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해양민족의 발흥

페니키아(두로)

호리홀리 2015. 7. 7. 13:52

 

페니키아[Phoenicia]

 

 

 


 

 

 

 

 

 

이스라엘과의 관계: 두로 왕 히람 1세는 다윗과 교류하여 동맹 관계를 이루었는데 백향목과 목수, 석수, 사자들을 보내어 다윗 궁을 짓게 하였다(삼하 5:11; 왕상 5:1). 솔로몬이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만들 때 두로 왕 히람은 항해에 익숙한 선원들을 보내었고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목재, 돌, 장인들을 보내었다(왕상 9:26-28). 오므리와 아합 때도 이스라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엣바알(Ethbaal)은 그의 딸 이세벨을 아합과 결혼시켰다(왕상 16:31). 그 결과 베니게의 종교인 바알 숭배가 이스라엘에 영향을 크게 끼치게 되었다(왕상 11:5; 왕하 23:13).

주변국과의 관계: 베니게는 주변의 강대국들의 침략을 계속적으로 받아왔다. BC 9세기경 앗수르의 아수르나시르팔(Ashurnasirpal) 2세의 공격을 받고 패배하여 옷감, 귀금속, 조각한 상아, 목재를 조공으로 바쳤다.

BC 8세기경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에게 공격을 받았고 살만에셀에게 침략당하였다. BC 700년경 산헤립은 베니게를 공격하여 시돈의 엣바알을 새 왕으로 옹립했지만 이 왕은 BC 677년 앗수르의 에살핫돈에게 반란을 일으킴으로 멸망당하였다.

두로는 그보다 오랫동안 번영을 누리며 지속되었으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BC 572년에 함락당했다. BC 539년 바사의 고레스 왕에 의해 베니게는 다시 독립적인 도시로서의 지위를 회복했지만 BC 332년 그리스의 알렉산더에게 함락 당하였다. 그럼에도 베니게는 그리스 - 로마 시대에도 계속 상업적인 중요성을 인정받았고 헬라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베니게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던 기간에 이곳에 들러 전도하셨으며(마 15:21),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셨다(막 7:24-31). 예루살렘에서 핍박을 받아 흩어진 성도들에 의해 이곳에 복음이 전해졌다(행 11:19; 15:3).

바울도 전도여행 중 이곳을 통과하였다(행 21:2).

 

두로(Tyre) = 티레(Tyre)

두로는 아셀 지파에게 분배되었으나 정복하지 못했던(수 19:24-31; 삿 1:31-32) 지역이다. 두로 왕 히람 1세(Hiram1) 는 다윗과 솔로몬과 교류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다윗이 궁전을 건축할 때는 일꾼과 백향목, 목수, 석수, 사자들을 보냈고(삼하 5:1-12,왕상5:1)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도 일꾼과 백향목 잣나무, 금을 보내어 성전 건축을 적극적으로 도왔다(왕상 5:1-12; 대하 2:1-16). 이에 대한 대가로 솔로몬은 히람 왕에게 두 왕 사이에 맺은 약조(왕상 5:12)를 지켜 밀과 기름, 포도주 등 농산물(왕상 5:11; 대하 2:1-18)을 제공하였고 갈릴리의 성읍 20개도 주었다(왕상 9:10-14).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 후람(대하 2:3, 11; 8:18; 9:10)으로 기록하였다.

베니게의 중요한 해안 도시로 시돈에서 남쪽으로 40km, 악고에서 북쪽으로 45km 지점에 위치한 곳이다. 두로는 고대에 세워진 도시로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BC 2800년경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베니게는 항해, 조선술이 발달해 해상무역을 장악했던 해양국으로, 베니게의 주요한 항구 도시인 두로는 국제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사 23:8 참고).

두로의 주산물로는 자색 염료, 금속 세공, 유리 기구 등의 제조로 유명하였는데 두로의 배들은 애굽, 구브로, 로도스, 시실리, 북아프리카의 식민지들과 다시스를 항해하며 자색 물들인 옷감과 재목, 밀, 기름, 포도주, 금속, 노예, 말 등을 수출하여 두로에 엄청난 부를 가져왔다(대상 22:4; 겔 27:3; 사 23:18).

정치적, 지리적 면에서 두로는 지리적, 산업적 여건 때문에 힘있는 나라들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1세에게 공격 받았으며(BC 1094) 살만에셀 3세 때는 조공을 바쳐야 했다(BC 853).

계속해서 디글랏 빌레셀 3세와 살만에셀 5세에 의해 공격을 받았으나 완전히 정복당하지 않고 결국 BC 722년 앗수르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앗수르 왕 산헤립에 의해 베니게가 정복당하고 에살핫돈에 의해 시돈이 정복당하자 두로의 바알 왕은 에살핫돈과 협정을 맺고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그 후 신바벨론 제국에 의해 계속 공격을 받았으며 느부갓네살이 13년 동안이나 두로를 포위하며 공격하자 두로는 이때 힘을 상실하였다. BC 539년 바사의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했을 때 두로도 그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두로는 여전히 백향목과 다른 생산품들을 수출하며 무역과 해운업을 계속하였다. 알렉산더에 의해 완전히 정복당했지만 알렉산더를 이은 셀류쿠스 왕조 때에는 이전과 같이 무역과 산업이 활발한 도시가 되었다.

BC 126년 두로는 다시 독립하였으며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 정복당했을 때(BC 64)도 계속 독립된 상태를 유지하였다.

 

예수님과 두로 땅: 두로는 유대인들이 기피하는 이방 땅이었지만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완악함을 지적하시며 두로와 시돈을 언급하셨다(마 11:21-22; 눅 10:13-14). 예수님은 두로가 이방 땅이었지만 가셔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 들린 딸을 고쳐주셨으며(마 15:21; 막 7:24) 그곳에서 가르치셨다(막 3:8; 눅 6:17).

 

시돈(Sidon)

시돈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Jezebel) -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BC 874-853년)의 왕비가 된다.(왕상 16:31). 시돈왕 엣바알은 시돈의 왕 펠레스(Pheles)를 죽인 후 왕위에 올랐고 그의 이름 ‘엣바알’의 뜻은 ‘바알과 함께한 자’라는 뜻이며 이것은 그가 바알에게 헌신한 열성적인 바알 신 숭배자라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강한 이교적 배경을 갖고 있었던 이세벨은 성경에서 가장 이교적이며 잔인한 성격의 여성으로 묘사되었다(왕상 21:5-16, 25; 왕하 9:22).

시돈은 두로와 함께 지중해 연안의 최대 항구 도시이자 고대 베니게(페니키아)의 상업 도시였다. 베니게의 도시 국가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였으므로 때로 베니게를 시돈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두로에서 북쪽으로 3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곳은 지정학적인 이유로 앗수르, 바벨론, 바사(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제국 등에 의하여 차례로 지배를 받았다. 시돈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때 스불론과 아셀 지파의 북쪽 경계를 이룬 땅이었으나(창 49:13; 수 19:28) 아셀 지파가 이들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사사 시대 때 시돈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압제하기도 하였다(삿 10:12).

시돈 사람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던 민족으로 시돈과 두로의 우두머리 신인 바알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섬기도록 영향을 미쳤다(삿 10:6). 솔로몬은 이곳 출신의 여인과 정략 결혼을 하여 이들의 우상 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고(왕상 11:1, 5; 왕하 23:13) 아합이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결혼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알 신 숭배는 극에 달했다(왕상 16:31-33, 18:17-40). 이로 인해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요엘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물들게 한 시돈의 멸망을 예언하였다(사 23:12; 렘 27:3, 6; 겔 28:21-22; 욜 3:4-6).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할 때에 시돈 사람들은 백향목을 벌목하여 욥바로 보냈으며(왕상 5:6) 포로 귀환 후 성전 재건을 할 때에도 시돈에서 백향목을 가져왔다(스 3:7).

신약 시대에는 시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사람들이 왔으며(막 3:8) 예수님도 시돈에 가셔서 병자를 낫게 하셨다(마 15:21). 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는 길에 이곳 시돈 땅에 들러 친구들에게 대접받았다(행 27:3).

 

페니키아 (Phoenicia) = 베니게(성경/라틴어,포에니)

지중해 동안을 일컫는 고대 지명. 일반적으로 북쪽의 에리우세루스에서 남쪽의 카르멜산(성경,갈멜산) 까지를 가리키나 시대에 따라 그 범위는 달라진다.

베리토스(베이루트, Beirut), 시돈(Sidon), 티레(Tyre/성경,두로), 비블로스(Byblos) 등의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한 도시연맹의 형태를 취했으며, 거주민은 주로 해상무역에 종사했다. 페니키아는 오늘날의 시리아와 레바논 해안지대, 즉 지중해 동안을 일컫는 고대 지명이다. 일반적으로 북쪽으로는 오늘날 카비르 강으로 불리는 엘레우세루스(Eleutherus)강에서 남쪽으로는 카르멜(Carmal) 산까지를 가리키나 시대에 따라 그 범위는 달라진다.

하나의 정치 단위로 통일된 적은 없으나 시기마다 세력이 강력한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한 도시연맹의 형태를 취했다.

 

 

주요 도시로는 베리투스(Berytus, 오늘날의 베이루트), 티레(Tyre/성경,두로), 트리폴리(Tripoli), 시돈(Sidon), 아크레(Acre, 아코: Akko), 비블로스(Byblos), 우가리트(Ugarit, 오늘날의 라스샴라: Ras Shamra) 등이 있다.

페니키아인들은 주로 지중해를 통한 해상 무역에 종사했으며, 발굴 자료에 따르면 이집트 제 4왕조(B.C. 2613 ~ B.C. 2494 추정) 때부터 이집트와 비블로스(Byblos) 간의 상업 교역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페니키아인의 기원은 셈어족(Semitics)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이 B.C. 3000년 경 서쪽으로 이주하여 동지중해안에 정착한 데서 주로 찾는데, 그들의 원래 고향이 어디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페르시아만 연안으로 추정되고 있다.

페니키아인은 초기에는 가나안(Canaanites)계(系)가 주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시간이 지나면서 아리아계, 후리르계와 혼혈을 이루어졌다.

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불렀는가는 확실치 않으나, 페니키아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은 그리스인들에 의해서였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을 포이니키스, 즉 '자(紫)색의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페니키아인들이 값 비싼 보랏빛 염료를 만드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B.C. 1200년 경 페니키아가 해상 무역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

페니키아는 본래 이집트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B.C. 1500년 경까지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스 3세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B.C. 14세기에 들어 히타이트와 아모리인(Amorites)이 이집트를 공격하면서 페니키아는 정치적 혼란기를 거쳐 독자적인 해양 세력으로 성장했다. B.C. 1250년경에 이미 페니키아는 동지중해연안과 에게해 연안을 장악했으며, 티레, 시돈, 트리폴리, 아라두스, 비블로스 등의 도시 국가들이 크게 발전했다.

B.C. 12세기에 이르러 이집트의 영향력이 매우 약해지면서, 페니키아는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스스로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지중해 연안의 사이프러스, 코카서스, 사르다니아, 이베리아 반도 등을 식민지화 한 것은 물론이며,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서안과 동인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해상 교역과 문화 전파를 통한 페니키아의 전성기는 약 400년간 지속되었으며, 이 시기에 오늘날 알파벳의 모태가 되는 페니키아어 알파벳이 발명·보급 되었다.

그러나 B.C. 9세기에 이르러 아시리아 세력이 팽창하면서 페니키아의 독립성은 점차 축소되었으며, 기원전 538년에 이르러서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B.C. 4세기 무렵 그리스가 성장하자 페니키아는 B.C 350년에 시돈이 공격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그리스의 한 속주가 되었다. 특히 티레(성경,두로)는 B.C. 333년 ~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직접 통치를 받았으며, B.C. 64년 페니키아 전역이 로마의 시리아 속주로 편집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그리스의 통치 하에 있었다.

 

페니키아의 항해술

페니키아는 중개무역을 중심으로 하는 해상 교역을 통해 지중해 전역을 장악했는데, 그 바탕에는 우수한 조선기술과 항해기술이 있었다. 특히 페니키아의 행해술은 연안항법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천문 관측과 조수간만의 차·조류의 흐름 등에 대한 전문 지식을 토대로 하였다. 또한 조선기술에 있어서도 전투를 목적으로 하는 길고 폭이 좁은 선박과 상선용의 라운드 선박으로 선박의 종류를 이원화 시켰으며, 상선의 경우에는 화물적재능력을 최대화 하기 위해 노(櫓)가 거의 필요 없는, 돛에 의존하는 범선을 주로 사용했다.

 

페니키아의 주요 생산품과 교역품

페니키아는 삼나무·소나무 등의 목재, 티레·비블로스·베리투스에서 생산되던 고운 아마포, 고둥의 분비액에서 추출하는 보랏빛 염료와 염색 옷감, 시돈에서 생산되던 자수제품, 포도주, 금속, 유리 공예품, 채색 유기, 소금, 건어물 등을 주로 수출했다. 또한 지중해연안, 아프리카, 아시아를 잇는 중개 무역을 통해 귀금속, 상아, 공예품 등을 사고 팔았으며, 식민지였던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은을, 사이프러스에서는 구리를 생산해 거래했다.

 

페니키아의 문화: 미술, 공예, 알파벳 페니키아 문화에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에게해, 시리아의 문명에서 온 소재와 관념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오늘날 남아있는 대부분의 페니키아 유적은 주로 평면 부조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비블로스에서 출토된 아히람(Ahiram, B.C. 11세기 말 비블로스의 왕)의 석회암 석관이다.

페니키아의 문화 유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페니키아 문자이다. 페니키아는 본래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를 사용했으나 B.C. 15세기 경에 22개의 자모로 이루어진 고유한 문자체계를 발명했으며, 비블로스를 중심으로 사용되었다. 후에 그리스인들이 이 표기법을 채택하여 오늘날 로마자 알파벳의 원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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