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중간사부터 초기기독교

중간사부터 초기기독교

호리홀리 2015. 5. 22. 11:49

 

                                 중간사부터 초기기독교


                                                                                                          박인대교수


                                                1장/중간사시대



구약과 신약사이 400년의 공백기를‘신구약 중간기'(intertestamental period) 혹은‘초기 유대주의’(early Judaism)라 부른다. 우리는 이 기간 동안의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기간에 일어난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예수님의 사역의 배경을 연구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 시기는 크게 페르시아제국 시대와 그 후 헬라시대로 구분할 수 있는데, 특별히 유대교가 이 두 시대에 어떻게 반응하면서 생존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유대교의 헬레니즘화의 수용과 거부가 흥미로운 주제이다.


1. 페르시아 시대


1.1. 고레스

캄비세스 (Cambyses)의 아들 고레스가 페르시아제국을 일구어 냈다. 주전 559년 나이 40세의 고레스는 안샨(Anshan)이라는 작은 왕국을 상속받았다. 이 왕국은 바벨론제국의 경쟁관계에 있었던 메데제국(Median Empire)에 예속되어 있었다. 이 무렵 바벨론의 왕은 나보니두스(Nabonidus 혹은 Nabu-naid)였다.

철학자요 신비가였던 나보니두스왕은 바벨론의 神 마르둑(Marduk)으로부터 고레스가 정복자로 등장할 것을 들었다. 마르둑 신의 제사장들은 나보니두스가 바벨론 이외의(수메르와 아카드의) 이방신들을 의존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고 나중에 고레스가 바벨론에 진격해 왔을 때 환영했다.

BC 550-549년에 고레스는 자신의 군주였던 메대왕 아스티아게스(Astiages)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때 바벨론제국은 나보니두스의 아들 벨샤르우술(Bel-shar-usur)이 통치했다. 안샨(Anshan)의 수도인 파르사(Parsa)에 메데왕 아스티아게스가 고레스를 정복하려고 왔을 때, 그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그를 고레스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고레스는 관대한 정복자였기에 메대의 관료들을 그대로 살려두어 그 직을 유지하도록 했다. 고레스는 메데제국의 영토를 모두 다스리게 되었다. 그 당시 세계의 열강들이었던 리디아(Lydia)와 바벨론도 고레스에 의해 정복당했다. 그리고 이집트는 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Cambyses II)에 의해 정복당했다.

고레스는 그리스, 파르티아(Parthia) 그리고 히르카니아 (Hyrcania)도 정복했다. 고레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에서 귀환조치 시켰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서 이방인인 고레스가 도구로 사용된 경우이다. 이 귀환을 그 당시의 국제 정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팔레스타인에 친 페르시아 정책과 기운을 심어둠으로써 애굽을 정복하는데 유리하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고레스의 관대한 성격은 그의 현명한 국제 정세를 읽는 눈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고레스와 유대인의 관계를 살펴보자.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의 술 맡은 관원이었다. BC 537년 경, 고레스는 포로 귀환하던 약 5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 편으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빼앗아 왔던 성전 기구들을 돌려보냈다(에스라 6:3-5). 고레스의 칙령대로 팔레스틴에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단을 재건하고 제사를 회복했다.


이때 팔레스틴의 북쪽 지역인 사마리아에는 앗시리아의 정복자들에 의해 추방된 포로들인 사마리아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예루살렘과 성전재건을 방해했다(스 4:5). 페르시아인들은 고레스를 ‘아버지’라 불렀고, 그리스인들은 ‘스승이며 입법자’로 여겼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고레스는 바벨론 포로를 종식시켜 새 시대를 연 하나님의 종이었다. 고레스는 신민들에게 페르시아의 사상을 강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 그리고 인도의 고대문명들을 종합하는 일을 했다.


1.2. 다리오

고레스 사후 다리오가 페르시아를 통치했을 때 이스라엘에서 학개와 스가랴가 선지자로 있었다. 다리오는 광대한 페르시아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도로와 우편제도를 발전시켰다. 그의 상비군은 기병 2,000명, 귀족 출신 보병 2,000명 그리고 불사신들(immortals) 10,000명 정도의 소규모였다. 주전 512년 경 다리오는 70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스키토족(Scythians)을 공략했는데 이것이 아시아와 유럽의 첫 번째 군사 접촉이었다.

다리오는 BC 518년경에는 나일강과 수에즈만 사이에 운하를 건설하기도 했다. 다리오는 계속하여 그리스를 점령하려고 원정했다. 한 예로 마라톤에(Marathon)서의 전투에서는 패배를 맛보았고 그 결과 이집트도 다리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집트의 반란이 진압되기 전에 다리오는 죽었다.


1.3. 아하수에로(BC 486-465)

다리오가 고레스의 딸 아톳사에게서 나은 아들인(히브리어로) 아하수에로(에 4:6; 에스더서의 부림절을 참고하라; 페르시아말로는 크사야르사(Khshayarsha; 영어로는 크세르크세스, Xerxes)가 35세에 다리오 후계자로 발탁되었다. 아하수에로는 이집트의 반란을 잠재우고 바벨론의 반란도 잠재웠는데, 스스로 ‘페르시아와 메데의 왕’이라고 부름으로써 바벨론은 영원히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임을 나타냈다.

BC 480년 경 아하수에로는 그리스를 공격하기 위해 46개국으로 구성된 군대의 병력을 보충했고, 엄청난 함대도 동원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군대가 페르시아를 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아하수에로가 아테네를 정복했지만, 살라미스(Salamis) 해전에서 패배를 맛보았다. 그는 조로아스터교도였고 자기 과시를 좋아했다. 그 후 즉위 20년 만에 그의 친위대장인 아르타바누스에 의해 암살당했다.


1.4. 아닥사스다 1세(BC 465-425)

아닥사스다 롱기마누스(Longimanus: ‘손이 긴 사람’이란 뜻. 그의 오른 손이 왼손보다 길었다고 함)가 왕이 되었을 때, 애굽 그리고 그리스 등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할 책임을 떠맡았다. 다리오가 시행했던 효율적인 행정제도가 제대로 유지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가 아닥사스다에게 포로귀환을 요청했다.

페르시아 제국 시기에 바벨론에 거주하던 유대인들 중에서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물질에 눈이 밝았던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데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닥사스다 제 7년에 유대인들이 아하와(Ahava)에 집결하여 성전 기물들을 가지고 약 7개월이나 소요되는 귀환 길에 오른다. 귀환 후 에스라는 재건 사업을 추진했는데 특별히 잡혼(mixed marriage) 문제를 처리했다.

이때 느헤미야의 활약도 컸다. 그는 사마리아인들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성전재건에 힘쓴 후 12년 만에 다시 페르시아의 수사(Susa)로 돌아왔다. 그는 귀환한 백성들 가운데 잡혼과 율법의 준수의 해이가 다시 문제로 대두되자(느 13:23-24) 2차로 예루살렘을 방문한다. 이런 배경이 구약 성경의 마지막 내용이다. 아닥사스다 때로부터 사실상 페르시아는 기울기 시작했다.

그 후 다리우스 2세와 아닥사스다 2세(BC 404-358)의 통치 때는 애굽, 구브로, 페니키아, 시리아에서 반란이 더욱 만연했다. 과도한 세금과 총독직의 세습화도 큰 문제였다. 그 후 아닥사스다 3세는 애굽을 다시 정복했는데 조상 다리오 시대의 영화를 회복하려고 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와 동맹을 체결했다. 하지만 아테네 근처의 마케돈(마케도니아, Macedon)은 이것을 적대행위로 간주하고, 주전 338년에 필립과 알렉산더의 통솔아래 아테네와 싸워 승리했다.

아닥사스다 3세는 환관 바고아스(Bagoas)에 의해 독살 당했다. 다리오 3세(느 12:22)가 주전 336년에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다. 같은 해에, 알렉산더는 20세에 마케도니아의 왕이 되었다. 333년 다리오 3세는 잇수스(Issus)에서 참패당했다. 다리오 3세의 죽음은 곧 페르시아제국의 몰락이었다. BC 550-330년 동안 융성했던 제국이었다.


1.5. 이 당시의 유대인의 상황

BC 722년에 앗시리아에게 사마리아가 함락된 후 이방 나라에서 사마리아로 이주해온 사람과 잡혼이 많아졌다(왕하 17:24-29). 그 결과는 일부는 여호와 신앙을 견지했으나 다수는 이방 신을 섬기는 혼합주의가 만연해 졌다(왕하 17:33). 그 후 즉 약 150년 후, BC 586년에 남 유다도 망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정착하자 사마리아인들은 위협을 느껴서 그들을 반대했다. 귀환했던 사람들이 독자적으로 강해진다면 그들의 소유지를 빼앗길 까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이 성전재건에 동참하려고 했으나 귀환자들은 이방인과 같은 사마리아인들의 도움을 수용할 수 없었다. 사마리아인들의 통치자였던 산발랏은 성벽과 성전 재건 사업을 무력으로 반대했다. 그 후 사마리아와 유대인은 원수로 지냈다.


1.6. 디아스포라의 회당

아마 바벨론 포로기에 최초의 회당이 건립된 것 같다. 회당(synagogue; 히브리어로는 ‘케네세트’- 이 단어는 지금도 이스라엘의 의회를 지칭함)은 신구약 중간기 디아스포라의 삶의 중심이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귀환을 원치 않아서 디아스포라로 남게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제사제도는 중단되었으나 기도, 율법의 연구와 가르침은 계속되었다(겔 8:1; 20:1-3). 호주 10명만 모이면 회당이 하나 세워질 정도였다. 참고로 디아스포라에게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의 결정은 여전히 유효했다.

회당예배는 아주 자유로운 형식을 취했다. (남자 혹은 여자) 회당장은 예배를 감독했으며, 회당의 사환(눅 4:20)은 ‘하잔’(hazzan)이라 불렸는데 성경을 낭독자에게 건네주고 다 읽은 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하잔은 (지방)산헤드린의 대리로서 범법자를 매질 할 수 있었다.



2. 헬레니즘 시대


2.1. 헬레니즘의 전파자 알렉산더(Alexander the Great)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동맹으로 묶은 사람은 마케도니아의 필립(Philip)이었다. 이것은 페르시아에게는 치명타였다. BC 336년에 필립이 모살당한 후 아들 알렉산더가 즉위했다. 그의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였고 그리스 문화를 수용했다. 페르시아의 다리오 3세 때 알렉산더는 원정 중이었는데 Granicus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무찔렀다. 그 후 별다른 저항 없이 소아시아와 페니키아를 점령했고, 다리오 3세의 협상을 거절했다.

애굽인들은 페르시아를 침입자로 여겼기에 알렉산더를 해방자로 환영했다. 알렉산드리아는 마케도니아인들의 애굽 정복을 기념하기 위해 새운 도시다. 이 무렵 유대인들이 이 도시에 많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는 군사 정책이외의 모든 부분은 애굽인의 자치를 허용했다.

BC 331년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본토에서 대 접전을 준비했다. 바벨론과 수사 등 페르시아의 대부분의 도시를 점령했다. BC 330년에 다리오 3세는 죽고 알렉산더는 대왕(Basileus)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 후 동진 정책을 통해 러시아와 인도의 푼잡 지역까지 경계선을 확장했다.

323년에 알렉산더는 33세의 일기로 열병으로 사망했다. 사망 전에 여러 가지 문제로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그가 가는 곳에는 헬레니즘이 전파되었는데, 이것은 헬레니즘을 다른 모든 문화보다 더 우수하다고 여긴 알렉산더의 영향 때문이었다.


2.2. 알렉산더 사후의 분열 및 톨레미 왕조 치하의 유대인

알렉산더가 죽은 후 권력 다툼이 발생했고, 알렉산더의 형 필립 아르히다이오스를 황제로 세웠다. 그러나 이 결정은 오래가지 못했고 페르딕카스가 제국을 대표하게 되었다. 하지만 알렉산더의 부하들은 제국을 분할-점령해 갔다. BC 315년에 이르러서야 알렉산더의 후계자로 4명의 걸출한 장군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안티고누스(Antigonus)는 지중해에서 중앙 아시아까지, 카산더(Cassander)는 마케도니아를, 톨레미 라기(Ptolemy Lagi)는 이집트와 남부 시리아를,마지막으로 리시마쿠스(Lysimachus)는 트라키아를 지배했다. 이 중에서 안티고누스가 가장 강력했기에 나머지 3장군들은 동맹을 맺기도 했다.

그 후 톨레미는 팔레스틴을 통치했는데 이 때 의인 시몬(Simon the Just)은 톨레미 1세가 파괴한 예루살렘 성곽을 재건했다. 시몬은 유대인의 지도자요 대제사장이요 교사들의 수장이었으며 예루살렘에 저수지도 만들었다.

그 후 안티고누스는 톨레미를 시리아에서 쫓아내고 시리아를 장악했다. BC 311년에 셀류커스는 바벨론을 정복하고 셀류커스 왕조를 세웠다(나중에 안디옥이 수도가 됨). BC 301년 리시마쿠스, 셀류커스, 그리고 카산더는 연합하여 안티고누스를 대항한 결과 그를 프리기아의 입수스(Ipsus)에서 죽였다.

이 전쟁에 톨레미가 가담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틴 지역을 정복해버렸다. 셀류커스는 BC 281년에 살해되고 안티오커스 1세가 왕위를 이어 받았다. 그 후 3왕이 알렉산더 대제의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집트의 톨레미 왕조, 시리아의 셀류키드 왕조,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누스 가문).

BC 252년 안티오커스 2세는 톨레미의 딸 베레니케(Berenice)와 혼인하여 이 두 왕조간에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안티오커스 2세의 다른 아내였던 라오디케(Laodice)는 베레니케와 그녀의 자녀들을 죽여 버렸는데, 이 사건을 기점으로 셀류키드와 톨레미 3세 사이에 라오디게아 전쟁(Laodicean War)이 발발하여 톨레미 가문의 승리로 끝났다.


2.3. 셀류키드 왕조 치하의 유대인

BC 223년에 18세로 등극한 안티오커스 3세의 팔레스틴 정복 역사 중에서 BC 198년에 있었던 예루살렘입성은 주목할 만하다. 셀류키드 왕조의 팔레스틴 통치 시기는 이집트인의 팔레스틴 통치 보다 더 헬레니즘을 수용하도록 압력을 가했던 시기였다. 이 무렵 로마의 힘은 강성해 갔다.

아테네 출신인 안티오커스 4세는 에피파네스 (신현)으로 불렸는데, 유대인들은 그를 ‘에피마네스’(Epimanes, 미친 놈)로 불렀다. 이 때 예루살렘에는 의인 시몬의 자손인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가 다스리고 있었다. 친 헬라화 정책을 추진한 유대인에 의해 그리고 에피파네스의 재가에 의해 야손(Jason)이 대제사장으로 추대되었다. 야손은 짐나지움을 세웠고, 유대 이름대신 헬라이름을 선호했다. 하지만 정통 유대인들인 하시딤(Hasidim, 경건한 자들)은 反헬라화 투쟁을 전개했다. 메네라우스(Menelaus)는 베냐민지파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뇌물을 바쳐 대제사장이 되었다.

에피파네스는 쥬피터 신상을 성전에 세웠는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멸망의 가증한 물건(the abomination of desolation)으로 여겼다. 돼지가 성전 제단에 드려졌고, 바카스(Bacchus)를 위해 酒神祭가 드려졌다. 유대인의 절기를 지키면 사형에 처하라는 법령이 선포되었다. 히브리 성경 사본을 파기하라는 명령도 떨어졌다. 이것에 대해 저항했던 자들은 무참히 죽어갔다. 참고로 BC 168년에 피드나(Pydna)전투에서 로마군은 마케도니아 군을 무찔렀다.


2.4. 유대인에게 미친 헬레니즘의 영향

알렉산더 대제는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헬라의 사상과 문화를 전수 받았고 정복지 마다 헬라도시를 세웠다. 연극장, 짐나지움, 도서관, 헬라교육-철학, 헬라화된 축제 등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포로 이전에는 가나안의 종교가 위협이었다면, 포로 후기에는 헬레니즘이 유대인들의 최대의 적이 되었다.

디아스포라에 미친 헬레니즘- 바벨론, 안디옥, 다마스커스, 에베소, 버가모, 사데, 티그리스-유프라데스 강 계곡 등에는 큰 디아스포라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들 중 20세 이상 남자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성전세를 보내었고 절기에는 순례길을 떠났다. 하지만 헬라문화와 유대문화의 종합은 여러 지역에서 불가피해 보였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LXX이 번역되었는데, 아마 톨레미왕조의 첫 번째 왕인 ‘필라델푸스’ (BC 285-246) 치하에서 시작되었다.

번역의 동기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이 자녀들의 신앙 교육을 위해서 헬라어 성경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주후 3세기 오리겐 때에 ‘Septuagint’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전설에 의하면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선발된 72명의 장로들이 별실에서 72일 동안 번역하여 제출한 것으로 거의 일치한 번역본이라고 한다. 이런 전설은 LXX에 영감성을 부여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이다.

성경해석과 관련해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BC 160년경의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와 BC 20에서 AD 50년경에 살았던 필로(Philo)는 헬라의 풍유적 해석을 도입했다. 반면에 알렉산드리아의 영향에서 제외된 안디옥에서는 문자적 해석이 유행했다. 디아스포라처럼 팔레스틴에서도 헬레니즘이 유행했지만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2.5. 마카비 왕조와 反헬레니즘

모딘 (Modin)이라는 마을 출신의 늙은 제사장인 마타디아스의 출현은 중요하다. 그는 이방신 숭배를 거절했으며 배교한 유대인과 에피파네스의 사절을 죽여버렸다. 그는 5명의 아들과 함께 도망갔다. 그 후 다른 사람들이 가담하여 게릴라전 형식으로 헬레니즘에 대항했다. 그의 사후 셋째 아들인 유다 마카비가 지도자가 되었다.

그 후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성전을 정결케 하고 하누카(Hanukkah, 빛의 절기)를 12월 25일부터 8일간 지켰다. 그 후 시리아 군대와의 전투에서 유다 마카비는 전사했다. 이제 유다의 형제들인 시몬, 요나단, 요하난이 지도자로 역할을 했다. 시몬이 이스라엘의 지도자 회의에서 지도자 및 대제사장으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하스몬 왕조가 합법적으로 출법했다. 하스몬(혹은 아스모니우스)은 마카비 가문의 조상의 이름이다. 그러나 BC 134년 시몬과 그의 두 아들은 야심 많은 사위에게 살해당하고 셋째 아들 요한 하르카누스가 왕이 되었다. BC 142-BC 63년까지 하스모니안 왕가는 시리아로부터 독립했다.


2.6. 하스몬 왕조의 성장과 쇠망

히르카누스가 시리아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정치적인 협상에 기인한다. 시리아는 히르카누스가 시리아의 군사 행동에 지원할 것을 약속받고 왕위를 보장해주었다. 이렇게 되자 헬라주의자들과 하시딤 사이의 분쟁은 종식되었다. 헬라주의자들의 이상은 사두개인들을 통해서 발전되었고 하시딤의 정신은 바리새인들에게 전승되었다.

히르카누스는 정복 정책을 펼쳤는데 부자와 귀족의 지원을 받았다. 이유는 새로운 상업의 기회를 정복정책이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는 독실한 하시딤의 일원이었지만 헬라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BC 104년에 사망했다.

히르카누스의 장자 아리스토불루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폭군이었던 그는 음주, 질병, 반란에 대한 공포로 통치 1년 만에 사망했다. 따라서 그의 형제인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계승했다. 영토확장 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솔로몬 시대의 영토를 회복했다. 이때 하스몬 왕가와 바리새파의 갈등은 절정에 달했다. 외국 보병을 동원해서 바리새파를 복종시키고 말았다.

바리새인들은 시리아 왕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나중에 얀네우스에 의해 많은 바리새파들이 살해당했다. 이런 대립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대립을 자연스럽게 초래했다. 학자들은 얀네우스를 의의 교사(the Teacher of Righteousness)를 핍박한 사악한 제사장(the Wicked Priest)으로 여겼다.

아리스토불루스와 얀네우스와 번갈아 가며 결혼했던(미망인)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왕권을 잡았다. 그녀의 사후 히르카누스 2세가 통치했다. 그는 동생 아리스토불루스 2세에게 통치권을 넘겨주었다. 그 후 이두메 출신의 안티파터가 정권을 잡았다. 이런 형제간의 혼란을 중재하기 위해 로마의 폼페이가 개입하게 되었다.



3. 신구약 중간사의 신학 사상


3.1. 신론

신구약 중간기에는 하나님을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계신 초월하는 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하나님의 성호를 직접 사용하기를 주저하여 대신에 완곡어를 사용했다. 마카비 1서에서 저자는 원칙적으로 하나님을 ‘하늘’로 말한다. 혹은 유대 랍비들은 ‘세키나’, ‘그 이름’이라는 대체 용어를 사용했다.


3.2. 천사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천사를 이해한 것은 신구약 중간기의 특징이다. 마카비 2서에서 천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서 싸운다.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직접적인 접촉을 가지신다는 묘사 대신에, 외경들은 번개와 눈, 비, 구름, 흑암, 추위, 더위, 안개 등에 대한 책임을 천사들에게 지우고 있다. 즉 눈을 주관하는 천사, 비를 주관하는 천사, 바람을 주관하는 천사와 같은 개념이 발생했다.

에녹 1서 20:1절 이하에서 우리엘, 라파엘, 라구엘, 미카엘, 사라카엘, 레미엘과 같은 천사들의 이름이 BC 2-3세기의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것처럼 언급된다. 그리고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 혹은 ‘파수군’으로 나타난다. 천사들의 계급 구분도 나타나는데, 에녹 1서 61:10절에는 케루빔, 스라빔, 오파님, 권세의 천사, 주권의 천사 등이 나타난다. 천사의 기능 중 최고의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외경들은 가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자로서 천사를 언급한다. 마카비 2서 5:1-3절에서 말을 탄 천사가, 토비트에서는 라파엘이 이 기능을 수행한다(행 7:38절 참조). 그리고 천사들이 수호천사로 등장한다. 모든 나라는 수호 천사를 가지고 있다(창 11:7절의 아람어 번역). 희년서 35:7절에서 미가엘은 이스라엘의 수호천사로 언급된다.


3.3. 마귀론

악한 영의 기원에 대해서 에녹 1서 15:8절은 “영들과 육체의 결합으로 낳아진 거인 (창 6:4의 네피림)들은 땅에서 악한 영들이라 불리우며 땅 위에서 거할 것이다. 악한 영들은 그들의 몸에서 발생했으니…” 중간기 문헌들은 악한 영들이 땅에 가지고 온 악에 대한 언급을 상당히 내포한다. 마귀들이 타락한 천사의 후예라는 것이 이 기간의 문헌에 담겨있다.

악한 영들의 우두머리에게 붙여진 이름은 벨리알(Belial) 혹은 마스테바(Masteba)라고 부른다. 몇 가지 방도가 마귀의 악한 궤계를 대응하여 사용될 수 있다고 믿어졌는데, 주문(magic formula)을 외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리고 토비트 8:2-4절에 의하면 물고기의 심장과 간을 향의 재 위에 놓아두면 마귀가 그 냄새를 맡고 도망간다는 미신적인 언급이 등장한다.


3.4. 종말론

이 당시 유대인들의 특징 중 하나는 내세에 대한 신앙을 종교의 근본으로 삼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메시아의 도래의 산물이 될 것이다. 에녹서는 죽은 자들의 집결지로서 스올을 말하며, 하나님의 공의가 그곳에서 작용하여 선인에게는 보상이, 악인에게는 징벌이 시행된다고 말한다.

희년서의 종말론적인 교훈은 모든 죽은 자들은 스올로 내려가며, 메시아가 임하면 정직한 자의 영혼들이 큰 기쁨을 맛보리라고 언급한다. 피르케 아봇 6:10절은 “임종 시 사람은 금이나 은, 보석이나 진주, 그 어느 것도 가져가지 않으며, 오직 토라와 그의 모든 선행만을 가져간다”라고 말함으로써 인생의 마지막에서 받을 보상을 언급한다.


3.5 메시아 신앙

죽은 자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신앙과 더불어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신앙이 나타나며, 그는 왕국을 세우도록 하나님의 기름을 부음받은 자이다(참고. 에스드라 2서 11-13장). ‘12족장의 유언서’ 중 일부인 ‘르우벤의 유언’ 6:7-12절에서 메시아는 레위에게서만 나온다고 말하는 반면, ‘유다의 유언’ 22장과 24장에서 메시아는 레위에게서만 나온다고 말한다.

‘에녹의 유사서’(The Similitudes of Enoch)과 에녹 1서 37-71장에서 메시아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요한의 로고스처럼 모든 인간보다 먼저 계시고 보다 뛰어나셨던 초월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이 메시아는 종말에 나타나실 것이며, 이 당시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인자’라는 칭호가 메시아에게 적용된다(에녹 1서 45:1-6; 52:4).


               2장/쿰란공동체와 초기 기독교 비교




1.1. 쿰란공동체와 엣세네공동체

1)두 공동체 사이의 유사성

1. 유대주의에서 분리된 집단이다(핫시딤).

2. 훈련규칙을 가지고 있다.

3. 회원의 생활은 감독자의 책임하에 있다.

4. 소유를 공동으로 관리한다.

5. 가입 희망자는 일정 기간의 유예기간을 통해 정회원이 될 수 있으며, 정회원이 아닌 사람 은 공동식사에 참여할 수 없다.

6. 정결의식을 행했다.(Charles F.Pfeiffer,The Dead Sea Scrolls and the Bible,.p.94.)

7.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했으며, 높은 수준의 의(義)를 추구하였다.

8. 고대 문서, 특히 예언서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다.(F.F.Bruce,{사해사본},.pp.202-205.)


2)차이점(A.D.Crown,"Qumran,Was it an Essene settlement,".p.30-31.)

1. 필로는 그의 저서에서 엣세네파에 대해 평화를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언급했다.(Philo, Quod amnis probus liber sit, in Complete Works)

반대로 쿰란 문서에는 그들 공동체의 호전적인 성격이 드러나 있다.

그들의 손에는 창과 칼이 쥐어져있다. 그 창의 길이는 7규빗은 족히 될것이다...그 칼은 제련과 표백을 통해 정제된 순수한 철로 만들어져 있어서 마치 거울과 비슷하다...(1QM 5.5-16).

2. 고대 문헌에는 엣세네파가 독신으로 살아간다고 언급했다.

(Philo, Apologia pro Judaeis 14-17;Pliny, Natural History 5.15.73; Josephus, War 2.120-121,160-161.)

쿰란 문서에는 비록 공동체에는 참여하지 못하지만 여자와 어린이에 대한 규율이 나타난다.(1QSa 1.6-8;11QT 62.9-10;63.11-15)

3. 엣세네 공동체에서는 노예제도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노예들을 원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노예 제도를 부정한 것으로 생각하였다(Josephus, Antiquities 18.21).

쿰란 문서에서는 노예에 대해 부정적이었다는 암시가 나타나있지 않다.

(CD 11.12;12.10)

4. 엣세네 공동체는 부(富)와 더불어 그것에 현혹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Josephus, War 2.122; Philo, Apologia pro Judaeis 4,11)

쿰란유적에서는 그들이 소유했던 것으로 보이는 값진 물품들이 발굴되었다.

5. 엣세네 공동체에서는 맹세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고대 문헌들은 증언하고 있다. 이들 에게 있어서 맹세는 오직 공동체에 입회할 때 뿐이었다.

(Philo, Quod omnis probus liber sit 84; Josephus, War 2.135,139-42.)

쿰란 공동체는 매년 공동체에 대한 맹세가 있었다....그들은 매년 그 일을 행한다(1QS 2.19).

6. 엣세네 공동체에서는 사유 재산은 일절 금지됨은 물론 공동체에 헌납해야 했다.(Philo, Apologia pro Judaeis 4; Quod omnis probus liber sit 86; Josephus, War 2.122)

쿰란 공동체에서는 어느 정도 사유재산을 허용하고 있었다.(1QS 6.19; 7.6-8; CD 14.13; 6.15-17)


3) 결 론

1. 엣세네 공동체와 쿰란 공동체는 어느 정도의 유사성과 함께 차이점을 공유하고 있다.

2. 두 공동체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극단적인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3. 쿰란 공동체는 다른 엣세네파와 의견을 달리하는 엣세네파의 한 부분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F.F.Bruce 206)


I.2 쿰란공동체와 초기기독교공동체

1) 쿰란 공동체와 기독교 비교

1. 반(反)성전주의적 공동체

쿰란 공동체는 예루살렘 사제직과 유대인 지도자들을 부정하다고 간주했다.

쿰란 공동체는 공식적 유대인 제의와 생활에서 탈퇴하였다(F.V.Filson 129).

2. 분파적 공동체

쿰란 공동체는 개인주의 성향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분파적 성향고집

예수의 제자들은  급진적인 분리는 시도 하지 않았다(Filson 129).

3. 독선적인 공동체

- 쿰란 공동체의 사랑의 대상은 오직 공동체 내의 사람에게 국한된다.

- 반면 어두움의 자식들로 간주되는 이방인이나 쿰란의 사상을 나눠갖지 못한 다른 유대인들은 증오의 대상이다( Filson 129-30, Charlesworth 74, Freedman 100-101)

- 예수는 반대로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친다.(마 5:44)

4. 율법을 중시한 공동체

- 쿰란 공동체는 율법의 준수가 올바른 신앙의 척도였다.

- 그들의 구원은 율법의 올바른 해석과 준수에 달려있었다.


2) 쿰란 공동체와 세례 요한

- 쿰란 공동체와 세례 요한은 매우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간주했다.

① 요한이 어렸을 때에 쿰란(엣세네) 공동체에 의해 입양되었다는 견해.

② 적어도 요한이 쿰란(엣세네) 공동체와 밀접한 인척관계가 있었다는 견해(O'Connor 57).


- 쿰란 공동체와 세례 요한의 유사성(A.J.Thomson 285)

① 젊은 시절에 광야에서 거주하였다는 점.

② 회개의 선포와 악한 세대에서의 분리를 촉구하였다는 점.

③ 세대에 대해 저항적인 성격.

④ 메시야를 대망하였다는 점.

⑤ 세례와 더불어 심판의 날을 선포하였다는 점.


- 쿰란 공동체와 세례 요한의 차이점(A.J.Thomson 285, W.S.Lasor 150)

① 선택된 무리가 아닌 일반 대중을 상대로 선포했다는 점.

② 메시야의 정확한 오심과 사역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한 점.

③ 쿰란의 세례가 2년의 견습 기간을 조건으로 하고 있는데 비해 요한은 회개와 신앙고백 이후 즉시 세례를 주었다는 점.

④ 요한의 세례는 메시야의 오심과 연관되는 종말론적 성격을 띠고 있으나 쿰란의 세례는 그렇지 않다는 점.

⑤ 요한의 금욕생활은 구약의 나실인의 서원과 연결될 수도 있으므로 반드시 쿰란과 연결시킬 필요는 없다는 점.

- 쿰란 공동체와 세례 요한의 연관성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어렵지만 그가 쿰란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았으며, 이를 통해 쿰란의 사상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내로 유입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가 어렵다.

3) 쿰란 공동체와 예수의 연관성

1. 종말론

- 쿰란 공동체의 신학과 예수의 신학은 절대적으로 종말론적이다.

- 양자는 모두 임박한 종말론을 선포했으나 예수의 종말론은 좀더 실현된 종말론적 성격을 띠고 있다.(Charlesworth 70)


2. 메시야관

- 쿰란 공동체의 메시야관(D.S.Russell 147-49)

① 제사장적인 메시야와 왕적인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다.

② 사독(Zadokite) 단편들에 메시야 도래에 관한 언급들이 있다.

③ 사해사본에 나타난 단수 단어가 실제로는 복수로 읽혀졌는데, 이는 저자가 두 사람 이상의 메시야를 대망했음을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아론과 이스라엘의 메시야들과 한 예언자가 올 때까지..(훈련교범 Col.9, 제11행).

④ 결론적으로 쿰란 공동체의 메시야 대망은 유대의 전통적 희망인 왕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야를 기대하는 점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3. 안식일에 관한 문제

- 안식일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예수의 견해는 쿰란(엣세네) 공동체와 의견을 완전히 달리하고 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지어진것이 아니다(막 2:27).

안식일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안식일 준수에 대한 반대가 아닌 안식일의 본래 적인 의미를 퇴색시킨 데 대한 것이다.

- 쿰란 공동체에 있어서 안식일의 준수는 바리새파 보다 훨씬 엄격하였다.

쿰란 공동체에서는 안식일에 어떤 물건을 다른 친구에게 빌려주거나, 조약돌을 들어올 려서도 안되었으며, 집의 먼지를 터는 행위 역시 금지되었다(CD 10.14-11.18).

- 한편 마태복음 12:11에 나타난 예수의 언급과 다마스커스 문서에 나타난 조항은 정확 하게 대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너희 사람들에게 묻겠다. 만일 누군가 양 한 마리를 갖고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날 구덩이에 빠졌다고 한다면 그 양을 들어 올리지 않겠느냐?(마 12:11).

나는 구덩이에 그 양을 두고 떠나겠다(CD 11:13-14).

쿰란 공동체에서는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짐승을 도와주지 말라고 엄히 경고한다.

- 요세푸스 역시 엣세네파는 "다른 유대종파보다 더 엄히 안식일을 지킨다."라고 증언한다(War 2.8.147).


4) 쿰란 공동체와 초대교회 공동체

- 두 공동체는 모두 스스로를 진정한 이스라엘이며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설립된 공동체 라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마음에 든 선택받은 사람들..(1QS 8.6).

당신의 기뻐하심을 입은 아들들.....(1QH 11.9).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눅 2:14).


- 두 공동체 사이의 차이점(Bruce 227-8)

① 쿰란 공동체와 초대교회 공동체는 동일하게 물로 씻는 정결의식을 가졌지만 기독교 적인 독특하고도 영원히 한번만 가지는 요소를 쿰란 공동체는 갖지 않는다.

② 두 공동체는 공동식사를 가졌는데, 기독교의 성찬과 같이 성례전적이며 기념적인 요소가 쿰란 공동체에 있어서는 결핍되고 있다.

③ 초대교회 공동체에 있어서 물건과 재산 통용은 쿰란과 같이 강제적인 것이 아닌 자발적 성격이 강하다.

④ 쿰란 공동체는 자신들을 외부와 격리시킴으로서 자신들의 거룩함을 지키려 한 반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모든 종류와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과 사귀었으며, 그들을 향한 선교에 열심이었다는 점이다.


결론-  쿰란 공동체와 초기 기독교 공동체 사이에는 수많은 유사성과 차이점이 나타난다. 이 중 어느 한 방향으로만 치우쳐도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사상적 배경을 놓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쿰란 공동체와 초기 기독교 공동체 사이에 나타난 여러 사상적, 생활의 유사성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쿰란 공동체의 영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3장/요한복음의 표적들



1.  표적의 언어적 기원


   요한복음은 예수의 표적에 대해 공관복음서 저자들과는 분명히 다른 관점을 보이고 있다. 기적(miracle 혹은 δυναμιζ) 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표적(sign, σεμεια)이란 말을 쓰고 있는 점이다.

  표적이란 일반적으로 어떠한 사람이나 어떠한 사물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가시적인 표시를 의미하지만 특별히 이 단어는 요한복음의 신학적 해석을 위한 열쇠가 되는 말로 계시의 표현이다. 이 단어는 특히 요한복음에 17번 나타나고 있다. 복음서들 중 요한복음에서 만 표적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헬라에서의 세메이온(σημεῖον)의 의미는 고전 그리스어에서 방패 위에 그려져 있는 문장이나 혹은 반지에 있는 인장을 가리키기도 한다.

요한복음에서 세메이온(σημεῖον)은 자기-입증에 있어서 증명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1.1 뒤나미스(δύναμις)


  예수의 표적에 대한 뒤나미스(duvnami")는 공관복음서의 기자들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발터 바우어(Walter Bauer)는 이 용어를 힘, 능력, 수용력, 수단, 외적인 힘의 표현, 개인적인 초자연적 인간으로서의 힘 등으로 표현하고 각각의 의미 의미들이 사용되는 성경 구절들을 나열하고 있다. 이 말은 세속적인 언어 사용으로 기인한 것이지만 공관복음 안에서는 세속적인 의미와는 구별되어 하나님의 행위에서 비롯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능력을 지칭하는 말이고 때로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또 그 능력이 성령이나 예수를 통해 나타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복음서들의 경우 주로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경우에 뒤나미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1.2. 세메이온(σημεῖον)


세메이온은 '신호하다', '표시하다'를 의미하는 세마이노(shmaivnw)로 부터 파생된 단어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출애굽 때 행하신 놀라운 사건들을 가리키는 기사와 함께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구약에서 이 단어는 안식일을 거룩한 날로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출31: 13, 17). 이 용어는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표적을 가리키는 특유한 말이다. 예수의 표적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용어가 이것이며, 예수의 사역에 관하여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3. 에르곤(ἔργον)


'일' 혹은 '사역'으로 번역되는 이 용어는 요한 사도가 표적을 말할 때 자주 사용하던 것이다. 마태복음 11장 2절에서 세례 요한은 옥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놀라운 여러 가지 '일들'(타 에르곤, tav e[rgon)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라고 묻는다. 그러나 이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표적을 의미하는 용어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를 증거하고 또한 그가 이루실, 그리고 이미 이루신 구원을 증거하는 에르곤 은 단지 능력이 있거나 영광스러운 행위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하심을 보여 주는 일로 나타난다. 더불어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통하여 주님에게는 표적의 사역이요 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복음서와 더불어 신약에서 기자들은 이적 혹은 기적을 말할 때 그 용어를 달리 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뒤나미스(duvnami")가 행위를 성취하는 능력에 관계된 것이라면 테라스(tevra")는 경외 또는 두려움을 뜻하고 있다. 그리고 세메이온(shmei'on)이 행위자의 신적사역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에르곤(e[rgon)은 행위자의 행위 그 자체에 관계되어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표적'이란 말이 자연법에 역행해서 행해지는 사건이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해지는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가리키는 놀라운 일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2. 표적사용의 목적


첫째로 표적이란 말 자체에서 엿보이듯이 요한이 소개하고 있는 표적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를 제시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있다.

둘째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표적 사건을 묘사하면서 세메이온을 사용한 것은 그 표적 사건 자체를 묘사하는데 목적이 있기보다는 이 표적 사건에 뒤이어 따라오는 예수의 담화를 소개하기 위한 일종의 도입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표적이 행해진 뒤에는 거의 대부분 예수의 담화 가 뒤따라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신 두 번의 표적 을 제외하고는 모든 표적 사건 뒤에 예수의 담화가 뒤따라 나오고 있다.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요5:1-18)뒤에는 심판과 영생에 대한 예수의 담화가 뒤따라 나온다.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요6:1-15)뒤에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에 관한 예수의 담화가 계속 된다. 태어나면서 눈먼 사람을 눈 뜨게 한 사건(요9:1-10:21) 다음에는 목자의 비유에 대한 예수의 담화가 계속된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요11:1-44)뒤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긴 담화가 요한복음 후반에 계속되고 있다.

결국 표적은 사람들을 예수께 나아가도록 인도할 뿐 아니라 믿음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끌어가는 곧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자로 영생을 주는 분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표적의 상징적 의미는 예수의 자기계시라고 할 수 있다. 표적을 통하여 진리 되신 자신을 상징적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3.  표적 사용의 특징


요한복음의 7가지 표적을 통해 나타나는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공관복음에서 예수가 행하신 일 곧 치유와 귀신 축출 그리고 자연이적 등이 요한복음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지만 귀신 축출 사역을 제외하고는 예수의 행하신 표적의 행위보다 예수 자신이 더 크게 부각되고 있다. 즉 요한복음의 표적들은 예수의 기원과 능력, 목적 그리고 예수의 정체성을 밝히는 데에 그 초점을 맞추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의 표적들은 공관복음에서는 구원적인 관점을, 요한복음에서는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둘째로 표적과 믿음과 관계가 다르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공관복음에는 믿음이 예수의 표적을 일으키는 동기가 되나 요한복음에는 표적행위가 먼저이고 그것을 본 후 믿음이 생겼다고 진술하고 있다. 가나에서의 첫 번째 표적부터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믿었다(2:11)고 소개하고 있다.


  셋째는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서 표적 이후의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공관복음에서는 사람들이 믿음의 결과로서 문제 대한 해결을 얻게 된다. 공관복음에서의 표적은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이다.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표적을 통하여 예수를 알게 되고, 예수를 '메시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표적을 통해서 신앙이 촉발되어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그를 믿게 되는 것이다.


  넷째는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서 비밀에 부치는 경향이 크다. 예수의 표적 이후에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단서를 붙이는 경우가 특히 마가복음서에 많다. 하지만 요한복음서에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으며 항상 그것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다섯째는 귀신축출 표적에 대한 관심 전혀 다르다. 공관복음에는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 하나님 나라에 초점이 맞추어진 표적을 행하는 실행자로서의 예수는 자연스럽게 메시야임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가장 공통적인 표적 행위들의 형태가 귀신축출 표적의 형태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서의 표적들은 예수의 정체성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계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공관복음과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요한복음의 표적의 사건들은 공관복음 보다 훨씬 더 극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9:1)라든지 "38년된"(5:5)이라든지 이런 설명 등이다. 또한 자연이적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나며, 극적인 정점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인 것이다. 나사로는 죽어 무덤에 둔지 나흘이 지났다(11 : 17). 또한 39절에서는 이미 부패하여 냄새가 난다고 하였다. 완전히 죽은 나사로, 이것은 더 이상 회생의 길이 없는 극적인 상황을 묘사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를 살리신 표적은 바로 그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창조행위인 것이다.



4. 요한복음의 표적들


4.1.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표적

이 표적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으며 요한복음의 7가지 표적 가운데 첫 번째 표적이다. 예수께서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신 곳은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13km 떨어진 갈릴리 지역의 한 마을인 가나다. 이곳의 한 혼인 잔치에서  사흘되던 날에 표적을 행하셨다. 제 3일은 예수의 부활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사흘째 되던 날에 일어난 것처럼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날이다. 가나라는 구체적인 장소 제시어와 사흘 되던 날이라는 시간 제시어가 결코 비유적이거나 비역사적인 구성이 아니다.


혼인잔치 표적을 처음에 소개한 이유는 예수는 유대교의 형식적인 결례를 완성하고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결혼잔치에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되는  포도주가 모자라는 상황이다. 축복과 기쁨으로 가득해야할 결혼잔치에서 기쁨의 요소인 포도주가 떨어져 감으로 인해 자칫 잔치의 흥이 깨질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포도주를 채워지게 함으로 결혼잔치가 기쁨과 축제의 분위기를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특히 예수가 행한 첫 표적으로서의 예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를 통해 제자들이 믿게 되었다는 선언으로  종결한다. 그러므로 이 표적은 자신이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임을 증거하는 행위메세지인 것이다.


4.2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4:46-54)


이 사건 또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의 병자치료와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16절의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 것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첫 번째 표적과 짝을 이룬다. 같은 장소인 가나에서 생긴 일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앞선 사건인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와 나란히 연결되어 있다. 두 사건은 모두 믿음의 이야기 즉 사마리아 여인의 믿음과 왕의 신하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둘 다 당시 소외 계층에 속하던 사마리아인, 이방인 혹은 왕의 신하가 예수에 대한 놀라운 믿음을 보이고 있다. 본문 가운데 “믿었다”란 동사가 두 번씩이나 반복되고 있는 데서도 그 점은 분명해 보인다.


예수가 유대에서 갈릴리에 오신다는 소식은 왕의 신하에겐 자신의 아들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한다. 왕의 신하는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많은 일을 행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간다.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는 간청은 일단 거부되는 것처럼 보인다.(48절) 이에 굴하지 않고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라고 간청한 후에 “ 네 아들이 살았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  예수의 일련의 표적의 과정을 보고 겪은 왕의 신하가 집으로 돌아가 취한 행동, 자기와 온 집안이 다 믿었다는 것은 표적의 결과가 단순히 한 개인의 체험이나 생명의 부활에 대한 신비를 전달하기 위함이었을까?


예수의 이 두 번째 표적은 첫 번째 표적과도 같은 주제를 갖고 있다. 첫 번째 표적이 생명을 풍성케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면 두 번째 표적은 죽음과 멸망의 위협으로부터의 생명의 구원을 강조하고 있고 따라서 이 표적 이야기에서는 생명이 주제이다.

예수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란 메시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본문 가운데 “네 아들이 살리라”란 문구가 세 번 비슷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이 반복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생명을 주는 능력”이 있음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5:21에 나오는 예수는 생명을 주시기 원하시는 아들에 대한 언급을 준비하고 있다. 요한은 4:14에서도 예수가 주는 물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한다고 생명을 강조한 바 있으며 6장에서는 생명의 떡을 먹이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이 본문을 통해서 예수가 “생명을 주시는 분” 즉 창조주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둘째로는 믿음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이다. 50절에서 아들이 살았다는 선포를 그대로 믿는 믿음이 본문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눈에 보이는 표적을 행하지 않으셨지만 그는 믿고 돌아갔다. 브루스는 이 관원의 믿음에 대해 흥미로운 해석을 한다. 가나와 가버나움 사이는 약32킬로미터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 관원은 평상 걸음으로 당일 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아들이 살았음을 말씀하신 것이 오후 1시이기 때문이다.(52절) 보통의 경우 바로 달려가서 아들의 생사를 확인했을 것이다.4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라는 복수를 사용하여 말씀하심으로써 관원이 혼자 온 것이 아니라 다른 하인들과 함께 왔고 예수님을 가버나움으로 모시고 갈 작정이었기 때문에 말과 같이 신속히 가버나움에 갈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왔음이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원이 바로 돌아가지 않고 다음날까지 머문 것은 아들이 나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신뢰 때문이었을 것이다. 관원의 식솔들은 아들이 나음을 보고 믿었지만 관원은 아들이 나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다. 이런 관원의 믿음은 요한복음20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야 믿는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도마의 믿음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결론 구절인 53절의 말씀처럼 “그와 온 집안이 함께 믿었다.라고 아버지의 믿음이 강조되어 있어 두 표적의 결과가 모두 믿음으로 끝나고 있다. 이 표적에 앞서서도 요한은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라고 사마리아인들의 믿음을 언급한 바 있다.


결국 요한은 이 표적 이야기를 통해서 믿음이 생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즉 믿으면 살게 될 것임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믿음과 생명과의 밀접한 연관성은 그의 복음서 전반에 걸친 주요한 관심사이기도 하다. 예수는 표적을 수행하는 표적 수행자가 아닌 예수 자신이 생명을 주시는 자라는 것이다. 즉 예수는 죽음과 멸망의 위협으로부터 생명의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4.3 베데스다 연못의 표적


요한의 표적 가운데 안식일과 관련된 표적은 베데스다 연못에서의 치유표적(5:1-19), 맹인으로 태어난 청년을 고치시는 표적(9:1-41)이다. 안식일 치유 사건은 유대인과 예수간에 거듭되는 안식일 논쟁, 왜 예수께서 그렇게 행동하셨는지와 예수께 반대하는 유대인의 성격을 보여준다.

안식일에 솔로몬 행각이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병자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일 년에 한 번 물이 동할 때 물에 먼저 뛰어들면 병이 낫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을 말해준다. 그 믿음이란 병자들의 치유 현상에 대한 미신이라고 생각된다. 고대인들의 증거에 의하면 그 물은 붉은 색이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철분을 함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물이 가끔 치료의 효능을 발휘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천사들이 내려와서 물을 진동시키는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38년 된 병자가 누워 있었다. 그는 너무도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리고 있어서 이제는 낫고자 하는 의지도 상실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혼자 힘으로는 절대로 병 나음을 얻을 수 없었다. 아무도 자신을 구원해 주지 못하는 상황에 그는 38년을 어둠속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그때 예수는 그 오래된 병자에게 질문을 한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는 대답한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절) 그는 먼저 자신이 못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그래도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인다는 항간의 미신을 믿으면서 지금까지 지내오고 있었다. 이런 소망 없는 자에게 예수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다.(8절) 그런데 이 날은 안식일이었다.

  38년 된 병자를 고친 날은 안식일이었다. 서기관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 39가지를 가르쳤다. 예수는 물론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일이 종교 지도자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을 알고 계셨다. 병을 고침 받은 그 사람에게 공적인 자리에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심으로 해서 그들을 더욱 화나게 할 것도 알고 계셨다.

요한복음에 소개된 유대인들의 안식일관은 율법주의적이다. 예수에 대해 적대적인 유대인들이다. 이들의 주장은 이 날은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10절) 이것은 지독한 율법주의적 태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긍휼과 사랑은 없이 오로지 자기들이 만든 규정에 따라 안식일에 무엇은 할 수 있고 무엇은 할 수 없다는 것만 따졌다. 38년동안 누워 있던 병자가 참으로 오랜만에 일어났는데 기뻐하고 축하하기는커녕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다니는 것을 문제 삼고 있다.


여기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예수가 거부하신 것은 안식일 자체의 중요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예수는 바리새인과 유대 지도자들이 지키던 방법으로서의 안식일 준수 방법을 따르지 않으셨다. 마가복음 7장은 바리새인들이 조상의 유전과 율법을 동일시하는 점을 문제로 지적한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자신들만이 완벽하게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교만이 깔려 있다.


38년된 병자가 병이 낫고 곧 바로 간 곳이 성전이었다. 그리고 그 성전에서 예수가 하신 말씀 -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4절) - 이 말씀은 의미 심장하다.

예수를 통해 병 나음을 선포받았다. 그것도 성전에서 이처럼 예수의 병고침은 제사장적인 역할의 의미가 있다. 예수의 목적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다.죄사함의 권세를 가진자임을 보여주는 표적이다.


이처럼 안식일에 모든 일이 금지되어 있으나 예수께서는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침으로 안식일의 본래의 목적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창세기의 진정한 안식일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렇기에 이 표적을 통해 나타난 예수의 정체성은 “안식일을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 안식일에 주인 되신 그리스도시란 사실이다. 오직 예수만이 안식일에도 하나님처럼 일하시는 분이며 그것도 자비와 행동을 베푸시는 분임을 강조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임을 진술한다. 예수야 말로 안식일의 주인이요, 주체인 하나님과 동등한 분임을 드러내고 있다.

4.4 5000명을 먹이신 표적 (6:1-14)


요한복음에 기록된 오병이어 사건은 공관복음에서 사용하고 있는 기적 δύγαμις이  표적으로 번역된 헬라어 σημϵίον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이 예수의 표적을 공관복음처럼 기적δύγαμις이 아니라 표적 σημϵίον이란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요한은 공관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는 군중의 반응에 대한 기록을 14-15절에서 제시하고 있다.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서 표적의 음식을 먹은 군중들은 예수를 이[예수]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선지자다(14절)라고 고백하며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예수를 그 선지자로 고백한 군중들에 의하면 예수는 신명기 18:15-18에 약속된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분명히 인식되고 있다. 요한은 오병이어의 표적 사건을 통해서 예수가 신명기에 약속된 모세와 같은 그 선지자와 같은 분이심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3절에 언급된 예수께서 올라가신 산을 언급하면서 그 산이라고 관사를 사용하여 표현한 것은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올라갔던 산을 회상할 수 있도록 만든다.(출 19:20, 14:1-2, 사34:2-4)  모세의 사건을 회상하여 모세가 광야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의 군중을 표적으로 먹이신 사건을 통해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그들에게 나타났음을 암시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주목해야할 것은 본문에서 유월절 주제가 강조되고 있는 점이다. 왜 요한은 이 유월절의 절기와 시점을 언급한 것일까? 

  4절에서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을 언급한 것은 예수께서 모세와 같은 종말론적 선지자의 신분임을 암시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관복음에서는 오병이어 사건에 대한 시간의 언급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요한은 의도적으로 유월절을 밝힌 것이라고 생각된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모세의 인도를 통해서 구원받은 사실을 기념하는 날로 모세를 회상할 수 있는 유대인의 명절이기 때문이다. 특히  유월절을 언급하면서 유대인의 명절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요한복음의 독자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그 중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일지라도 유대의 풍습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수식어는 유대 풍습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불필요한 부분으로 저자는 이런 표현을 사용하여 독자가 예수의 신분을 파악하는데 모세를 회상하여 비교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요한은 앞서 예수께서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세움받은 것을 말했다.(1:29,36) 어린양 개념과 유월절의 개념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진다. 더욱이 오병이어 표적이 드러내는 진리를 설명하는 예수의 생명의 떡으로 주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유월절의 희생양으로 죽으심으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무리를 먹이신 표적의 특징은 유월절이 전면에 드러나고 있을 뿐 아니라 유월절 주제는 6:51-58에 나오는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언급도 나타나 있다. 이러한 공관복음과의 차이는 요한이 이 표적 주제를 통해 자신의 신학적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유월절에 대한 관심은 성례전 그 중에서도 특히 성만찬에 대해 관심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쿨만(Cullmann)은 표적 뒤에 나오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에 관한 설교가 많은 주석가들로부터 성례전에 관한 설교로 생각되어 왔는데(떡을) 가지사(take) 축사하시고(bless) 떼어(break) 제자들에게 주셨다.(give)란 동사와 함께 떡(bread), 피(blood), 먹다(eat), 마시다(drink)와 같은 전형적인 성례전적인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요한만이 이 표적을 유월절과 연관시키고 있으며 또한 “보리떡”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초대교회에서 성례전에서 보리떡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한에서만 예수가 마치 마지막 만찬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축사하신 빵을 친히 나누어 주신점도 이 표적이 요한에게 있어 성만찬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해석을 강하게 뒷받침해준다.


생명의 떡과 연결되어있는 이 표적은 예수께서 진정한 하늘의 양식되심을 나타내고 있고 이 생명의 떡을 믿음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생명의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6:50-51)

예수가 보여준 인간의 우선적 과제는 빵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다. 진정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늘의 산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바로 오병이어 표적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예수의 정체성이다. 곧 유월절을 완전케 하신이가 그리스도이심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표적 자체보다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드러내고자 한 행위메세지인 것이다.


4.5. 물위를 걸으신 표적(6:16-21)


무리들이 예수를 억지로 왕을 삼으러 하자 예수는 무리를 떠나셨다. 예수가 사라지자 제자들은 예수께서 먼저 가버나움으로 가신 줄 알고 저녁에 배를 타고 떠난다.(6:16)오천명을 먹이신 표적은 갈릴리 바다 동편에서 행하셨다.(6:1) 그러나 예수는 아직 그 곳에 계셨다. 혼자 산에서 조용한 시간을 가지신 것이다. 그 밤에 산에 계시던 예수는 물위를 걸어서 먼저 떠난 제자들을 따라오신다. 그때 바다에는 큰 바람과 파도가 있었다. 이에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신 주님은 “내니” - I am - 라고 하신다.


이 “내니”라는 표현을 통해 요한은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고자한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자연의 질서와 법칙까지도 다스리시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심을 자연스럽게 드러낸 사건이다. 예수의 신성이 드러난 것이다. 두려워 하는 제자들에게 “나다”(I am) 라고 자신을 알리신 것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현을 상기시키고 있다.

예수의 정체성을 너무도 잘 드러낸 곳이다(6:20) 이 표현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예수가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계시하는 이 말씀이 이 이야기의 클라이막스를 구성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이야기가 현재의 문맥에 삽입되게 된 주요 이유라고 말한다. 따라서 예수가 어떤 분인가를 증거하는 기독론적 강조점을 갖고 있다. 6:14-15에 보면 사람들은 무리를 먹인 이적을 보고 예수를 예언자, 혹은 왕으로 인식했는데 요한은 이 표적을 첨가하여 예수가 그 이상의 존재임을 곧 하나님 처럼 “ I am ” 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임을 증거하고 있다.

본문을 오병이어 표적과 생명의 떡 강화 중간에 위치시킨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오병이어 표적은 유월절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데 유대인들의 유월절에서는 그들의 조상이 홍해를 건넌 것과 광야에서 만나로 배부르게 된 사건이 함께 연결되어 언급된다. 즉 두 표적이 결합된 상태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된 사건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출애굽으로부터의 구원에 있어 오병이어의 표적은 광야에서의 만나와 메추라기로 이스라엘 백성을 풍성히 먹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물 위를 걸으신 표적은 출애굽 사건에서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바로 뒤에 생명의 떡 강화를 연결시킴으로 예수께서 그의 살과 피를 가진 실체로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만나, 곧 생명의 떡임을 말하고 있다.


4.6. 소경된 자를 고치신 표적 (9:1-12)


요한복음 9장에는 예수께서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한 표적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께서 이 표적을 행하신 때는 초막절이 지난 어떤 안식일이었다. 이 표적은 앞서 있었던 초막절 강론인 “세상의 빛 되신 예수” - 8:12에서 주장하고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하는 “세상의 빛”이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려주고 영생을 얻게 하는 분이라는 것을 실례로 보여 준 사건이다. 한마디로 요한복음 9장은 요한복음 8:12의 주석이다.


요한복음 9장을 피상적으로 바라보면 소경을 치유한 표적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질지 모른다. 이 표적은 세상의 빛 되는 예수의 정체성과 연결시켜 숨겨진 의미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표적을 통해 예수는 빛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신학적 목적은 기독론적인 것이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이 땅에 가져오는 것이고 암흑세계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따라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이러한 예언을 성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을 알고 있다는 유대인들은 그가 메시아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소경이던 자는 빛이신 예수를 만나 예수께서 메시아임을 인식한 반면 자신들은 모세의 율법을 알아 빛을 받고 있다는 유대인들, 특히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은 정작 소경이 되어 빛이신 예수를 보지 못하고 메시아로 인정치 않음으로 결국 소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소경은 눈을 뜨고 빛을 본다는 자들은 오히려 소경이 되는 것! 도리어 소경의 신앙은 발전한다. 소경된 자가 예수를 하나님으로부터 온 그리스도라고까지 고백한다.


  소경된 자를 고친 예수의 표적을 통해 예수의 정체성은 빛을 주시는 분 바로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구원하는 능력 즉 신적주권을 행사하는 분이며 하나님이라는 구체적인 증거를 나타내고 있다.  


4.7.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 (11:1-46)


요한복음에 나오는 유일한 부활 표적 이야기이다. 본문에 기록된 나사로의 죽음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 이야기는 다른 부활 이적 이야기들과 다음과 같은 점들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다른 부활 이적들은 모두 죽은 직후에 죽음으로부터 살려내는 이적의 형태로 되어 있다. 그러나 나사로를 살려낸 표적의 경우는 그가 죽은 지가 이미 사흘이나 지났으며 벌써 시체의 부패로 인해 냄새가 나고 있었다.(11:39)는 점에서 혼수 상태나 가사 상태로부터 일어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점에서 나사로의 부활 표적은 독특한 부활 이적인 셈이다.

예수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보낸 사람으로부터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 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나사로가 죽기 전에 그에게 가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결국 병들어 죽었다. 예수는 나사로의 병과 관련하여 이 병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예언한다. 예수가 나사로의 죽음을 내다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죽음을 인생의 마지막으로 보지 않은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예수의 이해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예수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했다. 잠자고 있는 사람은 언젠가 깰 때가 있음을 암시한다. 나사로의 육체적 죽음은 연약한 한 인간의 단순한 생물학적 사망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 있다. 예수는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제자들의 믿음과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을 굳게 세워주고 이 사건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죽음과 생명을 다스리는 분임을 밝히 보여준다. 결국 나사로의 죽음과 살아난 사건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이 수난의 원인이 되고 있다. 또한 나사로의 부활이야기 뒤에 나오는 마리아의 기름부음(12:8) 사건은 장례를 준비하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고 12:20-26절의 인자의 영광의 때가 왔고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는 말씀이 예수의 죽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런 본문은 13장에서 예수의 수난과 부활로 이어지고 있다.

어느 누구도 인간은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린다. 이것은 예수가 생명의 주인이심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나사로의 죽음과 살아남을 통해 예수가 하나님이시며 생명과 부활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살아있는 동안에 믿으며 사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생명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