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생활/십일조

헌금에 대한 바른 이해

호리홀리 2014. 7. 19. 09:40

헌금에 대한 바른 이해

    

    하나님께 드릴 때는 그 드리는 형식을 주의해야 합니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는 시편 50장 12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내 것인데, 네가 무엇으로 내게 주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실질상 물질을 드려서 하나님께서 잡수시고 좋게 생각하시도록 한다는 따위의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너무도 즉물적卽物的이고 현실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드리면 음식을 잡수시는 것처럼 표현한 데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화제, 곧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레 21:6) 해, ‘여호와의 식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영어 성경에는 여호와의 떡(the bread of their God0이란 말로 썼습니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번제나 소제나 화목제가 여호와의 식물, 여호와의 레헴(떡)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께 드리지만 성경은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디로 돌아가야 할 것인지를 규정했습니다. 여호와의 제단 앞에 드린 모든 좋은 것들은 그 제사를 맡아서 하던 그 제사장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입에서 십분의 일을 떼어서 내어 놓고 나머지 십분의 구에서도 먼저 총 수입액의 십분의 일을 다시 떼었는데 이 십분의 이는 해마다 떼어야 했습니다. 십일조란 명확히 말하면 십분의 이인 것입니다. 먼저 구별한 십분의 일은 반드시 레위 사람에게 주도록 하셨는데 레위 사람은 그들이 받은 십분의 일에서 다시 십분의 일을 취해 제사장에게 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레위 사람은 받은 물건 가운데 제일 좋은 것을 뽑아서 제사장에게 주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제도로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거룩한 나라를 형성해 가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제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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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위 사람은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 일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복지를 나눌 때 레위인에게는 하나님께서 분깃을 안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신앙으로 어떻게 레위 사람들을 대접하는가에 따라서 레위 사람들은 확연히 잘 존재하고 활동할 것이며, 이스라엘 그들이 신앙이 타락해 물질주의적으로 변하면 레위 족속도 푸대접을 받고 가난하게 돼 그들에게서 사라지게 됨으로써 결국 이스라엘은 멸망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레위 사람들이 건실하게 존재하면서 늘 훌륭한 생활을 하고 백성들을 가르치며 이끌고 나가는 것은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유지하는가를 재는 바로미터와 같았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 사람들을 존중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의 모든 장자는 다 내 것이다.”고 하셨습니다.(출 13:2, 출 34:19) 애굽의 장자를 죽이시면서 이스라엘의 장자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마치 레위 사람들이 하듯이 성전의 일을 직접 맡아야 했고 자기 집을 위해 돈 버는 일을 전혀 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자기 집 일을 돌보는 대신 레위 사람을 세운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각 집은 십오 세겔씩 속전을 내서 계약을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렇게 했습니다.” 하는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각 집의 장자를 대신하는 것이 레위 사람이므로 레위 사람을 그들의 장자처럼 대접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레위 사람을 존중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레위 사람을 잊지 않고 좋은 것으로 함께 나누며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도 같이 가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그들이 떼어 놓은 두 번째의 십일조를 이런 때 쓰게 하셨습니다.

    레위 사람은 수가 적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 이스라엘 백성의 수는 장정만 60만 명이 넘었는데, 장정이란 20세 이상의 남자를 말합니다. 레위 사람은 생후 1 개월 이상 된 사람부터 전부 따져 봐야 22,300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장정만 센다면 많아야 15,000 명에서 18,000 명 정도밖에 안 됐을 것입니다. 민수기 1장 45, 46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장정은 603,550 명이라고 했으므로 이스라엘 장정 33 명에 레위 사람 1 명꼴이 되는 셈입니다. 이스라엘 각 집을 대표하는 장정이 열 명만 모이면 열 명 평균한 정도의 생활비가 나올 것이고 열 명이 모여서 십분의 일씩 냈으니까 그것을 가져다 레위 사람에게 주면 레위 사람도 그들과 같은 정도의 평균 생활은 할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30 명 이상이 모아서 얼마만큼을 정하고 주는 것이 아니라 30 명이 각각 자기의 십일조를 내므로 보통 열 명을 기준으로 평균한 정도보다는 세 배나 더 많은 수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레위 사람을 잘 대접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런 제도를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구수를 모르셔서 그러한 제도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레위 사람에게는 이렇게 돌아가야 할 것을 아신 까닭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도에 따라 살면 하나님의 일을 직접 하는 종들은 항상 충족한 가운데 구애받지 않고 일을 하도록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 제도를 엄격하게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가 먼저 높은 자격과 큰 능력을 가져야 하고 일단 하나님께서 불러서 세우셨으면 하나님 당신께서 그를 먹여 살리시되 사람들에게 “그 사람 하나를 잘 먹여 살려라.” 하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내게 내놓아라. 나는 저를 먹이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가 헌금해서 목사가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께서 먹여 살리시는 것이고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을 목사의 살림을 해주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굉장히 큰 잘못입니다. 오늘날은 교회가 타락한 까닭에 예산할 때도 목사의 생활비에 대해서 무엇은 얼마, 무엇은 얼마 하고 경리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먹여 살리는 문제에 대해서 교회가 경리하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원칙이 벌써 틀린 것입니다. 만일 엄격하게 구약의 하나님 법대로 시행한다면 교인 각 개인 수입의 십분의 일을 다 모아서 모두 교역자에게 쓰라고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십분의 일씩을 내서 교회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라는 말을 십분의 일로 생각하는 그것이 큰 잘못입니다. 십분의 일은 계산하는 표준이지, 자기 소득의 십분의 일만 바치라고 한 법이 구약에는 없습니다. 구약에는 최소한도 2 년 동안은 십분의 이씩 내놓고 제3년에 가서는 십분의 삼을 내놓게 돼 있습니다. 첫째 십일조는 레위 사람을 위해서 구별해 놓으셨고, 둘째 십일조는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비용으로 구별해 놓으셨으며, 셋째 십일조는 하나님의 거룩한 곳간에다 쌓아 놓도록 내놓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곳간에 세 번째 십일조를 내놓으면 그 고을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 과부, 고아, 나그네나 또는 헐수할수없는 사람들을 위해 그것을 썼습니다.

···{중략}···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웠습니다. 하나님 앞에 “잡수십시오.” 하고 드리면 하나님께서 바람으로 가져가시는 것도 아니고, 불로 가져가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대표적인 것만을 취하시고 실질상 필요하고 중요한 부분들은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에게 돌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업을 윤택하고 건실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즉 빈곤과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의 슬픈 심정을 싸매주고 복 돋우고 힘주기 위해서 쓰도록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몸을 해치는 병균을 없애고 연약한 곳을 보충하기 위해서 그것을 쓰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전체를 한 덩어리라고 보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표시하는 한 몸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 몸의 어떤 부분이 가난하고 어떤 부분이 고아여서 외롭고 슬프고 어렵고 어떤 부분이 나그네로 정처 없이 이리저리 유랑한다면 그 부분을 보강하고 힘을 주고 건강하게 해서 이스라엘 전체가 항상 싱싱하게 건강한 힘을 가지고 이방 세계뿐 아니라 세계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경영해 나갈 수 있게 한다는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도 먼저 이지적으로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내가 드리는 헌금은 무엇을 위해 쓰여야 하며, 내가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을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위해 쓰기를 바라시는지를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