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예레미야서해석(언약적,구속사적해석

예레미야서 해석(언약적,구속사적해석)

호리홀리 2016. 4. 5. 13:32

 

                                        예레미야서 해석(언약적,구속사적해석)


                                                                                                           박인대교수


예레미야가 살던 배경은 앗수르의 멸망과 신흥 바벨론의 등장 그리고 애굽 사이에 낀 약소국 유다였다. 요시야가 죽고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이 605년 왕이 되었다. 이후 598년 예루살렘공격,여호야김의 죽음,여호야긴의 1차 포로,그리고 시드기야에 의한 멸망으로 숨가쁘게 진행된다. 결국 586년 유다가 망하고 남겨진 자들은 총독 그다랴를 죽이고 모두 애굽으로 내려간다.(역출애굽)


유다의 소망이었던 요시야왕 13년(627년) 요시야의 종교개혁(622)이 시작되기 전 예레미야의 사역이 시작된다. 요시아의 개혁은 역사상 가장 위대하며 산당 전체를 철폐 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직 백성들의 마음을 파고들지 못하였다. 예레미야의 사역은 바로 이때 시작된다. 예레미야서에는 언어유희와 행위메세지가 특히 강조되고 있다.


1장-25장(전반부):예레미야의 애통

언약백성들이 언약을 파기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이 직접 때리시며 유다를 망하게 하시는 슬픔이다. 마지막은 바벨론에 끌려간 여호야긴과 백성들에 대한 권면과 소망이 나온다


26-52(후반부):역사적 사건에서의 예언

여호야김의 즉위 초부터 유다의 멸망 이후까지 기록된다. 마지막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애굽으로 떠나는 백성들을 향한 심판이다. 예레미야가 슬픈 이유는 유다의 멸망과 함께 애굽으로 끌려 내려가야하는 슬픔이다.

이사야는 아직 포로가 안된 가운데 예언했고 에스겔은 바벨론으로 끌려갔지만 안정된 상황에서 기록되었다. 그러나 예레미야서는 불태워지고(36)다시 기록되고, 훼손,불에 탐,파괴, 속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서에 나타난 신학

철저하게 시내산,모압언약(신명기 전체)의 패턴을 따르고 있다.

1.심판의 선언

대부분의 내용이 정죄와 심판의 언약적저주이다. 소망의 멧세지는 30-33장 뿐이다.  언약적저주의 근본은 “내 백성이(언약백성) 두 가지 악을 행하였는데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언약의 하나님을 버린 것과 다른 웅덩이 즉 우상 숭배한 것이다.  이 죄는 용서가 불가능하다.(17;1)


외로운 선지자 예레미야는 애굽과 손잡고 바벨론과 대항하자는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바벨론에 복종하고 포로로 잡힌 자들은 70년을 기다리라는 친 바벨론주의는 그들이 보기에는 민족의 반역자였다. 그래서 감옥에 가두고 죽이려고 모함하고 실행했던 것이다. 마지막에는 애굽에 내려가지 말라는 예언을 거부하고 예레미야를 강제로 애굽으로 끌고가는 것은 신명기의 언약적저주를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44-46장)

2.소망의 선포(새언약)

언약적 소망은 조건적 소망과 무조건적 소망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예레미야서에는 무조건적 소망이 강조된다. 즉 회개를 요구하지 않는 소망이다. 70년이 미리 결정된 것도 그와 같다. 유다의 멸망은 회개와 관계없이 필연이다. 그리고 남은 자를 통해서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30-33)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새 언약이다.(31:31-34) 그러나 기존 언약체결식은 돌을 세웠으나 이제 마음에 새길 것이라는 것이다. 영원한 언약이기에 하나님은 다시 시작하신다. 이것은 이사야서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연결되며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과도 일치한다. 징계 후에 다시 시작하시는 하나님은 영원한 언약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내용


1장,소명


예레미야는 아나돗출신의 제사장이었다. 아나돗은 솔로몬과 아도니야의 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난 제사장들이 유배되었던 곳이다. 아도니야는 솔로몬보다 왕위계승 서열이 앞섰고 지지한 사람들도 강력했다. 군대장관 요압,대제사장 아비아달이 지지했다. 그러나 솔로몬은 선지자 나단과 제사장 사독 뿐이었다. 결국 다윗이 솔로몬을 결정하자 분위기는 반전되어 아도니야와 그의 추종세력은 피의 댓가를 치르게 된다. 아도니야는 죽었으나 아비아달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추방된 곳이 아나돗이다. 이곳으로 쫒겨온 제사장 계열은 사독계열의 다윗언약과 솔로몬 성전보다,시내산언약의 기초위에 실로와 같은 곳을 더욱 사모했다.


소외된 제사장 그룹의 대변자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던 예레미야(그러나 예레미야는 환경이나 배경을 탓한 적이 없다)는 기득권 세력의 핍박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그의 예언조차 거부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예레미야가 사역을 시작한 요시야 13년은 아직 종교개혁 전이라 므낫세 시절의 우상숭배가 편만한 시절이었으며 개혁이후에는 철저히 요시아를 도왔다. 그리고 안타깝게 요시야가 므깃도 전투에서 느고에게 죽었을 때 요시야의 죽음을 슬퍼했다.


예레미야가 평생 역동적인 사역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5절 “알았고”‘구별하였고 “ ”세웠다“ 자신의 의지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이다. 과거,현재,미래를 속속들이 아신다. 구별은 ”카도쉬“ 시내산언약의 용어이다. 예레미야는 거부한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라 말 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6) 모세도 그랬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아는 것 보다 하나님이 나를 아심을 알아야한다.

나의 관점에서 나를 보기가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보기이다.하나님은 언약문구를 사용하신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8,17,19) 또 하나는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9) 이 말씀은 네가 말하는 것이 곧 내가 말하는 것이란 뜻이다.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는 말씀은 신 18:18의 내용을 상기시킨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모세의 후계자로 자각했을 것이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 여기서 '살구나무'에 해당하는 원어는 '솨케드'로서 아몬드나 밤, 호두 등의 견과(堅果)나무를 가리킨다. 야곱이 애굽 총리가 된 요셉에게 선물로 보내는 품목 중에 이것이 포함되어 있는데 '파단행'으로 번역되었다(창43:11). 그리고 '가지'에 해당하는 '마켈'은 '막대기', '지팡이'란 뜻으로 주로 쓰인다. 이 아몬드나무는 봄이면 가장 먼저 싹을 내고 봉오리를 맺는데, 오늘날에도 아나돗 지방에는 초봄에 수많은 아몬드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네가 잘 보았도다...이루려 함이니라 - 예레미야가 본 아몬드나무에 꽃이 피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몬드나무가 봄을 가장 먼저 알리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신속하게 성취된다는 내용이다. 한편 칼빈은 '살구나무 가지'를' 파수꾼의 막대기'로 해석하면서 선지자들의 말이 공허하게 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파수꾼처럼 지켜볼 것이란 의미로 설명하고 있으며, 아담 클라크(Adam Clarke)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해 전달한 심판의 예언이 이루어지도록 깨어서 지켜볼 것이라고 해석한다.


두 번째 환상은 첫 번째 환상보다 더 침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시간적으로 다소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Thompson). '끓는 가마'란 아궁이의 불을 지펴 가열되어지고 있는 큰솥을 말한다. 재앙이 북쪽에서 나오며 그 끓는 물의 흐름이 재앙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이 끓는 가마는 유다 북방의 바벨론 군대를 상징한다고 설명한다(Clarke).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 유다 백성이 앞에서 언급된 엄청난 재앙을 당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제사하고 또 자기들 손으로 만든 것에 경배했던 것이다. 언약 파기로 인한 재난은 본서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중심 사상이다.


너는...놋 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 여기서 하나님은 군사적 상징어를 사용하여 강하고 확실한 약속을 주셨다. 예레미야의 대적들이 왕이나 고관 또는 제사장 등과 같은 기득권층일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그의 주장을 비난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강력한 지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사실 예레미야의 전사역을 살펴보면 그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지도층 인사들과 대치해야 했으며 일반 시민들조차 그를 박해했다. 심지어 아나돗 사람들은 그를 죽이려고도 하였다(11:18-23).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니리 - 영적 승리의 비결을 제시하는 구절이다(C.L.Feinberg). 곧 영적 승리는 성도들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 달린 것이다. 누구도 예레미야를 대적할 이는 없는 것이다. 우리도 이런 확신이 있어야한다. 그리고 이시대의 예레미야로 살아야한다.


2장,언약파기


네 결혼 때의 사랑은 시내산언약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언약을 받아들이며 신혼의 기쁨 속에서 충성을 맹세하였던 것이다(출24:6-8). 이스라엘에는 유월절, 장막절, 초실절 등 많은 종교 축제가 있었는데, 이는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와 언약, 이적 등을 상기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호1-3장에 언급되고 있는 호세아와 고멜 사이의 관계를 상기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관계를 상징한다.


이스라엘은...처음 열매가 되었나니 - 여기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성물(聖物)', '소산', '처음 열매' 등으로 지칭되어 있다. '성물'이란 것은 오직 거룩한 목적으로만 사용하도록 따로 구별된 것을 말한다. 그러나 현재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에 따르면, 수확의 첫 소산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께 할당되어야 했다(출23:19). 이는 모든 토지의 소산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게 하였다. 수확 중 첫 열매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의 증표인 것처럼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몫으로서 하나님께 속한 언약백성답게 살아야했다.


그를 삼키는 자면 다 벌을 받아 - 예레미야 당시 북 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 군대의 침입으로 멸망당했고(B.C. 722년), 그 백성의 대부분은 포로로 잡혀갔다. 그러나 히스기야 이후 남유다 역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었으며, 특히 기나긴 므낫세 왕 통치 기간에는 엄청난 배도(背道)를 자행했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소유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자에게는 여호와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이는 선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섭리를 깨달은 데서 비롯되었다.


허탄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 '허탄한 것'의 원어는 '헤벨'인데 원래는 '증기', '김', '숨'이란 뜻으로 쓰였다. 잠 21:6에서는 '속이는 말로 제물을 모으는 것'을 이 '헤벨'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를 '안개'로 번역하였다. 한편, 본문에서 이 말은 가나안 종교의 주신(主神)이었던 '바알'을 뜻했던 것으로 보인다(Harrison, Thompson).  본문에서 쓰이고 있는 '따라 행하다'란 말은 '어떤 군주를 봉신으로 섬기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는 이스라엘이 언약파기,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신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섬긴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법적 절차를 밟고 있다는 점을 선언한 후에(9절) 이스라엘 주변 나라 중 그 어떤 나라에도 유례가 없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한다. 즉, 고유의 민족 신으로 섬겨 왔던 신을 바꾼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이 신들은 참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일관되게 섬김을 받아 왔지만, 정반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를 버리고 살아계시며 그들의 영광이신 하나님을 '무익한 것'과 바꾸어 버린 것이다. 한편, '무익한 것'에 해당하는 원어 '벨로 요일'이란 말은 '바알'을 언어 유희로 표현한 것이다(Thompson).


네 정수리를 상하였으니 - 이는 B.C.609 애굽과의 므깃도 전투에서 요시야왕이 죽은 비참한 결과를 당하게 된 사건(왕하23:29,30; 대하35:20-24)을 암시한다.


네가 나를 떠남으로 - 유다가 여호와의 언약을 파기하고 다른 신들과 야합함으로 고난 받는다는 것이 본서 전체에 흐르는 주제이며,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는 거듭 이 점을 상기시킨다. 물론 이미 멸망한 북이스라엘의 참변도 자기 백성에게 내리는 여호와의 심판인 것이다.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 본절은 사5장의 소위 '포도원의 노래'를 연상시키는 비유이다. 여기서 '귀한 포도나무'란 예루살렘과 지중해 사이의 '와디 알-사랄'에서 자라는 극상품의 붉은 포도를 말한다(사5:2). 하나님은 좋은 종자를 선택하셨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더러운 냄새가 나는 이상한 야생 포도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잿물로...비누를 쓸지라도 - 유다의 범죄에 대한 세번째 비유가 제시되고 있다. 그들의 죄악은 어떠한 세제를 사용하더라도 지워지지 않을 만큼 그 뿌리가 아주 깊다는 내용이다




3장,돌아오라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 히브리어 원문상으로 언어 유희가 쓰였다. 그래서 이를 살려서 번역하면 '돌아선 이스라엘아 돌아서라'고 할 수 있다. 이 구절은 자기 백성이 뉘우치고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하나님의 부성애적인 사랑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내용이다. 여호와는 자비하시고 그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신다. 한편, 여기에는 사마리아에 임한 심판이 너무 심했다거나 또는 적절치 않았다는 의미는 전혀 없다. 따라서 유다가 더 악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용서받는다는 논리도 성립되지 않는다. 여기서 지적되고 있는 핵심은 유다의 오랜 죄악에도 하나님이 참고 기다렸다면,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만 하면 어떻게 용서함을 받지 못하겠는가 하는 내용이다(Thompson, Harrison, Nicholson).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듣지 아니하였음이니라 -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는 장면으로서 '듣지'에 해당하는 '솨마'는 그냥 말씀을 듣는 것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하여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지적의 배경에는 순종하면 축복이요, 불순종하면 저주라는 신명기적 언약관이 자리잡고 있다(신28:1,2,15). 여호와의 언약 백성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사항은 그 언약에 순종하는 것이며, 그외 다른 방식에 의해서는 언약 백성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Thompson, Harrison, Nicholson).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 '남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알'은 '주인(남편, 주)이 되다'라는 뜻으로 가나안 신 바알과 음가가 같은 동사를 사용한 언어 유희인 바, 하나님만이 참된 보호자가 되실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나는'( 아노키)이란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강조하고 있다. 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신부로 삼아주신 것이다(2:2; 호2:2).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주리니 - 회복 시대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가 언급되고 있다. 즉 다윗처럼(삼상13:14) 여호와의 마음에 합하는 통치자가 여호와의 뜻에 따라 백성을 통치하게 될 것이다(23:1-6; 겔34:23; 37:24). 한편 예레미야는 여태까지 심판을 선포하다가 여기서는 은혜 장면으로 넘어간다. 어쩌면 하나님의 심판을 엄숙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이러한 은혜로운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 인기를 누리던 낙관적 선지자들은 심판 예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랬기 때문에 심판 이후에 도래할 은혜 역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심판이란 없었고 오직 '값싼 은혜'만 있을 뿐이었다(27:16; 28:2-4).


회복시대의 그림이 이제 더욱 확대되고 있다. 이는 두 가지 면에서 묘사되고 있는데 첫째는, 주의 백성이 '이 땅에서 번성하는 것'이요, 둘째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도 생각지도 만들지도 아니한다는 것'이다. 이 예언은 1차적으로 포로 귀환 후의 상황에 관한 내용으로 보기도 하지만, 예언의 복합 성취라는 관점 및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근거로 볼 때 메시야 시대의 상황에 관한 언급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1) 구원받은 남은 자의 증가와 번영은 메시야 시대의 특징으로 묘사되는 사항이다(23:3 참조). (2) 언약궤는 이스라엘 종교의 최고 상징이었던 바 그것이 필요없게 된다는 것은, 옛 신앙의 청산과 새로운 예배(요4:23)의 시대가 열림을 암시한다. 언약궤는 B.C.586년 예루살렘 함락 당시 소실되었거나 바벨론으로 탈취되어 갔을 것인데, 52:17-23의 전리품 목록에서 빠진 것으로 보아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5장,한 생명이라도


'공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쉬파트'이며 '진리'는 '에무나'인데, 이 두 용어는 구약의 주요 사상인 '의'( 체다카)와 '사랑'( 헤세드)과 함께 연결되어 여호와의 언약 사상을 구성하는 주요한 용어들이다. 즉, 선지자는 이를 통해서 여호와와의 언약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만악의 뿌리가 바로 이 언약을 배반한데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는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의인을 한 사람이라도 찾게 되면, 심판을 면케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 조건이었던 의인 열 사람보다 훨씬 더 쉬운 것이었다(창18:22-32).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지라도 -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는 것은 어떤 약속이나 의무에 대해 여호와를 그러한 약증의 증인 또는 보증인으로 불러낸다는 뜻을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맺은 약속이나 의무를 파기할 경우는 여호와의 심판을 자청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예레미야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맹세가 남용되었으며, 또한 거짓 맹세의 표상이 되고 말았다.


사자...이리...표범 - 본절에서는 유다 백성이 언약을 파기하고 마치 황소가 주인의 멍에를 부순 것과 같이 달아난 행위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황소가 자기 주인의 멍에를 꺾고 달아났지만,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수풀에서 나온 사자나 또는 사막의 이리, 또는 그 주위를 배회하는 표범의 공격을 당하고 만다. 하나님을 버린 유다 백성의 운명은 바로 이런 것이다.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용맹성과 난폭함에 있어서는 영락없이 사자와 같았으며, 탐욕과 욕심에 있어서는 이리와 같았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그의 재빠른 활약상에 있어서는 표범과 같았다(Thompson, Clarke).


여호와는 계신 것이 아닌즉...보지 아니할 것이며 - 백성들은 여호와의 언약을 어겨도 아무런 처벌이 없을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 근복적 이유는 여호와의 존재마저 인정하지 않는데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본질상 그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거부하는 인생의 추악한 모습을 다시금 보게 된다(롬1:28). 결국 그들은 여호와로부터 오는 칼이나 기근의 심판이 없을 것으로 보았다. 우리는 이런 그들의 말을 근거로 해서 그들이 자기 도취에 빠져 있었음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백성들은 언약 파기로 인한 저주 조항이 가동되어 그들에게 심판이 닥칠 것이란 점을 새까맣게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지자들은 바람이라 - 백성들은 선지자들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바람처럼 공허한 것으로 여기고, 그 대신 거짓 선지자들의 감언 이설(甘言利說)을 좇아 갔다는 내용이다. '바람'의 히브리어 '루아흐'는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는 점에서 저자의 언어 유희(Wordplay)를 보여준다. 즉,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을 바람으로 간주하는 중죄를 범했다는 것이다(C.L. Feinberg).


6장,나팔소리를 들어라


8절까지는 북방의 적이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시이다. 베냐민 지파는 예레미야가 소속해 있는 지파이며 그의 고향 아나돗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4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적의 침략이 임박함에 따라, 선지자는 경고의 나팔을 울릴 것을 촉구하면서 무장하고 침략자들을 맞아 싸우라고 말한다. 그리고 베냐민 자손들이 호명된 것은 예루살렘이 베냐민 지파의 영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드고아는 아모스의 고향으로서 베들레헴에서 남쪽으로 약 9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벧학게렘은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에 이르는 도상에 위치해 있었는데, 여기서는 봉화불을 올리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7장,실로를 보라


실로에 가서...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 -  '실로'는 엘리 제사장 당시 여호와의 성소가 있던 곳으로서 그 당시 백성들은 이곳 실로를 중심으로 해서 여호와께 제사하였다(삼상1-4장). 그러나 이 실로는 B.C.1,050년에 불레셋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곳은 에브라임 지파의 영역에 속해 있었으며 벧엘과 세겜 사이에 있었다(삿21:19). 하나님의 법궤는 무려 백년 이상이나 이곳에 있었으며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법궤를 빼앗겼다가 다시 반환받은 이후 다시는 실로로 돌아오지 않았다. 유다 사람들은 이 실로 사건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 역시 예외가 되지않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어야 하는 것이다.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냄 같이 - '실로의 파멸'이라는 분명한 예화와 마찬가지로 예레미야의 경고를 뒷받침하는 명백한 사건이 북이스라엘이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간 것이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었지만, 죄악으로 인한 결과는 상상도 할수 없었던 비극이었다. 열 지파도 아낌없이 멸망시켰는데 숫적으로 훨씬 더 열등한 유다가 과연 어떻게 그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을 피할 수 있었겠는가?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 16절에서부터 20절까지는 유다 백성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가증스러운 우상 숭배를 지적하고 있다. 이 말씀은 다른 장에서도 여러번 나타나는데(11:14; 14:11), 세 번이나 반복되어 강조적 의미를 전달해준다. 이제 회개의 가능성을 전혀 찾을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고집스럽게 지속되는 우상 숭배에 대한 처방책은 언약의 저주 조항을 가동시키는 것뿐이었다.


머리털을 베어 버리고...호곡(呼哭)할지어다 - 29절에서부터 34절까지는 한놈의 골짜기에서 자행되었던 극악 무도한 더러운 행위에 대한 심판이라는 측면에서, 이러한 죄상에 대해서는 본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호곡해야 마땅한 것이다. 머리털을 베어버리는 것은 슬픔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미가 선지자는 유다에 임할 심판에 대해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미1:16)라고 선포하였다. 한편 '머리털'에 해당하는 '네제르'는 '화관', '왕관', '면류관'이란 뜻도 있는데, 이는 머리카락이 면류관으로 여겨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나실인의 머리 카락에 비교해서 살펴보면, 나실인은 여호와께 헌신하였음을 나타내는 표로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으며, 이들이 머리털을 베어버리는 것은 헌신을 포기하였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그 당시 유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미이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 성전의 악행 이외에 또 다른 더러운 행위들이 지적되고 있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란 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들은 거기에 '도벳'이란 사당을 건축하였다. 이 '도벳'이란 이름은 '태우는곳'을 의미하는 아람어에서 유래된 것 같다. 이곳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쳐 태워 죽인 바가 있는데, 아하스와 므낫세 통치 기간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왕하16:3; 17:31). 이처럼 인간을 제물로 바쳐 태우는 끔찍한 관행은 몰렉 신에 대한 제사와 관련이 있는 절차였다(레18:21; 20:2-5; 왕하23:10).


8장,언약적저주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 그들이 스스로 지혜 있다고 주장하며 또한 여호와의 율법이 그들과 함께 있다고 주장한 근거는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종교 의식을 치루었다는 것이다. 아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경고에 대한 반론으로서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그들이 내세우는 '여호와의 율법'이란 것은 분명히 '기록된 율법' 즉 성전에서 발견된 바 있는 언약의 책 또는 신명기서와 같은 책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은 행위와 실천보다는 기록된 책 그자체에 무슨 마력과 같은 힘이 있다는 미신에 젖어 있었던 듯하다. 


서기관이란 말이 나오는데, 구약 성경에서 서기관이 어떤 직책을 맡은 특정 계층으로 언급되는 곳은 이 부분이 처음이다. 대상 2:55에 따르면, 서기관들의 조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하 34:13에 따르면, 그들의 활동은 요시야 통치 때에 대단히 두드러졌던 것 같다. 아마 그 이전에도 그들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율법과 역대 왕들의 사적을 기록하고 보관하는 일 및 가르치는 자로서의 소임도 맡았던 것 같다.

9장,헤세드 미쉬파트 체다카


24절,중요한 용어 세개가 쓰이고 있는데 그것은 '인애'( 헤세드), '공평'( 미쉬파트). '정직'( 체다카)이다.

이 세 단어들은 대단히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서 그 함축된 의미를 다 드러내면서 적절하게 번역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첫 번째  '인애'에 해당하는'헤세드'는 구약에서 약 245번 쓰이고 있다. 이 용어는 '진실한 사랑', '끊임없는 사랑', '충실함', '다함없는 헌신', '자비' 등으로 번역된다. 언약관계에서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공평'에 해당하는 '미쉬파트'는 의를 행하는 자를 격려하고 악을 범하는 자를 징계하는 '공의' 혹은 '정의'를 의미한다. 심판자로서 여호와는 행악자들의 활동을 제한하시고 그를 처벌하신다. 반면에 의인을 구원해 주시고 그를 위해 변호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서 압제받는 자들은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불러 그들 사이에 판단해 줄 것을 요청할 수 있었다(창16:5; 출5:21; 시26:1; 사2:4).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권리가 완전히 보장받기를 원하셨던 것이며, 이것은  '미쉬파트'를 세우고자 하심을 의미한다.


세 번째 단어인 '정직'에 해당하는 '체다카'는 흔히 '의'가 그의 백성 중에,  편만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셨다(마6:33). 한편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에 메시야께서 '미쉬파트'와 '체다카'를 가지고 다스리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사9:6).



11장,언약파기


11장부터 12:17까지는 언약의 요구조건에 충실하라는 경고의 말씀을 담고 있는 단락으로서, 연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첫 번째 견해는 느부갓네살이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을 무찌르기 얼마 전인 여호야김 시대에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고, 두 번째 견해는 B.C.622년 요시야 당시 힐기야에 의해 율법책이 발견된 후의 것으로서 종교 개혁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다(왕하 22,23장). 일반적으로는 후자의 견해가 받아들여지고 있다. 요시야의 개혁 운동에는 모세의 율법과 전통으로 돌아가라는 촉구와 함께 이교도의 제사 형식을 단호히 물리치라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대하 34장에 따르면, 율법책의 발견에 앞서 예루살렘을 정결케 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지역 산당에서는 가나안 종교 의식이 중단되었다.


'언약의 말'이란 것은 시내산에서 체결되었던 언약을 말하는 것으로서(신 5:2) 하나님은 그들의 일치된 예배와 순종의 대가로서, 민족 초기 단계에 있었던 그들에게 물질적, 영적 필요품들을 제공할 것을 약속하셨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소유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할 근거는 이러한 조건들을 수납하고 성실히 이행하는 데 있었다(신 29:9).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 백성들이 곤경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는 기도를 듣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선지자가 이제 그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백성들을 위한 기도에 대한 이 같은 금지령은 7:16;14:11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제시되었다.


유다 집의 악을 인하여 재앙을 선언하였느니라 -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심으셨던 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며, 또한 그들에게 재앙을 선포하신 이도 그분이시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구절에는 '재앙'과 '악'에 해당하는 원어가 모두 '라아'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악'이란 뜻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 일어나는 '재앙'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는, 이른바 언어 유희(wordplay)를 보여준다.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 예레미야의 고향 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그들의 죄악을 꾸짖고 또 하나님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언한다는 이유로 그의 생명을 해(害)할 음모를 꾸몄다. 하나님은 이런 음모를 비밀스러운 경고를 통해 그에게 알려주셨던 것이며, 그 결과 예레미야는 위험을 모면할 수 있었다(Clarke). 한편 제사장 아비아달의 후예들은 솔로몬시대부터 계속 아나돗에 살아왔었다(왕상2:26). 솔로몬 왕위 계승시에 아비아달은 아도니야를 지지했던 탓으로 솔로몬에 의해 추방, 낙향당했던 것이다.


나는 알지 못하였나이다 - 아나돗 사람들은 마치 그 주인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동물과 같은 행동을 하였다. 그들은 예레미야('나무')를 처치함으로써 그 입에서 선포되어지는 예언의 말씀('과실')을 단절시키고자 계획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예레미야가 화(禍)를 면하게는 되었다 하더라도 사회적, 심리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고향 마을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은 당시의 사회 배경상 크나큰 낙담에 빠지게 할 만한 것이었다.


그들이 네 생명을 취하려고 찾아 이르기를 - 그들이 이처럼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한 이유에 대해서 해리슨(Harrison)은 예레미야가 요시야의 개혁 운동에 찬동하고 나선 때문이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톰슨(Thompson)은 이보다는 예레미야가 유다의 모든 종교와 사회 생활에 대해 강하게 비난하고 나섰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본다. 아마 요시야나 예레미아의 대적들이나 일반 백성들은 모두 그 당시의 종교 생활에 어떤 위험한 요소가 있을 만큼 그렇게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과거나 현재나 할 것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실패했다고 하는 예레미야의 강도 높은 비난은 아나돗 사람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민족의 죄악을 선언한 예레미야는 그를 출생시킨 마을의 명예를 매우 손상시킨 자로 여겨졌던 것이며, 이런 사람은 마땅히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고 생각되었을 기능성이 높다 하겠다.


자기 종을 해하려는 이런 악한 음모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반응은 단호하게 주어진다. 하나님은 남는 자가 없을 정도로 철저한 살육이 임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한편 아나돗 사람들로부터의 위협은 그것으로 그치지않고 수차례나 더 계속되었다(20:1-3;38:6,13). 그러나 예레미야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도와주시리라는 확약만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한편 아나돗에 대한 심판 예언은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 당시에 성취되었다.


13장,5개 행위메세지


너는 가서 베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 여호야김의 후계자이며 아들인 여고냐(B.C. 598년)의 통치하에 전달된 말씀이다. 그는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며, 그 즈음에 갈대아인 장군들은 예루살렘 근처에 이르러서 진을 치고 있었던 것 같다.(왕하 24:8-11). 그러나 예루살렘 포위 공격은 느부갓네살이 그 주력군을 이끌고 왔을 때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선지자는 유다인들이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언했던 것이며, 썩은 띠를 허리에 두르는 상징적 행위로써 그들에게 임할 파국이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Clarke).

띠를 사서의 '띠'란 일반인들의 허리띠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특히 제사장들이 에봇 위에 두르던 띠를 가리키는 듯하다(출 28:8). 이 띠는 에봇, 흉패, 관과 함께 거룩과 영화로움을 상징했다(출 28:40-43).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사장 나라가 유다를 상징한다 하겠다.


물가에 숨겨둔 천이 썩었다는 것은 처음 숨기던 때와 그것을 찾으러 갔던 때 어간에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을 말한다. 아무튼 유브라데의 진흙이 그 '띠'를 썩게 만들었고 그래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내용은 어떤 특별한 상징을 나타낸다. 이는 유다인들의 현상황이 어떠한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들은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위치에 있음을 가리킨다. 아울러 이는 유다인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썩은 띠처럼 비참하게 연명해 가야 할 것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겠다(Clarke, Delitzsch).


유다의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 '교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게온'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교만'이나 '오만'의 뜻으로 번역할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탁월함'이란 뜻으로 번역될 수 있다. 고대 역본들중 70인역(LXX)이나 벌게이트역(Vulgate), 그리고 시리아역(Syriac Version) 등은 전자로 번역하였고, 아람어 탈굼역(Targum)은 '힘'이라고 번역하여 후자의 의미를 취하고 있다. 이 단어를 개역 성경처럼 번역할 경우에는, 하나님이 유다의 교만을 징벌하신다는 의미가 강조된다. 반면에, 이를 '힘', '영광', '탁월함' 등의 긍정적 의미로 번역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참으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으나(사 60:15) 그들은 스스로 패망을 자초하고 말았다는 의미가 강조된다(Blayney, Calvin, Horsley).


너는 왕과 왕후에게 고하기를 - 이는 여고냐와 그의 모친을 말하는 것으로서, 여고냐는 어려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모친의 섭정을 받았던 것 같다(Clarke). 그녀가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이유는, 그녀가 그의 어린아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유다의 왕후란 것이 공식적인 직책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왕후 역시 왕관을 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왕상 2:19에 의하면 왕좌 곁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 같다(Nicholson).


남방의 성읍들이 봉쇄되고 - 남방이란 원어로 '네게브'인데,  유다 남쪽의 메마른 넓은 광야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Nicholson). 원어의 원래 뜻은 '건조하다'인데, 그 위치는 가사-브엘세바에 이르는 도상에 있었고 시내 반도 고원으로 이어진다. 이곳의 성읍들은 침략자들을 피해 유입해 들어오는 피난민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차단될 것이다(R.K. Harrison). 반면에 클라크(Clarke)는 이를 유다의 남쪽까지 갈대아인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어 말 그대로 끝에서 끝까지 파괴될 것을 말한다고 보기도 한다.



14장,언약기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 예레미야는 자신을 자기 백성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대변자로 나서서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그는 민족의 과거와 현재의 잘못된 죄악을 고백하면서 구원해줄 것을 요청한다(Thompson).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이름은 종종 그 이름을 가진 이의 본질적 의미는 '당신은 하나님이시기에 그 이름에 맞도록 우리를 위하여 구원하소서'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J. Bright). 한편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실제적으로 그의 명성과 명예가 위태롭다고 생각하거나, 여호와께서 이 반역된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가하는 것이 그의 이름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시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축복 조항들이 가동되게 하셨던 것과 같이 언약 파기로 인한 저주 조항들의 가동을 허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여기서 비록 저주받아 마땅한 백성이지만 여호와의 은혜와 자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자하는 간절한 소원을 피력하고 있다 하겠다.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말라 - 7:16;11:14에 이어 중보 기도 금지 명령이 다시금 주어졌다. 백성들을 중재하는 일은 선지자들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였다(삼상 7:8). 그러나 당시 유다의 죄악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태였으므로, 이제 하나님의 징벌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12절에 가서는 그들에게 임할 재앙이 보다 상세히 설명된다.


7-9절과 13절에 이어 또다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가 나오고 있다. 22절까지 이어지는 이 기도는 아브라함과 (창 18:23-33) 모세의(출 32:11-13) 중재의 탄원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내용은 하나님의 응답이 점차 강렬해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점차 움츠러들고 있다는 점이다. 즉 '버리지 마옵소서'(9절)에서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 때문임을 참작하여 주십시오'(13절), 그리고 '버림받아 마땅하지만 주의 언약을 생각하사 용서해주십시오'(21절)라고 전개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와 세우신 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 이 '언약'은 출24:7, 8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언약을 파기한 것은 그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거절하였으며, 우상에게 자신의 몸을 바쳤던 것이다. 언약의 한 당사자가 이를 파기한 이상, 상대방은 이제 언약에 속박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이제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Clarke)


16장,행위멧세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이지만 청중들이 듣지 않을 때 하나님은 좀더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방법으로 행위메세지를 전하게 하셨다.

1.결혼하지말라(2-4)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들이 듣지 않을 때 자극적인 처방을 내리셨다. 선지자는 극단적인 명령에도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호세아에게는 음란한 아내와 결혼하게 하시지만 예레미야에게는 결혼하지 못하게 하신다. 모두가 죽게 될 텐데 결혼 할 필요가 없다. 회개를 촉구하는 행위메세지이다. 자손이 끊어진다는 것은 미래가없다. 파멸이라는 것이다. 유다의 완전한 멸망 ,회복의 불가능이다.


2.초상집에 들어가지 말라(5-7)

초상집에 가는 강장 큰 이유는 위로인데 유다에게 위로나 긍휼은 없다는 상징메세지이다.


3.잔치집에 가지말라(8-9)

이제 잔치 할 일도 없다. 기쁨은 사라진다는 상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헤세드는 포로로 끌려간 그들이 제2 출애굽할 것을 말씀하신다.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실 것이다.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제함이니라 - '평강'이란 말은 가장 폭넓은 의미를 가진 행복의 총체를 말한다. 이제까지 변함없는 헤세드를  베풀어 주셨는데 이제 그것을 거두어가실 것이다. 본절에 쓰이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세 단어인 '평강'(, 솰롬), '인자'(, 헤세드), '긍휼'(, 라하임)에는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제 이것들이 전부 몰수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남은 것은 재앙뿐이다. 이 같은 저주와 최종적인 재앙은 모두 언약 파기의 결과이다. 에스겔은 그의 아내의 사망에서 이와 비젼되는 파멸 상황을 보았다(겔 24:15-27).



18장,토기장이의 집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의문에 휩싸인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토기장이의 집으로 가라 명하신다. 당시 유다의 마을 마다 토기장이의 집이 한개 정도 있었다.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토기를 빚는 모습을 본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시고 당신의 작품을 빚으신다. 그런데 작품이 망가졌다. 하나님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신다. 경고와 소망이 동시에 보여진다.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6). 8절, 돌이키면(11) 재앙을 거두겠다. 계속되는 1인칭은 강조용법이다. 예레미야가 깨달은 것은 우리를 빚으시는 토기장이 되시는 하나님은 포로가 되는 과정을 통해서 다시 빚으시는 것이지 결코 버리는 것이 아니다.


1:5절의 지었다는 말은 “야짜르”이며 토기장이는 “요쩨르”이다. 나를 “야짜르‘하신 하나님은 ”요쩨르“이시다. 그러나 그들은 돌이키는 것을 거부한다. 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파상하듯(4), 산산조각 내신다는 뜻으로 회복 불가능을 의미한다.  이같은 언어유희는 예레미야1장부터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

여호야김 통치 기간 중 그 어느때, 아마 그의 첫 통치 삼 년 ,고대 유적지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토기 파편들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점에서 판단하건대, 토기는 많은 수요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토기들은 디자인이나 형태 면에서 시대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므로 유적지에 대한 연대를 추측케한다. 이스라엘 역사의 특정 시기 또한 이를 통해서 짐작할수 있는 것이다. 토기를 소재로 사용한 비유는 19장에도 기록되어 있다(Nicholson). 한편, 이 예화는 하나님이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피조물인 인간을 다루심을 보여준다. 인생은 마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작품을 만들어 내는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Clarke).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 4절과 7절 이하의 보다 특정적인 적용 내용에서 유추하건대, 그 당시 바퀴 위에 있던 그 특정한 진흙이라고 하는 것은 토기장이가 만들고자 의도하였던 그릇이 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분명해진다. 다시 말하자면, 진흙의 질이 좋지 않아 그가 만들고자 하는 그 그릇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진흙은 토기장이의 원래의 의도를 좌절시켜 버리고 말았으며, 다른 용도로 사용되어야 할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토기장이이신 여호와는 지기 목적에 저항하는 이 진흙을 그에 맞게 처리하실 것이다. 이처럼 여기서는 진흙에 대한 토기장이의 주권적인 능력이 초점으로 부각되며(사 64:8;룸 9:19-24), 아울러 자신이 원했던 그릇을 만들고자 하는 토기장이의 인내 또한 간과될 수 없는 사항이다(Feinberg, Harrison).


그들은 패역의 길을 너무도 멀리 걸어가 버렸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토기장이에게 소용도 없는 거칠고 뻣뻣한 진흙과 같은 것이 되어 더이상 토기장이가 의도했던 고귀한 형태로 빚어질수가 없었다. 오직 심판의 과정을 통해서만 그들은 토기장이의 손에 알맞는 진흙으로 다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온갖 악한 행위와 계속 되어온 언약 파기가 어떤 결말로 인도되고 있는가 하는 슬픈 내용을 볼 수 있어야 하겠다


19장,오지병의 비유


'오지병'이란 목이 좁고 오짓물을 발라서 구어 만든 것으로서 윤이 나는 병이다. 이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박부크'는 목이 좁은 오지병에서 물이 쏟아져 나올 때 들리는 소리에 착안한 말인 듯하다. 한편, 일단 구어진 오지병은 부분적으로 고칠 수 없기 때문에 토기장이가 마음에 들지 않게 구어진 것은 깨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유의 병이 고고학 발굴에서 나타났는데, 그것은 종류에 따라 높이가 약 10~25cm 정도되었다.


하시드 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 예레미야의 행위메세지가 진행되는 무대에 관한 언급이다. 고대 예루살렘의 하시드 문이란 곳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 위치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어쩌면 이 이름은 그 일대의 토기장이들의 작업장이 있는 데서 연유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 문 근처에다 깨어진 토기들을 내버렸을 것이다. 힌놈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쪽 아래에 가파른 지역에 있었으며, 쓰레기를 소각하는 장소로 쓰였다. 그렇다면 하시드 문 역시 예루살렘 남쪽에 있었을 것이다. 이곳은 10, 11절에 묘사되어 있는 상징적 행위를 연출하는 데는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


내가 이 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 여기서부터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시작되고 있다. 그 대상은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이다.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고하는 공개적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청중은 예레미가 데리고 간 어른들과 제사장들 뿐이었다(1절). 예레미야나 다른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직접적이고 그 실제적인 청중은 작은 그룹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민족 전체를 두고 하였던 것이 보통이었다. 복수로 언급된 '유다 왕들'이란 표현 역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레미야는 유다 통치자들을 전체적으로 보고 하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예레미야는 살아생전에 모두 네 명의 왕들이 다스리는 시대에 살았다.


바알을 위하여 불살라 드렸나니 - 이 백성은 다른 신들을 섬기고 그것들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과의 절대적 언약 관계를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겔 8장에는 에스겔이 본 환상이 묘사되고 있는데, B.C. 597년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갈 당시 유행했던 것으로 보이는 여러 형태의 이방 종교의 종교 의식이 언급되어 있다. 이 구절의 중요한 내용인 인간을 제물로 잡아 바치는 제사는 중동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특히 베니게(페니키아)와 가나안 지역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 이런 악한 풍습은 이스라엘에서는 처음부터 금지되었지만(창 22:1-19 참조), 아하스(왕하 16:3)나 므낫세(왕하 21:6) 당시에 이스라엘에서도 그런 사례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왕하 23:10에는 요시야 당시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행해졌던 인신 제사가 철폐되는 기사가 언급되어 있다. 아마도 이런 악습이 여호야김 시대에 되살아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자기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주권에 대한 거부였으며, 여호와를 정면에서 모욕하는 행위였다.언약의 주를 거부한 방자한 행위에 대한 결과는 언약의 저주 조항의 발동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Thompson).


이 곳을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는 날이 -예레미야를 따라갔던 청중들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오지병이 분명히 어떤 상징적인 행위 예언의 일부일 것으로 예측하면서 과연 그 오지병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 궁금했을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예레미야가 이 백성과 이 성의 멸망을 언급하면서 이 오지병을 깨뜨린 것은 대단히 극적인 효과를 주었을 것이다(10, 11절 참조). 한편, 이곳의 '도벳'이란 말은 '불의 장소', '불이 타오르는 곳'이란 뜻을 가진 아람어인 '테파트'나 '타파'란 말에서 유래되었던 것 같다.또한 이 '도벳'의 자음을 변경시키면, '치욕', '수치'란 뜻의 '보셋'( 보쉐트)이란 말이 된다. 아무튼 그 어원에 대해서는 명확한 해답을 제사할 수는 없다하더라도, 이는 힌놈 골짜기에 있었던 이교 사당을 지칭하는 듯 하며, 이곳이 살육의 처소로 바뀌게 된다는 사실에서 임박한 심판의 처절함이 시사되기에 족하다.


그 오지병을 깨뜨리고 - 이제 오지병을 깨뜨릴 적절한 때가 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곳의 내용을 앞의 구절들과 독립된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항아리를 깨뜨려서 어떤 질병을 쫓는다거나 또는 어떤 조약을 어긴 자들에 대한 저주를 불러온다거나 하였던 앗수르인, 헷인, 아람인들의 주술적 행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여기서는 그러한 주술적 의미는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는 이 항아리를 깨뜨리는 것이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신탁의 말씀과 똑같은 상징적 행위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선포와 같은 것으로 볼 수있겠다. 예레미야에게는 선포된 말씀과 상징화된 행위가 같이 수반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20장,제사장과 선지자


제사장은 제도권 안에 있었으므로 왕의 눈치와 백성들의 눈치도 보아야했다. 고로 자연히 타락할 소지가 많았다. 그러나 선지자는 제도권 밖에 있었으므로 보다 자유로웠다. 하여 둘은 견원지간이 될 소지가 많았다. 하나님께서는 왕의 제도를 원하는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주셨으나 왕을 견제하기 위해서 선지자제도를 시작하셨다.

제사장의 우두머리인 바스홀은 성전 수호자였다. 이제 개혁은 시작되었고 성전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바스홀은 제일 인기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기도를 받으려고 사람들은 줄을 섰고, 많은 제사장들을 관리하고 조직하며,제사를 회복하고 여러모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바스홀의 설교는 인기절정이었다. 그의 설교 주제는 늘 “샬롬”(8:11)이었다. 그는 낙관주의자였다. 걱정하지말라.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평안을 담보로 받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낙관주의, 번영주의는 위험하다. 예레미야는 참을 수 없었다. 8:10, 평강,평강,뭐가 평강이냐?  그렇다.선지자는 바로 잡아주는 것이다. 평강을 얻기위해서는 치열한 영적싸움이 있어야 한다. 고난도 이겨야한다. 뜨거운 회개와 자아성찰도 있어야한다. 무조건 평강은 마취제나 말 장난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설교하면 아무도 안 듣는다. 그러나 바스홀이 설교하면 구름떼 같이 몰려든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일부러 모여든 사람들을 쫒아 보내셨다.


바스홀에겐 예레미야가 눈에 가시였다. 심판,포로,회개를 외치는 예레미야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급기야 체포한 후 태형을 치고 착고에 채웠다. 예레미야는 거짓선지자로 낙인이 찍혔다. 성공지상주의, 축복지상주의, 샬롬지상주의는 늘 위험하다. 


우리는 이시대의 예레미야가 되어야한다. 아니 예레미야로 살아야한다.  예레미야는 세가지 고난을 받는다.

첫째는 육체적 고난이요

둘째는 영적고난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따진다. “주께서 나를 권유하셔서“(7) 권유는 꼬셔서이다.  왜 나를 조롱하십니까?  왜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되게 하십니까?(8) 그러나 예레미야는 잠시 흔들렸으나 다시 회복된다. ”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 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해서 견딜 수 없나이다.“(9)

예레미야의 세 번째 고난은 비방이다. 거짓비방, 이것은 정말 견디기 어렵다. 10절의 고소. 적들은 내가 타락하고 유혹에 빠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그러나 승리의 이유는 11절이다. “그러하오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언약문구이다. 하여 13절 ,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께 노래하고 찬양하여 영광을 돌리고 있다.

21장,소용없는 다라쉬


예레미야는 요시아의 아들들 중에 시드기야를 먼저 책망하고 있다. 연대순으로 기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마지막왕 시드기야에게 가장 큰 책임을 묻는 것이다. 시드기야는 방백 바스훌(20장의 바스훌과 다르다)과 제사장 스바냐(스바냐서 기록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 바벨론의 침공에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물었다. 왕 뿐 아니라 모든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다.

시드기야의 기대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4번 반복)기사를 행하실 것이었다. 즉 극적인 구원을 기대한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의 헛된 희망을 좌절시킨다. (3-7).여기서는 대조적으로 1인칭이 반복된다. 과거에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언약백성을 친히 공격하시는 거룩한 전사로 묘사된다. (5:든 손과 강한 팔) 살아남는 길은 오직 항복 뿐이다.


시드기야는 B.C. 588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으로부터 침략을 받자 당황하여 예레미야를 부르고 있다. 그는 본래 느부갓네살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반바벨론파의 득세로 인하여 애굽, 암몬, 두로, 모압, 시돈 등과 동맹을 맺어 바벨론에 반란을 꾀하였다(겔 17:15). 그러나 막상 상황이 다급해지자 그는 자신이 투옥시켰던(32:2) 예레미야에게 특사를 보내어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이 등장하고 있는데, 20:1-6에 언급된 임멜의 아들 바스훌과는 동명 이인이다. 이곳의 바스훌은 더욱더 악랄하게 예레미야를 반대했었으며 훗날에 가서는 예레미야를 반역죄로 처형하려고도 하였었다(38:1-13). 그 뒤에 등장하는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는 본장에서 시드기야의 특사로 예레미야에게 왔지만 훗날에도 예레미야를 찾아오게 된다.(37:3). 그는 예레미야에 대해서 그렇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29:25-27에서 예레미야를 징책하지 않았다고 비난을 받는 유사(有司)로 언급되고 있다.


여호와께 간구하라 기사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 여기서 '간구하라'(다라쉬)고 하는 말은 여호와의 생각과 뜻을 찾고자 할 때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구약에서는 이 말이 다양한 문맥에 산재해서 나타난다(창25:22;출18:15;신4:29;삼상9:9;사31:1;호10:12 등).



23장,의로운 가지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다윗 혈통의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의 모든 소망을 실현하게 될 것이란 내용을 담고 있으며, 예레미야의 직접적인 언급으로서는 드물게 나타나는 메시야에 관한 기사 중의 하나이다(Frost).그 사상은 사 11:1의 내용과 동일하다. 그리고 '의로운 가지'( 체마흐 차디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음가는 현재 왕위에 있는 시드기야란 이름과 언어 유희적 관계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레미야가 이 예언을 시드기야 통치 초기에 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있을 것이다(Bright). 그리고 '때가 이르리니'란 말은 엄숙한 선언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으로 쓰였다(Feinberg).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 메시야 사상과 관련하여 구약과 후대 랍비 문헌에는 두 가지 양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개인으로서의 메시야에 관한 가르침과 메시야시대에 관한 가르침이 그것이다. 5절에서는 메시야 개인에 관한 가르침이 주어졌고 본절에서는 메시야 시대에 관한 가르침이 주어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사 11:1-5, 6-16 참조). 예레미야는 여기서 유다가 온갖 제한과 속박에서 해방될 날이 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때가 되면 외부의 대적들이나 내적인 긴장이 그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그리고 그날에 이스라엘 모든 가족들도 이상적인 왕의 통치를 받을 것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이라 함은 이미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북이스라엘 왕국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남북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이 앞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는 이 주제는 30, 31장에서 더욱 자세히 언급된다. 한편, 본절 하반절에 언급된 이상적인 왕이 유다 역사에 등장한 일이 없기 때문에, 즉 바벨론 포로에서부터 로마인들의 예루살렘 파괴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문자적으로 기다리던 그런 메시야가 나타난 바 없으므로, 이는 주 예수께 적용될 수 밖에 없다. 그분이야말로 우리를 모든 죄와 저주로부터 해방시키는 메시야이며, 정의의 심판을 행하는 의로운 왕이시다(Clarke).


20절,  예레미야가 자기 고향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큰 박해를 받았으며 또한 그의 메시지에 대한 거부감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상기하고 넘어가야 할 것같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또 납득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내버린다는 것에 동조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Nicholson). 그러나 본절은 범죄에 따른 심판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편, 말일에( 베아하리트 하야밈)란 말은 직역하면 '종말의 때에'란 뜻으로서 메시야 시대에 관한 서술로도 쓰이나 여기서는 단순히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는 때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Bright, Feinberg).


24장,무화과 환상


1-3절에는 무화과의 환상이 나오고, 4절 이하에는 이 환상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본문의 환상은 그 내용면에서 암 8:1-3의 '여름 실과 환상'과 유사하다. 이 환상은 B.C.597년 이후에 주어진 것이다. 여고냐는 다른 곳에서는 고니야라고도 불렀으며, 또한 왕명(王名)으로는 여호야긴으로 불렀다.


성전 앞에 놓여 있는 무화과 두 광주리 중 하나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들어 있었고 다른 한 광주리에는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들어있었다. 이 광주리들이 성전 앞에 놓여 있다는 점을 중시하여, 어떤 학자들은 이를 성전 제단에 바쳐진 예물(Graf) 혹은 여호와께 드리는 수확의 맏물 등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 사실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환상에 대한 묘사인 까닭에 하나의 상징적 의미로 이해함이 나을 듯하다(Delitzsch). 그렇다면 이 무화과들은 여호와께 나아오는 유다 백성들을 상징하며, 좋은 무화과란 여호와께서 인정해주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자들로서 여기서는 포로로 잡혀가는 자들을 지칭하고 있다(5절).


4,5절,여호와께서 포로로 이미 붙잡혀 간 자들에게 자비와 은총을 베풀고자 하심을 보여주신다. 그들은 비록 죄를 범했을지라도 여호와의 자비를 구하며 회개할 것이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선한 존재들로 보신다는 것이다(Clarke). 물론 이들에게 회개하는 심령을 주시는 분도 바로 여호와시다(7절). 이제 미래는 그들에게 있다. 한편B.C. 597년에 바벨론으로 옮겨진 자들은 이 나라의 지도층이었으며, 핵심되는 인사들이었다(왕하 24:14-17). 이들은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거부하였으나, 막상 그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자 많은 이들이 뉘우치기 시작했을 것이다. 반면에 끝까지 유다땅에 남아 있던 자들은 예레미야에 대한 적대감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이 기간 곧 B.C. 597-586년 사이에 심각한 고초를 겪었기 때문이다(Thompson).


6절,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세우고', '헐고', '심고', '뽑는다'는 동사들은 1:10에 처음으로 등장하였으며 본서에서 계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다(12:14-17;31:27, 28). 이들 동사들은 심판과 회복이라는 이중적 주제의 메세지에 주로 등장하고 있으며, 예레미야의 소명 기사에서는 핵심을 가리키는 내용으로 쓰였다(1:10). 물론 대부분은 심판 선포에 할애되었으나 군데군데에 회복과 갱신의 메세지도 나타나고 있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 여호와께서는 특별한 섭리를 그들에게 베풀어 주실 것이며, 그들은 본토로 귀환하게 될 것이다. 본절 내용은 신 30:1 -10에 나타난 약속,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추방당할지라도 다시금 회개하면 새롭게 회복될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로 볼 수 있다. 또한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언약을 갱신하실 것임을 암시한다(Clarke). 또한 그들은 '전심으로'( 베칼 레브) 그에게로 돌아올 것인데, 이러한 전인적인 돌이킴은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에 의해 누차 강조된 바이다(29:13;31:33;겔 36:26,27;37:13, 14, 27 28;슥 13:9 등).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심판이란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새로운 시작이 임하고 있음을 알리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포로 중에 있던 자들과 B.C. 586년 이후의 사람들은 이런 메세지에 굉장한 격려를 받았을 것이다.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이 악하여 먹을 수 없는 - '악하여 먹을 수 없는 무화과'는 이 땅에 남아 있거나 애굽에 거주하는 자들에 비유되고 있다. 우리는 백성들이 언제 애굽으로 도망쳤는지에 관한 충분한 기록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친애굽인들은 여호아하스가 B.C. 609년 그곳으로 잡혀갔을 때 함께 건너가 그곳에 거주했을 수도 있을 것이며(왕하 23:34), 아니면 여호야김이 느부갓네살의 봉신이 되었을 때(B.C. 609년경) 또는 느부갓네살이 B.C. 597년에 유다를 침공했을 때 애굽으로 피신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기록은 애굽으로 달아났던 사실에 관한 언급이다(43, 44장).


여호와의 뜻에 따르기를 거부하고 유다 땅에 남거나 애굽으로 피신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더욱더 마음이 완악해져서 회복 불가능의 상태에 처한 가운데 파멸당하고 만다는 예언이다.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그들 중에 보내어 - 이들 중에 많은 자들은 갈대아인들과 벌이는 전쟁의 칼과 기근으로 쓰러지게 될 것이다. 먼저 포로로 잡혀 간 자들은 훗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중에 잡혀가는 이들은 먼저의 사건에서 교훈을 받고 돌이켜야 마땅하나, 오히려 전보다 더마음을 굳게 하고 완악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중에 대부분은 결코 귀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방 민족들과 뒤섞이게 되었을 것이다.

25장,예레미야의 70년


본문의 중심단어는 ‘부지런히’(3,4) 하쉬켐(동사)이다. 명사는 세켐(세겜)이다. 세겜언약으로 유명한 단어이다. 동사로 쓰일 때는 “짐을 어깨에 올리다“라는 뜻이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깨에 메고 23년을 쉬지않고 달려왔다. 역동적인 삶을 살아온 것이다. 예레미야는 새벽마다 기도했다.(애가3:18-23) ”소망이 끊어졌으나... 여호와의 헤세드(긍휼)가 아침마다 새로우니 ..“ 넘어졌으나 새벽마다 깨닫는 헤세드 때문에 23년을 달려온 것이다.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기, 그러나 가장 역동적인 삶을 살았던 예레미야의 고백을 기억하라.


여호야김 통치 제4년은 B.C. 605년으로서 구속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해이기도 하다. 이 해에 등극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을 물리치고(왕하 24:1, 7)그 여세를 몰아 유다까지 침입함으로써 유다는 바야흐로 포로로 잡혀가는 수난사를 맞기에 이르렀다(단 1:1-5). 본절에서부터 7절까지는 이러한 수난이 유다의 끝없는 불순종과 완악함으로 인해 초래되었음과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막바지에 달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8,9절, 북방 모든 족속과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 '북방 모든 민족'을 유다 멸망에 일조한 대적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1) 느부갓네살과 동맹을 맺은 민족들 (2) 바벨론 제국을 구성하는 여러 민족들 (3)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바벨론인들등이 있다 이중 문맥상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리라 본다(Feinberg). 또 느부갓네살이 '내 종'( 에베드), 즉 여호와의 종이라 지칭된 것은(27:6;43:10),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심판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음과 그가 수행해야 할 역할이 막중하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한 위함이다. 이와 유사한 예로 사 44:28;45:1에는 바사 왕 고레스를 가리켜, '나의 목자',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라고 묘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70인역(LXX)에는 느부갓네살을 가리켜 하나님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 누락되어 있는데, 아마 번역자는 이교도 왕을 가리켜 그런 영예로운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었을수도 있다. 한편 이 '종'이란 용어는 고대 근동에서는 군주와 봉신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문맥에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으며, 특히 조약 문서에서는 규범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봉신은 군주를 위해 자기 군대를 바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느부갓네살은 자신도 모르게 여호와의 봉신과 같은 역할을 수행할 자로 사용되었다 하겠다.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 '칠십 년'이라는 기간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 유다 백성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제1차 포로로 잡혀갈 때(B.C 605년)로부터 고레스의 칙령으로 귀환하던 해(B.C. 537년)까지의 기간 (2)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던 해(B.C. 586년)로부터 성전이 재건되던 해(B.C. 516년)까지의 기간 (3) 느부갓네살의 통치가 시작되던 때(B.C. 605년)로부터 바벨론이 점령당한 때(B.C. 539년)까지의 기간. 첫 번째의 경우는 바벨론에게 유다가 종속된 기간을 의미하는 역사적 측면에서, 그리고 두 번째는 성전을 중심으로 한 구속사적 관점에서 각각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고 세 번째 견해는 12절과의 문맥적 지지를 받는다.



28장,거짓선지자와 참선지자


하나냐는 예레미야가 사용했던 비유를 사용하여 예레미야의 예언과 반대되는 예언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B.C. 597년에 포로로 잡혀갔던 자들을 고국으로 속히 돌려보내실 것이며 또한 바벨론인들에 의해 빼앗겼던 성전 기구들을 복속시켜 주실 것이라고 하였다(3, 4절). 하나냐는 여기서보는 바와 같이 27장에 언급되어 있는 거짓 선지자들의 표본이 되고 있는 것이다(Nicholson).


여호와로부터 임한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하나냐의 예언 내용은 두 해가 되기 전에 바벨론의 멍에가 꺾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유적 표현은 예레미야가 그때까지 계속해서 걸고 있었던 그 멍에에서 힌트를 얻었을 것이다. 하나냐는 그 결과 성전의 신성한 기구들과 물건들이 포로들과 함께 다시 복귀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포로로 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간 왕 여고니야가 곧 돌아올 것이라고 하는 희망사항은 그 당시 백성들 중에 일부가 아직도 그를 합법적인 통치자로 여기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참고로 바벨론 성문에서 발견된 문헌 중 바벨론의 기름 수납 영수증을 보면 여호야긴이 유다의 왕으로 언급되고 있다(Thompson). 한편, 하나냐는 두해가 차기 전이라고 말했는데 바벨론이 멸망되기는 커녕 두 해가 되기 전에 하나냐 자신이 죽게 될 것이다(17절).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 하나냐의 거짓 신탁에 대한 예레미야의 이같은 반응과 응답이 단순히 빈정거리고 풍자적인 것이었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예레미야는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자로서 하나냐의 예언 내용대로 되기를 진정으로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예언이 사실이 아니란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한편 '하옵소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사'는 '준비하다', '시행하더', '성취하다' 등의 뜻을 내포하는 바, 애초부터 작정된 계획을 따라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심을 의미한다.


나와 너 이전 선지자들이...예언하였느니라 - 선지자 하나냐와 선지자 예레미야가 맞서고 있는 이 당시에는 참선지자가 누구이고 또 거짓 선지자가 누구인지를 알기가 힘들었다. 두사람 모두 여호와의 이름을 빌어 말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말만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일 만한 가시적인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외형상으로는 이 둘 중에 누가 참선지자인지 식별해낼 방법이 없다 하더라도, 더 깊이 내려가서 살펴보면 그들 사이에는 분명하고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한사람은 여호와의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에 민감한 반응을 느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하나님의 뜻을 곡해했다. 그리고 한 사람은 이 백성의 거룩하고 겸손한 순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명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선민으로서의 특권만 내세우고 그 특권이 왜 있는가 하는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였다. 이런 엄청난 잘못은 소위 경건하고 믿음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범하여 왔던 비극이었다. 그들은 바로 이 하나냐와 같이 자신들의 신앙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혼동해 버리곤 하였다. 진정한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참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런 행동이 예레미야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성이다(Nicholson). 한편 예레미야 이전의 선지자들이라고 함은 요엘, 아모스, 호세아, 미가, 스바냐, 나훔, 하박국 등의 선지자들을 들 수 있을 것이며, 이들의 메시지는 대부분 이 부패한 민족에 대한 회개의 촉구와 심판 선언에 관한 것이었다(Clarke).


선지자 하나냐가...멍에를 취하여 꺾고 - 하나냐는 여태까지 예레미야의 예언을 말로써 반박하고 있었으나 이제와서는 예레미야의 목에 있는 멍에를 벗겨내고 그것을 꺾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서 반박하고 나섰다. 즉 하나냐의 행위는 단지 예레미야 예언에 대한 모독과 멸시의 표현이었다기보다는 예레미야와 정반대되는 예언과 또 정반대되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서 예레미야의 예언을 무력하게 만들려고 하였던 것이다(Clarke,Nicholson).


내가 두 해가 차기 전에...꺾어 버리리라 - 25:11, 29:10에는 70년간 유다가 바벨론의 지배하에 있게 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냐는 이를 정면으로 공박하기 위해 자신도 2년이라는 구체적인 기간까지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는그 예언의 성취를 가만히 기다리지 않고 백성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거칠게 행동하였다. 어쨌든 그의 예언은 그 당시로서는 반바벨론 동맹과 반역을 꾀하고 있었던 자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냐의 대립된 예언에 대한 예레미야의 반응은 없었으며, 그냥 침묵 속에서 자기 길을 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민족이 바벨론인들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임을 다시 선언하러 돌아온다. 바벨론으로부터의 종속이 고통스럽고 힘들 것이라는 내용이 이제는 보다 더 강조되어 표현된다. 즉 여태까지는 나무로 된 멍에를 상징으로 사용했으나 그것이 이제는 쇠로된 멍에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Nicholson). 하나냐가 나무 멍에를 꺾은 사건 이후 오래지 않아 여호와께로부터 응답이 왔다. 참선지자는 몽상가나 공상가가 아니다. 그는 재치가 넘치는 정치평론가도 아니며, 더군다나 자신 스스로의 생각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아닌 것이다. 그의 말은 여호와로부터 주어진 것이었으며 전에 그가 전했던 것과 내용이 다른 그 어떤 것이 아니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사용되는 어휘가 더 강경해졌다는 것뿐이다. 하나냐가 나무로 된 상징적 기구를 꺾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꺾여지지 않는 쇠 멍에가 주어진 것이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공박하고자 했던 하나냐의 상징적인 행동은 더 강한 멍에의 등장이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Bright).



29장,70년이 차면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와 의도가 무엇인지가 언급되고 있다. 바벨론에서의 70년이란 기간이 차게 되면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한편, 근동의 패자로 급부상하였던 바벨론 제국의 권세가 불과 70년만에 몰락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본절의 예언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잘 믿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70년이라는 기간에 대해서는 굳이 엄밀하게 계수할 필요까지는 없을 듯하다(25:11 주석 참조). 니느웨의 멸망이 B.C. 612년에 일어났고 이때로부터 바벨론 권세가 시작된 것으로 한다면 바벨론 멸망이 B.C. 539년이기 때문에 그 기간은 73년간이 된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의 즉위하던 때(B.C. 605년)로부터 바벨론 멸망 때까지 66년간이란 기간이 된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 여기서 '전심으로'( 베칼레바브켐)라는 말은 '네 마음을 다하여'란 뜻으로서 감정적인 면보다는 의지적인 측면에 더 강조점이 주어져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돌아오게 하리라 - 13절에 제시된 약속이 여기서도 계속되고 있다. 즉 언약의 축복이 유용하게 될 것이란 내용으로서 신 30:3-5에 언급된 약속의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Delitzsch).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회복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지켜져야 할 선결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순종이다. 여호와를 거부하고 그의 언약을 저버리는 자들에게 아무런 조건도 없이 저절로 허용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B.C. 597년 이후에 유다에 남아 있던 자들은 여호와께서 자기 종을 통하여서 말씀하셨던 것을 염두에 두고 그들의 행위를 고쳤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끊임없이 그들을 설득하고 재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된 고집에서 돌이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심판은 불가피했던것이다(Thompson).


31장,새언약


새 언약이 무엇인가? 시내산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 백성들(32).“헤렘”(진멸)되어 마땅하나 하나님의 헤세드는 다시 시작하신다. 이것이 새 언약의 시작이다. 새 언약은 새로운 언약의 내용이 아니다. 33절, 시내산언약을 그대로 가져온다. 언약의 연속성, 그리고 영원한 언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가 무었인가? 기록판이다. 시내산 언약에서는 돌판에 새겼으나 새 언약은 마음판에 새기는 것이다. 고로 파기 할 수 없는 언약이란 것이다. 그리고 언약체결식을 한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33)의 언약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새 언약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며 일방적인 것이다. 또 하나, 새 언약에서 나타나는 것은 죄의 용서이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34)라는 일방적 선언을 하신다. 금강석 철필로 기록 된 그들의 죄(17:1)가 사해지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 여기서 '길표'란 돌무더기를 가리킨다. 이러한 돌무더기들은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분명하게 지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바벨론으로 가는 길에 이처럼 길표를 만들어 둠으로써 그것을 보고 다시 돌아오라는 것이다(Clarke). 이는 오랜 포로 생활로 인해 실의와 좌절에 빠진 자들에게 귀환의 확신을 심어주는 메시지였다.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 이는 본서 전체에서도 가장 난해한 구절에 속하며 (1)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예언한 것이다(Jerome). (2) '처녀 이스라엘'이 주께 돌아올 것을 가리킨다(Hyatt). (3) 전쟁시에 여인들이 대적들을 무찔러버릴 수 있을 정도로, 이스라엘이 평화와 안정을 구가하게 되리라는 말이다(Cundall).(4) 이제까지는 주께서 이스라엘(여인)을 사랑으로 안으셨으나, 새 날이 이르면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설 것이라는 의미이다(Jenson). (5) 이스라엘이 강력한 힘을 자랑했던 이방 열국들을 제압하게 된다는 의미이다(Ironside). (6) 이스라엘이 바벨론을 능가하는 힘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Calvin). 이러한 제 견해들 중 어느 하나를 단정적으로 선택하기는 힘들다. 다만 우리는 본절 내용이 여호와께서 창조하신 '새 일'이 하는 점에 근거하여, 믿기 어려울 정도의 놀라운 역사를 가리킨다는 정도를 알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비록 짧은 내용이긴 하지만 본절로부터 34절까지는 본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해당되며 구약 전체에서도 가장 심오한 부분에 해당된다. 훗날 쿰란(Qumran) 공동체는 여기에 근거해서 자신들을 새 언약의 사람들로 이해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새 언약은 강력한 율법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서 모세 언약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분명 본문은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성취된 예수 그리스도의 피언약에 대한 예언이라 할수 있다(눅 22:20;고전 11:25;히 8:8-9:28).


이 언약은...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 새 언약의 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으로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여호와 간에 시작된 언약이 제시되고 있다(출19:1-24:11). 언약의 계속적인 존속 여부는 여호와를 “주”로 인정하느냐 하는 문제, 곧 언약에 규정된 조항과 약속에 대한 계속적인 순종 문제에 달려 있었다(11:1-8). 이러한 율법에 순종하지 못하면 심판과 언약에 명시된 언약적저주라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반면에 순종은 언약적축복을 가져왔다. 그러나 모세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언약 규정 조항에 순종하는 데 언제나 실패했었음을 보여준다. 여호와께서 강력한 구원의 능력으로써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 첫 번째 언약을 파기하고 말았기 때문에 이제 새로운 언약이 필요했다(Thompson, Bright).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 이제 여호와는 백성들의 내적인 성품의 변화를 주실 것이며, 그렇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순종할 수 있도록 할 것임을 선언하신다. 즉 여호와는 그들의 마음에 그의 율법을 기록할 것인 바 이는 곧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도의 삶에 전인적이고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을 암시한다(롬8:1-11). 한편 옛 언약은 돌 위, 혹은 책에 기록되었었다(출 24:7;31:18;신 4:13). 그리고 기록될 장소로서의 '마음'이란 표현은 17:1에서는 죄와 관련되어 쓰이고 있다.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 여기에는 변화가 어느 정도까지 일어날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즉 제사장이나 선지자 등이 '여호와를 알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을 정도까지 될 것이다. 이처럼 인간적 중보(仲保)가 필요없이 작은 자에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다 여호와를 알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는 사 54:13에도 나온다. 이 말은 신약의 성도가 믿음의 선배로부터 전혀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체험적으로 교제하는 것이 외부의 지시나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뜻한다. 즉 죄사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과 더불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 신령한 은혜를 체험함으로써,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Cunliffe-Jones). 한편, 여기서 '알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는 밀접한 관계에 있는 두 당사자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깊고 친밀한 인격적 앎이라는 대단히 심오한 개념을 담고 있다.


32장,위기


예레미야는 유다의 최후를 목도하고 있었다. 언약백성과 위대한 예루살렘 성, 성전이 있는 영원한 도성이 바벨론 군대에 포위되어 있었다. 적은 토성을 쌓아 올렸고 성문은 공성무기에 의해 쿵 쿵 소리를 내며 부셔지기 직전의 상황이다.  백성들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놀라운 것은 백성들이 뒷문을 통해 왕래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루는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5k 떨어진 고향 아나돗에 가려고 성문을 나서는 순간 수문장이 그를 체포했다. 명분은 적에게 항복하러 간다는 것이었다.


위대한 요시아왕의 고문이었고 당대 최고의 선지자였지만 그들은 예레미야를 함부로 대했다. 고관들은 예레미야에게 태형을 가한 후 옥에 가두었다. 시드기야 치세10년 예레미야는 10년 동안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다. 시드기야는 그때는 듣는 듯 했으나 신하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인물이었다. 하여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다 했던 예레미야였다. 외교정책도 그와 같았다. 애굽에 붙었다,바벨론에게 붙었다 하다가 바벨론이 쳐들어온 것이다.


감옥에 갇힌 예레미야를 제일 먼저 찾아온 사람은 다름아닌 시드기야였다. 시드기야는 몰래 예레미야를 만났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 했으나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왕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진흙구덩이에 던져넣었다. 예레미야는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신속히 구출하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37장:예레미야서는 비 연대순으로 기록되었다.) 환관이며,이디오피아사람 에벳멜렉이 급히 왕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리고 왕의 허락을 받았다. 그는 급히 30명을 데리고 의복창고로 달려가 밧줄과 옷을 엮어 예레미야를 끌어올렸다.


예레미야는 고독했다. 선지자들이 그러하지만 늘 외로왔다. 모두가 대적자들이었다. 그러나 진실한 친구가 있었으니 서기관 바룩이었다. 그는 끝까지 예레미야와 함께했다.

예레미야가 다시 감옥에 갇혔을 때 한 사람이 면회를 왔다. 유일한 피붙이 조카 하나멜이었다. 너무나 반가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카가 이런 요구를 했다. 내가 지금 어려우니 고향의 땅을 팔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레25)에 가장 어려울 때 가장 가까운 친척이 사주게 되어있는데 삼촌이 그 땅을 사주시오. 조카가 제 정신인가? 이미 적의 수중에 떨어진 땅을 팔겠다니?


예레미야의 멧세지는 “너희는 포로가 된다. 그러나 곧 반듯이 돌아온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지 않았느냐? 이 땅을 사십시오. 아니 사셔서 그 말씀을 증명해 보이십시오. 교활한 조카는 증인들과 수많은 구경꾼까지 끌고 온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예레미야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반응을 보는 것은 재미있어했다. 예레미야는 값을 치르고 증인들을 세우고 매매계약서에 서명한 후 봉인하고 바룩에게 이 문서를 토기에 담아 보관하라, 지금은 적의 수중에 떨어졌으나 반듯이  돌아오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질 것이다. 


28절부터 매절마다 1인칭이 강조된다. 예레미야의 확신은 네 말이 내 말처럼 되리라는 말씀 같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이 행위 멧세지를 통하여 예레미야의 멧세지는 더욱 강력하게 선포되어진 것이다.


33장,위로와 회복


'회복과 위로의 메시지'(30-33장)의 결론부에 해당하며, 최대의 민족적 위기를 맞은 유다 백성에게 다시 한번 소망의 빛을 확신시키고자 하는 내용이다.


내게 부르짖으라...응답하겠고 - 이는 미래의 모든 일을 주관하며 계시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뿐이므로, 그분께 간절히 매어달려야 함을 상기시킨다. 특히 '부르짖으라'의 히브리어 '카라'는 '절규하다'는 의미로서, 심한 갈증속에서 물을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던 삼손의 모습이나 자식의 잉태를 위해 간구하던 한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삿 15:18;삼상 1:10-16).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 15절과 16절은 23:5, 6의 내용과 유사하다. 여기서 '의로운 가지'란 다양하게 번역되기도 하나 분명히 정의롭고 바르게 다스릴 이상적인 왕을 가리키고 있다. 이는 '싹'(사 4:2), '순'(슥 6:12), '뜨인 돌'(단2:34), '머릿돌'(벧전 2:7) 등으로 묘사되기도 하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가리킨다. 메시야의 통치가 도래하면 유다는 구속함을 입을 것이고 예루살렘은 안전하게 거할 것이다(Thompson).



34장,언약체결식


바벨론 제국 내의 여러 속국에서 온 원정군들이 예루살렘 공격에 가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종주국 왕이 봉신 국가들로부터 온 파견대를 거느리고 진군하고 있는 모습이다. 봉신국이 군대를 지원하여 그 종주국의 원정을 돕는 것은 종주국과 봉신국 간의 조약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성읍'이란 예루살렘 주위의 성읍을 말한다(Bright). 예루살렘과 그 주변의 성읍들에 대한 공격은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을 것이다. 유다 군대는 수세에 몰려 튼튼한 성벽이 있는 성읍들로 후퇴하여 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성읍들은 하나씩 침략자들의 공격에 무너졌으며, 마침내 철벽 같은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던 예루살렘만 남았던 것이다(Thompson).


모든 백성과 언약하고 자유를 선언한 후에 - 시드기야가 백성과 더불어 맺은 언약의 내용은 9, 10절에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이 언약을 맺은 이유에 대해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견해로 갈린다. (1) 계속되는 적군의 침공 위협으로 인해 성 밖에서 자유롭게 생산 활동에 참여할 수 없게 되어, 가난한 자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거나 노예로 전락하는 사례가 빈발하였따. 이런 상황에서 바벨론의 공격 이전에 노예 해방을 통해 그 주인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했다는 견해. (2) 본문의 언약은 일종의 개혁조치의 일환으로서, 이를 통해 하나니의 은총을 받고자 했다는 견해. (3) 노예를 해방시켜 전투에 참여케 하고자 했다는 견해. 이중 두번째와 세 번째 견해가 비교적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너희 형제...칠 년 만에 너희는 각기 놓으라 - 형제 히브리 사람이 팔려서 6년 동안 섬겼으면 7년이 되는 해에는 그를 놓아주어 자유로운 사람이 되게 하라는 명령은 출 21:2-6;신 15:12-18에 명시되어 있다. 출애굽기의 내용은 일반적인 언급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여자 노비에 대한 사항은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신 15장의 내용은 각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노예 해방이 제 7년으로 명시된 것은 그것이 7년 주기의 마지막이고 또 안식년에 해당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율법에는 제 7년에 농부들은 밭을 갈거나 밭에서 나는 산물을 수확하지 말도록 규정되었다(출 23:10, 11;레 25:3-7, Thompson). 그리고 본절의 '칠 년 만에'란 말의 문자적 번역은 '매 칠 년 끝에'인데, 실제로는 '만 육 년끝'을 말한다. 따라서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칠 년째가 되는 때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네게 팔렸거든'( 이마케르 레카)은 '그 자신을 너희에게 팔지 않을 수 없었던' 또는 '팔려지지 않을 수 없었던'으로도 번역된다. 그들이 팔려햐 했던 이유는 빚 때문이었다(Bright).


각기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하되 - 그 당시 백성들은 일시적이나마 회개하고 여호와께 수납될 수 있는 행위를 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노예 해방을 선언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노예 해방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 곧 성전에서 행하여졌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를 모독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한 언약이 곧 파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포위 공격에서 일시적으로 풀려나자 금방 태도를 바꾸어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힘으로써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는 죄악을(출20:7) 범했던 것이다.


자유케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삼았도다 - 어떤 주석가들은 B.C. 622년 요시야 당시에 있었던 언약 갱신(왕하 23:1-3)이나 또는 느헤미야 당시에 있었던 그것(느9:38)과 같은 그런 보다 일반적인 언약 갱신 의식이 노예 해방 선언과 함께 치러졌을지도 모른다고 설명한다(Nicholson). 시드기야와 그의 백성들은 여호와를 섬기고 또 그의 율법에 순종하기로 맹세하였으며, 그 율법에는 안식년에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언약 갱신의 외형상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이스라엘의 해방을 상징할 수도 있는 이런 노예 해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 문맥에는 이에 대한 암시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Thompson). 어쨌든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언약을 맺음으로써 여호와를 증인으로 내세웠으며, 여호와가 증인으로 참석한 그 언약이 파기됨으로 해서 여호와의 이름이 더럽혀졌으며 여호와의 율법은 철저히 무시당했다(Clarke).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즉 - 여호와의 이름이 먹칠된 이 시점에서 이제 여호와는 그들에게 칼을 내리실 것이다. 여호와는 칼과 염병과 기근의 '자유'를 내려 그들을 멸하실 것이다(Clarke). 그들이 노예 해방을 다시 번복하였기 때문에 이제 여호와는 그들을 보호하여야 할 의무에서 그들을 해방할 것이다. 그들이 이제 불순종과 반역으로 인해 여호와의 보호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칼과 염병과 기근으로 넘겨질 것이다. 언약을 파기함으로 해서 그들은 그 언약의 저주 조항을 스스로 불러들이게 되었다. 다음절에서부터는 언약 의식에 대한 흥미있는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다.


송아지를 둘에 쪼개고 그 두 사이로 지나서 - 송아지를 둘로 갈라서 그 사이로 지나는 언약 의식은 창 15:10, 17에 나타나는데 이 의식의 의미는 언약 당사자들에게 언약 파기시의 저주를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즉, 둘로 갈라진 이 짐승의 운명이 언약을 어긴 자에게 임하게 될 것이란 의미였다.


쪼갠 송아지 사이로... - 쪼갠 송아지 의식에 대해서 클라크(Clarke)가 다섯 가지로 요약해서 설명하고 있다. (1) 희생의 제물로 쓰이고 있는 송아지는 하나님께 바쳐졌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동의와 지지를 확보하였다. (2)희생물은 척추뼈를 세로로 절단시켜서 코에서부터 엉덩이까지 정확히 양분되게 하였고, 그리고 양편에 갈라져서 놓여야 했다. (3) 양분된 그것은 서로 마주보이도록 놓여야 했으며 그 사이로 지나가게 했다. (4) 언약에 참여한 양 당사자는 한쪽 끝에서 그사이로 지나가서 그 가운데서 만나며 그리고 거기서 언약을 맺고 만약 언약을 어기게될 경우 희생물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저주 의식을 거행한다. (5) 마지막으로 양 당사자는 희생물을 먹으면서 잔치를 벌인다. 하나님은 (4)의 경우를 근거로 해서, 20절에서 언약을 어긴 이들 유다 백성들의 시체들로 하여금 공중의 새들과 땅 짐승의 밥이 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35장,레갑족속의 순종


  35장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조법으로 강조된다.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는 말씀이 1절과 12절에 나오고 있다. 앞의 부분은 말씀에 순종하는 레갑족속에게 뒤의 말씀은 불순종하는 백성들에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상반된 명령이 떨어진다. 레갑족속에게는 말씀을 어기라는 주문과 함께 성전 방에 들어가서 레갑족속의 조상인 요나답의 명령을 어기고 포도주를 마시게 했고 반면에 유다백성들에게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경고와 권고, 즉 말씀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레갑자손은 요나답의 명령에 순종했고 백성들은 듣지 않았다. 이 극명한 대조를 통해 유다백성들은 더 이상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레갑족속이 누구인가? 때는 여호야김 3년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가 땅에 떨어진 때, 시원한 한 줄기 소낙비와 같이 우리를 시원케하는 사건이다. 예루살렘 함락과 함께 1차 포로 직전의 상황이 펼쳐진다.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이 예루살렘에 들려왔다.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은 갑자기 피난민들로 북적거렸다.  그런데 어느날 이상한 사람들이 거리에 나타났다. 그들은 레갑족속이라 불리웠다.  그들은 일정한 곳에 집을 짓지 않고 여기저기 천막생활을 하며 살았다. 그들은 마차,전차,금속무기를 만드는 장인들이었다. 그들은 자유롭게 다니며 도시의 외곽에 캠프를 설치하곤했다. 비뚤어진 마차바퀴,무기를 수리하거나 주문하는 일들이 그들이 오기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들은 많지 않지만 똘똘 뭉쳐살았다.


레갑족속의 조상은 미디안족속이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 ,즉 겐 족속이다. 그들은 귀화하여 언약백성이 되었고 야베스와 같은 인물은 서기관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드보라와 싸웠던 시스라의 전차부대를 기억하시는가? 그 시스라의 이마에 쇠를 박아버린 여인 “야엘”도 겐 족속이다. (삿5:24) 그들의 후손 중에 레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후손들에게 절대 술을 먹지말라고 가르쳤다. 후손들은 신실하게 이 명령을 지켜왔다.


이 독특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나타나자 마자 온 예루살렘에 소문이 퍼졌다. 예레미야는 이들을 성전의 방으로 초청하여 포도주를 내어 놓았다. 그 방은 탁트인 공개된 방으로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방이었다. 탁자위에는 포도주와 잔이 놓였을 뿐이다. 레갑족속도 이 위대한 선지자 예레미야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터라 기쁜 마음으로 이 초대에 응했다. 예레미야가 히브리 말로 외쳤다.“르차임”(건배)! 그들은 과연 “르차임” 할 것인가?


포도주를 먹는 것이 그렇게 죄가 되는 것일까? 예수님도 가나의 혼인찬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들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습니다.  우리 조상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너희는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시대의 조류를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절제되고 훈련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제 예레미야는 주위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말한다. 이들은 조상의 명령을 생명같이 여기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이 본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다. 이들은 조상의 명령을 지키려하는데 너희는 내가 직접 말하고 거듭 말하고 있으나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언약을 지켜라”15,16,17 듣지 않는 자는 포로로 끌려가고 18,19 레갑족속은 영원하니라.


37장,예레미야의 투옥


유다의 멸망 직전 시드기야 9-11년(588-586), 느브갓네살은 여호야긴을 폐위시키고 꼭두각시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어리석고 줏대없는 시드기야는 고관들의 압력에 굴복해서 바벨론에게 반기를 들게 된다. 바벨론은 즉시 군대를 동원해 유다를 공격했으나 애굽의 개입으로 인해 군사를 잠시 물린다.(37:11) 그러나 곧 예루살렘은 다시 포위를 당하고 예레미야는 친 바벨론인사라는 이유로 투옥된다. 유다는 멸망하고 느브갓네살은 그다랴를 유다총독으로 임명한다.(39:14)


시드기야는 신하들을 예레미야에게 보내어 기도를 요청한다(3). 이것은 그의 두 번째 기도요청이다. 처음은 21:1-10,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였다. 지금은 588년 여름(5)이다. 이때 자유케했던 노예들을 다시 종으로 삼는 언약파기가 일어난다. (34:8).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요청한 이유는 701년에 있었던 이사야의 기도로 산헤립의 군대 18만 5천을 물리친 사건을  기대하는 것이다. 더구나 애굽이 유다를 돕기위해 군대를 보냈다는 소문이 바벨론을 잠시 물러가게 했으니 시드기야는 기대를 갖고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예언은 단호했다. 바벨론은 다시 올 것이다.그리고 예루살렘은 불살라진다.(10)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참 선지자로 믿고 있었다. 하여 다시 묻는다. 여호와께 받은 말씀이 있느냐?(17) 예레미야는 항복을 권유한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신하들에게 눌려 우유부단한다.


38장,예레미야의 수난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선포한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2-3) 방백들은 예레미야를 다시 투옥한다. 그리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매국적 발언에 대해 예레미야를 처형할 것을 청한다. (4)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호의적이었으나 더 이상 그를 보호 할 수 없게 된다. (5)  하여 예레미야는 구덩이에 던져지게 된다. 물이 말라버린 진흒구덩이에 빠진 예레미야는 점점 수렁에 빠져들게 된다. 죽게 된 예레미야, 그때 이디오피아 출신 환관 에벳멜렉이 왕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린다. 왕은 즉시  예레미야를 끌어올리게 하고 극적으로 살게된다.


시드기야는 다시 예레미야와 비밀히 면담한다. 시드기야는 악한 왕은 아니었으나 예레미야에 대해 이중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신하들의 압력을 뿌리칠 힘이 그에겐 없었다. 예레미야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임을 밖힌다.(1:10) 주사위는 던져졌으나 시드기야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음을 예레미야는 강조한다. 여호와의 목소리를 들으면 살리라는 것을 여러번 강조한다.


39장,예루살렘의 멸망


586년 유다의 멸망(52:4-16,왕하25:1-12). 이것은 예레미야의 예언의 성취인 것을 강조한다. 예루살렘은 불타고 성전은 약탈을 당했다. 시드기야는 탈출을 시도했으나 잡혀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간다. (9).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고 (34:2-3의 예언의 성취) ,소유가 없는 백성들을 그 땅에 남겨 포도원과 농토를 돌보게 했다(10). 이제 유다는 사라지고 바벨론의 한 지방으로 전락한 것이다. 유다는 망했으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약속이 예레미야에게 의해 선포된다.(18) . 


이방인 에벳멜렉은 예레미야를 믿고 하나님을 신뢰한다. 그러나 언약백성들은 언약을 파기하고 불순종함으로 멸망하는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유다 왕 시드기야와...그들을 보고 도망하되 - 어쩌면 성문을 통하지 않고도 성밖으로 빠져나가는 비밀통로나 지하통로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들키지도 않고 성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며, 또한 성에서 상당히 멀리까지 달아날 수있었다(Clarke).


아라바로 갔더니 - '아라바'란 요르단 계곡을 망라하는 지역을 가르키는데, 사해 남쪽에까지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리고 지역인 요르단 계곡을 가리키는것으로 쓰였다(Thompson). 클라크(Clarke)는 이를 광야길로 번역한다. 아무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에 이르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감람산을 넘어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산을 넘는 것은 시간을 지체할 것이기 때문에 시드기야는 다른 길인 광야길, 다시 말해서 아라바를 택했던 것이다. 아마도 시드기야는 요르단을 건너 애굽으로 도망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맛 땅 립나에 있는...느부갓네살에게로 - '립나'는 팔레스틴 지역 북쪽 변방에 위치해 있었으며 '하맛' 역시 수리아에 속해 있던 대도시였다(창 10:18 참조,Clarke). 또한 오론테스 강변에 있었는데, 가데스 남쪽의 수리아 고도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 도시는 애굽과 메소포타미아를 직통으로 연결시켜주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느부갓네살은 수리아의 심장부인 립나의 사령부에 머물러 있고 그의 군장은 유다에서 전쟁을 수행했었다. 포로들은 느부갓네살에게 심판을 받기 위해 압송되었다(Thompson).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그들에게 주었더라 - 여호야긴 당시의 예루살렘 함락때와 같이(왕하 24:10-14),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사로 잡아서 바벨론으로 끌고 갔는데, 특히 유력한 인사들이나 재능있는 장인들을 잡아갔다. 반면에 빈민들은 유다의 땅을 할당받아 포도원이나 농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는 바벨론의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Feinberg).


40장,유다의 미래


시위대장의 입을 통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곳에 이 재앙을 선포하시더니 여호와께서 그 말씀하신대로 행하셨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이니라”(2-3). 언약파기로 멸망한 것을 설명하고 있다.  시위대장은 예레미야가 원하면 바벨론으로 초대할 것이라는 제안을 한다. 또한 어디든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 땅에 남아 백성들과 함께 있겠다한다.


총독 그다랴는 예루살렘의 유력한 정치인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아히감은 예레미야에게 우호적이었다.(26:24) 그는 바벨론의 신임도 얻고 백성들에게도 실용주의 정책을 펴서 흩어졌던 백성들이 미스바롤 돌아왔다. 그러나 자객 이스마엘(왕족의 후손:41:1)에게 살해된다.


3개월 통치로 끝난 그다랴를 이어 이스마엘은 미스바에 있는 왕의 딸들과 모든 백성들을 인질로 삼아 암몬으로 향했다.(41:10) 요하난은 군사를 이끌고 이스마엘을 추격해 싸운다. 이스마엘은 암몬으로 도주하고 백성들은 요하난을 선택하여 돌아온다.(14) 요하난은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워 애굽으로 향하게 된다.


42장,남은자들의 불순종


애굽으로 향하던 그들이 잠시 베들레헴 근처에 도착했을 때 백성들은 모두 예레미야에게 나아와 그들의 갈길과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는 남아있는 모든자“라는 표현을 쓰고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할 것을 서약한다.(5-6) 예레미야의 대답은 그들이 애굽으로 가지 않고 유다에 머무르는 것이다. 애굽으로의 도피(역 출애굽)에 대해 언약적 저주가 선포된다. (13-18)


43장,역출애굽


요하난과 소수의 교만한 이들은 거부한다. 오히려 예레미야에게 거짓말한다라고 공격한다. 결국 그들은 애굽으로 내려갔고 예레미야도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 함께한다. (3-7)   예레미야는 또 한번의 행위멧세지를 전한다. 큰 돌들을 벽돌 밑 진흙에 감추고 느브갓네살은  이 돌 위에 화려한 큰 장막을 치게 된다는 것이다. 전에 썩은 허리띠(13장),깨진 오지병(19장),줄과 멍에(27:2)는 즉각 예레미야가 행동으로 보여 주었으나 여기의 숨긴 진흙은 나중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이다.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된다. 586년 느브갓네살은 애굽을 침공하고 애굽은 항복한다.

애굽으로 달아난 자들의 수효가 어느정도 되는지는 여기서 분명히 암시되고 있지않다.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 이 땅에 남아 있던 유다인들의 수는 상당히 많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다랴와 함께 미스바에 집결되지 않았던 사람들의 숫자도 상당하였다. 그렇다면, 이곳의 '남은 자'란 표현은 베들레헴으로 도피했었던 특정한 무리일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트랜스요르단 지역에 피난해 있다가 최근에 유다로 돌아온 자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40:11, 12). 또한 미스바 일원에 거주하던 모든 유다인들이 이 애굽행 대열에 동참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포로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할 즈음에는 유다 지역에 상당수의 유다인들이 이미 살고 있었다. 한편,본문에서 나타나는 이 무리는 중요한 인물군을 암시하고 있는데, 그들을 구성하고 있는 인물을 보면 군대 지도자들, 왕의 딸들이나 예레미야 또는 바룩과 같은.영향력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예레미야와 바룩이 이들 난민들 무리에 포함된 경위는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전후 문맥을 살펴 보았을 때 예레미야 선지자가 자발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스스로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32:6-15 ; 40:1-6 ; 42:13-18 참조).


큰 돌들을 가져다가...벽돌 깔린 곳에 진흙으로 감추고 - 본절의 '바로의 집'이란 바로의 왕궁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국경 도시인 이곳 다바네스에 왕궁이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곳은 바로가 이 도시를 방문할 때 숙소로 사용했던 별궁과 같은 곳으로 볼 수 있겠다. 엘레파틴 파피루스에는 애굽 남쪽 국경에 있던 왕궁에 대한 언급이 있다(Bright). 이 부분의 설교, 또는 상징적 행위는 예루살렘 파괴 이후 약 1년 정도 지난 때에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리들은 갈대아인들을 두려워해서 유다에 머물지 못하고 이곳으로 건너왔지만, 예레미야는 느부갓네살이 그의 정복지를 애굽에까지 확장할 것이며, 이 '큰 돌'이 놓이는 곳에 느부갓네살의 군막이 설치될 것임을 상징적 행위를 통해서 보여 주었다. 44장 끝부분에 가면 이 예언들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밝혀 줄 것이다(Clarke). 아무튼 예레미야는 이곳에 와서도 유다에서 행했던 것과 같은 그런 상징적 행위로써 호소하였다. 그것은 예언의 메시지와 동일한 능력이 있었으며 성취되고야 말것이다. 이 상징적 행위가 보여주는 의미는 분명하다. 이 '큰 돌'은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정복했다는 증표로써 세우게 될 그의 보좌의 주춧돌을 상징하는 것이다.


44장, 돌이키지않는 백성들



15절에서 19절까지는 예레미야의 심판 선언에 대한 애굽 이주민들의 항변이 기록되어 있으며, 다른 선지서에서 찾아보기 힘든 본서의 특징을 보여준다. 즉 본서는 선지자의 메시지를 선포했을 때 나타난 백성들의 반응을 사실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그들의 영적 상태를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다. 곁에 섰던 모든 여인에 관한 언급은 우상 숭배에 있어 여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암시한다(Feinberg, Streane). 그리고 모든 백성의 큰 무리라는 표현은 애굽으로 내려간 자들의 대부분이 우상 숭배에 빠졌음을 나타낸다. 어쩌면 그들은 예루살렘 함락을 여호와의 무능(無能)의 소치로 여기고 새로운 신(神)을 찾아 동분서주하였을지도 모른다.


다시는 내 이름을 일컬어서...하는 자가 없게 되리라 - 혹자는 본절을 애굽에 도피한 자들 전원을 멸절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Bewer). 그러나 14, 28절 등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 재앙에서도 살아 남은 자가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하나님은 그들로부터 언약 백성의 특권을 빼앗아가실 것을 선언한다(Strea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