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요한복음에 나타난 7가지 표적

요한복음에 나타난 7가지표적

호리홀리 2014. 12. 1. 16:58

 




요한복음에 나타난 7가지 표적


목   차


Ⅰ. 서 론 ····················································································· 1

   A. 문제제기 ············································································· 1

   B. 연구방법 ············································································· 1

Ⅱ.  표적에 대한 일반적 이해 ························································ 2

   A. 표적의 언어적 기원 ······························································ 2

   B. 표적의 다양한 표현들 ··························································· 3

     1. 뒤나미스(δύναμις) ····························································· 3

     2. 세메이온(σημεῖον) ····························································· 4

     3. 에르곤(ἔργον) ··································································· 4

Ⅲ. 요한복음의 표적의 의미 ··························································· 5

   A. 요한복음 표적 사용의 목적 ··················································· 5

   B. 요한복음 표적 사용의 특징 ··················································· 7

Ⅳ. 요한복음의 표적들 ··································································· 8

     A.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표적 ················································ 8

     B.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 표적············································ 10

     C. 베데스다 연못의 표적 ······················································ 12

     D. 5000명 먹이신 표적 ························································ 16

     E. 물 위를 걸으신 표적 ························································ 21

     F. 소경된 자를 고치신 표적 ·················································· 25

     G.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 ······················································ 28

Ⅲ. 결  론 ·················································································· 31


Ⅰ. 서론

A. 문제제기

  예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주관적인 신앙체험을 가지고 대답을 한다. 또한 교리적인 믿음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답을 말한다. 정말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예수는 그리스도요, 나의 주요,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는 기독인들에게는 중요한 부분이다. 신약성경 가운데 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 특히 다른 복음서들보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에 대한 정체성을 나는.....이다. 예수 자신이 누구라는 자신의 신분과 역할을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을 통해 드러나는 표적을 통해 자신의 신적 모습을 드러냄으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선언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서에 기록된 7가지 표적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메시야로서의 예수의 자신의 신분에 대한 연구를 하려 한다.


B. 연구방법

요한복음에 나타난 표적의 목적은 20:30-31에서 제공한 것처럼 즉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요한복음 20장까지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표적들을 통해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곧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는 표적이라는 어원적인 내용을 접근해보고 표적의 목적이 무엇인지 표적의 특징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예수의 7가지 표적을 통한 내용을 통해 예수가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하는 내용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7가지 표적이 갖는 목적이 예수 자신의 정체성이 메시야임을 선언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려고 한다.


Ⅱ. 표적에 대한 일반적 이해
A.  표적의 언어적 기원

   요한복음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요한복음 저자가 공관복음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표적 자료들을 수집하여 소개하고 있지만 예수의 표적에 대해 공관복음서 저자들과는 분명히 다른 관점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요한에게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기적(miracle 혹은 δυναμιζ) 이란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그 대신에 표적(sign, σεμεια)이란 말을 쓰고 있는 점이다. 1)  표적이란 일반적으로 어떠한 사람이나 어떠한 사물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가시적인 표시를 의미하지만 특별히 이 단어는 요한복음의 신학적 해석을 위한 열쇠가 되는 말로 일종의 계시를 구성하는 표현이다. 이 단어는 특히 요한복음에 17번 나타나고 있다. 복음서들 중 요한복음에서 오직 이 단어만이 전적으로 예수의 표적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헬라에서의 세메이온(σημεῖον)의 의미는 고전 그리스어에서 방패 위에 그려져 있는 문장이나 혹은 반지에 있는 인장을 가리키도 한다.2) 사전상의 의미를 살펴보면 표시, 증거, 징조 등의 뜻을 가지며 음성언어를 통한 의미전달이 아닌 다른 형태의 또는 다른 수단이나 방법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의사소통 방법이다. 요한복음에서 세메이온(σημεῖον)은 자기-입증에 있어서 증명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에게 있어서 세메이온(σημεῖον)은 경이로운 행동 즉 표적과 같은 사건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세메이온(σημεῖον)은 시각적인 면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처럼 요한복음에서 세메이온으로 다루어지는 사건들은 특별한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데 그것은 거의 대부분 예수의 인격에 대한 것이다. 요한복음 4장 48절에 표적과 기사라고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떠한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놀라는 태도를 말한다. 세메이온(σημεῖον)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이상의 진리를 상징 또는 보증하는 영적인 면을 치중한다. 이 용어는 이사야 35장 5절 처럼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기대한 표적들이다.3) 요한복음의 표적의 용어를 보면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짐을 알 수 있다.

B. 표적의 다양한 표현들

1. 뒤나미스(δύναμις)

  예수의 표적에 대한 중요한 술어로서 뒤나미스(duvnami")는 공관복음서의 기자들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발터 바우어(Walter Bauer)는 이 용어를 힘, 능력, 수용력, 수단, 외적인 힘의 표현, 개인적인 초자연적 인간으로서의 힘 등으로 표현하고 각각의 의미 의미들이 사용되는 성경 구절들을 나열하고 있다. 이 말은 세속적인 언어 사용으로 기인한 것이지만 공관복음 안에서는 세속적인 의미와는 구별되어 하나님의 행위에서 비롯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지칭하는 말이고 때로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또 그 능력이 성령이나 예수를 통해 나타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복음서들의 경우 주로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경우에 뒤나미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권능(마 7: 22; 막 6:2; 행 2: 22), 능력(마 22: 29; 눅 1: 35; 행 8: 13), 능한 일(막 9: 39) 이라고 번역되어 있으나 '이적'이나 '기적'이라고 번역된 곳은 전혀 없다. 이것은 그 사역의 부분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역의 전체적인 의미로서의 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표적기사 안에서의 이 용어 사용은 표적 자체와 표적을 행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 능력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예수께서 의식하고 계신 것이다. 막 5 : 30을 통해서 능력이란 인간을 살리고 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힘이 인간세계로 들어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나 사랑을 그가 나타내신 활동이나 놀라운 변화를 보고 인정하게 되었으며 신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눈에 보여 지도록 현저하게 나타났음을 보게 된다.4)


2. 세메이온(σημεῖον)

공관복음에서는 때때로 예수의 표적을 '일'이라고 지칭하며(마11: 2; 눅 24 : 19), 표적에 해당하는 말로 세메이온(shmei'on)을 사용한다(마12:38-39; 16: 1-4; 눅 23 : 8) 그러나 표적은 요한복음에서보다 공관복음에서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다. 세메이온은 '신호하다', '표시하다'를 의미하는 세마이노(shmaivnw)로 부터 파생된 단어이다. 이 단어가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출애굽 때 행하신 놀라운 사건들을 가리키는 기사와 함께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구약에서 이 단어는 안식일을 거룩한 날로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출31: 13, 17). 이 용어는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표적을 가리키는 특유한 말이다. 예수의 표적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용어가 이것이며, 예수의 사역에 관하여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표적의 윤리적 목적이 기사에서는 가장 적게 드러났으나 이 용어에서는 가장 현저히 드러난다. 표적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며 역사하신다는 상징과 표시이며 계시의 진정함에 대한 증거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행하신 표적들은 그것 자체를 넘어선 어떤 것의 표적이요 보증인 것이다.


3. 에르곤(ἔργον)

'일' 혹은 '사역'으로 번역되는 이 용어는 요한 사도가 표적을 말할 때 자주 사용하던 것이다. 마태복음 11장 2절에서 세례 요한은 옥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놀라운 여러 가지 '일들'(타 에르곤, tav e[rgon)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라고 묻는다. 그러나 이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표적을 의미하는 용어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를 증거하고 또한 그가 이루실, 그리고 이미 이루신 구원을 증거하는 에르곤 은 단지 능력이 있거나 영광스러운 행위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하심을 보여 주는 일로 나타난다. 더불어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통하여 주님에게는 표적의 사역이요 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복음서와 더불어 신약에서 기자들은 이적 혹은 기적을 말할 때 그 용어를 달리 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뒤나미스(duvnami")가 행위를 성취하는 능력에 관계된 것이라면 테라스(tevra")는 경외 또는 공포의 영향을 뜻하고 있다. 그리고 세메이온(shmei'on) 이 그 자체를 능가하는 그 어떤 것을 강조하고 행위자의 신적사역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에르곤(e[rgon)은 행위자의 행위 그 자체에 관계되어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표적'이란 말이 자연법에 역행해서 행해지는 사건이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해지는 그래서 임재와 현존을 가

리키는 놀라운 일들을 의미하는 것이다.5)









Ⅲ. 요한복음의 표적의 의미

  A. 요한복음의 표적사용의 목적

요한복음의 저술 목적에서 본 대로 표적은 요한복음의 골격이 되는 주제임이 분명하다.

요한복음의 표적은 그 자체를 넘어서서 예수의 구원사역을 알려주는 계시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가리킬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방편이다.6) 즉 공관복음에서는 표적이 그 자체로서 예수의 신적인 능력을 증거해 주는 목적을 그래서 예수를 신적인 능력을 증거해 주는 목적을 그래서 예수를 신적인 존재 곧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7) 요한복음에 사용된 세메이온이라는 단어는 요한의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의 표적 사건은 단순히 예수의 놀라운 신비한 능력을 보여주는 표적 사건 정도가 아니라 또 다른 의도가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8) 첫째로 표적이란 말 자체에서 엿보이듯이 요한이 소개하고 있는 표적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제시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있다.9) 둘째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표적 사건을 묘사하면서 세메이온을 사용한 것은 그 표적 사건 자체를 묘사하는데 목적이 있기보다는 이 표적 사건에 뒤이어 따라오는 예수의 담화를 소개하기 위한 일종의 도입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표적이 행해진 뒤에는 거의 대부분 예수의 담화 설교가 뒤따라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신 두 번의 표적 가선을 제외하고는 모든 표적 사건 뒤에 예수의 담화가 설교처럼 뒤따라 나오고 있다.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요5:1-18)뒤에는 심판과 영생에 대한 예수의 담화가 뒤따라 나온다.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요6:1-15)뒤에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에 관한 예수의 담화가 계속 된다. 태어나면서 눈먼 사람을 눈 뜨게 한 사건(요9:1-10:21) 다음에는 목자의 비유에 대한 예수의 담화가 계속된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요11:1-44)뒤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긴 담화가 요한복음 후반에 계속되고 있다.10) 결국은 표적은 사람들을 예수께 나아가도록 인도할 뿐 아니라 믿음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끌어가는 곧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자로 영생을 주는 분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표적의 상징적 의미는 예수의 자기계시라고 할 수 있다. 표적을 통하여 진리 되신 자신을 상징적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공관복음에서 나오는 비유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이 자기계시를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11) 이렇게 볼 때 요한복음의 표적은 공관복음에 나타나는 비유와는 조금 다르게 신적 진리를 곧 예수를 메시아적인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수단이고 신적인 진리를 계시해 주는 상징적인 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B. 요한복음 표적 사용의 특징

요한복음의 7가지 표적을 통해 나타나는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공관복음에서 예수가 행하신 일 곧 치유와 귀신 축출 그리고 자연이적 등이 요한복음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지만 귀신 축출 사역을 제외하고는 예수의 행하신 표적의 행위보다 예수 자신이 더 크게 부각되고 있다. 즉 요한복음의 표적들은 예수의 기원과 능력, 목적 그리고 예수의 정체성을 밝히는 데에 그 초점을 맞추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의 표적들은 공관복음에서는 구원적인 관점을, 요한복음에서는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12)

  둘째로 표적과 믿음과 관계가 다르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공관복음에는 믿음이 예수의 표적을 일으키는 동기가 되나 요한복음에는 표적행위가 먼저이고 그것을 본 후 믿음이 생겼다고 진술하고 있다. 가나에서의 첫 번째 표적부터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믿었다(2:11)고 소개하고 있다.

  셋째는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서 표적 이후의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공관복음에서는 사람들이 믿음의 결과로서 문제 대한 해결을 얻게 된다. 공관복음에서의 표적은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이다.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표적을 통하여 예수를 알게 되고, 예수를 '메시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표적을 통해서 신앙이 촉발되어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그를 믿게 되는 것이다.

  넷째는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서 비밀에 부치는 경향이 크다. 예수의 표적 이후에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단서를 붙이는 경우가 특히 마가복음서에 많다. 공관복음서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자신에 대해서 비밀로 할 것을 당부 하지만 요한복음서에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으며 항상 그것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다섯째는 귀신축출 표적에 대한 관심 전혀 다르다. 공관복음에는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 하나님 나라에 초점이 맞추어진 표적을 행하는 실행자로서의 예수는 자연스럽게 메시야임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가장 공통적인 표적 행위들의 형태가 귀신축출 표적의 형태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관심이 크지 않다. 곧 공관복음에서 기록하고 있는 예수의 표적행위들은 세상 속으로 새롭게 천명되어진 하나님의 통치라는 현실을 가리켜 주는 반면, 요한복음서의 표적들은 예수의 정체성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계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3)    마지막으로는 공관복음과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표적의 행위를 묘사하는 데에 있어서 또 하나의 차이는 요한복음에서의 예수의 표적의 행위는 공관복음과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표적의 사건들은 공관복음 보다 훨씬 더 극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9 : 1)라든지 "38년된"(5 : 5)이라든지 이런 설명 등이다. 또한 자연이적에서 더욱 극명하게나타나며, 극적인 정점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인 것이다. 요한복음 11장에 있는 나사로는 죽어 무덤에 둔지 나흘이 지났다(11 : 17). 또한 39절에서는 죽은 나흘이고 이미 부패하여 냄새가 난다고 하였다. 완전

히 죽은 나사로, 이것은 더 이상 회생의 길이 없는 극적인 상황을 묘사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를 살리신 표적은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곧 예수는 생명을 주는 메시아라는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Ⅳ. 요한복음의 표적들

A.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표적

  이 표적은 특이하게도 복음서 가운데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으며 요한복음의 7가지 표적 가운데 첫 번째 표적이다. 예수께서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신 곳은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13km 떨어진 갈릴리 지역의 한 마을인 가나다. 이곳의 한 혼인 잔치에서 예수께서 사흘되던 날에 표적을 행하셨다. 제 3일은 예수의 부활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사흘째 되던 날에 일어난 것처럼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날이다. 가나라는 구체적인 장소 제시어와 사흘 되던 날이라는 시간 제시어가 결코 비유적이거나 비역사적인 문학적 구성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이요 표적으로 해석된 표적 사건이다.14)

유대인의 항아리는 손을 씻거나 그릇을 씻기 위한 물을 담다 두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 포도주를 만든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서 전통적으로 종말의 날로 의미되는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그 혼인 잔치를 계속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유대인의 결례에 따라 빈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는 것은 유대교의 종말의미를 완성할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저자가 가나안 혼인잔치 표적을 처음에 소개한 이유는 예수를 통해 그 당시 유대교보다 우월하며 완성임을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하겠다. 즉 이 표적을 통해 예수는 종교적인 제도를 완성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며 유대교의 형식적인 결례를 완성하고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결혼잔치에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요소인 포도주가 모자라는 상황이다. 축복과 기쁨으로 가득해야할 결혼잔치에서 기쁨의 요소인 포도주가 떨어져 감으로 인해 자칫 잔치의 흥이 깨질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심으로 포도주를 채워지게 함으로 결혼잔치가 기쁨과 축제의 분위기를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특히 예수가 가져다 준 포도주는 이전 포도주보다 더 좋은 포도주였다는 것은 예수가 행한 첫 표적으로서의 예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를 통해 제자들이 믿게 되었다는 선언으로 이야기를 종결한다.

  결론적으로 이 표적의 결혼 잔치 상황은 종말론적인 잔치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가나 혼인잔치의 표적은 예수와 함께 다가온 종말론적인 새로운 시대의 풍성함과 기쁨 온전함을 드러내는 상징이 된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의 존재가 자신의 신분에 대하여 종말의 구원을 가져오는 메시야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B.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4:46-54)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 또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의 병자치료와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16절의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 것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본 논문은 요한복음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소개하는 여섯 개의 표적 중 두 번째 표적인데 첫 번째 표적과 짝을 이룬다. 같은 장소인 가나에서 생긴 일이기 때문이다.15) 이 사건은 앞선 사건인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와 나란히 연결되어 편집되어 있다. 두 사건은 모두 믿음의 이야기 즉 사마리아 여인의 믿음과 왕의 신하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둘 다 당시의 기성 종교 체제의 외부 혹은 변두리에 있던 사람들의 믿음의 이야기들이다. 당시 소외 계층에 속하던 사마리아인 그것도 소외 계층 중의 소외 계층에 속하는 여인이 예수에 대한 놀라운 믿음을 보이고 있고 또한 소외 계층에 속하는 여인이 예수에 대한 놀라운 믿음을 보이고 있고 또한 소외 계층이랄 수 있는 이방인 혹은 왕의 신하가 예수에 대한 놀라운 믿음을 보이고 있다. 문맥상으로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이 표적 이야기는 가히 믿음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 가운데 “믿었다”란 동사가 두 번씩이나 반복되고 있는 데서도 그 점은 분명해 보인다.16)

예수가 유대에서 갈릴리에 오신다는 소식은 왕의 신하에겐 자신의 아들을 고칠 수 잇다는 믿음을 갖게 한다. 왕의 신하는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많은 일을 행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간다.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는 간청은 일단 거부되는 것처럼 보인다.(48절) 이에 굴하지 않고 왕의 신하는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라고 간청한 후에 “ 네 아들이 살았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 여기서 왕의 신하의 전의 간청 이제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라는 보다 절박하고도 아들과의 관계가 보다 친밀해졌음을 나타내 준다. 예수의 일련의 표적의 과정을 보고 겪은 왕의 신하가 집으로 돌아가 취한 행동 자기와 온 집안이 다 믿었다는 것은 표적의 결과가 한 개인의 체험이나 생명의 부활에 대한 신비를 전달하기 위함이였을까?

예수의 이 두 번째 표적는 첫 번째 표적과도 같은 주제를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 표적이 생명을 풍성케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면 두 번째 표적은 죽음과 멸망의 즉각적인 위협으로부터의 생명의 구원을 강조하고 있고 따라서 이 표적 이야기에서는 생명이 주제일 수 있다.17) 생명의 주제로서 예수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란 메시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본문 가운데 “네 아들이 살리라”란 문구가 세 번 비슷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이 반복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생명을 주는 능력”이 있음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5:21에 나오는 예수는 생명을 주시기 원하시는 아들에 대한 언급을 준비하고 있다. 요한은 4:14에서도 예수가 주는 물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한다고 생명을 강조한 바 있으며 6장에서는 생명의 떡을 먹이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요한은 이 본문을 통해서 예수가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18)

둘째로는 믿음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이다. 50절에서 아들이 살았다는 선포를 그대로 믿는 믿음이 본문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눙에 보이는 표적을 행하지 않으셨지만 그는 믿고 돌아갔다. 브루스는 이 관원의 믿음에 대해 흥미로운 해석을 한다. 가나와 가버나움 사이는 약32킬로미터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 관원은 평상 걸음으로 당일 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아들이 살았음을 말씀하신 것이 오후 1시이기 때문이다.(52절) 보통의 경우 바로 달려가서 아들의 생사를 확인했을 것이다.4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라는 복수를 사용하여 말씀하심으로써 관원이 혼자 온 것이 아니라 다른 하인들과 함께 왔고 예수님을 가버나움으로 모시고 갈 작정이었기 때문에 말과 같이 신속히 가버나움에 갈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왔음이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원이 바로 돌아가지 않고 다음날까지 머문 것은 아들이 나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신뢰 때문이었을 것이다. 관원의 식솔들은 아들이 나음을 보고 믿었지만 관원은 아들이 나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다. 이런 관원의 믿음은 요한복음20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야 믿는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도마의 믿음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19) 결론 구절인 53절의 말씀처럼 “그와 온 집안이 함께 믿었습니다.라고 아버지의 믿음이 강조되어 있어 두 표적의 결과가 모두 믿음으로 끝나고 있다. 이 표적에 앞서서도 요한은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를 믿었습니다.라고 사마리아인들의 믿음을 언급한 바 있다.20)

결국 요한은 이 표적 이야기를 통해서 믿음이 생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즉 믿으면 살게 될 것임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믿음과 생명과의 밀접한 연관성은 그의 복음서 전반에 걸친 주요한 관심사이기도 하다. 예수는 표적을 수행하는 표적 수행자가 아닌 예수 자신이 생명을 주시는 자라는 것이다. 즉 예수는 죽음과 멸망의 위협으로부터 생명의 구원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C. 베데스다 연못의 표적

1. 요한의 표적 가운데 안식일과 관련된 표적은 베데스다 연못에서의 치유표적(5:1-19) 맹인으로 태어난 청년을 고치시는 표적(9:1-41)이다. 베데스다에서의 치유는 - 타인이 환자를 치유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예수에게 접근하는 대신에 - 예수께서 자진하여 베푸신 복음서들의 치유 기사 중 하나다. 기이하게도 이 사건들은 현재의 기사와 마찬가지로 보통 안식일에 발생한다. 안식일 치유 사건은 유대인과 예수간에 거듭되는 안식일 논쟁의 예가 되며 요한복음 기자로 하여금 왜 예수께서 그렇게 행동하셨는지와 예수의 가르침의 견지에서 예수께 반대하는 유대인의 셩격을 밝혀줄 수 있게 해준다.21) 안식일에 솔로몬 행각이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병자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일 년에 한 번 물이 동할 때 물에 먼저 뛰어들면 병이 낫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을 말해준다. 그 믿음이란 병자들의 치유 현상에 대한 미신이라고 생각된다. 고대인들의 증거에 의하면 그 물은 붉은 색이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철분을 함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물이 가끔 치료의 효능을 발휘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천사들이 내려와서 물을 진동시키는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22) 그런데 거기에 38년 된 병자가 누워 있었다. 그는 너무도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리고 있어서 이제는 낫고자 하는 의지도 상실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혼자 힘으로는 절대로 병 나음을 얻을 수 없었다. 아무도 자신을 구원해 주지 못하는 상황에 그는 38년을 어둠속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그때 예수는 그 오래된 병자에게 질문을 한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는 대답한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절) 그는 먼저 자신이 못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그래도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인다는 항간의 미신을 믿으면서 지금까지 지내오고 있었다. 이런 소망 없는 자에게 예수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다.(8절) 그런데 이 날은 안식일이었다. 공관복음 전승에 의하면 예수의 표적 대부분이 갈릴리에서 행하신 표적은 네 개 - 첫 번째와 두 번째 표적, 무리를 먹이신 표적과 실로암 연못, 베다니 나사로 - 이며 예루살렘 근방에서 행하신 사건은 3개(베데스다 연못, 실로암 연못, 베다니 나사로)이다.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친 표적과 실로암에서 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청년을 고친 표적은 몇 가지 유사점이 있다. ➀서로 나란히 그리고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행해진 표적들이며 ➁둘 다 예루살렘 안에서 행해졌으며 ➂연못을 배경으로 행하여 졌고 ➃물이 치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고 ➄두 표적 모두 “안식일”에 행하여졌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두 표적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어 왔다.23) 어쨌든 38년 된 병자를 고친 날은 안식일이었다. 병자를 고친 사건이 화제가 된 것은 38년 된 병자가 표적처럼 나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는 이유가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24) 예수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는 날이 안식일인 것을 모를일이 없었을 텐데 안식일에 누구든지 무슨 물건이든 공적인 장소에서 사적인 장소로 옮기는 사람은 고의가 아닌 경우에는 자신의 죄를 위해 제사를 드려야 할 것이며 알고도 고의로 했을 경우에는 제해져야 하며 돌로 죽임을 당해야 한다. 서기관들은 안식이에 해서는 안되는 일 39가지를 가르쳤다. 예수는 물론 당신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일이 종교 지도자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을 알고 게셨다. 병을 고침 받은 그 사람에게 공적인 자리에서 비위를 건드릴 것을 알고 계셨다. 병을 고침 받은 그 사람에게 공적인 자리에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심으로 해서 그들을 더욱 화나게 할 것도 알고 계셨다.25) 요한복음에 소개된 유대인들의 안식일관은 다분히 율법주의적이다. 예수에 대해 적대적인 유대인들이다. 이들의 주장은 이 날은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10절) 이것은 지독한 율법주의적 태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긍휼과 삭랑은 없이 오로지 자기들이 만든 규정에 따라 안식일에 무엇은 할 수 있고 무엇은 할 수 없다는 것만 따졌다. 38년동안 누워 있던 병자가 참으로 오랜만에 일어났는데 기뻐하고 축하하기는 커녕26)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다니는 것을 문제 삼고 있다. 유대인은 자신들을 비유대인 교인과 구별하기 위한 표식으로 안식일을 준수했기 때문에 안식일에 관한 법을 엄격하게 그리고 문자적으로 지켰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규정한 대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사람의 법 보다 더 중요시 했다.

이처럼 예수의 행함이나 본문에 이어지는 담화의 내용이나 나레이터의 설명 등을 통해서 안식일 주제는 요한복음 저자의 강조점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표적에서 예수의 38년된 병자의 치유사건과 안식일과는 어떤 연관이 있으며 요한복음 저자는 이를 통해 예수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일까?27)

여기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예수가 거부하신 것은 안식일 자체의 중요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예수는 바리새인과 유대 지도자들이 지키던 방법으로서의 안식일 준수 방법을 따르지 않으셨다. 마가복음 7장은 바리새인들이 조상의 유전과 율법을 동일시하는 점을 문제로 지적한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자신들만이 완벽하게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교만이 깔려 있다.28)

38년된 병자가 병이 낫고 곧 바로 간 곳이 성전이었다. 그리고 그 성전에서 예수가 하신 말씀 -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4절) - 이 말씀은 의미 심장하다.29) 예수를 통해 병 나음을 선포받았다. 그것도 성전에서 이처럼 예수의 병고침은 제사장적인 역할의 의미가 있다. 예수의 목적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다.

이 후 병 나은 자가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임을 말하였다. 유대인들은 비난을 예수에게 하였다. 그러자 예수는 그들에게 “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께서는 심지어 안식일에도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예수께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구원하는 주권에 대한 단순한 예고가 아니라 그 실제, 곧 죽은자들로부터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을 보여준다. 또 표적들은 예수께서 최후의 심판시 확인될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30)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고 일하시는 분이시다. “안식”이란 것도 절대적인 무노동, 무동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으로 예수는 이해하셨다.(막3:4) 예수는 이 땅에 일하러 오셨으므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들이 만든 규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비판하고 심지어 죽이려 했으니 이 얼마나 큰 죄며 패역인가?31)

이처럼 안식일에 모든 일이 금지되어 있으나 예수께서는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침으로 안식일의 본래의 목적은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 표적은 브라운의 주장과 박수암 교수의 주장처럼 세례의 의미보다는 창세기의 진정한 안식일을 가르쳐 주고 있다. 32)

이처럼 베데스다의 치유사건은 안식일과 관련하여 예수의 모습, 안식일을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가 온전해지는 것이 안식일의 참된 정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안식일에 병을 고친 것은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 표적을 통해 나타난 예수의 정체성은 바로 “안식일을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 안식일에 주인 되신 그리스도시란 사실이다. 오직 예수만이 안식일에도 하나님처럼 일하시는 분이며 그것도 자비와 행동을 베푸시는 분임을 강조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임을 진술한다. 예수야 말로 안식일의 주인이요, 주체인 하나님과 동등한 분임을 드러내고 있다.


D. 5000명을 먹이신 표적 (6:1-14)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표적 사건들은 이 복음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오랫동안 연구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 중에서도 요한복음 6:1-15에 기록된 예수의 오병이어 표적 사건은 지금까지도 학자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 이유는 전체 복음서 가운데 이 표적 사건이 유일하게 네 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33) 요합복음의 기록이 공관복음과 다름과 같은 많은 유사점이 있음으로 요한이 공관복음을 문서로 사용했거나 혹은 공동 구전 자료를 사용하였을 것이라 추측한다.34) 그러나 마가와 마태는 5000명을 먹인 이적 이외에 별도로 4000명을 먹인 이적을 독립된 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35)

요한목음에 소개된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 사건은 공관복음서와 다른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 기록된 오병이어 사건은 공관복음에서 사용하고 있는 기적δύγαμις이요한 말 대신에 표적으로 번역된 헬라어 σημϵίον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이 예수의 표적을 기록하면서 공관복음처럼 기적δύγαμις이 아니라 표적 σημϵίον이란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요한은 공관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는 군중의 반응에 대한 기록을 14-15절에서 제시하고 있다.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서 표적의 음식을 먹은 군중들은 예수를 이[예수]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선지자다(14절)라고 고백하며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예수를 그 선지자로 고백한 군중들에 의하면 예수는 신명기 18:15-18에 약속된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분명히 인식되고 있다. 요한은 오병이어의 표적 사건을 통해서 예수가 신명기에 약속된 모세와 같은 그 선지자와 같은 분이심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3절에 언급된 예수께서 올라가신 산을 언급하면서 그 산이라고 관사를 사용하여 표현한 것은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올라갔던 산을 회상할 수 있도록 만든다.(출 19:20, 14:1-2, 사34:2-4) 요한이 그 산이라고 관사를 사용할 이유가 전혀 없다. 요한은 단순히 예수께서 산으로 올라가셨다 라고 묘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사를 사용하여 특정한 산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독자가 모세의 사건을 연상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모세의 사건을 회상하여 모세가 광야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의 군중을 표적으로 먹이신 사건을 통해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그들에게 나타났음을 암시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36)

무엇보다도 주목해야할 것은 요한의 본문에서 유월절 주제가 강조되고 있는 점이다. 왜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 유월절의 절기와 시점을 언급한 것일까?  요한은 유대인의 명절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한다.37)  4절에서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을 언급한 것은 예수께서 모세와 같은 종말론적 선지자의 신분임을 암시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관복음에서는 오병이어 사건에 대한 시간의 언급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요한은 의도적으로 유월절을 밝힌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의 신분을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보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모세의 인도를 통해서 구원받은 사실을 기념하는 날로 모세를 회상할 수 있는 유대인의 명절이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가 유월절을 언급하면서 유대인의 명절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요한복음의 독자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그 중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일지라도 유대의 풍습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수식어는 유대 풍습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불필요한 부분으로 저자는 이런 표현을 사용하여 독자가 예수의 신분을 파악하는데 모세를 회상하여 비교할 수 있도록 격려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38)

그러나 무엇보다 요한복음 저자는 앞서 예수께서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세움받은 것을 말했다.(1:29,36)하나님의 어린양 개념과 유월절의 개념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진다. 더욱이 오병이어 표적이 드러내는 진리를 설명하는 예수의 생명의 떡으로 주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유월절의 희생양으로 죽으심으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오병이어 표적은 요한복음 기자에 의해 예수께서 영생을 얻게 하며 죽지 않게 할 생명의 떡을 주실 것을 예시하는 표적으로 제시된다. 이 장의 배경이 이런 의미를 더 깊게 해준다. 유월절의 절기는 희생 제물, 구속, 제의적 식사, 그리고 종말론적 구원을 연상시킨다. 사람들은 메시아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함게 만나의 회복을 기대하고 있다. 모세와 달리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참된 양식을 주신다. 왜냐하면 그와 함께 그 나라가 도래하며 그를 통해 최후의 날의 부활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39)

요한복음에 나타난 무리를 먹이신 표적의 특징은 유월절이 전면에 드러나고 있을뿐 아니라 유월절 주제는 6:51-58에 나오는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언급도 나타나 있다. 이러한 공관복음과의 차이는 요한이 이 표적 주제를 통해 그리고 자신의 설교를 통해 자신의 신학적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유월절에 대한 관심은 성례전 그 중에서도 특히 성만찬에 대해 관심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쿨만(Cullmann)은 표적 뒤에 나오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에 관한 설교가 많은 주석가들로부터 성례전에 관한 설교로 생각되어 왔는데(떡을) 가지사(take) 축사하시고(bless) 떼어(break) 제자들에게 주셨다.(give)란 동사와 함께 떡(bread), 피(blood), 먹다(eat), 마시다(drink)와 같은 전형적인 성례전적인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주장하고 있다.40)  그 이유는 요한만이 이 표적을 유월절과 연관시키고 있으며 또한 “보리떡”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초대교회에서 성례전에서 보리떡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한에서만 예수가 마치 마지막 만찬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축사하신 빵을 친히 나누어 주신점도 이 표적이 요한에게 있어 성만찬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해석을 강하게 뒷받침해준다.41) 이 표적에서 요한의 저자는 에수는 이 표적과 관련하여 떡에 관한 긴 설교 본문을 소개한 것으로 이루어 보아 요한복음 저자의 성만찬에 대한 관심이 컸다고 보여진다. 표적 뒤에 나오는 해석본문은 크게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① “하늘에서 내려온 떡”(6:25-34) 이 부분은 생명의 떡에 대한 전체의 설교의 서론 역할을 하는데 특히 모세의 만나와 비교되고 있다. 이점이 유월절 예식의 영향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② “생명의 떡이신 예수”(나는 생명의 떡이다.6:35-50)이 부분은 예수 혹은 그의 교훈을 통한 계시가 강조된다. 예수가 자신을 떡으로 제시하는 것에 대한 반응은 믿음 혹은 믿음과 동등한 것이다. 이 부분에서 성찬의 주제도 나타난다. 특히 35절에서 주림과 목마름을 나란히 언급한 것이 의미 있다. 물에 대한 언급없이 목마름을 언급한 것은 떡과 피에 대한 언급과 더불어 요한이 성만찬의 먹고 마심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③ “생명의 떡의 의미”(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6:51-58)이 부분은 35-50절과 비슷하면서도 특히 먹다, 마시다, 살. 피, 등의 용어 사용으로 성례전적 의미가 더욱 드러나고 있다. 이 부분이 성만찬을 염두어 두었다는 두 가지 분명한 근거가 있다.42) 예수의 살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신다는 것에 대한 강조이다. 이것은 분명히 성만찬 제정 본문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내가 주는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는 나의 살이라(51)이라는 것이다.

브라운은 이 말씀이 공관복음에 나오는 성만찬 제정본문의 요한적 형태라고 말한다. 결국 요한에게서 예수께서 무리를 먹이신 표적이 예수께서 성만찬을 통해서 그의 백성들을 배불리시고 생명을 부여해 주신다는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또 생명의 떡과 연결되어있는 이 표적은 예수께서 진정한 하늘의 양식되심을 나타내고 있고 이 생명의 떡을 믿음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생명의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6:50-51)

한편 임진수 교수는 이 표적은 유월절과 기독교의 예전적의미를 주며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게 했던 것처럼 백성들의 배고픔을 그의 참된 양식을 통하여 해결한다는 의미를 제공한다는 것으로 예수의 식사이적은 단지 배고픔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기독론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유월절의 유형론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복음서 기자의 신학적인 의도와 예수의 식사 표적은 진정한 생명을 주는 표적으로서의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 받게 되고 표적 자체보다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드러내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오병이어 표적을 통해 예수의 정체성은 바로 영원한 양식을 주시는 생명의 떡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생명의 떡이신 예수는 양의 주가 되어 자신에게 오는 모든 자들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풍성히 주시는 분임을 드러낸다. 예수는 그가 세상으로 하여금 멸마의 심판에 이르지 않고 영생의 구원을 얻도록 세상 죄를 진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찢기고 흘려야 할 것이었다. 예수가 자각한 사명은 바로 이러한 대속의 죽음을 통해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고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들 즉 그를 대속의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었다.

예수가 보여준 인간의 우선적 과제는 빵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다. 43)

진정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늘의 산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바로 오병이어 표적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예수의 정체성이다. 곧 예수가 유월절을 온전케 하신 완전케 하신이가 그리스도이심을 말해주고 있다.


E. 물위를 걸으신 표적(6:16-21)

무리들이 예수를 억지로 왕을 삼으러 하자 예수를 무리를 떠나셨다. 예수가 사라지자 제자들은 예수께서 먼저 가버나움을 가신 줄 알고 저녁에 배를 타고 떠난다.(6:16)오천명을 먹이신 표적은 갈릴리 바다 동편에서 행하셨다.(6:1) 그러나 예수는 아직 그 곳에 계셨다. 혼자 산에서 조용한 시간을 가지신 것이다. 그 밤에 산에 계시던 예수는 물위를 걸어서 먼저 떠난 제자들을 따라오신다. 그때 바다에는 큰 바람과 파도가 있었다. 이에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신 주님은 “내니” - I am - 라고 하신다.

이 “내니”라는 표현을 통해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고자하는 의도가 있다.44)

이 표적 이야기는 공관복음에서도( 막6:45-52, 마14:22-33)비슷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관복음에서도 이 표적 이야기가 무리를 먹이신 표적에 뒤이은 표적으로 연결되어 소개하고 있는 점에서도 그 문맥 구성이 아주 비슷하다. 그러나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본문 사이에는 차이점들도 많이 있다. 공관복음 특히 마가는 예수가 홀로 해변에 계셨고 제자들이 폭풍 속에서 고통 당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로 나아가셨고 그들의 옆을 지나가시고자 하셨다. 반면에 요한에서는 제자들이 바다로 내려갔고 배를 저어 나아갔으며 예수가 그들에게로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 했고 예수를 배 안으로 모시기 원했다. 마가에서는 이 이야기가 본질적으로 예수께서 제자들을 폭풍의 바다로부터 구원해주는 구원의 표적 이야기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즉 제자들이 바다 위에서 역풍에 시달리며 고통을 당하는 가운데서 예수로부터 표적적으로 구원을 받은 이야기이다. 그래서 다른 표적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이 본문은 제자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하던 바람과 파도가 예수로 인해 잔잔해지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막 6:51,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는지라”)그러나 요한에서는 그런 요소가 없다. 요한에서는 제자들이 놀란 것이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가까이 오심을 본(6:19) 것 때문이었고  “내니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듣고 제자 들이 오히려 기뻐하고 있다. 따라서 요한복음에서는 사실상 이 이야기가 바다로부터의 구원 표적 이야기일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오셨다. 는 헬라어 문구가 대개의 문맥에서 자연적으로 바닷가로 걸어 오셨다는 것을 의미할 수 도 있기 때문이다.45)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요한은 본문의 사건에 대하여 다른 표적들과 달리 자신의 독특한 언어인 세메이온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표적 사건을 묘사하는데 세메이온이라는 헬라어가 17회 사용된다. 공관복음에서 처럼 두나미스를 사용하지 않고 세메이온이라는 단어는 요한의 특별한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요한이 예수의 기적 사건과 관련하여 사용한 헬라어 세메이온의 사전적 의미는 표적 또는 어떤 것을 알리기 위한 특별한 표시, 암시, 표이고 놀라운 능력이나 기적, 예언을 통해서 암시하는 어떤 사건이다. 이런 사전적 의미에 의하면 세메이온으로 묘사된 표적 사건은 그 표적 사건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표적 사건을 통하여 암시하고 지시하는 어떤 어떤 것에 더 큰 비중과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첫째로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 사건을 두나미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세메이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분명히 예수의 표적 사건이 암시하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상징적인 의미는 표적을 통해서 암시되고 있는 예수의 신분과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둘째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표적 사건을 묘사하면서 세메이온을 사용한 것은 그 표적 사건 자체를 묘사하는데 목적이 있기 보다는 이 표적 사건에 뒤이어 따라오는 예수의 강화를 소개 하기 위한 일종의 도입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표적이 행해진 뒤에는 거의 대부분 예수의 강화가 뒤따라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신 두 번의 표적 사건을 제외하고는 모든 표적 사건 뒤에 예수의 강화가 뒤따라 나오고 있다. 즉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사건 뒤에는 심판과 영생에 대한 강화가 나온다. 오병이어의 표적 사건 뒤에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에 관한 예수의 강화가 계속된다. 태어나면서 눈먼 사람을 눈 뜨게 하신 사건 다음에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경고와 선한목자의 비유에 대한 예수의 강화가 계속된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 사건을 통해 예수 부활의 예언적 표적 사건이후에는 고별설교가 예수의 기도로 마무리된다.

이런 점에서 물위를 걸으신 사건과 관련하여 세메이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이 사건이 요한복음에 기록된 다른 기적 사건들과 비교할 때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사건은 예수께서 자연의 질서와 법칙까지도 다스리시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심을 자연스럽게 드러낸 사건이다. 즉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의 신성이 드러난 것이다. 두려워 하는 제자들에게 “나다”(I am) 라고 자신을 알리신 것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현을 상기시키고 있다. 46) 예수의 정체성을 너무도 잘 드러낸 곳이다(6:20)이 표현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예수가 자신을 신적인 조재로 계시하는 이 말씀이 이 이야기의 클라이막스를 구성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이야기가 현재의 문맥에 삽입되게 된 주요 이유라고 말한다. 따라서 요한에서는 이 이야기가 예수가 어떤 분인가를 증거하는 기도론적 강조점을 갖고 있다. 6:14-15에 보면 사람들은 무리를 먹인 이적을 보고 예수를 예언자, 혹은 왕으로 인식했는데 요한은 이 표적을 첨가하여 예수가 그 이상의 존재임을 곧 하나님 처럼 “ I am ” 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임을 증거하고 있다. Schnackenburg도 이 본문의 이야기가 기독론적 강조점을 갖고 있으며 또한 본문은 예수로부터 멀리 있는 상황과 예수의 현존 가운데 있는 상황간의 대조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물위를 걸으신 사건에 대하여 성만찬 전승과 이 표적을 관련시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물위를 걸으신 사건과 광풍을 잔잔케하신 이야기가 유사한 것은 예수의 현존이 제자들에게 평안과 안전을 가져다준다는 것으로 예수의 현존은 성찬을 통해 지속된다. 그러므로 이 표적은 성만찬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보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성만찬과 이 표적을 관련짓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B.Gaertner는 이것이 기독교의 유월절 이해에 영향을 미쳐 복음 전승 가운데서도 무리를 먹인 표적과 바다를 무사히 건너는 표적 이야기가 함께 연결되어 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한 걸을 더 나아가 A. Guilding은 이 두 표적을 주님의 마지막 성만찬과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위를 건넌 것은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죽음과 사탄에 대한 승리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47)

본문을 오병이어 표적과 생명의 떡 강화 중간에 위치시킨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오병이어 표적은 유월절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데 유대인들의 유월절에서는 그들의 조상이 홍해를 건넌 것과 광야에서 만나로 배부르게 된 사건이 함께 연결되어 언급된다. 즉 두 표적이 결합된 상태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된 사건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출애굽으로부터의 구원에 있어 오병이어의 표적은 광야에서의 만나와 메추라기로 이스라엘 백성을 풍성히 먹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물 위를 걸으신 표적은 출애굽 사건에서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바로 뒤에 생명의 떡 강화를 연결시킴으로 예수께서 그의 살과 피를 가진 실체로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만나, 곧 생명의 떡임을 말하고 있다.48)

물위를 걸으신 표적을 통해 예수의 정체성에 대하여 나타내고자한 요한의 의도는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자신의 인격과 권능을 통해 바다위를 걷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예수는 바다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옴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지녔음을 입증하였고 I am 나다. 이 말씀 한 마디로 사람들이 인식하고 찾는 예언자나 정치의 왕이나 이적을 행하는 그런 자가 아니라 근원적인 생명의 주인되는 메시아임을 증거하고 있다.


F. 소경된 자를 고치신 표적 (9:1-12)

요한복음 9장에는 예수께서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세 한 표적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께서 이 표적을 행하신 때는 초막절이 지난 어떤 안식일이었다. 이 표적은 앞서 있었던 초막절 강론인 “세상의 빛 되신 예수” - 8:12에서 주장하고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하는 “세상의 빛”이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려주고 영생을 얻게 하는 분이라는 것을 실례로 보여 준 사건이다. 한마디로 요한복음 9장은 요한복음 8:12의 주석이요 하나의 드라마라 할 수 있다. 49)

  R.Kysar는 9장은 요한이 좋아하는 전형적인 문학적 구성이라고 말한다. 요한은 여기서 전하고 있는 이 표적 이야기는 육체적으로 감긴 눈을 뜨게 해주는 이야기이면서도 나중에는 영적으로 감긴 눈에 대한 논의로 발전시키고 있다. 50)

소경 치유사건을 보면 모두 여설 부분으로 나누면 이렇다.

   1. 예수께서 나면서부터 눈먼 자를 고치심(9:1-7) 등장인물: 예수, 제자들, 소경

   2. 이웃들과의 논쟁(9:8-12) 소경과 그의 이웃

   3. 바리새인들과의 논쟁(9:13-17) 소경과 바리새인들

   4. 눈 뜬 자의 부모를 심문함(9:18-23) 바리새인들과 소경의 부모들

   5. 눈 뜬 자를 두 번째 심문함(9:24-34) 바리새인들과 소경

   6. 눈 뜬 자를 예수께서 만나심(9:35-36) 예수님과 소경

요한복음 9장을 피상적으로 바라보면 소경을 치유한 표적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질지 모른다.51) 이 표적은 세상의 빛 되는 예수의 정체성과 연결시켜 숨겨진 의미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 표적 이야기는 첫째로 연못에서 일어났다. 특히 실로암 못에서 씻도록 보내는데 이것은 엘리사가 나아만을 그의 문둥병의 치료를 위해 요단강에서 씻도록 보낸 것과 마찬가지이다.(왕하 5:10-14) 실로암은 히브리어 “쉴로아”에 대한 칠십인경의 번역이다. 쉴로아라는 동사는 보내다와 같으며 본 문맥에서도 역시 광천수의 방출을 의미한다. 크리소스톰이 관찰했듯이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를 영적인 실로암으로서 보냄받은 자로 간주한다. 따라서 소경된 자가 실로암 못에서 씻을 때에 시력을 얻지만 그는 실제로 그것을 보냄을 받은 자의 능력을 통해서 얻었던 것이다. 이런 예수와 실로암, 즉 쉴로아의 동일시가 다음 창세기 49:10에 대한 메시아론적인 해석을 통해 제안되었던 것도 당연하다.52)

두 번째로 표적이 안식일에 일어났다. 그러나 5장에서 안식일에 대한 논쟁이 쟁점이 되었지만 R.E.Brown에 의해서 기독론적인 변증을 강조되고 있다. 그는 이 본문이 갖고 있는 중요한 가운데 하나가 변증적인 교훈인데 그것이 바로 기독론적 변증이라는 것이다. 언뜻 보면 표적에 이어 안식일 논쟁이 제기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소경을 고친 이 이적은 안식일 논쟁이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안식일 논쟁은 배후로 사라지고 논쟁의 핵심은 예수가 과연 이적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지, 가지고 있다면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에 집중하고 있다.53) 셋째로 표적을 통해 예수가 빛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표적을 세례와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R.E. Brown의 경우 이 본문이 세례와 관련된 교훈을 갖고 있음을 인정한다. C.H. Dodd는 “물에 눈을 씻음으로 시력을 되찾은 맹인은 세례의 해서 빛을 찾은 개종자를 뜻한다. 확실히 이와 같은 상징적 해석이 의도되었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Schnackenburg는 다음과 같이 결론 짓는다.만약 그가 세례를 암시하고자 했다면 보다 분명한 표적들을 남겨놓으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본문 가운데서 복음서 기자가 세례적인 상징을 끌어들이려고 했다는 설득력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Schnackenburg에 의하면 이 표적 이야기를 소개하는 ”요한복음 저자의 주요 신학적 목적은 기독론적인 것이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이 땅에 가져오는 것이고 암흑세계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따라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이러한 예언을 성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을 알고 있다는 유대인들은 그가 메시아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소경이던 자는 빛이신 예수를 만나 예수께서 메시아임을 인식한 반면 자신들은 모세의 율법을 알아 빛을 받고 있다는 유대인들, 특히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은 정작 소경이 되어 빛이신 예수를 보지 못하고 메시아로 인정치 않음으로 결국 소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소경은 눈을 뜨고 빛을 본다는 자들은 오히려 소경이 되는 것! 도리어 소경의 신앙은 발전한다. 소경된 자가 예수를 하나님으로부터 온 그리스도라고까지 고백한다. 예수께서 메시아 되시는 것은 그의 대속적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스스로를 인류 구원을 위한 속죄 제물로 내어 주는 것이 바로 메시아의 과업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유대교의 메시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온전한 신앙이 아니다. 치유된 소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바로 이것을 깨달았다. 바로 예수가 하나님이시고 인류를 하나님과 연합시키는 인자 이신 것을 육신적으로만 아니라 이제 영적으로도 이것을 보게 된 것이다. 54)

  소경된 자를 고친 예수의 표적을 통해 예수의 정체성은 빛을 주시는 분 바로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구원하는 능력 즉 신적주권을 행사하는 분이며 하나님의 대표자이며 생명을 얻게하는 메시아라는 구체적인 증거를 나타내고 있다.  


G.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 (11:1-46)

   이 표적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유일한 부활 표적 이야기이다. 본문에 기록된 나사로의 죽음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 이야기는 다른 부활 이적 이야기들과 다음과 같은 점들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첫째 다른 부활 이적들은 모두 죽은 직후에 죽음으로부터 살려내는 이적의 형태로 되어 있다. 그러나 나사로를 살려낸 표적의 경우는 그가 죽은 지가 이미 사흘이나 지났으며 벌써 시체의 부패로 인해 냄새가 나고 있었다.(11:39)는 점에서 혼수 상태나 가사 상태로부터 일어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점에서 나사로의 부활 표적은 복음서 전승 가운데서 유래를 찾을 수 없다는 독특한 부활 이적인 셈이다.55) 예수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보낸 사람으로부터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 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나사로가 죽기 전에 그에게 가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라고 한다. 그러나 나사로는 결국 병들어 죽었다. 예수는 나사로의 병과 관련하여 이 병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예언한다. 예수가 나사로의 죽음을 내다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죽음을 인생의 마지막으로 보지 않은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예수의 이해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예수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했다. 이것은 인간의 죽음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암시로 인간의 죽음을 잠든 것으로 묘사한 것은 잠자고 있는 사람은 언젠가 깰 때가 있음을 암시한다. 나사로의 육체적 죽음은 인간이 육체적으로 병들고 그 병으로 인한 죽음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 나사로의 육체적 죽음은 연약한 한 인간의 단순한 생물학적 사망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 있다. 예수는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제자들의 믿음과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을 굳게 세워주고 이 사건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죽음과 생명을 다스리는 분임을 밝히 보여준다. 결국 나사로의 죽음과 살아난 사건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56)

임진수 교수는 나사로의 부활사건을 누가복음 16:19-31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나사로와 연결시켜 구원론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요한복음 저자는 공관복음과 공동의 전승을 가지고 나름대로 연속성과 통일성을 가진 독특한 신학적 입장을 취했는데 이것은 요한복음의 유대인은 누가복음의 부자와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이 수난의 원인이 되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이 수난의 원인이 되고 있다. 또한 나사로의 부활이야기 뒤에 나오는 마리아의 기름부음(12:8) 사건은 장례를 준비하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고 12:20-26절의 인자의 영광의 때가 왔고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는 말씀이 예수의 죽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런 본문은 13장의 영광의 책에서 예수의 수난과 부활로 이어지고 있다.

버슬리 머리는 11:25-26을 통해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다. 예수께서는 부활이시며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자의 실존은 죽음이라기보다는 생명이다.57)

지금까지 요한복음 11:1 - 44에 나사로의 죽음과 살아남을 통해 삶과 죽음을 살펴보았다. 어느 누구도 인간은 자신은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린다. 이것은 예수가 생명의 주인이심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생명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께 주권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사로의 죽음과 살아남을 통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생명과 부활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살아있는 동안에 믿으며 사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생명이 있음을 가르켜 주고 있다고 본다.

H. 결 론

요한복음 표적들에 대하여 지금까지 살펴보았다.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차이는 공관복음은 예수의 신분을 비밀리 하였지만 요한복음은 예수 자신이 누구인지 공개적으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의 표적들을 통해 예수의 기원과 능력 목적 그리고 예수의 정체성을 밝히는 데에 그 초점을 맞추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의 이적들을 통해 요한복음의 저자가 말하려고 한 의도는 예수의 메시아적인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7가지 표적을 요약해보면 이렇다. 첫 번째 표적인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2“1-11)은 유대교를 능가하는 종말의 주인이 되는 메시아임을 강조하고 있다. 두 번째 표적인 신하의 아들을 고침으로 예수는 기적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죽음과 멸망의 위협으로부터 생명의 구원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 표적인 38년 된 병자를 고침으로  “안식일을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 안식일에 주인 되신 그리스도시란 사실이다. 네 번째 표적은 5천명을 먹이심으로 예수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는 떡으로 자신을 알리고 있다. 다섯 번째 표적인 물위로 걸으신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임을 증거하고 있다. 여섯 번째 표적인 소경의 눈을 고치심으로 빛으로 오신 예수 자신이 어둠을 밝히는 메시야임을 증거하고 있다. 일곱 번째 표적인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통해 예수 자신이 생명과 부활의 주인임을 알리고 있다. 7가지 표적을 통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이 사실이 진리임을 말해주고 있다.

요한복음에서의 예수의 7가지 표적들을 통해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해주며 신앙을 일깨워주는 표적들이다. 요한은 그의 기록 목적을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고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그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또 예수로 인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