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사해사본>이란 무엇인가

사해사본

호리홀리 2015. 3. 8. 21:22

<사해사본>이란 무엇인가 

첫째 1946년(1945년이라고도 한다)에
나일강변의 한 촌락 나그.하마디(카이로의 남쪽 약 570킬로,옛 케노보스키온)에서 그노시스파의 서고를 발견했고,

둘째로 뒤에 말할 1947년의 사해 사본의 발견이며,

셋째로, 크레테섬 크노소스 및 그리스 본토에서 출토된 선문자 B가 1952년에 영국 건축가 마이켈,벤트리스(1922-1956)에 의하여 해독되고, 이것이 기원전 1400년대의 가장 오래된 그리스어라는 것이 판명된다.

사해 사본이 발견된 경위는 이렇다.

1947년 봄, 사해의 북서부 사막의 구릉지대 쿰란에서 베두인(아랍계 유목민)이 양과 염소를 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리에서 이탈한 한 마리의 염소를 찾기 위하여 한양치기 청년이 반 쯤 허물어진 벼랑의 동굴에 돌을 던졌더니 무엇인가가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튿날 그 청년은 사촌 형제와 함께 그 동굴로 기어 올라가 보니 좁은 동굴 속에는 항아리의 파편이 흩어져 있으며 안쪽에는 뚜껑이 덮인 항아리 여덟개가 있었다.

그러나 그 중 일곱 개는 빈것이었고 나머지 한 개의 항아리 속에는 큰 두루마리 한 권과 작은 두루마리 두 권이 들어 있었다.

이 두루마리를 결국 베들레헴의 고물상에게 넘어가고, 그 해 12월에 예루살렘의 헤브라이 대학이 이 세 두루마리를 사들이게 되었다.

그후 사해의 서북 연안의 동굴은 베투인들이나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답사되고 매년 계속해서 발견이 있었다.

와디,쿰란 지역의 동굴 발견은 1956년 봄까지 11개 곳(1956년에 발견)이었으며, 발견의 순서에 따라서 1(1Q,Qumran Cave1)에서 11까지 번호가 매겨졌다.

그 밖에 와디,므라바트 지역의 동굴, 킬베트.밀드 지역에서 발견된 사본들,그리고 킬베드,쿰란과 아인.페스카 폐허에서 발견된 사본들은 모두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일반적으로 사해 사본 또는 사해 문서라고 부르는 것은,1947년에서 수년 간에 걸쳐서 사해의 서북연안과 서안에 펼쳐져 있는 <유다의 황야>의 동굴이나 폐허에서 발견된 고사본들을 말한다.

발견한 장소나 사본의 내용과 성격 등은 여러가지이며, 그 정리와 분류는 끝나지 않았다.

현재까지 간행된 사본과 단편들을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

(1) 와디.쿰란 지역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들

(2) 와디.므라바아트(쿰란의 남쪽 약 16킬로미터,예루살렘의 동남남 약 24킬로미터)지역의 동굴들에서 발견된 사본 단편들(대부분은 2세기 전반, 특히 유대인의 대로마 제 2차 반란(AD 132-135년)시대에 속하는 것이며, 이 반란의 지도자 발,코호바에 관한 사료도 포함되어 있다.

(3) 킬베트.엘밀드(예루살렘의 동남쪽 약 14킬로미터)지역의 유적(비잔틴 시대의 수도원 자리)에서 발견된 신약성서의 사본 단편들(AD 5-8세기에 속하며, 쿰란 사본들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

(4) 아랍인 베투인들이 가지고 온 출저 불명의 사본 단편들.

이것들 종에서 사해 사본이 중심이 되는 것은 (1)의 쿰란 사본들이다.

사본의 종류는 600종이나 된다고 하며, 두루마리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도 10권 이상이 되며, 특히 동굴 1에서 발견된 이사야서 전권(54난의 양피지로 돼있으며,전장 7.34미터,폭 평균 26센티미터,각 난은 평균 30행.
이사야 66

장이 전부 들어있다)과 동굴 4에서 발견된 키므엘기는 귀중한 것이다.

사본들의 연대는 대개 기원전 3세기 중엽에서 쿰란 종단의 본거지가 로마군에게 점령된 기원 67년에 걸쳐있다.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초에 기록된 사본은 대부분이 구약성서의 사본이다.

대부분의 두루마리 연대는 성서의 사본도 쿰란 종단 문서도 기원전 2세기말 이후, 특히 기원 전후의 그시기에 속한다

<사해사본>중에서 오래된 것은 와디.므라바아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단편들이며 기원전 8세기의 것이라고 한다.

발견된 많은 사본이나 파편을 양피지, 파피루스 ,동판,오스트라카 등에 기록되어 있다.

2.<쿰란 사본들> 은 무엇을 말하는가

쿰란 사본들은 구약성서 정전.외경,주해서 및 쿰란 종단이라고 하는 유대교의 한 종파의 종교 문서로 나뉘고,이것을 다시 분류하면 다음 네가지 문서로 대별된다.

(1) 구약성서 정전의 사본들(단편을 포함)

전체의 약 4분의 1이 되고 에스델기를 제외한 구약 각서가 있다. 신명기 이사야서,소예언서,시편등의 사본은 10종 이상이 된다.

주요한 것은 성마르크 수도원 소유의 <이사야서>의 두루마리(완본)와 헤브라이 대학 소유의 <이사야서>단편,<시편>단편 등이다.

(2) 구약성서의 외경(또는 위경)

여러가지 단편이 출토되고 있으나 가장 많은 것이 요엘서,에녹서 등이다.

(3) 구약성서의 주해서

창세기,시편,이사야서,호세아서,미가서, 나훔서,스바니야서,하박국서 등의 주해서의 단편들이 출토되고 있다.

가장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하박국서 주해서는 가장 흥미 깊고 중요한 것이다.

(4) 쿰란 종단의 종교 문서

사해 사본을 남긴 사람들의 종교 집단의 조직, 목적 계율,의식 등을 기록한 <종규 요람><종단 계율제요>라고도 한다.

<회중규정>,<축복기도문>,<감사의 시편>등의 예배식문에 속하는 문서, 그 밖에 <빛의 아들들의 싸움의 규칙>,아람어로 된 <외경 창세기>등이 있다.

그리고 1952년 3월에 발견된 동굴 3 속에서는 성전의 보물표와 그 숨긴 장소등을 기록한 이른바 <동의 두루마리>가 발견되었으나 이 리스트가 성전의 보물이었는지,또는 쿰란 종단의 재산이었는지,아니면 허구적인 것이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동굴 1에서 남쪽으로 약 15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폐허는 오늘날 킬베트,쿰란<쿰란의 폐허>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이미 1851년에 F.두.서씨에 의하여 답사되었고 <사해사본>의 발견과 함께 이 폐허는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51년에서 56년까지에 6회에 걸쳐서 예루살렘의 도미니코파 성서학원 원장 롤런,두.워 신부와 요르단 왕국의 고적 보존국장 G.L.하딩의 지도 아래 킬베트.쿰란의 발굴 조사가 실시되고 그 전모가 밝혀졌다.

3.<쿰란의 폐허>는 어떻게 발굴되었는가

두.워 원장이 얻은 결론에 의하면 ,킬베트,쿰란의 역사는 다음에 네 시기로 나누어진다.

(1) BC 8-7세기(철기시대 제II기)

(2) BC 2세기말-AD 68년까지

(3) AD 68-90년경 (로마군의 점령)

(4) AD 132-135년(유대인의 대로마 제2차 반란시에 유대인 저항군이 점거)

(1)의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는 벽의 일부와 토기,오스트라카(ostraca)의 단편이 출토되고 있을 뿐이다.

(2)의 시기에 속하는 유적은 쿰란 종단의 본거지로서 공동 목적을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주요 건물은 북서쪽 구석에 견고한 성루가 있는 30미터 * 37미터의 장방형 건물이며, 안뜰을 둘러싸고 동서남북으로 작은 방이있고, 집회실, 사경실,식당,부엌 등이 있다.

그리고 부근의 와디.쿰란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한 수로,7개의 저수조, 6개의 욕실 등이 있고, 이것들은 쿰란의 종단의 교리나 생활을 아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여기에 쿰란 종단이 형성된 것은 요하네.하르카누스(BC 135-104)시대였던 것 같다.

그후 기원전 31년에 이 근처 일대는 대지진을 만나 포기되었다.

이것은 건물의 균열로 알 수 있으며, 프라비우스.오세퍼스도 이 사실을 전하고 있다.

쿰란 사본들을 만들어 낸 쿰란 종단은 그후 재건된 것 같다.

이곳은 기원전 4년의 헤로데 대왕의 죽음에서 기원 7년경까지 사이에 재건되고 건물의 개축이 있었다.

(3) 의 시기는 유대 반란 제 3년에 시작된다.

출토품 중에는 반란 제2년과 제 3년의 날짜가 새겨져있는 화폐 70여매와 로마군의 화살촉 등이 들어있다.

로마군은 1세기 말까지 주둔하고 있었던 것 같다.

(4) 의 시기에 속하는 층에서 출토된 로마의 화폐에 의하면 로마 점령군이 약 10년간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후 단기간이기는 하지만 이유대인의 제2차 대로마 반란(AD 132-135)때에 발.코호바를 수령으로 하는 저항군이 일시 이곳에 진를 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두.워는 건물의 동쪽에 있는 묘지들을 시굴했다.

또 제분소,빵 굽는 곳, 도기 공장 등의 작업장도 발견했다.

이상의 모든 점으로 봐서, 이 폐허는 유대교의 어느 종교 집단의 본거지이며, 종단의 구성원은 부근 동굴이나 천막에 있는 일시적인 건물에 살면서 이곳을 도장으로 삼고 있었던 것 같다.

4. <사해사본>의 발견은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가

<종규 요람> 에 의하면,쿰란 종단의 단원은 자원해서 인적이 떨어진 이 유대 황야에 모여서 임박한 종말을 바라보며 메시아의 내림을 기다리는 종단의 엄격한 계율에 따라 생활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사경은 그들의 중요한 임무의 하나였기 때문에 그들에 의하여 구약성서 각서 및 구약성 외경의 대부분이 양피지, 파피루스,동판 등에 필사되어 남겨졌다.

<사해사본>의 발견은 좁은 의미의 성서학이나 성서 고고학 분야 뿐아니라, 특히 유대교의 공인된 교정본으로 정착되기 이전의 구약성서의 본문 비판학은 물론, 기원전후의 유대교 역사나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교섭, 원시 그리스도교단과 유대교와의 관계 등의 제 분야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다.

<사해사본>의 연구는 전문가들의 국제적인 협력체제 아래 계속되고 있다.

쿰란 종단의 단원들에 의하여 필사된 구약성서의 사본들은 세계 최고의 것으로 높은 학문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박물관(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스라엘 박물관은 예루살렘의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나베.샤난<고요한 집>이라는 뜻이라고 하는 언덕 위에 있으며 22에이커의 부지에 60년의 역사를 가진 옛 베자렐 미술관 (주로 유대인의 민속 자료,슈나고게의 비품등의 종교 사료,16-20세기의 근대 서구 미술작품)과 성서,고고학 박물관(주로 시리아,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오리엔트 고고 출토품)을 포함한 본관과 사해 문서들을 소장한 고문서관이 있으며, 그 중간에 현대 조각을 배치한 조각 정원으로 돼있다.

그 밖에 창고, 연구실, 수복용 시설 등이 있다.

이 조각 정원의 설계가 그 규모 면에서 전후 최대인이 이스라엘 박물관은 1964년에 창립되고 이듬해 1965년에 개관했다.

그 내용은 광범위해서 고고학적, 미술학적, 민속학적 제 요소와 근대 미술관적 제 요소를 겸비하여 인류 문화유산을 통해서 미래의 전망을 하게 하는 총합적인 민족의 미술관이다.

박물관 안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고문서관>에는 사해 문서 및 기원 2세기의 발.코호바의 반로마 봉기 관계의 고문서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 고문서관은 지상으로는 흰 돔과 장방형의 검은 외벽을 보일 뿐이고 중요한 부분은 지하로 들어가 있다.

그 내부는 이중의 포물선 돔으로 돼있으며, 그것은 굴곡이 있는 거대한 항아리 같이 생겼다.

소용돌이 치는 굴곡은 천장 꼭대기에 있는 약 1.8미터의 구멍까지 위로 뻗혀 있으며, 그 구멍에서 하늘 빛이 실내로 비쳐 들어온다.

고문서의 역사의 중요성을 재현해 주는 것 같은 설계와 구조의 건물이다.



사해 사본에 대해서

사해사본이란 1947년과 1956년 사이에 사해바다 주변에서 발견 되어진 사본을 말한다.

이 "사본들"은 일부 완전한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부분적인 조각들로 발견되었다. 광범위한 의미로 보면, 사해사본들은 주전 3세기부터 주후 8세기 무렵까지의 문서들로서 사해바다 주변 지역의 7 장소에서 발견되어진 것들 을 통칭한다.

사해바다 주변 지역들이란 것은 쿰란, 마사다, 와디 무라바아트, 나할 헤베르, 나할 쩨엘림, 나할 미쉬마르, 그리고 키르벳 미르드 지역들을 일컫는다.

이러한 광범위한 의 미에서의 사해사본에는 카이로에서 발견되어진 "그니자"까지도 포함되어지기도 한다.

한편, 협소한 의미에서의 사해사본은 쿰란 지역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쿰란 사본들을 가리킨다.

1952년 3월 10일부터 29일까지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사해바다 의 북서쪽 해변가 일대, 즉 하자르 엘 아쯔바흐에서부터 라쉬 훼쉬카에 이르는 8 km 지역에 흩어져 있는 273개의 동굴들에 대한 답사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39개의 동굴들에서 사람들이 살았던 자취를 확인하였고 25개의 동굴들에서 쿰란 제 1동 굴과 쿰란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들과 같은 형태의 토기들과 유 물들을 출토하였다.

그중에 단지 11개의 동굴에서만 "기록된 문서"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문서들을 가리켜 협소한 의미에서 의 사해사본이라고 일컫는다.

어떻게 사해사본의 기록연대를 알았을까 ?

사본과 함께 발견되어진 토기와 동전들을 통한 연대 결정과 더 불어 서체를 비교 연구하는 고문서학(팔레오그라피)이 사해사 본의 기록연대를 결정하는데 사용되어졌다.

W. F. Albright, N. Avigad, S. A. Birnbaum, F. M. Cross, R. S. Hanson 과 J. T. Milik 등이 이 고문서학(팔레오그라피)의 전문가들이다.

이 들에 의해서 사해사본의 서체들이 4가지 부류로 분류되었다.

① 고어체; 250 B.C. 부터 150 B.C. 까지,

② 하스모니안 서 체; 150 - 30 B.C. 까지,

③ 헤롯시대 서체; 30 B.C. 부터 A.D. 70 까지,

④ 헤롯시대 이후 또는 장식서체; A.D. 70-135 까지 등의 구분이다.

이러한 구분 속에서 고딕체와 필기체 등으로 세분화하기도 한다.

고문서체 비교 연구 방식에 의해서 얻어지는 연대 결정은 + 50년의 오차 범위 한도내에서 비교적 정확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고문서체에 대한 비교 연구와 함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을 이용하여 연대를 결정 짓는다.

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C14)를 이용하여 산화되고 남아있는 방사능 물질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얻어지는 연대는 + 200 년 또는 + 80 년 정도의 오차를 보여 고문서체 연구와 함께 연 대 결정의 중요한 방법으로 사용되어진다.

1951년 시카고 대학의 과학자 W. F. Libby 는 쿰란 제 1동굴에서 발견된 사본을 둘러쌌던 천조각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를 1917, + 200년 또는 A.D. 33, + 200년. 즉, A.D. 233 년과 168 B.C. 무렵이라는 결정을 얻었다(O.R. Sellers, BASOR 123[1951] 24-26 참조).

또한 1956년 런던의 한 연구소(Laboratory of the Royal Institution)에서 쿰란 지역에서 발견된 종려나무 조각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1940 + 80 년, 즉, A.D. 16 + 80 년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마지막으로 사본 자체 내에 연대 산출의 근거를 제공하는 단서들에 근거한다.

예를 들 면 제 4번 동굴에서 발견된 나훔 주석서(4QpNah)에 [ Dmy ]trws 는 Demetrius III Eucerus 라는 주전 2세기 경의 셀류 커드 통치자라는 것이 거의 확실하며, 알렉산드라 여왕의 히브리식 이름 "샬롬찌온", 알렉산더 얀네우스의 후계자 "히르카누 스", 그리고 첫 번째 시리아의 로마 총독 Aemilius Scaurus(ca 63 B.C.)에 의하여 일어난 "'Emilyos 학살 사건"등과 같은 내 부 기록들은 연대 결정에 있어서 중요한 실마리 역할을 한 다.

제 1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7개의 두루마리 사본이 발견되어진 곳이다.

7가지 두루마리 사 본들은

① 이사야 두루마리A(1QIsaa)

② 이사야 두루마리 B(1QIsab)

③ 공동체 규칙서 (1QS)

④ 전쟁사 (1QM)

⑤ 감사 찬 양시편 (1QH)

⑥ 하바국 주석서 (1QpHab)

⑦ 창세기 외경 (1QapGen) 등이며, 이것들 외에도 72개의 조각 난 텍스트들이 발견되었고 그 가운데 15개가 성서 내용들이다.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 중에서 중요한 것들은 미가, 스바냐, 시편의 주석서 들과 2개의 공동체 규칙서의 부록들이다(1QSa; 공동체의 메시 야 규율 1QSb; 축복문 모음집).

 


제 2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2번 동굴에서는 18개의 구약성서 텍스트들이 발견되었는데,
레위기 11:22-29 의 내용을 담고 있는 2Q5 같은 문서는 고대 페니키아 문자들과 비슷한 고대 히브리 어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2Q18 은 제 2경전 가운데 하나인 시라서(Sir 6:14-15, 20-31)의 내용을 보존하고 있으며 이것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으로는 매우 초기에 해당하는 시라서 사본으로 알려진다.

왜냐하면, 10세기, 12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카이로 그니자에서 발견된 것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영국 캠브리지대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히브리어로 기록된 시라서는 헬라어와 라틴어 사본만이 알려져 왔었었다.

2번 동굴에서는 또 다른 히브리어로 기록된 제 2 경전 사본 조각들도 제공한다.

그 밖에도 15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텍스트들도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2개의 '쥬빌리(Jubeilees)' 사 본들(3Q19, 3Q20)과 아람어로 기록된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서술문(3Q24)' 등이 있다.


제 3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3번 동굴에서는 14개 조각의 텍스트들을 발견하였는데, 3개가 성서(
에스겔 16:31-33, 시편 2:6-7,애가 1:10-12, 3:53-62) 내용들이고 11개는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이고 그 중에 하나는 이사야 1:1에 대한 주석(3Q4)이다.

또한 유명한 "청동 플라크"(3Q15)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는데 12개의 칼럼에 보물들(돈, 금, 은, 기타 보석들)이 감춰진 장소들이 열거되어 있다. 감춰 진 보물들의 수량은 가히 경이적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4600 달란트의 은과 금 등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아무 누구도 텍스트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제 4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4번 동굴은 가장 중요한 동굴이랄 수 있다.

완전한 사본은 발 견되지 않았지만, "최소한 15,000 조각들"의 사본이 발견되어 진 곳이다.

나훔의 주석서(4QpNah)가 5개의 칼럼으로 기록된 가장 긴 사본이고 나머지는 모두 끼워 맞추어야 하는 조각들로 발견되었다.

1952년부터 1960년 까지 끼워 맞추기 퍼즐을 통 하여 584개의 텍스트 종류가 확인되었는데, 그 중에 127개가 성서 내용들이고 나머지는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이다.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 가운데는 테필린, 메주자, 그리고 탈굼 (4Q128-157)들인데 DJD 6 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주석들과 구약성서와 관련된 시리즈들(4Q158-186)은 DJD 5 에서 다루었다.
또한 여러종류의 제 1에녹서가 1976년 J.T. Milik 에 의하여 출판되었다.

그 외에도 10개 내지 11개의 공동체 규칙서와 1896년 카이로 그니자를 통해서만 알려졌던 다마스커스 사본이 8개 정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헬라어로만 알려져 왔던 Testaments of the Twelve Patriarchs의 일부도 발견되었고, Jubilees 의 히브리어 원본의 일부도 알려졌다.

또한, 토빗서 의 사본(4개는 아람어, 1개는 히브리어- 헬라어와 라틴어를 통 해서만 알려진 제 2경전)과 1번 동굴에서 발견된 감사 찬양시 편 조각, 그리고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사본들이 발견되어진 곳이 4번 동굴이다.

"하나님의 아들(4Q246)", "축복 문 모음집(4Q525)", "율법의 실천을 위한 모음집( )"으로 알려진 4QMMT 등, 이 동굴에서 발견된 문서들은 구약성서에 대한 본문비평 연구의 중요한 자료들일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 사상의 배경을 연구 하는데에도 중요한 자료들로 알려졌다.
(DJD=Discoveries in the Judean Desert(Oxford:Clarendon)

제 5번, 6번 동굴들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5번 동굴에서는 정경화 이전의 성서 텍스트들 8개(
신명기 7:15-24, 8:5-9:2 열왕기 상 1:1, 16-17, 27-37 이사야 40:16, 18-19 아모스 1:3-5 시편 119:113-20, 138-42 애가 4:5-8, 11-15, 16, 18-19, 20-22, 5:1-3, 4-12, 13, 16-17 애가 4:17-20 과 개봉하기가 아주 어려운 테필린 한 개)와 17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이 발견되었다.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 중에는 1QS 2:4-7, 12-14와 병행구에 해당하는 "공동체 규칙서 (5Q11)", 그리고 카이로 그니자 다마스커스 사본 9:7-10과 병행구인 "다마스커스 사본(DD)의 사본(5Q12)", "아람어로 기록 된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서술문(5Q15)" 등이 있다.

이와는 대조 적으로 6번 동굴에서는 비교적 덜 중요한 문서들이 발견되었는 데, 7개의 성서 텍스트들이 있다.
이들 가운데 2개는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6Q1
창세기 6:13-21 과 6Q2 레위기 8:12-13 등의 기록이다).
나머지는 열왕기 상 3:12-14, 12:28-31, 22:28-31 열왕기 하 5:26, 6:32, 7:8-10, 7:20-8:5, 9:1-2, 19-21
시편 78:36-37 아가 1:1-6, 6-7 다니엘 8:20-21, 10:8-16, 11:33-36, 38 등의 내용들이다.
그 밖에도 24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도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중요성이 덜한 이야기체 문학들, 예언적, 사법적, 제의적 내용들과 찬양시들 이다.

제 7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놀랍게도 19개의 문서 조각들이 전부 헬라어로 기록된 것들이 발견되어진 동굴이다.
이 중에서 2개가 확인되었는데, 7Q1은
출애굽기 28:4-7 그리고 7Q2는 예레미야의 편지 43-44(=바룩 서 6:43-44)로 밝혀졌고 다른 것들은 너무 조각이 작고 적힌 내용의 분량이 충분치 않아서 해독하기가 어려운 상태이다.

제 8번, 9번, 10번 동굴들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8번 동굴에서는 4개의 성서 텍스트들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테필린에서 또 어떤 것은 메주자에서 나왔다.
또한
창세기 17:12-19, 18:20-25 그리고 시편 17:5-9, 14, 18:6-9, 10-13 등의 문구들과 한 개의 비성서적 찬양 텍스트가 발견되었다.

9번 동굴에서는 6 개의 히브리어 문자가 새겨진 파피루스 조각 한 개만이 발견되었고, 10번 동굴에서는 2개의 히브리어 문자가 새겨진 오스트라카 한 개가 발견되었다.

제 11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11번 동굴은 1번, 4번 동굴들처럼 중요하다.
고대 히브리어 문자로 기록된 레위기(11QpaleoLev)와 시편 두루마리(11QPsa), 욥의 탈굼역(11QtgJob), 거의 완전한 성전 두루마리 (11QTemplea), 그리고 여러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문서들이 발 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