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빌레몬서

오네시모의 변화

호리홀리 2015. 6. 30. 21:20

빌레몬서는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내는 사신(私信)이다(1절). 압비아(2절)는 아마 빌레몬의 아내였을 것이다.  빌레몬에게 보내지만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몬 1:2)도 이 편지를 같이 읽기 때문에 비밀스런 편지는 아니다. 아킵보는 골로새서 4장 17절에서도 문안의 대상자로 언급되고 있다. 또 이 편지가 씌어진 사유가 되었던 도주 노예의 이름인 오네시모도 골로새서 4장 9절에 등장하며 그를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음으로 보아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은 골로새에 거주하던 성도인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이 편지를 쓸 당시에 죄수로 있었다(1, 9, 10, 23절). 사람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바울에게 오고가며 도주한 오네시모도 바울을 통해 회심하는 사건이 가능했음을 고려할 때, 그가 갇혀 있던 곳은 사도행전 28장 30절 이하에 묘사된 로마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편지는 바울의 1차 로마 투옥 시절인 주후 60~61년경에 씌어졌다.


편지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에 집중돼 있다. 빌레몬의 노예인 오네시모가 도망을 쳤다가 바울에게로 가서 회심하여 새 사람으로 된 것이다. 옥중에 있던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그를 용서하고 받아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써서 달려 보낸다.
바울이 요청하는 바는 도주 노예인 오네시모에 대한 선처였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는데 현재의 문헌으로서 그 자세한 사정을 알 길이 없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서 도망쳐 나와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 모르지만 바울에게로 갔다. 바울과의 만남은 오네시모에게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바울은 그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10절)이라고 부르고 있다. 오네시모가 바울을 통해 회심했거나 아니면 이미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주인 빌레몬에게 저지른 잘못을 바울의 감화로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자신에게 매우 유익한 존재가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11절). 그러면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일단 빌레몬에게 돌려보낸다(12절). 바울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는 오네시모가 자신에게 돌아와 사역의 조력자가 되는 것이다(13절).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영접하고 용서한 다음에 다시 바울에게 돌아갈 것을 허락해야 한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런 선처를 기대하면서 오네시모를 보내고, 그때 ‘사면 추천서’처럼 따라 붙은 것이 우리의 빌레몬서다.


그렇게 한 개인에 대한 특별한 선처를 부탁하는 사신(私信)의 성격이 다분한 짧은 글이지만 제자도, 그리스도인의 용서와 사랑, 하나님의 섭리 등에 대한 주옥같은 영감들이 곳곳에 박혀 빛을 내고 있다. 특별히 당시에 인격체로 대우 받지 못하던 노예를 주인과 동등한 차원에서 취급하는 몇 가지 언급들은 당시 사회적 배경에서는 혁명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노예 제도와의 사회적 투쟁을 선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모든 구분을 타파하는 복음의 정신(갈 3:28)은 결국 시간이 흘렀을 때 노예 제도라는 묵은 가죽 부대를 터트려 파손시키도록 돼 있다.

 

빌레몬서는 짧지만 바울의 다른 편지들이 지닌 전형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송신인과 수신자를 밝히며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인사말(1~3절), 감사의 말(4~7절), 오네시모를 받아주라는 편지의 본문(8~21절), 문안과 맺음말(22~25절)로 나누는 것이 전통적인 바울 서신의 구성 분석이다.
하지만 빌레몬서는 바울의 다른 편지들 중에 어떤 것보다 고대의 수사학적 기제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빌레몬서는 오네시모의 사면을 요청하는 ‘추천서’로서, 읽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위를 바꿔 놓기 위한 설득의 글이다.

 

호소를 위한 도입 부분인 ‘서론’(exordium, 4~7절)은 빌레몬을 칭찬함으로써 그가 지닌 덕성이 오네시모에 대한 긍정적인 결정에 기여하게끔 마음을 열어준다. 본론(8~16절)에 가서 오네시모가 어떻게 바뀌었고 그가 바울과 빌레몬에게 어떻게 유익한지를 증명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오네시모에 대한 빌레몬의 선처가 필요한 신앙적 이유를 거론하여 그의 건전한 판단력을 유도한다. 그리고 재차 결론의 형식으로 클라이맥스를 구성하며 빌레몬의 결단을 정서적으로 압박하는 ‘결론’(peroratio, 17~22절)이 뒤따른다.


 인사말(1~3절):은혜와 평강
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갇힌 자 된 바울(1a절)
이 편지를 보내는 바울은 ‘데스미오스’ 즉 죄수로 잡혀 있는 사람이다. ‘데스미오스’의 문자적 의미는 ‘잡혀 있는 자’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죄수가 되었다. 이것은 개역 성경의 표현이고, 원문을 직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죄수’이다. 의도된 이중 의미가 엿보이는 구절이다. 개역 성경이 그렇게 번역했듯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다 죄수가 되었다. 그러나 원어의 구조에 충실하게 읽으면, 바울은 사회의 죄수이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죄수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갇혀 있는 바울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다가 예수에게 적대적인 사회의 죄수가 되었다. 그것을 서두에서 밝히는 의도는 무엇일까? 바울의 희생을 암시한다. 편지를 받는 빌레몬도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의 섬김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바울은 치러야 할 희생을 치르고 있다. 빌레몬은 바울과 다른 처지에 있지만 그의 차원에서 치러야 할 사랑의 희생이 있다. 곧 오네시모에 관한 일이다.

2) 사랑(1b절)
빌레몬의 이름은 ‘필레오’(사랑하다)에서 파생되었다. 그는 사랑의 사람이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께서 베드로의 사랑을 물을 때 동사 ‘아가파오’를 쓰기도 하고, ‘필레오’를 쓰기도 한다. 그는 이름에 걸맞게 사랑스러운 제자였다. 바울은 빌레몬을 “사랑을 받는 자”라고 한다. 바울은 그를 사랑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신다. 그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자이기에 그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한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갚아야 하지만, 누구보다 그의 사랑의 처분이 필요한 오네시모에게 갚아야 한다.
또 그는 바울의 동역자이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다. 같은 목적을 갖고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함께 손을 잡고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다. 바울은 그가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자신의 제의를 동역자로서 존중하여 마음에 의도한 목적을 함께 짊어지고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

3) 아킵보와 그 집에 있는 교회(2절)
이 편지의 공동 수신자는 교회이다. ‘에클레시아’는 신약 성경에서 한 번도 건물을 가리키는 데 쓰인 적이 없다. ‘에클레시아’는 사람이다. 사람의 모임이다. 참조로 수신하는 대상이 바로 아킵보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골로새교회, 골 4:17)이다. 물론 빌레몬은 그 교회에 속한 지체이다. 이 권면은 빌레몬 개인을 향하는 것만은 아니다. 교회에 속한 성도이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빌레몬에게 교회에서 주는 권면의 일환으로 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바울이 아니라 바울을 죄수로 부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다. 바울은 교회를 위해 교회와 함께 그리스도의 권위로 입을 열어 형제 빌레몬을 부르고 있다. 빌레몬은 그 권위의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인사말을 읽는 순간, 빌레몬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의 법정에 서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4) 은혜와 평강의 기도(3절)
하나님의 은혜와 ‘샬롬’(평강)의 기도이다. 그 근원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은혜와 ‘샬롬’은 인간이 누리는 행복의 필수 조건이다. 축복의 언어는 다양하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그의 백성들에게는 축복의 언어의 핵심이 바로 은혜와 ‘샬롬’이다. 바울의 인사말에 담긴 축복은 이스라엘의 제사장적 축복과 궤를 같이 한다(민 6:22~27). 단지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선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축복의 근원으로 들어간다.
물론 빌레몬은 이런 은혜의 배경과 정황을 이해하면서 오네시모의 일을 처리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와 평강의 선물을 누리며 사도된 바울의 사랑을 받는 제자 오네시모는 그 은혜와 평강을 배경으로 해서 오네시모를 생각해야 한다. 이 편지에서 풀어야 할 ‘문제’는 오네시모이다. 이 대화에서 ‘이슈’가 되는 존재는 도망했던 노예 오네시모이다. 그 문제와 이슈는 사랑과 은혜와 평강을 배경으로 해서 풀어나가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제와 이슈가 있다. 인간들 사이에 발생하는 사회적 모든 문제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그때 그 문제와 이슈를 해결하는 무대는 사랑과 은혜와 평강이 돼야 한다.

적용

첫째, 내가 ‘그리스도의 죄수’임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포로이다. 그리스도가 시키는 대로 한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생각해야 한다. 나는 권리 행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채무자이다. 셋째, 문제는 교회를 배경으로 조명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 넷째, 그런 의미에서 문제 해결의 무대는 사랑과 은혜와 평강이다.

 

 감사의 말씀(4~7절):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은 믿어도 좋다
1)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 성도들을 향한 신실함과 사랑(5절)

 원문을 살펴보면 관계 대명사의 선행사가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 두 가지에 모두 걸리게 해 놓고 관계절에서 전치사구의 목적어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모든 성도들 양쪽이 동시에 걸린다. 따라서 ‘예수님을 향한 당신의 믿음과 사랑’과 ‘모든 성도들을 향한 당신의 신실함과 사랑’이 빌레몬이 보여주는 치하할만한 덕목이다. 이 문장의 구조가 함의하는 바도 생각해야 한다. 두 덕목인 ‘아가페’와 ‘피스티스’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료인 형제와 자매들 양쪽으로 동일하게 나타나야 한다.
물론 바울이 빌레몬의 이런 덕목의 결합을 언급하는 것은 오네시모에 대한 신앙적 결단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오네시모에 대한 결단은 사회적 결정이다. 그것은 사회적 이슈이며 인간 관계의 문제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사랑에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암시돼 있다.

2) 교제를 살리는 ‘선’(善)의 창조(6절)
개역 성경 번역의 모호함을 해소하기 위해 원문의 직접적 번역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모든 선을 잘 알아 당신의 믿음의 교제가 그 활력을 갖게 되기를 [기도합니다]”(필자 사역, 6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는 선’이 무엇인가? 막연한 듯하다. 그러나 ‘우리’(그리스도인들)는 선을 창출해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을 만들어야 함을 당연한 것으로 알아 그것을 빌레몬도 상기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선을 알고 선을 향해 움직일 때 ‘빌레몬의 믿음의 코이노니아’가 ‘역사’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역사’로 번역된 헬라어는 ‘에네르게스’이다. 여기서 ‘에너지’라는 말이 나왔다.

3) 빌레몬의 사랑, 문제없다(7절)
실제로 이 점에서 빌레몬의 과거와 현재는 어떠한가? 바울이 크게 칭찬하고 있다. 우선 바울 자신이 빌레몬의 사랑의 열매 때문에 기쁨과 위로를 얻었다. 그가 어떤 일들을 해 왔는지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지 않아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다. 성도들이 빌레몬으로 인해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는 칭찬이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베풂과 마음 씀씀이가 매사에 관대했음은 틀림 없다.
이런 칭찬은 바울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고 그곳 교인들이 모두 동의한 것 같다. 그리고 특별히 자신의 기쁨과 위로를 언급하는 것은 바울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 빌레몬이 직ㆍ간접으로 베푼 도움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런 관대함이 오네시모의 일에도 반영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적용
첫째, 건강하고 정상이라면 예수를 향한 사랑과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형제와 자매들을 향한 사랑과 신실함도 동일하게 보여야 한다(요일 4:20~21 참고). 예수께서도 ‘쉐마’와 이웃 사랑의 명령을 한 데 결합해 가르치실 때(마 22:37~40) 이런 암시를 하신 것으로 봐야 한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이 없으면 공허하고 위선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우리가 그리하지 않더라도 세상이 그렇게 평가한다. 한국 교회의 신앙적 열정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을 과시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빌레몬에게서 볼 수 있는 바 건강한 덕목의 양자 균형과 조화가 과연 우리에게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종교인은 많은데 사람다운 사람이 없다는 힐난을 더 이상 들어선 안 된다. 목사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거나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는 말을 더 듣게 된다면 곤란하다.
둘째,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국면마다 ‘좋았더라’고 하시면서 선을 선포하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망가진 세계에서 어긋나는 모든 일들을 잘 조정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려 하신다(롬 8:28, 창 50:20). 하나님께서 선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섭리로 선을 창조하고 계신다. 그분 안에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선을 만들어야 한다. 악으로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어느 시점에서 어떤 상황이라도 그것을 선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떻게 하는 것이 ‘선’이 되는지를 염두에 두고 그쪽으로 의지와 감정을 움직여 가야 한다.
오네시모의 일을 ‘악’으로 처리할 수도 있고 ‘선’으로 이끌 수도 있다. 바울은 무엇이 선한 길인지 잘 알고 있다. 그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 전에 우리가 ‘선’을 추구해야 함을 암시하면서 빌레몬에게 그 지식을 갖기를 바라고 있다. 이제 빌레몬은 오네시모의 사건을 놓고 선과 악 사이에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선을 창조하는 것이고, 어떤 결정이 ‘우리’가 이뤄야 할 선(善)에 부합한 것일까?
셋째, 우리가 창출해야 할 ‘선’을 알고 선을 향한 의지를 가지면 ‘코이노니아’에 강력한 에너지가 발생하게 된다. 진정한 교제의 효력과 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나가는 ‘선’의 실천이다. ‘선’을 이루겠다는 의지로 서로를 대하고 결정을 내리며 모든 관계를 정의한다면 ‘코이노니아’는 큰 힘을 얻는다. 왜 ‘코이노니아’가 힘을 잃고 파경으로 가는가? ‘선’을 향한 의지와 결단과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선’이 우리의 목적임을 바로 알자. 그런 후에 믿음의 교제를 나누자.

 

 본론(8~21절): 오네시모를 받아 주라
1) 사랑을 바탕으로 하여(8~9절)
바울과 빌레몬의 관계를 감안한다면 바울이 빌레몬에게 권위를 담은 명령을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 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 대신에 정중하게 간청을 한다. 바울은 빌레몬의 영적 아버지이다. 그 바울이 연로한 죄수의 상태에서 인생과 사역 전체를 부담하여 따스한 사랑의 권면으로 빌레몬의 자발적 사랑의 결단을 호소한다. 강제로 할 수도 있고 그렇게 원하는 결과를 산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결과만 얻어내는 그런 성격의 업무나 작업이 아니다.
이것은 과정이 더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열매이다. 빌레몬이 바울의 강요 때문에 마지못해 오네시모를 받아주는 것과 심정이 동해 자발적으로 용서하는 사랑의 드라마가 되는 것은 천지 차이다. 바울은 전자를 실패로 보고 후자만을 의도했던 성공으로 보고 있다. 사랑으로 하는 것만이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전 13:1~3).

2) 노예를 아들이라 부를 때(10절)
바울이 사도로서 복음의 제자들과 갖는 관계는 친밀한 가족 관계이다. 그가 복음을 전해 성도가 되는 사람을 자식처럼 생각한다. 일찍이 자신의 속을 많이 썩게 했던 고린도 성도들에게도 자신이 그들의 ‘아버지’가 되었음을 역설했다. 그 편지에서 바울이 자신을 ‘아비’라고 생각할 때 의도하는 바가 잘 드러난다(고전 4:14~17). 스승은 어디에 가나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아비는 스승 정도에 머물지 않는다. 육신의 아버지가 자녀들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돌보려 하듯이, 바울은 성도들을 자식같이 생각해서 책임지고 돌보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통해 회심하고 제자가 된 동역자인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불렀다.
오네시모를 아들이라고 부를 때는 그보다 더한 사랑의 무게가 실려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도주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가리켜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엄청난 파장의 사회적 의미까지 갖는다. 더구나 빌레몬에게 권하는 내용은 더하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도주 노예는 다시 잡혀왔을 때 잔혹한 형벌에 처해졌고, 도주 노예를 숨겨준 사람도 상당한 처벌을 감수해야 했다.실제로 값비싼 재산이라 할 수 있는 오네시모가 돈까지 훔쳐서(18절) 달아났을 때 생겨난 노동력의 부재와 시간의 손실로 인한 물질적 피해와 배신감은 빌레몬에게 절제하기 힘든 분노를 누적시켰을 것이다. 이런 분노는 다시 잡혀온 노예들에게 행해지는 잔인한 앙갚음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노예들은 종종 별 심각한 잘못이 없어도 잔혹 행위를 감내해야 했다.그런데 바울은 문제의 오네시모를 가리켜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몬 1:16)고 말한다. 성도들 사이에 사소한 돈거래로 원수가 되는 것을 적지 않게 보는 것이 목회 현장이다. 빌레몬서의 핵심 내용은 웬만한 자제력과 후덕한 인품이 아니라면 받아들여 실천하기 힘든 권면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노예 신분의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고 자존심마저 뭉개버린 ‘더러운 물건’이었다. 그런데 대 사도인 바울이 그를 ‘아들’이라 하며 주인 빌레몬의 ‘형제’라고 하는 의미의 무게를 느낄 때 비로소 우리는 본문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이것은 어쩌면 자식을 향한 세속 아비의 사랑을 훨씬 능가하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사랑을 표현하고 요구하는 혁명적 부담의 요청이었을 것이다.

3) 유익한 심복(心腹)이 된  노예(11~12절)
요즘 같이 과학의 세계까지 온통 정치판이 된 세상에서 ‘심복’(心腹)이라는 말은 듣기에 그다지 어감이 좋지 않다. 표준새번역 성경이 ‘나의 마음’이라고 번역한 단어 ‘스플랑크나’는 원래 우리 몸속에 있는 내장, 심장 등의 내부 기관을 가리킨다. 따라서 은유적 의미에서 마음, 사랑, 애정 등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개역 성경의 ‘심복’(心腹)이라는 단어도 원래 한자에 충실하게 읽으면 ‘가슴과 배’라는 뜻으로 헬라 원문의 의미를 잘 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은유적으로 ‘긴요한 것’ 또는 ‘마음 놓고 부리거나 일을 맡길 수 있는 충성된 사람’이라는 뜻으로 더 많이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개역 성경의 ‘심복’은 괜찮은 번역이다. 어쨌든 헬라어로 보나 우리말로 보나 오네시모에 대한 바울의 마음은 지극하다. 오네시모는 그렇게 바울에게 유익한 사람이다. 바울은 확신을 갖고 있다. 이제 오네시모는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그로 인해 마음이 상했을 빌레몬에게도 유익할 것이라고 장담한다(11b).

오네시모의 사면을 위한 추천서(13~16절)
1) 오네시모는 쓸만한 사람이다(7절).
 나는 복음 사역을 하다가 갇힌 몸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인해 복음의 동역자인 빌레몬은 옥중에 있는 바울을 도와 안팎으로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 아마 물질적으로 바울을 돕기도 하고 바울이 갇혀 있기 때문에 하지 못한 일들을 골로새에서 감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오네시모는 빌레몬에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유익한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사실상 원하는 바는 그를 바울 가까이에 두고 싶다.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앞서 언급한 ‘전에는 무익했으나 이제는 유익함’에 대한 증거로 부연한 서술이다. 정말 유익하다. 떼어놓지 않고 항상 옆에 두고 싶을 만큼 유익한 심복이다.
그러나 보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걸림돌이 하나 있는데, 바로 주인 빌레몬에게 저지른 잘못이다. 오네시모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제 바울이 보기에 오네시모가 부족함이 없는 새 사람이지만, 그 변화의 완결을 위해 빌레몬의 자발적 용서와 수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2) 빌레몬의 용서는 오네시모의 변화를 위한 충분 조건(14절).
복음을 위해 사회 규범에도 충실해야 한다. 당시의 문화와 제도 속에서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속한 재산이다. 이 개념이 근본적으로 복음의 정신과 긴장을 일으키는 것은 틀림없지만, 동시에 사회적 규범 즉 사회적 윤리 문제가 달려 있는 관계의 통념이기도 하다. 오네시모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빌레몬과 다를 바 없는 영적 자유인이다(갈 3:28). 하지만 1세기 그리스-로마 세계의 사회 규범 차원에서 볼 때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자발적 용서와 회복 그리고 해방이 있기 전까지는 심각한 범죄자이다.
물론 그런 사회적 범죄의 죄과(罪過) 문제를 해소하기 전에 복음 안에서 이뤄진 그의 회심과 변화도 세인들의 눈에 조롱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요즘의 경험에 유추해 본다면, 아마 세인들이 오네시모와 바울을 두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런 못된 짓을 하는 것들이 무슨 그리스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이 일에 있어서 복음의 정신과 사회 규범상의 갈등이 해소되고 기독인의 윤리적 통합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있다. 빌레몬이 자의에 의해 문제가 된 사회적 규범의 긴장을 해소시키는 것이다. 즉 빌레몬이 주인으로서 관용을 베풀어 비록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곤 하지만 아직은 사회적으로 도주 노예의 오명을 달고 있는 오네시모를 용서하여 사회적 죄책을 풀어 줘야 한다. 이것이 바울이 14절에서 권면하는 바다.
즉 오네시모가 ‘선한 일’을 해 줘야 한다. 물론 오네시모가 해야 할 선행은 앞서 6절에서 암시한 바 그가 알아야 할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의 한 실례(實例)가 될 것이다. 물론 이 일이 선행되려면 마지 못한 수용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믿음과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이 동한 자발적 결정이어야 한다. 그리고 바울은 이 일에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는 하나님 섭리의 가능성을 언급한다.

3)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15절)
바울은 이 시점에서 약간의 신학적 이유를 추정한다. 받은 계시를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이뤄질 ‘선’의 가능성을 볼 때 하나님의 섭리를 느꼈음에 틀림없다. 직접적 계시를 받은 것은 아니기에 문장을 부사 ‘타카’(아마)로 시작한다. “아마 그를 잠시 잃었던 것은 영원히 그를 전부 얻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의도한 바가 상업적인 이해 득실이었다고 보는 주석가들도 있지만, 전후 문맥상으로 볼 때 타당치 않은 주장이다. 더구나 이것을 재산으로서 종의 소유권 회복을 의미한다고 읽는다면, 오네시모가 도망가기 전에 빌레몬이 그를 전적으로 소유하지 못했다는 함의를 갖는다. 주인에게 전적으로 귀속돼 있지 않은 노예의 경우가 무엇인지 확인할 길도 없고 일반적인 상식으로 볼 때 아주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상정할 수 없다. 여기서 바울은 분명히 오네시모에게 발생한 삶의 변화를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다(롬 8:28). 이것은 전능하신 주권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근본이다. 일찍이 요셉은 자신들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구걸하다시피 하는 형들에게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19~20)라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일에서 같은 섭리를 읽었다. 오네시모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것은 본인에게나 빌레몬에게나 ‘끊어짐’의 아픔을 가져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바울을 통해 오네시모를 회개케 하고 이제 그는 유익한 종이 되었다. 그래서 ‘영원히 오네시모의 전체를 얻게’ 된 것이다. 당연히 빌레몬도 하나님께서 이루신 이 선에 협력하고 순종해야 한다. 때로 잠시의 불운이나 불편은 장기적으로 이뤄질 선을 위한 것이리라. 그러니 빌레몬을 받아 주라는 것이다.

4) 오네시모를 사랑받는 형제로 두라(16절)
하나님께서 오네시모에게 큰 은혜를 베푸시고 그가 실제로 유익한 존재로의 변화를 과시하여 자신을 처벌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옛 주인에게로 돌아가기까지 한다. 빌레몬은 그를 예전과 같이 노예 중에 하나로만 취급한다면 하나님께 신실한 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네시모는 지금까지 칭찬해 왔듯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돼 있다. 그러니 ‘주 안에서 서로 존중하며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 손색이 없는 사람이다. 바울에게 오네시모는 손색이 없는 훌륭한 그리스도인 형제이다.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지금까지 관계로 보아 애틋한 정이 있던 빌레몬에게는 더할 것이다. 사실 어렵게 된 관계이지만 회복했을 뿐 아니라 과거보다 질적으로 더 나은 관계를 ‘주 안에서’ 이룰 것임을 단정하는 확언을 해 버린다. 바울 식의 강조 어법이다. 꼭 그렇게 받아줘야만 한다는 부드러운 강변(强辯)의 수사학이다.

바울의 에토스 (17~21절)
1) 오네시모를 자신과 동일시하기(17~19절)
빌레몬을 설득하려는 바울의 노력은 자신과 빌레몬과의 관계에 호소하면서 클라이맥스로 향한다. 무엇보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과 동일시한다. 빌레몬은 바울의 동역자(코이노논, 개역 성경에서 ‘동무’로 번역)이다. 이 관계를 빌어 오네시모를 옹호한다.
만일 빌레몬이 바울을 동역자로 취급한다면(물론이다) 오네시모를 볼 때 그가 바울이라고 생각하여 환대해 달라는 요청이다(17절). 그가 도주할 때 훔쳐간 것이 있어 돌아가면 받아야 할 금전상의 부채가 있다면, ‘그는 나의 분신으로 그곳에 간 것이니까’ 그에게 요구하지 말고 바울 자신과 계산하자고 말한다(18절). 물론 이 말을 했다고 해서 빌레몬이 바울에게 청구서를 보내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바울의 동역자지만 실제로 제자나 다름없는 빌레몬으로서 도리상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강조를 한다. 일반적으로 필경사에게 구술하여 편지를 쓰게 하는 것이 관행이고 바울도 그렇게 했지만(참고, 롬 16:22),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친필로 쓰면서 재차 오네시모의 채무 이행을 자신이 할 의지가 있음을 언급한다(19a).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이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빌레몬은 바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물론 그것은 금전적 부채는 아니다. 빌레몬의 회심이 바울의 복음 전파를 통해 이뤄졌음을 상기시킨다. 그는 로마서에서 영적 구원과 물질적 부담을 이렇게 연결해서 생각하고 있음을 언급한 적이 있다.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15:27).
여기에 바울의 앞의 말(14절)과 달리 사실 강제적인 정서적 압박이 담겨 있다. 어떻게 사도 바울의 말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오네시모의 생활의 구원을 위해서도 그렇고 빌레몬의 영적 건강을 위해서도 그렇다. 그리고 두 사람과 바울까지 낀 그리스도의 지체의 건전을 위해서 더욱 그렇다.

2) 애절한 마지막 호소(20~21절)
결국 바울이 진심으로 원하는 바는 기쁨으로 하는 자발적 순종이다. 자신과 오네시모를 동일시하고 자신에게 부담일 수 있는 사도로서의 존재까지 부각시키면서 압박을 가하지만, 진정 기대하는 것은 빌레몬의 자발적 용서와 영접이다. 두 가지 소원이 강하게 담겨서 한 데 어우러진다. 다소의 정서적 압박을 가할 만큼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주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것이 빌레몬의 마음에서 우러나와 내리는 자발적 결정이어야 빛이 나고 참된 의미가 있다. 그 바람은 결론이라 할 수 있는 두 절에 압축된다. “그래요 형제님, 주님 안에서 꼭 당신의 호의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심장이 안식을 얻게 해 주십시오. 형제께서 순종하리라는 확신을 갖고 이 편지를 보냅니다. 형제께서 내가 말한 것 이상으로 더 잘 하리라 굳게 믿습니다”(20~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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