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유다서

유다서/이단 분별

호리홀리 2015. 7. 2. 12:14

 유 1:3-4

 

유다서 전체가 바로 이단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사람들이 이단인지, 그들의 특징은 무엇인지, 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가 다 나와 있습니다. 우선, 이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단은 타종교가 아닙니다. 불교, 이슬람교는 이단이 아닙니다. 이것은 타종교입니다. 이단은 겉으로는 기독교를 표방하지만 그 내용은 사이비요 정통이 아닌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통일교도 교회라는 말을 사용하고, 몰몬교도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좋은 말을 사용하지만 우리가 이단이라고 규정합니다. 왜냐하면 그 용어만 사용했지 사실은 그 내용상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 있는 말씀에 보면 이단은 예수를 믿지 않으면서 교회 공동체에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가만히 들어오다”라는 원어는 “몰래 기어들어온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단은 성경과는 다른 신앙을 가진 자가 교회라는 이름을 걸고 혹은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교회 안에 들어온 자들을 말합니다. 요한일서 2:19에 있는 말씀처럼 이들은 결국 교회를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피해는 엄청 큽니다. 요즘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되고 있는 신천지 이단이 바로 이런 종류입니다. 교회에 몰래 기어 들어와서 교인들을 꾀는 것입니다.

 

 

이단은 초대 교회 시대부터 지금까지 늘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단이 생겨날까요? 만든 사람이 있고, 추종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지요. 대부분의 이단들은 허무맹랑한 꿈을 꾸고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런 이론에 빠질까요? 무슨 교리보다도 이들이 주는 따뜻함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기존 교회는 기구화 되면서 이 사회에서 보다 갖추어진 계급에 속한 사람이 더 편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위로 받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단이 생기는 데는 교회 자체의 책임도 일부 있습니다. 교회가 계급화되고 인본주의화 되는 것에 환멸을 느껴 이단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다음으로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는 것은 어떤 이단들은 성경과 신앙에 대해서 의문이 있었지만 교회에서 설명해 주지 않던 것을 이단은 명쾌하게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엉터리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12:23의 “장자들의 총회”를 “천국의 엘리트 신자들”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래 히브리적 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무리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장자”라는 말에서 착안하여 자신들이 바로 장자라고 하면서 자신들만 구원받는다거나 천국에서 지배자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어떻게 보면 매우 합리적인 설명인데 성경과는 반대되는 가르침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죽어서 3일간 음부에 내려간 사이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하는 질문에 대해서 한 이단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셨다. 그렇다면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 죽으실 수 없다.”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단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 방법은 성경이 기준입니다. 성경을 믿지 않고 그 반대의 주장을 하고, 그리스도를 대적하면 이단이 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단은 성경을 정통보다 더 많이 이야기 하고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단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은 교회를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옳고 역사적 교회는 다 틀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교회가 잘못한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 전적으로 잘못하여 하나님이 떠나신 일은 없습니다. 교회는 늘 잘못을 범하고, 하나님은 늘 교회를 정화하시어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단은 지금까지 역사에 존재했던 모든 교회는 틀렸고, 자기들만 옳다고 합니다. 그것이 이단입니다.

 

또 이단의 특징은 권위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유다서 5-16절에는 이단을 구약의 잘못된 인물들과 비교하고 있는데 모두 하나님의 세워주신 권위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단은 윤리적으로 방탕하게 됩니다(5절; cf. 16-19절).

또 이단은 예수님보다도 사실 교리에서 출발하여 기독교를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단들을 보십시오. 모두 새로운 교리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또 그 교리를 배우고, 받아들이고,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 사도들처럼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나 베드로나 스데반이나 빌립은 설교할 때 교리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모두다 예수로부터 출발합니다. 교리는 예수 안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예수가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시고,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 그것이 바로 교리입니다. 그런데 이단은 항상 예수 없는 교리, 혹은 예수보다 앞선 교리를 말합니다. 골로새서 2:8 하반 절은 이에 대해서 매우 시사적인 말씀을 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바울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조심하라고 말하고 이어서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세상의 초등학문의 대척개념으로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기대한 말은 “하늘의 높은 삶의 원리”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바로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사람의 전통과도 대척되고, 세상의 초등학문과도 대척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통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사이비는 무슨 이론을 따릅니다.

 

또 이단은 기본적으로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 예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신적 메시아요, 신적 본성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합니다. 요한서신은 바로 이것이 적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이 무리는 구원에 있어서 예수의 사역을 부인하고(2:22; 4:3), 성육신 자체도 부인합니다(요이 1:7). 모든 이단은 예수님을 성경에서 말한 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고 하든지, 아니면 이 땅에 오신 예수는 유령 같은 존재로 받아들입니다.

이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각자가 성령의 인도함으로 깨닫는다고 가르치지 않고 반드시 어떤 교주나 자기들이 쓴 책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고 합니다. 요한일서 2:20, 27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에는 중재자가 필요 없이 성령의 역사만 있으면 된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설교자나 성경교사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교사도 중재자는 아닙니다. 성경을 설명하는 자일뿐입니다. 모든 역사는 성령이 하십니다. 하지만 이단은 다릅니다. 교주가 그 위치를 차지합니다. 또 교주가 죽으면 그가 쓴 이상한 책이 그것을 대신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단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단 교리를 완전히 습득해서 지식이 많아지면 분별력이 더 생겨 절대로 이단에 빠지지 않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유다서 1:20-23과 골로새서 2:6-7이 제시한대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는 것은 그것을 조심하는 것, 주의하는 것이 한 소극적 방법입니다. 적극적 방법은 골로새서 2:6-7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유다서 20절도 같은 내용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모든 것을 그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9절 이하의 말씀도 모두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살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는 것도, 죽은 것도 교리도,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통하고 그리스도로 통일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입만 벌리면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 사람의 생각 속에는 온통 예수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는 것으로 잘 설명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예수교입니다. 그리스도교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단에 빠지는 것은 그리스도와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 없이 교회에서 좋은 교훈을 배워 착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기독교를 전혀 오해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주로 영접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바울은 신자를 나무로 비유하여, 나무가 살려면 뿌리를 땅 속에 내려야 하는데 그것처럼 예수 안에 뿌리를 박으라고 합니다. 또 건물을 비유하여 바로 그 안에서 건물이 지어져 가라고 말합니다. 곧 그리스도가 우리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떨어져 있는 나는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바울은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라고 합니다. 여기서 “교훈을 받은 대로”가 중요한 말입니다. 바울은 초대 교회에서도 교회 안에서 가르쳐지는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이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처음부터 내려온 교훈을 무시하고 이상한 교훈을 가르치고 있던 사람이 있었음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이단은 교회를 무시합니다. 교회 안에서 내려온 교훈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단은 흥미롭게도 교회 역사를 무시하고 성경만 봅니다.

 

마지막으로  감사함으로 넘치게 하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신앙이 감사로 나올 때 그것이 바로 참 신앙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절대로 이단에 빠질 수 없습니다. 감사가 없고, 그 마음 속에 그리스도도 없으면, 바로 사탄이 이단의 괴수들을 통해 우리를 세상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사로잡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를 꾀는 것이 무슨 나쁜 철학도 아닌 그냥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철학은 모두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 때 바울이 말하는 철학은 신학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 없이 인생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또 여기서 사로잡는다는 말의 어원 속에는 “말하다”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즉 말로 사람을 꾀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조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다서 1:23-24절에는 이단에 한 번 빠진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행위는 미워하지만 이들을 긍휼히 여기고 구해내라는 것입니다.

 

'신약 > 유다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다서의 배경  (0) 2015.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