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갈등과 멸망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갈등부터 멸망까지

호리홀리 2015. 7. 7. 13:20


12지파는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단결되었으며, 일사분란 끝에 팔레스타인을 정복했다.
반면에 사사기의 기록들은 각 지파의 지극히 위험하고도 힘에 겨운 개별적인 행동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나마도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토착민들이 정착해 있던 평야 지역보다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던 산지에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가나안에는 수백개의 작은 도시 국가들이 내륙 평지와 해안 평야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가나안을 지리적인 측면에서 나누어본다면 크게 네 지역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지중해 연안의 해안지역, 갈릴리와 에브라임 산지 및 유다 산지로 연결되는 중앙 산지 지역, 갈릴리 바다 - 요단강 - 사해로 연결되는 요단 협곡, 요단 동편 고원 지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좀 더 자세하게 지리적 특성을 살펴보면 이 네 지역은 상호간의 교류가 형성되기 어려운 지리적 구조를 지니고 있었고, 그와같은 지정학적 원인은 평야 지역보다 산지에 정착한 각 유대 지파들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 정착 후 이스라엘은 각 지파들이 서로 밀접한 유대 관계를 완벽하게 유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갈릴리는 넓은 이스르엘 평원에 의해서 므낫세와 에브라임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고, 유다와 에브라임의 관계도 긴밀하지 못했는데, 둘 사이에는 요르단 계곡의 장벽이 가로막아 상호 교류를 방해했다. 흩어져서 정착한 지파들이 북쪽과 남쪽으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지중해와 요단강의 분수령을 가르는 좁은 산마루 길을 제한적으로 이용해야만 했는대, 그와같은 지정학적 이유들은 지파간의 교류를 가로막는 커다란 장해 요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가나안의 지리적 특성은 자연스럽게 각 부족과 지파들을 분리시켰으며, 역사 발전 과정에서 어떤 원인들과 필요들에 의해서 지파의 이합집산이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와같은 지파 이합집산의 결과는 어떤 식으로든지 장차 북쪽 이스라엘 집단과 남쪽 유다 집단으로 굳어지는 민족 분열의 단서가 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에브라임은 세겜과 벧엘 사이에 위치한 중앙 산지 지역에 정착했고, 에브라임 지파 북쪽에는 므낫세 지파 그리고 남쪽에는 베냐민 지파가 자이 잡았다. 또한 요단강 동편에는 길르앗이 자리를 잡았다. 베냐민은 기브아를 중심으로 에브라임 남쪽에 위치해 있지만 때로는 베냐민이 에브라임의 일부인 것처럼 묘사된 곳도 있다.
므낫세 지파는 북쪽 중앙 산지에 위치해 있으며 이스라엘 계곡까지 차지했다. 요단 동편에는 마하르 족속이 있었으며 그들은 바산 지역에 거주했다. 한편 므낫세 지파의 영역에는 여러 개의 원주민 주요 도시들이 있었고, 므낫세 지파는 그 도시들의 외각에 거주했으나 도시들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에브라임-므낫세-베냐민은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의 자손들이다. 훗날 남북이 분열되어서 북왕국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를 때의 중심 지파들도 바로 이들 세 지파들이었다. 그리고 에브라임-이스라엘 지파 집단은 경제-사회-문화-지리적으로 밀착되어 있었으며, 사사 시대 초기부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지파 집단이었다.

갈릴리-이스르엘 지파 집단 ,이 집단에는 아셀,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 등이 속하며 이들은 벳산에서 단 이남까지 그리고 갈릴리에서 지중해 연안까지의 지역을 차지했다. 스불론과 앗사갈(창49:13; 신33:18-19) 아살(삿5:17)지파들은 원래 지중해 연안에 있었으나 후에 해양 족속들에게 밀려서 내륙으로 이동했다. 

단, 르우벤, 갓 지파 집단 , 단 지파는 이동했으며, 르우벤과 갓은 유목을 하며 이동하는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단 지파는 원래 에브라임/베냐민 지파 서쪽 지중해 연안 지방에 살았으나 후에 에브라임을 통과해서 내륙 북쪽으로 이동했다.  단은 헬몬산 기슭까지 이동해서 단(라기스)이라는 도시를 만들었다.
르우벤과 갓 지파들은 요단 동편에 거주하였는데, 그 경계선이 모호하다. 모압왕 메사의 비문에는 '갓 사람들'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갓 사람들'이 살던 땅은 '아타롯 땅'이라 하였다. 그리고 아타롯은 오늘날 디본으로부터 북북서쪽으로 약 13Km에 있는 지역이다.

유다 산지의 쉐펠라, 네게브, 유다 광양에 걸쳐 거주한 족속들은 유다, 갈렙, 고라, 그나스, 예라멜, 겐, 시몬 등이었다. 갈렙 족속은 헤브론 근방에 있었으며(민13-14장) 사사 웃니엘은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이었다.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연합은 여러 면에서 지파동맹이었다. 그러나 지파 동맹은 강력한 중앙 집권적인 세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다만 강력한 힘을 낼 수 없는 지방 분권적인 연합체일 뿐이었다. 그 이유는 다른 원인들도 많이 있겠지만 이스라엘 영토가 지형적으로 정치적인 단일체를 형성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했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 주의 하나였다. 결과적으로 왕정 이전의 시대는 위에서 기술한 대로 지형적인 영향 아래 형성된 각 지파 집단들 사이의 분화가 심화되었고, 상호 간의 갈등 구조가 생겨나고 있었다.

유다는 네게브 지역에 위치해 있어서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과는 거리를 유지했고 팔레스타인 중앙 산악 지대에 자리잡은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가 왕정 수립까지 이스라엘 지파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결국 왕정 이전에는 지파들의 결속이 정치 사회적인 입장에서 변동이 심했으며, 오히려 결속 보다는 지형적인 요인 때문에 남과 북으로 서로 분리된 지파들 사이에 갈등 구조가 상존했다고 보아야 한다.

 

사사시대에 시작된 갈등이 표출된 것은 에브라임의 몽니와 다른지파와의 갈등 특히 므낫세와의 갈등이 기드온과 입다 때에 일어났다. 이전에도 에브라임은 여호수아를 배출했다는 기득권을 내세워 더 많은 땅을 여호수아에게 요구 한 적이 있다. 이런 사건들은 남북갈등의 시작을 보여주는 단초가 된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사울의 시기를 지나면서 두 집단의 지방색이 뚜렷해지고, 다윗 왕정 초기부터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무섭게 충돌한다. 약 200여 년간 존속해 왔던 이스라엘의 지파동맹은 블레셋의 침략으로 붕괴되기에 이른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느슨한 지파동맹 체제로는 대처할 수 없었던 대적이었다. 블레셋은 과거 몇몇 지파들에게만 관련되는 제한적 위협이나, 지파들이 연합해서 물리칠 수 있는 정도의 위협을 가해온 것이 아니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정복을 목표로 삼았고, 존립을 위협했다. 더욱이 그들은 제철에 대한 독점 덕분으로 우수한 병기들로 무장했으며, 잘 훈련된 군사들이었다.
반면 이스라엘의 지파동맹은 그들의 침입에 맞설만한 중앙 정부의 기능도 없었고, 당시 주변 민족의 일반적인 국가 형태인 권력 집중형 왕정도 아니었다. 상비군 제도가 없는 관계로 병사들은 조직적으로 훈련이 되지 않았고, 병장기의 상태도 형편 없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길 승산은 어디에도 없었다. 
주전 1050년 직후에 해안 평야의 가장자리에 있는 아벡 부근에서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다(삼상 4장).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의 전진을 저지하려다가 초전에 패하자, 여호와의 임재가 승리를 가져다주리라는 소망을 갖고 당시의 중앙 성소였던 실로에서 언약궤를 전쟁터로 옮겼다. 그러나 결과는 다시 참패해서 언약궤는 빼앗겼으며 이스라엘 군대는 뿔뿔이 흩어지고 언약궤를 모시던 제사장 흡니와 비느하스는 살해되었다.
그 후 실로가 점령되고 지파 동맹의 성소는 파괴되었다.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파동맹은 대항할 도리가 없었으며, 20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 옛질서는 파탄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족적인 위기 앞에 옛 질서와 다른 새로운 질서를 요구했으며, 그와같은 시대적 정황은 사울의 등장 배경이 되었다.

사울은 선지자 사무엘의 지명과 대중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새로운 질서를 지지하지 않았다. 왕정은 이스라엘의 전통과 맞지 않았으므로 반대를 했다. 그렇지만 당시의 상황과 그의 지위는 온 이스라엘이 요구하는 새 질서를 선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처음에는 사무엘이 백성들의 요구를 정면으로 반대했지만 각 지파의 장로들에 의해서 대변된 백성의 요구를 받아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삼상8:4-5). 그러나 사무엘 생전에 구 질서와 새 질서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고, 사울과 사무엘의 관계는 결국 단절되고 말았다. 그 결과로 사울은 사무엘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는다.

대중적인 영웅이었던 사울은 사무엘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나기드(영웅)라고 공포되었다. 통치 초기 사울은 대중들의 지지에 부합하는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암몬 족속과 블레셋및 아말렉에게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 이스라엘을 사면의 위험에서 해방시키고, 자기의 위치를 확고히 굳히는 듯 했다. 블레셋에 의한 지파 동맹의 붕괴, 새로운 질서의 요구, 대중의 지지, 권좌에 오름, 전투에서의 승리까지 사울은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사울은 사무엘과 결별했고, 곧 이어서 자신의 사위이자 새로운 대중의 영웅으로 떠오른 다윗과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비록 백성들이 환호로써 사울을 왕으로 추대하고, 사무엘이 기름을 부어서 왕이 되었지만 사울은 옛 전통과 칼로 베듯이 단절한 것은 아니였다. 사울은 왕이었지만 왕으로 살지 않고 이전의 사사들과 마찬가지로 옛 질서를 따라 카리스마적인 영웅으로 살았을 뿐이다. 그와같은 사울의 시대는 구 질서와 새 질서가 공존하는 복합 구조이고, 사울 왕권의 한계였다.
사울은 자기의 시대에 이스라엘의 구 시대의 유물인 지파 체제를 대부분 그대로 두었다. 사울은 변화시킬 만한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니고 변화를 바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지파 조직은 과거와 다름없이 남아 있었고, 행정 기구나 관료 조직은 발달하지 않았다. 결국 사울의 그와같은 정체성의 불확실함은 사무엘과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했고, 다윗과의 권력 다툼에서도 대중의 지지를 잃게 되므로 권좌에서 물러나고 만다.
사울의 시대를 지나면서 사울과 다윗의 대결 국면은 이스라엘 집단과 유다 집단의 갈등을 심화시켰으며 대립의 구도는 점점 고착화 되었다. 북쪽 이스라엘은 비록 그 시기가 아주 짧았지만 사울이라는 구심점을 통해서 집단화되었다. 그리고 남쪽 유다는 사울의 집권 후반기에 등장하는 다윗을 구심점으로 집단화하게 된다.

다윗은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 출신이며, 그 지역의 호족인 이새의 아들이다. 이새는 베들레헴 에브라다 사람이었다(삼상17:12). 에브라다는 에브라임에 속한 족속의 명칭으로(삿12:5; 삼상1:1; 왕상11:26; 시132:6)  이새의 가문은 에브라임의 지역에서 남쪽으로 이주한 에브라다 족속의 일원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에게 와서 "우리는 왕의 골육입니다"(삼하5:1)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다윗이 데뷔하는 모습은 성경에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사울의 번민을 없애주는 악사로 기용되는 것이며(삼상16:14-23), 둘째는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죽임으로 무명의 목동에서 영웅으로 떠오르는 것이다(삼상 17장).
다윗은 데뷔 초기를 화려하게 장식하므로 대중들에게 새로운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왕자 요나단의 친구가 되고, 공주인 미갈과 결혼하기까지, 다윗은 승승장구했다. 공주 미갈과 결혼해서 왕의 사위가 되었다는 것은 합법적인 왕위 계승 후보로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사울은 대중 지지의 무게 중심의 추가 다윗에게로 기우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다윗을 견재하게 된다. 물론 다윗이 무용을 떨치는 장수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사울의 경쟁자가 될 수 있었지만, 다윗은 단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얻은 것 같다. 결국 사울이 위협을 느끼고 다윗을 경계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다윗이 사울로부터 독립해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윗이 사울로부터 이탈한 것은 자의든 타의든 결국 다윗이 자신의 지지자들을 세력화하는 출반점이 되었다. 다윗이 사울로부터 도주할 때, 도와준 인물들은 요나단, 미갈, 사무엘, 놉, 제사장 아히멜렉 등이었다(삼상19:11-21). 후에  갓과 다윗을 도운 놉의 주민들을 학살할 때, 탈출한 놉의 제사장 아비아달도 합류했다. 전통적으로 사울의 왕정을 반대해 온 사무엘과, 제사장 아히멜렉이 반역 인물인 다윗을 도와준 것은 다윗이 사울 통치 시기에 있었던 반대 세력, 혹은 불만 세력들을 규합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특히 아둘람 요새에서의 상황은 명백한 증거를 보여준다(삼상22:1-4).
"곤경에 처한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그(다윗)에게 모여왔고 그는 그들의 지휘자가 되었으며 400명이 그와 더불어 있었다"
다윗이 도피하였을 때, 그를 도와주었거나 따르는 자들은 적어도 일반 백성은 아닌듯 하다. 다윗을 따르는 무리들이 일반 백성과는 다른 집단으로 다윗이 일반 백성의 지지에 의존하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성경의 증언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다윗은 여러 곳에서 피해 다녔지만 그 때마다 백성들의 제보로 사울이 다윗을 쉽게 찾아내었으므로 다윗은 이스라엘에서도 유다에서도 발을 붙이지 못했다. 결국 다윗은 자기를 추종하는 자들을 이끌고 블레셋으로 명명하게 된다. 다윗은 사울이 죽기까지 일년 사 개월을 블레셋에 머물렀다. 다윗은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이 죽고 나서야 블레셋을 떠나 헤브론에 이르렀고, 다윗이 헤브론에 있을 때, 유다 사람들이 와서 다윗을 유다의 왕으로 기름부었다.(삼하2:4). 그 당시의 유다는 헤브론과 베들레헴 지역만을 말한다.
헤브론에서 7년 반(삼하5:4-5; 왕상2:11) 동안 다윗은 쉐펠라, 네게브, 유다 광야까지 영역을 넓혔으며, '이스라엘 장로들'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남부 유다만이 아닌 북부 이스라엘까지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갈등 관계는 이미 해소할 수 없을 만큼 심화되었다. 다윗이 왕위로 나아갈 무렵에는 도처에 건드리면 터질 갈등의 지뢰가 깔려 있었다. 장차 왕국의 분열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게되는 두 집단 사이에서 점점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대립 구도가 고착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윗은 이미 그와같은 분단된 국가 정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치세 동안 가능하면 북쪽 집단의 약점을 건드리고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행동을 자제해야만 했다. 그와같은 다윗의 노력은 어느 정도 결실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다윗은 집권 중에 사울 시대에 불완전했던 왕정 체제를 완성하고, 많은 전쟁에서 승리하므로 대제국을 건설한다. 물론 자국 내에는 여전히 분열의 소지가 남아 있어서 내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잘 수습되었으며, 아들 솔로몬이 왕권을 이어받기까지 남과 북 두 집단 모두에게 위대한 왕으로 남아 있었다.


길보아 전투의 결과로 사울은 전사한 세 아들과 함께 이스라엘의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진다. 당시 블레셋에 망명 중이던 다윗은 그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다윗은 사울이 죽은 후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이 된다. 이스라엘은 길보아 궤멸 후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게 되고, 북쪽 이스라엘 집단에서는 사울의 아들들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에스바알이 사울 가문의 왕위 계승권을 자기가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사울이 죽은 후 에스바알은 그의 친척 아브넬에 의해 요단 동편에 있는 마하나임에서 왕으로 웅립되었다(삼하2:8). 만일 마하나임 집단을 정부라고 할 수 있다면 블레셋인들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일종의 망명 정부였을 것이다.
에스바알 정권의 특징을 살펴보면 아버지 사울처럼 이스라엘에 대한 구속력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 망명 정부는 상당히 넓은 영토(길르앗, 중앙 팔레스타인, 갈릴리)를 통치한 것처럼 여겨졌지만 실제로 에스바알이 그 영토를 통치했다거나 영토에 속한 각 지파의 사람들이 그의 진영에 합류했다고 하는 증거는 없다. 과거 지파동맹 체제에 익숙해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왕위 세습의 원칙이 구속력으로 작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울이 죽은 후 특별한 대안이 없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암암리에 에스바알을 왕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가 사울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동적으로 충성을 바치게 한 것은 아니였다.
솔로몬 사후, 두 왕국이 분단되기 이전 다윗 정권이 처음 출범하던 이 시기에 이미 이스라엘은 너무도 분명하게 두 집단으로 구분되었다. 남과 북의 두 정권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나라가 별개의 실체로 출현하므로 이스라엘과 유다 집단은 둘 다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에스바알의 제위 기간은 불과 2년 밖에 되지 않는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서로 대치해 있던 두 왕국은 공공연한 전쟁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 이유를 다윗의 갈등 극복을 위한 노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다윗은 압도적으로 유리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일거에 북쪽 지역을 점령해 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해서 두 집단 사이 불화의 골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것 같다. 결국 다윗은 군사력보다는 정치적인 방법을 택했고, 다윗의 선택은 옳은 것이어서 멀지 않은 장래에'이스라엘'을 흡수해서 남북 통일을 달성하게 된다.

새 왕국은 태생적으로 옛 체제인 사울의 정권과는 크게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다윗의 집권은 과거의 고전적인 방식(지파동앵 체제 아래에서 대중의 지지를 업고 출범했던 과거의 방식 - 사사들은 대개 그 방식의 태두리 안에 있었다)을 따라 정권을 장악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의 초기 권력 기반은 지파 동맹 체제가 아니였으며, 오히려 강력한 군사력을 의지한 군사정권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될 때, 다윗에게 블레셋은 적지 않은 지지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남부와 북부는 다윗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통일되었다. 따라서 다윗이 창건한 새로운 국가는 언제든지 다시 갈라설 수 있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그와같은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윗이 두 지역 간의 소원한 갈등관계를 해소하려고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가는 몇 가지 사실만 들추어도 분명해진다.
다윗은 에스바알에 대하여 적대적인 일체의 행위를 하지 않았다. 다윗은 사울. 아브넬, 에스바알의 죽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주장했다. 아브넬과의 정상 회담 전에 그 전제 조건으로 사울의 딸이며, 첫째 부인인 미갈을 대려올 것을 제의했다. 아마도 미갈에 관해서는 미갈이 다윗의 왕궁에 거주하게 되면 집안으로부터 반역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사내 아이를 얻게 된다면 자신의 가문과 사울의 가문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그의 속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갈로 인한 다윗의 속내는, 미갈이 다윗의 아이를 낳지 못했고, 미갈과의 다툼 끝에 헤어지게 되었다(삼하6:20-23) 그야말로 망 사항일 뿐이었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돌보아 주므로 다윗이 사울의 후손을 완전히 끊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만 하다. 그러나 다윗의 온갓 노력에도 불구하고 친 사울 세력들은 다윗의 행위에 냉소를 보내면서 다윗은 자기들을 멸절시키기 위해서 골몰하고 있다고 믿었다(삼하16:5-8).
정권 창출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수의 문제들로 인한 불평은 다윗 집권기 내내 남아 있었고, 사울 가문의 왕권 주장과 북쪽 집단에 속한 문파들의 질시는 지속적으로 살아 있었다. 그것은 다윗 정권의 불안전 요인이었으며 풀 수 없는 문제들이었다. 그리고 그와같은 불완전 요인들의 표출은 압살롬의 반란이나 세바의 반란 세력에게서는 민중 봉기의 형태로 나타났고, 다윗 집권 후반기에는 권력 누수라는 힘의 약화를 가져와서 왕자들의 차기 집권을 향한 권력 쟁투로 나타난다. 

삼하18장, 압살롬의 반란에 절대적 지지 세력이 유다 집단보다는 상대적 피해 의식을 가진 다수의 이스라엘 집단에 속한 자들이었다.
다윗과 압살롬 분규는 압살롬의 누이 다말이 그들의 이복형제이자 다윗의 맏아들인 암몬에게 강간을 당하고 내어 쫓기는 모욕을 당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다윗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압살롬은 만 이년 동안 때를 기다린 끝에 기회를 만들고, 에브라임 근처 바알하솔 농장에서 암몬을 무자비하게 살해한다(삼하13:20-39). 압살롬은 사건 후 어머니(그술의 아람족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나라에서 삼년의 망명 생활을 보내다가 요압의 주선으로 귀국 허락을 받고 마침내 귀국하게 된다. 다시 이년이 지난 다음 왕의 용서를 받고 복권이 되었으며, 그 때부터 왕위를 찬탈할 구체적인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압살롬은 사년 동안 거사를 준비한 끝에 헤브론에서 스스로 왕이 되어 거병했다.
압살롬의 방법은 소외 계층인 이스라엘 집단의 마음을 훔치는 것이었다(삼하15:6). 압살롬은 역모를 꾸미며 자신의 사조직을 키워 나간 한편 법적인 문제로 생겨난 민중의 불만을 이용했다. 이 무렵 쯤 왕국의 영토가 거대화되면서 다윗은 점점 일반 대중과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다윗의 관료주의 체제는 민심이반을 초래했으며 압살롬은 그 빈틈을 이용했다. 결국 압살롬은 일반 대중의 호웅을 이끌어내게 되었고 헤브론에서 봉기한 것이다.

압살롬은  두 종류의 갈등 구조를 이용했다. 하나는 헤브론과 예루살렘의 갈등이다. 이 때 쯤 헤브론의 민심은 상당히 다윗을 떠나 잇었던 같다. 그 근거로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사람들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으나 다윗은 처음의 근거지요 정치적 고향인 헤브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것이다. 결국 헤브론 사람들은 예루살렘과 다윗에게 패해 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헤브론은 압살롬이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다른 하나는 다윗 집안과 사울 집안 사이의 오래된 권력 투쟁 끝에 집권 세력이 된 유다 집단과 권력의 중앙에서 밀려나 피지배 계층이 된 이스라엘 집단과의 갈등이다. 압살롬은 그와같은 갈등구조를 잘 이용해서 백성들의 환심을 얻었고, 헤브론 봉기 후 예루살렘을 점령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렇지만 압살롬의 과정 안에는 유다 집단과 이스라엘 집단의 갈등 구조가 두텁게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두 집단 사이의 갈등이 표출되는 패러다임은 솔로몬이 죽은 후 여로보암의 봉기로 완전 분열의 결과를 낳기까지 동일한 구조 속에서 반복되고 있다.

삼하19장에서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제압한 후 압살롬을 지지했던 이스라엘은 전면에 나서 다윗을 예루살렘으로 모시는 일에 앞장서려한다. 이에 유다지파의 반발로  분위기는 고조되고 급기야 세바의 반란으로 이어지게된다.

 

사무엘상 11장 8절 - 사울이 베섹에서 그들을 계수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이요 유다 사람이 삼만이더라.

사무엘상 15장 4절 - 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그들을 들라임에서 계수하니 보병이 이십만이요 유다 사람이 일만이라.


사무엘상 15장에서 18장까지의 기록은 압살롬의 반란에 관한 내용인데 압살롬의 지지자들을 일관성 있게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지칭하고 있으며, 사무엘하 20장 이하의 베냐민 사람 세바의 반란 기사에도 이스라엘 사람과 유다 사람은 대조적으로 나오고 있다. 


 

세바의 반란은 압살롬을 피해 달아낫던 다윗이 미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전에 일어났다. 세바는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다. 반란의 원인은 다분히 지역적인 불평의 결과 때문이었다. 세바가 나팔을 불면서 다윗 정부로부터 독립할 것을 선동했다. 이스라엘은 다윗에게서 얻을 몫이 아무것도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 물려받을 유산도 없으므로 모두들 자기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삼하20:1). 세바는 사울 집안의 사람인데, 세바의 논리는 이렇다. 유다 사람이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셔갔으니 이스라엘은 다윗 왕국에 아무런 분깃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을 버리고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랐다. 압살롬의 반란의 주동 세력이었던 이스라엘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세바의 원인은 유다 집단과 하나 되기를 거부하는 이스라엘 집단의 열렬한 갈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세바의 반란은 정식적인 내란이었으며, 다윗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왕국에서 북쪽 이스라엘이 물러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결국 세바의 반란은 다윗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북 갈등이 전혀 해소되지 않고 잇다는 것을 말해 주며, 다윗 정권의 태생적 한계가 극명하게 드러난 예증이기도 하다.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기까지의 과정은 단순하지가 않다.  아도니아와 솔로몬의 정권투쟁은 실로 복잡하고도 치열하다.솔로몬의 즉위는 후계 구도를 놓고 오랜 세월에 걸쳐서 진행된 다윗 왕가 내부의 마지막 결말이라기 보다는 다윗 시대부터 계속되어온 갈등에서 비롯된다. 
대립 구도는 몇가지의 정형으로 나누어볼 수가 있다. 첫째는 제사장 사독과 제사장 아비아달의 갈등이다. 둘째는 '성전옹호론(pro-temple)'과 '성전반대론(anti-temple)' 사이의 갈등인데, 이것은 다윗 언약과 시내산 언약 간의 갈등이다. 세째는 헤브론과 예루살렘의 갈등인데, 이것은 헤브론 출신의 왕자들과 예루살렘에서 출생한 왕자인 솔로몬과의 갈등이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결과론적이지만 헤브론에서 출생한 맘논, 압살롬, 아도니아는 죽임을 당하고, 새로운 수도였던 예루살렘에서 출생한 솔로몬은 살아서 정권을 장악하고 왕위를 물려받는다는 것이다.
솔로몬 즉위 배경을 둘러싼 두 세력의 권력 투쟁이 두세력의 싸움이지만 그 속에도 역시 남과 북의 대립 구도는 함께 나타나고 있다.

 

솔로몬은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달리 여러 부분에 있어서 유다와 이스라엘을 구별하는 정책을 폈다. 북부 이스라엘 집단에 대한 지나친 차별정책과 학대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왕국 분열의 씨앗을 뿌리고 말았다. 위로는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고 우상을 숭배한 결과, 여호와의 진노를 사게 되었고, 아래로는 지나친 강제 징용으로 인해서 백성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솔로몬은 집권기 내내 억압과 강경으로 백성들의 불만을 다스렸지만 이스라엘 집단은 솔로몬 통치 기간에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다윗과 솔로몬은 왕정의 근본적인 문제인 지파들의 독립성과 중앙 정부의 요구와의 간격, 옛 전통과 새로운 체제 요구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더해서 솔로몬의 억압 정책은 그 간격을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넓혀 놓았다. 대부분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왕위 세습의 원칙을 받아드리기를 거부하였고, 다윗 가문의 영속적인 통치 주장도 배격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솔로몬의 전제 정치에 분노했다(신17:14-20).
다윗의 집권과 솔로몬의 집권은 그 성격과 내용이 서로 다르다. 다윗은 적어도 세습에 의해서 왕권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시대적 상황들이 얼마간 다윗의 동기로 작용을 했고, 전체는 아니지만 유다 백성들의 기름부음을 통해서 왕위로 나아갔고, 북쪽 집단과도 계약을 통한 정당한 승인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통일왕국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단지 지배계급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한 결과로 다윗의 왕권을 물려받은 것이다. 결국 솔로몬을 향한 북쪽 집단의 미움은 다윗에 대한 마음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시내산 언약에서부터 시초된 이스라엘의 옛 전통을 고려해 볼 때, 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정이 가져왔던 변화들에 거부감을 가졌는지, 또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다윗 가문에 지독한 반감을 드러내었는지를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은 아직도 새 질서에 동화되지도 않을 뿐 더러 묵인하고 받아드릴 수도 없는 세습 체제와 지파 체제의 갈등이었다.

솔로몬의 치세 기간은 유례없는 번영의 시대였다. 이스라엘이 이전에는 꿈도 꿀 수 없었고, 이후로도 다시는 맛볼 수 없었던 풍요로운 황금시대였다. 솔로몬은 외교와 내치에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그 성공을 바탕으로 수많은 국책 사업을 벌였고, 대부분 완수했다.
그러나 국가 재정은 솔로몬의 왕성한 활동을 지원하느라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렸다. 솔로몬의 천재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국가 재정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이전에는 없었던 세금을 백성에게 부과해야만 했다. 그리고 좀더 효과적인 세금 징수를 위해서 보다 체계적인 국가 행정 조직이 필요했다. 솔로몬은 국토를 열두 개의 행정 구역으로 재편하고 각 지역에는 책임있는 지방 장관을 두었다(왕상4:7-19). 이 행정 구역들은 몇몇 경우에 있어서는 옛 지파들의 영유지와 대략적으로 일치하기도 했지만 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지파들의 경계가 무시되었다. 물론 이러한 조치는 주로 국가의 수입을 늘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각 지파 체제 아래 분산되어 있던 힘을 왕의 권력 아래로 집중시키는 것이었으며, 결국 오래도록 지속되어왔던 지파체제의 붕괴를 가져왔다.
지방 행정조직의 신설은 이미 그 이전 시대부터 점차 유물화 되고 있던 옛 지파 체제가 그 정치적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지파 체제의 실질적인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과거 열두 지파의 분권 체제 아래서는 국가 위기가 닥칠 때만 군사적 재정적 힘을 모았으나 이제는 열두 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져서 솔로몬 왕권의 유지를 위해서 세금을 바치고 노동력을 공급해야만 했다.
솔로몬에 의해서 취해진 조치들은 가차없이 이스라엘을 엄습한 변화였다. 옛 질서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과거 성스러운 제도들과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을 행사했던 지파동맹은 새로운 중앙 정부에게 그 자리를 내어 주고 말았다. 지파조직은 실재적인 종말을 고했으며, 각 지파의 독립성은 끝이 난 것이다. 요컨데, 지방 분권적인 지파 사회의 민주주의는 무너졌으며, 중앙집권화로 인한 폐해가 정책 곳곳에 나타나면서 왕국의 사회 구조는 거대한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국가 통치 조직의 정비가 가져다 준 상대적 피해 세력은 이스라엘 집단에서 더 두드러졌다. 만성적인 재정궁핍과 수많은 국가 사업을 위해서 필요한 노동력은 백성들을 강제 노동의 현장으로 내 몰았다. 강제 노역이란 곧, 자유민이었던 백성들의 노예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인간적 권리가 사라지고, 계급 사회가 출현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솔로몬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완전 노예화 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가나안의 원주민에게서 노동 인력을 충당했다(왕상9:20-22). 그러나 노동력의 절대 부족은 자유민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강제 노역으로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자유민으로 태어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삼키기 어려운 쓴 약이었다. 그것은 평등 사회가 계급 사회로 넘어갈 때의 갈등이고, 자유민이 노예화될 때의 집단적 갈등이었다.

열왕기상 12장은 통일 왕국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는 결정적인 사건을 기록한다. 남북의 긴장 관계는 그 세력 면에서 유다 집단보다 이스라엘 집단이 숫적으로 우세한 긴장관계였다. 다윗과 솔로몬 때에는 이스라엘 집단을 다스리는 별도의 왕이 없었기 때문에 언약관계 속에서 묵인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솔로몬의 통치 구조는 남북관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 것이고, 솔로몬이 죽기 전에는 겉으로는 어느 정도 솔로몬 체제의 요구가 수용된 셈이다.
그러나 솔로몬이 죽고 나자 상황은 급변했다. 르호보암의 입장에서는 북쪽의 이스라엘 집단에게 복종을 명령할 수 있는 입장이 전혀 아니었다. 르호보암이 유다 집단에 의해서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추대되었지만 북쪽 지파들은 솔로몬에 이어서 르호보암을 자기들의 왕으로 인정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르호보암이 세겜에 온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르호보암은 할아버지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북쪽 집단의 왕으로 인정받기 위한 언약을 맺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북쪽 대표들을 접견하지 않고 직접 에브라임 지파의 중심 도시였던 세겜으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세겜에서의 회동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이미 세겜회의 이전에 솔로몬의 억압 정책으로 말미암아 북부 이스라엘 집단은 예루살렘 중앙정부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린 상태에 있었다. 세겜회의는 그와같은 배경을 저변에 깔고 진행되었다.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당연히 이스라엘 집단의 대변자는 여로보암이었고, 여로보암은 일찍이 솔로몬을 대적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표자의 자격을 가질 만한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여로보암은 선지자 아히야로부터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기도 했다(왕상11:25-40). 솔로몬의 칼날을 피해서 애굽의 망명 중이던 여로보암은 급거 귀국을 했고, 온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르호보암과의 회동의 자리에 섰다.
세겜 회동에서 북쪽 지파들은 과거 솔로몬에게 빼앗긴 권리를 최대한 다시 되돌려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왕의 부친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 달라는 요구 사항을 내어놓았다. 그 자리는 일종의 협상 테이블이었다. 이스라엘은 르호보암을 왕으로 섬기는 대신 자기들이 빼앗긴 권리를 다시 되찾고자 했던 것이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르호보암은, 내 손가락이 내 부친의 허리보다 더 굵으니 부친의 멍에보다 더 잔인한 채찍으로 다스리겠다는 표현으로 북쪽 집단의 요구 사항을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거절했다(왕상12:10-12). 그러자 이스라엘은 다윗 집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왕상12:16). 르호보암이 무력으로 이스라엘을 통제하기 위해서 강제 노동 감독관 아도람을 보냈으나 아도람은 돌에 맞아 죽었고, 반란이 일어났다. 르호보암은 하는 수 없이 마차를 타고 예루살렘 궁으로 피신을 했으며, 북쪽 이스라엘 집단은 세겜에서 독립을 하게 된 것이다.
북쪽 이스라엘 집단의 대표들은 여로보암을 그들의 왕으로 추대하였다. 여로보암은 솔로몬의 감독관이었으나 예언자 아히야의 사주를 받아 독립운동을 꾀하다가 이집트로 망명했지만 솔로몬이 죽은 후, 다시 돌아왔고, 자신의 지지 기반인 북쪽 이스라엘 집단에 의해서 독립 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다.

이스라엘 집단과 유다 집단은 세겜 협상의 결렬로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만일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지혜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극단적인 결과는 피해갈 수도 있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그러지 못했다. 도리어 그의 오만함과 우둔함은 분열의 기폭제가 되고 말았다. 세겜 협상에서의 르호보암의 태도를 보면 적어도 두가지 부분에 있어서 실책을 범했다. 그는 북 이스라엘의 진정한 정서를 몰랐거나 무시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혜로운 원로들의 의견을 일축하고 경험없는 젊은이들의 권고를 따랐다는 것이다. 두 집단간의 뿌리깊은 갈등은 결과론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왕국 분열의 일차적인 동기를 솔로몬의 강압정책에서 찾아야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솔로몬 사 후 그동안 억제되어왔던 북쪽 지파 집단의 독립정신의 발로라는 측면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분열의 원과과 과정이 어떻든지 분열의 결과는 비참했다. 제국은 하룻밤 사이에 거의 모든 것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이스라엘도 유다도 체제 유지에 급급하느라 과거에 위대했던 제국을 지탱해 나갈 힘이 없었으며, 다윗 시대에 점령했던 영지들을 다 빼앗기고 이스라엘도 유다도 급격하게 근동의 이류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1.지리적배경으로 인한 남부의 유다와 중부의 에브라임, 그리고 북부의 갈릴리지역,또한 요단동편은 더 심각하여 언어의 변화(씹보렛사건)까지 가져왔다.

2.종교적배경/성막이 위치한 길갈,실로를 비롯해서 높,세겜이 오랫동안 중부에 있었고 이를 통해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갈등과 에브라임의 교만이 공동체의 갈등을 부채질 했다.

3.정치적배경/12지파동맹이 와해되면서 왕정을 거치며 잠재되었다가 다윗 말년에 폭팔하고 솔로몬 때에 12지파를 12개 행정지역으로 개편하면서 북이스라엘 지파들은 이미 마음이 떠났다.

 

 

 

또다른 관점에서 에브라임지파의 교만과 분열의 시도가 지속적으로 있어왔다는 것이다. 에브라임은 자기지파인 여로보암을 밀었다. 이스라엘의 리더격인 에브라임은 이후 북이스라엘의 종교정책으로 시내산 언약과 금송아지숭배라는 혼합주의를 택하면서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 남유다는 다윗언약을 믿었기에 왕이 부족하더라도 다윗의 후손을 받아들였으나 북쪽은 그렇지 않았기에 계속 구데타가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북이스라엘의 이러한 행태는 멸망을 단축시켰고 결국 주전722년 앗수르에게 망하고 만다.

 

남유다도 바벨론에게 주전586년 망하면서 남북의 오랜갈등은 결국 멸망으로 끝나게 된다. 지역갈등이나 민족,계파.당파의 갈등이 치유되지 않고 반목과 갈등이 계속된다면 공멸할 수 밖에 없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