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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센파와 사해사본

호리홀리 2015. 3. 9. 10:30

에센파와 사해사본


1세기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무렵 이스라엘 사회는 여러 분파로 갈리어져 있었다.
크고 작은 20여 개의 분파들이 있었지만 당시 역사가인 조세프스와 필리니의 기록에 따르면 바리세이파와 사두가이파가 커다란 세력을 지니고 있었고 에쎄네파 라고 불리우는 자그마한 분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조세프스에 따르면 에쎄네파는 약 4000명 정도로 도시와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며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과 독특한 복장과 행동, 그리고 특별한 행동 수칙을 지키고 있어 당시 역사가나 학자들에게 아주 많은 관심을 끌고 있었다고 한다. 에쎄네파에 대한 학술적인 기록은 사해문서가 발견되기 50년 전 1896년 기록에 나타난다. 캠브리지대 교수가 이집트 방문중 카이로에서 구입한 문서 가운데 벤 에즈라 유대교 회당에서 발견된 문서들 중에 중세시대 씌여진 “다마스커스 문서”라고 불리우는 기록을 보면 이 에쎄네파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다가 후에 사해 동굴 4번에서 발견된 문서들과 비교 분석함으로써 1986년 처음 언급된 이 분파의 존재에 대한 가설이 옳았던 것으로 증명되었다.



사해문서들은 에쎄네파의 공동체 생활이 조세프스, 필로, 그리고 필리니가 기록한 내용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사해 서쪽 해안지대에 엔게디 지역까지 바로 사해문서들이 발견된 동일한 지역이 이들의 활동지역으로 확인된다. 학자들간에 다소 이견이 있는 부분도 있는데 사두가이파의 문서들이 섞여 있다던가 로마에 대항하던 독립군들의 문서들이나 또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문서들이 섞여 있다던가 로마가 대항하던 독립군들의 문서들이나 또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문서들이 섞여있다는 주장들도 있다. 심지어는 쿰란에서 생활한 에쎄네 공동체와 이 지역에서 발견된 사해문서간에 전혀 관계가 없다는 주장조차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학계의 시각은 에쎄네파가 쿰란의 주인이었고 주위에서 발견된 사해문서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쿰란 공동체는 서기 68년 베스파시안 장군이 로마군을 파견하여 유대인 반란을 진압할 때 함께 파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어쩌면 멀리에서 다가오는 로마 군대를 보며 에쎄네 사람들은 주위 동굴에 가장 신성한 성경과 문서들을 황급히 감추고 어디론가 떠나 다시는 쿰란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에쎄네 공동체의 시작과 쿰란 수도원 건설은 발견된 문서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1897년 발견된 다마스커스 문서에도 확인할 수 있다.

쿰란에서 발견된 2번째 두루마리 문서는 115줄의 문서로써 그들만의 독특한 달력을
보여주며 날짜 계산 방식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기원전 2C 중엽
하시모니아 왕국시대를 그 시발점으로 제시하고 있다.

크로스(Frank Cross)는 에쎄네파의 족보를 마카베오 시대의 유다 마카베오의 동생인 요나탄 마카베오 때의 제사장에서 시작된다고 처음 주장한 학자이다.

수세기동안의 페르시아와 그리이스 통치 아래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은 유대사회의
최고 권력으로 활동했으며 거의 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사독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으로 그 후손이 세습적으로 대제사장을 승계했는데 기원전 175년 오니야스 3세와 제이손 두 형제가 자리를 이어받으려고 경쟁하고 있었다. 당시 그리이스 셀류시드
제국 황제였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게 많은 뇌물을 제공하고 제이손이 승리하였다.
이에 따라서 제사장은 외국인인 황제가 임명하는 새로운 전통이 생겼으며 제이손이
대제사장이 된지 4년 후에 유대의 부유한 가문이 안티오쿠스를 설득하여 대제상직을 사독 가문이 아닌 사람에게 임명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써 메네라우스가 새로운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로 인해 유대 사회는 소요와 반란으로 뒤덮이게 되었고 제이손의 세력과 메네라우스 세력과의 내분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내분은 외부 세력인 안티오쿠스의 개입을 유발시켰으며 이에 대항한 독립전쟁이 바로 마카베오 운동이었다.
마카베오가 정치적인 승리를 쟁취하자 왕과 대제사장직을 독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바로 에쎄네파의 출현의 무대였으며 새로 확립된 예루살렘 성전 주도 세력으로부터 소외된 세력들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의로운 선생님(Righteous
Teacher)”의 지도아래 모여 종파를 이루고 쿰란에 그들만을 위한 장소를 건설한
것으로 여겨진다.



에쎄네파의 공동체 회원들은 엄한 규율과 공동식사, 그리고 재산의 공동소유를 실천했으며 메시아의 임박을 믿는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문헌에 따르면 이들은 두 종류의 메시지를 기다렸는데 이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Anointed one)”라고 불리우는 정치적인 메시아(다윗의 후손)와 종교적인 메시아(아론의 후손)로 인식했다. 또한 메시아의 도래는 빛의 아들들(에쎄네파)이 어둠의 자식들에 대해 벌이는 40년의 성전을 치른 후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수도원 공동체의 생활은 율법의 엄정한 준수와 정결례의 강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해 동쪽에서 아침해를 맞는 아침기도를 시작으로 대추야자 재배등 여러가지 작업으로 이어졌고 오정에는 종교적인 정결침례예절과 공동 식사를 한 후 다시 오후 작업을 하는 생활을 하였다. 밤에는 성경을 공부하고 율법과 지혜문학을 연구하였다.


에쎄네 공동체는 자원자(volunteer)만 받아들었다. 자원자들은 감독(overseer)들의
심사에 따라 악의 그림자보다 빛의 부분이 더 많다는 것이 확인되도록 했으며 선과
악의 이분법에 따라 판단되었다. 선한자로 받아들여지는 즉시 모든 재산을 공동체에 의탁하였다. 공동체 생활은 그리 가난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매일매일 식사는 육류와 와인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당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공동체는 독특한 태양력을 사용했는데 성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일년을 364일로 나누었고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하고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달을 30일씩 12달로 나누었으며 매 4분기마다 하루씩을 더했다. 일년은 정확하게 52주로 나뉘게 된다. 새해는 언제나 수요일날 시작했으며 태양과 달, 별들이 창조된 날이었다. 성경에 따르면 유대인 절기들은 명확히 표기하고 있는데 유월절은 첫 달에 14번째 날, 칠칠절은 3번째 달에 14번째 날과 같은 방식이다. 이에 따라서 유대인 절기는 언제나 같은 요일에 시작된다. 유월절은 수요일, 칠칠절은 일요일, 속죄일은 금요일, 장막절은 수요일......

쿰란의 한 해는 29시간 48분 40초 만큼 태양 공전주기보다 짧기 때문에 에쎄네파는
매 5-6년 마다 달력에 일주일을 더 삽입해서 태양주기를 맞추었다. 이런 달력 시스템때문에 유대교 절기를 지키는 것이 성전과 달랐다. 이로써 사해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아칸사제가 의로운 선생을 가장 신성한 날인 속죄일에 공격했다는 것을 설명할 수가 있게 된다.


에쎄네파 사람들은 비교적 젊었으며 예루살렘 사제 집안의 후예들로써 예루살렘 권위를 부정하고 유대인 전반의 지지를 얻기위해 고심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요세프스 플라비우스가 기록한 전형적인 에쎄네파 회원의 이야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외가쪽으로 하시모니아 왕과 대제사장들의 친척인 16세 소년이 집을 떠나 유대사막에서 떠돌다가 바누스라는 사람을 만나 에쎄네 공동체에 얼마간 머문다. 3년 후에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 바리세이파에 합류했다. 조세프스가 기록한 이 일화는 아마 많은 쿰란 공동체 회원들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매일 아침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오랜 시간 일하며 공동 식사를 하고 엄격한 규칙을 따르며 밤시간의 1/3은 도서관에서 보내는 생활은 결코 쉬운 생활이 아닐 것이다. 비교적 젊은 사람들만이 견뎌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어느정도 나이가 들면 아마 좀 덜 엄격한 에쎄네 공동체로 옮겨가기도 했을 것이다. 쿰란 주위에는 공동묘지 세개와 1200개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똑같은 형태와 비석도 없이 줄줄이 똑같은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50개의 무덤이 발굴되었는데 거의 모두가 남자였다. 한 무덤만 65세로 판명되었고 다른 모든 무덤들은 30세 이하에서 매장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어떻게 긴박한 말세를 기다리는 종파가 200년 이상 계속될 수 있었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회원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하나의 실마리를
제시해준다.

서기 66년 대반란이 일어났을 때 말세가 온 것으로 여기고 전쟁에 참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란은 패배로 끝났다. 성전은 파괴됐으며 쿰란의 공동체 본부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파괴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유대교의 종말이라고 믿었고 “유대인 고대사”의 저자인 조세프스 플라비우스는 스스로 유대인의 탄생과 멸망의 역사를 기록한 책을 지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조세프스는 잘못 알았던 것이다. 얌니아(현재 야브네)는 이스라엘 남부 해안의 자그마한 마을인데 로마의 파괴로부터 생존한 몇몇의 랍비들이 성전이 없는 유대교의 기초를 이곳에서 새로 마련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의 시작인 것이다. 랍비들은 분파주의와 갈등이 유대인 역사에 가장 큰 아픔인 성전의 상실을 초래했다고 보고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유대인의 일체성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로 믿게 되었다. 분파적 요소를 지닌 종파들은 철저하게 제거되었다.
비록 사상의 차이에 대한 논쟁은 계속 되었지만 비교적 미미한 것이었다. 성전이
사라지자 에쎄네파의 영향력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 상대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에쎄네파의 랍비 유대이즘 영향력을 보여주는 예들이 있다. 이는
규칙적인 기도인데 에쎄네파는 성전에서 예배하는 대신 하루에 다섯 번 규칙적인
기도를 했고 이는 랍비 유대교에 그대로 전승되었다. 그리스도교에 끼친 영향은 신약성서에 의로운 선생님이라는 표현을 통해 또는 산상수훈의 선교 내용과 쿰란의 사상을 비교할 때 이해하게 된다. 사해사본은 구약성경외에 히브리어와 아람어 단어들을 포함하는데 이러한 단어들이 신약성경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이스어로 기록된 신약성서의 “의로운 신(sidqat el)”, “율법의 일들(ma’aseh torah)”, “하느님의 교회(gehal el)”, “빛의 아들들(bene’or)”이라는 표현등이다. 또다른 에쎄네파가 초기 그리스도교에 미친 영향은 초대교회 조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대 교회의 공동체 생활이나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며 하는 새벽기도 등이다.



초대교회의 지도자를 뜻하는 그리이스어 Episcopus는 감독을 의미하는 overseer라는 에쎄네파 직책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에쎄네파에서 중요한 절기가 일요일이라는 것도 어쩌면 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내용에서 더 비약하는 학자들도 있다. 의로운 선생님을 예수님을 뜻한다고 보기도 하고 혹자는 야고보(James)를 칭한다고 보기도 한다. 또는 세례 요한을 칭한다고 보는 이도 있다. 이러한 가설들은 아직 대부분의 학자들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지만 에쎄네파의 초기 그리스도교 영향력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본다. 세례 요한은 쿰란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으며 아마 적어도 한 때는 쿰란에 몸 담았을 것으로 믿어진다. 적어도 에쎄네파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죽자 그의 제자 중 일부는 갈릴리로 예수님을 따라갔을 것이다. 신약성서에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비교 내용이 나타난다. 유사한 토론들을 통해서 에쎄네 사상이 초기 그리스도교에 유입되었을 것이다. 쿰란 공동체 사람들은 상당한 지식인 계층이었고 지적능력은 입회의 조건이었다. 도서관에서 오랜동안 공부하며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바탕을 연구했다. 그러나 쿰란 사람들은 당시 대부분 유대인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개방주의자들은 아니었다. 그 반대로 엄격한 이분법에 따라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는 사람들로써 2차 성전시대 유대교에서 주세력이었던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로부터 심한 공격과 체포, 구금등을 당한 반체제 세력이었다. 쿰란 공동체에 관한 저서들은 그들의 인물들에 대해서 별로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지원자였던 Honio, 감독관이었던 엘리에저르, 그리고 감독관이 규칙 위반자 리스트를 만들면서 적어놓았던 이름들인 요하나, 하나니아, 시게온 등의 이름들만이 파편들을 통해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이들이 바로 사해 북서쪽 해안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던 수도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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