌍히 여기거나 돌보지 않는 정황이다(11:5). 또한 여호와께서도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지 않고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붙이신다(11:6). 이 정황 속에서 스가랴는 목자가 되어 “은총”이라는 막대기와 “연락”이라는 막대기로 양떼를 먹이며 양떼 안에 은총과 연합이 있기를 기대한다(11:7). 그러나 목자는 양떼를 싫어하게 되고 양떼도 이 목자를 미워하게 된다(11:8). 목자는 양떼를 그들의 불행 가운데 그대로 방치하면서 여호와께서 양떼를 불쌍히 여기시지 않음을 반영한다. 결국 목자는 두 막대기를 자르고, 양떼는 그의 고가 은 삼십을 주고 목자의 관계를 세우시는데, 이 목자는 양떼를 돌보기보다는 강포를 행한다(11:15-17).

 

이 목자가 실패한 목자들의 행위를 그대로 행하므로 양떼가 고통을 당하게 되겠지만, 결국 양떼를 버린 이 못된 목자는 심판 대상이 된다. 이 못된 목자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선언은 스가랴 10장과 에스겔 34장에서 선포하는 선한 목자의 등장을 다시 소망하게 한다. 하지만 이 소망은 찌름을 당하여 죽게 되는 목자를 통해서 성취된다(슥 12:10; 13:7-9). 스가랴는 12장과 13장을 통해 10장과 11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선한 목자가 고난 받는 종 메시아임을 분명히 드러내 준다.

 

⑶ 찌름과 칼로 침략을 당하는 메시아(슥 12:10; 13:7-9)

  스가랴 12:1-9는 열국이 미래의 한 날에 예루살렘을 파괴하려고 모일 때 여호와께서 친히 그 대적들을 물리치시고 예루살렘을 보호하실 것을 선포한다. 이날에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실 것을 약속한다(12:10). 결과는 대대적인 애통과 통곡이다(12:11-14). 이것은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개혁한글)” 그를 찌른 행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애통과 통곡으로 보인다(12:10). 이들이 찌른 행위를 묘사는 동사(다카르)는 칼과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상처를 내는 행위를 의미한다.

 

개역한글 성경에서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로 번역하고 있는 맛소라 히브리어 원문(BHS)을 직역하면 “그들이 그 찌른바 나를 바라보고”라고 번역된다. 이와 같이 맛소라 본문을 따라 번역할 경우, 그들이 찌른 자는 여호와(“나를”)를 의미하게 된다. 즉, 그들은 여호와께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것(이것은 추상적이거나 비유적이라기보다는 실제적인 상처를 의미함)에 애통하며 용서를 구하는 회개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친히 이 고통을 경험하심으로써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들은 그들의 행위에 대해 회개하고 죄 사함에 이르게 된다(참고, 슥 13:1). 여기서 언급하는 찌름을 당한 자는 스가랴서의 흐름을 고려할 때, 11:4-14에 나타나는 양떼에게 거절당하는 목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여호와와 목자가 동일시되는 대목이다. 이 목자가 13:7에서는 칼로 침을 당하는 자로 묘사되며 여호와의 짝된 자(“내짝된 자”)로 불린다.

 

따라서 여호와는 이 목자의 거절당함(11:4-14), 찌름을 당함(12:10), 또한 칼로 침을 당함(13:7)을 통하여 이 고통에 참여하기에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거민이 찌른 자가 여호와라고 하는 것이 가능하다. 같은 맥락에서 이사야 53장에서 말하는 고난 받는 종을 통해 여호와는 이 고통에 참여하시며, 스가랴 12:10의 찌름을 당한 자의 모습을 신약의 기록자들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을 맞이한 예수님께 적용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참고 요 19:37; 1:7).

 

스가랴 12장에서 언급하는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의 애통과 통곡은 단순한 괴로움의 표현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애통과 통곡이 13:1에서 죄 사함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스가랴 12:10에서 언급하는 찌름을 당한 자는 13:7에서는 칼로 침을 당하는 목자로 묘사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치는 행위가 여호와에 의해 행하여진다. 즉, 여호와께서 칼을 휘두르시고 이 칼로 그의 목자(“내 목자”)를 치신다. 이것은 이사야 53;10에서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라는 표현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내 짝 된 자”라는 표현은 이 목자가 신성을 여호와와 함께 나누고 있는 자를 암시하며 “내 종”이라는 표현(참고, 슥 3;8)과도 평행을 이룬다. 이 목자가 칼로 침을 당할 때 양떼가 흩어짐과 심판을 경험하게 된다(슥 13:7-8, 참고 단 9:26).

 

그러나 삼분의 일은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여호와를 그들의 하나님(“내 하나님”)이라고 부를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목자의 죽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호와와 그의 백성 간의 언약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내 백성”과 “내 하나님”). 마태복음 26:31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를 버리게 되는 것을 이 예언의 성취로 해석한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라 기록된바 내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스가랴는 에스겔의 선한 목자이시며 제의적 역할을 감당하시는 메시아의 이미지(겔 34:23-31; 37:24; 40-48장)를 이사야의 고난 받는 종의 이미지(사 53장)와 하나로 묶어 찌름과 칼로 침을 당하는 목자(슥 12:10; 13:7)로 묵시적 예언을 통해 전하고 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그의 백성과의 언약 관계를 회복하시는 방법이며 창세기 3:15에서 언급하는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증거 한다.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 8:27). 또한 복음서 저자들은 스가랴의 메시아예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았던 것이다.

 

요한복음 19:34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창에 옆구리를 찔리셨을 때 물과 피가 흐른 것을 기록하며 예수님의 확실한 죽음을 전한다. 하지만 37절에서 저자가 스가랴 12:10을 인용하는 것을 볼 때 이 물과 피는 아마도 두굿이 지적한 것처럼 스가랴 13:1에서 언급하는 속죄하는 물과 칼로 침을 당하여 죽음에 이를 때 흘리게 되는 피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속죄와 언약 관계 회복이 동시에 이루어졌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가랴 10-13장의 흐름을 목자를 중심으로 정리하면, 10장에서 여호와는 불의한 목자들을 대체할 그의 목자를 제공하실 것을 약속하시고, 실제로 제공하시는데, 양떼는 이 목자를 거부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슥 11:4-14). 하지만 여호와는 이들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그들의 행위에 대해 애곡하고 회개에 이르게 한다(슥 12:10). 양떼가(칼로) 찌른 목자(슥 12:10)는 여호와께서 의도하신 칼로 치심(슥 13:7)의 대상이며, 이 목자의 죽음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남은 자들(“삼분지 일”)의 언약 관계가 회복되며 죄 사함이 이루어진다(참고 슥 13:1).

 

(4) 에스겔서와의 연결성 속에서 살펴본 스가랴의 메시아 예언 결론

  포로기의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백성에게 에스겔 선지자는 새로운 다윗인 선한 목자가 등장하여 여호와의 임재와 성전회복을 보증할 것을 선포하였으며 여호와께서 세우신 성전에서 예배 공동체가 메시아와 제사장의 협력을 통해 유지될 것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의 회복 예언을 신뢰하고 돌아온 백성은 그들이 처한 상황 때문에 회복에 대한 소망을 잃고 자신들의 삶에만 열중하며 온전한 회복을 경험하지 못한다. 이에 스가랴 선지자는 회복을 위한 여호와의 적극적인 개입과 사역을 강조하고 에스겔 선지자가 언급하는 메시아 이미지와 사역을 반복하면서 에스겔의 회복이 그들에게 여전히 유효함을 일깨워 준다.

 

여호와께서 회복의 길을 마련하셨지만 이를 거부하고 배척한 백성이 신실하지 못한 목자 아래에서 심판의 시기를 겪게 되지만 결국 여호와께서는 그가 세우신 목자를 통하여 죽음의 고통을 감당하시어 그의 우주적 나라를 온전히 이루실 것(슥 14:8-11)과 열국이 그를 경배할 것을 약속하신다(슥 14:16-21). 스가랴가 회복을 위한 여호와의 적극적인 개입과 사역을 여전히 강조하는 것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회복이 여호와께만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여호와의 약속에 대해 백성이 취하여야 할 반응은 그들의 악한 행위를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1:2-3). 스가랴의 권면을 듣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자는 그가 세우신 목자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실 영원한 나라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자들은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경험할 것이다(슥 14:17-19).

 

에스겔 선지자가 회복에 대한 메시지를 강조하면서 포로기의 백성에게 소망과 기대를 갖게한 반면, 스가랴 선지자는 회복의 때를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회복의 길을 찾지 못하는 자들에게 확실한 선택의 도전을 전하는 것이다. 이는 회복의 때를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회복을 누리지 못하는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내용

 

1장,여호와께 돌아오라

 

1장에 반복되는 단어는 ‘돌아오라‘이다.(3,4) 또 ’열조를 본받지 말라‘는 말이 반복된다. (2,4,5,6) . 6절의 ’내가 내 종 선지자들에게 명한 내 말과 내 전례들이 어찌 네 열조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이 말씀은 신28장의 언약적저주의 성취이다. 언약을 파기한 참담한 결과를 목도하지 않았느냐는 수사학적인 질문 앞에 백성들은 돌아온다.

 

1.첫번째 환상:여호와께서 돌아오심(7-17절)

 

유다와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삶이 다시 풍요롭게 될 것이라는 묵시이다. 나아가서 성전 뿐 아니라 온 세상의 회복이다. 처음 세 환상은 공통점이 있다.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유다의 회복이다. 선지자가 본 환상은 빨간 말을 탄 천사이다. 여기의 색깔은 계시록(계6:2-8)의 색깔과 달리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러색깔과 말 탄자들이 복수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들의 임무는 여호와의 명령대로 세상을 둘러보고 오는 것이었다. 그들의 보고는 세상은 평온하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천사는 하나님께 호소한다. 예루살렘과 백성들은 언제까지 내 버려두실 것입니까?  12절, 하나님이 노하신지 70년이 되었습니다. 기한이 찼다는 것이다.

 

이사야의 70년(사23:15-17)은 완전수의 의미,예레미야의 70년은 성전파괴에 대한 회복으로서의 70년, 그러나 스가랴는 문자적인 70년을 말하고 있다. 586년부터 70년 그러니까 지금은 519년 2월 5일(우리 달력으로) 성전재건을 시작하기 4개월 전이다. (성전재건은 다리오왕 2년 6월 24일) 즉 70년이 되어가고있다는 것이다. 17절에 히 ‘오드’(다시)를 4번 사용함으로 회복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섭리에 회의를 품고있는 백성들에게 주시는 14-17절의 말씀은, 하나님은 지칠줄 모르는 열심을 가지셨다. 열방에 대한 분노,여호와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심(16),성전재건,예루살렘의 회복,위로등이다. 스가랴의 묵시문학적 표현 역시 기독교적 묵시문학의 형태를 보여준다. 현실극복,현실타파이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아니다 일하시고 계셨다. 하나님의 자비는 끝났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셨는가? 아니다.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는 결코 자기백성을 버리지 않는다. ‘시온‘이 반복된다. (14,17) 다윗언약의 회복이다.

 

2,둘째 환상(18-21)

 

네뿔을 보았다. 네뿔은 묵시문학적 표현에서 세상이다. 4를 뜻하는 의미이다. 주의 백성들을 괴롭혔던 네 뿔(열방)이 대장장이에 의해서 부셔진다. 하나님의 심판이다.

 

3.세째환상(2:1-5):불의 성곽 새예루살렘

 

척량줄 환상(에스겔-스가랴-요한계시록)은 아모스서(7:7-9)에서는 심판으로 나타나지만  여기서는 예루살렘의 구원과 회복을 상징한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에스겔서와 관계가 깊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하나님이 세우실 새로운 도성을 측량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스가랴서는 에스겔서를 이어서 읽으면 더욱 이해가 빠를 것이다. (겔 40:3,5)

 

척량줄 묵시는 계21:15-17절로 이어진다. 새 예루살렘의 크기를 측량하기 위해서이다. 구원과 회복을 위한 새하늘과 새땅이다.  다시 스가랴서를 보면 천사가 나타나서 측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예루살렘은 에스겔이 생각한 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성이 될 거라는 것이다. 폐허가 되었던 성이 회복되었을 때는 거대한 성으로 바뀌는 환상이다. 예루살렘을 불의 성곽이 되게 하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에덴동산 같이 불성곽으로 지키시겠다는 것이다.

 

4.네번째 환상(3:1-7):이스라엘의 정결과 회복

 

새로운 시대의 영적지도자 대제사장 여호수아 4장은 세상적 지도자 스룹바벨을 보여준다. 이 둘은 장차올 메시야의 예표이기도하다.

 

3장은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천사 앞에서 더러운 옷을 입고 사탄은 그를 정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치 욥기의 천상재판을 연상시킨다. 이에 여호와께서 사탄을 책망하고 여호수아에게 더러운 옷을 갈아입으라고 명령한다. 2절의 ‘불에서 꺼낸 그을린 나무’는 바벨론 포로에서 끄집어 낸 언약백성이다. 4절의 ‘더러운 옷을 벗는’것은 죄사함을 의미한다. 출19:6절의 제사장나라의 회복을 여호수아를 통해 이루실 것이며 여호수아는 메시야의 예표이며‘ 내가 내 종(에베드) 순을 나게하리라‘(8)

 

메시야의 사역은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9) 십자가에서 단번에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히10:10) 일곱 눈은 성령의 사역을 상징한다.  이 모든 것은 메시야를 통해 시작되는 회복 즉 하나님나라의 시작과 회복을 보여준다.

 

5.다섯번째 환상(4:1-14):순금등대와 두 감람나무

 

순금등대의 1차적해석은 성전이지만 2차적해석은 언약백성을 가르킨다. 그리고 신약의 교회를 상징한다.  그들의 사명은 세상을 밝히는 것이다. 기름은 성령이다. 성령의 공급으로만이 세상에 빛을 밝힐 수 있는 것이다.

스룹바벨이 성령으로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것을 보여준다. ‘이는 힘으로 능으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되느니라‘(6) 그럴때 큰 산인 장애물도 문제가 될 것없다. 무리가 은총을 외치는 가운데 스룹바벨이 건축을 마무리하는 머릿돌을 놓게 된다.

 

11절의 두 감람나무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이다. 이들은 성령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나라의 시작은 늘 미약하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하는 사역은 반듯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시에 메시야와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시작을 예표하는 것이다.

 

6.여섯번째 환상(5:1-4): 날아가는 두루마리

 

두루마리의 길이는 보통 30센티 정도이다. 길이는 10M 정도이다. 이것이 날아가는 것은 펼쳐져있는 것이다. 모두가 보기 위해서이다.  그 내용은 저주로서 계5:1절의 두루마리를 연상케 한다. 저주 앞에 정관사가 붙어서 이는 10계명을 가르킨다.  또한 두루마리의 크기는 매우 컸다. 이는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함이다.

 

7.일곱번째 환상(5:5-11)에바와 에바 속의 여인

 

에바는 추수때 사용하는 광주리로서 곡식의 양을 재기위한 것이다. 한 에바는 약 40리터 정도이다. 언약백성의 죄를 측정하는 것이다.  에바속에 앉아있는 여인은‘ 악‘을 상징한다.  역시 정관사가 붙어 언약백성들의 죄를 가르킨다. 이를 납으로 봉하였다는 것은 감금시킨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에바를 시날 땅(바벨론)으로 던져버리셨다. 그들의 악을 제거하신 것이다.

 

8.여덟번째 환상(6:1-8):네 병거 환상

 

네 병거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온 땅을 두루 다니고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첫 번째 환상을 상기시키면서 모든 환상을 정리하고 있다. 이는 수미상관구조로 반듯이 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말의 색깔이 주는 의미는 없다. 네 병거는 하늘의 네 바람(5) 이라는 것이다. 바람은 ‘루아흐‘ 성령이다. 성령이 주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북방(바벨론)으로 가서 ’내 마음을 시원케 했느니라‘ 마음은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의 영이 바벨론에 사는 언약백성들을 감동시키셨고 영을 내리셨다. 그리고 그들을 돌아오게 하셨다.(10)

 

12절의 ‘순’은 메시야의 예표인 스룹바벨이다.

성령의 사역은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의 일을 역동적으로 진행시키신다. 또한 성령의 사역은 다양성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동시에 사용하신다. 또한 성령의 사역은 메시야의 오심을 보여주신다.

7장,말씀하시는 하나님

 

포로 이후 성전 중심으로 하나님나라가 세워 질 것을 스가랴와 학개는 같이 외친다. 그러나 스가랴는 이방인들도 구원에 참여하리라는 것을 선포한다. 이제까지는 환상으로 보여주셨다면 7장 부터는 말씀으로 들려주신다. (1,4,8)

귀환공동체의 대표들은 518년 스가랴를 찾아와서 금식에 대한 질문을 한다. 3절에서 매년 오월에 하는 금식을 계속해야합니까?  오월의 금식은 586년 성전이 불탄 것을 기념하기위한 절기이다. 스가랴의 답변은 너희가 포로중에 오월,칠월에 금식했다. 그 금식이 누구를 위해서냐? 즉 금식의 시기가 문제가 아니라 금식의 정신이 목적임을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칠월의 금식은 총독 그달랴의 암살을 기억하는 금식일(속죄일)이었다. (왕하25:25,렘41:1-2) 금식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삶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유대인은 언약백성이라는 자부심이 교만과 오만으로 바뀌었다. 하여 이방인을 멸시하고 언약을 지키지 않았고 외식적인 신앙과 타성에 젖었다. 그러면서 오직 여호와의 날을 기대했다. 그 날은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는 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선지자들은 그 날이 심판의 날이라는 것이다.

 

8-10절 말씀은 이제까지 보여준 환상에 대한 요약이며 실천사항을 하나님이 강조하시는 말씀이다. 중심 단어는 ‘헤세드’(9)이다. 헤세드의 실천이 너희가 사는 길이다. 그러나 그들은 강팍하여 듣지 않고 귀를 막아버렸다. 12-14절은 그 댓가이며 기도에 응답치 않겠다. 포로로 끌려가게 하신다. 아름다운 땅을 폐허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8장.말씀하시는 하나님

 

귀환공동체를 위로하시는 말씀이다. 역시 만군의 여호와가 말씀하신다는 말이 반복 강조된다. ((7,9,13,15) 그리고 언약의 하나님의 언약문구인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반복된다. (9,13,15) 또한 언약백성의 호칭인 ‘내백성’(7,8)을 반복하며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이제 여호와께서 시온에 돌아오셨다는 것이다. (3) 시온에 돌아오셨다는 것은 다윗언약의 회복이다. 하여 ‘이제는’ (11,13,15) 14절의 ‘전에‘와 대조를 이루면서 이제부터 주실 은혜와 축복을 강조한다. 너희를 회복시킬 것이며(12-13) 은혜를 베풀 것이다.(15). 너희가 할 일은 여호와를 찾는 것이다.(21,22) 즉 예배의 회복이다. 그리고 헤세드를 베풀며 사는 것이다.

 

9장,메시야예언

 

환상(1-6장)이 과거적이었다면 말씀(7-8장)은 현재적이고 예언은 미래적이다. 이제 메시야의 오심을 예언하신다. 이미 8:22-23절은 예고편으로 메시야의 종말론을 선포하고 있다. 1절-8절은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경고를 (1)듣지 않는 그들에 대한 심판이 진행된다. 그러나 언약백성들은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그리고 장차올 메시야를 통해서 이루어가는 하나님나라를 보여주신다.

 

메시야의 오심(9-10)은 기쁜 소식이다. 메시야의 특징은 이방과 달리(6:교만) 겸손이다. 나귀는 겸손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하여 메시야는 나귀타고 오실 것이다. 그것도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언약의 장소인 예루살렘의 입성은 다윗언약의 성취로서의 메시야이다.

 

10절 그는 평화의 왕이시다. 10절은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이며 9절은 다윗언약의 성취를 보여준다. 또한 11절은 시내산 언약의 성취를 나타낸다. 너희의 구원과 회복은  피로 맺은 언약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사실을 통해 이방을 심판하시고 언약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미래적 시각을 통해 메시야의 오심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3장,선한목자로 오시는 메시야

 

7절‘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대표적 메시야예언으로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인용하셨다.(막14:27,마26:31) ‘내 목자 내 짝 된 자‘는 메시야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종말론적으로 말씀하셨다. 8-9절은 70년 예루살렘 멸망을 연상시킨다. 또한 예언의 이중적 구조대로 계시록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날에 ’내 백성’들이 최후 승리자가 될 것이다.

                       12. 말라기

 

 

 

포로이후 부터 언약체결식에서 제의적요소는 사라지고 말씀 운동,회개운동,성령운동으로 점차 바꿔지는 것을 보게 된다. 포로이후 선지자들은 메시야 득망사상을 더 강하게 예언했고 메시야예언은 구체화되었으며 이제 메시야의 오심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말라기는 시간적으로 구약의 마지막이면서 구약의 결산,그리고 신약의 서론이라 할 수 있겠다.

 

말라기의 활동시기는 느혜미야의 활동시기의 마지막과 겹쳐진다. 느혜미야는 445-443년 ,12년동안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고 종교개혁을 시행하다가 아닥사스다왕의 명령으로 페르사로 돌아간다. 1:8절의 총독은 느혜미야가 아니다.

 

말라기의 사역은 포로 후에도 언약을 지키지 않는 백성들에게 신앙의 기본인 십일조를 언급하며 시작한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예물이 아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을 무시하는 처사인 것이다. 결국 예배는 형식적이 되었고 외식적 행위가 만연되었다. 따라서 안식일도 지키지 않았으며 이방결혼이 심지어 대제사장에게도 이루어진다.

 

 

말라기의 신학

 

1.예배의 회복

 

예배의 부실은 레위인에게 있었다. 포로이후 레위인은 귀환하지 않았고 세상으로 나갔다. 물론 지파공동체의 붕괴와 지파의식의 약화로 더 이상 레위인들의 봉사와 희생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는 총체적 예배에의 부실로 이어졌고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위협이 되었다. 하여 하나님은 예배는 레위인들과의 언약이라고 말씀하신다.(2:4) 레위인들은 이 언약을 지켜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언약을 파기했다.(2:8) 그러므로 예배의 회복은 레위인의 회복이 선행되어야한다. 이제 장차 레위자손을 깨끗게 할 여호와의 사자가 임할 것이다. (3:3)

그는 세례요한이다.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킬 여호와의 사자이며 그는 레위인으로 온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성전에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전은 더렵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요한은 광야에서(에센파) 훈련받고 회개를 외치며 세례를 주며 메시야의 오심을 예비함으로 진정한 예배의 길을 열었다. 누가는 복음서 서두에 말라기의 예언의 성취로 세례요한을 선포한다.( 말4:5-6,눅1:17) 그러므로 말라기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한다하겠다.

 

2.영원한 사랑,영원한 언약

 

말라기의 짧은 본문속에 ‘여호와가 말씀하셨다’는 표현을 무려 25회나 사용함으로 언약의 하나님은 여전히 너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여호와,언약의 하나님’을 21번 반복한다. 또 ‘만군의 여호와’를 24회 사용하며 또 다른 언약적 표현들로 가득 차있다. 말라기 전체 55절 중에 47절을 ‘나’라는 일인칭을 사용하며 하나님과 우리와의 언약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백성들의 질문에 언약파기에 대한 여호와의 징계라는 답변으로 말라기는 시작된다. 여호와의 이름을 멸시했고(1:6),제사장들은 잘못 가르쳤고(2:7-8),언약을 욕되게 했고(2:10),언약의 상징인 결혼언약파기(2:13-16),여호와의 것을 훔치고(3:8-9)등 총체적 언약파기였다. 하여 신명기의 언약적 저주(27개)가 계속 선포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복케하시는 하나님, 영원한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내용

 

1장,언약적사랑

 

2절의 사랑은 언약적 관계에서의 사랑이다. 야곱의 호칭도 언약백성을 가르킨다.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신 언약적 관계에서의 사랑인 것이다. 그리고 이후 이스라엘과 언약적 관계를 수사학적 표현으로 설명하시고 있다.

 

2장.성실하지 못한 이스라엘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이다. 10절 언약을 욕되게 하였다.

 

3장,언약을 지켜라

 

17절의 ‘나의 특별한 소유‘(세굴라,출19:5,신26:18)는 시내산 언약과 모압언약의 골자이다. 너희가 언약을 지키면 세굴라로 삼겠다는 것이다.

 

 

 

 

 

 

 

 

 

 

레포트

 

1.호세아서의 역사적 배경을 써보시오.

A4로 2장

 

2.에스겔서와 스가랴를 비교 요약해보세요.

A4로 1장

 

문제

 

1.다음 중 동시대 인물이 아닌 선지자는(3)

1)요나

2)아모스

3)스바냐

4)호세아

 

2.다음 중 이스라엘 선지자는(1)

1)호세아

2)하박국

3)미가

 

3.제사장의 사명이 아닌 것은(3)

1)중보기도

2)제사

3)저주

4)가르침

4.다음중 틀린 것은(3)

1)예레미야를 통한 말씀의 내면변화

2)에스겔을 통한 성령으로의 변화

3)아모스를 통한 유다의 심판

3)요엘을 통한 성령의 오심

 

5.이스라엘 왕들의 멸망기사 중 틀린 것은(1)

1)여로보암1세 -스가랴-살룸

2)스가랴-살룸-므나헴

3)므나헴-브가히야-베가

 

6.마르제하흐는 어디에 나오나요(1)

1)아모스

2)호세아

3)미가

 

7.에돔의 멸망원인이 아닌 것은(3)

1)지형학적 교만

2)물질교만

3)야곱의 자손이라는 선민의식

 

8.요나에 대한 것 중 틀린 것은 (1)

1)요나는 유니버설 사상을 가졌다.

2)요나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식이 결여되었다.

3)요나는 민족주의 자였다.

 

9.나훔과 관계없는 것(3)

1)세상의 주인은 누구인가

2)앗수르심판

3)바벨론 심판

 

10.말라기와 관계없는 것은(2)

1)성전 건축후 80여년이 지났다.

2)그들의 신앙은 뜨거웠다.

3)하나님은 어디계시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