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레위기(언약적해석)

레위기5장,배상제의 의미

호리홀리 2015. 7. 14. 10:50

 제사 종류 가운데  '아샴' 이 있다. 이 제사가 "속건제"로 번역되어 있으며 영어역에는 보통 "guilt offering"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밀그롬(J. Milgrom)은 이 제사를 reparation offering(배상제사) 이라 번역하면서 이 제사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시하였다. 혹은 흔히 보상제로 일컽는다..
  "배상제사"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여러 제사 가운데 유일하게 배상제사만이 성전 세겔로 환산하여 드릴 수 있는데 이러한  면이 바로 배상제사의 특징이라 볼 수 있다. 법궤가 블레셋 지역에서 이스라엘로 되돌려질 때 금덩이로 배상제사를 드린 것을 보아도 배상제사가 금전으로 드려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삼상 6:4). 요아스 시대에도 "아샴"이 금전으로 드려질 수 있는 제사였고 그 돈은 나중에 제사장에게 돌려졌다(왕하 12:16[MT 12:17]). 이것은 민수기 5:8과 레위기 7:7과 일치하는 예이다.
 

 배상제사는 법률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손해 입힌 것을 배상하는 의미가 그 핵심이다. 이러한 성격은  헤쉬브란 단어가 "아샴"과 함꼐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더욱 분명해 진다. 헤쉬브는 "되돌리다/상환하다"(민 5:7-8; 18:9; 삼상 6:3, 4, 8, 17; CD 9:13-14)는 뜻의 단어이며 "회복시키다"라는 뜻의 쉴렘 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아샴"을 속건제라 번역하기 보다 배상제사라 번역하는 것이 이 제사의 의미를 보다 더 충실히 전달할 수 있다.  소위 죄 문제를 해결하는 제사인 배상제사와 정화제사(purification offering)를 드리는 과정에는 반드시 죄를 뉘우치거나 죄를 고백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즉 회개의 과정이 필수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배상제에서의 회개
  하나님의 것은 거룩한 것으로 그것이 침범 당한 경우 배상제사를 드려야 한다.하나님의 거룩한 것이 합법적으로 평범한 것으로 돌이키는 경우(sancta desecration)가 있는데 이 경우 보통 속전을 지불하고 돌이키게 된다. 예를 들면 초태생을 하나님의 것이라는 규정이 있다. 이 규정에 의하면 맏아들은 성전에 바쳐 하나님의 거룩한 것이 되어야 한다. 만약 맏아들을 평범한 것으로 변경시켜 일반 백성의 집에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속전을 성전에 바쳐야 한다. 레위인이 바로 백성의 맏아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것이 되는 것이며 그들은 백성들이 바친 속전으로 운영되는 성전에서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법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평범한 것으로 바꾸어 하나님께 손상을 입힐 경우(illegal sancta desecration) "마알"의 범죄에 해당하며 이 경우 배상제사를 드려야 한다. 배상제사와 회개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는 핵심적인 단어인 마알과  아샴 그리고 토다 등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 마알
  배상제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핵심적인 단어 가운데 "마알"에 대해 우선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마알"은 구약에 44번 나타나는데 모두 "사람에 대한 죄"가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죄"라는 의미로 나타난다. 반면에  하타아트는 사람에게 대한 죄를 표시하는 단어이다. 이러한 차이는 민수기 5:6에 분명히 나타난다;
        "남자나 여자가 사람에 대해서 잘못(하타아트)을 범하여 야훼께 범죄(마알)하게 될 때..."
  "마알"에 대한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언급은 없으나 이 단어는 배상제사를 드려야만 되는 잘못을 가리키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마알"의 경우는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에 대한 위배 행위(Sancta Trepass) 둘째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언약적인 맹세를 파기했을 경우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한 이름" 레 20:3; 사 57:15; 겔 36:20-22; 암 2:7; 시 111:9)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맹세는 "거룩한 말"(시 105:42)이 된다.
첫째 사 57:15; 겔 36:20-22; 암 2:7; 시 111:9)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맹세는 "거룩한 말"(시 105:42)이 된다.
  첫째의 경우, 즉 거룩한 성소에 대한 위배행위를 한 경우들은 제사장이 아닌 웃시야 왕이 분향하려다 문둥이가 된 경우(대하 26:16-18), 아하스가 성소를 범한 사건(대하 28:19,  22:25; 29:19), "헤렘"의 명령을 무시하고 물건을 감춘 아간이 돌에 맞아 죽은 사건(수 7:1-26), 요단 동편의 갓과 르우벤의 제단(수 22:16,22) 등이다. 둘째의 경우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을 파기한 경우들은 시드기야가 하나님의 이름을 들면서 느부갓네살과  맺은 조약을 파기한 경우(겔 17:19)를 들 수 있다. 그외 "마알"에 해당하는 것은 사울이 놉의 제사장들을 죽인 사건(삼상 22:18-19), 우상숭배의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마알"은 결국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 죄를 말하는데 거룩한 성소를 침범하거나 하나님 자신인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을 깨뜨릴 때 범하는 죄를 말하며 이러한 죄는 무거운 죄로 범죄자 뿐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가 함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마알"을 범했을 경우에는 하나님만이 그 범죄자를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공동체를 처벌하는 것은 결코 인간이 행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아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닌데 이 경우 제비를 뽑아 발각된 경우이기에 하나님이 죄인을 지목한 것으로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죄인을 공동체가 대신 처벌하게 되는 것이다(수 7:1-26). 특히 역대기기자는 유다가 "마알"의 죄 때문에 멸망하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대하 36:14).
  "마알"의 죄를 범할 때는 120%를 배상하고 배상제물(혹은 그 가치 만큼의 금전)을 드려야 한다. 배상제사를 드려야 되는 또 다른 경우들을 보면 거룩한 음식을 먹은 경우(레 22:14-16), 나실인이 드리는 배상제사(민 6:1-12), 예레미야의 예언(렘 2:3), 바벨론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드리는 배상제사(에스라 10:19) 등이 있다.
 

2. 아샴
  배상제사에서 회개의 개념을 논할 때  핵심적인 단어는 바로 "배상제사"로 번역되는 "아샴"이란 단어이다. 그런데 "아샴"이란 단어에는 네 가지의 서로 다른 뜻이 포함되어 있다. 명사인 "아샴"은 "배상" 또는 "배상제사"로 번역할 수 있다. 그리고 동사인 "아샴"에 만약 전치사 "라멧"이 붙은 명사(사람을 나타내는 명사)가 목적격으로 되어 있으면 그 뜻은 "...에게 책임이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만일 "아샴" 동사 다음에 목적격이 없을 때에는 "죄책감을 느낀다"라는 뜻이 된다. "아샴"의 네 가지 의미는 다음의 본문들에서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 그는 전부를 회복시키되 5분의 1을 더하여 돌려줄 것이며, 그가
         죄책감을 느끼는 날에 그 주인에게 줄 것이라. 그는 제사장에게 배상
        제물  즉 야훼께 드리는 그의 배상물을 가져오되, 짐승떼 중 흠없는 수
        양이나 혹은 그 가치대로 가져올 것이라. (레 6:5b-6)
        ... 사람이 죄책감을 느낄 떄는 그가 저지른 잘못을 고백하고, 전체를
        배상하고 그 위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배상해야될 본주인에게 돌려줄
        것이라. (민 5:6b-7)
  이 중에 중요한 것은 "죄책감을 느낀다"는 의미인데 보통 이제까지는 다르게 번역되어 왔다. 레위기 5:17의 예를 들면 "죄 혹은 죄인"이라는 의미로 "허물이라"(개역), "죄를 유발한다"(NEB), "죄라"(RSV)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 경우 그 다음에 계속되는 "그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구절과 동의반복(tautology) 되는 이상함이 있다. 더구나 무슨 죄인지 정확히 몰라도 배상제사를 드리는 레위기 5:17-19의 경우에는 이 번역이 적합하지 않다. "죄책감을 느낀다"고 번역되는 "아샴"을 찾아 보면(레 4:27; 5:2, 3, 4, 5, 17; 6:4 [MT 5:23]) 그 단어가 "죄" 혹은 "죄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발생되는 심리적인 양심의 가책을 말하는 결과적인 의미의 "아샴"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의미의 "아샴"이 모두 조건절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샴"이 그다음 행동을 유발시키는 동인으로서 작용한다는 의미이며 이러한 의미는 "아샴"이 행동의 결과인 "죄"이기 보다 행동의 원인인 "양심의 가책"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 "아샴"이 결과적으로 사용된 예는 예언서(호 5:15; 시 11:5)와 시편(시 34:21-22 [MT 22-23절]) 등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주로 "고통당하다" 혹은 "처벌을 받다" 등의 동떨어진 의미로 사용되었다.
  기본적으로 배상제사는 세속적인 재판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죄책감을 느끼는 본인이 제사장에게 나아가 고백하고 배상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심리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아 죄책감을 느끼는 단계는 배상제사의 핵심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범죄자가 양심의 가책을 받아 죄책감을 느끼면 하나님과 화목하려고 할 것이며, 이 때 하나님은 사람에게 손해를 입힌 것은 120% 배상하고(레 5:16) 하나님에게 손해 입힌 것에 대해서는 배상제사를 드리도록 하는 것이다.  제사장보다 예언자들이 더 강하게 회개를 강조한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 모든 제사의 전단계에는 양심의 가책과 죄의 고백이라는 회개의 행동이 있음을 볼 때 제사장들이 얼마나 회개를 강조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범죄자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내면세계의 현상이며 죄를 범한 사람은 심리적으로 무거운 짐을 지게 되는 것이다. 양심에 가해지는 내면적인 형벌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제사장은 죄로 인해 혼자 고독하게 고통받는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제사를 집전하여 그들의 무거운 짐을 벗겨주고 고통을 말끔히 씻어 주는 역할을 한다.
 

3. 토다
  회개에 관한 용어 가운데  아샴이 마음 속으로 죄를 뉘우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면, 토다는 입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을 말한다. "고백하다"라는 뜻의 동사형은 야다의 히트파엘형으로 제사에서는 언제나 목적격이 따라온다. 그러나 포로 후기에는 이 단어 뒤에 목적격이 없으며 제사와도 무관하게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단 9:4; 스 10:6; 느 1:6; 9:2, 3). 고백한다는 것은 입으로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속마음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것 아샴과는 구별된다. 반드시 죄를 고백해야 하는 경우는 비고의적 혹은 우발적인 경우가 아니라 고의적인 죄를 저지른 경우인데(5:1-4; 16:21; 26:40; 민 5:6-7) 죄를 고백하면 고의적인 죄가 비고의적인 죄로 경감되는 법률적 효과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누구에게 고백하느냐 하는 것과 언제 어디서 고백하는가 하는 것이다. 

 죄의 고백은 본인이 할 수도 있고(삼상 7:6; 왕상 8:33-43; 스 10:1; 느 1:6; 9:2-3) 제사장이 대신 할 수도 있다. 제사장이 대신 죄를 고백하는 경우는 희귀한데 대속죄일 제사에는 대제사장이 백성의 죄를 고백하는 장면이 나타난다(레 16:21). 죄의 고백은 주로 하나님에게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손상을 입은 사람에게도 할 수 있다.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는 경우는 피해 입은 사람에게 배상하고 피해자로부터 용서를 받기 위해서이며 배상제사의 경우는 반드시 피해자에게 고백하고 배상해야한다(레 6:1-7; 참조 [마 5:23-24]). 그러나 피해자가 반드시 용서해 준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은 주로 하나님에게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죄를 지은 본인이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는 장면은 정화제사를 드리기 전 고백하는 장면에서 찾아 볼 수 있다(레 5:1-5). 물론 제사장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죄를 고백해야 제사장이 어떤 제사를 드릴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죄인이 다른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혔을 때는 배상제사를 드리기 전 당연히 손해를 배상해야 되며(레 5:14-16; 6:6b-7; 민 5:6-8) 이 경우 죄를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어디서 죄를 고백하는가? 성전 안에서 죄를 고백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죄의 고백은 어디서나 가능하며 오히려 성전 밖에서 고백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사람에게 죄를 고백해야 하는 배상제사의 경우 특히 성전 밖에서 죄를 고백하기 마련이다. 구약 제사에 나타나는 성전의 모습은 무척 고요하다. 제사를 집전할 때도 말이 없는 제사가 진행된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다른 사람의 귀에는 들려지지 않고 개인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소리 없는 흐느낌이다. 제사장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은 제사를 진행시키는 선행조건일 뿐 제사가 집전되는 현장에는 침묵만이 흐를 뿐이다.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배상제사와 정화제사의 경우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기본적인 자격이 명시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죄는 비고의적인 죄 뿐이다. 비고의적인 죄를 저지른 죄인은 죄책감을 느끼면(아샴) 성전에 가서 배상제사 혹은 정화제사를 드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의적인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만약 고의적인 죄를 용서받으려면 고의적인 죄가 비고의적인 죄로 변경되어야 한다. 그런데 제사문서에 보면 고의적인 죄를 범한 죄인이 제사를 드리는 경우를 볼 수 있다(레 5:1; 16:21). 이러한 제사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은 회개를 통해 죄의 성격이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즉 고의적인 죄를 범한  사람이 죄책감을 느끼고(아샴) 입으로 그 죄를 고백(토다)하는 절차를 밟을 때(레 5:1-4; 16:21; 26:40; 민 5:6-7) 고의적인 죄가 비고의적인 죄로 변경되는 것이다.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법률적으로 효력을 발생시키는 힘이 있다. 죄를 고백함으로 죄인이 그 죄를 인정하고 뉘우친다는 것을 공표하는 것이요 법정에서는 정상참작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고독한 개인이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제사장은 회개하는 사람을 위해 제사를 집전하여 혼자 괴로워하는 마음을 치료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대속죄일의 경우 대제사장이 회개하지 않은 백성의 죄를 대신해서 회개함으로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회개에 관한 제사를 요약한다면 비고의적인 죄를 용서받는 모든 제사는 죄인이 죄책감을 느끼고 뉘우치는 심리적인 과정이 있어야 제사가 진행될 수 있다. 그러나 고의적인 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죄책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죄를 고백함으로 고의적인 죄를 제사가 가능한 비고의적인 죄로 변경시켜야 한다.
  죄인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모습은 성전 제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미스바에 모인 백성들이 회개의 고백을 하고(삼상 7:6), 솔로몬의 기도 가운데 백성의 회개를 언급하였으며(왕상 8:33-43), 에스라가 기도하며 죄를 자복한 것(스 10:1), 그리고 백성의 죄를 자복하는 느헤미야의 기도(느 1:6)와 백성의 회개(느 9:2-3) 등이다.

 

제사장과선지자의 역활

  제사장들이 회개를 이야기할 때는 예언자들이 사용하는 슈브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아샴, 토다, 니크나 등의 단어들만 사용한다. 이러한 현상들을 살펴볼 때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각기 회개를 강조하면서도 회개의 개념을 독특하게 형성하고 있다. 아마도 동일한 시대에 이들은 각기 다른 용어로 회개를 이야기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상호 영향을 미치면서 각기 독자적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후기예언자들은 제사의 절차를 강조하지 않고 오직 회개  함으로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설교하였다. 그런데 이 때 예언자들이 사용하는 단어는 "회개하다"라는 뜻의 슈브 이다. 즉 제사장들은 아샴과 토다를 사용하였지만 예언자들은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면 "남은 자가 회개한다"라는 내용이 제사장들은 "토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레 26:39-40) 이사야는 "슈브"라는 단어를 사용한다(사 10:21-22). 그리고 회개의 효력에 대해서도 서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1. 슈브
  슈브는 구약에서 101회 나타나는 단어로 예언서에서는 주로 "회개하다"라는 의미로 나타난다.   우선 전기예언서들과 오경에 나타나는 비제사적인 회개의 경우들을 살펴보자.
다윗과 아합과 요시야가 회개한 경우를 보면 다윗은 형벌이 경감되었고(삼하12:13-14 ; 24:10-14), 아합(왕상 21:27-29)과 요시야(왕하 22:18-20)의 경우는 형벌이 연기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모세의 경우는 전혀 회개가 효력을 나타내지 못하였다(신 3:23-26). 모세(출 32:11-13; 31-35; 33:12-16; 34:9; 민 12:11-13; 14:13-19; 신 9:16-29), 아브라함(창 18:23-32; 20:7), 사무엘(삼상 7:5-9; 12:19-25; 15:11), 엘리사(왕하 4:33; 5:11; 6:15-20) 등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지만 정작 범죄자들인 백성들의 회개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모습은 후기예언서에 나타나는 회개의 양상과는 차이가 있다.
  한편 후기 예언서에는 구약에 나타나는 슈브 중 78%가 나타나는데 주전 8세기 예언서(23회), 예레미야(27회), 에스겔(23회), 포로 후기의 문서(28회) 등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 단어가 후기 예언자들과 포로기 이후에  압도적으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후기 예언자들은 죄라는 것을 올바른 것에서 벗어난 것이라 보았으며 죄인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능력으로 그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에 제사장들은 죄를 없앨 수 있는 얼룩으로 보았다.  반면에 후기예언자들은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 단순히 회개함으로 죄를 완전히 없앨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제사장신학의 "회개"의 개념은 후기예언자들의 "회개"의 개념보다 시대적으로 앞섰다고 할 수있다. "아샴"과 "토다"는 "슈브"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이전에 사용된 언어라고 볼 수있다.
  그러나 같은 시대에도 제사장이 사용하는 특수한 용어와 예언자들이 사용하는 특수한 용어가 병행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같은 시대에 제사장은 제사를 집전하면서 "아샴"이라는 단어로 회개를 이야기 하였고 예언자들은 "슈브"라는 단어로 회개를 이야기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주전 8세기의 경우 예언자들은 "슈브"라는 단어를 사용한 그 때에 성전의 제사장들은 여전히 "아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제사를 진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는 제사장의 아들이었고 에스겔은 제사장이었으므로 제사장신학에 바탕을 둔 회개를 이야기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후기 예언서에 나타나는 회개의 개념은 갑자기 튀어나왔다기보다 오랜 세월동안 발전해 온 개념으로 여겨진다. 제사장신학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죄는 회개의 과정을 거쳐야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제사장신학은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만 향유하는 신학이 아니라 야훼의 보편적인 신학으로 널리 알려진 신학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종교생활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생활이었으며 누구나 제사의식과는 친밀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탕 속에서 예언자들은 회개를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 개념을 독특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사장신학의 회개 개념을 직접적으로 승계하지는 않았다.
  죄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회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제사장신학 뿐 만 아니라 전기 예언서나 신명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후기 예언자들이 이러한 회개의 개념을 활용하고 더욱 발전 강화시켜 독자적인 견해를 발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후기 예언자들은 제사 의식에 대해 날카로운 비난을 쏟아 부었다. 마치 제의가 더 이상 필요없다는 말같이 들리고 있다. 그러나 후기 예언자들이 죄 문제를 해결하는 절차에 있어서 배상제사나 정화제사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예언자들이 제사에 관해 비난을 할 때 감사제사(번제, 소제, 화목제)를 비난하였을 뿐 죄 문제를 해결하는 제사인 정화제사나 배상제사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후기 예언자들이 회개를 외칠 때 제사 없는 죄의 용서를 외쳤다기 보다 정화제사나 배상제사를 드리지 않고 감사제사를 드리는 면을 비난하면서 오히려 정화제사나 배상제사부터 드리라고 강조한 것이다(사 1:10-17). 따라서 예언자들이 제사장신학에 나타나는 회개의 중요성을 훨씬 강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제사의식과 예언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회개를 강조한 현상은 포로 후기 예언자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있다(욜 2:12-17; 말 3:7-18).
   요나의 경우를 예로  후기 예언자들은 제사의 절차없이 회개만으로도 죄의 용서가 가능함을 외쳤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내용은 회개의 신비한 능력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장면이 발생한 곳은 이스라엘 땅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땅이요 바다 한가운데이다. 요나의 예언을 듣고 회개한 니느웨는 이방인의 도시이며 이스라엘 땅이 아닌 이방인의 땅 앗수르의 수도였다. 따라서 제사장신학에 입각하여 볼 때 이방인의 땅에 사는 이방인에게 제사절차를 요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요나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의식의 무용론을 강조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요나의 경우를 통해 야훼종교는 제사의식의 형식과 율법의 껍질 속에서 과감히 탈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제사의식을 포함한 율법의 핵심이 다시 햇빛을 보는 극적인 장면을 볼 수 있다. 요나는 자신이 만든 우상을 깨뜨려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요나에 나타나는 제사의식은  이방인 선원들이 제멋데로 드리는 제사였으며 이들은 야훼께 기도하며 제사를 드렸다(욘 1:14-16). 제사의 중요성을 크게 위축시키는 모습이다. 중요한 것은 그 선원들이 야훼를 두려워하고 야훼께 돌아왔다는(회개했다는)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의 경우 제사의식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오직 금식하고 베옷을 입고 회개하는 모습만 나타난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시고" 형벌을 내리지 아니하셨다(욘 3:10). 죄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무엇이냐 하는 핵심적인 물음에 후기 예언자들은 과감하게 "회개"라고 대답한 것이다.
  결국 슈브 라는단어를 사용하여 회개를 강조한 후기 예언자들의 외침은 야훼종교가 이방인의 땅으로 확산되면서 점점 더 강화되어 간 것이다. 특히 신약시대에 와서 예언자들의 회개 개념이 더욱 강조되었고 성전이 사라지고 희생제사의 형태가 사라진 시대에 이르렀을 때에는 오직 회개만이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된 것이다.
 

제사장과 예언자의 공통된 회개 

  제사장과 예언자들이 회개를 이야기할 때 공통적으로 강조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분은 아니라는 점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지만 언제까지나 기다리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강조하였다. 특히 아모스와 이사야의 경우 회개의 문이 닫혀질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즉 처음에는 회개를 권고하지만(암 4:4-6, 14-15, 24; 사 1:16-20),  회개를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을 맹세하고(암 6:7-8; 7:8; 8:2; 사 5:8-23), 마지막으로 예언자가 성전에서 완전한 심판을 선포하는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이다(암 9:1-4; 사 6:9-13).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회개하지 않고 심판을 받는 것보다 회개하여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호세아와 예레미야는 회개를 강조하면서도 희망적인 예언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격려하였다. 예레미야의 경우 하나님의 구원의 선행 조건으로 회개를 강조하지 않고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로 된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 적이 있다(렘 31:27-37; 32:37-41; 33:1-26; 50:17-20). 이러한 메시지는 예루살렘의 파괴와 바벨론 포로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행한 희망의 메시지일 뿐 예레미야가 회개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한 것은 아니었다. 페르시아가 등장하고 유대인이 귀환할 수 있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예언자들이 다시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을 보아도 예언자들이 회개를 얼마만큼 중시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제사장신학과 예언자신학의 중요한 공통점은 공동체를 살리려는 의지가 집약된 신학이라는 점이다. 레위기 6:1-7의 경우 고의적인 범죄인데도 불구하고 배상제사를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정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민수기 15:30-31절의 경우 이러한 범죄자는 "끊어지리라"는 형벌을 받는데 비하면 상당히 예외적인 용서의 길을 열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갑절을 배상해야 한다는 언약법전의 규정(출 22:7-9)에 비한다면 120%을 배상한다는 레위기 6:5의 규정은 상당히 호의적으로 배려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배려는 결국 범죄자가 죄책감을 느낄 때 죄를 고백하고 큰 부담없이 배상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격려하는 규정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제사장의 권유는 결국 공동체 안에 부정의 요소를 제거하고 공동체 전체가 정결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예언자들 역시 회개를 외치는 것은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구약의 중요한 제사인 아샴은 "속건제" 혹은 "guilt offering"으로 번역하기 보다 "배상제사(reparation offering)"로 번역하는 것이 보다 더 적합하다. 배상제사를 필요로 하는 범죄는 마알인데 이 죄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여 하나님께 손상을 입힌 행위(illegal sancta desecration)를 말하는데, 세분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에 대한 위배 행위(Sancta Trespass)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언약적인 맹세를 파기했을 경우(Oath Violation)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배상제사는 거룩한 것에 손해 입힌 것을 배상한다는 의미가 그 핵심이기에 금전으로도 드릴 수 있다. 배상제사의 이러한 배상의 의미는 "되돌리다" 혹은 "회복시키다" 등의 뜻을 가진 헤쉬브와 쉴렘 등의 단어들과 함께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더욱 명확해진다.
  배상제사의 핵심적인 단어는 "아샴"이란 단어이다. "아샴"이란 단어에는 네 가지의 서로 다른 뜻이 포함되어 있다. 명사인 "아샴"은 "배상" 또는 "배상제사"로 번역할 수 있다. 그리고 동사인 "아샴"은 그 다음에 목적격이 있을 때는 "...에게 책임이 있다"는 의미가 되며, "아샴" 동사 다음에 목적격이 없을 때에는 "죄책감을 느낀다"라는 의미가 된다. 죄책감을 느끼는 아픔 즉 회개가 배상제사를 출발시키는 핵심적인 요인이며 이러한 요인은 죄를 고백하는 행동으로 이어지면서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특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고의적인 죄의 경우에도 제사를 드려 용서를 받는 길이 열려있는데 이 경우 죄를 고백하는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즉 죄를 고백함으로서 고의적인 죄가 비고의적인 죄로 변경되어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죄가 되는 것이다.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죄책감에 시달려 고통받는 개인이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 그 고통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이며 제사장은 이러한 일을 도우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죄문제를 해결하려할 때 배상제사를 포함한 제사장신학에서 회개가 필수적이라면 예언자신학에서는 회개가 더욱 핵심적이라 말할 수 있다. 차이점을 살펴보면, 제사장들은 죄를 제사의식을 통해 없앨 수 있는 얼룩으로 보았다면 예언자들은 회개만으로도 죄를 완전히 없앨 수 있다고 강조한 점이다. 또한 사용하는 용어도 제사장들은 아샴, 토다, 니크나 등의 단어들을 사용하였으나 예언자들은 슈브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은 각기 독특한 용어를 사용하여 회개의 개념을 발전시켰음을 엿볼 수 있으며 상호간의 영향도 주고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예언자들이 포로후기에 갈수록 더욱 회개를 강조하면서 제사의식과 무관한 회개의 위력을 강조한 점으로 보아 회개의 개념을 확대 발전시킨 인물들은 예언자임을 알 수 있다.
  제사장신학이나 예언자신학에서 회개가 이처럼 강조된 것은 범죄자에게 용서의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죄의 심각성을 깨우치려는 교육적인 의도를 엿 수 있다.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고 고백하는 절차를 통해 범죄의 재발을 예방하고 공동체를 정결하게 유지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공동체를 정결하게 하고 공동체를 살리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진 것이 바로 회개의 절차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