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그라페

그라페

호리홀리 2015. 3. 5. 11:35

 

                                                          그라페

 


 


 

한국 기독교 이단 사이비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계시록 강해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칼빈의 주석서 중, 강해되지 않은 것이 바로 계시록(물론 다니엘도 포함)이다. 정통 신학자들 대개는 계시록이 난해하여 강해하기를 주저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단과 사이비 대부분은 자의적인 계시록 강해로 사람들을 공략하여 세를 불려 왔던 것이다. 이들이 바로 베드로의 경고가 임한 자들이라 보면 틀림없다.

 


 

곧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 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그라페와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3:15-16)는 말씀이 저들에게 임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사실을 주지하고자 한다. 특히 성경에 나타난 이방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분별의 중요함을 주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라페(성경)'는 두 개의 고대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바로 히브리어와 헬라어이다. 플라톤 전공자들이 당연히 플라톤을 공부하기 위해 고대 헬라어를 익히듯이, 그라페를 풀어 가르치려는 교사들도 역시 그라페의 원래 언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 실정은 지식 경시 풍조와 맞물려 원어 용례를 통한 성경연구에는 관심이 많지 않다.

 


 

그리하여 한글 개역성경만으로 신학 운운하는 자들 중에는 대부분 심각한 오류에 빠지고, 더불어 이단들과 사이비가 속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부정할 자는 없을 것이다. 이단과 사이비는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장악하다 보니, 성경 본래의 문자적 의미를 등한히 하고 항상 의미분석만으로 접근하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그 의미는 말할 것도 없이 자의적인 것이다.

 


 

그라페의 자증을 왜곡하지 않고 또 제멋대로 논단하지 않기 위해서는 히브리어, 헬라어 외에도 당시의 역사적 배경 특히 이스라엘과 이방인에 대한 차별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라페 대부분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러한 분별이 없다 보니, 본래 과거 유대인들에게 주신 율법을 가지고 오늘 이방인들이 지켜야 할 법인냥 가르치는 자들이 많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들을 체험신앙으로 현혹하기도 했던 것이다.

 


 

한편 19세기, 20세기에는 역사적 예수 연구와 비신화화, 문서설 등으로 물의를 일으킨 역사 비평주의자들의 고등비평이 그라페의 순수성을 파괴하여 왔다. 물론 이들의 고대사 연구는 일정부분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통한 그들의 사본비평학은 성경을 연구하는 자들에게는 유용한 것들이라도 이들의 성경에 대한 태도는 반기독교적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애굽의 보화는 금송아지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데도 사용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사이비와 이단들에 대해서는 한 두번 권고한 이후에도 듣지 아니하면 내쫓을 것이다. 그리고 비평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배척보다는 제대로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눈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롬2:17-19, 9:4-5(이스라엘)과 엡2:2-5, 11-13(이방인들) 등의 말씀을 살펴보고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자신이 이방인이면서 영적 이스라엘 운운해 가며 이스라엘인척 하는 자들에게 경고가 되기를 바란다.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면 이방 그리스도인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전 세계 기독교 이단들의 공통점은 이러한 차별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계7장과 14장에 나오는 144,000명을 그라페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를 언급하면서 온 이스라엘의 구원얻을 자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데도, 여호와의 증인들과 신천지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안상홍증인회)들이 자신들의 족수들을 각각 12지파로 나누어 마치 자신들이 구원받을 144,000이라도 되는냥 푼수를 떨고 있다. 참으로 무식하고 자의적인 성경해석의 극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사도 요한은 144,000 외에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수 없는 큰 무리"(계7:9)를 따로 구분지어 표현하므로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분별을 꾀하고 있음에도, 이단과 기독교 사이비들은 이러한 성경의 자증을 거부하고 제멋대로 성경을 논단하고 있다. 

 


 

먼저 이스라엘과 관련된 두 본문의 말씀을 들어보자.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났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 영원토록 찬양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롬9:4-5)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롬2:17-19)

 


 

위 두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은, 본래 하나님의 양자가 된 자들이었고, 또한 영광이 있던 자들이고, 언약들이 있었고, 또 롬2:17-19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밝힌 성문화된 율법을 주신 적이 있었다. 그리고 믿음의 조상들 예를 들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등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저들의 조상이었다. 게다가 하나님을 섬기는 예법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저들의 조상들에게 가나안 땅 주실 것과 생육번성케 하실 것 등을 약속 하셨고, 또한 육신으로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저들의 혈통에서 나셨다.

 


 

물론 이방인들도 그리스도 이후에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지만(롬8:14-17), 이방인들보다 앞서 1500년 전에 이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던 자들이다. 곧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출4:22-23)의 기록과 같이, 이스라엘은 이방인이 하나님의 양자가 되기 전에 벌써 1500여년 전에 하나님의 양자로 피택된 자들이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영원한 약속(창17:7)에서 기인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친히 목격하였던 자들이다. 이 역시 많은 곳에 나타나지만 그 중 한 곳을 살펴보면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출40:34-38)와 같이 회막과 성전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친히 목격했던 자들의 후손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는 언약들 곧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율법 준행할 것을 맹세한 언약이 있었고(출24:1-11),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진작부터 있었던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그리고 롬9:4에서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예배'라는 헬라어 '라트레이아'는 예배가 아니라 '섬김'이다. 왜냐하면 헬라어 '라트레이아'는 '프로스퀴네오'와 구별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중에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프로스퀴네오'라는 단어가 따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로마서 12:1의 '영적 예배'라는 말에서, '영적'이라는 말은 '프뉴마티콘'이 아니라, '로기켄'이라는 헬라어로, 이는 '합리적인', '합당한' 그리고 '정당한' 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예배'라는 말도 프로스퀴네오가 아니라 '라트레이아(라트류오의 명사형)'로 롬9:4의 라트레이아와 같다.

 


 

그리고 그 의미를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 '프로스퀴네오'와 '라트레이아'가 한꺼번에 사용된 경우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사단이 자신에게 프로스퀴네오하면 천하의 모든 영광을 주겠다고 시험하자, 주님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고 하신데서 '경배하다(프로스퀴네오)'와 '섬기다(라트류오)'의 헬라어가 바로 '프로스퀴네오'와 '라트류오'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히브리어 성경 신10:20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야라)하여 그를 섬기며(아바드)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는 말씀에서 인용된 것으로, 수24:14에서도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야라)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아바드) 것이니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야라'와 '아바드'라는 단어가 구분되어 나타난다. 하나님의 친 아들조차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며 사는 것을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의 양자가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프로스퀴네오하고 몸의 거룩한 산 제사로 라트레이아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프로스퀴네오와 라트레이아인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영원한 약속으로 인해 오늘 우리보다 앞서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속될 수 있었고, 또 하나님의 양자 됨으로 인해 멸망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위한 방법으로 미쉐파트와 체다카의 거룩한 율법을 받아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길 수 있게 된 자들이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체다카와 미쉐파트로 살았더라면 저들은 "세계가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는 말씀과 같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질 못했다. 이들의 실패로 인해 이방인의 때가 열리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마21:42).

 


 


 

다음으로 이방인의 본래 모습에 대한 바울의 기록을 살펴보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2:1-5)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이방인)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이스라엘)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2:11-19)

 


 

바울의 가르친 대로 당시 에베소에 사는 자들 뿐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까지도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할례당이라 칭하는 유대인들에게는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다. 게다가 우리는 세상 풍속을 좇고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인 사단을 따랐던 자들이었다. 그리하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다. 이 때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들이어서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었고,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다. 이것이 바울이 가르친 오늘 우리나 당시 에베소에 살던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본래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또한 언약과 약속과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두신 성전을 가지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눈에는 이방인들이 어떻게 보였을 것인가는 안 봐도 뻔한 일이다. 다시 말해 세상 온갖 풍속을 좇아 우상을 섬기며 공중의 권세 잡은 사단을 좇는 자들을,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눈에는 결코 곱게 보였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7:49)와 같이 했던 것이며, 또 율법없는 이방인들을 죄인(갈2:15)으로 취급하고 상종하기를 꺼려하므로 이스라엘과 이방인은 원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犬猿之間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바울은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일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일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일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5-16)고 가르친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1500년 동안을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지었던 '계명의 율법'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난 이상 이제는 하나님의 의가 율법의 일이 아닌 그를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지게 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방인과 이스라엘이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폐하시고, 이 둘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고 가르쳤다.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시고, 이제 그를 믿는 자들은 누구나 그리스도안에서 의롭다함을 얻게 하시고, 뿐만 아니라 원수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서로 한 새 사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과 이방인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성경 전체는 물론 부분이해에 있어서도 혼란스러울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래서 율법을 국가법, 의식법, 도덕법으로 구분하여 국가법, 의식법은 폐하여졌지만, 지금도 도덕법은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의적으로 논단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라페가 문자적-역사적으로 이해 되지 않으면 그라페의 자증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풀다가는 이단에 빠지거나 사이비가 되거나 진리의 지식에서 넘어지는 불상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진리의 지식을 배워 가기를 힘써야 한다. 그 일이 고달프고 힘들겠지만 성도들의 인내는 후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할 것이다.   

 


 

끝으로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분별의 중요성과 관련해서 바울서신과 공동서신의 차이를 말하고 마치려 한다. 바울서신 전체는 이방사도답게 한결같이 이방 교회에 보내는 서신들이다. 비록 그 내용상에는 유대인 관련내용들 예를 들면 율법문제가 지속적으로 언급되기는 하지만, 이는 오늘날과 같이 당시에도 율법에 열심있는 자들이 있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 때문에 발생된 문제일 뿐이다. 오히려 바울 서신은 이방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되심과 그의 복음에 대한 교훈이 주를 이루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바울 서신 전체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주도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공동서신 즉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일이삼서, 유다서는 이방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이 아니라, 한결같이 흩어진 이스라엘인으로 그리스도인된 자들에게 보내는 서신이다. 그리하여 히브리서 서신 초두에 "옛적에 대언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로 시작하게 된 것이며, 더우기 야고보 서신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고 시작하게 된 것이다. 베드로서도 마찬가지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서신과 유다서신도 마찬가지로 하늘 나라의 복음 이전에, 선지식을 가진 자들에게 쓰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이러한 사실을 주지하지 못하고 읽어왔을 것이나, 이제부터라도 바울서신과 공동서신을 읽을 때 이러한 차이를 감안하고 읽는다면 더욱 깊은 감동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읽고서는 그라페를 제멋대로 해석하여 자의적으로 논단하는 자들은 "내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되지 말라"(약3:1)는 야고보 기자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중죄를 범하게 되어 더 큰 심판을 남겨두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