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신약성경의 기독론

기독론

호리홀리 2015. 2. 24. 22:44

 기독론


마태복음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가 누구이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그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호칭을 통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탄생 시에 주어진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라는 히브리 이름의 헬라식 명칭으로 “주가 구원하신다.”(the Lord saves)라는 뜻이며 “그리스도”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 이름 “메시아”(Messiah)의 헬라식 표현이다. 즉 그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그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분이시다. 그 외 예수님의 호칭으로 다윗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아들, 인자, 주 등이 있는 가운데 “인자”(Son of Man)는 “하나님의 아들”에 필적할만한 호칭으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이 호칭을 자주 사용하셨다.
예수님에 대한 호칭 가운데 “주”(Lord)는 그의 신성에 관한 면을 명확히 보여준다. 복음서의 영어 번역은 이러한 의미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마태가 “주”라는 호칭을 신적인 특권과 관련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님을 각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심판자로 제시하고 있는 본문들에서 잘 드러난다(마 7:22-23; 25:31-46). “주”는 예수님의 신적 특권에 대한 경험과 관련된 호칭으로서 그의 신성을 제시한다. 그밖에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아무도 예수님을 “선생”으로 부르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히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선생이었으며 “종”(servant)이라는 호칭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결코 “종”으로 불리신 적이 없지만 이사야 42:1-4(“내가 택한 나의 종”)은 그의 치유 사역과 관련하여 예수님에게 적용된다
누가복음에서 “구주”라는 호칭은 약속된 구원, 승귀하심, 죄사함 및 성령을 부어주심에 대한 하나님의 전체적 계획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으며 “주”라는 호칭은 통치자로서 예수님의 궁극적 권세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누가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호칭이며 “이 땅에서부터”의 기독론을 형성하는 기본적 요소이다.
사도행전에서 많은 일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일어난다. 세례, 구원, 치유, 화평, 성령 세례, 생명을 아끼지 아니함. 몇 가지 일들은 “그리스도”에 관해 예언된다. 부활, 고난, 인류를 위해 예정하심. 그리스도는 사도들의 설교 주제이다. 그의 신분과 사역으로 인해 그는 믿음의 대상이 되신다(행 24:24).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대부분 가르침과 기적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소망에 관한 말씀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의 윤리적 삶에 대한 촉구이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가르침과 함께 그의 십자가에서의 사역이 있다. 사람들은 종종 이것을 예수님의 유일한 사역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누가는 비록 바울과 달리 이 사역에 관해 자세하게 제시하지는 않았으나 이 사역 역시 그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누가는 예수님이 “누구보다 의로운 자로서 고난당하신 자”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누가복음 23장에 인용된 시편 내용에 의해 암시된다. 본문에는 구약성경의 고난 받는 성자에 대한 애가가 예수님께 적용되었다. 그는 이러한 고난의 전형에 부합되며 그것을 성취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누가-행전에서 특별히 강조되었다. 더구나 사도행전의 많은 설교들은 승천의 중요성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 누가는 예수님의 승천을 언급하면서 부활의 의미에 대해 제시하였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으며, 따라서 성령을 부어주시며 권능으로 다스리시게 되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이 그의 이름으로 사역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예수님은 다시 돌아오실 때까지 하늘에 계신다. 그러나 그가 다시 오시면 땅을 다스리고 인류를 심판하실 것이다.
예수님의 미래적 역할은 주로 장차 그의 백성들을 모으시기 위해 다시 돌아오실 때 심판자로서의 사역과 관련하여 제시된다.

요한복음의 시작부터 예수님은 여러 차례의 표적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1:34)과 메시아(41)로 제시되며 성육신 하신 말씀으로서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적인 생명과 빛을 주신다.
제자들에 대한 고별 강화(13:31-17:26)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많은 것을 계시한다. 아들로서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이것은 다가오는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성육신 이전의 영광을 다시 회복하심과 관련된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며,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분이심이 다시 한번 드러난다. 본 강화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함과 그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거듭 밝히신다. 예수님은 성부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요한서신에서 예수님의 신분에 관한 이슈는 “생명의 말씀”과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에 대한 강조와 함께 전면에 부상한다. 요한일서에는 아들에 관한 언급이 22번 나온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정확한 이해는 신자들에게 필수적이다.

요한계시록에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를 회복하신 승귀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은 이 땅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다시 오실 예수님과 그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날 사단의 권세에 대한 그의 승리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요한복음 10:30과 17:22에 언급된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이 하나라는 언급은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며 요한계시록 1:4, 8; 4:8; 11:17; 16:5에 언급된 ὁ ᾢν(“him who is")이라는 표현 역시 출애굽기 3:14을 암시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며,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도 요한복음은 진실하고 실제적으로 묘사하며 요한서신 역시 이것을 확인하며, 보다 확대한다. 요한일서의 첫 절은 그들이 생명의 말씀에 대해 듣고 보고 만지기까지 하였다고 분명히 언급한다(요일 1:1-4).
사복음서 가운데 요한복음만이 메시아(Messias)라는 히브리어 및 아람어 형태의 단어를 번역하여 제시하며, 동시에 그리스도(Χριστόꐠ)라는 헬라어 단어도 사용한다.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본서에 17번 나오며,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합어로는 두 번 나온다.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은 요한복음에서 거듭 반복된다.
요한서신에서도 메시아라는 용어는 예수님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합적 표현은 요한일서 1:3; 2:1; 3:23; 4:2; 5:6, 20 및 요한이서 7절 등에서 발견된다.
요한계시록에는 메시아라는 용어에 대한 언급이 세 번밖에 나타나지 않는다(계 1:1-2, 5). 이들은 모두 예수라는 이름과 연결되어 있으며 요한서신에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합적 형태와 유사한 호칭으로 사용된다.

요한이 기록한 성경 가운데 예수님을 메시아로 묘사한 내용과 가장 유사한 호칭이 “이스라엘의 왕”(King of Israel)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1:49 및 12:13에 언급된다. 1:49에서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외쳤다.
요한복음에서 로고스라는 헬라어는 일반적인 의미로 여러 번 제시된다.
로고스는 그리스의 철학 용어로서 “세상의 영혼”(world-soul), 즉 우주의 영혼에 대한 언급이다. 이것은 우주의 보편적, 합리적 원리이며 창조적 동력이다. 한편으로 모든 만물은 그것으로부터 온다. 또 한편으로 사람들은 그것으로부터 지혜를 얻는다. 이러한 개념은 적어도 주전 6세기의 헬라 철학자 헤라클리투스(Heraclitus)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로고스가 “항상 존재하며 모든 만물은 이 로고스로 말미암았다”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요한은 이미 헬라 세계에서 널리 인식된 용어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로고스라는 호칭은 요한일서 1:1에도 유사한 의미로 제시된다. 특히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로고스)으로 불린다. 이것은 요한복음 서문(요 1:4, 9)에서처럼 영생의 수여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한다.
요한계시록에는 로고스라는 단어가 한번 언급되며 요한복음의 서문에서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요한계시록 19:13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로고스(말씀)로 불린다.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께 적용된 호칭 가운데 하나는 “어린양”이다. 이 호칭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통해 세례를 받은 사건 및 공생애의 시작과 연결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하여 중요한의미를 가진다.

요한복음에서 어린양의 이미지는 구약성경 본문 두 곳과 연결된다. 하나는 이사야 53:7에 언급된 “고난의 종”(Suffering Servant)이며 또 하나의 구약성경적 암시는 유월절 어린 양이다. 요한복음에는 특히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유월절의 상징이 분명히 제시된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이 “양”(the Lamb)으로 불리신 것은 모두 27번이다. 본문에 사용된 단어는 모두 ἀρνίον(arnion)이라는 헬라어이다. 1세기 당시의 다른 유대 묵시 문학에는 세상의 악을 멸하실 승리의 양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과 관련하여 이미 언급한 바 있는 구약 성경적 배경이다. 이사야 53:7에 나타난 고난의 종과 출애굽기 12:46 및 다른 여러 본문에 나타난 유월절 양이라는 두 가지 이미지는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양의 이미지에 대해서도 동일한 배경을 형성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영광은 그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및 승귀하심 전체와 관련된다. 요한이 제시하는 예수님의 영광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기에는 예수께서 성육신을 통한 낮아지심, 고난 및 죽으심에 이어 성육신하시기 이전에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영광으로 돌아감이 포함된다.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한 것은 대부분 구원(구원론)과 교회의 본질(교회론) 및 미래적 사건(종말론)에 관한 것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theos)을 성부 하나님에 국한하였으나 로마서 9:5의 영광송에 언급된 이름은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예수님이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주”라는 호칭과 유사한 의미를 갖는다.
구약성경에서 주(kyrios)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 호칭이다. 신약성경에서 이 호칭은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서 예수님에게 적용된다.

바울은 단 한번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the last Adam)이라고 언급하였다(고전 15:45). 그러나 그는 사실 그리스도와 아담을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서 여러 번 대조하였다. 그가 고린도전서에서 “마지막 아담”이라고 할 때 “마지막”이라는 형용사는 두 사람의 차이점을 강조한다. 바울은 아담에 대해 불순종으로 모든 인류에게 죄와 죽음을 가져온 자로 보았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순종은 그와 관련된 모든 자에게 부활과 영생의 약속을 가져왔다.
바울의 옥중서신(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는 중보자요 능력주시는 자이며 생명의 원천이 되신다.
바울의 목회서신에서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름은 25번 등장하며 이들 서신은 메시아로서 그의 역할을 강조한 승귀적 기독론을 제시한다. 그는 주(kyrios)이시다. 이 호칭은 승귀의 개념을 나타낸다. 바울은 이 용어를 특별히 사용하였다. “주”는 신자들의 기도의 대상이시며 교회는 그로부터 명령을 받는다. 다가오는 재림과 심판 역시 이 호칭과 연결된다.

바울의 목회서신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나타남(ἐπιΦανείαꐠ)”이란 용어는 그리스도
의 성육신과 재림 그리고 개인적 구원의 시기에 사용되었다. 또한 이외에도 바울의 목회서신에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언급하는데 있어서 의로운 고난의 모델, 하나님과 사람의 중보자,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 등의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언급하면서 선재하신 영원한 아들로 제시하고 있으며, 성육신하신 지상의 아들로도 제시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 승귀하신 아들로도 제시하고 있다.
히브리서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이며 신학적 핵심은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 주제의 배경은 구약성경 시편 110:1, 4로서 1절은 5번, 4절은 10번이나 인용하였으며 그리스도는 값비싼 순종의 길을 걸으셔서 인간의 연약을 충분히 체휼하심으로 대제사장으로서의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한다. 또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다. 예수님의 제사장 사역은 히브리서 서두에 언급한 대로(1:3)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변화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하나님의 뜻을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 새로운 제사장 반열의 영원한 제사장으로 칭하심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멜기세덱과 같은 대제사장으로서 신자들을 위해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로 들어가셨다. 옛 제사장과는 대조적으로 이 새로운 반차는 영원성을 가지며, 예수님은 무궁한 생명의 능력에 근거한 제사장이 되셨다. 그는 무궁한 제사장으로서 영원히 계시기 때문에 백성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며 그는 항상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간구하신다(히 6:25).
베드로와 유다의 서신에서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베드로의 기독론의 핵심을 이룬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삶에서 나타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바라보았다. 하늘의 하나님은 이러한 지상의 사건들을 통해 역사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성취되었으며, 마찬가지로 신자들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받으며 미쁘신 조물주께 자신을 맡길 수 있다.

성육신 교리는 베드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제시에 함축되어있다.
다. 신약성경신학에서 기독론(그리스도)은 신약성경신학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사복음서는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사도들의
서신들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는 믿음의 백성들에게 장차 도래(渡來)할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약속하고 있다.
*** 요한복음 서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한 “로고스”(λόγοꐠ)는 태초에 계셨던 말씀으로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로고스=말씀’이라고 하지만 이는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로고스는 그리스 철학 용어로서 로고스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고대 그리스인의 우주관과 철학을 이해해야 될지도 모른다. 로고스의 헬라적 배경을 통해 조금이나마 사도 요한의 기록 의도를 짐작할 수가 있다고 본다. 로고스는 우주적 존재(우주의 영혼)이며 힘이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유월절의 상징이 분명히 제시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선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 어린 양”은 레위기서에 나타난 속죄 제물로서의 어린 양의 이미지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이었다. 그 당시 관습에 따라 요한도 제사장이 될 수도 있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요단강에 와서 요한에게 자기 죄를 자백하고 세례(침례)를 받았다. 예수님도 요한에게 오셔서 세례를 받으셨다. 그 때(세례 집례 때) 요한은 앞서 많은 사람들이 자백한 죄를 예수께(어린양 되신) 전가(轉嫁)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광야에서 돌아와 요한에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 어린 양”으로 불리었다.(아사셀 양) 세례 요한은 산 제물인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쳐지기 전에 그 머리에 안수하여 백성들의 죄를 전가시킨 제사장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