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Hermeneutics

Hermeneutics

호리홀리 2015. 12. 7. 12:24

 

 

 

   

               Hermeneutics

                           석의 방법론

                                                                 박인대교수


1강,석의란 무엇인가                                     


Hermeneutics는 έρμηνεύειν(έρμηνεύω 현재능동 부정사)에서 온 말이고 Exegesisέξηγεισθαι(έξηγεόμαι의 현재부정사)에서 온 말이다.

Hermeneutics는 έρμηνεύειν의 어간을 딴 것이고 Exegesis는 έξηγεισθαι의 어간을 딴 것이다.


        έρμηνεύειν                     έξηγεισθαι

        Hermeneu tics                  Exeges is


이 둘은 사전을 찾아보면 뜻은 같지만 동의어가 아니다. Hermeneutics는 해석에 필요한 방법을 만들어 내는 학문을 말한다. 그러나 Exegesis는 Hermeneutics가 만든 방법을 사용해서 성경을 풀이하는 학문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말의 석의는 Exegesis로 정의한다.


주석이나 주해는 단어와 문장을 해석하는 것이지만 석의는 사건 전체에 대한 해석을 하는 것이다. 눅24:35절에는 έζηγέομαι(엑세게오마이)로 기록되었다.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엑세게오마이’는 영어로 ‘Exegesis’로 바뀌었다. 헬라어 사전을 보면 'tell' 'relate' 'explain'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눅24:35절을 해석하면 두 사람은 단순히 전달한 것이 아니라 보고들은 모든 사건을 증거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누가의 기록에는 여러번 나오고 있다. 특히 사도행전 15:12,14절에도 나온다. 12절에는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έξηγουμένων)을 듣더니’ 여기서도 표적과 기사를 본 그대로 증거하는 것이다. 14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έξηγησατο)로 나온다.21:19절에도 ’바울이 하나님이 하신일을 ......낱낱이 고하니“ 증거한 것이다. 단순한 전달이나 자기 생각을 말한 것이 아님을 알수 있다. 그러므로 석의는 단어나 문장이 아닌 사건 전체를 사명을 가지고 증거하는 것이다.


석의를 할때

첫째 하나님의 관점에서 관찰해야한다.

둘째는 사건의 구경꾼이 아닌 당사자로 사건 속에 들어가서 보아야한다. 

셋째는 증거자로 올바로 증거해야하는 사명자로 전해야한다.


성경을 보는 관점 세가지   Bible is word of God

                             become

                              contain

우리는 축자 영감설과 성경무오류설을 믿는 확고한 신앙에서 성경을 석의하고자한다. 또한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게하는 방법으로 석의 하려고한다. 히브리의식구조를 이해함으로 성경이 거의 대부분 네러티브로 되어있슴으로 그 속에서 말씀하시려는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성경을 석의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본문은 맛소라 성경이다(히브리어성경) 다음은 사마리아 오경,그 다음은 70인역 그 다음은 벌게이트역등이 되겠다.


1.본문평가(비평)(Textual Criticism)


성경을 석의함에 있어서 먼저 본문비평을 살펴보아야한다. 비평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있으면 평가나 연구로 바꾸면 좋겠다. 원본이 없기에 사본을 통하여 원본을 찾는 것이다. 본문의 길이가 늘어난 경우,필사자가 주석을 단 경우등을 권위있는 사본부터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다음 본문을 놓고 배경과 의미를 찾는 것이다.이것은 석의를 함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것이다.


2.문서비평(Literary Criticism) /자료비평(Source Criticism)


계몽주의 시대부터 성경을 이성적으로 비평하며 읽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Jean Astruc(1684-1766)의 ‘창세기연구‘에서 처음제기된 것은 하나님의 호칭이다. 창세기 에 나타나는 여러 호칭들은 다른 문서의 조합이라고 주장했고 이것이 문서설로 계속 발전되었다. 여호와로 나오는 것은 J문서,엘로힘은 P문서,로 분류했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다른 문서의 조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평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수도 있다는 전제하에 비평하는 것이다. 1장은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하여 ‘엘로힘’을 쓰고 있고 2장은 언약의 하나님을 강조하기위하여 ‘여호와’를 사용하고 있으며 ‘아도나이’는 하나님의 호칭에 대한 별칭으로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이다. 우리의 입장은 모세의 오경저작을 믿는다. 현재 보수적이고 개혁적인 입장인 예일대교수인 B.S.Childs(2007년 별세)의 ’성서신학의 위기‘  ’구약정경 개론‘을 참조하라.

한국의 문*석교수는 신34:5-6을 가르켜 모세의 신명기저작설을 부인한다. 그러면 여호수아서도 같은 방식을 보여주고있는데 (수24:29-33) 여호수아가 기록자가 아니란 말인가?

신명기의 기록주체자는모세이다.(1:16,18;3:21;29:5)명확한것은 31:9,24-26절에 분명히 모세의 기록이라 나와있다. 예수님도 모세의 기록이라고 하셨는데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자서전에 부록으로 붙여서 저자의 죽음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흔히있는 경우이다. 신명기의 뒷부분은 여호수아라고 보는 것이다.


3.양식비평(Form Criticism)


말 그대로 form을 비평하는 것이다. 내용,문체,서법,어조,인칭,시제등과 구조인 서론,본론,결론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양식 비평학자들이 장르부터 설화,케르그마 등 성경의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기에 처음부터 틀린 것이다. 장르가 달라지면 역사적 사실도,목적,의도,적용 모두가 틀려지는 것이다.


4.수사학적비평(Rhetorical Criticism)


아리스토테레스나 플라톤의 수사학으로 시작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이란 말이나 글로서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라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성경이 기록되었고 그런 관점으로 보아야한다는 것이다.  폰라드는 족장시대는 역사성이 없다고 했다. 신학적 케리그마라는 것이다. G 라이트는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은 가현설이라 비판했다.

  수사학적 비평자들은  본문을 자세히 살핌으로 성경이 마치 예술작품같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기록자의 의도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2강,본문탐구


2강에서는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석의를 시도하고자한다. 본문평가가 우선되어야한다.


역사적 분석


라브리공동체를 시작한  금세기 최고의 복음주의자였던 Francis Schaeffer 는 “생명의 물“(요7:1-39)에 대한 설교에서 역사적 설명으로 시작한다.

 

초막절은 유대인들이 출애굽이후에 광야를 건널 때 한동안 살았었던 것을 기억나게 하기위하여 하나님께서 매년 이 기간 동안 초막에서 살도록 그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후 수십세기를 거쳐서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은 이 절기를 지켜왔습니다.광야 생활동안 하나님은 두 번이나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하셨으며 이것을 기년하는 초막절 절기 끝날 곧 “큰날”에 하나님의 광야에서 물을 예비하신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백성들 앞에 큰 물을 쏟아 붓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이 마지막의식을 기다렸고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물이 쏟아지면 초막절절기는 끝나는 것입니다.

석의의 기본은 역사적분석이다. 역사적분석은 기록자,청중,연대,원인,결과 문화 사회적,시대적배경을 포함한다.

쉐이퍼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예수께서 둘러선 모든 청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때 였다고 말한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8) 전체설교가 초막절을 역사적 배경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역사적배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수박 겉핥기의 해석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문학적분석


문학적분석은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체로 세 단계의 분석이 필요하다.

첫째는 the canonical(경전적배경):성경 자체에서의 그 본문의 위치이다.

둘째는 the remote(간접적 배경):단락들,장,또는 그 성경,혹은 성경전체까지도 포함된다.

셋째는 the immediate(직접적배경):본문의 바로 앞뒤에 나오는 절이나 단락이다.

  Haddon W. Robinson(보스톤에 위치한 성경신학의 요람지인 고든콘웰 신학교의 설교학 교수이며 강해 설교의 대가이다.) 은 120개가 넘는 신학교의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Biblical Preaching"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적 설교는 한절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 아닌 주어진 전체의 주제를 설교해야한다. 중심주제에서 벗어난 해석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주제를 찾기위해서는 역사적,문법적,문학적인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성경전체의 주제인 헤세드와 구속사)

그는 말한다. 설교의 권위는 성경의 올바른 해석에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는 미국 복음주의신학협회회장을 지냈으며 (1983),성경무오협회 회원이다.

로빈슨은 네러티브설교를 강조한다. 성경은 네러티브로 구성되었으니 그 형식을 따라 설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대지를 나누는 방법이 아닌 기록자가 인물과 사건을 통해서 전달하려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첫째는 구체적인 묘사, 둘째는 정확한 원리이다. 정확한 원리를 발견하지 못하면 자신이 생각한대로 혹은 자의적 해석의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는 1인칭 네러티브설교의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라. 사울에게 쫒기는 다윗의 묘사

둘째:1인칭 네러티브이다. 설교자가 성경의 인물속에 들어가 그의 모습을

셋째:귀납적설교이다. 청중에게 일방적전달이 아닌 대화형식의 설교이다. 과거의 설교는 설교자의 결론을 설교하는 것이라면 지금은 청중으로 하여금 함께 결과를 찾으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귀납적 설교방식은 청중의 경험을 설교에 응용함으로 본문과 청중사이에 다리를 놓는 효과를 제공한다.

넷째:설교자의 경험이다. 그럴때 청중은 자신의 이야기로 듣고 본문에 쉽게 마음을 열수 있는 것이다. 그가 늘 하는 말은 “말씀을 깊이 연구하십시오 영혼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십시오”

성경 한 구절을 뽑아 설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하는 것은 공산주의도 모든 이단도 성경의 구절들을 근거로 하고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는 그리고 네러티브속에서 하나님의 말씀하시려고하는 것들을 마치 보물찾기하듯이 탐구하는 정신이 필요하다.


1.본문분석


본문에 ( )로 되어 있는 부분에 대한 분석, 사본과 역본의 비교 분석은 기초적인 것이다. 기록자의 오류는 인정해야하기에 사본을 통해 원본과 가장 가까운 것을 찾는 것이다.


2.사전적분석


예를 들면 תירב,דסה,מרה의 의미를 모르고 본문을 해석할 수 없다. 헤렘은 언약적저주인데 신약에서도 갈1:8-9절에 거짓교사의 운명에 대해 άνάθεμα(저주받은)를 쓰고 있다. 신7:25-26,수6:18-26절에 적용된다. 겉으로는 언약을 지키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중심단어는 דסה(은총,은혜,자비,긍휼,인애)이다. 이 단어를 중심으로 언약,구속,공의가 진행된다는 것을 늘 의식해야한다. 왕상8:23에 דסהג תירבה 두 단어가 붙어 나오듯이 늘 헤세드라는 단어를 살펴야한다.

하나님의 호칭에서도 מירלא הוהי ינדא 에 주의 해야 하며 다윗은 특히 주 여호와를 붙여서 호칭하곤 한다.


3.구문론적 분석


  사전적 분석이 끝났으면 시제 ,숫자,수동태,능동태,인칭등을 분석해야한다.

  롬5:1,2(과거수동태)과9,10 (미래 수동태)

수1:3(완료수동태),6(미완료),8:1,7

  엡5:18절의 “충만을 받으라”(πληρουσθε)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신다.(명령법이다)

    성령충만은 반복적이다.(동사는 현재시제이다)

    우리는 성령의 영향력아래 복종시켜야한다.(동사는 수동태이다)



4.수사학적분석


직유법,은유법,병행법,교차법,반복법,강조용법,대조법등


1)반복법


주석,주해,석의,강해란 용어들이 뚜렷한 차이없이 사용되고 있으나 어법상 조금씩 차이가 난다.

주석은 한 단어, 단락을 푸는 것이다. 논문을 쓸 때 붙이는 각주의 단어의 뜻이 그러하다. 그러면서 단락을 해석하는것이다. 주해도 비슷하다. 그러나 석의란 본문 전체의 뜻을 해석하는 것이다. 강해는 주석,석의한 것을 알기쉽게 풀어놓은 것이다.


성경은 내러티브 형식으로 기록되었다. 창세기는 말할 것도 없지만, 심지어 시편 잠언 까지 거의 대부분 네러티브 형식으로 기록되었다. 성경의 기록자들은 히브리적 세계관에서 살고 있었기에 그들의 세계관을 빌어 성경은 기록되었다. 히브리적 세계관에서 말이나 글을 표현할 때 ,그 내용을 강조하려고 할때, 즐겨쓰는 것이 반복법(대구법)이다.





(1)문장(구)을 반복하는 경우


민수기9:19-23 “여호와의 명을 좆아 ”라는 말이 반복된다. 반듯이 지켜야할 명령을 강조한 것이다. 출40:19-38에는“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되니라”란 말이 반복되는 것은 반듯이 되는 명령을 강조할 때 즐겨쓰는 표현이다.


신명기16:1-21에는“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라는 말이 반복된다. 반듯이  택한 장소에서 해야지, 아무데서나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경우이다(.창1,2장의 엘로힘과 여호와),창1장의 ‘좋았더라’‘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26절의 ‘우리의’등등


(2)단어를 반복하는 경우


성경의 매장마다 강조된다고 할 정도로 단어를 반복해서 쓰고 있다. 여호와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이지만 언약의 하나님을 강조 할때 꼭 여호와라는 호칭을 쓰고 있다.

신15장은 면제년을 이야기하면서 반듯이 라는 단어를 반복하고 있다. 8,10,11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법이기에 반듯이 지켜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창17장을 우리는 흔히 족장언약이라 부는다. 언약이란 말을 여러번 강조함으로 아브라함과 분명한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삼상16장을 보면 1절 “예선”이란 말이 나온다. 택했다는 말인데 16장에서만 9번 나오고 있다. 16:7절에서는 본다는 동사와 명사가 4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이런 반복법을 이해할 때 우리는 본문을 보다 쉽게 석의 할 수 있는 것이다.(마가복음의 ‘곧’:유디스 의41회 반복)

창9장의 언약,요18장의 ‘내가 그로라‘


(3)단어의 연속반복법


히브리어에는 영어와같은 최상급이 없다. 그래서 강조할 때 두 번,혹은 세 번 사용하기도 한다.  거룩 거룩 거룩은 최고의 거룩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혹은 오직이라는 단어, 결단코,심히 혹은 히브리어 “헤렘” ( 진멸 )등 강력한 뜻이 담긴 단어들을 쓰기도 한다


(4)본문의 맨앞에 반복되는 표현


창1장6절부터 하나님이란 단어가 반복, 마5장 복있을 찐저,

그 외에 시편에서는 보다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런 것들을 미리 숙지하고 있다면 보다 정확한 석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2)대조법


인물,지명,절,구,문장,성경한권등의 대조를 눈여겨 봐야한다. 히브리적의식구조에서 자주나타나는 반복과 대조를 찾아라. (삼상3:3절과 3절의 대조:엘리와 사무엘,16:13절과14절의 다윗과 사울의 대조,왕상9:24절의 솔로몬의 ‘바로의 딸을 위하여’와 25절의 ‘여호와를 위하여’를 통하여 양다리 걸친 솔로몬을 부각시키고 있다. 왕상3장과9장의 대조,계7장과 14장의 대조,에발산과 그리심산,이스라엘과 유다등 성경의 거의 매장에서 반복과 대조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나오고 있다.


(1)단어를 대조하는 경우


삼상16:7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할때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외모와 중심이다. 육적인 사람은 늘 외모를 볼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려고 하기에 중심을 볼 것이다.


시1편의 복있는 사람과 악인의 대조,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 의인과 악인의 대조,가인과 아벨,다윗과 사울, 아브라함과 롯, 창4장과 5장의 라멕과 노아, 창10장의 니므롯과 아브라함


(2)인물을 대조하는 경우


삼상16:13과14은 다윗과 사울을 대조적 인물로 두면서  다윗은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받은 것과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신이 떠난 것을 대조하고 있다. 이렇게 두개를 대조하는 것을 교차대조법이라한다. 삼상22장의 구조를 보면 다윗과 사울,다윗과 도엑을 교차대조하고 있다. 시편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삼상2장에서도 11절과12절은 사무엘과 엘리의 아들들을 대조 시키고 있다. 17절과18절도 마찬가지이다. 엘리의 두아들은 여호와를 멸시했지만 사무엘은 여호와를 정성으로 섬겼다는 것을 대조법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아벨과 가인을 대조한다든지, 아브라함과 롯의 경우 ,창4장 가인의 족보와 셋의 족보의 대조들이다.  또한 선과악을 대조한다든지 복있을 찐저,화있을 찐저 등이다.(마5장의팔복, 복있을 찐저와 23장의 7‘화’ 화있을 찐저.요18장의 세가지 대조중에 특히 베드로와 요한의 대조를 눈여겨보라.


(3)‘장’을 대조


창세기11장과 12장의 계보 ,4장과 5장, 창세기1장과 요1장


(4)기타:장소의 대조(에발산과 그리심산,갈릴리와 사해,요단 동편과 서편)

국가의 대조(이스라엘과 유다)

환경의 대조( 벳세다와 갈릴리의 풍랑),

에브라임지파와 므낫세지파



3)인칭변화:

네레티브에서 강조 할 때 흔히 쓰는 기법으로 인칭의 변화를 통해 강조한다. 예레미야애가3장은 1인칭단수로 시작하다가 40절부터 복수로 다시 48절부터 단수로 전환된다. 언약기도를 강조하기 위해서 인칭의 변화를 사용하는 기법이다. 이는 시편에서 자주 찾아 볼 수 있다. 시121,130.잠8장,눅12:16-21등

잠8장,예레미야애가3장은 1인칭 단수로 시작했다가 40절부터 복수로 다시 48절부터 단수로 전환된다. 언약기도를 강조하기 위하여 인칭의 변화를 사용하는 대표적인 기법이다. 시편에도 자주 나오고 있다. 시121,130,눅12:16-21,왕상9장 1-5절 까지는 2인칭단수 6절에는 2인칭복수 이후 다시 단수로 나오는 인칭변화를 통한 강조. 삼하12장의 나단아 다윗에게 밧세바와의 범죄를 지적할 때 3인칭으로 시작하다가 7절에 ‘네가 그다’ 2인칭으로 바뀌며 강조한다. 이 설교를 듣는 청중들 역시 다윗의 이야기로만 듣다가 ‘네가 그다’는 나의 이야기로 듣게되는 것이다.


4)1인칭 강조용법


히브리어의 1인칭은 강조용법이다. 1인칭을 집중적으로 반복하는 것을 통해서 강조하는 경우이다. 창34:30 “나”라는 1인칭이 무려 6번이나 반복된다. 창1:26의 “우리가 ” 복수로 반복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표현이라든지. 삼상15:30절 사울의 교만을 강조할 때 “나”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시편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3편 4절에는 1인칭을 15번 강조하고 있다.시42,43,시51 참조


5)숫자를 통한 강조


성경의 완전수는 7과 12이다. 3은 하늘의 숫자, 4는 땅의 숫자  합하면 7, 곱하면 12, 완전수는 이렇게 나온다. 모든 숫자가 의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숫자를 통해 강조하려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7은 영적의미의 완전수를 강조한다면, 12는 채워지는 의미에서의 완전수라하겠다. 12지파,12제자 ,12제자중 유다가 빠졌을 때 굳이 채울 의미가 없지만 맛디아를 채운 것, 성인은 12세 ,성인 12명이 되면 회당을 세울 수 있는 정족수 ,계시록의 14만 4천의 경우,노아의 방주준비120년 등 ,엘리아의 머리를 무릎사이에 넣고 7번기도, 여리고성 마지막날 7번 돌기를 통한 여리고성 전투의 절정을 강조하는 것,바벨론 포로70년등


4,세상의 숫자에서 10이 곱해지면 고난의 수  ,400년 애굽의 종살이 ,예수님 40일 고난 ,광야 40년 ,노아홍수의 40주야 ,

성경에서 숫자를 빼면 남을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숫자는 많이 나온다 숫자의 조합을 통해서, 혹은 넣고  빼고를 통해서 의미를 강조한다.

계시록은 숫자의 의미를 모르고는 결코 해석할 수 없다. 또한 보이지 않는 숫자도 등장한다. (예 출1:7,계5:12)




8)언어유희(language play)


호세아와 고멜과의 자녀들 이름 로루하마-루하마,로암미-암미,이스르엘-이스라엘

요1:14절의 히‘세퀴네’를 헬 ‘쉐퀴나이’로, 예레미야서 1장의 살구나무와 ‘샤케드.  렘1:5절의 지었다는 ‘야짜르’를 18장의 토기장이의 ‘요쩨르’를 사용함으로 지으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렘2장의 헛된 것=바알





5.구조적 분석


  H.W.Robinson은 문장의 구조를 결정하기 위한 도구를 “기계적인 배치”(mechanical layout) 로 보았고 월터 C.카이저는 "구문론적 배열"(syntactial display)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고든 D.Fee는 “문장의 흐름 모형도”로 보았다. 여러분도 좋은 명칭이 있으면 붙여보라.


1)샌드위치 기법


샌드위치의 양쪽, 즉 빵 과 빵사이 보다 중간 내용물이 중요하듯이, 양쪽의 상황을 놓고 가운데 사건을 강조하는 기법이다(막5:22-43). 혈루병 여인의 구원얻는 장면을 강조하기 위해서 야이로의 사건을 양쪽에 배치하고 있으며 동시에 여러 대조법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를 극대화하고 있다.(막11장,왕상7:1-12:양쪽에 성전건축을 놓고 솔로몬의 왕궁건축을 강조,계20:4-6)


2)본문의 시작과 끝을 같은 단어로 강조:

시146,147,148,149,150편은 할렐루야를 처음과 나중에 놓음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3)Acrostic(답관체)


시편9,10,25,34,37,111,112,119,145.애가1장-4장


4)행위메세지


북 이스라엘의 호세아,남유다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의 경우. 언약백성들이 언약을 파기하고 우상숭배 할 때 하나님은 충격적인 요법을 쓰셨다. 그것이 행위 메세지였다. 호세아의 고멜과의 결혼,이사야의 벌거벗음,예레미야의 결혼금지와 레갑족속,조카 하나멜의 사건,에스겔의 아내의 죽음등


5)수미상관구조(시146-150편은 할렐루야가 처음과 나중에 놓음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을 극대화시킨다. 성경의 많은 부분이 수미상관구조이다)



6)줌앤 크로즈업기법:창1,2장,족보,역대상,


7)데칼코마니기법


8)언어유희(language play):

호세아1장의 자식들의 이름(로루하마-루하마,로암미-암미,이스르엘-이스라엘),요1:14(히 ‘세퀴네’를 헬라어 ‘쉐키나이’로) 렘1장의 살구나무와 ‘샤케드’(깨어라),  렘1:5절의 ‘야짜르’를 18장의 토기장이인 ‘요째르’로 사용하면서 예레미야를 지으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다.렘2장의 바알(=헛된 것)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 이는 히브리어를 아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풍자와 유머이며 언어유희이다.


벳바게는 히브리어로 ‘집’을 뜻하는 ‘베이트’(tyIBe)와 첫 무화과나무 열매를 뜻하는 ‘파게’가 합쳐진 ‘베이트 파게’이다.

베다니는 '집'을 뜻하는 ‘베이트’(tyIBe)와 무화과를 뜻하는 ‘테에나’가 합쳐진 단어로 ‘베이트-테에나’(무화과동네)가 우리말로 베다니로 번역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무화과동네에서 무화과동네로 가시며 무화과를 저주하셨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이 유머이다.


말씀을 깊이 이해하려면 성경의 원어를 어느 정도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구약성경에는 히브리어의 운율과 발음에 기초한 유머와 풍자가 종종 등장한다. 특히 시편은 히브리어의 독특한 운율을 살린 아름다운 시다.


하지만 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면 운율의 묘미가 모두 사라지고 만다. 삼손의 수수께끼도 이런 히브리어 운율에 기초한 것인데 이를 번역하면 그 속에 담긴 유머와 풍자가 사라진다.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그들이 삼일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더라.” 사사기 14:14


9)샌드위치기법:막5:22-43,신4:44-29:1,막11,눅12,왕상7:1-12,계20:4-6,눅12장,왕상11:6절이 전체의 주제인 ‘여호와의 눈’을 강조 그 양쪽에 솔로몬의 우상숭배


10)답관체(아크로스틱):시9,10,25,34,37,111,112,119,145 이는 암송하기에 편리하도록 중요한 시편을 답관체 형식으로 기록했다. 예레미야애가1-4장


6.영적해석(영해):랍비주석법


영해는 본문을 벗어난 해석이기에 주의해야한다. 그러나 성경을 이해 할 때 영해를 하지않으면 안되는 부분들이있다. 그러므로 랍비들의 오경 정통해석을 참고하여 올바른 영해를 시도해 보려고 한다.


1)Pesha(페샤)

구절을 해석할 때 단어,문법적 구조,전후관계를 살펴서 해석하는 것을 ‘페샤’라한다. ‘페샤’는 본문안에서 이루어지는 본문에 대한 해석이다.


예)엘리사의 제자들이 요단강가에서 나무를 찍고있었는데 한사람의 도끼머리가 자루에서 빠져 강물에 빠진 사건이 있었다.(왕하6:1-5) ‘파샤’의 해석은 ‘도끼 머리가 자루에서 빠져 물에 빠졌고 엘리야의 기적으로 도끼머리가 물에 다시 떠올랐다는 것’ 그 이상은 없다.


2)Derash(데라쉬)


그러나 ‘데라쉬’에 따르면 도끼머리 없는 자루가 아무 쓸모없듯이 믿음없는 사람도 아무 쓸모없는 것이다.  도끼머리를 믿음으로 본 것이다. 영해(알레고리해석)는 성경에 대해 아주 무식하던지 아니면 해석자가 자의적해석으로 성경을 억지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본문과 관계없는 해석이기에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영해의 유익한 예를 살펴보자.


          레19:3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

그러나 이 말씀을 히브리 성경으로 직역하면 ‘너희 각 사람은 모부를 경외하라......’라고 되어있다.

         신5:16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파샤’에 따라 해석하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레위기19:3에는 우리말 성경은 아버지,어머니로 되어있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어머니,아버지의 순서로 되어있다.


  ’데라쉬‘의 해석은 어머니가 자녀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아버지보다 덜 엄격하고 덜 두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어머니를 더 두려워해야한다는 의미로 어머니부터 먼저나온 것이라는 것이다.  신5:16절에는 아버지가 먼저 나온다. 아버지는 밖에 나가있는 시간이 많다 그래서 아버지를 더 사랑해야한다는 의미로 아버지가 먼저나온 것이라 해석한다.


예)출20:25 ‘네가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라’.


누구든지 돌을 다듬기위해서는 돌위에 걸터 앉게 된다. 사람의 하체가 돌을 덮으므로 돌은 부정하게 된다. 그래서 다듬은 돌은 부정한 것이기에 쌓지말라는 것이다. 다듬은 돌로 단을 쌓으면 예배자가 다듬은 돌에 마음을 끌리게 됨으로 뜻하지 않는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파샤’의 해석이다.


    그러나 ‘데라쉬’는 이렇게 해석한다. 돌을 다듬는 쇠는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된다. 무기로 인하여 사람이 죽는다. 쇠는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단은 죄인을 살리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다. 단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을 쌓을 때 쓰는 돌은 정으로 쪼지 말라는 것이다. 무리한 해석인가?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는 주로 ‘데라쉬’해석을 하고 있다. ‘데라쉬’를 잘 활용하면 우리는 좀더 지혜로운 해석을 할수 있는 것이다.


신27;2,4~6절을 해석해보라


7.본문적용






3강,석의방법론



제1단계:역사적배경연구(정치적,종교적,지리적,고고학적)


기록자는 누구인가?

수신자는 누구인가?

기록자와 청중사이의 관계

기록자가 성경을 기록할 때의 장소

어떤 상황속에 이 말씀을 주셨는가?

그  말씀의 목적은 무엇인가?

청중들의 처한 위치와 상황

청중의 문제와 요구


제2단계:문학적 배경을 관찰하라


구조분석:

신학적구조:책이나 장이 전달하려는 핵심

상황적구조:원래의 핵심뿐 아니라 기록하려고하는 상황에서의 목표와 관련              된 구조

   예를들면 출애굽기는 신학적 구조로 신명기는 상황적구조로 분석해야한다. 신명기는 제의와 설교의 형식을 띠고있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언약(시내산언약)과 현재언약(모압언약)과 미래언약(세겜언약)이 공존한다. 그러므로 모압언약에 서서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야하는 것이다.

단락나누기

번역본비교


제3단계:중요한 단어를 살펴라


자주 나오는 단어이며 성경의 주제 단어인 “베리트” “헤세드‘를 관찰하라.

중요한 단어를 살피라. 예를들면 사무엘서의 주제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다.  열왕기서의 주제는 “다윗의 길” “여호와의 눈”이다.주제 단어를 생각하며 각장을 석의하라.


제4단계:구문을 분석하라


정관사의 여부

동사의 시제

전치사와 접속사들

단어,구,절의 순서


제5단계:문장구조


자기방식으로 개발하라.요절찾기,주제단어등


제6단계:신학적 문제들


언약적 관점에서 해석하기

구속사적관점에서 해석하기


석의방법론은 자신의 방법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방법론이 숙달되면 성경을 읽으면서 바로 석의 설교가 가능해진다.






4강,석의의 실제(살전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단계:역사적배경


바울과 데살로니가교인들과의 관계와 당시의 역사적 상황,지리적,문화적,정치적,종교적,고고학적연구에 매진하라.

  “데살로니가 전서는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갑자기 떠난 직후에 기록되었다. 바울을 그 도시에서 몰아낸 그들의 적의는 여전했고 데살로니가의 소수의 개종자들은 모든 희망을 읽게될 위기에 처해있었다. 더군다나 이제 막시작된 교회에서 부도덕(4:3-8),게이름(4:9-12),불화(5:12-13)가 일어났다. 이런 그들에게 격려가 필요했다. 배경에 관한 책들과 여러 주석을 참고할 수 있다.


2단계:문학적배경


데살로니가 전서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있다. 격려(1:2-3:13)와 징계(4:1-5:22) 바울은 교인들의 극심한 환란과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믿음을 칭찬한다. 그러나 그들의 부족함도 지적하고 있다.(3:10)

5:16-18절의 3중 권면은  이 서신의 두 번째에 나오고 있다. 바울은 그들의 깊은 영성을 촉구한다. 5:12-22절의 권면은 지도자들(12-13) 교인들(14-15)에 대한 훈계의 목록이다.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지 않고는 훈계에 순종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내적으로 오염되어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수 없다. 16-18절은 고난,가난,환란속에 승리한 그들에게 내적인 삶으로 방향을 돌리고 있다.


3단계:본문의 중요한 문제해결


바울 서신이 그러하듯 수사학적 표현을 사용한다. 질문형식을 사용함으로 설득하는 바울서신의 특징은 헬라어문장에서 흔히 사용하는 아리스토테레스적인 표현이다 별 문제가 없다면 다음단계로 넘어가라.


4단계:중요한 단어의 뜻


먼저 성경의 용어들을 세속적관점에서 해석하지말라. 축복은 물질적인 풍요가 아닌 영적 풍성함이며 평안은 편안함과 오히려 반대되는 고난속에서의 안식,안식 또한 쉼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며 격려는 단순한 칭찬이 아닌 사랑을 품고 지속적인 베품이며,사랑은 헤세드(아가페)이다.


χαίρετε(기뻐하다)는 εύφραινομαι(행복의 표현으로서의 기쁨)와 συννηδομαι(어떤 유쾌한 경험의 결과로서의 기쁨) 둘 다와 다른 어떤 상황과 관계없는 기쁨을 말한다. 구원 받은 자,구속함 받은자의 기쁨이다.


προσευχεσθε(기도하다)는 특별한 필요를 위해 기도하는 δεομαι와는 대조되는 일반적 기도의 포괄적 용어이다.


ευχαριστειτε(감사하라) 는 신약성경에서 감사의 1차적용어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에 사용된다. 이 동사는 주의 성찬의 말씀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성찬의 명칭이 감사(Eucharist)이다.


5단계:구문 분석

세동사 모두 명령형이며 그러므로 성도로서 선택이 아닌 필수요건들이다. 세동사 모두 현재형이며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은 계속적이고 습관적이며 훈련적이라는 것이다.

18절에 있는 “이는“(τουτο) 단수이지만 세가지 모두에 적용된다.

έν πάντι(18절)은  “at every time"이 아닌“모든 일에”(in everything:모든 상황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έν χριστω(18절)라는 말씀은 바울의 중심사상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수도 없고 그리스도의 임재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도 없다.


6단계:문장구조를 결정하라


     16절  기뻐하라

     17절  기도하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

     18절  감사하라


7단계:수사학적분석


“π”로 시작하는 두운법  πάντοτε......προσευχεσθε....παντι.... 이러한 특징은 마치 노래하는 것 같은 운율적이며 귀를 즐겁게하고 이어지는 절들의 접촉점을 제공한다.

접속사생략(16-18) 반복법을 쓰면서 명령형으로 강조한다.

교차법; 가운데 있는 ‘기도하라’를 강조하기 위해 양쪽에 ‘항상’,‘범사에’ 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 가운데 것을 강조한다.


     A    παντοτε(16절)

           προσευ'χεσθε(17절)

     A'   έν παντι(18절)



3중배열:기뻐하라 ,기도하라.감사하라를 통한 의무, 강조를 살전에서 자주 사용하고 있다.(1:3,5 ;2:10,19 ;5:8,23),마7:7 ,고전13:3


8단계:자료분석

   막9장29절의 기도,눅18:1-8절의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눅11:5-8절의 간청하는 친구의 기도,마7장의 구하라,찿으라 두들리라는 3중 배열과 기도의 내용이 유사하다. 기도하면 반듯이 응답하신다는 내용들이다.


9단계:본문의 중심사상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10단계:석의 설교


제목:나의고난(환란,염려,고통,고민,질병)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주제:하나님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상황윤리가 아닌 기쁨과 감사, 특히 그 상       황을 타개하기 위한 쉬지말고 기도하는 것을 원하신다. 루터가 말한 것       같이 하나님께서 성도를 다루시는 방법은 고난을 주시고 기도하게하시       고 승리한 그들에게 의의 면류관을 씌우시는 것이다.


개요: 당신의 염려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가?

      고난을 면제 받은 수는 없다. 고난의 개연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how'의 법칙은 늘 존재하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을 분명        히 알아라


설교요약:

이제 막 예수를 영접한 그들은 염려와 근심,그리고 외부의 핍박,가난등 여러 가지로 근심,걱정에 사로 잡혀있었다. 체포와 구금의 위협,생계의 걱정으로 가득찬 그들은 어찌할바 몰랐다. 바울은 떠났고 훈련이 안된 그들은 야손의 집에 모여 데살로니가전서를 낭독한다. 바울은 먼저 칭찬과 격려로 시작한다. 바울서신의 대부분이 이렇게 시작된다. 이것이 하나니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이다. 우리도 먼저 칭찬함으로 대화를 시도해야한다. 그러나 단순한 칭찬이 아닌 사랑이 담겨있는 격려로 말이다. 계속적인 사랑과 관심 데살로니가 후서로 이어지는 권면은 소통이 부족한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방법이다.

우리의 상황은 어떤가?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나님의 뜻은 3가지이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그리고 쉬지말고 기도하라


기도하라는 말을 강조한다. 포기하지 말고 낙수물이 바위를 뚫 듯이 ...

이제 교인들은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극복하고 승리한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고후8장에서 보듯이 큰 은혜를 받아 오히려 예루살렘 모교회를 돕는 연보를 보내게 된다. 풍성한 삶이 시작된 것이다. 살전1장에서 칭찬하듯 아가야(그리스 남부의 주)와 마게도니아(그리스 북부의 주)에 소문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교회에도 풍성한 삶이 넘치기를 축원한다.




5강  신약 석의: 문법-역사적 해석에 기초한 구속사적 해석  



개혁주의 성경해석의 장점 혹은 독특성은 철저한 문법-역사적 해석에 기초하여 삼위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구속사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의 유기적 영감은 모든 석의의 기본적인 전제가 되어야 한다.


1. 성경관에 관하여


구약과 신약은 정경으로서의 성경 전체를 구성하고 있으므로 성도의 전체 삶에 권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성경의 영감자이시며 원저자이신 성령님의 도움을 받으면서, 종료되고 완성된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 것인지 믿음으로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사회적 환경, 언어 그리고 문학적 장치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의 특정한 면들을 계시하셨다.


2. 문법적 해석

두 말할 것 없이, 신약의 문법-문학적 해석을 위해서 헬라어 문법 지식이 기초이다.

저자의 의도와 문체를 따라야 할 것, 그리고  문장 구성 요소들 간의 관련성을 매우 세밀하게 밝히는 '직접 구성 성분 분석' (immediate constituent analysis)으로 저자의 사고를 추적하는 헬라어 구문 분석 과 의미가 담겨져 있는 큰 틀을 밝히는 구조 분석이 수행되어야 한다. 이런 분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내용과 구조 모두 영감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중요 어휘의 의미 분석을 통하여 저자의 의도를 찾을 수 있다. 어휘 분석은 어원 연구, 분석되는 단어의 구약 히브리어 상응어 연구, 그 단어의 신약에서의 용례, 마지막으로 그 단어의 다루고자하는 본문 안에서의 의미 결정이라는 단계를 따른다 . 그 후 본문의 문학적 기교나 스타일 (예. 두운법, 과장법, 중언법, 반어법, 곡언법, 은유법, 수미상관법 등)을 분석해야 한다


3. 역사적,지리적,고고학적 해석


본문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수행할 때 신약 본문의 첫 저자와 독자가 처한 상황을 6하 원칙에 따라 묘사하는 '사회적 묘사'가 기초이다. 그 위에 신약의 경우 AD 1세기 상황을 특별히 문화인류학적인 입장에서 '분석'하는 작업이 보조적으로 필요하다. 본문의 역사적 해석을 위해서 사회적 묘사와 사회적 분석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또한 지리적 해석과 고고학적해석이 필요하다.


4. 구속사적 해석


만약 문법-역사적 해석에서 멈춘다면 잘못된 해석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해석이다. 신학적 해석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않는 것이며, 본문 자체가 갖고 있는 관심사를 무시하는 것이다 현대의 성경 연구 경향은 너무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 자신의 분야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 학자들이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주경신학의 일부로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 과정을 고찰하는 학문인 성경신학은 창조 이래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역사적 배경과 문법-문학적 분석을 통해서 밝혀야 하고, 전체 성경을 아우르면서 작업을 해야 하기에 종합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따라서 19세의 현대적 의미에서 '구속사적 해석의 아버지'로 불리는 Konrad von Hofmann과 20세기 초의 G. Vos와 중순의 O. Cullmann으로 이어진 구속사 (Offenbarungsgeschichte)적 이해를 발전시킨 성경신학은 단편화된 신학을 통전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뿐 아니라, 자신의 믿음과 삶 그리고 예배와 섬김을 성경에 맞추고자 하는 성도에게 실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그 속에 담긴 성경신학적 메시지를 교회에 전달할 수 있을까? 문법적-역사적 주석 위에 수행되어야 할 신약 본문의 구속사적 해석의 단계는 다음과 같다:


(1) 관주 성경을 사용하여 다루고자 하는 신약의 구약관련 구절을 살펴보라.

(2)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과 관련된 언약의 성취의 사항을 살펴보라.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원형적 렌즈' (antitypical lens)를 통해서 구약의 모든 구원사를 탁월한 방식으로 재해석하신다.

이 때 특별히 예수님의 다양한 이름들이나 은유를 잘 살펴야 한다.

그렇다고 부자연스러운 문맥에서조차 억지로 그리스도를 찾아내려고 해서도 안 된다.

(3) 성경의 큰 주제인 '창조-타락-구속' 흐름을 염두에 두고 살펴라.

(4) 하나님 나라, 언약의 성취, 심판과 구원 등 성경의 전체를 엮을 수 있는 주제가 본문 속에 나타나 있는지를 살펴라. 이것을 위해 본문에 등장하는 중요 단어들의 어휘에 담긴 구속사적 중요성을 살피는 것이 유익하다.

(5) 신약의 종말론의 틀인 '이미와 아직 아니'를 잘 고려하라. 하지만 계시의 전진을 고려해 볼 때 만유이신 예수님의 온 교회적 인격에 기초하여 '이미'의 측면을 더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신약 안에도 언약의 중첩 및 계시의 전진이 나타난다.

(6)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계시를 다루기에, 우리는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읽도록 힘을 기울여야 한다. 바로 그 때 성경의 구원의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실 것이다.


1) 교회 개혁가들이 이룩해 놓은 문법적-역사적 해석에 근거한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구속사사적 해석의 관점에서 성경의 큰 그림을 가지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거시적에서 미시적으로 ,줌앤 크로즈업


2) 그들을 도약판 삼아, 이제는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을 할 때, 본문에 대한 다양한 각도에서의 주도면밀하면서도 적극적인 접근 방법의 필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3) 그러나 이런 작업의 전제는 성경의 유기적 영감이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종 형태의 본문 이전의 자료 전승과 같은 가설적인 작업에 집중하지 않도록 하며, 오히려 최종 본문을 통해서 원저자가 첫 독자에게 의사소통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파악하는데 초점을 모으도록 한다.

4) 물론 개혁주의 성경 해석은 원저자이신 성령님의 손아래 겸허한 자세로, '오직 성경' (Sola Scriptura)과 '전체 성경' (Tota Scriptura)의 원칙에 입각하여 '항상 개혁되어야' (Semper reformanda) 신학이 발전한다.

















6강 성경신학적 석의



최근에 호주 시드니 소재 무어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그레엄 골즈워디의 ‘성경신학적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 (2002. 성서유니온선교회. Preaching the whole Bible as Christian Scripture)가 출간되었다. 부제는 ‘강해설교의 성경신학적 적용’이다. 복음 중심의 성경해석으로 유명한 (참고. p. 143) 골즈워디는 시드니 그레이다누스와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큰 맥을 같이하는 탁월한 개혁주의 성경주석-설교학자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전제주의적-고백적이지만 거기서 머물지 않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논리적이며 학적으로 글을 전개한다는 데 있다. 골즈워디는 우리 시대의 두 극단을 극복한 사람이다.


하나는, 개혁주의 석의와 설교를 표방하면서도 판에 박힌 듯한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으로 인해 ‘고백적 입장으로만’ 일관하여, 참으로 동의하기 힘든 과격한 주해-설교가 되고 마는 극단이다. 다른 하나는, 복음주의-개혁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성경신학에 별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극단이다. 실제로 한국 성경신학회에 참석해 보면 역사를 자랑하는 비교적 큰 보수 장로교단의 학자들은 참으로 찾아보기 힘드는데, 이 현상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며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칼빈에 관한 연구를 칼빈주의자보다는 바르트주의자와 같은 다른 진영의 학자들이 더 많이 하는 현상과 흡사하다. 왜 이런 기현상이 발생할까? 복음주의가 성경신학을 감당할 힘을 상실했는가,


아니면 현대의 조류를 따라가다 그것에는 무관심했기 때문인가? 한국의 복음주의 진영에서 현대 성경 해석 방법론 논의가 미미한 것을 볼 때 후자는 아닌듯하다. 그 원인을 한국에서 성경신학을 신약과 구약으로 나누어서 가르치는 풍토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신학은 성경 전체 (One Bible)에서 나오는 통전적인 것이다. “나는 신약을 가르치기에 혹은 나는 구약을 가르치기에 다른 편 성경은 잘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반쪽 신학이요 진정한 성경신학이 되기에는 역부족이다. 여기서 한국적 성경신학이 세계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즉 합리주의에 근거하여 정경의 권위를 의심하고 쪼개는 데 일가견 있는 서구인들과는 달리, 한국인은 그 전통상 어떤 경전의 권위를 중요시하고 그것을 통째로 닳도록 읽고 암기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기에, 한국식 성경신학은 바로 성경 66권 전체를 한 줄로 꿰어서 읽고 또 읽어서 간본문성에 충실한 성경신학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성경신학,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이라는 말이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일반 성도에게는 어려운 용어임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선입견을 가지고 어려워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는 성경을 매일 읽고 삶 속에 적용하는 주석가요 설교자이기 때문이다. 이제 골즈워디의 글의 안내를 받으면서 효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발견하여 전할 수 있는 길을 탐구하는 여행을 떠나보자. 이 고단한 여행을 시도하는 목적은 프로그램을 통한 교회 성장만 이 시대에 통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에 자리잡은 능력의 말씀을 통한 부흥이 근원적인 것임을 증명할 수 있다는 데 있다.


1. 성경신학적 석의의 정의와 필요성


‘성경신학’ (Biblical theology)은 하나님의 계시가 일차적으로 주어진 그 시대에 어떻게 이해되었으며, 모든 역사 과정에 걸쳐서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 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특정한 성경 이해 방식이다. 성경신학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결정적 단서가 되는 관점은 ‘구원사’ (historia revelationis)이다. 이것은 구원은 역사의 주관자요 의미 부여자이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으며, 지금도 역사하시고 계시며, 앞으로도 역사하실 것을 틀로 하여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다. 성경신학 혹은 구원사를 무시하는 설교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강해설교라는 큰 우산 개념 (umbrella term) 하에 본문 중심으로 말씀을 전한다고 하지만, 단지 위대한 신앙 인물에 대해 설교하는 것과 교회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돕는 것은 다르다. ‘신학의 꽃’이라고 불리는 설교학의 주제가 변천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불행하게도 설교자 자신의 준비 혹은 설교의 유형과 효과적인 전달이라는 부차적인 주제에 치중하는 듯하다. 하지만 설교학이 신학의 꽃이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성경신학적 주해와 적용에 관한 원칙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배제하고는 불가능하다.


계시사의 진가를 모르는 이는 신학의 꽃을 피울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풀기 어려운 문제-숙제가 여전히 우리에게 있다. 복음주의자들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한다고 하면서 단지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닮아가자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이 예수님을 윤리적 모범을 보인 선생이나 위인으로 만든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주의자들과 다른 성경적인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이를 위해 우리는 다시 성경의 연속성과 통일성에 주목해야 한다. 구약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은 그 모든 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시기 위해 신약에서 예수님 안에서 성육하신 하나님이시다.


이 성취된 구원 사역의 중심에 예수님의 윤리적인 모범이나 교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천국확장을 위한 공사역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위 (Jesus' sitting on the heavenly throne)가 있다. 즉 성경의 윤리와 모범이 그리스도 안에 결정적으로 현시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보다 우선적일 수 없다. 환언하면, 하나님의 복된 소식이요 은사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윤리적 삶이나 사명 보다 우선적이고 선행하는 것이며 기반이 된다. 성경신학적 주해와 설교는 성경 전체가 메시지를 담고 있는 다양한 문학 장르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자연스럽게 말씀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의 유기적 영감을 전제로 하여, 설교자 개인의 경험과 예화 사용을 자제하고, 예수님만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강조하고, 관련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귀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성경적 주해-설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이 없다면 신약조차도 율법주의적 권면으로 들려질 것이다. 성경은 창조주요 구속자이신 삼위 하나님이 우주 만물 가운데 자기를 계시하신 책이다. 자기 계시의 핵심에 그리스도를 통한 언약 백성을 구원하는 사역이 자리잡고 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구원의 주로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므로 성경 66권 전체가 한 본문을 성경신학적으로 주해함에 있어서 문맥이 되어야 한다. “문맥이 없는 본문은 핑계다 (A text without its context is a pretext.” 성경신학과 관련있는 간본문적 해석은 문맥 연구에 기초해야 한다. 성경 전체의 문맥도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따라서 ‘요한신학’, ‘바울신학’, ‘누가신학’, ‘소선지서의 신학’, ‘오경신학’이라는 말은 이런 성경 저자들에게 신학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성경과의 관련성을 약화시키는 차원에서는 한계가 있다. 예수님과 사도의 설교의 전통 (고전 1:23; 2:2) 그리고 교회 개혁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를 계속 붙잡아야 한다. 성경 독자와 설교 청중이 누구를 대면하도록 할 것인가? 아브라함인가? 오래 전 미국의 알쏭달쏭한 어떤 신앙의 위인인가? 아니면 변함없는 구원의 주재이신 하나님인가? 이런 의미에서 성경신학은 갖추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2. 성경신학에서 간과된 것: 신약 안에서의 계시의 전진


신약을 석의하면 본문으로부터 자동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계시사가 흘러나오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신약의 큰 세 가지 특성은 이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나는, 신약 안에서 발견되는 신구약의 중첩현상이다. 구약과 신약이 중복되는 면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많은 부분을 오해하게 되며, 우리에게 적용할 수 없게 된다. 두 번째는, 신약 성경이 기록된 시점과 우리 시대 사이의 이천년 이라는 간격이다. 그러므로 신약이라고 해서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막 16:15-20절의 예수님의 예언은 더 발전된 계시인 후대의 사도행전에서 일차적으로 성취 (fulfillment)되었다. 물론 이 예언은 계시록 21-22장에서 완성 (consummation)을 만날 것이다. 그러나 막 16장의 승천 직전에 주신 예수님의 (상징이 강한) 예언 중 일부는 우리 시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세 번째는, 신약 자체가 신약의 계시사의 전진의 큰 분수령은 예수님의 부활-승천 그리고 오순절 성령님의 강림사건이라고 밝히기 때문이다. 특히 오순절 성령의 강림 사건 이후에 제자들의 복음에 대한 인식의 수준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 예수님의 승천 후의 구원 역사는 성령이 주도하시기 보다는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신다고 보아야 한다 (막 16:20). 그리스도의 천상의 통치는 십자가와 부활을 클라이맥스로하는 지상의 통치에 근거하지만 영광과 방식 그리고 범위에 있어서 더 진전된 것이며 그 이상이다. 현대의 성도는 신약 성경 기록 당시 (주로 주다해 60년경)보다 더 분명한 계시사적 전망대에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


3. 구약: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위한 하부구조


성경 해석에 있어서 어떤 시대에는 구약을 신약보다 강조한 경우가 있었고, 어떤 때는 이것에 대한 반동으로 신약학자들을 중심으로 신약을 높이고 구약을 낮추는 경우가 있었다. 이것은 루터가 했던 방식처럼 ‘성경 속의 성경’이라는 잘못된 주장을 되풀이 하는 것이며 ‘정경 축소작업’이다. 여기서 구약을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으로 임한 하나님 나라 계시의 ‘하부 구조’ (sub structure)로 보는 것은 구약을 무시하거나 신약보다 못하게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통시적으로 (diachronically) 이해할 때, 구약 계시는 같은 구약 속에서 먼저 성취를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구약 사건들의 궁극적인 원형 (antitype, 혹은 대형, 실체, 실재)은 구약과 신약의 모든 교회를 그 안에 품고 계시는 만유이신 예수님이시다 (골 1:16; 3:11).


구원 계시의 전진에 있어서 구약의 모든 구원(과 심판) 사건은 그 원형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하기에 ‘하부 구조’로 불릴만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 계시의 중심이며, 성경 안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을 이해하는 확고한 지침이다. 예수님과 (단순화시켜서 말할 때) 성경의 양대 구약 성경신학적 주제라 할 수 있는 ‘출애굽 주제’와 ‘새 창조 주제’는 불가분하다. 구약의 구원 사건이 얼마나 다양하고 형형색색의 구조를 가지는가? 그러므로 만유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것이 성취되기에 우리가 이해하고 전해야 할 그리스도의 계시는 얼마나 더 풍성한가? 이런 차원에서 성경신학은 이것을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에게 단조롭고 빈약한 내용이 아니라 다함이 없는 풍성한 계시를 약속한다. 


4. 예수 그리스도: 성경신학자의 원형 (antitype)


신구약 중간기라는 430년이 공백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그들의 경전인 구약을 가지고 자신을 들추어내어 깨닫도록 설교하셨다 (눅 24:27, 44-47).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원형적 렌즈 (antitypical lens)를 통해서 구약의 모든 구원사를 탁월한 방식으로 재해석하신다. 이제 예수님 안에서 새 이스라엘이 회복된다. 이것은 피상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성도의 실존적인 변혁적 재창조를 의미한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경의 본질적 내용이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원형이신 예수님이 밝히는 점진적 계시는 ‘이미와 아직 아니’의 종말론, (명백하거나 혹은 암시적인) 모형과 원형, 약속과 성취, 문자적 의미와 더 온전한 의미 (sensus plenior), 옛 언약과 새 언약, 율법과 복음, 이스라엘과 교회 등과 같은 대칭축들로 나타난다.


이런 대칭축들은 다양하고 복잡하지만, 동시에 원형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얼마나 역동적이고 풍성한 분이심을 증거한다. 그러나 연대기에 기초한 점진적인 계시사는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말씀의 기능을 경시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지닌다 (p. 163). 성령에 의한 동정녀 탄생,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은 구약에서 예언되었지만, 유대인들이 전혀 기대하지 못한 급진적인 방식이 아닌가? 이런 그리스도의 복음 사건을 계시의 전진을 시간적으로 고려한다고 알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공시적으로 (synchronically) 초공간적이며 초시간적인 원형이시다. 예수님은 설교하신 후 청중이 은혜를 받았는지, 그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주었는지, 청중이 듣기에 부담없고 의사소통에 있어서 산뜻한 스타일이었는지에 거의 관심이 없으셨다. 대신 바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에 따라 성육하셔서 새 이스라엘을 새 에덴으로 인도하실 주체가 되심을 계시하실 뿐 이었다.


예수님이 ‘성경신학자’라고 말하는 것은 썩 내키지 않는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분명히 가장 탁월한 분이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현대 성경학자처럼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방식으로 구약만 혹은 신약만 다루시지 않았고, 구약의 성취로서 신약 계시를 주신 로고스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학자는 유대주의에 대한 연구, 랍비 유대교, 유대 묵시문헌에 대한 연구를 하되,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말씀과 사역으로 스스로 구약 계시의 성취자이심을 증명하신 예수님은, 그 원칙과 목적에 있어서 구약의 여호와께서 시행하신 구원과 신원의 연속선상에 서 계신다. 마치 복음서에서만 120회 이상 언급된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가 신약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듯이, 예수님이 시행하신 구원의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구약에서부터 시행하신 것과 유사하다. 예수님은 영원하시며 초시간적이시기 때문이다. 물론 구약의 구속사와 신약의 구속사를 비교해 보면 차이점도 있는데, 특히 구원을 이루는 방법과 범위에 있어서는 급격히 심화되고 상승한다.


여기서 ‘범위’라는 말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포함하는 우주적인 차원으로 이해해야 할 뿐 아니라, 만유이신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대상-영역이 우리의 영혼은 물론 삶의 모든 부분을 아우른다는 차원에서 통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성경신학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라는 모퉁이돌은 움직이지 말고, 다각적으로 접근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은 포괄적인 동시에 매우 실제적이고 역동적이다. 놓치지 말 것은 포괄적이고 역동적이되 과거-현재-미래를 아우른다. 그리고 예수님이 구원계시를 주신 방식 또한 다양하다. 비유, 모형, 은유, 설교, 강화 등. 복음서에 나타난 다양한 문예적 표현들의 이면에 예수님의 뜻과 그 뜻에 대한 복음서 저자들의 표현이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정황 가운데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


성경신학적 이해와 설교는 현대 교회가 자초한 정경 축소라는 난국을 타개할 유일한 활로이다. 우리의 신학교 커리큘럼이 이런 핵심적인 사안을 곁에 둔 채 맴돌고 있어서 너무 주변적인 것이 아닌가? 교회의 성경공부나 소모임의 성격은 이런 비평에서 예외인가? 시카고 선언문 제 3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과 그의 사역이 성경 전체의 초점임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교회론, 구원론, 종말론, 그리고 윤리론은 기독론 중심이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하는 복음이고, 진정한 은혜다 (참고. 아드리오 쾨니히를 인용한 p. 156-159).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는 신약의 권면은 구약과 마찬가지로 복음이 아니라 율법주의적이다.


실제로 그리스도 없는 주석과 설교를 듣고도 현대의 성도는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 은혜는 아마도 감동적인 예화에서 나온 것이거나, 아니면 그 근거를 추적하기 힘든 것이리라. 한 본문을 다룰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건의 관점 하에서 다른 본문과의 간본문성을 보이도록 구원사의 맥락에 놓아야 한다. 바로 그 때 그리스도와 연합된 현대의 우리의 삶의 정황은 또 하나의 적실성을 가진 실존적인 간본문 (proper-existential intertext)이 된다. 바로 그 때 창조와 타락을 창조이래로 동시에 거듭해온 역사가 변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승리의 복음의 깃발을 흔들며 뻗어가는 천국에 동참할 것이다. 말씀의 주해와 설교, 성경 공부, 교회 교육, 그리고 더 나아가 심방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본질을 해명하는 영원한 생명이 달린 일이다. 속에서 성령이 주시는 탄식이 일어난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으소서!”







      7강 예수님의 관점으로 석의       




하나님의 백성만 믿음과 순종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지식에 까지 새롭게 변화를 받을 수 있다. 그 속에서 우리의 믿음의 주시며, 온전케 하시는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다면 더욱 새롭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제대로 읽을 때 성화가 반드시 수반된다. 따라서  성경을 정확히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석의 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1. 예수님 중심의 석의의 정당성과 필요성


창조 때부터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이 구원의 사역을 이루실 것이라는 예언이 등장한다. 에덴동산의 복된 언약과 노아에게 주신 창조 질서의 보존 언약 그리고 여러 족장들에게 약속된 중다한 언약 자손과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될 영역은 각 시대마다 적합한 메시지를 가질뿐더러, 점진적으로 성취되며, 궁극적으로 예수님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 질 것들이다.


그 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역군들인 사사와 왕들 그리고 선지자와 제사장들뿐 아니라, 구원 사역에 수반된 사물들인 성전과 그 부속 기구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원의 사역을 다양한 방식으로 내다본다. 포로 시기의 왕의 부재현상은 자연스럽게 메시아 왕의 도래와 함께 이루어질 왕국을 고대했기에, 포로기를 배경으로 하는 성경은 예수님 중심으로 해석해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 신약은 어떠한가?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사도들의 설교와 스데반의 설교의 특징을 꼽아보라면 당연히 구약을 가지고 예수님을 드러내는 메시지였다는 점이다. 사도의 설교를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된 구약 예언과 이 땅에 도래한 천국의 관점에서 구약을 해석하기에, 그리스도가 종착점인 동시에 사실상 출발점이기도 하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예수님 중심으로 성경을 읽는 것을 ‘오직 그리스도’만 나타내야 한다는 축소주의로 보지 말아야 한다. 사실 구약과 신약은 삼위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인간 세상 속에 어떻게 성취되는 가를 다룬다. 그러므로 삼위의 사역의 관점에서 바라보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중심으로 보려는 균형 감각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약을 읽을 때 어떻게 삼위의 사역이 오실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가를 발견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신약을 읽을 때도 어떻게 구약의 빛 속에서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관점에서 읽을 수 있는가? 개혁교회 전통은 설교 전 성경봉독 시 반드시 구약과 신약을 병행해서 읽는 데 참으로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볼 때 바람직한 현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요 그분과 신비로운 연합을 이룬 교회가 살 길은 그리스도 중심적 메시지를 깨닫고 오늘도 우리에게 통전적인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만유이시기에 부요하시다.


그리스도는 만유이시기에 구약과 신약의 모든 언약 백성을 포함하며, 우주 만물도 그 안에 두고 계신다. 따라서 구약이나 신약의 어떤 인물을 닮자는 식의 초등 단계의 주석과 적용은 지양되어야 한다. 그 대신 우리는 한 개인의 영웅시하는 오류에서 벗어나서, 스펙트럼을 확대시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그 인물이 속한 공동체인 이스라엘이나 교회를 행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 때 우리는 한 인물을 우상시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 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큰 틀 속에서 조망해 볼 수 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의 구속의 중심에 계신 그리스도를 발견하여 바른 적용을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할 수 있게 된다.


2. 예수님 중심의 석의란 무엇인가?


우리 가운데 숨길 수 없는 문제가 여전히 존재한다. 성경을 예수님 중심으로 읽고자 하는 성도에게는 물론, 성경신학을 공부한 학자에게도 이 문제는 항존한다. 예수님 중심으로 성경을 읽자고 하지만 쉽게 이것에 관한 명확한 개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 주제에 대해서 대부분 대충 알고 있다.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 해석과 설교의 지침을 위해서 우리 시대의 최고의 성경신학에 근거한 설교학자인 칼빈신학교의 시드니 그레이다누스가 쓴 “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하나의 현대적 해석학 방법론” (2003. 이레서원)을 참고하면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다. 먼저 예수님 중심으로 성경을 읽는 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룬 구속 사역 중심으로‘만’ 읽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리스도 일원론 (Christomonism)적 발상이다. 물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구원 사역의 핵심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경 해석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그리고 주님의 모든 가르침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인격만 해도 참으로 풍성하고 놀랍다. 예수님의 인격 (person)은 참된 인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기름부음 받은 왕, 선지자, 제사장이시요, 마지막 아담이시며, 창조주요 섭리자이시며, 교회를 통합적으로 연결시켜 다스리시는 주이시며 머리시요, 새로운 모세와 여호수아로서 새 이스라엘의 새로운 출애굽을 주도하사 이 땅에 새 가나안인 천국을 심으신 분이시며 재림의 주님이시다. 그 외에 예수님의 인격의 풍성함을 주님이 온 교회적 인격을 넘어 온 우주적 인격을 가지신 ‘만유’라는 사실 속에서 더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의 사역은 어떠한가? 예수님은 죄 사함을 위한 속전이 되셨고, 옛 언약과는 다른 차원의 새로운 천국 질서를 부여하셨고, 부활-영생을 이 땅에 심으셨고, 귀신들림과 질병과 같은 왜곡된 창조질서를 회복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떠한가? 주님이 가르치신 주제는 다양한데, 구약의 진정한 의미와 재창조, 진리와 자유, 섬김과 사랑과 사람의 본분, 천국, 하나님-인간-세상의 관계 속에서의 바른 윤리 등이다 (참고. 그레이다누스, 2003:40).


3. 예수님 중심의 석의 지침


우리가 예수님 중심으로 성경을 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는 단순한데, 예수님 스스로 성경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읽어 영생을 얻으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눅 24:27, 44; 요 5:39). 그렇다면 지침과 원칙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점진적 구속사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다. 구약 구원의 예언의 정점은 예수님이심을 인정하면서 읽으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윗 왕가는 메시아 왕국으로 발전한다. 예수님은 구약 예언의 성취요 결말이다. 예수님의 부활-승천은 복음의 시작의 결말 (the end of the beginning of the Gospel)이다. 신약의 구원의 전진은 본격적으로 승천하신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성령의 담지자인 교회의 확장과 종국적으로 신천신지로 이어진다.


둘째, 약속과 성취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구속사의 한 단계에서 약속을 주시고, 그 다음 단계에서 성취를 주신다. 구약의 약속은 일단 구약에서 일차적으로 성취되며,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잠재되어 있다. 하지만 모든 약속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결정적으로 성취된다. 구약의 다양한 구원과 심판은 예수님 안에서 시행될 구원과 심판에서 성취된다. 신약 안에서도 계시의 전진이 있는데 약속된 것이 같은 신약 안에서 성취된다. 예를 들어, 막 16:15-20절은 사도행전에서 성취되고, 주님의 최종 파루시아로 완성된다.


셋째, 모형론으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다. 모형은 “신약의 구원사 속에서 일치하는 실재들의 모델들이나 예표들을 신적으로 확립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구약의 인물, 제도, 사건들이다”.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불변하시기에 구원사의 유사성이 에덴동산에서부터 새로운 에덴의 회복 때 까지 계속 일관되게 이어진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의 복잡 다양한 구원과 심판 사건 사이에 유비가 있다. 실제로 구원 사건은 반복되는 듯하다.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사역을 펼치신다. 동일하신 하나님이 다른 시간과 배경 속에서 사역을 행하실 뿐이다.


그러므로 이전 구원 사건의 인물, 사건자체, 사물 속에서 이후의 구원 사건의 그림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단순히 하나의 지엽적인 유비가 다른 (두 개의) 구원 사건들 사이에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을 확대해서 모형론적인 해석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구약 안에서도 계시의 전진과 더불어 모형이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옛 언약에서 새언약으로, 출애굽에서 새출애굽인 출바벨론으로 유사하게 확대 발전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요나의 표적으로 종종 모형론적으로 말씀하셨다 (마 12:40-42). 예수님은 종종 은유로 모형을 연결하신다. 예수님은 새로운 만나시며, 영생하는 하늘의 떡이시다 (요 6). 모형 (type, 그림자, 전조)과 원형 (대형, antitype; 혹은 실체, reality) 사이의 유사성은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의 관점에서 볼 때 둘 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뿌리를 둔 구원의 행위를 가리키며 구원계시의 전진이 예수님 안에서 확대 상승되는 것이어야 한다. 모형의 특징을 정리해 보자. 첫째, 모형은 역사적이다. 오직 역사적 사실들인 임물, 행위, 사건, 제도들만이 모형이 된다.


상징 속에서 모형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성경의 상징은 오히려 성경상징주의에 입각하여 해석을 시도해야 한다. 둘째, 모형은 하나님 중심이다. 즉 역사적인 임물, 사건, 제도 등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관련된다. 셋째, 참 모형은 그 실체와 의미심장한 유비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그림자와 실체 사이에는 기본적인 원리와 구조 그리고 역사와 신학에서 유비적인 일치가 발견된다. 넷째, 그림자인 모형에서 실체로 확대 상승하여 발전한다. 예수님은 구약의 대제사장보다 더 크시고, 솔로몬보다 더 크시고,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그렇다면 모형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첫째,  모형을 주요 실체이신 예수님에게 적용하기 이전에 그 모형이 사용된 (구약) 배경과 문맥에서 먼저 해석해야 한다. 이 단계에 (문맥과 장르, 구문-구조-어휘 의미 및 문학적 장치를 밝히는) 문법- (6하 원칙을 묻는) 역사적 해석 이 요청된다. 둘째, 모형을 세부적인 사항에서 찾지 말고, 언약 백성을 행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이라는 큰 맥락에서 모형-실체의 관계를 찾아야 한다. 세부적인 모형적 관련성에 집착하면 할수록 알레고리가 된다. 셋째, 그림자들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를 파악하라. 예를 들어, 구약 그림자들이 계시의 전진과 관련하여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면 모형이 될 수 있다. 즉 이 모형이 구속사의 전진에 있어서 어디에 다시 (상징적으로) 등장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넷째, 모형과 실체 사이의 대조에 관심을 기울여 보라. 예를 들어, 예수님은 요나보다 더 크시다. 다섯 째, 합당한 모형과 실체의 관계를 밝혔다면 거기에만 머물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설명하여 우리에게 적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넷째, 유비 (analogy)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인물이나, 서건 혹은 제도나 사물이 이전 혹은 이후의 인물, 사건, 제도, 사물과의 유비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유비를 통해서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류의 조상 아담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유비적 관계에 있다. 그리고 아담은 새로운 인류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노아와 자리매김에 있어서 유사하다. 그리고 의로운 남은 자 노아의 역할은 야곱 (이스라엘)의 가족을 남은 자로 만들어 번성케 만든 요셉과 유사하다. 법궤와 방주 그리고 모세의 갈대 상자 사이에도 유비가 있다. 더 나아가, 구약의 여호와와 예수님 사이에, 구약의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와 예수님과 신부인 교회 사이의 유비가 계시의 전진 상에 두드러진다. 완성될 신천신지에서의 새 예루살렘은 전투적 교회와 유비를 이룬다. 이 유비는 적용을 위해서 유용한 안목을 제공한다.   


다섯째, 구원사와 관련된 주제를 통해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구약의 희생 제사의 제물은 속전 (ransom)이시며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님과 관련되며, 성전 주제 역시 성령의 전인 교회와 관련된다. 용어에 있어서 사단과 바다를 꾸짖으신 예수님의 사역은 혼동의 세력을 꾸짖으신 구약의 여호와의 사역과 연결된다.


여섯째, 대조를 통해서 예수님이 드러난다. 구약의 구원과 신약의 구원 사이의 불연속성과 대조를 통해서 더 진전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분명해 진다. 물론 구약 안에서도 대조가 있다. 예를 들어, 시내산 언약이 체결될 때 말씀이 돌 판에 새겨지지 않고, 새 언약에서는 마음 판에 새겨질 것이다. 구약의 경우 원수를 진멸하라고 하나님이 명하시지만, 예수님은 사랑과 복음으로 정복하라고 명하신다. 살인과 간음을 금하는 명령에 있어서도, 예수님은 실제적인 행동은 물로 마음과 생각의 동기까지도 철저히 점검하도록 하신다.


일곱째, 예수 그리스도를 명확히 언급하지 않는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이 현장에 계셨다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라고 물어 봄으로써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성취된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과 승천의 관점에서 본문을 조망해 볼 수 있다. 이 해석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라기보다 ‘그리스도 완결적 해석’으로 불린다.



성경학자와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해석을 계속 연구해야 한다. 왜 그런가? 이것을 예수님이 명령하셨고, 사도들이 추구했던 성경적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본문을 인간중심으로 윤리화 하는 것에 대한 해독작용을 할 것이며,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 넣을 것이다. 지금도 예수님 중심으로 설교를 하면 ‘어렵다’는 반응을 어렵지 않게 접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좁고 생명을 얻는 길은 넓고 쉬운데 있지 않음을 기억하자. 성경신학이나 구원계시사적 해석이 시대적 감각을 잃어버린 골동품 취급을 받을 것이 아니라, 현대의 해석학의 도움으로 더 발전되기를 소망한다. 문법-역사적 해석이 선행된 예수님 중심의 구속사적 해석이 아름답게 발전해 가도록 해야 한다.




다른 방법론1

(배 *훈교수)

시80편

1.서론

민족 탄식시로 알려진 본문을 통하여 민족의 고난에 대해 승리하고자한다.

2.본문의 범위와 문학적 구조

대단락 ,중단락,소단락

3.분석적관찰

4.통전적해석

  고난이 어려운이유

  고난을 어떻게 이길수 있을까

  고난을 극복하려면

  회복은 어떻게

5.결론


다른방법론2

(김*훈교수)

출40:34-38

1.본문선택이유

2.본문구조분석

3.본문비평

4.전통비평

5.개별주석

6.종합주석







석의방법론(Hermeneutics)

        참고도서


필독서


1.B.S.Childs.   성서신학의 위기  대한기독교서회  1992

2.B.S Childs.   구약정경개론    대한기독교서회 김갑동역1999

3.Haddon W Robinson.Biblical Preaching.CLC.박영호.옮김.1993

4.Haddon W Robinson.일인칭 내러티브 설교. 이레서원. 2004

5.David Alan Black. Using New Testament Greek in Ministry. 솔로몬.김경진역. 2004

6.정규남.구약개론.개혁주의 신행협회. 2006

7.Young,Edward J. 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1975


1,2,5권은 절판되었슴으로 구할 수 있는대로 노력하시고 3번은 다양한 제목으로 번역되어있으니 (우리말로는 강해설교로 번역) 반듯이 읽어야하며 4,6번도 필독하셔야함.7번은구약총론으로 번역이 되어있음 역시 필독



연구서


8.배제민.구약연구.총신대학출판부.1983

9.김희보.구약신학논고.예수교문서선교회.1975

10.Walter C. Kaiser.Toward an Old Testament Theology.Grand Rapids.1982

11.B.S.Childs,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as Scripture(Philadelphia:Fortress Press,1979)

12.M.F.Unger,Introductory Guide to the Old Testament(Grand Rapids:Zondervan Publishing House,1951)

13.G.L.Archer Jr., A Survey of Old Testament Introduction (Chiago :Moody Press,1964)

14.R.K.Harriso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Grand Rapids.1969) 

 

10번은 구약성경신학으로 생명의 말씀사에서 번역본이 나와있고  11-14까지는 20세기 대표적인 복음주의 학자이며 성경의 영감을 주장하는 분으로서 지속적인 연구를 위해서 탐독해야 할 책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