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유대인의 문헌

유대인의 문헌

호리홀리 2015. 3. 9. 13:36

유대인의 문헌

 


 

유대교를 단순히 하나의 종교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용어의 참 뜻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통 유대교(Judaism)라 하면 이스라엘 백성(또는 유대인)의 종교, 문화, 법적인 전승 내지 문명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런 포괄적인 의미에서 유대교의 크나큰 특징중의 하나는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문헌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대인의 문헌은 단지 그 양적인 면에서만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 질과 영향력이라는 점에서 더욱 놀랍기만 하다. 유대인에게 하나의 별명을 준다면 아마도 '책의 민족'이라는 이름이 적절할 것이다.

 


 

오늘날 유대인들, 특별히 종교적인 유대인들은 늘 책을 끼고 다닌다. 그저 끼고 다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늘 읽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 이스라엘에 가보면 버스 안에서, 또는 가게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을 흔히 보게 된다.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읽고, 가게 주인은 손님이 없을 때 틈틈이 책을 읽는다. 심지어 자선을 요구하는 거지들도 책을 읽고 있다. 그리고 개개인의 장서 보유율과 서적 출판율도 높다. 늘 책과 사는 민족,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책을 손에서 떼지 아니하고 읽으며 또 책을 쓰는 민족이 바로 유대인이다.

 


 

흔히들 말하기를 유대인은 호기심이 많은 민족이라고 한다. 자신들이 그렇게 평한다. 이들의 대화 내용은 항상 풍부하다. 관심도 많고 질문도 많다. 한 번 묻기 시작하면 귀찮을 정도로 꼬치꼬치 물어댄다. 호기심이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의견도 다양하다. 유대인들 스스로 하는 말이 열 명의 유대인이 모이면 적어도 열 하나의 의견이 나온다고 한다. 아이들도 말하는 상대방을 개의치 않고 제 의사를 똑똑히 표현할 줄 안다. 학교 교실에서 국회 의사당에 이르기까지 진지하고 불꽃튀는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주먹이 나가지는 않는다. 이들은 입싸움만 할 따름이다.

 


 

유대인의 이러한 특성은 그들의 독서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들은 인류 문명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쳤고 또 계속적으로 미치고 있는 신구약 성경을 인류에게 선사한 민족이며, 일찍이 미슈나, 탈무드와 같이 방대한 지적 보고(寶庫)를 엮어낸 민족이다. 이러한 고대 문헌의 편찬도 놀랍거니와 그 전래 과정은 더욱 피눈물나는 것이었다. 유대인은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자기들의 문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민족이다. 읽고자 하는 의욕이 없이는 글의 전수가 거의 불가능하다. 성경을 비롯하여 미슈나, 탈무드 등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건재한 것은 유대인들의 독서열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독서열은 율법의 연구를 구원의 지름길로 믿었던 그들 선조들의 가르침 때문에 붙은 습관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면 '책의 민족'이라고 불리우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책들로는 무엇 무엇이 있는지 알아 보도록 하자.

 


 

가장 우선적으로 꼽히는 책은 역시 성경이다. 흔히 기독교에서 성경이라 하면 신구약 성경 예순 여섯 권의 책을 말하지만,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구약 스물 네 권만을 의미한다. 물론 이들의 스물 네 권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약 서른 아홉 권과 동일한 것이다. 다만 서로 다른 분류 방식 때문에 이런 숫적인 차이가 생긴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서 유대인은 사무엘서를 한 권으로 보지만,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사무엘상과 사무엘하 두 권의 책으로 본다. 기독교의 신구약 예순 여섯 권과 유대인의 스물 네 권 성경은 정경(正經)이라고 불리운다. 정경은 특정의 종교 조직이나 집단에 의하여 정식으로 공인된 성경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에 반해서 정식 공인을 받지 못했으나 성경과 유사한 형식이나 내용을 가진 글들이 예부터 전해지는데, 이런 문헌은 외경(外經)이나 가경(假經)으로 따로 취급된다. 종교 단체에 따라서는 이들 외경이나 가경을 정경과 동일한 권위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이들 외경이나 가경은 일반 기독교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기독교 학자들의 주목도 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상 이 문헌들은 신구약 성경은 물론, 신구약 중간 시대와 거의 일치하는 제2성전 시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큰 도움을 제공해준다. 아울러 1947년 이후로 쿰란 일대의 동굴들에서 발견된 쿰란 공동체의 독특한 분파적 문헌들과, 주후 1세기에 활동한 알렉산드리아의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상가 필로와 역사가 요세푸스의 문헌들도 이 점에 있어서 큰 기여를 할 것이다.

 


 

유대인은 외경이나 가경을 권위있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약 성경 또한 비록 그 거의 전부가 유대인에 의하여 쓰여졌지만 혹평하면서 이를 거부한다. 다만 스물 네 권의 구약 성경만 정경으로 인정한다. 미슈나와 탈무드를 비롯하여 후기 유대인의 모든 종교적 문헌들은 바로 이 성경에 기초한다. 유대인은 그들의 성경을 토라(=율법), 네비임(=예언서), 케투빔(=성문서 聖文書)의 세 부분으로 나눈다. 때로는 세 부분을 다 합하여 율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율법과 선지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누가복음 24:44) 등의 표현은 모두 유대인의 성경 곧 구약 성경을 가리키는 것들이다.

 


 

유대교에서는 말하기를, 시내산에서 이미 하나님의 모든 토라가 모세에게 하달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성경은 '기록된 토라'(=성문 成文 율법)요, 나머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가르침은 '입에 의한 토라'(=구전 口傳 율법)라고 한다(여기서 '입에 의한'이란 히브리어 표현은 '외운다'는 뜻이 있다). 이들이 말하는 구전 율법에는 에스라 이후 대략 주후 7세기까지 약 천년간에 걸쳐 집성된 유대 현인들의 문헌들이 포함된다. 결국 구전 율법도 성문화(成文化)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입에 의한 토라'도 '기록된 토라'와 마찬가자로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것인데, 후자만 기록되고 전자는 대대 손손 입에서 입을 통하여 전수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은 두 가지를 똑같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인다.

 


 

일반적으로 구전 율법을 집대성한 것을 가리켜 미슈나라고 한다. 미슈나라는 용어는 성문 율법(= 성경)을 가리키는 또다른 히브리어 용어인 '미크라'에 대립되는 개념이다. 히브리어 명사 '미크라'는 동사 '카라'(=읽다, 부르다)에서 파생한 것으로서, '모임'이라는 뜻 말고도 '읽을 거리', '본문'이라는 뜻이 있다. 이는 기록된 율법인 성경은 읽어서 배워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명사 '미슈나'는 아람어 동사 '샤나'(=반복하다)에서 파생한 것이다. 유대인의 반복을 통한 교육 방법을 엿보게 하는 용어라고 하겠다. 중요한 법들에 대한 해석은 주후 70년 이후에 활발하게 진행되어서 주후 200년까지는 기록이 완성된다. 이것이 바로 미슈나이다. 미슈나는 여섯 부분으로 나뉜다: 1) "씨앗"에서는 농경법과 땅 경작에 있어서의 종교적 의무 등을 다룬다. 2) "절기"에서는 안식일을 비롯 종교적 절기들을 다룬다. 3) "여자"에서는 혼인, 이혼, 간통, 서원 문제 등을 다룬다. 4) "손해"에서는 민사 및 형사 문제를 다룬다. 5) "성물(聖物)"에서는 희생 및 동물 문제를 다룬다. 6) "정결"에서는 사람이나 물건의 깨끗한 여부를 다룬다.

 


 

주후 3-6 세기에 걸쳐 미슈나에 대한 주석이 편집되었는데, 이를 가리켜 탈무드라고 한다. 탈무드의 본문은 미슈나가 되겠고, 주석 부분은 특별히 그마라라고 일컫는다. 탈무드는 단순히 '배움'이란 뜻이다. 구전 율법인 미슈나의 내용을 두고 랍비들이 벌인 토론 내용을 종합하여 편집한 것이 탈무드이다. 따라서 탈무드는 대개 대화식으로 전개되어 있다. 미슈나 및 탈무드와 거의 같은 시대에 편찬된 또 다른 종류의 유대 문헌으로서 미드라쉬라는 것이 있다. 미슈나가 전래법 문제를 다루는데 반하여 미드라쉬는 성경에 대한 교훈적 내지는 설교적 주석이다.

 


 

이상 언급한 유대인의 문헌들은 특정한 기간내에 모두 배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평생 배워도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분량도 많지만 내용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이들 문헌, 곧 포괄적 의미의 율법을 연구하는 것은 구원으로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대를 이어 가며 부지런히 책을 읽는 것이다.

 


 

독서를 많이 하게 하는 유대교는 자연히 지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지식, 특별히 율법에 대한 지식은 존경의 대상이 된다. 과거 2000년 동안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지도층은 대개 지식있는 랍비들이었다. 랍비들은 부지런히 공부하여야 한다. 율법을 일상 생활에 적용시키는 일에 능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일반인들도 마찬가지로 율법 지식의 향상을 통하여 신앙의 진보를 도모한다.

 

문자 언어가 만들어진 이후 인류는 자기들의 역사와 사상 등을 그 안에 담아서 후세 사람들에게 전달해주었다. 지구상에 존재했거나 또는 존재하고 있는 많은 민족 가운데 몇몇 민족은 문자화된 기록을 남기는 일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보여준다. 그러나 고대에 방대한 분량의 문헌을 남기고 동시에 그 문헌이 인류의 정신 문화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점에 있어서 유대인을 따라갈 민족은 없을 것이다.


유대인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책을 기록하고 전수하면서 살아왔고, 또 책을 연구하는 일을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중 하나로 간주하며 살아왔다. 과연 유대인은 '책의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민족, 책 때문에 수천년의 고난도 극복하고 생존과 존립의 불길이 꺼지지 않은 민족, 책을 통하여 전세계에 공헌한 민족, 책을 가지고 인류의 정신 문화를 주도해 왔고 또 지금도 주도하고 있는 민족, 이러한 점이 바로 '책의 민족 유대인'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유대인의 방대한 문헌의 원천은 다름이 아니라, 모세의 다섯 책이라고 불리는 '토라'로 시작되는 구약 성경이다. 과거 유대인의 모든 문헌은 '기록된 율법'으로서의 구약 성경에서 시작하였다고 보아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주전 588년과 주후 70년 두 차례에 걸쳐 예루살렘이 파멸되고 야웨 하나님에 대한 예배 중심지인 성전이 불에 탄 일은 모든 유대인에게 충격적인 사건으로서, '기록된 율법'의 역할을 더욱 강화시켜준 사건이었다.


제1성전이 불에 탄 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성전을 대신하여 회당을 세우고, 회당을 중심으로 제사 대신 토라의 연구에 치중하였다. 이 회당과 토라 연구의 전통은 제2성전이 선 후에도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다. 이러한 전통이 바로 바리새파에게 영향을 주어 성전 예배보다는 토라의 연구와 준수에 역점을 두게 하였을 것이다. 주후 70년의 사건은 이러한 과정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희생 제물을 바치는 성전 예배는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토라의 연구와 준수만을 중시하는 '랍비 유대교' 만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존속해 오게 하였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유대인이 기록된 율법으로서의 구약 성경 외에 '구전 율법'을 비롯한 여러 기타 문헌들을 만들어 낸 것은 성전 파괴에 따른 중요한 결과 중 하나가 아닌가 한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지난 2000년 역사 가운데, 인류에게 미친 가치와 영향력 면에서 유대인의 보고(寶庫)인 모든 문헌에 필적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한 인물을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가 바로 유대인중 유대인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전 건물들의 장엄함과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찬탄을 금하지 못하던 제자들을 향하여,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예수는 선언하였다. 그는 또한 성전에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발언을 하여 크게 유대인들의 노여움을 사기도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랍비 유대교와는 달리, 언뜻 보기에 성전을 대치할 만한 어떤 것도 제시하지 못한 것 같다. 사실 그는 어떠한 성전 대용품도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의 육체를 성전과 동일시했을 뿐이다. 성전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하나님의 임재에 있는 것처럼, 예수의 육체적 삶 역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임마누엘)을 구현(具顯)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육체가 바로 성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발언은 결국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 것이다.


주후 70년의 대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되찾고자 랍비 유대교의 길을 택하였다. 다시 말해서 율법의 연구와 준수라는 인간적 수고와 노력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 없이, 하나님의 임재가 결코 성전의 파멸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와 그의 영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믿는 이들의 마음 속에 거한다고 믿는다.


한 사람의 유대인인 예수의 그 거창한 발언에 나의 삶을 건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크나큰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그의 처음 제자들도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한 후에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고, 제자들은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예수를 선전하기에 이르렀다. 필자에게는 적어도 저 유식한 랍비들의 지적 토론과 훈계보다는 저 무식한 갈릴리 사람들의 대담한 외침이 더 호소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